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명南冥 조식과 퇴계退溪 이황 1편
■ 남명(南冥) 조식과 퇴계(退溪) 이황 1편
1555년(명종10년) 조정에 한 장의 상소문이 올라왔다. 이 상소문의 주인공은 남명(南冥) 조식(1501~1572년)으로, 퇴계 이황과 함께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으로 불리는 인물이다. 평생 관직을 사양하고 스스로 처사(處士)로 불리기를 원했던 선비학자 조식은 1555년 조정에서 제안한 단성현감을 마다했다. 이 과정에서 올린 당시 정치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한 상소문은 명종 시대 정국을 크게 흔들어 놓았다. 어떤 내용이었기에 이처럼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을까.
조식이 올린 상소문의 핵심은 명종(1534~1567년, 재위 1545~1567년)이 정치를 잘 못하고 있어 민심이 떠나고 있다는 것이었다.
『전하의 나랏일이 이미 잘못돼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했고 하늘의 뜻이 가버렸으며 인심도 이미 떠났습니다. 비유하자면 큰 나무가 백 년 동안 벌레가 속을 먹어 진액이 이미 말라버려 회오리바람과 사나운 비가 어느 때에 닥쳐올지 까마득하게 알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 지경에 이른 지가 오래됐습니다.』
조식은 정치가 잘못된 원인을 무엇보다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에서 찾고 있었다. “자전(慈殿·왕의 어머니, 문정왕후)께서는 생각이 깊으시기는 하나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다만 선왕의 외로운 후계자(孤嗣)이실 뿐이니, 천 가지 백 가지의 천재(天災)와 억만 갈래의 인심을 무엇으로 감당하며 무엇으로 수습하시겠습니까.”
문정왕후는 인종 승하 후 자신의 소생인 11세의 명종이 왕위에 오르자 수렴청정을 하면서 윤원형 등 친정집 세력을 대거 끌어들였다. 이에 따라 왕을 정점으로 하는 정상적인 정치가 아니라 소수의 외척 세력에게 권력이 집중됐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백성들이 떠안게 되는 형국이 됐다. 조식은 잘못된 정치 현실에서 비판의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것을 선비의 책무로 여겼다. 왕에게 불경한 표현이 될지언정 이 상소문을 올린 것은 이런 생각에서였다.
이 상소문으로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특히 문정왕후를 과부로, 명종을 고아로 표현한 대목에 대해 명종이 ‘군상불경죄(君上不敬罪)’로 역정을 낼 만큼 큰 파문을 일으켰다. 문정왕후에 대한 불만이 벽서 형태로 나타난 경우는 있었지만, 조식처럼 직언하는 상소문으로 비판하는 경우는 없었다. 조식에 대한 처벌이 제기되고, 목숨까지 위태로운 상황이 발생했다. 하지만 상당수의 대신이나 사관들이 “조식이 초야에 묻힌 선비여서 표현이 적절하지 못한 것이지, 그 우국충정은 높이 살만하다”는 논리로 조식을 변호함으로써 파문은 가라앉았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