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11일 월요일

원균과 칠천량해전 5편

■ 원균과 칠천량해전 5편

■ 원균과 칠천량해전 5편

7월 15일, 저녁 또 다시 쉬지도 못하고 죽기 살기로 도주해서 겨우 도착한 곳이 거제 북방. 거제 장목과 칠천도 사이의 좁고 긴 물목인 칠천량이었다. 조선 수군의 무덤으로 운명의 장소가 될 줄은 그때는 몰랐을 것이다. 하루 종일 쉬지도 못하고 쫓겨만 다니고 눈앞에서 동료들이 표류되어 죽어가는데 또 도주해야 했으니, 기력이 남아 있을 리가 없다. 사기는 떨어지고 모두 탈진해서 그대로 쓰러져 버렸고, 깊은 잠에 빠져든 그 시각, 이미 조선 수군을 가두는 일본군의 포위망이 완성되고 있었다.

좁은 물목 양쪽 끝을 일본군 전함들이 봉쇄하고, 칠천도와 거제도 장목에 일본군이 이미 상륙해서 점령했다. 수륙 양면으로 물샐틈없이 포위해서 모두 잠든 새벽에 기습, 협공한다는 일본군의 전략은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7월 16일 새벽에 시작된 일본군의 공격은 무자비했다. 임진년부터 이순신장군에게 계속 패하며 당했던 수모를 이번 기회에 씻으려는 듯 일본군의 각오는 대단했다.

기습당한 조선 수군은 무기력하게 격파 당했다. 명령과 지휘체계가 마비된 상태에서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 전라우수사 이억기장군과 충청수사 최호가 전사했고, 조방장 백기 배흥립은 중상을 입고 실종되었다. 조방장 김완은 함대의 후미를 맡아 싸우다 실종되었다가 포로가 되어 일본에 끌려갔다. 결국 함대는 각 수영(水營)별로 퇴각하기로 했다. 이미 지도자를 잃은 부대들은 우왕좌왕 오합지졸이었다.

경상우수사 배설은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12척의 함대를 빼내어 탈영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12척의 배는 명량해전에서 귀중한 조선함대로 쓰이게 된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배설이 도망을 간 것이 아니라 ‘작전상 후퇴’ 라고나 할까, 마지막 함대를 지키기 위해 일부러 후퇴했다고도 한다.

가리포 첨사 이응표는 직속상관인 전라우수사 이억기장군이 위기에 처했는데도 구원하지 않고 탈출했다 하여 살아서 복귀했지만 그 죄가 중하므로 파직되었고, 통제사 원균의 아우인 종사관 원전은 형과는 다르게 끝까지 싸우다 전사했다. 통제사 원균은 도주하여 중위장인 순천부사 우치적과 함께 고성 춘원포에 상륙했지만 쫓아온 일본군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

결국 7월 16일, 이 하루의 전투로 조선 수군은 삼도수군통제사 원균,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등이 모두 전사했고, 그 외 상당한 수의 장졸이 전사하고 도주하였으며 경상우수사 배설이 빼돌린 전함 12척 외의 모든 함선을 잃었다. 조선 수군의 전멸. 참담한 패전이었다. 칠천량해전으로 조선 수군은 제해권(制海權)을 상실했다.

칠천량 해전은 당일의 전투행위 자체도 졸렬하고 무능한 것이었지만, 실질적으로 이런 대패를 일으킨 것은 출정부터 칠천량에 정박하기까지의 모든 과정에 있다고 봐야 한다. 전쟁에 진 장수를 모두 비겁하고 무능하다고 평가절하하지는 않는다. 만반의 대비와 노력을 하고 혼신의 힘으로 대적해도 역부족이었다고 하면, 영웅까지는 아니더라도 비난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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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원균과 칠천량해전 4편

