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13일 수요일

설니홍조雪泥鴻爪 - 눈 위에 난 기러기의 발자국. 눈이 녹으면 없어지는 인생의 무상

설니홍조雪泥鴻爪 - 눈 위에 난 기러기의 발자국. 눈이 녹으면 없어지는 인생의 무상

설니홍조(雪泥鴻爪) - 눈 위에 난 기러기의 발자국. 눈이 녹으면 없어지는 인생의 무상

눈 설(雨/3) 진흙 니(氵/5) 기러기 홍(鳥/6) 손톱 조(爪/0)

인생이 길다고 한 말은 어디에서나 들은 적이 없을 것이다. ‘인생은 행복한 자에게는 너무나 짧고, 불행한 자에게는 너무나 길다’고 한 영국 격언만 제외하고 말이다. 생활이 지겹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이고, 형편이 나아진 이후로는 길다고 여기지 않는다. 이렇게 짧은 인생을 덧없다고 여기고, 욕심껏 이룬 부귀와 영화도 부질없다고 깨우치는 성어는 셀 수 없이 많다.

대표적인 것이 南柯一夢(남가일몽)과 같이 꿈 이야기만 해도 羅浮之夢(나부지몽), 盧生之夢(노생지몽), 役夫之夢(역부지몽), 一場春夢(일장춘몽), 黃粱之夢(황량지몽)이 있다.

꿈 이야기 말고 대조적인 비유로 나타낸 성어도 제법 된다. 인생이 풀끝에 맺힌 이슬처럼 덧없고 허무하다는 속담 ‘풀끝의 이슬’과 똑 같은 것이 人生如朝露(인생여조로)이다. 바람에 깜박이는 등불과 같다는 人生如風燈(인생여풍등)도 같은 뜻이다. 여기에 눈이나 진흙 위(雪泥)에 난 기러기의 발자국(鴻爪)이란 멋진 표현도 인생의 자취가 눈이 녹으면 사라지는 무상을 나타냈다.

중국 北宋(북송)의 문호 蘇軾(소식, 1036~1101)의 시에서 나왔다. 東坡(동파)란 호로 더 잘 알려진 소식은 부친 蘇洵(소순)과 아우 蘇轍(소철)과 함께 三蘇(삼소)로 불렸다. 서정적인 것이 많은 唐詩(당시)에 비해 철학적인 요소가 짙은 시가 많다는 평을 듣는다.

소식이 동생 소철에게 보낸 시 ‘和子由澠池懷舊(화자유면지회구)’에 성어 구절이 들어 있다. 子由(자유)는 소철의 자, 澠池(면지)는 河南省(하남성)에 있는 지명이라 한다. 澠은 고을이름 면. 앞 부분만 보자. ‘인생은 여기저기 떠도는 것 무엇과 같을까, 기러기가 눈 내린 진흙 벌을 밟아놓은 것 같으니(人生到處知何似 應似飛鴻踏雪泥/ 인생도처지하사 응사비홍답설니), 우연히 진흙 위에 발자국은 남겼지만, 기러기는 동서 어디로 날았는지 어떻게 알랴(泥上偶然留指爪 鴻飛那復計東西/ 니상우연류지조 홍비나부계동서).’ 기러기 발자국은 흔적도 없고, 그것을 남긴 기러기도 어디로 사라졌는지 참으로 무상하다.

사람도 기러기와 다를 바 없다. 부와 명예를 위해 아등바등하고 그것을 이뤘다고 해도 오래 가지 않는다.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모든 근심을 안고 나라의 문제점을 고치려 의욕을 보이지만 세력이 바뀌면 뒤집어진다. 자신은 영원할 줄 알고 먼 장래의 일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xa0/ 제공 : 안병화(전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상경여빈相敬如賓 - 서로 공경하고 손님 대하듯 하다.

상경여빈相敬如賓 - 서로 공경하고 손님 대하듯 하다.

상경여빈(相敬如賓) - 서로 공경하고 손님 대하듯 하다.

