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일 화요일

마요네즈·토마토, 냉장 보관하시나요?

마요네즈·토마토, 냉장 보관하시나요?

마요네즈·토마토, 냉장 보관하시나요?

모든 식품은 냉장고에 보관해야만 안전할 것 같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냉장고에 보관했을 때 맛이 떨어지는 식품이 있다. 헷갈리기 쉬운 식품의 보관법에 대해 알아본다.

◇마요네즈·토마토, 냉장 보관 안 좋아

마요네즈는 저온에 보관하면 상하기 쉽다. 마요네즈는 계란 노른자, 식초, 식용유, 소금 등을 섞어 만드는데 저온에 보관하면 성분들이 분리된다. 한번 분리되면 재결합이 불가능하고, 세균 번식을 막는 식초 층이 분리돼 세균 번식이 쉬워진다. 약 10~20℃에서 보관해야 성분이 분리되지 않기에 서늘한 곳에서 보관하면 된다.

토마토도 냉장 보관하지 않는 것이 좋다. 냉장고의 찬 공기가 토마토의 수분을 빼앗아 풍미가 떨어질 수 있다. 가급적이면 냉장고보단 햇볕이 없는 서늘한 곳에서 보관하는 것이 좋다.

◇견과류는 반드시 냉장보관해야

견과류는 반드시 밀봉해서 냉장 보관해야 한다. 실온 보관 시 아플라톡신이라는 곰팡이가 생길 수 있다. 아플라톡신은 발암성 독성물질로 성장 장애, 발달 지연, 간 손상 및 간암을 유발할 위험이 있다. 맛도 안 좋아진다. 견과류 속 불포화지방산이 공기나 햇빛에 접촉해 산화되면 맛이 변질되고 악취가 생길 수 있다. 장기간 보관할 때는 냉동보관을 해야 한다. 견과류 껍질을 까놓으면 곰팡이 증식이 활발해질 수 있어 알맹이만 있는 견과류 보관 시 더 주의해야 한다.

빵도 실온에 보관하면 신선도가 떨어지고 곰팡이가 생기기 쉽다. 냉장 보관하면 수분을 빨리 증발시킬 수 있음으로 냉동실에 보관 하고, 1회 섭취량만큼만 실온이나 냉장 보관 해 1~2일 이내에 먹는 것이 좋다.

2024년 4월 1일 월요일

우리 몸에 좋은 과일 7가지

우리 몸에 좋은 과일 7가지

우리 몸에 좋은 과일 7가지

1. 키위

포타시움 마그네시움 비타민E와 섬유질이 풍부합니다. 비타민C는 오렌지의 두배나 있습니다.

2. 사과

하루에 사과 한 알씩이면 의사가 필요 없다지요. 비록 비타민C는 적지만 플라보노이드가 있어서 비타민C의 작용을 향상시키기 때문에 직장암 심장마비 중풍의 위험을 낮추어 줍니다.

3. 딸기

몸을 보호하는 과일입니다. 과일가운데 항산화제가 높아서 암을 유발하고 혈액을 응고시키는 물질에서 몸을 보호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4. 오렌지

매우 귀한 과실이지요. 하루에 2-4개 먹으면 감기 안 걸리고 콜레스트롤을 내리고 신장결석을 녹여주고, 직장암 위험을 감소시킵니다.

5. 수박

갈증 해소에 최고입니다. 92%가 물이고 글루틴이 많아 면역을 높이고 암을 이기는 항산화제가 많습니다. 비타민C와 포타시움도 많습니다.

6. 구아바와 파파야

비타민C가 풍부하고 섬유가 많아서 변비에 좋습니다. 파파야는 카로틴이 많아서 눈에 좋습니다.

7. 보라색 과일

포도와 블루베리는 대표적인 보라색 과일입니다. 포도는 적포도주의 심장병 예방 효과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껍질에 들어있는 플라보노이드는 동물성 지방이 혈관에 달라붙는 것을 막고 좋은 콜레스테롤 수준을 높여줍니다.