■ 원균과 칠천량해전 4편

■ 원균과 칠천량해전 4편

권율은 원균이 적을 두려워하여 출정을 지체하였다 하여 전령(傳令)을 보내어 곤양(昆陽)으로 불렀다. 11일에 권율이 곤양에 도착하자 원균도 명령을 받고 도착했다. 권율이 곤장을 치면서 말하기를, "국가에서 너에게 높은 벼슬을 준 것이 어찌 한갓 편안히 부귀를 누리라 한 것이냐? 임금의 은혜를 저버렸으니 너의 죄는 용서 받을 수 없는 것이다."라 호통치고 돌려보냈다. 통제사가 도원수에게 소환되어 가서 부하들 앞에서 곤장까지 맞는 수모를 당한 초유의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원균은 곤장을 맞은 뒤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홧김에 출전하고 싶은 생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날 밤 한산도의 전 함대를 거느리고 부산으로 향하였다. 7월 11일 곤양에서 곤장 맞고 한산도에 도착하는데 하루 잡고, 그리고 군사와 함대를 모두 집결시켜 출발하는데 최소 1~2일 잡는다면, 출전 일시는 14일이 유력하다.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경상우수사 배설 등의 지휘관과 조선 함대 169척, 귀선(龜船) 3척, 병력 1만 이상을 이끌고 출전한 후 부산포 근처 다대포에 정박했다.

판옥선은 격군(格軍:노젓는 병사)이 노를 저어 큰 전함을 움직이는데, 바람과 조류도 따져보지 않고 무작정 출전해서 역조류를 헤치고 가야 하는 상황이었으니 얼마나 힘든 일이었을까? 그것도 하루 만에 그 거리를 갔다면, 한마디로 이건 통제사 원균이 함대를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로 엄청나게 몰아댔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지휘관으로서는 엄청난 바보 같은 행동이다. 쉬지 못하고 체력이 바닥난 격군들로 판옥선은 전투 불능상태에 빠지게 된 것이다. 만약에 통제사 원균이 제대로 된 장수라면, 수군 장수로서 바다를 알고 배를 아는 사람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실수이다. 아니 실수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 1만이 넘는 대군과 1백척이 넘는 대 함대, 그리고 나라의 운명을 어깨에 짊어진 장수의 무능과 무지는 죄악이다.

통제사 원균의 가장 큰 잘못은 자신의 역량 이상의 분수에 넘치는 자리를 탐했던 것이고, 칠천량해전은 그 대가를 치른 것이다. 자신의 무능 때문에 그 수많은 사람을 허무하게 죽게 만들고, 나라를 망하게 할 뻔 했다.

부산 앞바다에서 일본 대 선단을 만나 소규모 전투를 벌이다가 탈진한 조선 수군함대는 도주해서 겨우 부산과 거제 중간 지금의 가덕도에 도착했다. 병력 4백 명이 식수를 구하는 한편, 잠시 숨을 돌리려 했더니 일본군이 먼저 와서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매복에 걸린 것이다. 통제사 원균은 가덕도에 상륙한 병력을 그냥 두고 그대로 도주해 버렸다. 가덕도에 상륙한 병력들은 모두 일본군에게 몰살당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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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균과 칠천량해전 3편

■ 원균과 칠천량해전 3편

■ 원균과 칠천량해전 3편

이 기문포 해전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패전(敗戰)이다. 그리고 심각한 외교 문제까지 야기 시킬 뻔 했다. 또 약속을 어기고 신의 없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으니 나라의 위신이 실추되었고, 조선의 지휘관들 사이에 서로 업무 협조가 원활하지 않다는 약점을 일본군이 훤히 알게 하였다. 선조를 기망(欺罔:기만)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기망조정(欺罔朝廷). 이순신장군이 파직되고 백의종군된 이유였다. 통제사 원균의 실책은 실로 무겁고, 중대한 사안이다. 그런데 왜 원균은 처벌도 없이 유야무야된 것일까? 같은 사안에 대해 조정 대신들은 왜 이순신장군은 그렇게 탄핵해 놓고, 원균에 대해선 입을 닫고 있었을까? 열심히 나라를 지킨 이순신에 대한 질투에서 야기된 그릇된 탄핵과 인사에 대한 잘못을 스스로 인정하기 싫어서인 것은 아닐까?