서로 상(目/4) 공경 경(攵/9) 같을 여(女/3) 손 빈(貝/7)

남을 나와 같이 받들고 위한다면 다툴 일이 없다. 일상에서 자주 쓰는 속담 ‘웃는 낯에 침 뱉으랴’는 누구한테나 겸손한 태도로 대하면 돌아오는 것도 나쁠 것이 없다. 예부터 몸과 마음을 닦고 가정을 잘 이끌어야 다른 큰일도 처리할 수 있다고 修身齊家(수신제가)를 중요시했다. 인간사회에서 가장 작은 단위, 가정에서의 부부 사이라도 존경이 없으면 참다운 사랑은 성립하지 않는다. 부부가 항상 서로 공경하고(相敬) 마치 귀한 손님 대하듯이(如賓) 한다면 다른 사람도 존중할 수 있다. 이런 자세를 가진 사람이 지도자가 되어 다스린다면 모두에게 칭송받는다.

이 성어는 여러 곳에서 사용됐어도 左丘明(좌구명)의 ‘春秋左氏傳(춘추좌씨전)’에 내용이 상세하다. 중국 春秋時代(춘추시대) 晉(진)나라의 대부인 胥臣(서신)이 부부가 서로 존경하는 한 사람을 적극 추천한 것에서 유래했다. 臼季(구계)라고도 불린 서신이 어느 때 사신이 되어 冀(기) 지역을 지나다 들판에서 쉬고 있을 때였다.

‘기결이란 농부가 밭에서 김을 매고 그 아내가 점심상을 받쳐왔는데 서로 공경하는 태도가 마치 손님을 대하는 것과 같았다(見冀缺耨 其妻饁之 敬相待如賓/ 견기결누 기처엽지 경상대여빈).’ 耨는 김맬 누, 饁은 들밥 엽. 이 모습을 보고 서신이 文公(문공)에 적극 추천하여 기용됐고, 일명 郤缺(극결)인 농부는 침략한 나라의 왕을 사로잡는 등 뒤에 큰 공을 세웠다.

後漢(후한) 말기의 은사 龐德公(방덕공)은 謀士(모사)로 이름난 諸葛亮(제갈량)의 스승이자 龐統(방통)의 숙부이다. 그는 약초를 캐며 초야에 묻혀 살아 ‘평생 성 안으로 가 본 적이 없고, 부부가 서로 귀한 손님 대하듯(未嘗入城府 夫妻相敬如賓/ 미상입성부 부처상경여빈)’ 했기에 오랫동안 주위의 존경을 받았다. 范曄(범엽)이 쓴 ’後漢書(후한서)‘의 逸民(일민)열전에 실려 있다.

가까운 부부가 서로 귀히 여기고 대한다면 큰일도 능히 맡아 치르고 길이 우러름도 받는다. 이는 孔子(공자)의 말 ‘문을 나서서는 귀한 손님을 맞는 듯이(出門如見大賓/ 출문여견대빈)’ 하고, ‘자신이 원치 않는 일을 남에게 시키지 않으면(己所不欲 勿施於人/ 기소불욕 물시어인)’ 원망하는 이가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와 상통한다.

‘明心寶鑑(명심보감)’에 太公望(태공망)이 했다는 좋은 말이 있다. ‘어리석은 사람이 아내를 두려워하고, 어진 여자는 남편을 공경한다(癡人畏婦 賢女敬夫/ 치인외부 현녀경부).’ 큰일을 꿈꾸지 않더라도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는 어리석은 사람이 될 필요가 없다. 서로가 위하면 된다. 그런데도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란 속담이 옛말이 될 정도로 실제 금 가는 일이 잦다. \xa0/ 제공 : 안병화(전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거립지교車笠之交 - 신분의 귀천을 뛰어넘은 우정

거립지교車笠之交 - 신분의 귀천을 뛰어넘은 우정

거립지교(車笠之交) - 신분의 귀천을 뛰어넘은 우정

수레 거(車/0) 삿갓 립(竹/5) 갈 지(丿/3) 사귈 교(亠/4)

친구 사이의 아름다운 우정을 기리는 고사는 쌔고쌨다. 혈연이 아니면서 혈연 이상으로 서로 돕고, 친구의 위험을 자기가 안는 미담이 많아 이 난에서도 다수 소개했다. 이번엔 약간 생소하여 평시엔 잘 사용하지 않는 우정에 관한 성어도 한 번 모아 보자. 먼저 淸(청)나라 金纓(금영)이 편찬한 격언집 格言聯璧(격언연벽)의 구절엔 이런 것이 있다. ‘노름과 오락으로 사귄 친구는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술과 음식으로 사귄 친구는 한 달을 넘기지 못한다.

