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5일 금요일

황희 1편

■ 황희 1편

■ 황희 1편

황희(1363년~1452년)는 고려시대(공민왕12년)에서 조선시대(문종2년)에 걸쳐 관직에 있으면서 누구나 인정하는 조선 최고의 명재상(名宰相)이다. 세종의 모든 업적은 황희라는 명재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할 만큼, 그는 명망 높고 관리들의 롤모델이 되는 모범적인 관리였다. 후대 벼슬아치들의 청렴을 강조할 때마다 황희의 이름이 어김없이 등장하며, 조선시대 청렴한 벼슬아치를 뽑아서 청백리로 지정하고 기릴 때에도 언제나 그의 이름이 맨 앞줄에 올랐다.

황희는 고려가 망할 징조가 뚜렷했던 혼란한 시기에 태어났고, 세종의 탁월한 정책들이 이룩되어 조선왕조의 기틀이 다져진 뒤에 죽었다. 조상의 고향은 남원(또는 장수)이었으나, 그는 개경에서 태어났다. 그가 성균관에서 학관(學官)으로 있을 때 고려가 망했는데, 그는 고려에 대한 충절을 달랠 길 없어 개경 언저리에 있는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 숨어 살았다. 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러나 이성계가 유능한 그를 그대로 둘 리가 없었다. 그는 끝내 이성계의 끈질긴 간청을 물리치지 못해 뜻을 꺾고 벼슬에 올랐다.

황희는 조선왕실에 들어와서 세자를 가르치는 우정자(右正字)를 시작으로, 태종 때는 6조 판서를 두루 지냈다. 그에 대한 태종의 신임은 아주 두터웠다. 태종은 그에게 “이 일은 나와 경만이 알고 있소. 만약 누설된다면 경 아니면 내가 한 것이오.” 라고 하면서, 기밀업무를 전담하게 했다. 또한 하루 이틀이라도 만나지 못하면 꼭 불러다가 둘이 의견을 나누었다.

그런데, 태종16년 11월, 황희에 대한 태종의 신임에 금이 가는 사건이 일어났다. 세자인 양녕대군이 점점 더 도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자, 태종은 황희를 불러 의논하였다. 황희는 “세자가 아직 젊어서 그러한즉 큰 허물은 아닙니다.” 라고 대답했다. 태종은 황희가 양녕대군을 두둔한 것으로 오해하여 좌천 시켜버렸다. 이후 태종18년에 판한성부사로 발령을 받았으나 4개월 만에 양녕대군에 대한 폐위 논의가 일어났고, 황희는 이때 또 폐위를 반대하였다. 이에 다시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경기도 교하로 귀향 갔다가 다시 남원으로 옮겼다.

그러나 태종은 일찍부터 황희를 재상감으로 지목하고 있었던 것 같다. 세종이 등극하자 태종은 상왕이 되어 국정의 일부를 전담하였는데, 이때 세종에게 이르기를 “전날의 일은 어쩌다가 그릇된 것이다. 이 사람은 끝내 버릴 수 없다. 나라를 다스리려면 이 사람이 없어서는 안된다.”고 하며 황희를 예조판서에 제수했다. 세종7년(1425년)에 대사헌을 지냈고, 이어서 이조판서를 걸쳐 우의정이 되었다. 세종 13년(1431년)에 영의정이 되었는데, 이후 세종 31년(1449년)에 사임할 때까지 영의정으로 재임하면서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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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혜왕후인수대비 5편

■ 소혜왕후인수대비 5편

■ 소혜왕후(인수대비) 5편

연산군의 광폭함을 모두 지켜 본 인수대비는 병들어 자리에 누웠다. 어느 날 연산군이 찾아오자 갑자기 일어나 바로 앉으면서, “이 사람들이 모두 부왕의 후궁인데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 하며 분노했다. 이 말에 흥분한 연산군은 자신의 머리로 할머니 인수대비의 몸을 들이 받았다. 몽둥이로 두들겨 맞았다는 설(說)도 있다. (설마........)충격을 받은 인수대비는 “흉악하구나.” 하며 자리에 누운 뒤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결국 노약한 인수대비는 연산군과의 갈등과 마찰 속에 68세로 세상을 떠났다. 연산군은 할머니의 죽음에 이르러서도 슬퍼하기는커녕 3년 상(喪)까지 폐지할 정도로 원한을 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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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죽음으로 잃어버렸던 왕비 자리를 아들을 통해 대비 자리로 보상받은 인수대비 한씨는 시부모인 세조 내외로부터 효부(孝婦)라는 글귀가 새겨진 도장을 받을 정도로 부덕을 갖춘 여성이었다. 21살에 청상과부가 된 이후로 자식 교육과 아랫사람을 경계함에 추호의 빈틈도 없어 ‘폭빈(暴嬪)’이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로 완벽함을 추구하였다. 그녀의 강한 집념은 자을산군을 왕위에 올리는 동력이 되었으나, 한편으로 폐비 윤씨를 부덕한 여성으로 몰아 죽음에 이르게 함으로써 조선 왕실의 최대 비극이라 할 수 있는 연산군의 폭정을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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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만장한 그녀의 삶은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도 우여곡절 끝에 왕비를 거치지 않고 대비에 오른 특이한 이력을 가진 여성으로, 며느리를 쫓아낸 비정의 시어머니로 묘사되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전기 여성 지식인의 대표 격으로 그녀의 삶과 업적이 새롭게 조명되어야 한다는 재평가도 나오고 있다. 여성 교양서가 없었던 시절에 여성도 교육받아야 한다는 진보적인 생각을 한 인수대비였지만, 그녀가 생각한 여성의 교양은 남성을 우위에 둔 여성의 부덕(婦德)이었다. 또한 유교적 부덕을 갖추지 못한 여성은 비록 왕비라 해도 내칠 수 있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조선 성종 대는 우리 역사에서 유교이념이 본격적으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시기였다. 여성의 유교적 부덕이 국가적 차원에서 강조되기 시작한 것이다.