이후 원균은 선조의 기대와는 달리 이순신과는 전혀 다른 행보를 걸었다. 작전은 고사하고 이순신이 만든 조선 수군의 작전회의실 운주당(運籌堂)에서 기생을 불러다 같이 놀며 술을 마시기도 했다. 일본군은 조선 수군을 부산 근해로 유인해 섬멸하려고 일본의 이중첩자인 요시라(要時羅)를 시켜 유혹했다. 이에 도원수 권율(權慄)은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과 상의해 원균에게 출전명령을 내렸다.

이순신의 후임으로 임명된 원균도 통제사가 되기 전의 자기주장과는 달리 사태의 불리함을 깨닫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출전하지 않는다. 특히 육군의 엄호 없이는 출전할 수 없다며 3월 29일 장계를 통해 30만 대군으로 안골포, 가덕도 등지의 적을 몰아내야 한다는 비현실적인 장계를 올린다. 조선 육군의 병력 규모를 몰랐거나, 부산포 공격이 현실적으로 어려움을 알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무리한 요구를 해서 출정을 피하려 한 듯하다.

통제사 원균은 또다시 조정의 재촉을 받고 어쩔 수 없이 6월 18일 한산도 통제영을 출발, 거제 장문포를 거친 다음 안골포와 가덕도를 공격했는데, 적선 2척을 빼앗았을 뿐, 큰 성과없이 철수했다. 이 전투에서 평산만호 김축이 부상을 입고, 보성군수 안홍국이 탄환을 맞고 전사했다. 전선(戰船)의 피해는 없었지만, 주요 지휘관에 사상자가 발생한 것은 상당한 손실이었다.

원균은 이 출전으로 왜선 10척을 부수고 판옥선 32척을 잃는, 이순신 시절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패전을 한 뒤 한산도로 돌아왔다. 이전까지 원균은 전투 지휘관으로서 능력을 제대로 보여준 적이 없었는데, 이 전투에서 원균이 사실상 처음 보여준 지휘 능력은 말 그대로 최악이었다. 그렇게 성과 없이 엄청난 손실만 입고 철수해 돌아온 통제사 원균에게는 반갑지 않은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선조도 이제는 계속된 작전 실패와 패전에 크게 실망하면서 원균에게 최후 통첩성 경고를 했다. 그리고 도원수 권율 장군의 소환명령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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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균과 칠천량해전 2편

■ 원균과 칠천량해전 2편

■ 원균과 칠천량해전 2편

임진왜란 중 명나라와의 화의가 결렬되자, 일본은 1597년 1월 다시 조선을 침범했다. 일본은 지난번 조선 침범이 실패한 것은 바다를 제패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하여 조선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수군을 이겨야 한다는 각오 아래 만반의 준비를 갖춘 상태였다. 당시 조선에서는 이순신(李舜臣)이 무고로 하옥되고 대신 원균이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어 있었다.

1597년 3월 9일, 거제도 기문포(器問浦)에 왜선 3척이 정박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원균은 군사들을 이끌고 나갔다. 이때만 해도 휴전상태가 유지중이어서 경상우병사 김응서와 일본군 사이에 거제의 일부 섬 지역에서 나무를 베는 사람은 공격하지 말기로 협의가 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원균이 공격했던 자들은 바로 그 나무를 베러 온 병력들이었던 것이다. 이 일본군들이 놀라서 숨으니, 원균은 항왜(降倭:투항 일본인)를 보내 술과 먹을 것을 주고 안심시킨 뒤 돌려보낸 후, 그 뒤를 따라가 공격을 했다. 일본군들이 살려줘서 고맙다고 고개를 조아리며 돌아가는 것을 뒤에서 기습한 것이다.

