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0일 수요일

자승가강自勝家强 -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 강한 사람

자승가강自勝家强 -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 강한 사람

자승가강(自勝家强) -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 강한 사람

스스로 자(自/0) 이길 승(力/10) 집 가(宀/7) 강할 강(弓/8)

자신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눈이 아무리 밝아도 제 코는 안 보인다’는 속담은 제 아무리 똑똑해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는 비유다. 가까운 제 눈썹 못 본다는 目不見睫(목불견첩)과 같다. ‘너 자신을 알라(Know Thyself)’란 명언은 고대 그리스 델포이의 아폴론(Apollon) 신전 기둥에 새겨진 말이라는데 철학자 소크라테스(Socrates)가 자신의 무지를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하여 그의 격언이 됐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아무 것도 모르지만 그 사실을 아는 것이 다른 철학자보다 약간 나은 점이라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모르는 자신에게 이긴다는 것이 도대체 가능하지 않게 보인다.\xa0

스스로를 이기는 사람(自勝)이 진정으로 강한 사람(家强)이란 말은 소크라테스(서기전 470~399)보다 먼저 중국 老子(노자)의 ‘道德經(도덕경)’에 나온다. 自勝者强(자승자강)이라고도 한다. 도가의 창시자 노자는 생몰연대를 알 수 없지만 孔子(공자, 서기전 552~479)보다 약간 앞선다고 본다. 제33장 辦德章(판덕장)의 내용을 보자. ‘남을 아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고 자신을 아는 사람은 밝은 사람이다(知人者智 自知者明/ 지인자지 자지자명), 남을 이기는 사람은 힘이 있는 사람이고 자신을 이기는 사람은 강한 사람이다(勝人者有力 自勝者强/ 승인자유력 자승자강).’\xa0

남을 아는 것 보다는 자기를 아는 것이 중요하고, 남을 이기는 것보다는 자신을 이기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을 이긴다는 말은 나의 욕망을 이긴다는 말이다. 남을 이기려면 필요한 것은 힘이지만 나를 이기려면 힘만으로는 되지 않고 더 강한 의지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이어지는 말도 멋지다.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 부유하고, 힘차게 나아가는 사람이 뜻을 얻는다(知足者富 强行者有志/ 지족자부 강행자유지), 그 자리를 잃지 않는 자가 오래 가는 사람이고, 죽어도 없어지지 않는 사람이 오래 산 사람이다(不失其所者久 死而不亡者壽/ 불실기소자구 사이불망자수).’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 진정한 부자라는 知足者富(지족자부)도 여기서 나왔다.

성인의 말이야 알 듯 모를 듯 옳은 이야기라 해도 보통 사람이야 자기를 모르니 자기가 모자란다는 사실도 모르고 항상 자기가 최고다. 自勝之癖(자승지벽)은 누구에게나 있어 남의 잘못만 보이는 釜底笑鼎底(부저소정저)의 잘못을 저지른다. 제 눈에 있는 들보는 모르고 남의 눈에 있는 작은 티끌까지 들춘다. 말로 싸우는 것이 직업인 정치권은 없는 흠도 귀신같이 찾아내어 들쑤시니 특히 더하다. 동물적인 충동과 욕망을 어쩔 수 없는 인간이라 해도 부당한 유혹을 억누르는 것이 자신을 이겨내는 일일 것이다. / 글 : 안병화(전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부저유어釜底游魚 - 솥바닥에서 헤엄치는 물고기, 상황이 극히 위험한 상태

부저유어釜底游魚 - 솥바닥에서 헤엄치는 물고기, 상황이 극히 위험한 상태

부저유어(釜底游魚) - 솥바닥에서 헤엄치는 물고기, 상황이 극히 위험한 상태

가마 부(金/2) 밑 저(广/5) 헤엄칠 유(氵/9) 고기 어(魚/0)

몹시 위험한 처지에 놓여 목숨이 간당간당한 경우를 이를 때를 비유한 성어가 제법 많다. 여기저기 들쑤시며 음식을 훔치는 쥐가 독 안에 빠지면 꼼짝달싹 못하는 入甕之鼠(입옹지서)가 된다. 도마 위에 오른 고기 俎上之肉(조상지육)이나 약간 나은 못 속의 물고기와 새장의 새, 池魚籠鳥(지어농조)도 부자유스럽긴 마찬가지다.

