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비밀프로젝트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비밀프로젝트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24년 3월 28일 목요일

비밀프로젝트, 한글창제 3편

■ 비밀프로젝트, 한글창제 3편

■ 비밀프로젝트, 한글창제 3편

그러나 비공식적으로 그 이면을 살펴보면 조금 다른 이유가 숨어있다. 우선 세종은 조선 건국 초 4대(代) 왕으로서 건국의 정당성을 온 백성에게 알려 조선을 빨리 안정화시키고 싶었다. 그때까지도 고려의 잔존세력이 아직 살아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려운 한문으로는 이 일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백성들도 배우기 쉬운 우리 글자를 연구하였는데 그것이 ‘훈민정음’이라는 것이다.

"

세종이 훈민정음 반포 이후 제일 먼저 용비어천가를 편찬한 것만 봐도 그 이유를 알 수 있다.진정 백성을 생각했다면 세종 때 백성들을 위해 쓰여진 농사직설이나 향약집성방을 먼저 한글로 편찬해야 옳았다.

",

또 다른 이유는 세종이 원래는 한글창제가 목적이 아니라 중국 한자의 운율을 중국식으로 발음하기 위한 운율연구가 목적이었다고 한다. 이 일에는 당시 집현전 부제학이었던 최만리가 앞장섰다. 그런데 세종이 운율연구 이상을 넘어 훈민정음을 반포하자 최만리 등 조정대신이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게 된다. 그 상소문 제일 위에 최만리의 이름이 있어 최만리만이 한글에 반대한 어리석은 조정대신으로 지금까지도 오명(汚名)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최만리의 상소문 내용은 당시 거의 대부분의 조정대신이나 조선의 정치와 문화를 담당하고 있던 사대부 대다수가 가지고 있던 일반적인 생각이라고 봐도 좋을 듯하다.

최만리는 세종이 가장 아끼던 집현전 학자였고 조선의 대표적 청백리였다. 세종이 그 상소문을 보고 화가 나 그를 잡아가두기는 하지만 바로 다음 날 풀어주고 집현전으로 다시 돌아와 주길 간청하나 최만리는 석방 즉시 낙향하여 돌아오지 않았다.

이처럼 쉽게 만들어져 누구나 환영했을 것 같은 훈민정음은 우여곡절을 겪었고, 반포이후에도 조선시대 내내 찬밥 신세를 면치 못했다.

5살만 되어도 전부를 깨우칠 수 있는 쉽고, 과학적이고, 철학이 있는 문자 한글!!! 만약 세종이 조선사대부 지배층들의 그 거센 반대에 굴복하여 훈민정음을 반포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 어떤 문자를 쓰고 있었을까를 생각해보면, 세종의 위대성에 감복하고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

비밀프로젝트, 한글창제 2편

■ 비밀프로젝트, 한글창제 2편

■ 비밀프로젝트, 한글창제 2편

"

최만리의 상소에도 분명히 나오지만 조선사대부들 생각은 중국 한자가 아닌 다른 독립적인 문자를 쓰는 것은 중화질서로 부터 벗어나려하는 무엄한 짓이었고, 야만국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라고 주장했다. 즉, 야만인 오랑캐라 깔보았던 여진족, 몽고족, 서하, 티벳. 일본 등이나 고유의 독립된 문자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

조선사대부들은 우리나라 스스로 쓸 수 있는 고유문자 한글창제는 그러한 오랑캐와 같아지는 수준으로 여겼다. 세종은 이런 격렬한 반대를 미리 예상했기 때문에 믿을 수 있는 집현전 학자 몇 몇과 함께 극비 프로젝트로 훈민정음 창제를 진행했던 것이다.

어느 한 시기에 글자가 만들어져 일시에 반포·사용되고, 이후 약 600년 가까이 지속적으로 사용되는 문자는 세계에서 오직 한글밖에 없다.

훈민정음의 위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순식간에 우리나라는 거의 전 국민이 글자를 해독할 수 있는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너무 쉽게 만든 것도 탈이었다. 조선사대부들은 한글을 모든 백성들이 읽을 수 있다는 것도 큰 수치로 생각하였고 모든 국가의 공식장부에서 철저히 외면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한글은 서민들과 여자들 사이에서만 비공식적으로 전승되는 글자가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세종은 왜 훈민정음 반포에 매달렸을까? 공식적으로 한글의 창제 동기는 〈훈민정음〉의 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

『첫째, 우리말이 중국말과 다른 데도 중국글자를 쓰므로 불편한 점이 많아 우리말에 맞는 새 글자를 만든다는 것.

둘째, 어리석은 백성이 쉽게 글자를 배워 문자생활을 편하게 하기 위함.』

여기에서 세종의 강한 민족자주정신, 애민정신과 민본주의를 엿볼 수 있다.

-3편에 계속

"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

비밀프로젝트, 한글창제 1편

■ 비밀프로젝트, 한글창제 1편

■ 비밀프로젝트, 한글창제 1편

1443년 12월 30일, 세종대왕은 그의 인생 최고의 걸작이자, 대한민국 역사의 최고 걸작품인 훈민정음, 즉 한글을 내놓았는데, 기이하게도 이날 이전의 조선왕조실록에는 한글에 관한 기록이 전혀 없었다. 그동안 한글은 세종의 지휘 아래 집현전 학자들이 만들었다는 것이 통설이지만, 적어도 실록에는 집현전이 한글창제에 관여했다거나 도움을 주었다는 내용은 어디에도 없다.

한글 창제는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한글창제는 중국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고 당시 사대부들의 엄청난 반대에도 부딪혔다. 많은 사람들이 훈민정음은 세종의 명을 받은 집현전 학자들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 알고 있지만, 훈민정음(한글)은 세종대왕이 눈병에 시달려가며 몸소 만들었고, 집현전 학자들은 세종대왕의 지시와 가르침에 따라 한글 안내서인 ‘훈민정음 해례본’ 집필에 참여했을 뿐이다.

"

한글은 배우기도 쉽고 과학적인 문자이다. 몇 년 전 방영한 뿌리깊은나무라는 드라마에서 한글 창제과정을 깊이 있게 다루었다. 이 드라마에서 세종은 최만리를 위시한 조정대신들이 훈민정음 창제를 결사적으로 반대할 것을 예상해서 집현전 학자 몇 명만 데리고 극비프로젝트로 진행한다. 조선 조정대신과 사대부들이 훈민정음을 만드는 데 반대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명확했다.

",

한글은 사나흘이면 누구나 읽고 쓰고 할 수 있는 너무 쉬운 문자라 여자들은 물론이고 평민, 천민들까지도 문자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나라가 되어 버려 사대부들이 유교적 질서아래 통치하기가 힘들어 질 수 있고 현재의 체제가 지속되기도 힘들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문자가 바로 권력이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세종은 중국도 훈민정음 창제를 반기지 않을 것이라 보았다. 그래서 극비 프로젝트로 비밀리 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는 중국만이 천하를 지배하는 중화질서 시대였다. 즉 모든 것은 중국을 통해야만 가능한 시대였다. 조선 사대부들이 목숨처럼 따르는 당시 천하 질서였고 동시에 성리학 질서였다. 그래서 당연히 문자도 중국의 것을 쓰는 것이 중화질서에 속한 문명국으로서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2편에 계속

"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