소혜왕후(인수대비)는 덕종(의경세자)과 함께 동원이강형(정자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능이 형성)으로 조성된 경릉에 안장되었다. 경릉은 의경세자가 죽자 세조가 친히 수차례 묏자리를 물색하게 하고 산형도(山形圖)를 그려 친히 선지(宣旨:임금의 명을 내림)를 했다. 기록상 역대 가장 많은 곳의 상지(相地·자리 잡기)였을 만큼 수많은 곳을 찾았으니, 마지막에 오늘날의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으로 결정됐다. 1457년 10월 24일 세조는 세자의 조묘도감(왕릉을 조성하는 기관은 ‘산릉도감’인데 세자와 왕세자비 등의 능은 조묘도감이라 함.)에 무덤 안은 마땅히 후하게 하고, 무덤 밖의 석물은 간소하게 하라는 전지(傳旨)를 내렸다. “백성을 번거롭게 하고, 죽은 자에게는 유익할 것이 없다”는 세조의 능역 간소화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경릉은 조선시대 최초로 조성된 세자의 묘(원)다. 조선시대에는 왕이나 왕비의 능침은 능(陵)이라 하고, 세자나 세자빈, 왕의 사친의 무덤은 원(園)이라 했다. 의경세자는 후에 덕종으로 추존받았으므로 능(陵)이라 부른다. 특이한 것은 인수대비의 능이 남편인 덕종의 능보다 더 화려하고 더 높은 위치에 묻혀 있으며 석물도 덕종의 능보다 인수대비 능이 더 많다는 것이다. 그것은 덕종은 세자일 때 승하했지만, 인수대비는 왕실 최고의 어른인 대왕대비일 때 승하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인수대비(소혜왕후)의 묘는 손자인 연산군이 조영했으므로 석물 등의 질이 떨어지는 것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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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혜왕후인수대비 4편

■ 소혜왕후인수대비 4편

■ 소혜왕후(인수대비) 4편

인수대비는 《내훈》이라는 자신의 책에서 “며느리가 잘못하면 이를 가르칠 것이고 가르쳐도 말을 듣지 않으면 때릴 것이고, 때려도 고치지 않으면 쫓아내야 한다.”고 했다. 결과적으로 이 말은 그대로 실행되었다. 유학적 소양을 갖춘 엄격한 성격의 인수대비는 윤비의 행동을 결코 용납하지 못하였다. 인수대비는 윤비의 폐출(廢黜)과 사사(賜死)에 깊이 관여했고, 이는 평탄하지 않은 불행한 미래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성종 주변에는 많은 여성들이 있었고, 윤비는 이를 참지 못했다. 성종이 엄귀인과 정귀인을 총애하자 윤비는 왕의 총애를 되찾고자 했다. 왕실 여성들 사이에는 이른바 압승(壓勝)이라 불리는 이른바 저주행위가 있었는데, 들키게 되면 큰 화(禍)가 되었다. 윤비의 처소에서 극약인 비상과 이를 바른 곶감이 발견되자, 인수대비와 성종은 이 곶감이 왕과 후궁을 죽이려는 의도라 생각했다. 야사에는 윤씨가 성종과 다투면서 얼굴에 손톱자국을 냈다고도 하나, 확실치는 않다. 결국 윤비는 왕비가 된지 8개월 만에 폐비(廢妃)가 되어 사가로 쫓겨났고, 여전히 반성하지 않는다는 오해를 받아 결국 1482년(성종13년) 8월에 사사(賜死)되었다.

대신들은 윤씨의 폐비와 사사 문제를 원자의 친모라는 이유로 반대했으나, 성종의 입장은 단호했다. 인수대비 또한 폐비 윤씨가 살아 있으면 화근(禍根)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폐비 윤씨를 대신하여 윤호의 딸 파평 윤씨가 왕비로 책봉되었다. 파평 윤씨는 대비들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고, 인수대비는 “이제 중전다운 사람이 들어왔으니 낮이나 밤이나 무슨 걱정이 있겠느냐”며 기뻐했다. 며느리를 죽임으로써 후환을 없애고자 생각한 인수대비의 판단은 완전 오판(誤判)이었다. 윤씨를 죽인 이듬해 인수대비는 정희왕후(세조 비)와 함께 온양을 갔는데, 여기서 정희왕후가 죽고, 성종 또한 재위 25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죽기 전 성종은 자신의 사후 100년 동안 폐비 윤씨의 사사 사건을 절대로 공론화 하지 않도록 유언을 남겼다.