莊子(장자)가 비유한 涸轍鮒魚(학철부어, 涸은 물마를 학)도 있다. 수레바퀴 자국에 괸 물에 있는 붕어라는 뜻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솥바닥(釜底)에서 헤엄치고 있는 물고기(游魚)도 다를 바 없는 신세다. 곧 삶길지도 모르고 놀지만 사람 목숨으로 치면 命在頃刻(명재경각), 風前燈火(풍전등화)인 셈이다.

光武帝(광무제) 劉秀(유수)가 서기 25년 재건한 後漢(후한)은 초기에는 서역까지 뻗어 국력을 과시하다가 외척과 환관의 농간으로 급격히 쇠락했다. 외척의 대표적인 인물 梁冀(양기)는 여동생이 8대 順帝(순제)의 왕후가 된 후 4대에 걸쳐 帝位(제위)도 마음대로 폐립하는 등 무소불위의 횡포를 자행했다.

이 때 하급관리 張綱(장강)이란 강직한 사람이 양기를 규탄하여 눈 밖에 났다. 윗물이 흐린데 아랫물이 맑을 수 없어 지방서도 비리가 들끓자 황제는 장강을 비롯한 8명에게 규찰을 시켰다. 장강은 더 큰 도둑을 두고 갈 수 없다며 수레를 묻고 양기를 탄핵한 埋輪攬轡(매륜남비, 轡는 고삐 비)의 고사로 남았다.

앙심을 품은 양기는 장강에게 지방관을 죽이고 모반을 일으킨 張嬰(장영)을 진압하도록 보냈다. 장강은 양기의 속셈을 알고도 두려움 없이 부임하여 장영을 설득했다. 장강의 사람됨을 믿은 장영 일당들은 살기 위해 이렇게 도적이 됐다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저희들은 마치 솥 안에서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과 같아 잠시 숨만을 쉬고 있을 뿐입니다(若魚游釜中 喘息須臾間耳/ 약어유부중 천식수유간이).’ 이들이 용서를 구하자 장강은 용서하고 평안을 찾았다.

황제는 큰 공을 세운 장강을 중용하려 했으나 양기의 반대에다 장영 등이 상소를 올리며 지역에 있게 해 달라고 애원하자 더 근무토록 했다. ‘後漢書(후한서)’ 장영 열전과 ‘資治通鑑(자치통감)’에 실려 전한다.

‘끓는 물 속 개구리’란 말이 있다. 물이 끓는 통에 넣은 개구리는 바로 뛰쳐나오지만 서서히 온도를 높이면 닥칠 위험을 인지하지 못하고 죽게 된다는 이야기다. 이런 개구리는 솥 안의 물고기보다 족을 시간이 빨리 닥쳐도 유유히 헤엄친다. 어려움을 이겨내고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경제대국으로 올라선 우리나라가 국내외 여건으로 성장이 예전만 못하다고 아우성이다.

소득이 높아지자 세금을 펑펑 쓰고 온갖 명목의 복지제도를 만들어 낭비하는 경쟁을 한다. 미래세대는 이럴 줄도 모르고 좋아하다가 솥 안의 물고기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 제도가 잘못 되어 부작용이 나타나면 고하를 막론하고 장강 같은 지사가 나타나 바로잡아야 한다. / 제공 : 안병화(전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 열흘 동안 붉은 꽃은 없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 열흘 동안 붉은 꽃은 없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 열흘 동안 붉은 꽃은 없다.

꽃 화(艹/4) 없을 무(灬/8) 열 십(十/ ) 날 일(日/0) 붉을 홍(糸/3)

꽃이 필 때 가장 아름다움을 뽐낼 시기가 있다. 하지만 그 절정의 화사함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없는 것은 자연의 이치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장 잘 나가는 전성기는 누구나 한 번 쯤은 있다. 그 시기가 곧 지나갈 줄을 모르고 기고만장하는 사람이 더 많지만 말이다.

우리 속담 ‘열흘 붉은 꽃은 없다’와 같이 ‘봄꽃도 한 때’란 말도 일상에 흔히 쓰이는데 부귀영화란 일시적인 것이어서 그 한 때가 지나면 그만이라는 것을 깨우친다.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고 한 번 성한 것이 얼마 못 가서 반드시 쇠하여짐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이 말의 쓰임이 워낙 여러 곳에 통용될 수 있어서인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어디서 먼저 사용되었는지는 뚜렷하지 않다. 처음은 아니라도 굳이 사용된 곳을 찾는다면 南宋(남송) 때의 학자이자 애국시인으로 南宋四大家(남송사대가)에 포함되는 楊萬里(양만리, 1127~1206)의 시가 있다.

