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5일 화요일

면리장침綿裏藏針 - 솜 속에 바늘을 감추어 꽂는다.

면리장침綿裏藏針 - 솜 속에 바늘을 감추어 꽂는다.

면리장침(綿裏藏針) - 솜 속에 바늘을 감추어 꽂는다.

솜 면(糸/8) 속 리(衣/7) 감출 장(艹/14) 바늘 침(金/2)

겉 다르고 속 다른 인물은 어디서나 지탄받는다. 더하여 번지르르한 말을 하고 다니면서 행동은 전혀 달리 하는 사람은 모두 상종을 하지 않으려 한다. 부드러운 솜 안에(綿裏) 날카로운 바늘을 감춘다(藏針)는 뜻의 이 성어는 겉으로는 착한 체하나 마음속으로는 아주 흉악함을 이르는 말이다. 어찌 보면 겉은 훌륭하나 속은 형편없는 羊頭狗肉(양두구육, <34>회)보다 몰래 사람을 칠 준비를 하는 이 말이 더욱 피해를 많이 끼친다고 볼 수 있다.

중국 元(원)나라의 화가이며 서예가인 趙孟頫(조맹부, 頫는 구부릴 부)의 ‘跋東坡書(발동파서)’란 글에 실려 있는 내용에서 유래되었다. 東坡(동파)는 중국 北宋(북송) 때의 제1의 시인이자 대문장가인 蘇軾(소식)의 아호이다. 부친 蘇洵(소순)과 동생 蘇轍(소철)과 더불어 三蘇(삼소)로 알려졌고, 赤壁賦(적벽부)는 동파의 명작으로 꼽힌다. 이 글에서 글씨에 일가를 이룬 동파의 글에 대해 자신도 ‘나의 글씨는 마치 솜 속에 숨겨진 쇠붙이와 같다(余書如綿裏鐵/ 여서여면리철)’고 말한 적이 있다 했다. 이때의 ‘솜 속의 쇠붙이‘는 보기에는 부드러운 것 같지만 실상은 속에 뼈가 들어 있는 듯이 필치가 강하다는 의미로 사용했다. 이처럼 이 말은 겉으로 부드러우나 마음속은 꿋꿋하고 굳세다는 外柔內剛(외유내강)을 나타냈기에 조금도 나쁜 뜻이 담겨져 있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綿裏針(면리침)으로 글자가 바뀌면서부터 의미가 달라져 칭찬하는 말이 아니라 ‘웃음 속에 칼이 있다‘는 笑裏藏刀(소리장도)와 같은 뜻으로 쓰이게 됐다.

言行一致(언행일치)를 덕목으로 한 선현들의 가르침은 겉과 속이 다른 것을 경계하는 비슷한 성어를 많이 남겼다. 북한 김정은이 장성택을 처형했을 때 당과 수령을 받드는 척하고 뒤에선 딴 마음을 먹었다고 비난한 陽奉陰違(양봉음위)나 面從腹背(면종복배), 口蜜腹劍(구밀복검), 包藏禍心(포장화심) 등 숱하다/ 제공 : 안병화(前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창름실즉지예절倉廩實則知禮節 - 곡식창고가 가득하면 예절을 안다.

창름실즉지예절倉廩實則知禮節 - 곡식창고가 가득하면 예절을 안다.

창름실즉지예절(倉廩實則知禮節) - 곡식창고가 가득하면 예절을 안다.

곳집 창(人/8) 곳집 름(广/13) 열매 실(宀/11) 곧 즉, 법칙 칙(刂/7) 알 지(矢/3) 예도 례(示/13) 마디 절(竹/9)

사람이 살아가는데 衣食住(의식주)가 필수이지만 그 중에서도 음식이 첫손에 꼽힐 정도로 중요할 것이다. 먹지 못하면 당장 목숨을 부지하지 못한다. 孔子(공자)는 無信不立(무신불립)이라 하여 병사나 식료보다 신뢰가 앞서야 한다고 가르쳤는데 이는 국민들의 믿음이 없으면 나라가 성립할 수 없다는 뜻에서였다. 음식이 첫손에 꼽혀야 한다는 말 중에 以食爲天(이식위천)은 먹는 것을 하늘로 여긴다는 유명한 성어다. 食爲民天(식위민천)이라 해도 같은 뜻으로 중국 漢高祖(한고조) 劉邦(유방)을 도왔던 酈食其(역이기, 酈은 땅이름 역, 食은 밥 식, 먹을 사, 사람이름 이)가 한 말이다.

