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4일 일요일

기상 후 물 한 잔의 중요성

기상 후 물 한 잔의 중요성

기상 후 물 한 잔의 중요성

아침 에 일어나서 제일 처음 하는 일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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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해지는 가장 쉬운 비결은 아침에 마시는 물 한잔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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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 물 한잔의 효과

1. 노화방지

노화를 촉진하는 몸 속의 나쁜 성분을 씻어내고, 피부 세포가 회복되는 효과가 있다.

2. 통증완화

복부근육 풀어주면서, 원활한 혈액순환으로 통증을 가라앉게 도움을 주는 효과가 있다.

3. 체중감량

아침에 마시는 물은 몸의 온도를 높여서 신진대사율도 높이게 되고, 결과적으로 열량을 더 태우는 효과가 있다.

4. 소화기능 의 개선

기상 후 따듯한 물 한잔은 수면시간동안 굳어있던 소화기관과 위장의 활동을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5. 변비예방

따듯한 물은 특히 배변 운동에 도움을 준다.

✔ 조심 할 것

일어나자마자 너무 차가운 물을 마시게 되면, 내장기관이 놀라 경련을 일으킬 수 있다. 그래서 꼭 따듯한 물을 마시는 것이 좋다.

✔꿀팁

자는 동안 입속 세균이 많아져 있기 때문에 기상 후에는 가글이나 양치를 하고 물을 마시면 더욱 좋다.

버릴 것 없는 시금치

버릴 것 없는 시금치

버릴 것 없는 시금치

시금치는 섬유질이 많아 변비 해소에 좋고, 루테인 성분도 많아 눈 건강에 좋은 음식이기도 하다.

그런데, 시금치는 수산이 많아서 칼슘과 같은 미네랄의 흡수를 방해하기 때문에

수산을 용해시킬수 있도록 뜨거운 물에 데쳐 먹는 것이 좋다.

그렇게 뜨거운물에 시금치를 데치고 나면 초록색 물이 남는다.

그 물은 시금치의 성분들이 녹아있는 물이라 여기저기 활용할 수 있다.

1. 기름때 청소

기름때로 더러워진 후라이팬, 후드, 가스레인지 청소에 이용하면 좋다.

깨끗해질 뿐만 아니라 반짝반짝 광택까지 낼 수 있다.

청소에 활용할 수 있는 이유는, 시금치의 카테킨 성분이 기름때를 분해하는데 도움을 주어 기름때 청소를 훨씬 쉽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천연세제인 베이킹 소다를 조금 첨가하면 더욱 좋다.

2. 행주 삶을 때

표백, 살균효과 가 있어서 행주를 삶을 때 이용하면 그 효과가 더욱 좋다.

더 간단하게는 시금치 데친물에 행주를 넣고 전자렌지에 돌려주면, 행주도 살균하고 전자렌지 청소까지 할 수 있다.

3. 세수할 때

시금치의 사포닌 성분이 독소배출에 도움을 주어 피부를 매끈하고 윤기있게 만들어준다고 한다.

특히 여드름 있는 피부에 좋아서 진정효과를 기대해 볼 수 있다.

추노推奴 2편

■ 추노推奴 2편

■ 추노(推奴) 2편

추노에 대한 기록은 숙종, 경종, 영조실록에 주로 기록되어 있다. 나라에서 기근이 들었을 때마다 금지하였지만 관리들이 이를 어기고 도적을 잡는다는 핑계로 사사로이 이들을 붙잡아서 사고 파는 행위로 돈을 벌었고, 이 과정에서 관리들끼리 결탁하여 노비가 아니라 민가의 백성들을 잡아가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한편, 조선 후기에 들어 돈이 궁해진 몰락양반이 과거 자신의 소유였던 외거노비로부터 몸 삯을 받으러 몇 십 년 전의 호적이나 노비매매문서 하나 달랑 들고 추쇄에 나서기도 하였다. 노비 입장에서는 당연히 나는 노비 아니라고 잡아떼기 마련인데, 명확한 증거가 없어서 송사가 질질 끌기 십상이라 관가에서는 싫어했다고 한다. 노비에게 돈을 받으러 다닐 정도인 양반의 경제력과 사회적 영향력은 노비만도 못한 경우가 많아서 이를 이용한 노비 쪽에서 뇌물로 관리를 매수하거나 양반을 몰래 죽여 버리는 일도 있었다.

