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군과 싸운 왜군 2편
■ 왜군과 싸운 왜군 2편
"사야가의 우리말 이름은 김충선(金忠善)이다. 전쟁이 끝난 후 사야가는 진주목사의 딸과 결혼해 우록동에 내려와 김충선(金忠善)이라는 이름으로 평생을 살았다. 사야가의 유품이 전시된 충절관에는 사야가 집안의 족보도 있다.
",1592년 4월, 조선 침략을 위해 출병한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는 부산에 상륙했다. 사야가는 바로 가토 기요마사 휘하의 선봉장이었다. 사야가는 부산 상륙 후 경상도 좌병사 박진에게 강화서를 보내 투항의지를 밝힌다.
『임진년 사월 일본국 우선봉장 사야가는 삼가 목욕재계하고 머리 숙여 조선국 절도사 합하께 글을 올립니다. 이번에 일본이 이유 없이 군사를 일으키며 저를 선봉장으로 삼으매, 저의 소원인 조선에 한번 나가보고 싶은 생각으로 본의 아닌 선봉이 되어서 군사를 이끌고 본국 조선에 이른 것입니다. 다만 저의 소원은 이 나라의 예의문물과 의관풍속을 아름답게 여겨 예의의 나라에서 성인의 백성이 되고자 할 따름입니다.』
조선군에 투항한 사야가는 곧 바로 경상도 의병들과 힘을 합쳐 동래, 양산, 기장 등지에서 왜군과 전투를 벌였고, 한 달 동안 여덟 차례나 승전보를 올리는 개가(凱歌)를 이루었다. 한때 곽재우장군의 군대와도 연합, 경상도 연안의 일본군을 격퇴하기도 했다. 가토 기요마사의 제1부대를 전멸하는 공적을 세운 사야가는 선조에게 무관 정3품인 가선대부, 지금의 차관급 지위를 하사받기에 이른다. 사야가는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도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 데 참여, 혁혁한 공을 세웠다.
우록마을 입구에서 100m 쯤 떨어진 곳에 녹동 서원이 있다. 서원 뒤에는 김충선(金忠善)의 위패를 모신 사당 녹동사가 있다. 서원과 사당은 김충선의 사후 유림이 조정에 상소를 올려 지은 것이다. ‘중국의 문명을 그리워한다’는 뜻의 모하당(慕夏堂)이라는 호를 지을 정도로 김충선(金忠善)은 유교 문물과 예의를 따른 철저한 조선인이었다.
마을 뒷산 그의 무덤은 일본을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김충선(金忠善)은 1642년 72세의 나이로 두 번째 고향인 조선 땅 우록동에서 눈을 감았다. 그의 사후 조정은 대신급에 해당하는 정2품 정헌대부의 벼슬을 내렸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