‘그저 꽃이 피어야 열흘을 못 넘긴다고 하지만, 이 꽃만은 날도 없고 봄바람도 필요없다네(只道花無十日紅 此花無日無春風/ 지도화무십일홍 차화무일무춘풍)’라며 月季花(월계화)를 읊었다. 월계화는 야생장미의 일종으로 사시사철 핀다고 한다.

이런 무리한 예 말고 더 친숙하게 사용되는 대구가 있다. ‘사람의 좋은 일과 붉은 꽃의 아름다움은 열흘을 넘지 못한다(人無十日好 花無十日紅/ 인무십일호 화무십일홍)’는 말과 함께 ‘달도 차면 기우는 법, 권력이 좋다한들 10년을 채우지 못한다(月滿則虧 權不十年/ 월만즉휴 권불십년)’라고 멋지게 이어진다.

虧는 이지러질 휴. 이렇게 되면 우리나라 초기의 대중가요 ‘노랫가락 차차차’가 저절로 떠오를 것이다. ‘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 늙어지면은 못 노나니/ 화무는 십일홍이요/ 달도 차면 기우나니라’ 하며 흥을 돋운 가수 황정자의 노래였다.\xa0\xa0잘 가노라 닫지 말라고 했지만 자기만은 예외라고 거들먹거리는 사람이 많아서인지 유사한 성어는 부지기수다. 몇 가지만 들면 樂極生悲(낙극생비), 物極則衰(물극즉쇠), 物壯則老(물장즉로), 盛者必衰(성자필쇠) 등이다. / 제공 : 안병화(전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인간삼락人間三樂 - 인간이 누리는 세 가지 즐거움

인간삼락人間三樂 - 인간이 누리는 세 가지 즐거움

인간삼락(人間三樂) - 인간이 누리는 세 가지 즐거움

사람 인(人/0) 사이 간(門/4) 석 삼(一/2) 즐길 락(木/11)

사람은 저마다의 재주가 있고, 목적하는 바가 달라서 각기 느끼는 행복도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인간의 즐거움을 세 가지로 나타내보라 할 때 내세우는 것이 다르다. 욕심이 덕지덕지 엉겨 붙은 대부분의 인간은 부귀와 명예를 갖고서도 만족을 못한다. 그런데 다른 행복, 다른 즐거움을 드는 선현들이 말하는 행복은 의외로 단순하다.

먼저 모든 유학자의 영원한 스승 孔子(공자)의 三樂(삼락)을 보자. 배우고 때에 맞게 익힘(學而時習/ 학이시습),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는 일(有朋自遠方來/ 유붕자원방래),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음(人不知而不慍/ 인부지이불온)을 꼽았다. 論語(논어) 첫머리 學而(학이)편에서다.

공자 다음의 亞聖(아성)인 孟子(맹자)는 부모 살아 계시고 형제가 탈이 없는 것(父母俱存 兄弟無故/ 부모구존 형제무고), 하늘 우러러 부끄럼이 없고 굽어 봐 사람에 부끄러울 일이 없는 것(仰不愧於天 俯不怍於人/ 앙불괴어천 부부작어인), 영재들을 가르치는 것(得天下英才而教育/ 득천하영재이교육)을 들었다. 모두 남이 주는 것보다 자기가 닦는 데서 오는 것이다. 怍은 부끄러워할 작.

우리의 茶山(다산)선생은 젊은 시절 ‘수종사에서 노닐던 기록(游水鐘寺記 /유수종사기)‘에서 세 가지 즐거움을 나타냈다. ’어렸을 때 뛰놀던 곳에 어른이 되어 오는 것(幼年之所游歷 壯而至/ 유년지소유력 장이지), 곤궁했을 때 지냈던 곳을 출세한 뒤 오는 것(窮約之所經過 得意而至/ 궁약지소경과 득의이지), 홀로 외롭게 찾던 곳을 마음 맞는 벗들과 오는 것(孤行獨往之地 携嘉賓挈好友而至/ 고행독왕지지 휴가빈설호우이지)‘이다.

挈은 거느릴 설. 仁祖(인조)때 학자 申欽(신흠)의 삼락은 이렇다. ’문 닫고 마음에 드는 책을 읽는 것(閉門閱會心書/ 폐문열회심서), 문 열고 마음에 맞는 손님을 맞는 것(開門迎會心客/ 개문영회심객), 문을 나서 마음에 드는 경치를 찾아가는 것(出門尋會心境/ 출문심회심경).‘

선인들은 주변에서 누릴 수 있는 작은 행복을 찾고, 조그만 성취에도 자족할 수 있는 것을 가장 크게 쳤다. 끊임없이 행복을 추구하기만 하면 행복해질 수 없다. 자기 스스로를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서양 격언처럼 자기의 분수를 알고 그것을 사랑해야 한다.\xa0철학자 安秉煜(안병욱)의 말도 기억하자. ‘행복과 불행은 같은 지붕 밑에 살고 있으며, 번영의 바로 옆방에 파멸이 살고 있고, 성공의 옆방에 실패가 살고 있다.’ / 제공 : 안병화(전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국유사유國有四維 - 나라를 유지하는 네 가지 근본.