인수대비는 왕위에 오른 손자 연산군으로부터 많은 원망을 받았다. 어머니의 죽음을 알게 된 연산군은 폭군으로 변해갔고, 방탕한 생활로 국정을 파멸로 몰아갔다. 인수대비는 연산군의 광폭함을 누차 지적하고 타일렀으나 오히려 원망만 살 뿐이었다. 연산군은 부친의 후궁이자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아간 엄숙의(嚴淑儀)와 정숙의(鄭淑儀)를 궁 안뜰에 결박하고서는 아들인 안양군 항(㤚)과 봉안군 봉(㦀)을 불러 모친들을 때리게 만들었다. 이어서 분이 풀리지 않은 연산군은 항과 봉의 머리채를 쥐고 인수대비의 침전으로 가 방문을 열고 “이것은 대비의 사랑하는 손자가 드리는 술잔이니 한 번 맛보시오.” 하며, 항을 독촉하여 술잔을 드리게 하니, 인수대비가 놀라 잔을 받았다. 연산군은 엄숙의·정숙의를 죽인 뒤 시신을 가져다 찢어 젓을 담그고 산과 들에 흩어 버렸다고 하나 진위는 확실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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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혜왕후인수대비 3편

■ 소혜왕후인수대비 3편

■ 소혜왕후(인수대비) 3편

1469년 11월 28일 자을산군, 즉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사가에 머물던 한씨는 왕의 어머니(대비)로서 다시 궁궐로 돌아왔다. 청상과부가 되어 궁궐을 떠난 지 12년만이었다.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아버지 의경세자의 위호(位號:벼슬의 등급 및 이름)와 어머니의 위상 문제가 거론되었다. 성종 1년에 의경세자의 시호를 온문의경왕(溫文懿敬王)으로 하고, 수빈의 휘호를 인수왕비(仁粹王妃)로 하여 예종비와 인수왕비를 형제의 서열로 차서(次序:순서)를 정하였다. 그리고 2년 뒤 인수대비는 남편이 덕종(德宗)으로 추존됨에 따라 덕종비(德宗妃)가 되었다. 사실 인수대비는 생전의 존칭이었고, 죽어서는 소혜왕후(昭惠王后)라는 시호를 받았다.

어려서 부모와 남편을 잃은 탓에 인수대비는 불교에 심취하였고, 성종이 도첩제(度牒制:승려허가증)를 실시하여 불교를 탄압하자, 이에 불만을 품기도 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성리학의 이념은 여성의 삶을 크게 변화시켰다. 특히 여성에게 요구된 가장 큰 임무 중의 하나는 ‘현모양처(賢母良妻)’로 규정되는 남편을 잘 섬기고, 자식을 잘 키우는 것이었다. 여성에게 유교적인 덕목을 가르치기 위해서 일종의 교재가 필요했는데, 왕실 어른으로서 늘어가는 왕실 여성들을 교육시켜야 하겠다는 필요성을 절감한 인수대비는 1475년(성종6년) 궁중의 비빈(妃嬪)과 부녀자들을 훈육하기 위해 내훈(內訓)이라는 책을 편찬하였다. 이때 그녀의 나이 39살이었다.

인수대비는 이 책에서 부인들의 모범적인 사례를 들어 이해도를 높이고 부부의 도리, 형제와 친척 간의 화목 등 여성으로서 갖춰야 할 유교 덕목을 실어 여성도 유교적 도리를 알고 실천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하지만, 남자는 하늘이고, 여자는 땅이라는 원리가 기본이 되는 오늘날의 기준에는 맞지 않는 내용일 것이다.

인수대비의 일생에 있어서 며느리 윤비(尹妃)와의 관계는 그야말로 불행 중의 불행이었다. 이상적인 여성상을 목표로 한 인수대비에게 윤비는 성에 차지 않는 며느리였다. 원래 성종의 부인은 한명회의 딸인 공혜왕후였으나, 그녀가 1474년 후사 없이 일찍 죽는 바람에 연산군을 잉태한 후궁 윤씨가 중전의 자리에 오른 것이었다. 인수대비 한씨와 왕비 윤씨는 서로 성격상 물과 기름같이 섞일 수 없는 생각과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인수대비에게 막강한 친정 세력이 있었다면, 윤비는 그렇지 못했다. 가난한 대간(臺諫) 집안 출신의 딸로서 그를 후원해 줄 부친도 없는 신세였다. 또한 유교적 부덕을 완벽하게 실천하고 강요했던 인수대비와 달리 윤비는 자유 분방하고 사랑을 중요시하여 왕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성종은 그렇게 지순한 사랑을 주는 인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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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혜왕후인수대비 2편

■ 소혜왕후인수대비 2편

■ 소혜왕후(인수대비) 2편

세조의 맏아들 도원군이 의경세자로 책봉되자, 자신의 딸 한씨도 세자빈으로 책봉되어 수빈(粹嬪)이 되었다. 수빈 한씨가 된 그녀가 왕비 자리에 오르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인지, 부친인 한확이 세자책봉의 고명(誥命:중국 황제가 주는 임명장)을 받아 조선으로 돌아오는 길에 사망하고 말았다. 세자빈이 된 이듬해의 일이었다.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로 위세가 등등했던 한확이었지만, 객사(客死)라는 불운을 맞이한 것이었다. 부음(訃音)을 듣고 놀란 세조는 압록강으로 관리를 급파하여 그의 시신을 호송하였다. 수빈 한씨는 부친이자, 막강한 정치적 후견인을 하루아침에 잃고 말았다.

부친의 사망에 이어 불운은 계속되었다. 수빈 한씨는 결혼 직후 맏아들 월산대군과 명숙공주를 낳았고, 이어서 1457년(세조3년)에 둘째 아들이자 훗날 성종이 되는 자을산군(자산군)을 출산하였다. 그러나 남편인 의경세자가 갑작스런 질병으로 사망하는 청천벽력(靑天霹靂)과도 같은 불행이 찾아왔다. 이때 의경세자의 나이 20세였고, 한씨는 21세에 불과하였다. 불과 2년 3개월의 짧은 세자빈 생활이었다. 부친과 남편이 1년 간격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슬픔에 빠져 있을 새도 없이 그녀는 왕비의 꿈을 접고 사가(私家)로 물러나야했다. 세조가 맏며느리 한씨에게 특별히 궁궐에서 살아도 좋다고 하였음에도 이를 사양하고 두 아들과 궁궐을 떠나려하자, 이를 가엽게 여긴 세조는 그녀를 위해 특별히 집을 지어주었다. 그곳이 바로 지금의 덕수궁이다. 한씨의 죽은 남편 의경세자 사당 옆에 건설되었으며, 일반적으로 고위 사대부나 왕족이 살던 사저보다 그 규모가 크고 웅장하여 훗날 선조가 임진왜란 중에 임시 거처로 사용하기도 했다. 후에 한씨의 작은 아들 자산군이 보위에 올라 임금의 어머니로서 다시 궁궐에 들어가자, 그녀의 큰아들 월산대군이 사저를 물려받았다.

