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7일 목요일

◇ 미국 사우스타코타주 러시모어산 석상

◇ 미국 사우스타코타주 러시모어산 석상

◇ 미국 사우스타코타주 러시모어산 석상

"

-워싱턴, 제퍼슨, 루스벨트, 링컨… 18m 크기의 큰바위 얼굴

",

"

미국 여권 안에는 네 명의 대통령상이 실려 있어요. 미국 중북부 사우스다코타주 러시모어산(Mount Rushmore)에 조각된 미국 전직 대통령 4인의 석상이지요. 석상을 정면으로 바라보면 왼쪽부터 조지 워싱턴(1대·1732~1799), 토머스 제퍼슨(3대·1743~1826), 시어도어 루스벨트(26대·1858~1919), 에이브러햄 링컨(16대·1809~1865)의 얼굴이 보여요. 워싱턴은 영국과의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뒤 오늘날 미국을 건국한 초대 대통령이고, 링컨은 흑인 노예 해방을 선언한 대통령으로 유명해요.

",

토머스 제퍼슨은 미국 역사상 최대 영토를 사들인 대통령이에요. 그는 1803년 캐나다 국경에서 미국 동남쪽 멕시코만(灣)에 이르는 광대한 중부 지역을 프랑스로부터 1500만달러에 사들였는데, 그 영토가 얼마나 컸던지 현재 미국 50주 중 15주가 당시 제퍼슨이 사들인 범위에 포함돼요. 212만㎢에 달하는 국토를 한꺼번에 확보한 덕에 훗날 그 후손들이 서부 태평양 연안까지 진출하는 초석이 되었으니 미국인들이 사랑할 만하죠.

"

그 옆에 새겨진 시어도어 루스벨트도 미국의 확장에 도움을 주었어요. 그는 1901년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미국이 대서양과 태평양을 모두 장악하려면 두 바다를 잇는 파나마운하를 건설하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죠. 파나마운하는 그가 퇴임한 뒤에야 완공되었지만, 그의 공헌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A man A plan A canal Panama(한 사람이 있었고, 하나의 계획이 있었고, 운하가 탄생했고, 그것은 파나마)란 유명 문구 속 A man이 루스벨트 대통령을 가리키는 것이라 생각하기도 해요. 참고로 이 영어 문장은 소주 만 병만 주소처럼 뒤에서 읽어도 똑같답니다.

",

해발 약 1750m에 달하는 러시모어산 정상 부근에 이토록 거대한 조각을 남긴 사람은 누구일까요? 미국의 조각가 거츤 보글럼(Borglum·1867~1941)입니다. 사우스다코타주로부터 작업 요청을 받고 적당한 공간을 물색하던 보글럼은 동남향이라 늘 햇볕이 잘 드는 러시모어산 암벽이 맘에 쏙 들었습니다. 작업은 1927년부터 1941년까지 14년간 작업자 약 400명이 참여하는 가운데 이뤄졌지요. 다이너마이트로 바위를 부순 뒤 얼굴 형상을 잡고 드릴과 정으로 세부 조각을 해나갔어요.

청년 시절 로댕에게서 조각을 배우기도 했던 그는 미국적 정신을 표현하는 대형 작품을 남기려고 했답니다. 흔히 규모가 크면 아름다움이 떨어진다고 말하는데, 얼굴 크기가 건물 6층 높이(18m)에 달하는 데도 불구하고 매우 섬세합니다. 특히 눈동자의 검은자위는 음각으로 그늘지게 하고, 그 안의 수직 기둥을 새겨 마치 동공에 맺힌 빛처럼 하얗게 보이게 한 효과는 백미예요.

보글럼은 공사 기간 자금난, 인력난, 여론의 비난 등 숱한 악재를 겪었지만 공사를 멈추지 않았어요. 당시 그는 "얼굴은 이미 산에 있다. 내가 할 일은 그것이 드러나게 하는 것뿐"이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안타깝게도 보글럼은 1941년 3월 완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고, 곁에서 조각을 돕던 아들 링컨 보글럼이 작업을 이어받아 그해 10월 완성했어요.

"

최근 러시모어산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독립기념일에 연설을 하면서 다시 주목받았어요. 이곳은 원래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땅이었고, 1980년 미국 대법원이 미국 정부는 원주민들에게 보상금을 지불해야 한다고 판결했던 역사적 장소이기도 해요. 이곳에서 우리는 오늘날 미국을 만든 네 사람의 커다란 얼굴과 한 사람의 집념을 만날 수 있습니다.