국유사유國有四維 - 나라를 유지하는 네 가지 근본.

국유사유(國有四維) - 나라를 유지하는 네 가지 근본.

나라 국(囗/8) 있을 유(月/2) 넉 사(囗/2) 벼리 유(糸/8)

仁義禮智(인의예지)는 사람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네 가지 성품을 말한다. 어질고, 의롭고, 예의 바르고, 지혜로움이다. 이 四德(사덕)은 孟子(맹자)가 제시했다. 仁(인)을 중시한 孔子(공자)는 ‘지혜로운 사람은 미혹되지 않고, 어진 사람은 걱정하지 않고, 용감한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는다(知者不惑 仁者不憂 勇者不懼/ 지자불혹 인자불우 용자불구)’며 智仁勇(지인용)을 세우고 예에 따라 克己復禮(극기복례)해야 인을 실천한다고 했다. 맹자는 여기에 義(의)를 더한 것이다.

유가의 사덕과 비슷할 것 같은 禮義廉恥(예의염치)는 사뭇 다르다. 체면을 차릴 줄 알며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 염치다. 그런데 이것이 나라의 기강을 세우는데 가장 중요한 구실을 한다고 管仲(관중)은 주장했다. 중국 春秋時代(춘추시대, 기원전 770년~403년) 齊(제)나라의 桓公(환공)을 도와 패업을 이루게 한 그의 저작 ‘管子(관자)’에 나온다.

본란의 破廉恥(파렴치)에 소개한 대로 예의염치가 바로 四維(사유)다. 벼리 維(유)의 벼리는 고기그물을 사방에서 동시에 거두어 올릴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줄을 말한다.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 알아야 할 이치의 서론에 해당하는 牧民篇(목민편)의 내용을 보자.

예의염치를 설명하면서 ‘나라에는 네 가지 강령이 있는데 이 가운데 하나가 끊어지면 나라가 기울고, 두 가지가 끊어지면 위태로우며, 세 가지가 끊어지면 뒤집어지고, 네 까지가 다 끊어지면 망하여 다시 일으킬 수 없다(國有四維 一維絕則傾 二維絕則危 三維絕則覆 四維絕則滅/ 국유사유 일유절즉경 이유절즉위 삼유절즉복 사유절즉멸)’고 했다.

그러면서 ‘예란 절도를 넘지 않음이요, 의란 제멋대로 나아가지 않음이고, 염이란 잘못을 은폐하지 않음이요, 치란 그릇된 것을 따르지 않음(禮不踰節 義不自進 廉不蔽惡 恥不從枉/ 예불유절 의부자진 염불폐악 치불종왕)’이라 하고 그것이 넘어서지 않을 때 사악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踰는 넘을 유, 蔽는 덮을 폐, 枉는 굽을 왕. / 제공 : 안병화(전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괄모귀배刮毛龜背 - 거북 등의 털을 긁다, 보람 못 찾고 쓸데없는 수고만 하다.

괄모귀배刮毛龜背 - 거북 등의 털을 긁다, 보람 못 찾고 쓸데없는 수고만 하다.

괄모귀배(刮毛龜背) - 거북 등의 털을 긁다, 보람 못 찾고 쓸데없는 수고만 하다.

긁을 괄(刂/6) 털 모(毛/0) 거북 귀(龜/0) 등 배(肉/5)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도 그 결과가 시원찮으면 허탈하다. 오랫동안 공들여 해 온 일이 허사가 됐을 때 곧잘 ‘십년공부 도로 아미타불’이라 한다. 처음부터 좋은 결과가 없을 것이라고 예상하고서 열심히 하는 사람은 없다.

한 때의 잘못으로 애만 쓰고 아무런 보람이 없을 때 勞而無功(노이무공), 萬事休意(만사휴의)가 된다. 그런데 남이 보기에는 성공을 못할 일에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어리석은 사람도 있다. 기름에다 그림을 그리고 얼음에다 조각을 한다는 畵脂鏤氷(화지루빙)이나, 실컷 힘들여 게를 잡고서는 놓아준다는 捉蟹放水(착해방수)가 그것이다.

