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7일 목요일

◇ 지리산에 ‘칠암자 순례길’

◇ 지리산에 ‘칠암자 순례길’

◇ 지리산에 ‘칠암자 순례길’

지리산에 칠암자 순례길이 있다. 지리산 자락에 매달린 일곱 암자를 이은 탐방로다. 찾는 이 적으니 거리두기야 자연스레 이뤄질 테고, 오랜 기간 쓰지 않았던 몸 여기저기에 긴장감을 잔뜩 불어넣을 수 있다. 울림과 여운이 남는 수행의 여정을 원한다면 이 길이 딱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칠암자 순례길’의 들머리는 도솔암이다. 한데 문제가 있다. 도솔암 가는 길이 비법정 탐방로란 것이다. 일 년에 딱 하루, 부처님오신날에만 탐방로의 문이 열린다. 평일에 올랐다가 걸리면 꽤 많은 벌금을 물어야 한다. 그런데도 꾸역꾸역 찾아가는 이들이 있는지, 국립공원관리공단과 산객들 간에 막고 피하는 싸움이 꽤 치열하다고 한다. 오지 말라고 하는 곳을 굳이 찾을 필요가 있을까. 꼭 이름만큼의 구간을 돌아야 한다는, 명분에 너무 집착하는 건 아닐까 싶다.

대부분의 산객들이 선택하는 코스는 경남 함양 영원사에서 올라 상무주암~문수암~삼불사~약수암을 거쳐 전북 남원 실상사로 내려오는 것이다. 평일에는 사실상 도솔암을 뺀 ‘육암자 순례길’인 셈이다. 칠암자든 육암자든 무슨 상관이랴. 순례길을 걷는 목적이 숫자의 정복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칠암자 순례길’은 지리산 안에서 또 다른 지리산을 보며 걷는 길이다. 등산로를 머릿속으로 그려 보면 이 말의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지리산 주능선의 삼각고지(1480m)에서 북쪽 방향으로 작은 능선 하나가 갈라져 나왔다. 이게 삼정능선이다. 칠암자는 이 삼정능선의 골짜기를 따라 매달려 있다. 그러니 암자와 암자를 잇는 순례길을 따라 걷다 보면 자연스레 천왕봉 등 지리산 주능선의 수려한 봉우리들을 한눈에 담게 된다.

들머리는 함양 마천면의 영원사(920m)다. 1971년 중건된 절집이지만 거쳐 간 스님들의 법명은 그야말로 전설적이다.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끈 서산대사와 사명대사, 일제강점기 불교계의 항일운동사에 큰 공적을 남긴 백초월 스님 등이 이 절집에서 일정 기간 수행했다. 109명에 이르는 고승들의 면면은 이 절집에서 여태 보관하고 있는 안록(역대 큰스님들의 행장이 수록된 책자)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한다.

영원사 공양간을 돌아서면 오르막이 시작된다. 영원사에서 영원령을 넘어 상무주암에 이르는 1.8㎞ 구간 중에 1㎞가 넘는 구간이 오르막길이다. 이후에도 오르막 내리막이 반복되지만 이 구간이 가장 힘들다.

상무주암은 순례길 암자 가운데 가장 높은 해발 1162m에 있다. 부처님도 발을 붙이지 못하는 경계(上)에 있는, 머무름이 없는 자리(無住)라는 뜻이다. 고려 때 보조국사 지눌이 2년여를 머물며 “옷 세 벌과 바리때 하나만으로 지리산 상무주암에 은거했는데, 경치가 그윽하니 천하제일인지라 선객이 거주할 만했다”는 말을 남겼다고 할 만큼 전망이 빼어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다른 암자와 달리 상무주암에선 사진을 찍을 수 없다. 암자 입구에 사진촬영금지 팻말이 걸려 있다. 하지만 그걸 보지 못한 게 화근이었다. 낯선 객이 제집인 양 안마당을 헤집고 다니자 주지 스님께서 조용히 한마디 하신다. 사진 찍지 말라고. 멀리서 일부러 찾아왔다고 재차 읍소를 하니 단박에 나가라며 축객령이다. 따지고 보면 해발 1000m를 오르내리는 순례길의 암자들은 세상과 멀어지려 일부러 외진 곳에 터를 잡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사람들은 더 숨은 암자를 찾으려 하고, 결국 숨자고 들어선 곳이 외려 명소가 되는 희한한 역설이 생겨난다.

상무주암 주변에 홀로 명상에 잠길 만한 자리가 몇 곳 있다. 축객령으로 내쫓긴 이들에겐 그야말로 제격인 자리다. 눈앞에 펼쳐지는 지리산의 눈부신 봄 풍경 덕에 불편했던 마음 한 자락이 스르르 녹아내린다.

문수암은 커다란 바위 아래 터를 잡은 암자다. 순례길의 풍경을 말할 때 최고로 꼽는 이들이 많은 절집이다. 임진왜란 때 마을 사람 1000여명이 숨었다고 전해지는 천인굴과 늘 마르지 않는 석간수로 알려졌다. 문수암은 오랫동안 암자를 지키던 도봉 스님의 보시로 유명한 절집이다. 암자를 찾는 이와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고 먹거리를 나누곤 했다. 한데 도봉 스님이 암자를 내려간 이후로 절집은 적막한 공간이 됐다.