아무리 전공(戰功)이 탐이 나더라도 너무 비겁하지 않은가. 하지만, 이 때 오히려 일본군에게 반격을 받아 임진왜란 최초로 해상에서 판옥선 1척을 탈취 당하고 말았다. 판옥선 안에 실린 화포와 화약, 기타 무기까지 모두 빼앗길 판이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우리 수군은 탈취 당한 판옥선을 집중 공격해서 태워 버렸다. 우리 손으로 귀중한 판옥선 한 척을 없애버린 것이다. 적선 3척을 빼앗고 적 47명을 참수했지만, 우리는 판옥선 1척을 잃고, 그 판옥선의 지휘관 고성현감 조응도를 포함해서 판옥선 내의 병력 1백 이상을 잃었다. 일본군보다 아군의 피해가 더 크다는 소리다. 이 기문포해전은 과연 승전(勝戰)인가? 패전(敗戰)인가? 원균은 이 해전에 대해 왜구의 목을 쳐 몰아냈다고 장계를 써 올렸으니 선조는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삼도수군통제사에 원균을 임명한 선조가 자신의 안목에 흡족해 있을 때, 곧바로 다른 내용의 후속 보고가 잇따라 올라오면서 이 일의 진상이 밝혀졌다. 경상도 관찰사의 장계에 고성현감 조응도가 3월 8일 판옥선에 병력 140명으로 출천했다가 패전하고 전사하였으니, 새 현감을 보내달라는 내용이다. 그리고 연이어 도원수 권율 장군의 상세 보고가 올라오고 당연히 일본 측은 휴전(休戰) 기간임을 내세워 항의했고, 조선 조정은 당황했다. 결국 원균에게 줄 포상은 없던 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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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균과 칠천량해전 1편

■ 원균과 칠천량해전 1편

■ 원균과 칠천량해전 1편

원균은 임진왜란·정유재란을 통틀어 조선 수군이 유일하게 대패(大敗)한 칠천량해전을 이끌다 전사(戰死)했다. 그것도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도망치다가 전사한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에게 이순신장군이 민족의 영웅으로 각광 받는 것과는 달리, 원균은 임진왜란 중 대표적인 비겁하고 무능한 장수로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대패의 참극(慘劇) 그 모든 과정이 원균만의 잘못이었을까? 당시 왕인 선조와 조정 신료들, 그들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이순신을 파직하고 원균에게 우리 수군을 맡긴 것이 바로 그들이고, 원균의 인사가 잘못되었음을 기문포해전에서 이미 간파했음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조처를 취하지 않았고, 무작정 바다로 그를 내몰았던 것이다. 우리가 역사를 알아야 하고, 그 속에서 교훈을 얻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똑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그러나 역사는 되풀이 된다고 했던가.

무신 집안에서 태어난 원균(1540~1597년)은 어려서부터 무예에 뛰어나고 용맹했다고 한다. 1592년(선조 25년)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거쳐 조산만호(造山萬戶)로 있을 때, 변방의 오랑캐를 무찌른 공으로 조정으로부터 신망을 얻어 부령부사로 특진하였다. 그러다가 다시 종성으로 옮겨 병사 이일(李鎰)을 따라 시전부락(時錢部落)을 격파하는 데도 공을 세워 경상 우수군절도사(右水軍節度使)로 임명되었고, 3개월 뒤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임진왜란은 양국 간의 전쟁 준비 격차로 인해 전쟁 발발 초부터 우리의 일방적인 패주(敗走)의 연속이었다. 관군을 이끌던 명관(名官)들은 앞 다투어 도주하고, 백성들은 모두 산간으로 피난해 성읍(城邑)이 모두 텅 빈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 수군 제일의 요충인 경상좌수영의 수사 박홍(朴泓) 이하 모든 장병이 도주해 싸워보지도 못한 채 완전 궤멸되었고, 원균이 이끄는 경상우수영 관할의 장병들도 거의 흩어져 휘하에는 약간의 장병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원균은 흩어진 군사를 수습해 고군분투하면서 몇 차례에 걸친 원병 요청 끝에 마침내 전라좌수영의 이순신장군의 원병이 도착하자 합세해 옥포(玉浦)·당포(唐浦) 등지에서 연전연승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포상 과정에서 이순신과의 공로 다툼이 심해 불화가 발생하였다. 급기야 1593년 8월 이순신이 신설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에 임명되어 지휘권을 장악하자 원균은 이에 크게 반발했고, 이듬해 12월 충청병사로 전출되었다가 얼마 뒤에는 전라좌병사로 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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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 언제까지 소비자가 입증책임을 해야 하나