세력과 이익으로 사귄 친구는 한 해를 넘기지 못하며, 오직 정의로 사귄 친구만이 영원히 이어진다(博奕之交不終日 飮食之交不終月 勢利之交不終年 道義之交可終身/ 박혁지교부종일 음식지교부종월 세리지교부종년 도의지교가종신).’ 연벽이란 쌍벽과 같은 뜻으로 격언을 쌍벽처럼 묶어놓은 책이란 뜻이다.

孔子(공자)님은 정직한 사람, 성실한 사람, 견문이 많은 사람과 사귀라고 益者三友(익자삼우)를 내세웠다. 明(명)나라 蘇竣(소준)은 雞鳴偶記(계명우기)란 책에서 친구를 네 종류로 나누었다.

첫째는 畏友(외우)로 서로 잘못을 바로 잡아주고 도를 위해 노력하는 친구 사이, 둘째 密友(밀우)는 좋은 일이 있을 때나 서로 돕고 생사를 같이 하는 사이, 셋째 昵友(닐우)는 좋은 일이 있을 때나 놀 때만 잘 어울리는 사이, 마지막으로 賊友(적우)는 이익을 보면 서로 싸우고 근심거리가 있으면 미루는 사이를 말했다. 昵은 친할 닐. 이익을 두고 서로 싸우는 사이를 친구로 포함시킨 것이 의외다.

신분이나 생활수준이 차이나는 것을 뛰어넘은 친구는 더 아름답다. 伯牙絶絃(백아절현)은 고관과 나무꾼, 水魚之交(수어지교)는 군신관계였다. 한 사람은 수레를 타고, 다른 사람은 패랭이를 쓰고(車笠) 다닐 정도로 차이가 나는 두 친구의 사귐(之交)을 말하는 이 성어도 신분의 귀천을 뛰어넘는다.

宋(송)나라 太宗(태종)의 명으로 李昉(이방, 昉은 밝을 방)이 엮은 ‘太平御覽(태평어람)’에 인용되어 전한다. 越(월)나라 풍속에 우정을 맺을 때의 예를 소개하고 그 때 축원하는 말에 나온다. ‘그대는 수레를 타고, 나는 삿갓을 쓰고 다른 날 만나면 수레에서 내려 서로 읍하세(卿雖乘車我戴笠 後日相逢下車揖/ 경수승거아대립 후일상봉하차읍).’ / 제공 : 안병화(전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재벌 회장 팔자는 도대체 뭘까...

◇재벌 회장 팔자는 도대체 뭘까...

◇재벌 회장 팔자는 도대체 뭘까...

한국 사람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팔자가 재벌 팔자이다. 재벌의 오너가 되던지, 재벌가의 가족이 되는 팔자는 만인이 선망한다. 돈이 많기 때문이다. 인간은 돈으로부터 도망갈 수 없다.

자본주의가 발전하기 전인 조선시대에도 인간 욕망의 순서는 돈이 제일 먼저였다. 재색명리(財色名利)가 그것이다. 색(色)보다도 돈이 앞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그러나 돈이 많으면 팔자가 세다. 모든 사람이 가지고 싶은 돈을 유달리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수많은 화근을 초래한다. 모두가 달려들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곡괭이를 들고 달려들고, 누구는 부비트랩을, 또는 독극물을 투약하려고 한다. 때로는 색풍(色風)이 몰아치기도 한다. 팔풍(八風) 중에서 색풍도 대단히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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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을 만나는 사람은 대부분 바라는 게 있다. 그냥 만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대부분 부탁 사항이 있다. ‘여기 좀 보태주세요. 거기 좀 지원해 주세요. 이것 좀 신경 써 주세요.’ 그래서 재벌 회장은 사람을 만날 때 끊임없이 의심을 할 수밖에 없다. ‘저 사람은 또 어떤 요구를 할까. 어떤 트릭과 함정을 파서 나를 상대하는 것일까?’ 모든 인간을 만날 때마다 긴장을 하고 있어야 한다. 통이 크고 대가 셌던 정주영 회장도 항상 ‘돈이 부족하다고 느끼며 살았다. 만나는 사람마다 모두가 돈 달라고 하니까 말이다. 만약 돈을 안 주면 그 사람은 뒤돌아서서 욕을 하게 되어 있다. ‘그 인간 정말 짠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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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유지하고 관리하다 보면 반드시 배신을 겪는다. 아주 믿었던 주변 사람으로부터 배신을 몇 번 당하면 인간에 대한 깊은 환멸을 경험한다. 밤에 잠이 오지 않으므로 수면제는 상비약이다. 인간에 대한 깊은 환멸은 장기 중에서 폐에 충격을 준다. 재벌 오너가 폐암에 잘 걸리지 않던가. 꼭 폐암이 아니더라도 근래에 LG 구본무도 70대 초반에 갔고, 한진의 조양호도 70에 갔고, 삼성의 이건희도 70대 초반에 식물인간이 되었다. 보통 사람도 요즘 어지간하면 80세는 넘기는데, 이들 오너들은 평균수명 미달이다. 몸에 좋다는 것은 다 구해서 먹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빨리 간 것은 그만큼 보통 사람보다 훨씬 시달리며 살았다는 반증 아니겠는가.