산객들에게 풍경으로 보시하는 최고의 절집은 삼불사가 아닐까 싶다. 독특하고 소박한 건물과 비구니 스님의 손길이 묻어나는 각종 소품들이 산객의 마음을 산뜻하게 보듬어 준다. 무엇보다 좋은 건 암자 앞 작은 뜨락에서 맞는 너른 풍경이다. 지리산으로 향한 미닫이 문이 활짝 열린 듯하다.

삼불사에서 남원 땅에 속한 약수암까지는 2.3㎞로 다소 길다. 내리막길이긴 해도 너덜지대의 연속이어서 결코 만만하지 않다. 약수암은 시원한 샘물이 유명하다. 목각탱화인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보물 421호)도 고색창연하다. 종착지인 실상사는 다른 암자들에 비하면 대찰이다. 평지에 있어 은둔의 느낌도 덜하다. 볼거리는 많다. 경내 극락전 앞의 석등(보물 35호)과 2기의 삼층석탑(보물 37호)을 비롯해 딸린 암자인 백장암의 삼층석탑(국보 10호) 등 문화재가 수두룩하다.

산행 끝에 둘러볼 만한 명소 몇 곳만 덧붙이자. 함양 오도재는 지리산 전망이 멋들어지게 펼쳐지는 곳이다. 조망공원이 따로 마련돼 있다. 이웃한 지안재는 사진 좋아하는 이들이 즐겨 찾는 출사지다. 뱀처럼 휜 도로를 사진에 담을 수 있다.

▶ 여행수첩

- 지리산 칠암자 순례길은 영원사 쪽에서 시작하는 게 낫다. 영원령 등 오르막 구간도 일부 있지만 대체로 내리막 구간이다. 반대로 실상사에서 오르면 급경사가 이어져 체력 부담이 커진다. 도솔암을 제외한 거리는 얼추 8㎞ 가까이 된다. 소요시간은 6시간 이상 잡아야 한다.

- 약수암에서 실상사까지는 구절양장 임도를 따라 내려와야 한다. 한데 영 산행하는 맛이 나지 않아 숲으로 난 샛길로 내려오는 이들이 많다. 다만 표지판이 없어 길을 잃고 함양 쪽 도마마을로 내려올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차를 가져갈 경우 실상사에 주차를 하고 함양 택시를 불러 영원사로 가는 게 보통이다. 영원사 앞에 차를 대고 실상사에서 택시를 불러도 된다. 어느 쪽이든 택시비는 2만 5000원이다.

-서울신문-

◇ 옛이야기 가득… 명불허전 문경새재 옛길

◇ 옛이야기 가득… 명불허전 문경새재 옛길

◇ 옛이야기 가득… 명불허전 문경새재 옛길

예고편을 자주 보면 영화를 본 것으로 착각할 때가 있다. 전국의 유명 걷기길 중에서 문경새재 옛길이 그렇다. 산세가 높고 험해 새도 한번에 날아서 넘지 못한다는 고갯마루, 동래에서 한양까지 이어지는 영남대로에서 가장 중요하고 험한 구간, 영남의 유생들이 과거를 보기 위해 오르내리던 길, 임진왜란 때 신립 장군이 판단을 잘못해 허무하게 내어준 전략적 요충지 등 새재에 대한 정보가 차고 넘치는 탓이다.

문경새재 제1관문인 주흘관 뒤편 산자락으로 운무가 피어 오르고 있다. 문경새재 옛길은 안전사고의 우려가 없어 비 오는 날 대안으로 찾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실제 문경새재를 방문하는 이들도 제1관문 주변만 산책하거나, 제2관문인 조곡관 까지만 왕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정해진 시간 안에 돌아오기 위해 걷는 데만 치중하면 참맛을 알기 어렵다. 제1관문에서 제3관문까지는 왕복 13km, 느긋하게 온전히 하루를 투자한다면 문경새재의 또 다른 매력을 발견할 수 있다. 역사가 오래된 만큼 이 길을 스쳐 간 인물과 이야깃거리가 가득하다.

문경새재 옛길을 걷기로 한 그날은 하필이면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동행하기로 한 김영숙 문화관광해설사는 걱정할 것 없다고 단언했다. 단단한 흙길이어서 산행을 통제하는 경우가 거의 없고, 날이 험해도 길을 잃거나 안전사고의 우려가 없다고 했다. 오히려 눈이나 비가 오는 날이면 인근 지역 산행을 포기한 등반객들이 대안으로 이곳을 택한다고 한다.