남편이 죽지 않았더라면, 아니 부친이라도 살아 있었더라면 최소한 세자 자리는 의경세자의 맏아들이자 세조의 장손인 월산대군에게 주어졌을 지도 모른다. 그녀는 8살에 불과한 시동생 황(晄-예종)이 세자로 책봉되는 것을 바라만 보고 있어야 했다. 세자 시절에는 건강했던 예종은 부친인 세조의 병간호와 즉위 후의 격무에 시달려 건강이 좋지 못했다. 죽어서 예종이라는 시호를 받고 싶다는 말을 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예종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예종의 아들(제안대군)이 아직 어려, 정희왕후는 후계자를 빨리 정해야 한다는 신하들의 독촉에 한씨의 둘째 아들인 자을산군(자산군)을 후계자로 지목하였다. 서열상 장남인 월산군이 왕위에 올랐어야 하지만, 월산군은 병치레가 잦고 동생인 자을산군의 도량이 왕재감이라 하여 자을산군이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이는 핑계에 불과하고(물론 기록에는 없지만), 자을산군의 장인인 한명회의 정치적 위상이 작용했음은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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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혜왕후인수대비 1편

■ 소혜왕후인수대비 1편

■ 소혜왕후(인수대비) 1편

소혜왕후(昭惠王后, 1437-1504)라는 시호(諡號)보다 인수대비(仁粹大妃)로 더 익숙한 한씨는 실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다간 여인이다. 인수대비는 우리나라 역사 상 TV드라마에 가장 많이 나온 여성 중 한 명일 것이다. 그 이유는 인수대비가 살았던 시대가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까지 7분의 왕과 함께 했고, 그 시대 큰 사건 때마다 인수대비가 그 중심에 있었다. 조선 제9대왕 성종의 어머니이자, 폭군으로 알려진 연산군의 할머니로서 더욱 유명한 인수대비는 세자빈 시절 남편(의경세자)의 죽음으로 왕비자리에는 올라보지도 못했고, 자신의 둘째 아들이 왕(성종)이 되면서 대비 자리에 오른 입지전(立志傳)적인 여성이다.

인수대비 한씨는 세조 때 좌의정을 지낸 서원부원군 한확(韓確, 1403~1456)의 6째 막내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유교 교육을 받았고 정치적 영향력이 막강했던 청주 한씨 가문에서 성장하였는데, 어머니 홍씨는 그녀의 나이 13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한씨가 왕실과 혼인을 하게 된 결정적 요인은 그녀의 특별한 집안 배경에 있다. 부친인 한확은 순창군수 한영정의 아들로, 그의 누이는 명나라에 공녀(貢女)로 갔다가 명 성조(成祖)의 후궁이 된 여비(麗妃)이다. 말하자면 인수대비 한씨의 큰고모가 명나라 황제의 후궁이 된 셈이다.

한영정의 맏딸이었던 여비(麗妃)는 사대부가의 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불행히 공녀가 되었으나, 명 성조의 눈에 들어 후궁까지 된 여성이다. 여비는 1424년 성조가 죽자 순절(殉節:충절이나 정절을 지키기 위하여 죽음)하였다고 전하는데, 실제로는 그 시대 상황 상 강요된 자살이나 다름없다. 그 뒤를 이어 황제에 오른 선종(宣宗) 또한 한영정의 막내딸 즉 한확의 누이동생을 후궁으로 삼았다. 《세종실록》에 보면 당시 한확이 재산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미모가 뛰어난 여동생을 시집보내지 않고 있다가 명나라 황실로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청렴결백하고 뛰어난 인품의 소유자라 전해지지만, 권력욕이 강한 인물이었다는 평판도 엿보이는 점이다.

한확은 젊은 시절 누이의 후광을 업고 출세 가도를 달렸다. 명 황실과 인척이 된 한확은 명나라와 조선의 민감한 사안을 도맡아 담당하는 비중있는 인물로 성장하였다. 특히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양위(讓位)했을 때에는, 조선 사신으로 명나라에 가서 황제의 고명(誥命:중국 황제가 주는 임명장)을 받아 오기도 했다. 1437년(세종19년)에 둘째 딸이 세종의 후궁 소생인 계양군(桂陽君)과 혼인하였고, 1455년(단종3년)에는 여섯째 딸(인수대비)이 수양대군의 맏아들 도원군(桃源君, 성종의 부친으로 덕종으로 추존된 의경세자)과 혼인하였다. 야망이 컸던 수양대군은 훗날의 정치적 입지를 고려하여 명 황실이라는 막강한 배경을 가지고 있는 한확과 사돈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수양대군은 한확의 힘과 위상을 잘 이용했다. 한확은 한명회(韓明澮)와 함께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고, 계유정난(癸酉靖難)과 왕위찬탈이 성공하자 그를 비롯한 청주 한씨들이 대거 공신에 책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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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어트 하지 않아도 살이 빠지는 생활 요령 12가지

다이어트 하지 않아도 살이 빠지는 생활 요령 12가지

다이어트 하지 않아도 살이 빠지는 생활 요령 12가지

체중 감량은 쉽지 않다. 보통은 좋아하는 음식을 대부분 포기해야 하고 끊임없이 운동해야 하는, 그런 지옥같은 생활을 떠올리기 때문! 하지만 꼭 극단적인 고행을 해야만 살을 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열량을 덜 섭취하고 더 사용하면 체중은 빠지게 마련. 아무 생각 없이 유지해 온 생활습관을 약간 고치는 것만으로도 평소보다 몇백 kcal의 열량을 덜 먹거나 더 사용할 수 있다. 그러면 1-2kg쯤은 자연스럽게 빠질 것이다.