조선의 계급 체계는 모순 그 자체였다. 양민에서 노비가 되거나, 양반에서 노비로 전락할 순 있어도 노비가 그 신분을 벗어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조선 사회에서 노비를 벗어날 길은 도망이나 죽음뿐이었다. 모순된 계급 사회에서 필요에 의해 탄생한 추노꾼은 조선의 어두운 사회상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존재였다.

추노를 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주인이 노비가 있는 지역에 가 집에 있는 호적의 내용을 바탕으로 관에 소지(민원서류)를 작성해서 당사자를 불러온 뒤, 추궁해서 사실이면 다시 잡아가는 형태였다. 지방관청 공문서가 왜란, 호란, 일제강점기, 산업화 시대를 거치며 죄다 소실되어버려 관청의 노비 관리나 추노 등을 제대로 연구하기는 매우 어렵게 되었다. 실록에 있는 내용으로 사실을 알 수는 있지만, 1차 사료가 아니므로 실체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게 한계이다.

‘추노’라는 드라마가 인기를 끌었던 중 하나는 참신한 소재의 드라마라는 점이다. 역사 속 음지에 가려져 있던 \추노\들의 삶을 조명해 조선시대의 어두운 사회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은 이 드라마가 갖는 특별한 매력이었다. ‘추노’에는 "종으로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 며,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민초(民草)들의 생생한 절규가 있었다. 노비로 전락해 이마에 낙인이 찍히고, 도망갔다는 이유로 피투성이가 되도록 맞으며, 가축보다 못한 존재로 업신여김을 받는 조선시대 하층민들의 모습을 잔인할 만큼 자세히 그려냈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추노推奴 1편

■ 추노推奴 1편

■ 추노(推奴) 1편

2010년 시청률 30%를 넘으며 큰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가 있었다. 드라마 ‘추노(推奴)’. 이제껏 다루어지지 않았던 참신한 주제였기 때문에 더욱 주목을 받았던 것 같다. 이 드라마에는 전문 추노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추노꾼’은 도대체 무엇일까?

추노(推奴)란 도망간 노비(奴婢:남자종과 여자종)을 찾아 데려오는 일을 말하며, 추노꾼은 도망간 노비를 찾아 원래 주인에게 데려오는 일을 하던 직업을 가진 사람이다. 노비를 추적(追跡)한다고 해서 추노라고 생각하기 싶지만, 쫓을 추(追)가 아닌 밀 추(推)다. 도망간 노비들을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는 추쇄(推刷)를 한다고 해서 추노(推奴)인 것이다. 조선 후기 18세기에 들어와 도망가는 노비의 수가 급증하면서 이들을 쫓는 추노꾼이 등장했다고 한다.

주인집에 거주하면서 사역(使役)하는 가내노비(家內奴婢)와 달리, 주인의 거주지를 벗어나 독립생활을 하는 외거노비(外居奴婢)는 주인집에서 사역을 하지 않는 대신 몸값으로 일정한 포(布)를 바쳐야 할의무가 있었는데, 이 공포(貢布)를 징수하던 일이나 이를 피해 도망간 노비를 수색하여 연행해 오는 것을 추노라고 하였다. 그 당시 외거노비들은 이전보다 경제력은 향상되었지만, 그들이 받는 인격적 차별 대우는 여전했다. 노비들은 인권 말살의 차별 대우와 과도한 노동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망이라는 최후의 수단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유교 양반사회였던 조선에서 노비의 도망을 막기 위해 추노책이 실시되기도 했지만, 별 효과를 거두지 못했고, 도망가는 노비가 더욱 증가하자 노비 소유주들은 노비의 현황을 파악하고 노비를 찾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토지와 더불어 중요한 재산이었던 노비의 도망은 주인 입장에서는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가져왔으므로, 먼 거리에도 불구하고 여종을 팔아 돈을 마련하면서까지 추노꾼을 고용했다고 한다. 추노꾼의 역할은 주인집에서 따로 떨어져 독립적인 생활을 하는 외거노비(外居奴婢)들을 관리하며 몸 삯을 징수하거나, 주인집 등에서 무단이탈을 하거나 도망친 노비를 수색하여 체포하는 일을 했다. 민간인의 노비에 관련되어 추노를 하는 민간업자는 추노꾼, 관노와 관기 등의 관공서에 관련된 추노를 하는 이들을 추노관이라 불렀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운을 부르는 풍수인테리어 기법

운을 부르는 풍수인테리어 기법

운을 부르는 풍수인테리어 기법

주방 풍수인테리어 기법 ㉖

운을 부르는 풍수인테리어 기법으로 일부 가정에서 식탁 위에 유리를 얹어 놓아두는 경우도 있는데, 유리를 얹어 놓으면 가족 구성원이 불화가 자주 일어나는 경우도 있다.