길은 명칭만 ‘영남대로’가 아니라, 1980년대 초반까지 실제 차량이 다녔던 도로다. 전 구간이 비포장이지만 차량 두 대가 조심스럽게 비켜갈 정도로 넓다. 주차장에서 옛길박물관을 지나 약 1km를 가면 제1관문 주흘관이다. 문루를 가운데 두고 높은 석성이 계곡을 가로막고 있다. 일반적으로 성벽은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원형으로 쌓지만, 문경새재의 성벽은 길목을 차단하는 일자형이다. 성벽이 없는 부분은 지형이 험해 애초부터 진입이 불가능하다. 3개의 관문 중 주흘관과 이어진 성벽(초곡성)이 2,270m로 가장 길다. 단단한 성벽 뒤로 첩첩이 산줄기가 겹쳐지고, 계곡에선 안개가 피어 오른다. 비 오는 날의 선물이다.

주흘관을 지나면 계곡 왼편에 ‘문경새재 오픈세트장’이 자리 잡고 있다. 2000년 드라마 ‘태조 왕건’ 촬영 세트로 개장한 이래 수많은 사극을 촬영한 곳이다. 2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130여 채에 달하는 건물 외벽과 돌담에도 세월의 때가 묻어 얼핏 오래된 민속마을의 풍모가 느껴진다.

키 큰 활엽수가 터널을 이룬 길을 따라 조금 더 오르면 길가에 조령원 터가 있다. 사각형으로 둘러진 돌담 안에 드라마 촬영을 위해 지은 초가가 한 채 남아 있다. 원(院)은 일종의 공립 여관이다. 10리마다 설치해 문경새재에는 조령원과 동화원이 있었다. 인적이 드문 험한 산길에는 도둑과 산짐승이 많아 상인이든 과객이든 혼자는 재를 넘지 못하고 이곳에서 일행을 이뤄 출발했다고 한다. 요즘은 매달 음력 보름 전후로 진행하는 ‘문경새재 달빛여행’ 프로그램에서 참가자들이 동동주를 곁들이며 잠시 옛 정취에 빠져 보는 공간으로 이용된다.

멀지 않은 곳에 사설 여관인 주막 터도 있다. 김시습, 이이, 류성룡 등 이 길을 거쳐 갔던 당대의 유명 인사들이 남긴 시들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 요즘으로 치면 일종의 방명록이다.

조금 더 올라가면 멋들어지게 휘어진 소나무 한 그루 뒤로 제법 규모가 큰 정자가 홀연히 나타난다. 새로 부임하는 경상감사와 이임하는 감사가 임무 교대를 하던 교귀정(交龜亭)이다. 짙은 나무 그늘 아래로 초록 비가 뚝뚝 떨어져 운치를 더한다. 정자 좌우에 2개의 선정비가 있다. 왼쪽에는 ‘안동부사 김수근타루비’가 세워져 있다. 임기를 마치고 한양으로 귀환하는 길목에 주민들이 그의 선정을 기려 ‘눈물을 흘리며 세운 비석’이다. 오른쪽 바위에는 ‘상주부사 이인면 애휼비’가 음각과 양각으로 새겨져 있다. 바위와 함께 오래도록 남을 터인데, 실제 그럴 만한 인물이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바로 앞 계곡에는 폭포 소리가 청량하다. 용이 승천했다는 용추폭포다. 폭포 위 반반한 바위에 궁예가 최후를 맞은 곳이라는 안내판이 있어 자세히 읽어 보니 드라마에서 그랬다는 얘기다. 조곡관 아래 길가에는 ‘산불됴심’이라 쓴 커다란 표석이 길손의 주의를 환기시킨다. 조선시대에 세운 순수 한글 비석으로는 유일한 것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조곡관은 순서상 제2관문이지만 3개 관문 중에서 가장 오래된 문루다. 조곡관은 임진왜란 직후인 선조27년(1594), 1ㆍ3관문은 숙종 34년(1708)에 세워졌다. 조곡관 앞에는 계곡을 건너는 다리가 놓였고, 뒤에는 붉은 기둥을 쭉쭉 뻗은 솔숲이 멋스럽다. 이곳은 새재에서 가장 좁은 길목이기도 하다. 바로 위에 이진(二陣) 터가 남아 있는데,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친 신립 장군이 눈속임으로 인형을 세워 놓았던 곳이라 한다. 아무리 멍청이라도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지 못할까. 패배의 원인을 찾자면 100가지도 넘는다는 말처럼 당시의 전술이 꼭 그 모양이었던 듯하다.

이곳부터 3관문까지는 제법 오르막이다. 계곡 물소리도 멀어져 다소 심심하다. 탐방객들이 대부분 2관문에서 발길을 돌리는 이유다. 이 구간에서 꼭 들어야 할 곳이 있다면 동화원이다. 조령원과 마찬가지로 여관 자리였는데 지금은 휴게소로 운영되고 있다. 방풍ㆍ곰취ㆍ두릅ㆍ엄나무와 오가피 순을 버무린 제철 산나물전이 상큼하다.