◇ 언제까지 소비자가 입증책임을 해야 하나

◇ 언제까지 소비자가 입증책임을 해야 하나

‘운전자가 당황한 나머지 브레이크가 아닌 가속페달을 밟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자동차 급발진 사고에 대한 거의 굳어진 공식이다. 자동차는 부품 약 3만개의 복잡한 제품이다. 가느다란 전선 가닥 하나가 끊어지거나 합선이 돼도 사고를 일으킬 수 있다. 솔직히 제조사조차 그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하물며 이를 소비자에게 입증하라는 건 무리다.

최근 이런 점을 반영한 전향적인 판결들이 조금씩 보인다. 서울중앙지법이 지난해 11월 BMW 급발진 사건 항소심에서 제조사가 유가족들에게 4000만원씩 배상하도록 한 것이 대표적이다. 재판부는 과속 범칙금 전력이 없는 60대 운전자가 시속 200㎞ 넘게 질주한 정황을 그 증거로 인정했다. 여기서 주목할 대목은 ‘급발진이 아니란 근거를 BMW가 제시하라’고 재판부가 요구했다는 점이다. 입증책임이 논란이 되는 또 다른 분야가 의료사고다. 심각한 의료사고에서조차 입증책임을 피해자에게 요구하는 바람에 의료기관이 면책받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하지만 의사가 잘못 시술했다는 사실을 환자 측이 입증하기가 좀 어려운가.

지난 12일 가습기살균제 사건으로 기소된 SK케미칼과 애경산업 전 임원들이 1심 법원에서 무죄를 받으면서 입증책임이 다시 거론되고 있다. 가습기살균제로 피해를 입었다는 점을 소비자 측이 입증하지 못했다는 판결이 지나치게 소비자에게 가혹한 게 아니냐는 것이다. 반대로 ‘살균제로 피해가 발생한 게 아니다’라는 증거를 제조사가 제시하도록 해야 사회정의에 부합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

법무부는 지난해 9월 피해자의 입증책임을 줄여주는 집단소송법 제정안을 냈다. 제정안에 따르면 피해자는 밝힐 수 있는 데까지만 개략적인 피해를 주장하면 된다. 반면 제조사는 구체적으로 증명해야 하고, 정당한 이유가 없으면 피해자 주장을 진실로 인정할 수 있게 했다. 날로 복잡해지는 정보기술(IT) 기기나 전문적 의약품·의료기, 화학제품 등이 늘어나는 현대사회에서 소비자의 방어권은 강화되는 쪽으로 가는 게 맞다. 가습기살균제 사건처럼 피해자가 광범위할 경우엔 더욱 말할 것도 없다. “아픈 내 몸이 증거”라는 피해자의 절규만으로 입증책임이 완성되는 세상이 속히 오면 좋겠다.

-경향신문-

◇ “집콕 지친다” 5인 미만 취미수업 '하늘의 별따기'

◇ “집콕 지친다” 5인 미만 취미수업 하늘의 별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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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콕 지친다” 5인 미만 취미수업 하늘의 별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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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리·그림… 일일 강습에 커플들 몰려

서울 도봉구에서 캔들(양초) 공방을 운영하는 장윤지씨는 이달 들어 하루도 쉬지 못했다. 지난달 초 사회적 거리 두기 2.5단계가 적용된 이후 손님이 4배나 늘었기 때문이다. 장씨는 1인당 5만원을 받고 향초 만드는 법을 가르친다.

장씨는 “원래 사흘에 한 번 정도 문의가 왔었는데 요즘에는 하루에 3~4건씩 온다”며 “일주일에 10명 남짓했던 손님도 40여명으로 늘었다”고 했다. 주 고객층은 ‘소셜미디어와 포털 검색을 보고 왔다’는 젊은 커플들이다. 장씨는 “손님 10명 중 8명은 밖에서 만날 곳이 없어 찾아오게 됐다고 하더라”고 했다.