풍수인테리어 기법으로 노란색이나 초록색 식탁보를 활용하면 가족 구성원의 관계가 원만하며, 금전 운도 상승한다.

또한, 식탁의 의자 숫자는 가족 구성원의 숫자대로 놓아두어야 가정이 화목하고 운도 상승 한다.

냉장고 위에 공간이 있다면 붉은색 또는 주황색 등으로 인테리어를 하면 운이 상승한다.

가정에 계획에 없던 지출이 많이 발생하면, 조미료 통을 흰색(밝은 색) 도자기로 바꾸어 놓으면 지출을 줄일 수 있다.

냉장고 안팎을 항상 깨끗하게 하여야 기(氣)의 순환이 원활해져 건강 및 재물 운이 상승한다.

금속으로 된 숟가락이나 젓가락 및 포크 등은 가능하면 사용하지 않을 때는 보이지 않게 보관하여야 운(運) 상승에 도움을 준다.

♣ IFSA 국제풍수협회 선정 2018 대한민국 최고 풍수인테리어 전문가 / 문의 : 010-2432-5522

도량형 2편

■ 도량형 2편

■ 도량형 2편

그럼 미터법이 사용되기 전에는 어떻게 거리와 길이를 재고 표기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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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길이 단위는 약 3000년 전 중국의 주(周)나라에서 사용한 주척(周尺)이다. 1주척은 20㎝ 정도 된다고 한다. 그 후 중국 한나라 때 한척(1한척 : 약 23.7㎝)이라는 단위가 만들어졌고, 당나라에서는 당대척(1당대척 : 약 29.7㎝)을 만들어 길이를 재는 데 이용했다. 우리나라는 삼국 시대부터 나름의 도량형을 만들어 사용했다. 고구려는 한나라에서 사용하던 한척 대신 35.6㎝를 1척의 단위로 사용하였는데 이를 고구려척이라 부른다. 신라에서는 중국의 주척을 가져와 그대로 사용하다가, 통일신라부터는 주로 당대척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 시대에도 주척과 당대척을 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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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여러 단위를 사용하다가 우리나라 실정에 맞는 단위가 만들어진 것은 조선 시대이다.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과 신하 박연이 그 주인공이다. 박연은 기장이라는 곡물 중 크기가 중간 정도의 것을 골라 100알을 나란히 놓은 길이를 1척(황종척)으로 정했다. 1척의 길이는 대략 34.48㎝ 정도이다. 그리고 10척은 1장, 척을 10등분 한 것은 1촌, 1촌을 10등분 한 길이는 1분이라 정했다. 이후 이 황종척을 기준으로 관청 건물이나 배나 수레를 만들 때 사용한 영조척,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는 그릇(예기)을 만들 때 적용한 예기척, 옷감을 사고 팔거나 옷을 만들 때 사용된 포백척 등 여러 가지 척이 쓰임새에 따라 만들어져 사용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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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조상은 우리말로 촌을 치라고도 부르고, 척은 자라고도 불렀다. 그리고 8~10자 정도로 되는 길이를 1길이라고 불렀다. 우리 속담 중에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길이 바로 길이를 표현하는 길이다. 또 ‘세치 혀’라는 말도 있다. 부피를 측정할 때는 홉(合)·되(升)·말(斗)·섬(石)이라는 단위를 사용했고, 무게를 잴 때에는 관·근·량·돈 4개의 단위를 사용했다. 이렇게 길이, 부피, 무게를 재는 도량형은 세금을 매기고 걷거나, 물건을 사고 팔 때 매우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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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탐관오리들은 이 도량형을 마음대로 바꾸어 백성의 곡식과 돈을 마구 빼앗기도 했다. 그래서 조선 시대에는 나라에서 정한 도량형을 사용하도록 하고, 지키지 않으면 무거운 벌을 내렸다. 조선 시대에 임금은 암행어사를 임명할 때, 마패와 함께 유척(鍮尺)이라고 부르는 놋쇠로 된 자 2개를 주었다. 유척은 마을 사또들이 도량형을 잘 지키는지 감시하거나 세금을 걷을 때 도량형을 함부로 바꾸지 않았는지 단속하는 데 썼다. 또 죄인을 매질하는 기구의 크기를 재는 데도 유척을 사용했다. 탐관오리들이 법에서 정한 것보다 더 큰 매를 만들어 백성들을 가혹하게 매질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이렇게 유척은 도량형을 측정하던 도량형기인 동시에 백성을 보살피는 수단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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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도량형 1편