",

-조선일보-

あたたかい暖かい·温かい

あたたかい暖かい·温かい

あたたかい暖かい·温かい

=> 따뜻하다, 온도가 차지 않다, 포근하다;훈훈하다

◇ 대매물도 장군봉 서면 점묘화처럼 펼쳐지는 한려해상 파노라마!

◇ 대매물도 장군봉 서면 점묘화처럼 펼쳐지는 한려해상 파노라마!

◇ 대매물도 장군봉 서면 점묘화처럼 펼쳐지는 한려해상 파노라마!

"

소매물도는 1986년 크라운제과 쿠크다스의 CF 배경으로 나오면서 유명세를 탔다. 쿠크다스섬이란 별명도 그 때문에 생겼다. 2007년 문체부의 가고 싶은 섬으로 뽑혔고, 각종 TV 프로그램에 등장, 관광객들로 북적이게 됐다. 특히 하루 두 번 바다 갈라짐 현상으로 길이 열리는 소매물도 옆 등대섬 풍광이 아름다워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됐다.

",

반면 대매물도는 번잡하지 않아 오래 머물고 싶은 섬이다. 요즘 같은 언택트 시대에 안성맞춤이다. 간혹 백패커나 걷기길을 찾는 사람들만 드문드문 보인다. 매물도는 옛날 섬에서 메밀이 많이 생산되었기에 붙은 이름이다. 메밀을 경상도에서는 매물이라 한다.

행정구역상 통영에 속하지만 실제로는 거제도와 가깝다. 그래서 한려해상국립공원 거제지구로 지정돼 있으며, 거제 저구항에서 뱃길도 빠르고 배편도 많다.

"

대매물도는 장군봉 정상을 거치는 매물도 해품길을 따라 걷는 것이 효율적인 섬 여행법이다.

",

산행은 당금항에 내려면 바로 코스가 시작된다. 당금마을 부두~매죽보건진료소~매물도 발전소~70m봉(전망대)~옛 매물도 분교~파고라 쉼터~홍도 전망대~대항고개 갈림길~어유도 전망바위~장군봉 정상~등대섬 전망대~꼬돌개 오솔길~대항마을을 지나 당금마을로 되돌아오는 약 6.5㎞ 코스다. 3시간30분 정도 잡는다.

특히 70m봉에 오르면 전망대. 북쪽으로 어유도, 가왕도, 대·소병대도가 바다에 떠있고, 바다 건너는 거제의 해금강 일대와 망산, 가라산, 노자산이 펼쳐진다.

산행 중 만나는 2005년 폐교된 한산초등학교 매물도분교의 건물은 그대로이고, 운동장은 마을에서 야영장으로 운영하고 있다. 운동장 앞쪽 갯가에는 섬에서 유일한 해수욕장인 몽돌해변이다. 옛 매물도분교 운동장 귀퉁이 해품길 출입문을 통과한다. 섬의 동쪽으로 굽어지는 완만한 사면 길에 동백나무터널을 지난다. 산길은 방향을 틀어 침목 계단으로 오른다. 당금마을 전망대인 파고라 쉼터에선 숨을 고르며 지나온 풍경을 되돌아본다. 북쪽으로 한적한 당금마을과 바다 건너 거제도 남부면의 홍포, 여차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장군봉(255m) 정상은 이동통신사의 시설물로 복잡하다. 주변에는 일제강점기 일본군이 포진지로 구축한 동굴이 있다. 매물도 사람들은, 장군봉의 형상이 말에서 잠시 내려 쉬고 있는 장군을 닮았다고 한다. 군마상(軍馬像) 조형물과 정상석 옆의 전망데크에 서면 등대가 있는 소매물도가 눈앞에 보이고 뒤로 국도가 희미하다. 맑은 날 대마도까지 볼 수 있다는 이곳은 여름 철새인 섬휘파람새의 서식지이기도 하다.