창고에 곡식이 가득 찬(倉廩實則) 연후에 예절을 알게 된다(知禮節)는 말도 먹는 음식의 중요성을 말한다. 사람 사이에 예절을 차릴 수 있는 것도 먹는 것이 해결된 후의 일이란 뜻이다. 곳집 廩(름)은 곡식을 저장하는 창고, 의젓하고 당당한 凜凜(늠름)할 때는 찰 凜(름)을 쓴다. 이 말을 남긴 사람은 春秋時代(춘추시대) 齊(제)나라의 桓公(환공)을 도와 최초의 覇者(패자)로 오르게 한 명재상 管仲(관중)이다. 군사력의 강화, 상업과 수공업의 육성을 통하여 부국강병을 꾀한 그는 평생의 친구 鮑叔牙(포숙아)와의 우정 管鮑之交(관포지교)라는 말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관중이 남긴 말을 후세사람들이 모았다고 하는 ‘管子(관자)’의 牧民(목민)편에 이 구절이 나온다. 농업이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이니 백성들은 곡물을 심고 거두는 일에 힘쓰고, 다스리는 사람은 계절에 따라 생산에 힘쓰고 곡식 창고를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강조한다. ‘나라에 재물이 많으면 먼 데서도 찾아오고, 토지가 개간되면 백성들이 머무른다(國多財則遠者來 地辟擧則民留處/ 국다재즉원자래 지벽거즉민유처). 창고가 그득하면 예절을 알고, 옷과 양식이 풍족하면 영욕을 알게 된다(倉廩實則知禮節 衣食足則知榮辱/ 창름실즉지예절 의식족즉지영욕).’

千字文(천자문)에도 ‘다스림의 근본은 농사이니 때맞춰 심고 가꾸는데 힘써야 한다(治本於農 務玆稼穡/ 치본어농 무자가색)‘는 구절이 있다. 농사가 지금은 비중이 떨어졌다고 해도 식량은 농사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농업을 중시하면서 제조업과 서비스업을 병행시켜야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다. / 제공 : 안병화(前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공휴일궤功虧一簣 - 마지막 한 삼태기 흙이 모자라 공이 무너진다.

공휴일궤功虧一簣 - 마지막 한 삼태기 흙이 모자라 공이 무너진다.

공휴일궤(功虧一簣) - 마지막 한 삼태기 흙이 모자라 공이 무너진다.

공 공(力/3) 이지러질 휴(虍/11) 한 일(一/0) 삼태기 궤(竹/12)

온갖 정성을 기울여 최선을 다한 일은 결과가 말해 준다. 공들여 쌓은 탑은 무너질 리 없다고 했다. 그러나 탄탄한 탑이라도 사소한 실수에서 만사휴의가 된다. 앞서 나왔던 堤潰蟻穴(제궤의혈)은 천 길이나 되는 제방 둑이 조그만 개미구멍에 의해 무너진다고 가르쳤다. 그러니 ‘다 된 밥에 재 뿌리기’가 되지 않도록 마지막까지 작은 빈틈이라도 보이지 않아야 되는 법이다. 산을 쌓아 올리는데 한 삼태기의 흙을 더 보태지 않아 완성을 보지 못한다는 이 성어는 거의 이루어진 일을 중지하여 오랜 노력이 아무 보람도 없게 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四書三經(사서삼경)에 드는 중국 고대의 기록 ‘書經(서경)’에 이 말이 처음 등장한다. 상고시대의 책으로 숭상해야 된다는 뜻의 尙書(상서)라고도 한다. 武王(무왕)이 폭군 紂王(주왕)을 폐하고 周(주)나라를 세웠을 때 그 위력이 주변의 九夷八蠻(구이팔만)까지 떨쳤다. 서쪽의 旅(여)라는 나라에서 특산품인 큰 개 獒(오, 獒는 사나운개 오)를 바쳤다. 이 개는 키가 넉 자가 되고 사람의 말도 알아들었다. 무왕은 이 기이한 개를 받고 애지중지했다. 동생 召公(소공) 奭(석)은 개에 빠져 정치를 등한히 하지 않을까 하여 경계하는 글을 올렸다.

고생 끝에 나라를 열었으니 군주된 사람은 새벽부터 밤까지 부지런히 정사에 임해야 한다며 이어진다. ‘사소한 행동에 신중하지 않으면 끝내는 큰 덕에 누를 끼치게 됩니다. 아홉 길 높은 산을 만드는데 흙 한 삼태기가 없어 공을 헛되이 해서는 아니 됩니다(不矜細行 終累大德 爲山九仞 公虧一簣/ 불긍세행 종루대덕 위산구인 공휴일궤).’ 仞은 길 인, 길이 단위로 1인이 8척이라 했다. 旅獒篇(여오편)에 실려 있다. ‘論語(논어)‘ 子罕(자한)편에는 ’비유하자면 산을 쌓는데 흙 한 삼태기가 모자라 이루지 못했다(譬如爲山 未成一簣/ 비여위산 미성일궤)‘로 비슷하게 나온다. / 제공 : 안병화(前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천산조비절千山鳥飛絶 - 온 산에는 새 한 마리 날지 않는다.