‘게 등에 소금 치기’라는 속담도 두꺼운 게 껍질에 아무리 소금을 쳐 봤자 쓸데없다는 의미다. 마찬가지로 거북의 등(龜背)에는 털이 없는데도 아무리 긁어봤자(刮毛) 얻을 수가 없다. ‘거북의 털’이란 비유가 있듯이 도저히 구할 수 없는 물건을 쓸데없이 수고만 한다는 성어가 됐다.

중국 北宋(북송)의 문장가족 三蘇(삼소) 중에서 장남인 蘇東坡(소동파, 1037~1101)의 시에서 유래했다. ‘거북 등 위에서 터럭 긁어 보았자, 언제나 털방석을 만들어볼지(刮毛龜背上 何時得成氈/ 괄모귀배상 하시득성전).’ 氈은 담요 전. 동파와 교유가 있던 馬正卿(마정경)이란 친구의 도움을 받고도 고생하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한다.

우리의 문장가들도 다수 인용한 것이 고전에서 검색된다. 고려의 문호 李穡(이색, 1328~1396)은 ‘처음엔 기린 뿔에 받히나 했더니, 점차로 거북 털을 긁기와 같구나(初疑觸麟角 漸似刮龜毛/ 초의촉린각 점사괄구모)’ 하며 ‘有感(유감)’이란 시에서 읊었다. 기린의 뿔은 학문의 성취를 말한다고 한다.

조선 초의 학자 徐居正(서거정, 1420~1488)은 ‘만사는 참으로 말 머리에 뿔나기 같은데, 길은 막혀 어느새 거북 등 털 긁고 있네(萬事眞成馬頭角 途窮已刮龜背毛/ 만사진성마두각 도궁이괄구배모)’라며 세상사 있을 수 없는 해괴한 일 속에서 자신이 애써온 일이 허망할 뿐이라고 탄식한다.

한 가지 목표를 정해 두고 꾸준히 노력하라는 선현의 말은 많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라고 한 楊士彦(양사언)의 시조 구절도 남 탓 하지 말고 묵묵히 나가라고 했다. 그런데 태산이 울리더니 쥐 한 마리 나오는 泰山鳴動鼠一匹(태산명동서일필)의 결과로는 모두 허탈할 수밖에 없다.

없는 거북의 털을 깎는 어리석은 일이 아닌 박수 받는 일이라도 앞만 보고 나가다가 의외의 상황이 닥치면 방향을 트는 지혜가 필요하다. 初志一貫(초지일관)이 중요하다고 황소같이 나가다가 돌이킬 수 없는 부작용이 드러날 땐 돌이킬 수 없다. / 제공 : 안병화(전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청매죽마靑梅竹馬 - 어릴 때부터 의좋게 지낸 한 쌍의 남녀

청매죽마靑梅竹馬 - 어릴 때부터 의좋게 지낸 한 쌍의 남녀

청매죽마(靑梅竹馬) - 어릴 때부터 의좋게 지낸 한 쌍의 남녀

푸를 청(靑/0) 매화 매(木/7) 대 죽(竹/0) 말 마(馬/0)

어릴 때부터 한 동네에서 같이 놀며 자란 벗의 대명사는 竹馬故友(죽마고우)다. 장난감 죽마를 타고 놀았으니 주로 사내아이끼리의 우정을 일컫는다. 옛날 문물과 예의를 방대하게 모아 놓은 유교의 경전 禮記(예기)에서는 남녀의 구별이 엄격했다.

한부분만 봐도 남자와 여자는 섞여 앉지 않으며 옷걸이도 같이 하지 않고 수건과 빗도 따로 쓴다(男女不雜坐 不同椸枷 不同巾櫛/ 남녀부잡좌 부동이가 부동건즐)고 했다. 椸는 횃대 이, 枷는 칼 가, 櫛은 빗 즐. 이처럼 남녀가 유별하다고 교육을 받아왔으니 일곱 살만 되면 男女不同席(남녀부동석)이라고 놀이도 따로 하는 것이 당연했다.

아무리 유별하다고 해서 더 어릴 때 사내아이나 여자아이 함께 어울려 장난감으로 살림살이 흉내를 내는 소꿉놀이는 구별을 할 일이 없다. 푸른 매실(靑梅)을 장난감으로 여기는 계집아이가 죽마(竹馬)를 타고 노는 어린 사내아이와 섞여 놀 때는 남녀가 따로 없다.