코로나 여파로 젊은이들 사이에서 서너 명 안팎의 ‘소규모 모임’이 빠르게 늘고 있다. 데이트 공간 역할을 톡톡히 했던 카페들이 일제히 매장 영업을 중단해 마땅히 갈 곳이 사라졌고 ‘5인 이상 집합 금지’로 단체 만남까지 제한된 탓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책·음식 만들기와 같은 취미 수업부터 헬스·필라테스 개인 강습 등 다양한 모임들이 빠르게 생겨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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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윤모씨는 지난달 여자 친구와 함께 ‘북바인딩(책 제본)’ 수업을 예약하려다 결국 실패했다. 한 달치 예약이 모두 꽉 차 있었기 때문이다. 윤씨는 “‘집콕 데이트에 지친 커플들이 이런 ‘원데이 클래스(일일 수업)’에 많이 몰리는 것 같다”고 했다. 서울 서초구의 푸드 스타일링수업 ‘스튜디오 페이지’ 운영자 김지현씨는 “작년 11월까지만 해도 수업을 개설하면 예약 마감에 한 달쯤 걸렸는데 최근엔 이틀이면 끝난다”며 “수강생들에게 물어보니 ‘코로나를 계기로 돌아보니 지금 하는 일의 미래가 불투명해 보인다거나, 새로운 자극이 필요해서 신청한다’고들 하더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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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와 수강생을 연결해주는 앱 ‘숨고’에 따르면, 작년 2분기(4~6월) 58만건이었던 그림·요리 배우기 같은 취미 수업 개설 건수는 3·4분기에 각각 80만, 89만건으로 늘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코로나 장기화로 스트레스가 높은 상황인 데다 모임 등 사회적 활동도 줄었다”며 “미술·공예와 같은 취미 수업을 통해 심리적 안정과 함께 성취감을 얻을 수 있어 인기가 높은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조선일보-

◇ 정장에 발목양말 신으면 안 되나요?

◇ 정장에 발목양말 신으면 안 되나요?

◇ 정장에 발목양말 신으면 안 되나요?

▶ 남자 양말 길이 선택법

직장인 김모씨는 최근 정장 바지에 발목이 드러나는 양말을 신었다가 직장 상사에게 “예의가 없다”는 말을 들었다. 김씨는 “평상시 TPO(시간·장소·상황)에 맞게 옷을 입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당황했다”며 “양말 길이도 상황에 따라 달라져야 하는 줄 몰랐다”고 했다.

과거엔 남자 양말의 종류가 단조로웠다. 최근엔 남자 양말도 긴 양말부터 발목, 페이크 삭스에 이르기까지 다양해지고 있다. 남자의 양말, 어떤 장소에서 어떤 길이가 적당할까.

패션 칼럼니스트 이헌씨는 “남자가 구두를 신을 때는 어떤 구두인지에 관계없이 살이 보이지 않아야 하는 게 신사 패션의 불문율”이라고 했다. 이씨는 “최근에는 전 세계적으로 약간의 변칙이 생겨서 아예 양말 없이 구두를 신는 스타일링도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했다.

구두에 양말을 신을 때는 앉았을 때도 살이 보이지 않도록 목이 긴 양말을 고르는 게 좋다. 색깔은 구두나 양복바지와 맞추거나 그보다 조금 진한 색을 추천한다. 양말을 안 신기로 한 경우에도 비장의 무기는 있다. 발에 땀이 많다면 발바닥만 감싸고 구두 밖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덧신 모양의 ‘페이크 삭스’ 등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반바지를 입을 때는 발목 정도까지 오는 양말이 보기에 안정적이다. 이씨는 “반바지를 입었는데 짧은 양말을 신으면 균형이 맞지 않는 느낌”이라며 “나 같은 사람은 지하철을 타고 가다 그런 모습을 보면 안절부절못한다”고 했다.

두툼한 스포츠 양말은 푹신한 착용감과 땀 흡수를 잘하도록 설계돼 있다. 운동이나 야외 활동을 위해 양보하자. 운동할 때 열이 많이 나는 사람의 경우 이때 발목 양말을 신으면 좋다. 샌들이나 슬리퍼에는 양말을 안 신는 게 보기에 자연스럽다.