■ 도량형 1편

■ 도량형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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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와 부피, 무게를 재는 단위를 도량형이라고 한다. 한자에서 비롯된 말로 도(度)는 물건의 길이를 재는 자, 량(量)은 곡식의 부피를 재는 되나 말, 형(衡)은 무게를 재는 저울을 뜻한다. 그리고 길이·부피·무게를 재는 기구를 도량형기(度量衡器)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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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량형은 문화의 발달과 더불어 발전되어 왔다. 인류가 식생활을 위하여 곡물을 생산하고,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하여 물물교환을 시작할 때부터 수의 개념과 더불어 간단한 도량형의 형태가 최초로 생겨나게 되었다. 최초의 도량형은 대부분 신체의 일부분을 기준으로 사용하였다. 예를 들면, 길이는 손가락의 길이나 손바닥의 길이로 한 뼘·두 뼘 등으로, 부피는 양 손바닥으로 가득히 담을 수 있는 양으로서의 한 줌·두 줌 등으로 사용하였다.

그 후 인류문명의 발달과 더불어 조세·공납(貢納) 또는 건축·토목공사에 소요되는 곡식 등의 공출이나 물자 조달 등의 필요에 따라, 도량형 제도는 국가의 형성과 더불어 제일 먼저 생겨난 경제의 기초제도로서 법률적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BC 5000∼BC 4000년의 이집트 고대 벽화에 의하면, 당시 토목 건축술의 발달과 더불어 도량형제도도 매우 발달된 형태를 이미 갖추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도량형 제도는 각 나라마다 각기 다른 형태로 발전되었으나, 그 중에서도 중국을 원류로 하는 척관법(尺貫法) 제도, 중동 등에서 서유럽으로 확대되어 오늘날까지 영국이나 미국 등지에서 사용되고 있는 야드-파운드법, 그 후 1840년경에 프랑스의 과학자들에 의하여 가장 과학적으로 만들어졌다는 미터법은 오늘날까지 계속해서 사용하고 있는 도량형의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각 나라마다 서로 다른 도량형 제도를 운영하여 서로 다른 길이나 부피 및 무게 등을 사용한다면, 오늘날과 같이 세계적인 교역이 발달된 상태에서는 매우 불편하고 혼란스럽다. 이에 1875년 세계 각국의 대표가 프랑스 파리에모여서 전 세계가 공통으로 사용할 수 있는 통일된 도량형 제도를 채택하게 된 것이 미터법이며, 이를 위하여 체결된 것이 국제미터협약이다. 그 후 세계 각국은 미터법 통일사업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법으로 이의 추진을 서둘러서 오늘에 와서는 미국과 일부국가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의 국가가 미터법을 사용하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1902년에 미터법이 도입되었고, 1963년부터 법으로 모두 미터법을 사용하도록 하고 있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단청 3편

■ 단청 3편

■ 단청 3편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고려인들은 궁실(宮室)을 수축하기 좋아하며, 왕이 거처하는 궁궐의 구조는 둥근 기둥에 모난 두공(頭工)으로 되었고, 날아갈 듯 연이은 대마루는 울긋불긋 광채나게 꾸며졌다.』고 기록하여, 12세기 전후의 고려시대 궁전의 규모와 장엄성을 엿볼 수 있다.

