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돈의 몰락
■신돈의 몰락
고려사에는 신돈이 공민왕의 신임이 옅어지자 궁지에 몰려 반역을 꾀했다고 기록 되어 있다. 공민왕이 능으로 행차하는 길가에 미리 군사를 숨겨 두어 암살하려던 계획을 세웠지만 실패했고, 또 다시 모의를 했지만 고발자에 의해 탄로가 나서 수원에 유배되었다가 이틀 만에 죽음을 맞았다고 전해진다.
신돈을 죽일 때 공민왕은 이렇게 질책했다 한다. 《고려사》
"네가 늘 부녀자를 가까이함은 기운을 기르려는 것이지 감히 사통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이를 낳았다고 한다. 이것이 맹세한 글에 있는 것이냐? 또 성 안에 좋은 집을 일곱 채나 갖고 있는데, 이 역시 맹세한 글에 있는 것이냐?"
신돈의 어린 아들도 죽었고 그의 충실한 부하들도 제거되었다. 신돈은 잡힌 지 나흘 만에, 유배된 지 이틀 만에 죽었다. 공민왕은 해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던 것이다. 공민왕은 그토록 신임하던 신돈을 왜 죽였을까? 단지 기득권 세력의 이간질 때문이었을까? 신돈의 축첩과 치부 그리고 역적질 때문이었을까? 그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첫째로, 신돈의 개혁으로 권력과 경제기반을 상실한 권문세가와 군사권을 쥔 무장 세력의 반발을 들 수 있고, 둘째로는 신진 유학자들의 공민왕 친정(親政) 요구와 국제 정세의 변화(원·명 교체)를 들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공민왕은 새 인물을 구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로써 신돈의 개혁은 중단되었고, 공민왕은 다시 보수 세력과 손을 잡았다. 신돈에 의해 쫓겨났던 최영 · 이성계 · 경복흥 등 무장들과 이색 · 백문보 등 유학자들이 불려와 다시 등용되어 고려 말 역사의 주역이 되었다. 하지만 신돈이 추진한 토지정책과 노비정책은 뒷날 조준, 정도전에 의해 전면적인 토지개혁이 단행될 때 하나의 모델이 되었다. 신돈이 추진한 과거제(科擧制)는 조선에 들어와서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신돈은 불교의 자비사상과 중생구제의 가르침, 유학의 정치운용 원리와 실천도덕을 접목시켜 현실정치에서 실행한 개혁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조선 건국의 주체세력은 신돈의 개혁을 폄하시키고 고려 말 혼란상을 부각시켜야 했다. 그리하여 고려말 혁신적 개혁가이고, 그 개혁을 현실적으로 실천한 신돈은 단지 요승(妖僧)으로 우리에게 기억되고 만 것은 아닐까.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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