재벌을 운영하려면 오장육부가 강철로 되어있어야 한다. 창업주는 강철도 있지만 3세쯤 가면 멘털이 양철도 안 된다. 재다신약(財多身弱)이 재벌 회장을 한다는 것은 엄청나게 시달리며 사는 ‘심난한’ 팔자이다.

-조선일보-

◇봄, 채능본능 발동해 응급실 가지 맙시다

◇봄, 채능본능 발동해 응급실 가지 맙시다

◇봄, 채능본능 발동해 응급실 가지 맙시다

봄꽃이 한껏 꽃망울을 터뜨린 동네 뒷산에 등산객 한 무리가 나타났다. 데크가 깔린 등산로는 운동화 한 켤레면 충분하다. 그걸 몰랐던 게다. 그들은 해외 원정에 나선 듯 중등산화를 신고, 스틱까지 들었다. 등에 진 배낭은 왜 그렇게나 큰지. 등산로 입구의 만개한 벚꽃을 마주한 무리는 사진을 찍느라 정신없다. 무리 중 하나가 소리쳤다. “여기 홑잎나물이 있네.” 무리는 우르르 달려들어, 갓 올라온 화살나무 여린 잎을 뜯었다.

무리가 훑고 간 화살나무는 순식간에 연둣빛에서 잿빛으로 바뀌었다. 뜯은 걸 다 합쳐봐야, 데쳐서 무치면 한 접시도 안 될 텐데. 그 적은 걸 각자 가져갔으니 결국 버릴 거다. 옛말에 “부지런한 며느리는 홑잎나물을 세 번 딴다”고 했으니, 화살나무에는 다시 새잎이 돋을 거다.

20만 년 전 등장한 인류(호모 사피엔스)는 수렵과 채집을 호구지책으로 삼았다. 농경과 목축을 시작한 건 1만 년 전 일이다. 그리고 산업혁명은 18세기 들어서야 일어난 일이다. 요컨대 인류는 19만년간 수렵채집사회에서, 9800년간 농경사회에서, 200년간 산업사회에서 살았던 거다. 몸과 뇌리에 19만년간 새긴 것이 쉽게 사라질 수가 없다.

바닷가를 지나다가도 조개나 소라를 보면 일단 줍고 본다. 혹시 더 있나 주변도 살핀다. 산길을 걷다가 밤이나 산딸기를 보면 우선 챙기고 본다. 인류에게 채집은 본능이다. 그러니 홑잎나물을 발견하자마자 아드레날린이 솟구친 등산객 무리를 비난할 일도 아니다. (채집 금지 경고문이 적힌 곳에서라면 물론 얘기가 다르지만.)

가을이면 “공원에서 밤처럼 생긴 열매를 주워다가 삶아 먹고 병원 응급실로 이송됐다”는 뉴스가 가끔 들린다. 밤과 비슷하지만, 자세히 보면 뭔가 다른 그것, 마로니에(칠엽수) 열매다. 독성이 있다.

봄에도 비슷한 뉴스가 들려오곤 한다. 독초를 산나물로 오인해 먹었다가 탈이 난 경우다. 여로(오른쪽)를 원추리(왼쪽)로, 박새를 명이나물(산마늘)로, 동의나물을 곰취로, 삿갓나물을 우산나물로 오인하는 일이 잦다고 한다. 후자가 식용이고, 전자는 모두 비슷하게 생긴 독초다.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따르면 최근 10년간 25건의 봄나물 안전사고로 86명이 치료받았고 3명이 사망했다. “구별이 쉽지 않으므로 채취하지 않는 것이 식중독 예방에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게 식약처 조언이다. 본능이 때로는 위험할 수 있다.

