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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10일 수요일

세종의 싱크탱크Think Tank, 집현전 3편

■세종의 싱크탱크Think Tank, 집현전 3편

■세종의 싱크탱크(Think Tank), 집현전 3편

집현전은 세종의 각별한 배려 속에서 수백 종의 연구 보고서와 50여종의 책을 편찬하였다. ‘향약집성방’, ‘삼강행실도’, ‘자치통감’, ‘국조오례의’, ‘역대병요’와 같이 의학, 역사, 의례, 국방 등 전 분야에 걸쳐 많은 책들이 편찬되어 세종시대 문화의 꽃을 활짝 피우게 하였다. 집현전의 설치는 무엇보다 세종이 혼자만의 힘으로 국가정책을 결정하지 않고 다수 인재들에게 학문 연구를 지원하고 그 성과를 국가정책으로 활용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리고 집현전에서 배출된 쟁쟁한 인적자원은 15세기 찬란한 민족문화를 완성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집현전이라는 국가의 인재를 최대한 활용하면서 ‘함께하는 정치’의 모범을 보였다는 점에서 세종은 가장 위대한 국왕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세종이 집현전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과도 함께 정치 현안을 의논하고자 했던 점은 토지 세법에 관한 의견을 직접 물어 본 것에서 그 면모를 엿볼 수 있다. 1430년(세종 12년) 세종은 ‘공법’이라는 새로운 세법(稅法) 시안을 갖고 백성들에게 그 찬반 의사를 묻는, 요즈음으로 치면 ‘국민투표’를 실시하였다. 토지 1결당 일정하게 10두(斗)의 세금을 정하는 것이 핵심적인 내용이다. 이전까지 관리가 직접 논밭을 돌아보면서 수확량을 확인하고 그에 따라 세금을 정하는 방식이 부정이 저질러지면서 문제점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1430년 3월 5일부터 8월 10일까지 무려 5개월간에 걸쳐 찬반 투표가 실시되었다. 17만 여명의 백성들이 투표에 참여해 9만8000여명이 찬성, 7만4000여명이 반대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찬반 상황은 지역별로 ‘세종실록’에 기록될 정도로 국가의 총역량이 집중된 사업이었다. 당시 인구수를 고려하면 17만 여명의 참여는 전 백성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그러나 찬반 의견이 워낙 팽팽했기에 세종은 바로 세법을 확정하지 않고 다시 면밀한 조사를 거쳤다. 1437년 8월 전라도와 경상도부터 공법의 시범 실시가 이루어졌고, 1441년(세종 23년)에는 충청도까지 확대되었다. 1444년(세종 26년) ‘공법’은 마침내 토지의 크기와 풍흉(豐凶)의 수확량을 모두 고려하는 ‘연분 9등법’ ‘전분 6등법’으로 최종 확정되었다. 국민투표를 실시한 지 14년 만의 일이었다.

농업이 근본 산업이었던 당시, 백성들이 경작하는 토지에 대한 세금 결정은 백성들의 최대 관심사였다. 이처럼 중요한 사안이었기에 세종은 오랜 시간을 두고 신하와 백성들의 충분한 의견을 수렴한 끝에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흔히들 왕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전제왕권 시대에 이처럼 민주적인 의사결정 과정을 거쳤다는 사실이 실로 놀랍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세종의 싱크탱크Think Tank, 집현전 2편

■세종의 싱크탱크Think Tank, 집현전 2편

■세종의 싱크탱크(Think Tank), 집현전 2편

집현전에서는 주로 옛 제도에 대한 해석과 함께 현안의 정책 과제들을 연구하였다. 주택에 관한 옛 제도를 조사한다거나 중국 사신이 왔을 때의 접대 방안, 염전법에 관한 연구, 외교문서의 작성, 조선의 약초 조사 등 다양한 연구와 편찬 활동이 이곳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리고 집현전에 소속된 학자들은 왕을 교육하는 경연관, 왕세자를 교육하는 서연관, 과거시험의 시관(試官),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史官)의 임무도 동시에 부여받았다. 그야말로 국가의 싱크탱크(Think Tank)로 자리매김 한 것이다.

집현전에서는 각종 편찬사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역사서, 유교 경서, 의례, 병서, 법률, 천문학 등 국가에 필요한 서적 편찬의 과제가 집현전에 부여되면 학자들은 과거의 법제와 학문 연구를 통해 이를 완수해 세종에게 올렸다. 이러한 편찬사업은 세종 당대에 완성된 것도 많았지만 ‘고려사’와 같이 전대의 역사를 정리한 편찬사업은 세종대에 시작하여 문종대에 완성되었다. 그만큼 긴 안목을 가지고 과제를 부여하고 이를 완성했던 것이다. 집현전은 세종의 지대한 관심 속에 국가의 중요 정책을 연구하고 결정하였다. 세종 또한 수시로 이곳을 방문하여 학자들을 격려하였다. 어느 겨울 밤 집현전에 여전히 불이 꺼지지 않은 것을 본 세종이 이곳에서 깜빡 잠이든 신숙주에게 자신이 입고 있던 담비 가죽 옷을 덮어준 일화는 널리 알려진 미담(美談)이다.