뱃살 감량을 위해 피해야 할 음식

뱃살 감량을 위해 피해야 할 음식

뱃살 감량을 위해 피해야 할 음식

▶정제된 탄수화물

과자/빵/케이크 등 가공된 탄수화물은 혈당을 급격히 상승시킨다. 이때 혈당을 낮추는 인슐린이 포도당을 글리코겐으로 변환해 지방세포로 저장한다. 이러한 과정을 반복하다보면 인슐린에 대한 감수성이 떨어지면서 더 많은 인슐린을 분비. 결국 뱃살이 늘어나게 된다.

▶포화 지방·트랜스 지방

육류나 유제품에 풍부한 포화지방, 마가린과 같은 트랜스지방은 혈관 내 노폐물 축적을 부추겨 혈액순환을 방해하여 지방 대사를 방해한다. 단, 무작정 지방 섭취를 줄이다보면 상대적으로 탄수화물 섭취량이 많아서 중성지방 수치가 증가하면서 내장지방이 생길 수 있다. 따라서 포화지방은 전체 칼로리의 7% 이내로 섭취하도록 하자.

▶짠 음식

우리 몸은 하루 5g 이상 소금을 섭취하면 조직 내에 수분을 축적시켜 염분을 희석하려고 한다. 이는 뱃살 및 부종의 원인이 되며 셀룰라이트까지 악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뱃살 빼는 음식

뱃살 빼는 음식

뱃살 빼는 음식

▶고단백 음식_콩류

신체 근육 발달을 도와 체지방 연소를 촉진해 주는 단백질은 다이어트 필수적인 영양소. 이때 지방이 섞인 육류보다는 섬유질과 단백질이 풍부한 콩을 섭취해주면 더욱 좋다. 콩은 열량이 낮아 저칼로리로 포만감을 주기 때문이다. 만일 육류를 섭취할 때에는 단백질 함량이 높은 돼지고기나 소고기 살코기 부위, 껍질을 벗긴 닭 가슴살을 이용하도록 하자.

▶식이섬유가 풍부한 채소와 과일

식이섬유가 풍부한 채소와 과일은 천천히 소화되면서 장시간 포만감을 준다. 또한 과도한 인슐린 분비를 억제해 배에 포도당이 지방세포로 저장되는 것을 방지해준다.

▶물

체내 수분이 부족해지면 체지방 연소를 방해하며 몸을 지치게 만들어 활동량이 감소하게 된다. 또한 물 속에는 체내 불필요한 지방을 연소시킬 때 필요한 산소도 함유되어 있어 평소 수시로 물을 마셔주면 뱃살 감량에 도움이 된다.

▶견과류

호두, 잣, 아몬드 등 견과류에는 체지방 분해를 돕는 불포화지방산과 혈액순환을 촉진해주는 비타민E가 풍부하게 들어 있다. 단, 견과류는 열량이 높은 식품으로 지나치게 많은 양을 섭취하면 오히려 다이어트에 방해가 될 수 있다.

▶해조류

김, 미역, 다시마에 들어 있는 요오드와 미네랄 성분은 혈액순환을 원활히 해주고 소화를 촉진해 변비를 완화해 준다. 또한 체내 독소 및 노폐물 배출을 도와 혈액을 맑게 해주고 신진대사 작용을 활발히 해 체지방 연소를 도와준다.

쥐와 관련된 속담이나 비유

■ 쥐와 관련된 속담이나 비유

■ 쥐와 관련된 속담이나 비유

1.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

2. 쥐도 새도 모르게 해치운다.

3. 쥐구멍에 홍살문 세우겠다.

4. 쥐구멍으로 소 몰려 한다.

5. 쥐꼬리는 송곳집으로나 쓰지.

6. 쥐뿔도 모른다.

7.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

8. 가진 거라곤 쥐뿔도 없다.

9. 쥐도 막다른 길로 몰면 고양이를 문다.

10. 고양이 앞에 쥐걸음.

11. 독 안에 든 쥐.

12. 쥐 잡듯 한다.

13. 쥐도 도망갈 구멍을 보고 몰아라.

14. 쥐 꼬리만한 월급.

15. 소 뒷걸음치다가 쥐잡기.

16. 쥐가 뜯어먹은 것 같다.

17. 쥐 소금 나르듯 하다.

18. 물에 빠진 생쥐 같다.

19. 쥐구멍을 찾는다.

20. 코끼리는 생쥐가 제일 무섭다.

21. 쥐가 내리는 배는 타지를 말라.

22. 쥐 죽은 듯 조용하다.