또, 단청장식의 호화로움에 대하여 『난간은 붉은 칠을 하고 동화(銅花)로 장식하였고, 단청의 무늬와 채색이 매우 힘차고 아름다워 다른 전각들보다 뛰어났다.』고 하였다. 고려시대 건축물로서 현재까지 남아 있어 단청의 흔적을 볼 수 있는 것은 영주 부석사조사당, 안동 봉정사 극락전, 예산 수덕사 대웅전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수덕사 대웅전에서는 건립 당시에 그려졌던 벽화를 비롯하여 단청의 흔적이 발견되었는데, 채색과 선이 밝고 부드럽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우리나라의 단청은 더욱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고 변화하였다. 조선시대 단청의 일반적인 특성은 단청의 단위무늬의 구성이 세련되고 장식구성이 매우 복잡해지고 다채로운 색조의 대비가 화려하게 된 점이다. 조선시대의 단청색조는 건물 내외의 장식에 따라 외부단청을 밝은 색 계통의 등황색을 현저하게 증가시켜 장식의 명도를 높였고, 내부단청은 광선의 명도가 외부의 단청보다 낮은 것을 고려하여 주로 녹청색으로 처리한 것이 특징이다. 조선시대의 단청들은 무늬의 체계와 함께 색채 구사에 있어서도 일정한 법칙성을 가지고 색의 조화를 이루었다.

단청장식의 색조는 시대성을 반영하여 시대에 따라 표현수단 및 방법에 있어서 특수성·독자성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통일신라시대 이전의 지상건물의 단청색조는 유구(遺構:잔존물)가 전하지 않으므로 확실히 밝히기는 어렵다. 물론, 지상건물과는 똑같다고 할 수 없으나 고구려고분의 벽화에 나타난 다양한 색채는 당시 선조들의 색채에 대한 감각이 세밀하고 예민함을 말하여 준다.

단청의 종류는 건축물에 따라 다르다. 궁궐에는 무늬가 큰 모루단청을 하고, 절에는 무늬가 조그맣고 고운 비단단청을 한다. 새로 올리는 단청을 신단청이라고 하며, 빛이 낡아 다시 칠하는 단청을 물단청이라고 한다. 단청을 만들 때는 처음에 초벌 그림(초상)을 만든 다음, 애벌 색칠(가칠)을 한다. 그리고 검은 색깔로 그림의 윤곽을 칠하고(골채), 무늬의 윤곽을 그린 다음에(기화) 색깔을 칠한다(빛넣기).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단청 2편

■ 단청 2편

■ 단청 2편

우리나라 전통건축에서 주재료로 사용된 소나무는 목질이 강한 반면에 표면이 거칠고 건조 시 열상이 크며, 해충과 부식의 피해가 있기 때문에, 이러한 단점을 보강해주는 도장(塗裝) 방법인 단청이 발달했다고 한다. 또한 전통시대의 건축은 정치적·종교적·신분적 위계질서에 따라 건물의 규모와 장엄의 정도가 엄격히 구별되었으므로, 건물에 따라 무늬와 색상 및 그 화려함의 정도를 다르게 했다. 왕의 거처인 궁궐과 부처의 상징적인 거주지인 불전의 안팎은 가장 화려하고 아름답게 단청을 하여 왕과 부처의 권위와 존귀함을 상징했다. 조선시대 단청에서는 장단·주홍·양청·양록·황·석간주 등을 주요색으로 사용했고, 주요색에 흰색과 먹색 등의 여러 색을 배합하여 다양한 색깔을 만들었다.

단청의 색 배열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는데 여기에는 민족의 고유한 색채감각이 잘 반영되어 있다. 삼국시대에는 고분벽화를 통해 그 양상을 엿볼 수 있으며, 고려시대에는 부석사조사당·봉정사극락전·수덕사대웅전을 통해서 빛을 많이 받는 기둥이나 난간 등에는 붉은색을, 빛을 적게 받는 추녀나 천장 등에는 녹청색을 써서 명암의 장식적인 대비효과를 높인 상록하단의 원칙이 적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무늬가 다양해지고 건물 외부에 등황색 계통을 많이 써서 매우 밝고 화려해졌는데, 이것은 조선건축의 다포양식이 복잡해지고 장식화된 것과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우리나라 단청의 색조는 건물의 구조적인 표현성을 더욱 높일 수 있고, 다채로운 보색대비로 원색적이고 화려하면서도 색을 규칙적으로 반복·처리하여 색조의 율동과 조화를 이루어낸 것이 특징이다. 즉 한색(寒色)과 난색(暖色)을 엇바꾸면서 색의 층단을 구성했고, 보색대비와 명도 차이에 따라 색띠의 면적을 달리했으며, 대범한 명암효과도 내었다.