동화원에서 주흘산 부봉으로 이어지는 등산로를 조금만 따라가면 숲 속에 ‘조령국민학교 동화원분교’ 터를 알리는 표석이 남아 있다. 1971년 개교해 1985년 폐교할 때까지 24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단순 계산으로 한 학년에 채 두 명이 되지 않는 작은 학교였다. 동화원 인근에는 도공과 화전민, 특정 종교인들이 신앙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다고 한다. 문경새재 옛길에는 동화원 외에도 3개의 휴게소가 더 있다. 라면과 전, 막걸리와 커피 등을 판매하는 카페 겸 주막이다.

고갯마루에 닿으면 드디어 제3관문 조령관이다. 문경새재 옛길이 끝나는 곳이자 경상도와 충청도의 경계다. 문경읍과 괴산 연풍면에 걸쳐 있는데 ‘문경새재’로 명칭이 굳어졌으니 괴산에서는 아쉬울 수밖에 없다. 명분에서 밀리면 목소리가 커지는 법, ‘백두대간 조령’이라 쓴 대형 표석으로 부족했는지 ‘연풍새재 옛길’이라는 안내판과 조형물까지 설치했다. 이곳부터 연풍 방향으로는 조령산 자연휴양림을 통과하는 숲길이 이어진다.

-한국일보-

◇ 알려지지 않은 작은 해수욕장 서해안

◇ 알려지지 않은 작은 해수욕장 서해안

◇ 알려지지 않은 작은 해수욕장 서해안

서해에선 푸른 바다를 보기 어렵지만 광활한 갯벌을 만날 수 있다. 밀물과 썰물 풍경도 다르다. 환상적인 일몰을 감상할 수 있다는 것도 서해만의 매력이다. 충남 태안으로 향했다. 이곳에는 해수욕장 28곳이 있다. 지난달 6일 개장한 만리포해수욕장처럼 유명하고 북적이는 해변보다 조용하고 한적한 해변이 더 많다.

태안 기지포해수욕장은 입구의 해안사구가 먼저 눈길을 끈다. 훼손된 해안사구를 보존하기 위해 울타리를 세워두었다. 울타리를 지나면 광활한 해수욕장이 펼쳐진다. 길이 800m, 폭 200m의 해변이지만 삼봉해수욕장, 안면해수욕장과 해변이 이어져 있어 끝이 보이지 않는다.

마침 도착 때가 썰물이라 갯벌까지 드러나니 광활하다는 표현이 실감난다. 바닷물이 빠져나간 해변엔 조개와 게 등 바다 생물들이 살아 숨쉬고 있다. 발밑에서 바삐 움직이는 생명체가 신기하기만 하다. 갯벌 체험에 나선 가족들이 종종 보인다. 해변을 벗어나 주변 산책을 즐기기로 했다. 해안사구를 따라 걷는 길과 해송숲 사이 산책로가 있어 좋다. 기지포의 노을도 아름답기로 유명한데 시간을 맞춰 방문한다면 서해 갯벌과 일몰을 한 번에 감상할 수 있다.

태안 운여해수욕장에서도 아름다운 일몰을 감상할 수 있다. 해수욕장 남쪽에 소나무를 심어놓은 방파제가 있는데 밀물 때면 바닷물이 들어와 고이면서 호수처럼 비친다. 섬처럼 떠오른 솔숲과 일몰이 어우러져 장관이 된다. 초여름이면 은하수도 볼 수 있는 포인트다. 유명한 사진 포인트만 보고 가긴 아쉽다. 운여해수욕장의 탁 트인 해변 풍경도 놓치지 말 것. 썰물 때 펼쳐지는 갯벌이 광활하다. 태안의 해수욕장은 8월 16일까지 개장한다.

전남 신안 증도 우전해수욕장은 서해에서 에메랄드빛 바다와 하얀 백사장이 어우러진 해변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해변에 짚으로 만든 파라솔이 줄지어 서 있어 이국적인 풍경이 연출된다. 짱뚱어해수욕장까지 이어지는 해변이 길고 한적해 여유롭게 쉬어갈 수 있다. 짱뚱어해수욕장 앞에는 짱뚱어다리가 서 있다. 짱뚱어를 비롯해 갯벌에 서식하는 다양한 생물들을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다. 짱둥어다리에서 바라보는 노을도 아름다워 노을 전망대로도 인기다. 8월 16일까지 개장한다.

-조선일보-

김기범 교수의 운을 부르는 풍수인테리어 기법

■ 김기범 교수의 운을 부르는 풍수인테리어 기법

■ 김기범 교수의 운을 부르는 풍수인테리어 기법

✔ 현관 풍수인테리어 기법 ⑬

건강과 안정을 부르는 풍수인테리어 기법으로는 녹색 계통의 인테리어 소품이나 물건을 너무 지나치지 않은 범위 내에서 활용하면 좋은 기운(氣運)이 상승 한다.

녹색은 안정과 건강을 관장하는 색으로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혈압을 안정시켜 주는 효과가 있으며, 사람의 병을 치료하는 병원 표지판이 녹색이며, 병원 실내 인테리어가 밝은 색 계통이나, 녹색 계열로 인테리어를 많이 하는 원인도 이와 같은 것이다.