아래 12가지의 어렵지 않은 변화를 시도해 보자!

1. 배부르면 그만 먹는다.

누구나 한 끼니로 차린 상은 웬만하면 끝까지 다 먹게 마련이다. 음식을 남기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도 많을뿐더러 그게 적당한 1인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 하지만 영양사가 직접 당신만을 위해 신경 써서 차려준 게 아니라면 한상 차림은 필요한 칼로리를 훨씬 웃돌 가능성이 높다. 포만감이 느껴진다면 수저를 놓자. 배가 심하게 부르면 불쾌해지고 필요 이상의 칼로리는 건강에도 해롭다. 식당에서 음식이 많이 남았다면 포장해 달라고 정중히 부탁해 보자!

2. 탄산음료 대신 물을 마신다.

간과하기 쉽지만 음료를 통해 섭취하는 열량도 꽤 높다. 특히 달콤한 탄산음료나 과일주스는 치아를 상하게 하는 설탕이 과하게 들어있는 경우가 많다. 다행히 열량이 전혀 없는 음료도 있다! 바로 물이다. 오이나 레몬 조각으로 향을 살짝 넣으면 한결 마시기 편하고 당도 높은 음료보다 수월하게 갈증도 해소해 준다. 레모네이드나 콜라보다는 물을 선택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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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칵테일 대신 화이트 와인 숄레를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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숄레는 와인에 물이나 탄산수를 섞은 음료이다. 위에서 살펴본 단 음료뿐 아니라 술 종류에도 열량은 잔뜩 숨어있는데 여기에 달콤한 맛까지 가미한 칵테일은 그야말로 열량 대장. 피냐 콜라다의 열량은 무려 400kcal에 육박한다. 그래도 편안한 저녁에 즐기는 기분 좋은 한잔을 포기할 수 없다면 와인 반 잔에 열량이 없는 물이나 탄산수를 섞어서 마시자. 깔끔한 맛에 기분까지 더욱 좋아질 것이다.

4. 설탕을 더 넣지 않는다.

\u2028커피와 차는 건강한 음료라고 여겨지지만, 다른 재료를 넣어 먹으면 칼로리가 금방 높아진다. 특히 달콤하게 만들기 위해 넣는 설탕은 특히 그 역할을 톡톡히 한다. 각설탕 두 개를 넣지 않는다면 30kcal 정도를 아낄 수 있다. 커피와 차를 달게 만들지 않고도 즐기도록 해 보자. 아니면 메이플 시럽이나 꿀을 대신 넣어도 같은 당도로 섭취 열량을 낮출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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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간식 도시락을 챙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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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밖에 자주 나가는 사람이라면 간식거리를 직접 챙겨서 가지고 다니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배가 고파질 때 군것질을 하다 보면 길에서 흔히 파는 도넛이나 초코바 등 열량과 당도가 무척 높은 음식을 먹게 되기 때문이다. 미리 단백질바나 과일, 쌀과자 등을 가지고 나온다면 좀 더 건강하고 열량도 낮은 음식으로 배를 채울 수 있다!

6. 바나나보다는 사과를 먹는다

바나나는 인기가 좋은 과일이다. 휴대하기도 편하고 먹기도 편할 뿐만 아니라 달콤하고 배를 금세 든든하게 배를 채워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나나는 그만큼 다른 과일보다 열량이 높으므로, 바나나 대신 사과를 먹으면서 섭취 열량을 줄여보자. 바나나와 마찬가지로 달고 맛있으며 100g에 52kcal밖에 하지 않는다. 바나나는 같은 무게에 무려 88kcal로 열량이 36kcal나 더 나간다.

7. 양념, 소스, 드레싱을 조금만 먹는다.

소스와 드레싱도 알게 모르게 당신을 살찌우는 주범이다. 샐러드에 프렌치드레싱을 뿌려서 먹는다면 열량은 두배가 된다. 드레싱 100mL의 열량은 무려 300kcal. 마요네즈, 요거트 드레싱 등은 적은 양만 먹거나 발사믹 드레싱처럼 열량이 더 적은 드레싱으로 바꿔 보자.

8. 곁들여 나오는 빵은 무시하자.

레스토랑에서 코스 요리를 먹을 때면 식사에 앞서 빵 바구니가 곁들여 나온다. 배고픈 채로 자리에 앉았을 때 역시나 무척 유혹적인 음식이다. 한두 조각 먹다 보면 150kcal를 훌쩍 넘기게 마련. 올리브유 등에 찍어 먹는다면 열량은 더 높아진다. 그러니 메인 코스를 맛있게 먹기 위해서라도 빵은 참아 보자.

9. 방송을 보며 먹지 않는다.

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텔레비전이나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음식을 먹으면 제대로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하는 것보다 290kcal 정도를 더 섭취하게 된다고 한다. 음식을 맛보고 씹어서 삼키는 것보다 화면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음식을 먹는 것에 집중할수록 탄수화물과 지방 분해 효소를 더 많이 분비하기 때문에 설탕과 지방이 혈액 속의 수치를 빨리 올려서 그만큼 금세 포만감을 느끼게 된다. 결과적으로 더 적게 먹을 수 있다.