인류의 생활에서 채색그림이 출현하는 시기는 약 2만 년 전 동굴벽화로부터 시작된다. 당시의 동굴벽화나 천장그림들은 현재의 양식화(樣式化)된 단청과는 그 목적이 다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단청의 출발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나라 단청의 가장 오래된 실례는 현존하는 고대건축물은 없고, 삼국시대의 여러 고분벽화를 통하여 그 형태를 찾아볼 수 있다. 특히,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당시의 건축양식과 단청의 모습을 보여 주는 다양한 채색무늬가 남아 있고, 또한 고분에서 출토된 채화(彩畫)·칠기(漆器) 등도 그 예의 하나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신라에서는 성골(聖骨) 이상에게만 오채(五彩)의 사용이 허용되었음을 알 수 있으나, 그 당시의 단청이 칠해진 건물은 하나도 전하지 않고 있다. 다만, 최근에 발굴된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건축부재(建築部材)와 암막새 끝에 칠해진 주칠(朱漆)을 통해서, 당시 건축 장식의 중요 요소이던 단청의 섬세하고 아름다움을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단청 1편

■ 단청 1편

■ 단청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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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청이란 붉을 단(丹)과 푸를 청(靑)자가 합쳐진 말이다. 원래 붉은색과 푸른색의 그림 재료를 말하는 것인데, 그 말이 건축물의 벽·기둥·천장 등에 여러 빛깔로 그림과 무늬를 그리는 것으로 불리게 되었다. 사찰이나 궁궐 등 전통 목조 건축물에 여러 가지 색으로 그림이나 무늬를 그려 아름답게 장식하는 것을 말한다. 목조 건축물 뿐 아니라 조각품과 공예품 등에 그림이나 무늬를 그리고 색을 칠하여 장식하는 것도 단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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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청은 건물을 아름답고 장엄하게 꾸밀 뿐만 아니라, 목재가 썩는 것을 막아 주어 건물의 수명을 늘리기도 한다. 단청에 쓰이는 기본색은 빨간색 · 노란색 · 파란색 · 하얀색 · 검은색의 5가지이다. 이 5색은 오행사상을 상징하는 색으로서 각 색마다 해당되는 오행·계절·방위·방위신이 정해져 있다. 또한 오행의 상관관계에서 중간색이 나오는데 청백의 중간색은 벽(碧), 청황의 중간색은 녹, 황흑의 중간색은 유(騮), 청흑의 중간색은 자(紫), 적백의 중간색은 홍(紅)색이다. 또한 단청의 무늬는 건물에 쓰인 부재에 따라 서로 다를 정도로 종류가 다양했다.

고구려 고분이나 백제의 왕릉에서도 단청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것으로 보아, 단청은 이미 삼국시대에 널리 유행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통일신라 말기에는 최상류 계층 이외에는 집에 단청으로 치장하는 것을 금지했다는 기록도 있다. 단청을 왕궁과 사찰에만 사용하도록 해 왕권이나 종교의 권위를 지키고자 했던 것이다. 그 뒤로 고려시대에는 주로 사찰에, 조선시대에는 주로 궁궐의 목조 건축물에 단청으로 장식을 했다.

목조 건축물에 단청을 한 이유는 비바람이나 갑작스러운 기후변화에 대비해 내구성을 강화하여 건물의 수명을 늘리기 위해서이지만, 목재 표면에 나타난 각종 옹이나 흠집 등을 감추는 데도 효과적이다. 건축물의 기능과 위계성에 맞추어 아름답게 장식함으로서 격에 맞는 장엄함과 위엄을 보여주기 위한 목적도 있다. 음양오행 사상을 중심으로 길흉화복을 기원하는 뜻도 담겨 있었다고 한다.

단청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 즉, 옛 궁궐이나 절 · 비각 · 문루 등에 그림이나 무늬를 그리는 일에 뛰어난 솜씨를 지닌 사람들을 일컬어 단청장이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단청 솜씨의 문화적 값어치를 높이 사고, 전통문화를 길이 이어 가기 위하여 단청장을 중요 무형 문화재 제48호로 지정하고 있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