그러나 집현전 학자들은 세종의 결정으로 오랜 기간 이곳에 근무하게 했기 때문에 승진이 늦어져 학자들 간에는 불만이 쌓였고 다른 부서로 옮기려는 학자들도 나타났다. 정창손은 22년, 최만리가 18년, 박팽년이 15년, 신숙주가 10년을 근무하는 등 집현전 근무 연한은 다른 어떤 부서보다도 길었고, 이에 따라 승진에 불만을 가지는 학자들이 일부 나타났다. 이런 상황을 파악한 세종은 집현전 학사들을 제도적으로 배려하는 조치도 취하였다. 세종은 집현전 학자들을 위해 사가독서(賜暇讀書), 즉 왕이 하사하는 유급 휴가제도를 실시하였다. 심신이 지친 학자들에게 재충전의 기회를 준 것으로, 오늘날 대학교 교수의 연구년(또는 안식년) 제도와 비슷하다. 역시 시대를 초월한 성군(聖君)임에 틀림없다.

사가독서(賜暇讀書)는 세종 8년인 1426년 12월에 집현전 학사 권채, 신석견, 남수문 등을 집에 보내 3개월간 독서하면서 재충전할 수 있는 시간을 준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처럼 처음에는 집으로 보내 쉬게 했다가, 이후에는 학문하기 좋은 조용한 절(진관사)에 보냈다가, 성종대에 이르면 아예 독서당(호당이라고도 칭함)을 만들어 사가독서 제도를 정착시켰다. 처음에 독서당은 용산에 있어 남호(南湖)라 하였다가 중종대인 1507년 현재의 서울 금호동 산자락으로 옮긴 후에는 동호(東湖)라 하였다. 지금 서울 성동구의 독서당길이나 한강의 다리 중 동호대교는 조선시대에 동호 독서당이 있었던 흔적을 말해주고 있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세종의 싱크탱크Think Tank, 집현전 1편

■세종의 싱크탱크Think Tank, 집현전 1편

■세종의 싱크탱크(Think Tank), 집현전 1편

세종대왕은 그 자신의 능력도 뛰어났지만 나라의 인재를 적재적소에 잘 활용한 군주였다. 능력을 우선하면서도 포용성과 객관성을 가진 세종의 인재등용은 오늘날의 정치인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황희와 같은 명재상, 북방을 개척한 김종서, 집현전의 성삼문과 신숙주, 음악가 박연, 천민 출신의 과학자 장영실까지 세종대에 배출된 인재들은 우리 역사에서 가히 ‘드림팀’이라고 부를 만하다. 인재를 알아본 세종의 눈이 이들을 역사의 인물로 영원히 남게 한 것이다.

왕으로서, 정치가로서 세종의 위대함을 부인하는 한국인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훈민정음 창제, 백성들을 위한 ‘농사직설’ ‘향약집성방’ 등의 농서와 의서 간행, 천재 과학자 장영실의 발탁과 해시계·자격루·측우기 등의 각종 과학기구들의 발명, 박연으로 대표되는 궁중음악의 완성 등 세종대의 찬란한 민족문화의 성과는 일일이 나열하기도 힘들 정도이다. 그런데 세종대왕의 면면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점이 바로 역량 있는 국가 인재들을 폭넓게 활용했다는 점이다.

특히, 집현전의 설치는 세종의 인재활용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세종은 즉위와 함께 집현전을 국가기관으로 승격시켜 학문의 중심기구로 삼았고, 집현전에 재주와 행실이 뛰어난 젊은 인재들을 모았다. 신숙주, 성삼문, 정인지, 최항 등 세종 시대를 대표하는 학자들이 속속 집현전에 모여들었다.

집현전은 1420년(세종 2년)에 설치되어 세조 2년에 없어질 때까지 약 37년간을 존속하였다. 그러나 이처럼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집현전이 우리에게 깊이 각인되어 있는 것은 이곳에서 세종시대의 대표적인 학문과 문화가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집현전은 세종대에서 단종대까지 총 96명의 학자가 거쳐 갔다. 조선시대 문과 합격자 명단을 기록한 ‘국조방목’의 기록을 보면 집현전 학자 전원이 문과 급제자 출신임을 알 수 있다. 그것도 수석인 장원급제자가 정인지를 비롯한 16명, 2등이 6명, 3등이 신숙주 등 11명, 4등이 7명으로 전체 집현전 학자 중 절반에 가까운 46명이 5등 안에 합격한 그야말로 국가의 최고 인재들이 발탁되었다. 이들 우수한 인재에게 세종이 부여한 임무는 독서와 학문연구,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정책 결정과 편찬 사업이었다.

집현전은 현재의 경복궁 수정전 자리로, 국왕이 조회와 정사를 보는 근정전이나 사정전과 매우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만큼 세종이 집현전에 대한 관심이 컸음을 의미한다. 세종은 학문이 매우 뛰어난 군주였음에도 불구하고 홀로 정책을 결정하지 않았다. 집현전 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충분히 반영하려 했다는 점에서 인재를 활용하는 세종의 면모가 잘 나타나고 있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