고속도로 표지판을 보면 녹색 바탕에 흰색 글씨로 표시하고 있다. 자동차가 고속도로에서는

고속으로 달리므로, 운전자의 마음의 안정을 주는 녹색 표지판을 활용하고 있다.

시내 도로 표지판은 협력의 기(氣)를 높이는 청색 바탕에 흰색 글씨 표지판이다.

현관 풍수인테리어 소품이나 물건으로 관엽식물, 녹색 숲 그림, 초록색 매트, 등이 좋으며, 또한 나무 향이 나는 아로마 향초 등도 건강 운(運)을 높이는데 좋은 효과가 있다.

♣ IFSA 국제풍수협회 선정 2018 대한민국 최고 풍수인테리어 전문가

♣ 문의 : 010-2432-5522, http://cafe.daum.net/kkb2005

◇ 미륵사지 석탑, 어둠이 내리면 1400년 전 백제의 밤이 깨어난다

◇ 미륵사지 석탑, 어둠이 내리면 1400년 전 백제의 밤이 깨어난다

◇ 미륵사지 석탑, 어둠이 내리면 1400년 전 백제의 밤이 깨어난다

"백제 무왕이 이 풍경을 봤으면 무덤에서 일어났을 겁니다." 지난 4일 오후 8시 이제 전북 익산 미륵사지(규모 1296만㎡)에 어둠이 내리면서 경관 조명이 하나둘 켜졌다. 미륵사지석탑(국보 11호)을 비추는 노란 조명 30여 개가 일제히 켜지자 관광객들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미륵사지석탑은 백제 무왕(재위 600~641)대에 지어졌다. 현존하는 최고(最古)·최대(最大) 석탑이다. 석탑 곁을 지키는 높이 3.95m의 당간지주(보물 236호)도 불기둥이 솟아 오르는 듯한 모습을 뽐내며 미륵사지의 밤을 화려하게 수놓았다.

익산의 대표 유적인 미륵사지석탑은 1915년 붕괴한 부분을 콘크리트로 땜질하고 나서 80년 동안 사실상 방치돼 있었다. 화강암으로 만든 탑과 콘크리트의 불편한 동거에 관광객들도 발길을 돌렸다. 지난 1992년 복원된 미륵사지동탑마저 부실 복원 논란에 휩싸이면서 미륵사지는 명성을 점점 잃어갔다.

문화재청은 지난 1999년부터 미륵사지석탑을 해체하고 보수를 시작했다. 해체 작업 10년 만에 역사학계를 깜짝 놀라게 한 사건이 일어났다. 탑을 만들 때 안치했던 사리장엄구(보물 1991호) 등 1만점에 가까운 유물이 나왔다. 국보급 유적이 쏟아져 나오자 익산시와 전북도는 미륵사지를 체계적인 관광지로 개발해 지역 경제를 살리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지난 201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 목록에 미륵사지를 올렸다. 마침내 지난 201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미륵사지석탑 보수 작업은 지난해 6월 마무리됐다. 보수를 마친 석탑은 높이 14.5m, 너비 12.5m에 무게는 약 1830t에 달했다. 20년 만에 웅장한 모습을 드러낸 미륵사지석탑을 보기 위해 관광객이 몰렸다.

미륵사지 등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할 국립익산박물관도 지난 1월 10일 문을 열었다. 미륵사지 바로 옆에 연면적 7500㎡, 전시실 면적 2100㎡ 규모로 지어졌다. 주변 경관을 해치지 않도록 지하 2층, 지상 1층으로 건립한 유적 밀착형 박물관이다. 미륵사지 유물 2만3000여 점과 전북 서북부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 3만점을 소장하고 있다. 국립익산박물관은 개관 한 달 만에 26만8495명이 다녀갔다. 작년 동월 대비 20배가 넘는다. 조계남 익산시 홍보담당관은 "백제 유산 관광 산업을 통해 앞으로 5년 동안 5000억원의 경제적 파급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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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지와 국립익산박물관이 위용을 갖추자 익산시는 백제고도 익산, 관광도시 익산을 선포하고 관광산업 육성에 나섰다. 미륵사지와 백제왕궁, 무왕릉 등 핵심 유적 6곳에 예산 3600억원을 투입한다. 미륵사지와 왕궁리 유적에 석탑을 제외하면 옛 건축물이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을 고려해 가상현실과 증강현실, 홀로그램 등을 활용한 콘텐츠를 만들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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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번문욕례繁文縟禮 - 번거롭고 까다로운 규칙과 예절

번문욕례繁文縟禮 - 번거롭고 까다로운 규칙과 예절

번문욕례(繁文縟禮) - 번거롭고 까다로운 규칙과 예절

번성할 번(糸/11) 글월 문(文/0) 화문놓을 욕(糸/10) 예도 례(示/13)

복잡한 사회생활을 해 나가는 사람들은 다른 일이 닥쳤을 때 간단하게 이해하는 것을 바란다. 그렇지 않아도 머리 아픈 일이 많은데 크게 중요하지 않은 일에는 무시하거나 대충 처리한다. 서양 철인 세네카는 단순함의 중요성을 말했다. ‘모든 기교적인 것, 주의를 끄는 것은 피해야 한다. 단순만큼 사람으로 하여금 친근하게 하는 것은 따로 없다.’ 또 있다. ‘참으로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은 누구나 항상 단순하다. 왜냐하면 쓸데없는 일을 할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다.