10. 가만히 있을 땐 다리라도 떨자.

공부를 하건, 다림질이나 요리를 하건 가만히 앉아서 한다면 모두 비슷한 열량만을 소모한다. 항상 운동을 하고 있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어느 때건 많이 움직이는 사람이 열량을 더 쓰게 마련! 음악에 맞춰 다리나 엉덩이를 흔드는 것도 좋다! 이렇게 수시로 움직이면 가만히 있는 것보다 하루에 평균 300kcal를 더 소비할 수 있다.

11. 더 작은 그릇을 사용한다.

식기나 잔의 크기는 당신이 한 끼에 먹거나 마실 양을 결정해 준다. 작은 그릇과 작은 잔을 사용해서 뇌를 잠시 속여 보자. 작은 그릇에 담으면 같은 양도 훨씬 많아 보이기 때문에 그만큼 포만감도 더 쉽게 느낄 수 있다.

12. 기름 스프레이를 사용하자.

요리를 할 때 쓰는 기름도 당연히 음식의 칼로리에 들어간다. 그런데 팬에 붓다 보면 불필요하게 많은 양을 쓰게 된다. 이때 오일 스프레이를 사용하면 좋다! 표면에 골고루 기름을 발라 줄 뿐만 아니라 기름도 적게 써서 열량 섭취를 줄여 주고 기름도 아낄 수 있다는 사실. 100g에 900kcal나 나가는 지방은 이런 작은 양에서도 열량 차이가 커진다.

날씬하고 건강해지고 싶은 사람들은 자신의 몸무게를 주시하고 신경 쓰게 된다. 적당하게 운동을 하는 것이 물론 가장 좋은 방법이겠지만, 당장 격한 운동을 하기에는 체력이 부족하다면 위의 습관만 바꾸어도 1~2kg 감량에 도움이 된다.

열량을 과하게 섭취하기 쉬운 오늘날의 식생활을 작은 습관부터 시작해 더 건강하게 바꾸어 보자. 물론 살을 더 많이 빼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이 12가지 팁 외에 운동으로도 더 많은 열량을 태워야 할 것이다!

알츠하이며 병의 원인은 '치주염'일지도 모른다

알츠하이며 병의 원인은 치주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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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츠하이며 병의 원인은 치주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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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소문 없이 조용하게 시작되어 더욱 무서운 병, 알츠하이머. 현관문 열쇠를 어디에서 잃어버렸는지 잘 모르겠고, 냉장고 문을 열긴 했는데 뭘 꺼내야 할지 기억이 나지 않는 등의 순간이 종종 있다. 그저 건망증이겠지,라고 다들 생각하게 될 거다. 하지만 이런 건망증도 기억력이 감퇴하면서 더 심해진다는 사실.만약 병세가 깊어지면 환자는 매일처럼 하던 젓가락질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때가 찾아온다. 자신의 가족도 알아보지 못하고, 주위 환경이 낯설어 공황 장애에 빠지기도 한다. 더 이상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고, 말이 어물어물 서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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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츠하이머 병으로 인한 치매 환자 수는 매년 증가 추세이다. 심평원 통계에 따르면 2016년 우리나라 알츠하이머형 치매 환자의 수는 359,705명이다. 이는 2010년에 측정된 환자 수(131,513명)에 비해 확연하게 늘어난 수이다. 이 비극적인 병은 아직까지도 현대 의학으로 완치가 불가능하다.

<알츠하이머 병에 걸리면 나타나는 증상>

알츠하이머 병에 걸리면 뇌 조직이 변한다. 신경 세포 사이에 저장된 단백질이 뇌의 기능을 저해하고 뉴런과 시냅스를 잃게 되어 사고가 둔해진다. 죽은 신경 세포는 다시 살아나지 않아서 뇌는 점차 퇴화되고 만다.

<알츠하이머 병의 원인>

그렇다면 이토록 무서운 병, 알츠하이머의 원인은 무엇일까? 제아무리 뛰어난 의사도 이 병의 원인을 직접적으로 밝혀내진 못했다.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가까운 가족이 알츠하이머 환자라면 발병 확률이 덩달아 높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전이 직접적인 발병 원인인 경우는 전체 환자 중 단 1%뿐이다. 고혈압이나 당뇨병도 알츠하이머 발병률을 높이는 요인이다. 전문가들은 알츠하이머에는 한두 개로 특정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요인이 있다고 추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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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안의 염증, 위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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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여러 나라에서 모인 의사가 팀을 이루어 흥미로운 연구를 진행했다. 그 연구 결과에 의하면 입 안이 비위생적이고 건강하지 않으면 알츠하이머 발병 확률이 높아진다. 따라서 치매를 막기 위해서는 이를 열심히 닦아야 한다. 언뜻 들으면 농담 같은 이론이나 그 신빙성을 뒷받침해줄 여러 가지 근거가 있다. 먼저, 치주염을 일으키는 세균인 포르리포모나스 진지발리스(Porphyromonas gingivalis)가 구강 건강과 알츠하이머의 첫 번째 연결 고리이다. 알츠하이머 환자의 90%의 뇌에서 이 세균이 발견되었다. 건강한 사람의 뇌에서 이 세균이 발견될 확률은 20%에 지나지 않는다. 발견된다고 하더라도 균의 수는 알츠하이머 환자에 비해 훨씬 적다.