-중앙일보-

◇코로나 사태 이후 두 번째 봄, 꽃밭은 그만 엎자

◇코로나 사태 이후 두 번째 봄, 꽃밭은 그만 엎자

◇코로나 사태 이후 두 번째 봄, 꽃밭은 그만 엎자

꽃이 피었다. 그렇다고 봄이 온 건 아니었다. 농부가 꽃밭을 갈아엎었고, 공무원이 꽃밭에서 주민을 쫓아냈다. 모두가 집에 틀어박혀 꽃이 지기만 기다렸다. 그렇게 2020년의 봄이 지나갔다.

다시 꽃이 피었다. 코로나 사태가 터지고 두 번째 봄이 시작되었다. 올해도 축제는 열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달라지지 않은 건 아니다.

제주도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작년 이맘때 농부들이 유채꽃밭을 엎었던 현장이다. 축구장 10개가 들어간다는 이 초원에 하루 최대 1만 명이 몰린다고 꽃밭을 없앴었다. 올해는 드라이브 스루 형식으로 꽃밭을 개방하고, 온라인 중계도 한다.

국내 최대 봄꽃 축제 진해군항제가 열리는 경남 창원시. 작년에는 축제 취소로도 안심이 안 돼 시청 공무원이 조를 짜 경계 근무를 섰다. 올해도 군항제는 열리지 않는다. 대신 작년처럼 출입을 막지는 않는다. 발열 검사와 거리두기를 강화한다.

주민 우려와 반발을 전하는 목소리도 있으나, 애먼 꽃밭을 갈아엎는 것보단 잘한 일이라 생각한다. 꽃 피는 자연이 불안하다면, 지구에서 안전한 곳은 없다. 작년 거의 모든 공공 휴양시설이 문을 닫았을 때 국립공원은 개방 원칙을 고수했다. 국립공원마저 폐쇄되면 국민이 갈 곳은 없다고 국립공원공단은 판단했다.

폐쇄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건, 지난 1년의 경험이 증명한다. 방역수칙을 얼마나 엄격히 준수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의미 있는 사례가 있다. 제주올레 걷기축제. 원래는 사흘간 열리던 축제를 작년에 23일간 열었다. 하루에 한 코스씩 수천 명이 함께 걷던 방식을 23개 코스에서 15명이 한 코스씩 23일간 걷는 방식으로 바꿨다. 기대 이상의 성과에 힘입어 제주올레는 아예 ‘한 달 걷기’ 여행상품을 기획했다. 올가을 걷기축제도 작년처럼 진행할 계획이다.

코로나 사태 이후 특급 호텔과 고급 리조트가 때아닌 호황을 누린 배경엔 예약제와 회원제가 있다. 제한된 소수의 인원만 이용한다는 조건은 코로나 시대 방역지침의 다른 말이었다. 예약 시스템을 축제에 적용한 사례가 서울 여의도 벚꽃축제다. 4월 5일부터 11일까지 열리는 올해 여의도 봄꽃축제는 무작위 추첨으로 뽑힌 3500여 명만 입장이 가능하다. 하루 정원은 총 504명이다.

관광 당국에 제안한다. 생각을 달리하자. 축제 없을 생각은 그만하고 축제 방식을 바꾸자. 세상이 변했으니 노는 법도 달라져야 하지 않겠나. 코로나 사태는 외려 단체 여행과 싸구려 관광으로 점철된 국내 관광 생태계를 개혁하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다. 이참에 뜯어고 치자.