단순함을 찾는 사람에게 생각도 그러한데 번거롭고 까다로운 규칙(繁文)과 꾸미기만 한 듯이 세세하게 보이는 예절(縟禮)은 더 거리감을 느낀다. 번잡스런 煩文(번문)이라 해도 같고 줄여서 繁縟(번욕). 繁忙(번망)으로도 쓴다. 금침이나 자리에 꽃무늬 놓는 것이 縟(욕)인데 역시 번잡하다.

꼭 이 말이 어디에서 처음 사용되었는지 분명하지 않으나 중국 西周(서주)시대 왕의 직계 혈통과 동맹관계에 있던 제후 사이의 호혜적인 관계에 근거하여 복잡한 규정이 있었다고 본다. ‘史記(사기)’ 魯周公(노주공) 세가에 예가 있다. 주공의 아들 伯禽(백금)이 魯(노)땅의 봉토를 받은 지 삼년 만에 상황을 보고했다. 姜太公(강태공)은 齊(제)에 간 지 다섯 달 만에 보고했다. 주공은 정치가 쉽고 백성들에게 친근해야 따르게 된다며 앞으로 노나라가 제나라를 섬기게 될 것이라고 한탄했다.

우리나라에서 이 말은 상례나 제례 등의 규정에 대해 ‘허례다, 지켜야 한다’며 논쟁을 해 온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또 절차, 양식 등을 요구하는 관청에서의 사무가 형식적이고 너무 까다롭다고 말할 때 많이 쓴다. 민원인의 입장에선 전혀 필요하지 않을듯한데 요구하여 비용을 낭비하고 부패가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일을 처리하는 사람의 입장에선 근거가 있어야 하고 책임질 일이 있을 때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치는 간단하고 쉽게 행해지지 않으면 국민들이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다. 漢高祖(한고조)가 통일한 뒤 約法三章(약법삼장)으로 민심을 잡았다. 법이 성기면 큰 죄를 지은 사람이 빠져나갈 구멍이 많다며 조밀하게 규정하면 되레 피라미들만 생활하기 불편해진다. 도덕으로 충분히 규제할 수도 있는 것을 제정했다가 유명무실한 법은 또 얼마나 많을까. / 제공 : 안병화(前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살처구장殺妻求將 – 부인을 죽여 장군이 되다, 목표를 위해 수단 방법을 안 가리다.

살처구장殺妻求將 – 부인을 죽여 장군이 되다, 목표를 위해 수단 방법을 안 가리다.

살처구장(殺妻求將) – 부인을 죽여 장군이 되다, 목표를 위해 수단 방법을 안 가리다.

죽일 살(殳/7) 아내 처(女/5) 구할 구(氺/2) 장수 장(寸/8)

큰일을 성취하려면 다른 일을 생각지 말아야 한다. 큰일만이 아니라 자신이 처음 결심한 일을 해나갈 때도 잡념에 마음이 끌리지 않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百濟(백제) 말기의 階伯(계백) 장군은 羅唐(나당) 연합군을 물리치기 위해 황산벌로 출전할 때 처자를 죽였다. 5000의 군사로 5만 대군을 막기 위해 나서면서 나라를 보전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적의 노비가 되는 것보다 낫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오늘날 생각하면 가혹한 처사임이 분명하지만 자신의 영달을 위한 것이 아니었음도 명백하다.

듣기만 해도 끔찍하게 부인을 죽여(殺妻) 장군 자리를 구한다(求將)는 이 말은 명성이나 이익을 얻기 위하여 잔인한 수단도 망설이지 않는 것을 비유한다. 吳子(오자)라는 병서의 원저자로 보는 吳起(오기)의 이야기에서 나왔다. 싸움터에서 부하의 상처에 난 종기에 고름까지 빨아주는 장수, 吮疽之仁(연저지인, 吮은 빨 연)의 그 사람인데 참으로 집념이 무섭다. 春秋時代(춘추시대) 衛(위)나라 사람으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재산을 탕진했다. 자신을 비웃는 자들을 30명이나 죽이고 도망하면서 어머니께 출세하기 전에는 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魯(노)나라에 가서 曾子(증자)에게 배우고도 어머니 초상 때 가지 않았다고 배척당했다.

그 즈음 齊(제)나라의 대부가 열심히 하는 오기의 모습을 보고 큰 인물이 될 것이라며 딸과 결혼을 시켰다. 제나라가 침입하자 병법에 능한 오기를 노나라 장군으로 기용하려 했지만 부인의 출신이 문제가 되었다. ‘오기는 공명심에 불탄 나머지 자기 아내를 죽여 제나라와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吳起于是欲就名 遂殺其妻 以明不與齊也/ 오기우시욕취명 수살기처 이명불여제야).’ ‘史記(사기)’ 손자 오기열전에 실려 있다.