포르리포모나스 진지발리스 균은 혈관을 따라 입에서 뇌로 흘러들어간다고 짐작되고 있다. 그도 그럴게, 보렐리아증이나 매독 등의 질병도 병균이 혈관을 통해 뇌로 이동한 경우에 발병한다. 연구진이 쥐를 대상으로 실험한 결과 치주염 균이 입에서 혈관을 타고 뇌에 들어가면 알츠하이머 병과 유사한 염증이 발생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뇌는 이러한 균의 공격을 받으면 세포를 보호하느라고 본 기능은 저하된다. 뇌에 세균이 들어가는 걸 막은 실험 통제군의 경우 뇌에 아무런 이상 증세가 발생하지 않았다.

<연구에 대해 제기되는 의문들>

알츠하이머 병 환자의 대다수가 치아 건강 문제도 안고 있다. 치주염은 노년층에게 흔히 나타나는 병이기 때문이다. 임플란트나 틀니 등의 치아는 원래 치아만큼 위생적으로 관리하기 어렵다. 특히 치매를 앓고 있는 사람이 위생 관리를 하기는 더욱 어렵다. 따라서, 알츠하이머 병과 치주염의 인과관계가 뒤바뀐 것이 아니냐 의구심을 품는 이도 있다. 덧붙여, 신경학자 로버트 모어(Robert Moir)는 알츠하이머 환자의 혈관은 정상인에 비해 약해 병균이 훨씬 침투하기 쉽다고 주장한다. 결과적으로 치주염 균이 뇌에서 많이 발견되는 것은 당연하며, 치주염 균이 병의 원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한편, 치주염이 알츠하이머 병을 유발한다는 사례 연구는 이미 여러 번 발표됐다. 게다가 앞서 언급된 동물 대상 실험 연구는 그 인과관계를 명확하게 밝혀주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진다. 약학계는 현재 이 연구를 기반으로 한 치료약을 개발하는 중이다. 앞으로 어떤 결과가 나올지 무척이나 기대가 되는 상황이다.

약이 출시되기 전까지는 "이를 자주 닦고, 치실을 꼭 사용하라"라고 연구에 참여했던 피오틀 마이델(Piotr Mydel)은 밝혔다. 치주염 균이 알츠하이머 병의 유일한 원인인 건 아니지만, 분명 잘 관리한다면 알츠하이머 병을 막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담배를 끊으면 당신의 몸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다

담배를 끊으면 당신의 몸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다

담배를 끊으면 당신의 몸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다

건강을 지키는 최고의 방법, 금연. 금연이 몸에 좋다는 사실은 다들 알고 있지만 쉽게 끊을 수가 없는 게 또 담배입니다. 금연을 했을 때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무엇인지 알아두면 조금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하나씩 함께 확인해보시죠.

금연한 지 20분 후, 맥박과 혈압이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손과 발이 따뜻해집니다.

금연한 지 8시간 후, 혈중 일산화탄소 농도가 떨어지고 산소 농도는 올라갑니다.

금연한 지 48시간 후, 후각과 미각이 좋아집니다.

금연한 지 72시간 후, 기관지가 이완됩니다.

금연한 지 2주에서 3개월 후, 신진대사와 폐 기능이 개선되면서 몸이 한결 가뿐해집니다.

금연한지 1~9개월 후, 기도가 깨끗해지면서 기침이 가라앉습니다.

금연 1년 후, 심장병 발병률이 절반으로 줄어듭니다.

금연 5년 후, 뇌졸중 발병률이 비흡연자와 같은 수준으로 돌아옵니다.

금연한 지 10년 후, 폐암에 걸릴 확률이 흡연자의 절반 수준으로 감소합니다.

금연한 지 15년 후, 심장병 발병률이 비흡연자와 같은 수준으로 회복됩니다.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약 5년만 버티면 몸이 정상 수준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이 말이죠! 지금부터 시작하더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손에 든 그 담배를 당장 버리시고 자신의 건강을 돌봅시다!

남의 심리와 행동을 '조종하는' 트릭 13

남의 심리와 행동을 조종하는 트릭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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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심리와 행동을 조종하는 트릭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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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라는 게 참 쉽지 않다.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할까, 대체 그 사람의 행동 뒤에는 어떤 숨은 의미가 있을까 등의 고민으로 노심초사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다른 사람들의 감정과 행동을 나의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일부 행동은 조종할 수 있다. 신경 언어학적 프로그래밍(Neurolinguistic Programming) 방법만 잘 이해하고 있다면 말이다. 심리학자들은 환자의 사고 처리 과정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실제로 이 방법을 사용한다. 어떤 사람에게 적용해도 실제로 효과가 있다. 그 사람의 사고가 얼마나 복잡하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결국 단순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이 프로그래밍 기법을 매일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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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의 심리 트릭 13가지만 알고 있으면 주위 사람들을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끔 조종할 수 있다. 듣기만 해도 짜릿하지 않은지? 집중해서 읽어보기를 권한다!

1. 브로콜리 먹이기

아이들이 브로콜리를 너무나도 먹기 싫어하진 않는지? 아이들에게 브로콜리 먹고 싶으냐고 물어보는 대신에 "한 두세 개 먹을래?"라고 물어보자. 이렇게 하면 브로콜리가 오늘 반찬이라는 사실을 아이들에게 확실하게 인지시키는 동시에 그들에게 선택권을 주게 된다. 결과적으로 아이들은 브로콜리를 먹겠다고 자신이 결정했다고 착각한다. 이 트릭은 물론 브로콜리 외에 다른 채소에도 적용할 수 있다.

2. 권위를 이용하기

타인에게 충고를 할 때 제대로 듣지 않는다면, 나보다 높은 권위자에 기대어 말해보도록 하자. 예를 들어, "우리 엄마(아빠)가 그러는데..." 등의 서문이 있겠다. 사람들은 높은 사회적 권위를 가진 사람들의 말을 조금 더 귀 기울여 듣는 경향이 있다.