엄격한 가르침을 받은 고지식한 어른들이라도 꼬마 아이들이 천진난만하게 어울려 노는 모습에선 절로 미소가 떠오를 수밖에 없다. 이들이 갖고 놀던 장난감을 합쳐 부르게 되면 남녀가 장성하고서도 의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말하는 성어가 됐다. 唐(당)나라의 詩仙(시선) 李白(이백)의 ‘長干行(장간행)‘이라는 오언고시 시구에서 비롯된 말이라 한다.

어릴 때 함께 스스럼없이 지내다 부부가 된 후 열 여섯에 먼 땅으로 떠난 남편을 그리워 찾아 나선다. 성어가 나오는 앞부분을 보자. ‘제 머리 막 이마를 덮었을 때 꽃 꺾으며 문 앞에서 놀았지요(妾髮初覆額 折花門前劇/ 첩발초복액 절화문전극), 그대는 죽마 타고 와서 난간을 뱅뱅 돌며 청매로 놀렸지요(郎騎竹馬來 遶牀弄靑梅/ 낭기죽마래 요상농청매).’ 遶는 두를 요.

長干(장간)이란 마을에서 함께 놀던 때는 두 아이가 서로 친숙하여 스스럼이 없었다는 兩小無猜(양소무시)란 말이 그 뒤에 따른다. 어릴 때를 그리워하며 수백 리 먼 길을 걸어 長風沙(장풍사)에서 반갑게 만난다는 내용이다.

두 남녀의 천진난만한 모습은 어린 시절부터 가까이 지내다 자라서도 의좋은 한 쌍의 부부가 된 행운의 경우다. 우리의 단편 명작 황순원의 ‘소나기’에서도 천진무구한 소년소녀의 이성에 눈뜨는 과정과 씁쓸한 이별을 그린다. 미소를 가져오는 이런 관계가 요즘 드러나는 모습에선 살벌한 면이 많다.

어릴 때는 느끼지 못했다가도 자라서는 남자가 여자를 해치기만 하는 존재, 여자는 남자의 앞길을 막으며 앞서가는 존재로 여긴다. 물론 그런 면이 있다고 해도 조금씩 양보하여 친밀한 관계가 회복돼야 사회가 발전하고 인류가 지속된다. / 제공 : 안병화(전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격물치지格物致知 -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온전한 지식에 이르다.

격물치지格物致知 -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온전한 지식에 이르다.

격물치지(格物致知) -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온전한 지식에 이르다.

격식 격(木/6) 물건 물(牛/4) 이를 치(至/4) 알 지(矢/3)

몸과 마음을 닦아 수양하고 집안을 다스린다는 修身齊家(수신제가)는 보통 사람이라도 지켜야 하는 덕목이다. 더 큰 뜻을 펼치려는 平天下(평천하)할 사람은 더욱 먼저 갖춰야 함은 물론이다. 이처럼 좌우명 이전의 기본인 이 말이 유교 四書(사서)의 하나인 ‘大學(대학)’에서 유래했다는 것도 상식이 됐다.

원래 孔子(공자)의 제자 曾子(증자)가 지었다고 하는데 관혼상제와 일상의 예절이 담긴 禮記(예기)에서 독립시킨 것으로 분량은 아주 적다. 대학이 오늘날 학제의 대학은 당연히 아니고, 큰 뜻을 배우고 닦는 글이란 의미로 朱熹(주희)가 저술한 大學章句(대학장구)의 연구가 집중된 데서 왔다고 본다.

대학의 수신제가 다음으로 알려진 말이 실제적 사물을 통하여(格物) 그 이치를 연구하고 온전한 지식에 이른다(致知)는 이 성어다. 格致(격치)라 줄여 써도 같다. 유학의 전문 연구자들이 오랫동안 깊이 다뤄 온 깊은 뜻을 쉽게 알 수는 없으나 와 닿는 설명들을 종합하면 治國平天下(치국평천하)의 기본이 되는 것이라 했다.

대학의 구성은 공자의 가르침인 經(경) 1장이고 증자를 비롯한 제자들이 해설한 傳(전) 10장으로 되어 있고, 제일 첫머리 三綱領(삼강령)에 이어 등장한다. 삼강령은 자신의 밝은 덕성을 밝히는 明明德(명명덕), 백성을 자기 몸처럼 아끼는 新民(신민), 지극한 선의 경지에 머무는 止於至善(지어지선)이다.