23. 泰山鳴動 鼠一匹(태산명동 서일필)

24. 튼튼한 제방도 작은 쥐구멍으로부터 무너진다.

25. 집안이 결단 나려면 생쥐가 춤을 춘다.

26. 새도 염불 하고, 쥐도 방귀 뀐다.

27. 새앙쥐 입가심 할 것도 없다.

28. 개구멍에 쥐방울 드나들 듯 한다.

29. 쥐가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

30. 주린 고양이가 쥐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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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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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나들이

■ 우리말 나들이

■ 우리말 나들이

1. 섣달

‘섣달’ 이란 ‘설이 드는 달’이란 뜻으로, 말대로 하자면 1월이 섣달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왜 12월을 섣달이라고 할까? 한 해를 열두 달로 잡은 것은 수천 년 전부터지만, 어느 달을 한 해의 첫 달로 잡았는가 하는 것은 때론 달라졌다. 음력 동짓달인 11월을 첫 달로 잡은 적도 있었지만, 대개는 음력 12월을 한 해의 첫 달로 잡고 음력 12월 1일을 설로 쇠었다. 그래서 음력 12월을 설이 드는 달이라 하여 ‘섣달’이라 한 것이다. 후에 음력 1월 1일을 설로 잡으면서도 그전에 음력 12월을 ‘섣달’로 부르던 흔적은 그대로 남게 된 것이다. 원래는 ‘설달’이던 것이 ‘ㄷ’과 ‘ㄹ’의 호전(互轉)현상에 의해 섣달이 되었다.

2. 손 없는 날

“우리 다음 달에 이사해야 하는데 당신이 손 없는 날 좀 잡아보지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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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젊은 세대에서는 이런 대화를 잘 하지 않겠지만, 과거 우리네 어른들이 자주 했음직한 대화내용이다. 예로부터 우리 민간 관습에 이사를 하거나 큰 행사가 있을 때는 손 없는 날이라 해서 좋은 날을 골랐다. 동서남북 네 곳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서 사람의 일을 방해하는 귀신이 곧 손이다. 손 없는 날을 가리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음력으로 1이나 2가 들어가는 날은 동쪽에 손이 있고, 3이나 4가 들어가는 날은 남쪽에, 5나 6이 들어가는 날은 서쪽에 있고, 7이나 8이 들어가는 날은 북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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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쪽에 손이 있는 날 -1. 2. 11. 12. 21. 22

- 서쪽에 손이 있는 날 -5. 6. 15. 16. 25. 26

- 남쪽에 손이 있는 날 -3. 4. 13. 14. 23. 24

- 북쪽에 손이 있는 날 -7. 8. 17. 18. 27. 28

- 손이 없는 날 - 9, 10, 19, 20, 29,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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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없는 날은 손이 하늘로 올라가 귀신이 훼방을 놓지 않는 길일로, 음력으로 9와 10이 들어가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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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바가지를 긁다

“오늘 늦게 들어가면 우리 마누라가 또 바가지 긁을 것 같다.”

본뜻은 옛날에 콜레라가 돌 때 전염병 귀신을 쫓는다고 바가지를 득득 문질러서 시끄러운 소리를 냈는데, 여기에서 유래하여 듣기 싫을 정도로 귀찮게 나무라는 것을 가리키게 되었다고 한다. 생활 속에서는 흔히 아내가 잔소리를 하거나 불평을 늘어놓을 때 쓰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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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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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의 여인들-공혜왕후 2편

■ 성종의 여인들-공혜왕후 2편

■ 성종의 여인들-공혜왕후 2편

왕비가 된 후에도 정희왕후·소혜왕후·안순왕후 세 대비를 극진하게 받들어 모시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인수대비(소혜왕후)는 며느리들에게 무척 엄격한 시어머니였는데, 한씨에게 중국의 현모양처들에 관한 이야기인 《열녀전》을 읽게 하는 등 유교 윤리에 따라 철저히 교육했다. 착한 품성의 소유자이면서 효심도 지극한 그녀였지만 성종이 어린 후궁을 가까이하는 것을 보는 것에는 가슴앓이를 많이 했을 것이다. 그러나 <성종실록>에는 『후궁을 대접함에 있어서는 너그럽고 대범하여 중도(中道)에 맞으셨으며…(중략) 왕후께서는 장차 후궁을 뽑을 것이라는 말을 들으면, 의복을 극히 정밀하게 장만해두었다가 들어오기를 기다려서 내리시고, 복식과 완구를 끊임없이 내려주면서도 조금도 싫어하는 기색이 없으셨다』 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후궁에 대한 투기가 없음은 물론이고, 그녀들에게 최대한 은혜를 베풀어 주었음을 말해준다. 공혜왕후 승하 후에 성종의 계비가 된 폐비 윤씨가 후궁에 대한 투기가 대단했던 것과는 대비되는 상황이다.

