2024년 3월 19일 화요일

소현세자 8편

■ 소현세자 8편

■ 소현세자 8편

조선 왕들 중 형제를 죽인 태종이나 아들을 죽인 영조 같은 임금은 있었으나, 아들·며느리·손자까지 죽음에 이르게 한 왕은 인조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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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봉림대군)이 즉위하면서 강빈(姜嬪) 옥사(獄死)에 대한 의혹과 억울한 죽음에 대한 신원(伸冤) 여론이 대두되자, 효종은 강빈의 옥사를 재론(再論)하는 자는 역모죄로 다스리겠다는 특별 하교를 내렸다. 이런 상황에서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젖힌 인물은 황해도 관찰사로 있던 김홍욱(1602~1654)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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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욱은 추사 김정희(金正喜:1786~1856)의 7대조로 조선 후기 경주 김씨 가문이 절의(節義)의 집안으로 자리를 잡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김홍욱은 강빈의 신원과 소현세자 셋째 아들의 석방을 요청하는 직언(直言)을 올려 조정에 파문을 일으켰다. 격분한 효종은 곤장을 때려 김홍욱을 죽임으로서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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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후로도 강빈의 옥사를 둘러싼 여러 의혹이 제기되었고, 1718년(숙종44년)에 이르러서야 강빈은 마침내 신원되어 민회빈 강씨(愍懷嬪 姜氏)로 복위(復位)되었다. 복위된 이름의 뜻을 풀어 보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품게 하는 빈(嬪)이라는 의미로, 그녀의 죽음이 억울하고 가여워서 백성들이 슬픈 마음을 품게 되었다는 뜻이다. 민회빈 강씨의 묘소는 현재 광명시에 소재하고 있는데, 처음에는 민회빈묘로 불렸으나 1903년(고종40년) 영회원(永懷園)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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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 내외는 이렇게 철저하게 소외되고 음모 속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과연 그들이 청국에서 보낸 행동을 매국행위로 볼 수 있을까? 물론 당시 반청감정이 최고조에 다다른 분위기에서 소현세자의 행보는 다소 섣부른 감도 있었고, 충분히 오해의 소지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세자의 신분으로 그것이 죽을 정도의 죄는 아니다. 그냥 세자책봉을 폐하는 정도로 충분히 죄를 물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은 청국에게 결정권을 빼앗긴 상태였기 때문에 인조는 마음대로 세자를 폐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설령 세자를 폐한다고 하여도 소현세자에게 우호적이었던 청국은 그것을 인정할리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결국 인조는 소현세자에게 왕위가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비밀리에 죽일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소현세자 내외의 안타까운 죽음, 그리고 숨겨진 음모......그 음모의 정점에는 국왕이었던 인조가 있었기에, 역사는 그의 죽음을 의문사 정도로 밖에는 기록 할 수 없었다.

심양에서 청의 신문물을 보고 돌아와 북학(北學)의 기운을 조선에 심으려 했던 소현세자와 강빈의 죽음, 그리고 봉림대군의 즉위 이것은 조선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만일 선진 문물에 눈을 뜬 소현세자가 왕위에 오르고 실리에 밝은 강빈(姜嬪)이 왕후가 되었더라면 이후 우리나라의 역사는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의 근대화를 이백년은 더 앞당길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인 조의 뒤를 이어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즉위하면서 청을 물리쳐야 한다는 북벌(北伐)이 국시(國是)로 자리 잡게 되었다. 소현세자가 심양의 인질 생활 속에서 습득하고 추구했던 새로운 과학기술과 문명의 수용, 즉 북학(北學)의 꿈은 그의 죽음과 함께 묻혀 버리고 말았다. 시대를 지나치게 앞서갔던 비운(悲運)의 세자였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