부분을 보자. 제가나 치국 등 모든 것에 앞서는 것이 수신이라며 이야기를 이어간다. ‘자신을 수양하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마음을 바르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려면 자신의 뜻을 성실하게 하며(欲修其身者 先正其心 欲正其心者 先誠其意/ 욕수기신자 선정기심 욕정기심자 선성기의),

뜻을 성실하게 하려면 먼저 지식을 넓혀 사물의 이치를 깨치는데 있다(欲誠其意者 先致其知 致知在格物/ 욕성기의자 선치기지 치지재격물).’ 주희는 이처럼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캐 들어가면 통달하게 된다고 했다. 이에 대해 明(명)의 王陽明(왕양명)은 사물의 이치를 파악하는 것을 넘어 가치의 도덕적 실천까지 이르게 하는 것이라 했다.

삼강령과 함께 八條目(팔조목)이 되는 格物(격물), 致知(치지), 誠意(성의), 正心(정심)은 修身(수신)을 위한 자신의 수양이 되고, 이후 齊家(제가), 治國(치국), 平天下(평천하)는 외적 확산의 과정이 된다. 전문적인 것을 모를지라도 한 가지 일에 집중하여 실력을 닦으면 다른 사람을 위한 일에도 성공적으로 이를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욕심이 앞서 무턱대고 나서기만 한다면 얼마 가지 않아 밑천이 들통 난다. / 제공 : 안병화(전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금의야행錦衣夜行 - 비단옷 입고 밤길을 가다, 고생하고서도 보람을 찾지 못하다.

금의야행錦衣夜行 - 비단옷 입고 밤길을 가다, 고생하고서도 보람을 찾지 못하다.

금의야행(錦衣夜行) - 비단옷 입고 밤길을 가다, 고생하고서도 보람을 찾지 못하다.

비단 금(金/8) 옷 의(衣/0) 밤 야(夕/5) 다닐 행(行/0)

삼베와 무명으로 된 옷이 보통이던 때 명주실로 짠 비단으로 옷을 해 입으면 빛이 났다. 그래서 비단옷은 부귀와 출세한 사람들이 입는 옷으로 여겨져 錦衣還鄕(금의환향)이란 말이 나왔다. 고향은 누구나 그리는 곳인데 떵떵거리는 자리에 올랐다면 자랑하고 싶어 더욱 돌아가고 싶다는 말이다.

그런데 ‘비단옷 입고 밤길 가기’란 속담과 번역한 듯이 똑 같은 이 성어는 귀한 비단옷을 입고서 밤길을 걷는다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 허탕이다. 실컷 고생을 하고서도 보람이 없게 됐거나 생색이 나지 않게 됐을 때 이르는 말이다. 또 立身揚名(입신양명)한 뒤에도 고향을 찾지 않는 것을 비유하기도 한다.

비단옷을 입고 고향을 가거나 또는 보람 없이 밤길을 걷게 되는 정반대의 상황 모두 力拔山(역발산)의 천하장사 項羽(항우)에게서 나왔다. 천하를 처음 통일한 秦始皇(진시황)이 죽은 후 각지서 호걸들이 난립할 때 명문 출신의 막강한 항우와 시골 읍장을 지낸 劉邦(유방)이 최후까지 겨뤘다.

關中(관중)을 먼저 차지한 유방은 항우가 대군으로 포위하자 뒤를 기약하며 철수하고 말았다. 민심을 다스린 유방에 비해 항우는 궁전의 금품을 약탈하고 호화 궁전 阿房宮(아방궁)을 불태웠다. 이제 천하를 손에 쥐었다고 생각한 항우는 보화와 미녀들을 거두어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다.

‘史記(사기)’의 항우본기와 ‘漢書(한서)’의 項籍(항적)전에 전하는 내용이다. 실컷 고생하고 통일을 눈앞에 두고서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항우에게 韓生(한생)이란 선비가 관중에 도읍을 정해야 천하를 호령할 수 있다고 간했다.

항우가 말했다. ‘부귀를 이루고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은 비단 옷을 입고 밤길을 걷는 것과 같다(富貴不歸故鄕 如衣錦夜行/ 부귀불귀고향 여의금야행).’ 한생이 항우를 가리켜 원숭이에 관을 씌워 놓은 沐猴而冠(목후이관)과 같다고 중얼거렸다가 가마솥에 삶겨 죽은 것은 그 후의 일이다. 능력은 있으나 속이 좁은 항우는 천하보다 고향에서 더 자랑하고 싶었던 것이다.

비슷한 뜻이지만 衣繡夜行(의수야행)으로 나온 곳은 아동용 교재 ‘蒙求(몽구)’에서다. 前漢(전한)의 대기만성 정치가 朱買臣(주매신)에게 武帝(무제)가 말한다. ‘부귀해져 고향에 돌아가지 않으면 수놓은 옷을 입고 밤길을 걸어가는 것과 같은 것이네(富貴不歸故鄕 如衣繡夜行/ 부귀불귀고향 여의수야행).’ 비단옷입고 밤길을 가더라도 중앙에서 출세를 한 뒤 고향에서 뜻 깊은 일을 하는 것은 환영할 일이다.