한산은 소매물도를 바라보며 내려선다. 완만한 내리막길에 만나는 등대섬 전망대는 소매물도를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곳이다. 바다로 향해 내닫던 산길이 방향을 틀면 일몰이 매혹적인 꼬돌개 오솔길을 따라간다. ‘꼬돌개 사람들 이야기’, ‘옛 갱문의 이야기’ 등등 돌담에 걸린 목판의 글은 섬사람들의 팍팍했던 삶을 엿보게 한다. 중간 쉼터를 지나면 대항마을이다. 해품길은 대항마을 선착장에서 끝나지만 직진해 나지막한 고개를 넘으면 당금항에 닿는다. .

매물도로 가는 여객선은 통영과 거제 두 곳에서 다닌다. 통영↔대·소매물도의 경우, 통영항 여객선터미널(642-0116)에서 한솔해운(645-3717)의 선박이 1일 3회(06:50, 10:50, 14:30) 운항한다. 소요시간은 약 1시간 30분. 거제↔대·소매물도의 경우, 거제시 남부면 저구항에서 매물도해운(633-0051)의 선박이 1일 4회(08:30, 11:30, 13:00, 15:30) 운항하며 소요시간은 약 40분이다.

대매물도에는 식당이 따로 없어 민박집에서 식사를 같이 해결해야 한다. 당금마을에는 노을민박(646-3008), 동백민박(642-4963), 소라민박(643-4957), 하나펜션(642-9852), 매물도펜션(641-4783) 등이 있다. 옛 매물도분교 야영장을 이용하려면 구판장에 문의하면 된다.

-월간 산-

◇ 여전히 한국에는 인종차별이 남아있군. 미안하다 오취리군! 대신 사과할께.

◇ 여전히 한국에는 인종차별이 남아있군. 미안하다 오취리군! 대신 사과할께.

◇ 여전히 한국에는 인종차별이 남아있군. 미안하다 오취리군! 대신 사과할께.

▶ 인종차별 지적한 샘 오취리, 사과하게 만든 한국

가나 출신 방송인 샘 오취리가 학생들의 ‘흑인 분장’에 불쾌감을 드러냈다가 논란이 일자 공식 사과했다. 학생들이 재미로 찍은 사진까지 ‘인종차별’이라 비판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여론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취리의 사과는 한국 사회에 만연한 인종차별을 드러낸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지난 3일 ‘관짝소년단’을 패러디한 의정부고 학생들의 졸업사진이 올라오며 논란이 시작됐다. 관짝소년단은 가나의 장례식장에서 관을 옮기는 상여꾼들이 춤을 추는 영상이다. 학생들은 흑인인 상여꾼들을 모방하며 얼굴에 검은 칠을 했다. 오취리는 지난 6일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흑인들 입장에선 매우 불쾌한 행동”이라고 썼다.

그러자 오취리의 인스타그램에는 그를 비난하는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누리꾼들은 ‘흑인 피부색이 검어서 검게 칠한 것뿐인데 별게 다 불편하다’ ‘다른 나라 가면 공장에서 돈이나 벌지 모르지만 한국 와서 좀 뜨니 훈계질을 하고 있다’ 등 댓글을 달았다.

누리꾼들은 오취리가 학생들의 얼굴을 모자이크 없이 올린 점, 과거 방송에서 동양인 비하 행위를 연상케 하는 ‘눈찢기’를 했다는 점도 언급했다. 오취리는 결국 다음날인 7일 인스타그램에 “학생들을 비하하는 의도가 전혀 아니었다. 제 의견을 표현하려고 했는데 선을 넘었다”는 사과문을 올렸다.

블랙페이스에 대한 흑인들의 불쾌감엔 역사적 맥락이 있다. 19세기 중반 미국의 대중적 코미디공연 <민스트럴쇼>의 백인 진행자들은 얼굴에 검은 칠을 한 뒤 과장된 춤과 노래로 흑인 노예를 희화화했다. CNN은 지난해 기사 ‘블랙페이스는 왜 모욕인가’에서 블랙페이스가 “노예가 된 아프리카인들을 비하적인 농담 대상으로 만들고 흑인 비하적 고정관념을 조장했다”고 했다. 저스틴 트뤼도 캐나다 총리는 과거 한 행사에서 블랙페이스 분장을 한 사실이 밝혀져 사과했다.

