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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30일 토요일

꽃미남에 엄친아, 문종 3편

■ 꽃미남에 엄친아, 문종 3편

■ 꽃미남에 엄친아, 문종 3편

문종은 세자시절 세 명의 세자빈을 모두 잃고, 승하할 때까지 홀아비 임금으로 삶을 살았다. 문종은 처복이 지지리도 없었던 것이다.

첫 번째 세자빈의 경우는 못생겼다 해서 문종이 마음을 주지 않았다. 이에 세자빈이 문종의 마음을 얻기 위해 궁녀 신발을 태워 문종에게 먹이는 등의 이상한 행동을 하다가 세자빈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두 번째 세자빈은 인물은 괜찮았지만 문종과 성격이 맞지 않아 사이가 좋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두 번째 세자빈은 궁궐 야사에 초유(初有)의 이름을 올리고 만다. 궁녀와 동성애로 쫓겨난 순빈 봉씨이다.

여기까지는 문종보다 세종의 책임이 크다. 문종의 의지가 아닌 세종의 의지로 세자빈을 뽑았기 때문에 인물은 별로 개의치 않고 뽑은 거 같다. 그래서 세 번째 세자빈은 문종이 총애한 후궁 중에 선택했으나 단종을 낳은 직후에 사망하고 만다. 이처럼 문종은 세 명의 부인과 비극적으로 헤어졌고, 그 이후로는 새 왕비를 얻지 않고 혼자 살았다.

문종은 왕으로 즉위한 후로도 왕비를 새로 뽑지 않았다. 조선에서 재위할 동안 한 번도 왕비를 두지 않은 유일한 왕이다. 그리고 이것은 단종이 즉위한 후 그를 보호하며 수렴청정을 할 왕실의 웃어른이 없어서 왕권이 약화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문종의 부부관계만큼은 9명의 부인에게서 18남 4녀를 둔 또 다른 성(?)군인 아버지 세종을 닮지 못한 듯하다.

단종의 비극을 낳게 된 또 하나의 결정적 원인은, 아우들인 수양대군과 안평대군들의 정치참여를 막지 않아서 그들의 세력을 키워주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자신의 아우인 수양대군이 조카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문종이 오래 살았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세자 시절 오랫동안 대리청정을 하면서 국정에 몰두한 것이 문종의 건강을 해치고 왕위에 오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승하하게 되면서 또 한명의 성군(成君) 탄생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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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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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미남에 엄친아, 문종 2편

■ 꽃미남에 엄친아, 문종 2편

■ 꽃미남에 엄친아, 문종 2편

문종은 열 살의 어린 나이로 세자에 올라 무려 29년 동안을 세자로 보낸다. 세종대왕의 치세기간이 31년 6개월이나 되지만, 그 기간 중 문종이 세자로만 무려 29년을 보냈으니 세종의 치적은 문종과 공동으로 이룬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특히 세종의 병치레가 아주 심했던 세종 후기는 솔직히 문종의 치세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문종은 긴 세자시절 동안 특별한 건강 문제없이 과도한 업무를 모두 소화해냈다. 세자시절 문종은 병약함 보다는 세종과 비슷하게 일중독에 가깝게 일에 몰두했다. 문종은 세종대왕을 쏙 빼닮아 학문에 대한 깊이가 상당히 깊었다. 병서(兵書)와 다른 분야에서도 업적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한글 창제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장영실이 발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측우기도 사실은 문종이 세자시절에 낸 아이디어였다고 한다.

문종은 세종처럼 학문을 좋아하는 왕이었지만 실제로는 국방에도 아주 관심이 많은 지도자였다. 실제로 세종시대 개발한 신기전과 화차, 화포 등 화약무기에 관해서는 문종이 기획 개발 설계까지 거의 모든 부분에 관여했다. 그리고 군제 개편 또한 관심이 많아서 4군 6진 개척 또한 세자시절 문종이 주도했다.