이씨는 “최근 연예인 봉태규씨가 치마를 입고 나왔듯 자신이 패션으로 잘 소화하기만 한다면 뭐든지 불가능은 없다”면서도 “일반인의 경우 오랜 규칙을 거스르면서도 촌스럽거나 어색해 보이지 않으려면 상당한 ‘멋 내공’이 필요하기에 규칙을 지키는 편이 안전하다는 것”이라고 했다.

-조선일보-

◇ 트럼프의 뒷모습

◇ 트럼프의 뒷모습

◇ 트럼프의 뒷모습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아름다운 퇴장’을 거론할 때 자주 인용되는 시인 이형기의 시 ‘낙화’ 첫 구절이다. 이 시구는 적어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집권 4년은 물론 대선 후 ‘79일간 권력이양기’에 그가 보여준 모습은 아름다움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는 당선자에게 축하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추악함의 정점은 조 바이든 대통령의 취임식 불참이다. 트럼프는 20일 오전(현지시간) 열릴 취임식 참석 대신 대통령 전용 헬기 마린원을 타고 앤드루스 공군기지에서 ‘셀프 환송’을 연다고 한다. 그 후에는 전용기 에어포스원을 타고 플로리다주 거주지 마러라고로 떠난다. 현직 대통령의 취임식 불참은 역대 44명 대통령 가운데 2대 존 애덤스, 6대 존 퀸시 애덤스, 8대 마틴 밴 뷰런, 17대 앤드루 존슨, 28대 우드로 윌슨 5명밖에 없던 일이다. 취임식 패싱은 트럼프의 마지막 ‘몽니’다. 화합과 통합의 상징인 취임식에 불참함으로써 갈라진 미국에 기름을 부으려는 의도다.

“당신의 성공이 곧 우리나라의 성공이다. 나는 당신을 열렬히 응원한다. 행운을 빈다.” 재선에 실패한 41대 조지 HW 부시가 떠나기 전 후임자인 빌 클린턴에게 남긴 손편지 내용이다. 손편지 쓰기는 부시 전임자인 로널드 레이건이 시작한 아름다운 관행이다. 트럼프도 버락 오바마로부터 손편지를 받았지만 바이든에겐 남기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오바마의 손편지는 “우리의 선조들이 피 흘려 싸워 지킨 법의 지배와 권력 분립, 평등권과 인권 등과 같은 민주적 제도와 전통의 수호자가 되도록 해준다”는 대목 때문에 트럼프의 실패를 예고한 것으로 관심을 끌기도 했다. 트럼프는 취임 후 오바마 손편지를 자랑했지만 그의 충고를 새겨듣지는 않았다.

트럼프는 역대 가장 실패한 대통령상을 남겼다. 대선 불복, 의회의사당 점령 선동, 하원 탄핵 2차례 가결은 초유의 기록이다. 잘못된 지도자의 선택이 가져온 대가는 컸다. 하지만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그가 뿌린 분열의 씨앗 때문이다. 트럼프는 떠나지만 ‘트럼프 유령’은 여전히 전 세계를 배회할 것이다.

-경향신문-

◇ 한국 절들은 왜 산에 있을까?

◇ 한국 절들은 왜 산에 있을까?

◇ 한국 절들은 왜 산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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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8년 유네스코는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을 인류가 지키고 보존해야 할 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그런데 등재 명칭 9글자에 산사와 산지 승원이라는 산과 관련된 표현이 두 번이나 등장한다. 한국사찰의 특징을 산사로 잡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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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진짜 그럴까? 과연 국교가 불교였던 신라나 고려의 왕들은 고승을 찾아 산사로 갔을까? 그러다가 여차해서 정변이 일어나면 어떡하지?

