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 도읍지를 정하라 4편
■ 새 도읍지를 정하라 4편
태조는 그동안 도읍을 옮기기 위해서 서운관, 풍수지리학자, 무학대사, 여러 신하들로부터 문서로 보고를 받거나 얼굴을 맞댄 논의를 거쳤고 찬·반 의견도 낱낱이 들었다. 태조는 지리서도 공부하고 계룡산, 무악, 남경을 현장 답사했다. 태조는 조선의 지혜를 망라했고,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 이제 태조의 결정만 남았다.
태조는 남경(한양)을 택했다. 이로써 조선의 도읍으로 한양이 탄생한 것이다. 태조 3년 8월 13일이었다. 여기서 도읍을 정하는 좁은 의미로는 궁궐터를 정하는 것도 포함된다. 현재의 경복궁은 태조가 정한 남경(청와대 터)이 아니라 약간 남쪽으로 내려 와 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태조는 한양을 그냥 밀어붙이지는 않았다. 한양을 도읍으로 사실상 결정했지만 소수의견을 낸 광실원 동쪽, 개성, 도라산 등도 살피고, 무악도 다시 갔다. 현장을 확인하고 중론을 모아 마침내 조선의 도읍 한양에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태조가 천도를 결심한 이후 3년의 시간이 흐른 뒤의 결정이었다.
태조는 신도궁궐조성도감을 설치했다. ‘ㅇㅇㅇ도감’은 어떤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서 설치하는 임시기구이다. 조선은 도읍을 건설하기 위한 본격적인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종묘, 사직, 궁궐, 시장, 도로의 터를 구체적으로 정하기 위해서 준비단을 파견했다. 이들 준비단은 태조가 정한 남경의 궁궐터가 너무 좁다고 판단하여 그 남쪽의 평탄하고 넓은 곳을 궁궐터로 정했다. 현재의 경복궁이다. 경복궁이 태조가 정한 최초의 자리보다 약간 남쪽으로 내려온 이유다. 북쪽의 산을 주맥으로 하고 여러 산맥이 굽어 들어와서 지세가 좋은 것도 이유 중 하나이다.
태조는 2개월 후인 10월 25일 한양으로 도읍을 정하고 3일 후 10월 28일 서울에 도착해서 한양부 객사를 이궁(離宮)으로 삼아 임시로 거처한다. 아직 궁궐 건설에 착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울 시민의 날이 10월28일로 정해진 것은 이 때문이다.
태조는 도평의사사, 서운관과 함께 사전 준비단이 도면으로 그려서 올린 종묘와 사직의 터도 둘러보았다. 도평의사사는 종묘, 궁궐, 성곽의 공사를 서둘러야 한다고 태조에게 건의했다. 태조 3년 12월 4일 오방(五方)의 지신(地神)에게 제사를 올리고 종묘와 궁궐 공사를 동시에 시작했다. 궁궐의 터파기를 시작한 것은 스님들이었다. 관청에서 스님들을 모집해서 옷과 먹을 것을 주었다. 공사 초기에 백성들은 동원하지 않았지만, 궁궐 건설에 스님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태조 4년 8월 궁궐 건설을 위해서 농사철이 끝난 백성들을 대대적으로 동원했다. 총 15,000명이 부역(赴役)으로 동원된다. 약 50일 후 종묘와 경복궁이 완공되었다. 궁궐 공사를 시작한 지 10개월 후의 일이다. 즉위 4년 만에 법궁(法宮:으뜸궁)인 경복궁이 탄생한 것이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