어떤 일을 이루려면 결심을 이어가야 하는데 쉽지 않아 作心三日(작심삼일)이 많다. 꼭 해야 할 일이라면 ‘나중에야 삼수갑산을 갈지라도’ 끝장을 내는 의지가 필요하다. 그런데 자기만 옳고 나머지에 피해를 끼친다면 큰일을 이루고도 지탄을 받을 것이다. 야심을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 / 제공 : 안병화(前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명주암투明珠暗投 - 구슬을 어둠 속으로 던지다, 가치를 모르고 썩히다.

명주암투明珠暗投 - 구슬을 어둠 속으로 던지다, 가치를 모르고 썩히다.

명주암투(明珠暗投) - 구슬을 어둠 속으로 던지다, 가치를 모르고 썩히다.

밝을 명(曰/4) 구슬 주(玉/6) 어두울 암(日/9) 던질 투(扌/4)

선물을 주고받을 때 정성이 깃들어 있지 않거나 예의에 어긋나면 주고도 좋은 소리 못 듣는다. 복숭아를 선물로 주고 자두로 답례한다는 投桃報李(투도보리)란 말이 있다. 격식에 맞게 선물해야 한다는 뜻이다. 또 귀한 선물이라도 그것을 알아보는 눈이 있어야 값을 안다. 빛이 곱고 귀중한 야광주(明珠)를 어둠 속으로 던진다는(暗投) 이 말은 선물을 주고도 알아보지 못할 때 줬기에 예에 어긋난 것으로 원망을 산다는 뜻이다. 번쩍이는 구슬이라도 가치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소용이 없듯이 재능을 가진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는 윗사람 때문에 썩히고 있다는 뜻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 성어는 ‘史記(사기)’의 雛陽(추양) 열전에서 유래했다. 前漢(전한)의 6대왕 景帝(경제)의 동생 孝王(효왕)을 모셨던 문객이 추양이다. 효왕은 태자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을 때 내심 속셈을 갖고 여러 저명인사와 교제해 인맥을 두텁게 하려 했다. 효왕은 여러 명사들을 초청하여 주연을 베푸는 등 환대했는데 문장에 능했던 추양도 포함됐다. 하지만 효왕은 현자를 존중하고 있다는 명성을 얻기 위해서일 뿐 추양을 깊이 신임하지는 않았다. 효왕은 측근 羊勝(양승) 등이 추양을 모함하자 감옥에 가두고 처형하려 했다.

추양은 이름을 더럽힐 수 없다며 옥 안에서 효왕에게 글을 올렸다. 獄中上梁王書(옥중상양왕서)로 이름난 글이다. 효왕이 梁(양)지역을 다스렸기 때문에 양효왕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그는 진실된 사람은 의심을 받지 않는다고 알았는데 옛날 보옥을 바쳤던 卞和(변화)나 나라에 충성을 바쳤던 李斯(이사) 등이 중벌을 받는 것을 보니 빈말이었다며 이어진다. ‘어두운 길을 걸어가는 사람에게 명월주와 야광벽을 던지면 칼을 잡고 노려보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明月之珠 夜光之璧 以闇投人於道路 人無不按劍相眄者/ 명월지주 야광지벽 이암투인어도로 인무불안검상면자).’ 眄은 곁눈질할 면.

알아보기 어려울 때는 보석이라도 좋아할 리 없다. 반대로 어리석고 깨어있지 못하다면 보물을 가질 자격이 없다. 아래에서 아무리 훌륭한 의견을 내어도 명주임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묻혀있을 수밖에 없다. 다행히 깊은 뜻을 깨달은 효왕은 추양을 풀어주고 상객으로 삼았다. 번득이는 재주를 가진 인재는 곳곳에 묻혀 있다. 인사를 할 때마다 잡음이 나오는 것은 알아보는 눈이 없기 때문이다. / 제공 : 안병화(前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관즉득중寬則得衆 - 마음이 너그러우면 많은 사람을 얻는다.

관즉득중寬則得衆 - 마음이 너그러우면 많은 사람을 얻는다.

관즉득중(寬則得衆) - 마음이 너그러우면 많은 사람을 얻는다.

너그러울 관(宀/12) 곧 즉(刂/7) 얻을 득(彳/8) 무리 중(血/6)

남을 사랑하고 어질게 행동하는 仁(인)은 본래 등에 짐을 진 사람을 의미했다고 한다. 孔子(공자)가 처음으로 강조한 인은 孝悌(효제) 즉 혈연적인 사랑을 널리 퍼뜨려 나라까지 평화롭게 할 수 있다고 했다. 후일 孟子(맹자)가 완성시킨 五常(오상)도 인이 중심이 돼 仁義禮智信(인의예지신)으로 되었고 유교에서 가장 중심덕목으로 자리하고 있다.

너그러운 마음씨를 가지면(寬則) 많은 사람을 얻을 수 있다(得衆)는 이 말도 공자가 인에 대해서 설명할 때 나온다. 많은 사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물론 많은 사람의 사랑과 애정을 받는다는 뜻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2014년 리더십의 덕목을 말하는 신년휘호로 이 성어를 선정한 이후 잘 알려졌다.