3. 부탁하기

친구나 가족에게 부탁이 하고 싶다고 가정해보자. 가령, 이사를 가야 하는데 짐을 옮겨달라는 부탁을 예로 들어보자. 이럴 땐 작은 부탁부터 시작하면 좋다. "미안한데, 이 주소로 편지하나 만 보내줄래?" 이런 간단한 부탁을 거절할 사람은 없다. 이사 날이 다가오면 이미 당신의 사정을 아는 친구는 당신을 필시 도와줄 거다. 이런 수법을 일명 "문에 발 밀어 넣기 테크닉"이라고 부른다. 이 테크닉의 재미있는 점은 반대로 해도 효과가 있다는 거다. 예를 들어, 친구가 꼭 거절할 정도로 부담스러운 부탁을 해보자. 친구는 아마 당연히 거절할 거다. 그다음에 이사와 관련된 이야길 꺼내보자. 친구는 아마 앞서 부탁을 거절했다는 죄책감에 이 부탁은 들어줄지도 모른다.

4. 긍정적인 답변 얻기

면접을 보러 갔는데, 면접 위원들이 너무나 딱딱하고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당신이 질문을 물었을 때 긍정적인 답변이 돌아오기를 바란다면, 물어보면서 고개를 중간에 끄덕끄덕하도록 하자. 그 행동을 본 상대방은 당신의 질문이 정확하며 진실되다고 믿게 착각하게 된다. 이 기법은 의외로 큰 효과가 있어, 레스토랑 직원들도 손님들이 더 많은 음식을 주문하게끔 유도할 때 쓴다.

5. 가위바위보 이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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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트릭만 알고 있으면 다시는 가위바위보에서 질 이유가 없다. 게임을 하기 전, 상대방을 혼란스럽게 할 질문 하나를 물어보자. 머릿속이 어지러워진 상대방은 필시 가위를 낼 것이다. 당신은 주먹만 내면 쉽게 이길 수 있다. 이렇게 간단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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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노려보지 못하게 하기

어떤 사람이 계속 당신을 노려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면, 마주 노려보는 대신에 그 사람의 신발을 주의 깊게 바라보자. 신발만 오랫동안 바라보면 상대방도 당신의 시선을 불편하게 느끼고 고개를 돌리게 된다.

7. 진실된 답변 얻기

만약 상대방이 제대로 답변을 해주지 않는다면, 말을 잠깐 멈추고 굳은 표정으로 그의 두 눈을 바라보도록 하자. 잠시 뒤 그도 포기하고 진실을 털어놓게 될 것이다.

8. 나에게 호감 있는지 보기

상대방이 나에게 호감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지? 귀를 잡거나 목을 긁거나, 팔을 한 번 접어보자. 만약 그가 나를 좋아한다면 무의식적으로 그 행동을 따라 할 것이다.

9. 머릿속에 맴도는 노래 지우기

머릿속에 콕 박혀 하루 종일 같은 노래만 반복해서 부르고 있다면, 이 트릭을 스스로에게 사용해보도록 하자. 일명 "포인터 효과"라는 테크닉을 이용한 트릭으로, 인간은 종료된 일보다는 끝나지 않은 일을 더욱 오래 기억한다는 무의식적 반응을 이용했다. 노래의 코러스 부분이 아닌 마지막 가사를 몇 번 불어보도록 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그 노래를 잊을 수 있게 된다. 끝났으니까!

10. 다른 사람의 집중 방해하기

대화를 하고 싶은 상대방이 전화 통화에 열심이다.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이야기가 있다면, 그 사람에게 팔을 뻗어 몸에 손을 얹자. 이렇게 하면 그의 집중을 깨고 당신의 말을 전달할 수 있게 된다.

11. 나를 좋아하게 만들기

사이가 좋지 않은 상대방이 나를 좋아하게 만들고 싶다면, 펜을 빌려달라 물어보면 된다. 사람들은 좋아하는 이에게만 자신의 물건을 빌려주려는 성향이 있다. 하지만 펜과 같은 사소한 물건은 빌려주지 않기에도 좀 뭐한 느낌이 있다. 어쩔 수 없이 펜을 내어주면, 자신도 모르게 그 사람에 대한 인식이 다소 좋아진다. 나중에 펜만 잘 잊지 않고 돌려준다면 당신이 그리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12. 도움 요청하기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할 때, "혹시 이거 해줄 수 있어?"라는 투로 이야기하지 말자. "나 이런 도움이 필요한데..." 식의 어투가 훨씬 설득력있다. 이렇게 하면 다른 사람의 양심에 호소할 수 있어 훨씬 효과적이다. 만약 이 부탁을 거절하면 전자를 거절했을 때보다 훨씬 더 큰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죄책감을 느끼고 싶어하는 이가 누가 있겠는가?

13. 상대방을 불편하게 만들기

상대방을 불편하게 만드는 방법도 생각보다 무척 간단하다. 이야기를 하면서 계속 그 사람의 이마 중앙을 바라보면 된다.

미디어, 광고, 주위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다양한 심리 조작에 시달리고 있다. 이제 위의 트릭을 다 알았으니, 어떤 누가 나의 심리를 조작하려고 해도 휘말리지 않게 된다. 또, 다른 사람을 내가 원하는 대로 이리저리 휘둘릴 수도 있는 무서운 트릭이다. 그래도 항상 상대방을 존중하고 이해하려는 태도는 갖추도록 하자. 당신에 대한 인식이 나쁘다면 아무런 트릭도 통하지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