전문가들은 오취리에 대한 공격이 인종차별에 대한 한국 사회의 낮은 인식을 드러낸다고 분석했다. 사회학자 오찬호씨는 “오취리가 한국인이 인정한 범위 안에서 행동할 때는 좋아하지만, 그러지 않을 때는 그를 비난하는 여론이 나온 배경엔 오취리에 대한 시혜적 시선이 있다”고 말했다. 손희정 평론가도 “설령 오취리가 과거 인종차별 발언을 했다고 해도 그건 오취리가 반성할 문제지 블랙페이스를 정당화하는 논리가 될 수 없다”고 말했다.

오취리의 사과 이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나는_샘_오취리와_연대합니다’ 해시태그가 등장했다. 한 누리꾼은 이 해시태그를 공유하며 “명백한 잘못에 대한 지적조차 거꾸로 사과해야 하는 현실이 우리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한국의 부끄러운 모습”이라고 적었다.

-경향신문-

あずける預ける

あずける預ける

あずける預ける

=> 맡기다

◇ 홍수로 우사 탈출한 소, 천년고찰 사성암으로 간 이유는?

◇ 홍수로 우사 탈출한 소, 천년고찰 사성암으로 간 이유는?

◇ 홍수로 우사 탈출한 소, 천년고찰 사성암으로 간 이유는?

사람만 나라를 탈출하는 게 아니다. 물론 타의지만, 때론 소도 ‘망명’한다. 1996년 7월 대홍수 때 북한의 소가 임진강을 타고 한강 하류로 내려왔다. 당연히 소의 ‘탈북’이 관심거리이겠지만, 소의 수영실력(사진 위)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소가 떠내려온 곳이 북한의 군사작전지역 후방에 위치한 민가일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소의 수영거리는 수십 ㎞로 추산된다. 그렇게 먼 거리를 헤엄칠 수 있는 건 물을 이용하는 소의 탁월한 능력 때문이다.

말은 물을 거슬러 헤엄치려는 습성이 있어 홍수가 나면 지쳐서 죽지만, 소는 물살에 몸을 맡긴 채 흐름을 타는 까닭에 산다고 한다.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것인데, ‘우생마사(牛生馬死)’의 지혜를 일깨운다.

소의 그런 ‘도력(道力)’은 최근 물난리에서도 볼 수 있었다. 300㎜가 넘는 폭우로 섬진강이 범람해 전남 구례의 많은 지역이 물에 잠긴 지난 8일, 우사를 탈출한 소 10여 마리가 이곳 고찰인 사성암(四聖庵)으로 도피했다(사진 아래).

백제 성왕 때 연기조사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사성암은 원효·의상·도선·진각 등 신라·고려시대의 고승들이 수도한 곳이라 예사롭지 않다. 해발 531m의 오산(鰲山) 정상 아래 자리한 사성암에 오르면, 천왕봉에서 노고단까지 지리산의 장쾌한 전모가 병풍처럼 펼쳐지고 남도의 속살을 적시는 섬진강의 유장한 물굽이가 한눈에 들어온다. 사성암의 이런 내력과 절경이 소들을 이끈 것인지도 모르겠다.

소들의 사성암 방문은 중국 송나라 때 곽암이 그린 십우도(十牛圖)를 연상케 한다. 십우도는 선 수행과 깨달음의 단계를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10개의 그림이다. 이 그림에서 주체는 동자승이다. 피부가 검은 색에서 흰 색으로 바뀌다가 마침내 형체마저 사라지는 소는 해탈의 과정을 상징하는 대상일 뿐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소가 스스로 수행 도량에 찾아갔으니, 사람뿐 아니라 소를 비롯한 만물에 불성(佛性)이 깃들어 있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전국을 수마에 빠뜨린 올해 장마는 과거 어느 때보다 시련이 컸다. 그 와중에 경남 합천에서 익사 직전의 소 110여 마리를 구출하는 등 사람과 소의 오랜 인연을 확인한 건 불행 중 다행이다. 선인들이 소를 생구(生口·사람대접할 만큼 존중한다는 뜻)라고 부른 이유다. 소는 이에 매사에 신중하라는 ‘호시우보(虎視牛步)’, 매사를 우직하게 실천하라는 ‘우보만리(牛步萬里)’ 등 교훈으로 사람에게 보답한다. 사람과 소의 아름다운 공존이다.

"

-국제신문 도청도설-

"

감배하풍甘拜下風 - 바람 불어가는 쪽으로 절을 하다, 스스로 몸을 낮추다.