‘論語(논어)’의 陽貨(양화)편에 등장하는 공자와 제자 子張(자장)의 문답을 보자. 자장은 字(자)이고 이름이 顓孫師(전손사, 顓은 오로지 전)인 陳(진)나라 출신이다. 인에 대해서 여쭙자 공자가 ‘하늘 아래에서 다섯 가지 덕목을 실천할 수 있다면 사람답다(能行五者於天下 爲仁矣/ 능행오자어천하 위인의)’고 한다. 다시 그 내용을 자세히 알려달라고 하여 대답한다. ‘다섯 가지는 공손함, 너그러움, 미더움, 민첩함, 은혜로움이다.

공손하면 업신여김을 받지 않고, 너그러우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얻으며, 믿음이 있으면 사람들이 신임하게 되고, 민첩하면 기회가 올 때 공적을 세울 수 있고, 은혜로우면 사람들을 부릴 수 있게 된다(恭 寬 信 敏 惠, 恭則不侮 寬則得衆 信則人任焉 敏則有功 惠則足以使人/ 공 관 신 민 혜, 공즉불모 관즉득중 신즉인임언 민즉유공 혜즉족이사인).’ 이 덕목들은 인을 실천할 때 필요한 것인데 공손, 관대, 은혜로움은 특히 사람과의 관계를 강조한 것이다. 남을 이끌어 가는 지도자가 지녀야 하는 필수 덕목이기도 하다.

우리의 지도자들, 이러한 덕목을 잘 지니고 있을까. 대기업은 많이 가진 자가 더 욕심 부리고, 항상 시끄러운 정치판에서는 거론하기조차 부끄럽다. / 제공 : 안병화(前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주마간화走馬看花 – 말을 타고 달리며 꽃을 구경하다, 대충 보고 지나가다.

주마간화走馬看花 – 말을 타고 달리며 꽃을 구경하다, 대충 보고 지나가다.

주마간화(走馬看花) – 말을 타고 달리며 꽃을 구경하다, 대충 보고 지나가다.

달릴 주(走/0) 말 마(馬/0) 볼 간(目/4) 꽃 화(艹/4)

온갖 생물이 흐드러진 萬化方暢(만화방창) 따뜻한 봄날에 느긋이 말 등에 올라타고 산천경개 구경한다고 하면 무엇이 느껴질까. 신선이 따로 없이 좋은 팔자라고 모두들 부러워할 것이다. 하지만 말을 타고 달리며(走馬) 꽃구경을 한다(看花)면 아름다운 꽃을 제대로 감상할 수는 없다. 흔히 走馬看山(주마간산)으로 잘 알려진 이 성어는 ‘수박 겉핥기’란 속담과 같이 자세히 관찰하지 않고 대충대충 훑고 지나간다는 뜻으로 굳어졌다. 처음 꽃으로 사용될 때는 일이 뜻대로 되어 마음이 즐겁다는 뜻이었는데 의미하는 바가 달라졌다.

중국 中唐期(중당기) 시인으로 유명한 孟郊(맹교, 751~814)는 韓愈(한유)와 가깝게 지내며 復古主義(복고주의)에 동조한 작품을 많이 썼다. 가정적으로 불우하여 청년 시절 청렴한 생활을 하면서 벼슬에는 전혀 뜻이 없이 시작에만 열중했다. 어머니의 권고에 못 이겨 41세가 되던 해 과거에 응시했지만 보기 좋게 낙방하고 주변에서 온갖 냉대를 다 받았다. 두 번째 도전에서도 낙방하고선 ‘두 번이나 서울 땅을 밟고서도 또 떨어져, 헛되이 눈물 머금고 꽃만 바라보네(兩度長安陌 空將淚見花/ 양도장안맥 공장루견화)’라며 피눈물을 흘렸다.

陌은 길 맥. 그러다 46세 때에 겨우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는데 세상인심이 급변했음을 실감했다. 맹교가 어느 술좌석에서 또 꽃을 등장시켜 각박한 민심을 풍자했다. ‘登科後(등과후)’란 시의 부분을 보자. ‘봄바람에 뜻을 얻어 세차게 말을 모니, 하루 만에 장안의 꽃을 다 보았네(春風得意馬蹄疾 一日看盡長安花/ 춘풍득의마제질 일일간진장안화).’ 말을 타고 달리며 장안의 꽃을 다 구경했다는 것은 하루 만에 좋은 것을 모두 맛보았다는 은유로 이전 낙방했을 때와 천양지차를 실감했다는 표현이다. 앞부분의 春風得意(춘풍득의)란 말도 벼슬을 얻게 된 기쁨을 표현하는 성어가 됐다.

다른 목적이 없이 관광을 할 때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구경하는 것이 더욱 흥이 난다. 하지만 학업이나 사업을 할 때는 목표가 있고 이익이 걸려 있어 대충하면 실패가 기다린다. 이것을 확연히 구분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으니 탈이다. / 제공 : 안병화(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