문종은 세자로서 보기 드물게 효자였고, 수양대군을 비롯한 동생들에게도 자신만만한 형이었다. 그래서 문종은 세자시절이나 왕이 되어서도 동생들을 전혀 견제하지 않았다. 그러나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이 때때로 권력에 대한 욕심을 드러낼 때가 있어, 중신들은 문종에게 왕권 강화를 위해서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을 견제하도록 요구하고 결단을 강요하기도 했다.

그러나 문종은 자신만만했기 때문에 중신들의 요구를 다 무시했고, 문종 앞에서 철저하게 발톱을 숨긴 수양대군에게 오히려 어느 정도의 조정 일을 맡기기까지 했다. 그래서 어린 단종을 남겨 놓고 갑작스레 문종이 승하하자 문종 독살설도 나오게 되었다.

백성들이 세종 승하 때보다 문종 승하 때 더 슬퍼했다는 기록도 있다. 당시 시대에도 백성들이 문종의 치세를 잘 알았던 듯하다. 만일 문종이 조금 더 오랫동안 왕으로서 보위에 있었다면 세종대왕에 버금가는 현군이 탄생하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훌륭한 자질을 가진 문종에게도 몇 가지 문제가 있었다.

- 3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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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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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미남에 엄친아, 문종 1편

■ 꽃미남에 엄친아, 문종 1편

■ 꽃미남에 엄친아, 문종 1편

세종의 큰아들이자 단종의 아버지, 조선의 5대 왕인 문종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다. 문종의 재위기간은 2년여 정도로, 그 기간에 후세에 주목받을 만한 역사적인 큰 사건도 없었고 세종 대의 태평성대가 이어지고 있었다. 너무 병약해서 일찍 죽어버리는 바람에 바로 아래 동생인 수양대군의 쿠데타에 의해 비극적 죽음을 당한 나이 어린 단종의 아버지 정도로만 기억한다.

사극 드라마나 영화에 나온 문종의 이미지는 체구가 작고 말라 병약한 모습이었다. 또 유약한 심성을 가져 아래 동생 수양대군에게 항상 두려움을 느끼며, 수양 앞에서 기분을 맞추기 위해 전전긍긍하며 주눅 든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러나 실록에 나온 문종의 기록은 이런 문종의 이미지와는 정반대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병약한 왕이 아니었다. 오히려 수양대군이 문종의 세자 시절부터 문종의 눈에 들기 위해 갖은 애를 다 쓴다. 아마도 세조(수양대군)의 왕위찬탈을 정당화시키고 그 치적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상대적으로 문종을 병약한 이미지로 만들었고, 지금까지도 오랫동안 그런 이미지가 남아있다.

문종은 체구가 건장하고 키도 훤칠한, 지금으로 보면 엄청난 꽃미남에 엄친아였던 것으로 보인다. 젊은 세자 시절부터 수염이 길고 멋드러졌고, 관우를 닮은 외모 빨로 중국 사신들에게도 큰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또, 외모 뿐 아니라 생각도 깊고 아는 것도 많았지만 겸손하기까지 해서 중국에서 사신들이 오면 젊은 세자와 토론하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이런 조선의 젊은 세자에 대한 소문이 중국까지 퍼져 나가서 중국과의 외교와 무역이 활발해지는 등 세자 덕을 톡톡히 본 것으로 실록에 적혀있다.

문종은 조선의 왕 중 몇 안 되는, 적장자로 왕위계승을 한 왕이었다. 최고 성군인 세종조차도 적장자로 태어나지는 못했다. 문종의 외아들인 단종이 어린나이로 왕위에 올라서 문종이 아주 젊은 나이에 단명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문종이 승하할 때의 나이는 39세로 당시 나이로는 적지 않는 나이였다. 조선 왕들의 평균 사망나이로 봐서 문종은 평균 정도이다.

- 2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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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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