-중앙일보-

시험장은 난장판 5편

■ 시험장은 난장판 5편

■ 시험장은 난장판 5편

초정 박제가(1750~1805) 역시 ‘과거난장판’이 된 세태를 적나라하게 기록했다. 『마당이 뒤죽박죽 되고…심한 경우에는 망치로 막대기로 상대를 때리고 찌르고 싸우며…문에서 횡액을 당하고…심지어는 남을 죽이거나 압사하는 일까지 발생한다.』 《북학의》

조직적인 입시비리 때문에 이미 치른 과거 자체가 취소된 경우도 있었다. 1699년(숙종 25년)의 기묘과옥과 1712년(숙종 38년)의 임진과옥이다. 기묘과옥은 1699년 실시된 과거에서 34명이 합격했지만 과거 자체를 취소한 사건이다. 즉 과거 시험의 실무를 담당하는 이들 중에 등록관과 봉미관 등이 있었다. 등록관은 과거 때 필적 부정을 막으려고 응시자의 답안을 베껴 채점관에게 넘기는 실무관이고, 봉미관은 응시자들의 답안지 서명란에 봉인을 붙이거나 떼는 일을 담당한 관원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청탁을 받고 다른 응시자의 봉투를 붙였거나, 답안을 베껴 제출할 때 고쳐 써주거나 해서 부정 합격시킨 사례가 줄줄이 나왔다. 결국 관련자 수십 명이 유배되고, 시험자체가 무효 처리됐다.

13년 뒤에 일어난 임진과옥은 시험관이 친구의 아들과 지인에게 문제를 3건이나 알려주는가 하면, 시험기간이 지난 뒤 답지를 제출하도록 해서 부정 합격시킨 것이 적발됐다. 특히 시험관이 시험 전에 응시생의 집을 두루 찾아다녔던 사실도 드러났다. 결국 전원의 합격이 취소되고 관련자 중 3명은 끝내 처형당했다.

이와 같은 폐단을 막기 위한 조치가 여러 차례 마련됐다. 이 같은 부정행위를 막으려고 영조는 수권관(收券官:시험지를 거두는 관리)의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답안지를 내지 못하게 하기도 했고, 정조는 시험문제가 발표된 뒤 3시간 이후에 답안지를 제출케도 했다. 한편 처벌의 규정을 더욱 강화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부정행위는 쉽게 사라지지가 않았다. 이런 부정행위는 대체로 첫째 대가를 받고 행해지는 경우, 둘째 권세가에 빌붙어 한 자리를 노리려는 경우, 셋째 인정에 못 이겨 동조하는 경우로 나누어 볼 수 있겠다. 첫째의 경우는 모든 기간에 걸쳐 이루어졌다. 둘째의 경우는 문벌정치가 극성을 부렸던 19세기 이후에 주로 자행되었고, 셋째의 경우는 아주 드물게 나타났다.

1894년에 단행한 갑오개혁에서 성균관을 근대식 교육기관으로 개편하며 과거제는 폐지되었다. 근대적인 관리등용법을 제정하여 종래의 신분구별도 없어지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개화운동의 일환으로 1886년 최초의 근대학교인 육영공원(育英公園)을 설립하여 신식교육을 실시하고, 1895년 ‘교육입국조서(敎育立國詔書)’를 발표하여 소학교·중학교·사범학교·외국어학교·의학교 등을 세워 관립학교 제도를 확립하였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시험장은 난장판 4편

■ 시험장은 난장판 4편

■ 시험장은 난장판 4편

응시생과 시관(試官)이 짜고 부정으로 합격시키는 방법도 있었다. 그 방법은 여러 가지였다. 시관이 시험문제를 미리 일러주어 집에서 답안지를 작성해 제출하는 방법, 응시생이 답안지에 점을 찍는 따위 암표(暗票)를 하여 누구의 답안지인지 알게 해서 시관이 합격시켜주는 방법, 종사원에게서 자호를 알아내 시관에게 알려주는 방법 등등이 동원되었다. 또 시관의 보조역할을 맡은 등록관을 매수해 답안지를 베낄 때 잘못 놓여진 글자나 엉터리 문맥을 바로잡아 고치게 하는 방법도 있었다. 이를 역서(易書)라 한다. 또 종사자를 매수해 다른 합격자의 이름을 답안지에 바꿔 붙이게 했다. 이를 절과(竊科)라 했다. 다른 합격자를 떨어뜨리고 자신이 합격하는 가장 악질적 방법이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응시자가 기하급수로 늘면서 과거장은 더욱 난장판으로 변해갔다. 특히 정기시험(식년시) 외에 부정기로 치르는 특별시험의 경우 과열양상이 두드러졌다.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에 기록된 1800년 3월21~22일의 왕세자(순조)의 책봉을 축하하기 위한 특별과거. 이틀간 치른 이 시험에 문과에만 무려 21만 명이 응시했다. 이틀간 답안지를 제출한 응시생만 해도 7만1498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들 중에서 최종 합격증을 받은 응시생은 단 12명에 불과했다. 경쟁률이 자그만치 1만8000 대 1이었던 것이다. 이때의 한심한 시험장 모습을 다산 정약용(1762~1836)은 《경세유표》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문장에 능숙한 자를 거벽(巨擘), 글씨에 능한 자를 사수(寫手), 자리와 우산 같은 기구를 나르는 자를 수종(隨從), 수종 중 천한 자를 노유(奴儒), 노유 중 선봉이 된 자를 선접(先接)이라 이른다.』