감배하풍甘拜下風 - 바람 불어가는 쪽으로 절을 하다, 스스로 몸을 낮추다.

감배하풍(甘拜下風) - 바람 불어가는 쪽으로 절을 하다, 스스로 몸을 낮추다.

달 감(甘/0) 절 배(手/5) 아래 하(一/2) 바람 풍(風/0)

사람이나 사물의 질이 낮은 것을 일러 下風(하풍)이라 한다. 사전에는 이 뜻 밖에 없지만 바람이 불어가는 쪽이란 의미로 사용된 곳이 많다. 孫子兵法(손자병법)에 나오는 전술에 따른 火攻(화공)의 다섯 가지 원칙 중에는 이런 말이 있다. ‘화공은 바람이 위를 향할 때 실시하고, 바람이 아래로 향할 때는 공격하지 않는다(火發上風 無攻下風/ 화발상풍 무공하풍).’ 바람이 불어가는 쪽은 말소리가 잘 들리는 곳으로 민의가 향하는 곳이기도 하다. 바람이 불어가는 쪽을 향하여 기꺼이 머리 조아려 절을 한다(甘拜)는 것은 대의를 좇아 자신을 낮춘다는 뜻이다. 바람과 맞서 싸울 때는 逆風(역풍)을 맞는다.

孔子(공자)의 春秋(춘추)를 해석한 三傳(삼전) 중에서 가장 평가받는 左丘明(좌구명)의 ‘左氏傳(좌씨전)’에 관련 이야기가 실려 있다. 晉(진)의 獻公(헌공) 말년에 맞은 계비 驪姬(여희, 驪는 검은말 려)의 음모로 태자가 자살하고, 두 왕자 重耳(중이)와 夷吾(이오)는 쫓겨났다. 헌공이 죽자 중신과 이웃 秦(진)나라의 도움으로 막내 이오가 먼저 왕위에 올라 惠公(혜공)이 되었다. 그런데 혜공은 은혜를 모르는 용렬한 군주였다. 秦穆公(진목공)이 왕위에 오르도록 도움을 줬고, 흉년이 들었을 때 양곡을 보내준 호의를 무시하여 보복을 부른 것이다.

秦(진)나라가 기근이 들었을 때 晉(진)에게 양곡을 보내주도록 요청하자 혜공은 대부 慶鄭(경정)의 간언에도 불구하고 거절했다. 분노한 목공이 전투를 벌여 韓原(한원) 땅에서 진창에 빠진 혜공을 사로잡았다. 포로로 끌려가는 혜공을 따라 대부들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함께 했다. 목공이 배은망덕한 혜공 외에 그대들까지 포로로 할 수 없다고 하자 대부들은 머리를 조아린다. ‘하늘과 땅도 진실로 군주의 말씀을 들었으며 우리들 모두 부족함을 인정합니다(實聞君之言 群臣敢在下風/ 실문군지언 군신감재하풍).’ 이후 淸(청)나라의 소설에서 甘拜(감배)로 바뀌어 사용된 것이 나타난다.

사람은 모두가 자신이 모자라는 것을 모르고 제일인 줄 우쭐댄다. 특히 남보다 우월하다는 지도자란 사람들은 더하다. 고위 공직자들은 국민들이 자신들을 위해 있는 줄 안다. 선출직들은 선거 때에는 허리가 꺾일 듯이 유권자에게 몸을 굽히다가도 끝나면 언제 그랬느냐 하며 뻣뻣하다. 하풍을 따라 겸손을 모르다가는 태풍이 닥치듯 뒤집어진다. / 제공 : 안병화(前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묘항현령猫項懸鈴 -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 실행하지 못할 공론

묘항현령猫項懸鈴 -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 실행하지 못할 공론

묘항현령(猫項懸鈴) -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 실행하지 못할 공론

고양이 묘(犭/9) 항목 항(頁/3) 달 현(心/16) 방울 령(金/5)

고양이는 귀엽고 영리하게 생겼다. 伴侶(반려)동물 중에서도 개 다음으로 인기가 높아 전 세계에서 2억 마리가 사육된다고 한다. 고양이를 죽이거나 소중히 다루지 않으면 불행이 찾아온다는 민화는 각국에서 전해온다. 고양이가 사람에게 가장 도움을 주는 것은 주변에 쥐를 얼씬하지 못하게 하는 점이다. 다 함께 사람 주변에 살지만 음식을 훔치고 병균을 옮기는 쥐를 쥐죽은 듯 고요하게 하는 능력을 지녔다. 그래도 사람들은 그 덕을 잊고 살아 ‘고양이 덕과 며느리 덕은 알지 못한다’는 말이 남았다.