착한 품성으로 남편을 잘 내조하고 대비들에 대한 효심도 대단했던 공혜왕후의 생은 그리 길지 않았다. 1473년 7월 병으로 친정인 한명회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고, 성종도 하루가 멀다 하고 이곳에 들를 정도로 왕비에게 지극한 정성을 다했다. 그녀는 병이 회복돼 다시 궁궐로 돌아왔으나 병이 다시 깊어져, 다음해 3월에는 본인의 희망으로 구현전(求賢殿)으로 거처를 옮겼다. 구현전에는 성종과 대비들이 날마다 거동해 왕비의 쾌차를 빌었지만, 공혜왕후는 1474년 4월15일 1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최후의 순간에도 왕실의 어른들과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지 못함을 한탄했다는 이러한 기록도 전한다. 『왕후께서 훙서(薨逝)하기에 임박하여, 한명회와 부인이 여러 날 먹지 않는 것을 보고 명하여 밥을 먹게 하고, 더불어 결별하여 이르기를, ‘죽고 사는 데에는 천명이 있으니 영영 삼전(三殿)을 여의고 끝내 효도를 다하지 못하여 부모에게 근심을 끼치는 것을 한탄할 뿐이다’ 하시고 드디어 돌아가셨다.』

계유정난으로 단종을 숙청하며 집권한 한명회는 조선 역사상 유일무이하게 두 딸을 왕비로 만들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렸지만, 두 딸(셋째 장순왕후, 넷째 공혜왕후)이 모두 스무살을 넘기지 못하고 요절하게 되는 비운을 겪게 된 것이다.

성종은 유순하게 윗사람을 잘 섬김을 공(恭)이라 하고, 너그럽고 부드러우며 인자함을 혜(惠)라 하여 공혜왕후(恭惠王后)라는 시호를 올렸다. 공혜왕후의 능(陵)은 경기도 파주에 이미 조성돼 있던 친정언니 장순왕후의 공릉(恭陵) 동쪽에 조성되었고, 순릉(順陵)이라 했다. 세자빈으로 세상을 떠난 장순왕후의 공릉과는 달리 왕비의 능이므로, 전체적인 구조는 공릉과 같지만 순릉은 공릉에 비해서 석물이 많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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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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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의 여인들 공혜왕후 1편

■ 성종의 여인들 공혜왕후 1편

■ 성종의 여인들 공혜왕후 1편

성종(成宗)은 이름 그대로 조선의 유교적 질서와 통치체계를 완성한 왕이었다. 성종은 학문이 매우 깊고 정국을 안정적으로 이끌어 간, 조선역사상 성군(聖君) 중 한 명으로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성종은 열심히 일한 만큼 놀기도 좋아하여, 주연(酒宴)과 여색(女色)을 즐겼다. 그는 성품이 담대하고 비교적 키가 작았던 다른 왕들에 비해 기골이 장대하고 키가 컸다고 한다. (물론 오늘날의 기준으로 본다면 165CM 내외?) 7년간의 수렴청정을 거치면서 임금이 되는 공부가 어느 정도 끝나자 성종은 사냥과 술, 여자에 빠져들게 되었다. 이름 그대로 성(性)종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성종과 가까운 종실들이나 측근들을 대할 때면 반드시 작은 술잔치를 베풀어 기생과 음악이 따르게 했다. 그런 면에서 연산군은 아버지 성(性)종의 유전자를 그대로 이어받았던 것은 아닐까. "연산군이 연락에 즐겨 빠진 것은 성종 때부터 귀와 눈에 배었으므로 그렇게 된 것이리라." 라고 《연려실기술》에 나올 정도였다.

