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난정鄭蘭貞 3편
■ 정난정(鄭蘭貞) 3편
을사사화를 계기로 조정을 완전히 장악한 윤원형은 사림 세력을 완전히 축출한 데 이어, 정적으로 돌아선 친형 윤원로를 남원으로 귀양 보낸 뒤 목숨을 빼앗았다. 하지만 이는 윤원형의 치명적인 실수였다. 권력에는 부모형제도 없다고 세간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그 무렵 문정왕후는 정난정을 통해 보우대사를 소개받고, 그를 통해 고려시대의 선종과 교종을 부활시켰으며, 전국에 3백여 개의 사찰을 공인하고 도첩제를 부활시켰다. 이에 정난정은 불사 중창에 거금을 기부하고 다양한 불교 행사를 마련하여 그녀의 노력을 뒷받침했다. 정난정의 깊은 불심에 감동한 문정왕후는 1549년(명종4년) 윤원형의 공이 크다는 이유로 그의 첩인 정난정의 소생인 자녀가 불이익을 당하지 않고 다른 집 적자와 통혼하고 벼슬길에 오를 수 있도록 하는 은전을 베풀었다.
기세가 오른 윤원형은 1551년(명종6년) 2월 명종에게 조강지처 김씨의 악행을 고발하며 집안에서 내치게 해달라고 청원했다. 명종이 이 청원을 받아들이자 윤원형은 즉시 조강지처 김씨를 쫓아내고 정난정을 정실(正室)로 삼았다. 일찍이 그녀를 소실(小室)로 들일 때의 서약을 지킨 것이었다. 그 후 김씨는 가난과 모멸 속에서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정난정이 보낸 음식을 먹고 죽었다고 한다. 그녀에게 요녀이자 독녀라는 그녀의 별명이 붙은 이유였다.
문정왕후는 수렴청정을 거두기 넉 달 전인 1553년(명종8년) 3월 명종에게 ‘윤원형의 첩에게 직첩을 주도록 하라’는 명을 내리게 했다. 그리하여 정난정은 합법적으로 윤원형의 부인이 되었다. 당시 윤원형은 종1품 의정부 좌찬성이었으므로 그녀는 단숨에 외명부 종1품 정경부인(貞敬夫人)이 되었고, 자식들은 천역에서 벗어나 어엿한 양반이 되었다. 하지만 정난정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해 10월 윤원형으로 하여금 서얼허통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게 함으로써 자신과 같은 처지의 백성들을 구원하려고도 했다.
“인재의 우열은 타고난 기질의 순수함과 그렇지 않음에 좌우되는 것이지 출생의 귀천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만일 재질이 뛰어난 사람이 첩의 몸에서 났는데, 서얼이라 하여 등용하지 않는다면 어찌 왕자가 인재를 취함에 귀천을 가리지 않는 도라고 하겠습니까.”
윤원형이 영의정 심연원, 좌의정 상진, 우의정 윤개 등과 함께 올린 이 상소는 서얼들도 과거를 볼 수 있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조 판서 안현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얼호통법이 통과되자 숨죽이고 있던 서얼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 4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