붓다 당시 인도에 산사는 없었다. 오늘날도 밥을 해 먹는 건, 여간 많은 시간과 관련 노동을 필요로 하는 일이 아니다. 이 때문에 1인 가구는 되도록 밖에서 음식을 해결하며, 먹는 횟수 자체를 줄인다. 붓다 역시 같은 생각을 했다. 해서 승려는 하루에 1끼만 먹고, 신도들의 보시를 통해 먹는 것을 해결하도록 제도화한다. 이는 출가한 승려가 시간의 낭비 없이 수행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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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에게 음식을 공급받기 위해 사찰은 마을과 멀어서는 안 된다. 때문에 율장의 방사건도(房舍犍度)에는 사찰의 위치를 마을과 멀거나 가깝지 않은 곳으로 규정하고 있다. 가까우면 소란스럽고, 멀면 음식 공급에 어려움이 따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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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불교에서도 최고의 사찰은 모두 도시에 있었다. 신라를 대표하는 사찰인 황룡사는 진흥왕이 새롭게 왕궁을 건설하던 과정에서 황룡이 나타나자 사찰로 바꾼 곳이다. 왕궁지가 산에 있을 리 만무하지 않은가? 고려 시대에도 수도를 대표하는 사찰인 흥왕사(興王寺)나 영통사(靈通寺) 등은 모두 개경 안에 있었다. 그래야 국왕과 고승의 교류에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산사란 대체 무엇일까? 불교 시대에는 절이 너무나 많다 보니, 도시 사찰이 포화되어 산에까지 절이 들어서게 된다. 또 명상을 중시하는 선종에서는 도시보다 산에서 자급자족하는 방식을 택하곤 했다. 마치 중세 유럽의 가톨릭 수도원이나, 우리나라의 기도원 같은 곳을 생각하면 되겠다.

이런 포화상태에서 조선이 들어서자, 불교는 하루아침에 전 왕조의 이데올로기로 낙인찍히며 탄압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이때 집중포화를 당한 곳은 단연 도심 사찰이다. 즉 유럽으로 말하면, 도시 성당은 파괴되고 산속의 수도원만 남은 셈이라고나 할까!

그럼 왜 산사는 살아남은 것일까? 여기에는 일차적으로 산사라는 특성상 파괴하러 가기도 어렵고, 또 굳이 없앨 필요도 없는 측면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조선 정부 입장에서도 필연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산이 많다 보니 물류 유통이나 역참 운영에 있어, 산 안에 중간 거점이 필요하다. 또 전쟁이 발발할 때, 산사는 진지와 같은 방어기지의 역할로 전용될 수 있다. 이것이 산사가 남게 되는 실질적인 이유이다.

불교 시대의 주류였던 도시 사찰이 사라지고 산사만 남자, 오늘날 불교는 산사가 정석인 것처럼 되어 버렸다. 고려 시대를 대표하는 건물로 우리는 흔히 부석사 무량수전과 수덕사 대웅전을 꼽고는 한다. 그러나 고려를 대표하는 최고 건축물은 당연히 수도인 개경에 있지 않았을까? 개경에서 볼 때, 부석사와 수덕사의 위치는 변방의 시골에 불과하다. 즉 진짜 대단했던 것이 아니라, 살아남았기 때문에 대단하게 인식된 것이라는 말이다. 때문에 한국 불교의 전통이 산사로 규정되는 것은, 고즈넉한 동시에 역사적인 비극을 내포한다고 하겠다.

중세까지 종교시설은 도시의 가장 한복판에 위치했다. 이는 유럽의 성당들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한국의 사찰은 도시의 흔적마저도 완전히 사라진 것일까? 이는 건축에서, 나무를 재료로 하는 짜맞춤 방식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목조는 화재의 취약성도 크지만, 건물의 개변 역시 용이하다. 즉 화재로 인한 소실과 용도변경이 쉬웠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산사는 오늘날의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동시에 비주류의 미감인 셈이다. 마치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이 소실되자, 이궁인 창덕궁이 258년간 정궁의 역할을 수행한 것처럼 말이다. 물론 이 때문에 창덕궁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다. 이점 또한 산사와 매우 유사하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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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자현 스님(중앙승가대 교수)의 아제아제 바라아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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