성종은 3명의 왕후와 10명의 후궁을 두었고, 16명의 왕자와 12명의 공주와 옹주를 두었다. 성종의 첫 번째 왕비 공혜왕후 한씨는 한명회의 넷째 딸로, 1467년 12세의 나이로 한살 연하의 잘산군(자산군)과 혼인했다. <세조실록> 1467년(세조13년) 1월12일 기록을 보면 『잘산군이 영의정 한명회의 딸을 영응대군 이염(李琰)의 집에서 친영(親迎)하였다』 고 적혀 있다. 물론 이때만 해도 자신이 왕비가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유순한 성품에 효심도 깊어 시조부인 세조한테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세조께서 우리 주상 전하의 배필을 가리실 때에 뜻에 맞을 만한 사람이 없었는데, 왕후께서 덕용(德容)을 지녔음을 알고 불러 보고서 혼인을 정하셨다』 는 기록은 이를 증명해 준다. 2년 후 그녀에게는 큰 행운이 찾아왔다. 예종이 죽은 뒤, 제안대군과 월산대군에 이어 왕위 계승 서열 3위에 있던 남편 잘산군이 왕위에 올라 성종이 된 것이다. 성종은 일찍부터 왕의 재목으로 부족함이 없었으나, 실제로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한명회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다.

셋째딸 장순왕후가 예종의 세자빈의 지위에서 사망한 만큼, 왕의 장인으로서의 권력을 맘껏 행사하지 못했던 한명회로서는 공혜왕후가 왕비가 됨으로써 그 한(恨)을 풀게 되었다. 천안군부인(天安郡夫人)으로 불리던 공혜왕후는 성종의 즉위와 동시에 정식으로 왕비에 책봉되었다. 그녀의 품성에 대해서는 『명문가 출신이면서도 검소한 덕이 일찍부터 나타나고, 유순하고 고요한 성품을 타고났다』 고 <성종실록>은 전하고 있다.

-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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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의 즉위 2편

■ 성종의 즉위 2편

■ 성종의 즉위 2편

예종에게는 비록 어리지만 아들 제안대군이 있었다. 아니면, 세조의 장손인 월산대군(의경세자의 큰아들)이 다음 후보여야 한다. 그러나 정희황후는 죽은 의경세자의 둘째아들인 열세 살의 자을산군을 왕으로 지명한다. 열여섯 살의 건장한 월산대군을 제치고 말이다. 이에 대해 정희왕후는 제안대군은 아직 너무 어리고(4살) 월산대군은 병약해서 안 된다는 이유를 들었는데, 월산대군이 병약하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또한, 정희왕후는 세조가 자을산군을 예뻐했다는 것을 이유로 들었지만, 기록에 의하면 세조가 월산대군을 더 예뻐한 정황들이 많이 나온다. 정희황후도 이런 점이 찔렸는지 명나라에 자을산군 왕위 계승을 요구하는 글을 보낼 때 예종의 유언을 위조하기까지 했다. 자산군이 성종으로 즉위하면서 한명회의 둘째 딸은 공혜왕후가 되었으나 자식은 없었다.

곧바로 수렴청정을 시작한 정희왕대비가 버티고 있고, 훈신 세력의 우두머리인 한명회가 성종 뒤에서 권력을 쥐고 있는 이상, 예종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이나 성종의 왕위계승에 대한 잡음은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했다. 특히 정희왕대비와 인수대비는 구공신 훈구세력과는 계유정란 때부터 아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특히 겹사돈인 한명회하고는 한 집안 식구나 마찬가지였다.