다만 문제는 지역의 대표자로 고향을 위해서 일하겠다고 모두에게 공언한 뒤 선출된 뒤에는 언제 봤냐는 위인들이다. 강도 없는 곳에 다리를 건설하겠다는 공약도 예사로 하는 이런 사람을 뽑는 유권자도 문제다. / 제공 : 안병화(전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빈이무첨貧而無諂 - 가난해도 굽실대지 않는다.

빈이무첨貧而無諂 - 가난해도 굽실대지 않는다.

빈이무첨(貧而無諂) - 가난해도 굽실대지 않는다.

가난할 빈(貝/4) 말이을 이(而/0) 없을 무(灬/8) 아첨할 첨(言/8)

가난을 좋아하거나 일부러 원하는 사람은 없다. 가난에 대해서 부끄럽지 않고 아무리 대범한 척 해도 불편한 생활일 수밖에 없다. 가난을 즐기지는 않더라도 일부러 벗어나기 위해 아등바등하지 않고 초연하게 보내 성어로 남은 예화가 제법 된다. 安貧樂道(안빈낙도)의 대표적인 몇 사람을 들어보자.

대나무 그릇의 밥에 표주박에 든 물만으로 簞食瓢飮(단사표음)의 생활을 하고도 학문을 즐긴 顔回(안회)가 먼저 꼽힌다. 한 달에 식사는 아홉 끼가 고작인 三旬九食(삼순구식)의 陶淵明(도연명)은 歸去來辭(귀거래사)를 남겼고, 냉이 국과 굳은 죽을 잘라 먹었다는 斷薺劃粥(단제획죽, 薺는 냉이 제)의 范仲淹(범중엄)은 岳陽樓記(악양루기)가 유명하다.

이같이 도통한 성인이 아닌 일반 사람들은 가난에 대해서 태연하기 어렵다. 더구나 한 끼의 밥을 해결하려는 사람은 죽기보다 싫다 해도 허리를 굽실거리지 않을 수가 없다. 孔子(공자)가 이와 관해서 제자와 문답을 주고받았다.

十哲(십철) 중의 한 사람이고 큰 재산을 모은 理財家(이재가)이기도 했던 子貢(자공)이 여쭈었다. ‘가난하면서도 남에게 아첨하지 않고, 부유하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교만하지 않으면 어떻겠습니까(貧而無諂 富而無驕 何如/ 빈이무첨 부이무교 하여)?’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겠는데 스승은 더 이상을 기대한다. ‘論語(논어)’ 學而(학이)편에 나오는 뒷부분을 보자.

공자는 괜찮다면서 덧붙인다. ‘가난하면서도 즐겁게 살고, 부유해도 도를 즐기는 것만 못하다(未若貧而樂 富而好禮者也/ 미약빈이락 부이호례자야).’ 가난하면서 즐겁게 살기는 어려우니 貧而樂(빈이락) 뒤에 道(도)가 빠졌다고 보고 도를 즐긴다고 해석한다.

빈자이거나 부자거나 간에 아첨과 교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스스로 지키는 바를 알아야 즐거울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禮記(예기)’에도 비슷한 구절이 있다. ‘가난하면서도 즐거움을 좋아하고,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며, 가족이 많으면서 편안해 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몇 명이나 되겠는가(貧而好樂 富而好禮 衆而以寧者 天下其幾矣/ 빈이호락 부이호례 중이이녕자 천하기기의)?’ 백성들의 잘못을 막는다는 坊記(방기)편이다.

가난한 자나 부자라도 아첨과 교만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만큼 상대를 대하는 것은 더 어렵다. 宋(송)나라의 蘇東坡(소동파)가 말한 것이 明心寶鑑(명심보감)에 인용된다. ‘상대가 부자라고 친한 척 하지 않으며, 가난한 자라고 멀리 하지 않는 것이 인간 세상에서 대장부(富不親兮貧不疎 此是人間大丈夫/ 부부친혜빈부소 차시인간대장부).’ 좀 더 여유 있는 쪽에서 마음을 넓게 베풀어야 세상이 훈훈할 텐데 가진 자의 교만에다 욕심은 잇따른다. 높은 자리에서 갑질이 그렇고 약자 상대로 한 폭리가 그렇다. / 제공 : 안병화(前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