무서운 사람 앞에서 설설 기면서 꼼짝 못한다는 비유로 ‘쥐가 고양이를 만난 격’이란 속담을 쓴다. 쥐들은 사람들은 문제없이 눈을 피하며 먹을 것을 조달할 수 있는데 고양이는 발걸음 소리만 들어도 오그라든다. 쥐들은 어느 날 모두 모여 대책회의를 했다. ‘곳집을 뚫고 쌀광 속에 들어가 살면 기름지게 살 수 있을 텐데 단지 고양이 때문에 두렵다(穿庾捿廩 生活可潤 但所怕 獨猫而已/ 천유서름 생활가윤 단소파 독묘이이)’며 이래서야 되겠는가 하고 울분을 토했다. 捿는 棲(서)와 같이 깃들일 서, 庾(유)와 廩(름)은 모두 곳집, 물건을 보관하던 창고다. 怕는 두려워할 파.

한 마리 쥐가 나서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면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말하자 모두 좋은 의견이라며 박수를 쳤다. 어른 쥐가 점잖게 말했다. ‘옳은 이야기이나 누가 우리를 위해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겠느냐(是則是矣 然猫項 誰能爲我懸鈴耶/ 시즉시의 연묘항 수능위아현령야)?’ 모든 쥐들이 입을 다물고 말았다.

조선 중기 宋世琳(송세림)이 편찬한 한문 소화집 ‘禦眠楯(어면순)’에 실린 이야기다. ‘잠을 쫓는 방패’라는 뜻으로 육담도 많이 있어 古今笑叢(고금소총)을 이루는 책이기도 하다.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란 속담을 번역하여 旬五志(순오지)와 松南雜識(송남잡지) 등에도 나온다. 猫頭懸鈴(묘두현령)이라고도 한다. / 제공 : 안병화(前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각의교혁刻意矯革 - 굳은 의지로 고치려 노력하다.

각의교혁刻意矯革 - 굳은 의지로 고치려 노력하다.

각의교혁(刻意矯革) - 굳은 의지로 고치려 노력하다.

새길 각(刂/6) 뜻 의(心/9) 바로잡을 교(矢/12) 가죽 혁(革/0)

성품과 행실이 높고 맑으며, 탐욕이 없는 것이 淸廉(청렴)이라고 쉽게 말한다. 주변에 그러한 사람들이, 특히 공직자가 많을 것이라 쉽게 믿는다. 이들 중 하늘과 신과 나와 그대가 안다며 황금을 거절한 楊震(양진)과 뇌물로 가져온 물고기를 매달아놓은 羊續(양속)이 유명하고, 백성의 생활에 피해를 준다며 아욱을 뽑고 베틀을 버리기까지 한 公儀休(공의휴)가 압권이다. 성어가 된 중국의 청렴관리는 이처럼 손에 꼽을 정도이다. 우리나라에선 어떨까? 조선시대에 淸白吏(청백리)는 217명이 배출되었다는데 그 전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졌다고 믿는 사람은 드물다.

‘청렴이라고 하는 것은 목민관의 기본 임무이고, 모든 선의 근원이며, 모든 덕의 근원이니 청렴하지 않고서 목민관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아직 없었다(廉者 牧之本務 萬善之源 諸德之根 不廉而能牧者 未之有也/ 염자 목지본무 만선지원 제덕지근 불렴이능목자 미지유야).’ 茶山(다산) 선생의 ‘牧民心書(목민심서)’ 중 律己(율기) 편 淸心(청심)조의 첫 대목이다. 백성을 다스릴 벼슬아치 牧民(목민)이 지켜야 할 도리와 지방관의 폐해를 들어 깨우치는 내용으로 시대를 넘어 공직자의 필독서로 꼽히기도 하는 책이다. 같은 조의 중간에 굳은 의지(刻意)를 가지고 고쳐 나가라(矯革)는 말은 잘못된 관례라도 공직자는 고쳐야 한다는 뜻이다.