과거시험을 보는 유생 1명에 최소 5명이 붙어 역할분담을 하여 도와준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6인 1조의 ‘입시비리단’이다. 각자는 어떤 역할을 맡았을까. 우선 과거장에 먼저 들어가야 유리했다. 지금처럼 수험번호에 따라 지정좌석에 앉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조건 먼저 들어가서 현제판(懸題板·과거 때 시험문제를 거는 널판지)에 게시되는 문제를 잘 볼 수 있는 곳에 자리를 차지해야 했다. 수만 명이나 되는 응시자를 두고 반나절 사이에 합격자 방을 내걸어야 했으므로, 지친 시험관은 붓을 잡기에도 신물이 나서 눈을 감은 채 답안지를 읽지도 않고 내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일찍 내야 하는 것이 관건이다. 이때 필요한 자들이 바로 ‘선접’과 ‘수종’그리고 ‘노유’였다. 이들은 과거시험장인 창경궁(춘당대) 밖에서 등불을 밝히며 밤새워 기다렸다가 새벽에 궐문이 열리면 좋은 자리 확보하기 위해 몸싸움을 벌였다. 우산대와 말뚝, 막대기 등을 휘두르며 달려가 우산일산(日傘)을 펴고 자리를 차지했다. 물론 이들이 머리에 검은 유건(儒巾:유생들이 쓰는 관모)을 써서 수험생으로 위장했음은 물론이다.

- 5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시험장은 난장판 3편

■ 시험장은 난장판 3편

■ 시험장은 난장판 3편

1686년(숙종 12년) 4월3일 숙종이 명륜당에서 과거시험을 본다는 소식을 들은 전국의 선비들이 먼저 들어오려고 아귀다툼을 벌이다가 8명이나 압사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숙종실록》은 『죽은 자들뿐 아니라 위독한 사람들도 많아서 성균관 주변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부잣집 자식은 입에 아직 비린내가 나고 아직 고무래 丁(정)자도 몰라도 거벽의 글과 사수의 글씨를 빌려 시권(답안지)를 제출한다.』 《경세유표》

이 같은 다산의 말처럼 돈이 있고, 행세깨나 하는 집안의 자제는 고무래 丁자도 모르는 일자무식이라도 ‘거벽’과 ‘사수’, ‘수종’ ‘노유’ ‘선접’ 같은 ‘부정시험단’의 도움으로 합격증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과거시험이 왜 이렇게 난장판이 됐을까. 따지고 보면 조선은 ‘시험의 나라’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보통 5살 때 과거공부를 시작한다면 무려 30년 이상 머리를 싸매고 공부해서 시험을 치러야 겨우 대과에 합격할 수 있었다. 국가시험만 4차례 거쳐야 했다. 과거시험은 원칙적으로 3년마다 실시됐다. 수험생들은 한번 떨어지면 최소 3년을 기다려야 했으니 합격에 목숨을 걸 수밖에 없었다. 우선 예비시험인 소과의 경우 초시(1400명 선발)를 거쳐 복시를 통과한 200명이 생원(100명)·진사(100명)가 됐다. 생원·진사가 돼야 본시험인 대과(문과)를 치를 수 있었다. 대과 역시 1차 시험격인 초시에서 240명을 선발했고, 다시 이 240명이 2차 시험인 복시에 응시할 수 있었다. 이렇게 4차례의 시험에서 뽑힌 33명의 과거급제자가 꿈에 그리던 문관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행정고시 최종합격자이다. 3년에 한번 씩 불과 33명을 뽑는 행정고시였던 셈이다. 그랬으니 합격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기상천외한 사건이 1705년(숙종 31년) 2월18일 터졌다. 성균관 인근 동네에 살고 있던 여인이 나물을 캐다가 땅속에 묻힌 노끈을 발견하고는 잡아당겨 보았다. 그랬더니 이 노끈은 명륜당 뒤 산 쪽에서 성균관 담장 밑을 통과해서 과거시험장 안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누군가 대나무 통을 묻고 그 속에 노끈을 연결한 것이다. 그 날짜 《숙종실록》은 『이것은 과거장에 들어간 유생이 노끈을 이용해서 외부인이 작성한 답안을 받았다는 것이다.』라고 단정했다.

