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싱크탱크Think Tank, 집현전 3편
■세종의 싱크탱크(Think Tank), 집현전 3편
집현전은 세종의 각별한 배려 속에서 수백 종의 연구 보고서와 50여종의 책을 편찬하였다. ‘향약집성방’, ‘삼강행실도’, ‘자치통감’, ‘국조오례의’, ‘역대병요’와 같이 의학, 역사, 의례, 국방 등 전 분야에 걸쳐 많은 책들이 편찬되어 세종시대 문화의 꽃을 활짝 피우게 하였다. 집현전의 설치는 무엇보다 세종이 혼자만의 힘으로 국가정책을 결정하지 않고 다수 인재들에게 학문 연구를 지원하고 그 성과를 국가정책으로 활용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리고 집현전에서 배출된 쟁쟁한 인적자원은 15세기 찬란한 민족문화를 완성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집현전이라는 국가의 인재를 최대한 활용하면서 ‘함께하는 정치’의 모범을 보였다는 점에서 세종은 가장 위대한 국왕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세종이 집현전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과도 함께 정치 현안을 의논하고자 했던 점은 토지 세법에 관한 의견을 직접 물어 본 것에서 그 면모를 엿볼 수 있다. 1430년(세종 12년) 세종은 ‘공법’이라는 새로운 세법(稅法) 시안을 갖고 백성들에게 그 찬반 의사를 묻는, 요즈음으로 치면 ‘국민투표’를 실시하였다. 토지 1결당 일정하게 10두(斗)의 세금을 정하는 것이 핵심적인 내용이다. 이전까지 관리가 직접 논밭을 돌아보면서 수확량을 확인하고 그에 따라 세금을 정하는 방식이 부정이 저질러지면서 문제점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1430년 3월 5일부터 8월 10일까지 무려 5개월간에 걸쳐 찬반 투표가 실시되었다. 17만 여명의 백성들이 투표에 참여해 9만8000여명이 찬성, 7만4000여명이 반대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찬반 상황은 지역별로 ‘세종실록’에 기록될 정도로 국가의 총역량이 집중된 사업이었다. 당시 인구수를 고려하면 17만 여명의 참여는 전 백성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그러나 찬반 의견이 워낙 팽팽했기에 세종은 바로 세법을 확정하지 않고 다시 면밀한 조사를 거쳤다. 1437년 8월 전라도와 경상도부터 공법의 시범 실시가 이루어졌고, 1441년(세종 23년)에는 충청도까지 확대되었다. 1444년(세종 26년) ‘공법’은 마침내 토지의 크기와 풍흉(豐凶)의 수확량을 모두 고려하는 ‘연분 9등법’ ‘전분 6등법’으로 최종 확정되었다. 국민투표를 실시한 지 14년 만의 일이었다.
농업이 근본 산업이었던 당시, 백성들이 경작하는 토지에 대한 세금 결정은 백성들의 최대 관심사였다. 이처럼 중요한 사안이었기에 세종은 오랜 시간을 두고 신하와 백성들의 충분한 의견을 수렴한 끝에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흔히들 왕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전제왕권 시대에 이처럼 민주적인 의사결정 과정을 거쳤다는 사실이 실로 놀랍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