왕으로 즉위한 성종의 나이가 13세에 불과해, 성년이 될 때까지 할머니인 정희왕대비가 수렴청정을 맡게 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당시 13살인 자을산군보다 네 살에 불과한 제안대군을 왕위에 올리면 정희왕후의 수렴청정기간도 훨씬 길어지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도 사실은 의아한 점이다. 정희왕후는 수렴첨정 기간에 자신들을 견제하던 신공신이자 종친세력의 핵심 인물인 귀성군 준을 왕권에 위협이 된다고 하여 유배 보냄으로써 한명회와 훈신세력의 권력을 공고히 했다. 덧붙여 세조가 허용했던 종친들의 정치참여도 법으로 금지시켰다. 왕위를 빼앗긴 제안대군과 월산대군도 죽을 때까지 몸을 낮추고 정치를 멀리하면서, 풍류나 즐기면서 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유유자적한 삶을 살면서 천수(天壽)를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성종은 할머니와 어머니의 치마폭에 쌓여 꼼짝 못할 만큼 어리지도 어리석지도 않았다. 성종은 곧 성년이 되고 직접통치를 시작하면서 한명회를 제외한 대부분의 훈구대신들이 사망하자, 남은 훈구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신진세력인 사림파를 대거 등용하였다. 성종은 신숙주나 한명회와 같은 훈구파의 빈자리에 김종직 등의 사림파를 등용했고 그렇게 새 시대를 열었다. 훈구파에 맞선 사림파의 대립이 본격화되면서 역사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기 시작됨을 예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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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의 즉위 1편

■ 성종의 즉위 1편

■ 성종의 즉위 1편

어느 왕조이던 성종(成宗)이라는 묘호(廟號)는 큰 의미가 있다. 건국 초 새 왕조의 불안을 잠재우고 정치적 제도적으로 안정을 찾고, 새 왕조를 든든한 반석 위에 올려 완성시켰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성종시대는 조선이 개국하고 80년 정도 지난 시점으로, 조선 역사상 보기 드문 태평성대와 평화가 찾아 왔다. 외침도 없고, 큰 내란도 없었다. 성종 중반부터 연산군 초기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평화로운 시기였고 백성들도 살기 좋은 시대였다고 한다.

조선 9대 왕 성종은 1457년(세조3년) 세조의 큰아들 덕종(의경세자)과 한확의 딸 소혜왕후(후에 인수대비)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혈(娎)이며, 1461년(세조7년) 자산군(者山君)에 봉해졌다. 사실 성종은 왕위계승 서열에서는 애당초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성종의 친부(親父)인 세조의 큰아들 의경세자가 세자 시절 일찍 죽지 않고 왕위에 올랐다면, 성종은 왕위계승 서열이 2위였다. 그러나 의경세자가 갑자기 죽고, 세조의 차남인 의경세자의 동생이 예종으로 즉위하면서 성종은 왕위로부터 더 멀어져 갔다.

하지만, 예종은 왕위에 오른 지 1년 2개월 만에 짧은 생을 마감했다. 이때 예종의 나이 20세. 예종은 훈신세력과 종친세력을 잘 저울질하여 자신에게 유리하게 써 먹었어야 했지만, 아직 어리고 정치적 경험이 미숙한 탓인지, 이 두 세력을 모두 적으로 만들고 말았다. 예종은 친모인 정희왕후(세조의 부인)마저 적으로 돌렸다는 설이 있다.

정희왕후는 예종에게 정치적인 부탁을 여러 번 했는데, 예종은 그때마다 꼬박꼬박 정희왕후의 부탁이 있었음을 신하들에게 밝혔다. 신하들 입장에서는 대비가 자주 부당하게 정사에 관여한다고 비난할 일이었다. 이런 일들이 공론화 되면서 정희왕후는 공개적으로 거듭 망신을 당하면서 아들이 곱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위와 같은 모든 상황은 당시 예종독살설이 나올 만 한 근거가 되었다. 예종이 구공신을 공격하고 정희왕후를 무시하자 이들이 합작하여 예종을 제거했을 수도 있다. 실록에도 예종은 죽기 직전 까지 특별히 아팠다는 언급이 없다. 말 그대로 급서(急逝)였다. 예종의 시신을 염습할 때 시신이 변색되어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당시는 겨울이었으니 변색되었다는 것은 약물 중독을 뜻한다. 그런데 시신의 변색에 관해 정희왕후는 예종이 치료를 권할 때 잘 받지 않아서라고 둘러대며 넘어 가 버리고 만다. 예종 독살설은 조선 왕의 수많은 독살설과 마찬 가지로 단지 추론일 뿐이다.

예종의 급서에도 불구하고 자리에 모인 공신들과 정희왕후는 태연했다고 한다. 특히 예종의 친모인 정희왕후는 자기 아들이 죽었는데도 누구보다도 침착하였으며, 바로 그 날 임금으로 누굴 정할 지를 물었다. 정희황후는 예종 다음 임금으로 뜬금없이 성종(자을산군)을 추대했다.

-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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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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