성어가 나오는 부분을 인용해 보자. ‘무릇 그릇된 관례가 내려오는 것은 굳은 의지로 이를 고쳐 나아가되, 간혹 고치기 어려운 것이 있거든 나 하나만이라도 범하지 말아야 한다(凡謬例之沿襲者 刻意矯革 或其難革者 我則勿犯/ 범유례지연습자 각의교혁 혹기난혁자 아즉물범).’ 沿襲(연습)은 전례를 답습하거나 이어받는 일이고 刻意(각의)는 마음을 졸인다는 뜻이지만 굳은 의지로 해석한다. 공무원들이 손쉽게 관행이라며 이어져 온 비리를 벌써부터 근절하라고 가르쳤다. / 제공 : 안병화(前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민위방본民爲邦本 -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다.

민위방본民爲邦本 -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다.

민위방본(民爲邦本) -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다.

백성 민(氏/1) 하 위(爪/8) 나라 방(阝/4) 근본 본(木/1)

‘민심은 천심’이라는 말이 있다. 백성의 마음이 곧 하늘의 마음이라는 것은 민심을 얻지 않고서는 나라까지 모든 것이 바로 설 수 없다는 말이다. 나라님의 마음을 섬뜩하게 하는 ‘민심은 물과 같다’는 말도 백성의 뜻을 거스르면 물이 배를 뒤엎듯이 응징하기 때문이다. 孟子(맹자)가 민심의 중요성에 대해서 특히 강조한다. ‘걸왕과 주왕이 천하를 잃은 것은 그 백성을 잃었기 때문이며, 그 백성을 잃은 것은 그들의 마음을 잃었기 때문이다(桀紂之失天下也 失其民也 失其民者 失其心也/ 걸주지실천하야 실기민야 실기민자 실기심야).’ 그러면서 백성을 얻으려면 그들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고 했다. 離婁上(이루상) 편에 있다.

앞서 소개한 民心無常(민심무상)은 백성들의 마음이 일정하지 않아 다스리는 데에 따라 착하게도 하고 무섭게도 변한다는 말이다. ‘오직 혜택을 주는 사람에게 따르기 마련(民心無常 惟惠之懷/ 민심무상 유혜지회)’이라고 書經(서경)에 실려 있다. 春秋(춘추) 이전의 역사와 문화를 담아 尙書(상서)라고도 하는 책이다. 백성(民爲)이 나라의 근본(邦本)이라는 이 성어도 ‘서경’ 夏書(하서)편에 나온다. 하나라의 두 번째 임금 啓(계)는 시조 禹(우)임금의 아들이고, 처음 세습으로 아들 太康(태강)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그런데 태강은 사냥에만 골몰하고 정치는 돌보지 않아 后羿(후예, 羿는 사람이름 예)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쫓겨났다.

태강의 다섯 동생들은 그를 기다리며 노래를 불렀다. ‘五子之歌(오자지가)’이다. 첫 번째 동생이 부른 내용을 보자. 할아버지 우임금이 훈계했다는 내용이다. ‘백성은 가까이 할 수는 있으나 얕보아서는 안 된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고, 근본이 튼튼해야 나라가 편안하다(民可近 不可下 民惟邦本 本固邦寧/ 민가근 불가하 민유방본 본고방녕).’ 끝부분에도 좋은 말이 나온다. ‘백성을 다스림에 있어 두려워하고, 썩은 새끼로 여섯 마리 말이 끄는 마차를 모는 듯이 한다. 백성의 위에 있는 자가 이런 마음을 가진다면 어찌 존경하지 않겠는가(予臨兆民 懍乎若朽索之馭六馬 爲人上者 柰何不敬/ 여림조민 능호약후삭지어륙마 위인상자 내하불경).’ 懍은 위태할 름.

이런 백성이 사직이나 군주보다 귀하다고 한 사람도 맹자다. ‘백성이 귀하고, 사직은 그 다음이며 임금은 가벼운 존재다(民爲貴 社稷次之 君爲輕/ 민위귀 사직차지 군위경)’란 말이 盡心(진심) 하편에 나온다. 군주가 없는 요즘은 선거 때 민심을 들먹인다. 국민의 마음이 어디 있는가를 아는 것이 물론 중요한데 문제는 투표가 끝나면 곧 잊어버린다는 데 있다. / 제공 : 안병화(前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