본격적인 수사가 시작됐는데, 이와 같은 노끈이 여러 개 발견된 사실만 추가 확인했고, 범인색출에는 끝내 실패했다. 이것은 단적인 예에 불과하다. 컨닝페이퍼를 콧속이나 붓대에 숨기기도 했고, 시험관에게 뇌물을 주거나, 남의 답 베끼기, 대리시험 보기 등등 수법도 다양하고 치밀했다고 한다. 종이로 만든 속옷에 글을 써서 입거나 아주 작은 책을 만들어 옷 속에 숨겨 들어가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 4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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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장은 난장판 2편

■ 시험장은 난장판 2편

■ 시험장은 난장판 2편

과거에 합격한 조선 선비들의 평균 나이는 마흔이었는데, 당시 평균 수명이 마흔이 안 되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그만큼 과거 시험이 어려웠음을 알 수 있다. 과거급제가 이렇듯 어렵다보니 부정행위도 아주 심하게 일어난 것이다. 온갖 부정행위가 공공연하게 성행함으로써 과거시험의 권위는 땅에 떨어져 과거의 폐단을 시정하라는 건의도 많았으나, 한번 흐려지기 시작한 제도의 결함은 걷잡을 수가 없었다. 이와 병행하여 뇌물과 정실(情實:사사로운 정에 이끌림), 문벌의 고하, 당파의 소속에 따라 급제와 낙제가 결정되니, 과거제도는 극도로 문란해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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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시험의 부정행위가 심각해지면서 시험장은 난장판이 되기에 이르렀다. 단속이 느슨한 틈을 타서 양반 자제들은 많은 수종(隨從)을 데리고 들어갔다. 수종들은 책을 가진 자, 시험지를 베껴주는 자, 외부와 연락해 시험답안지를 바꿔치기 하는 자들이었다. 예를 들면 정조 24년에 치른 과거는 10만 명 정도가 들어갔는데 답안지는 3만 명만 냈다고 한다. 그 까닭은 응시생인 양반집 자제들이 과거장에 조수 여러 명을 데리고 들어가는데, 글을 짓는 거벽(巨擘:학식이 뛰어난 사람), 글씨를 써주는 사수(寫手)가 따라 들어갔다. 과거를 보는 사람은 손도 까딱 안 하고 대리시험을 보게 하는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라 좋은 자리를 먼저 잡고 답안지를 다 쓰면 폭력을 써가면서까지 답안지를 대신 내주는 선접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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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먼저 내려고 폭력까지 쓰는 데는 까닭이 있었다. 수만 장의 답안지를 며칠 안에 다 보기 어려우니 실제로는 답안지 앞부분만 보거나, 앞에 낸 수백 장만 채점하는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었다. 과거를 통해 훌륭한 인재를 뽑는다는 본래 취지가 퇴색되고, 일부이기는 했지만 소수 힘 있는 가문의 벼슬 독점장이 되어 버린 것이다.

차술(借述) 대술(代述)하는 방법도 있었다. 시험장에 대여섯 명을 데리고 들어가 각기 답안지를 작성하고 그들 속에 제일 잘 쓴 답안지를 골라서 내는 것이다. 이것이 차술(借述)이다. 또 시험장 밖에 글 잘하는 선비를 대기시켜 놓고 종사원을 매수해서 시험 제목을 일러주면 대리 답안을 작성한다. 이 대리답안지를 다시 종사원이 응시생에게 전달하여 제출하는 것이다. 이것이 대술(代述)이다. 심지어 응시생이 시험장 안에서 일단 절차를 밟고 난 뒤 시험장을 빠져 나와 집이나 서당에 앉아 답안지를 작성한 뒤 다시 들어와 제출하는 방법도 있었다. 이 방법은 여러 종사자들을 매수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특별히 권세 있는 집의 자식들이 써먹던 방법이었다.

-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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