천산조비절千山鳥飛絶 - 온 산에는 새 한 마리 날지 않는다.

천산조비절(千山鳥飛絶) - 온 산에는 새 한 마리 날지 않는다.

일천 천(十/1) 메 산(山/0) 새 조(鳥/0) 날 비(飛/0) 끊을 절(糸/6)

산이란 산마다 새 한 마리 날지 않을 정도로 고요하다. 바로 흰 눈에 덮여 만물이 숨죽이고 있다. 이런 풍경을 떠올릴 때마다 연상하는 유명한 시의 한 구절이다. 唐(당)나라의 명문장 柳宗元(유종원, 773~819)의 시 ‘江雪(강설)’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명구다. 唐宋八大家(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인 유종원은 친구 韓愈(한유)와 함께 고문운동을 일으켜 함께 韓柳(한류)라고도 불린다.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는 풍자적인 글도 빼어나지만 자연 속의 정경을 노래하여 陶淵明(도연명), 王維(왕유) 등을 이어받는 자연시파로 잘 알려진 시인이기도 하다.

오언절구로 짤막한 이 시의l 전문을 보자. ‘온 산엔 새 한 마리 날지 않아 고요하고, 길이란 길엔 사람 자취 모두 끊겼네(千山鳥飛絶 萬逕人蹤滅/ 천산조비절 만경인종멸). 외로운 배엔 도롱이와 삿갓 쓴 노인, 홀로 낚시하는데 추운 강엔 눈만 내리는구나(孤舟蓑笠翁 獨釣寒江雪/ 고주사립옹 독조한강설).’ 逕은 길 경, 지름길 徑(경)과 통하는 글자, 蹤은 발자취 종, 蓑는 도롱이 사, 도롱이는 짚으로 엮어 허리나 어깨에 걸쳐 두르는 비옷을 말한다. 천산과 만경은 물론 구체적인 수가 아닌 많은 수를 형용한 것이다.

폭설이 내린 산하에 새도 날지 않고 오가는 사람도 없다. 차가운 날씨 속에서도 삿갓에 도롱이를 두른 노인이 작은 배를 타고서 낚시를 한다. 한 폭의 동양화를 떠올리는 이런 시가 詩中有畫(시중유화)가 된다. 이런 정경도 뛰어나지만 끊기고 소멸되었다는 絶(절)과 滅(멸) 두 글자에 주목하면 시인의 심경을 읽을 수 있다. 유종원은 혁신정치 집단에 참여했다가 실패하여 지방을 전전하며 울분을 달랬다. 그래서 공허한 세상을 등지고 폭설에 의한 끝없는 정적의 세계로 침잠하려는 의지가 구현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유종원이 이 시를 지은 곳은 瀟湘八景(소상팔경)으로 알려진 강 상류의 永州(영주)라는 곳이라 한다. 본의는 아니지만 지방으로 좌천되었어도 이겨내고 명편을 남겼다. 은퇴를 하거나 또는 사업에 실패하여 복작거리는 도시를 떠나 낙향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잘 나가던 때와 비교하면 현재의 생활은 서럽다. 지나간 세월을 잘 되살리며 천산을 감상하고, 또 하고 싶었던 자기만의 세계로 빠져드는 것도 한 방법이다. / 제공 : 안병화(前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득롱망촉得隴望蜀 – 농서 지방을 얻은 뒤 촉 땅을 넘보다, 욕심이 끝이 없다.

득롱망촉得隴望蜀 – 농서 지방을 얻은 뒤 촉 땅을 넘보다, 욕심이 끝이 없다.

득롱망촉(得隴望蜀) – 농서 지방을 얻은 뒤 촉 땅을 넘보다, 욕심이 끝이 없다.

얻을 득(彳/8) 큰고개 롱(阝/16) 바랄 망(月/7) 나라이름 촉(虫/7)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 무욕의 생활을 영위한 성인들은 마음을 비우라고 하지만 일반 사람들은 지킬 수가 없다. ‘말 타면 종 두고 싶다’나 ‘행랑 빌리면 안방까지 든다’는 우리 속담이 잘 말해 준다. 속담성어로 騎馬欲率奴(기마욕솔노), 借廳借閨(차청차규)라 한다. 고사에도 상당수 등장한다. 겨를 핥다 쌀까지 먹는다는 砥糠及米(지강급미, 砥는 핥을지, 糠은 겨 강), 식객이 고기반찬에다 수레까지 요구했다는 車魚之歎(거어지탄) 등이다. 농 지방을 얻고서(得隴) 촉 지역까지 욕심낸다(望蜀)는 이 말은 역시 만족할 줄을 모르고 계속 욕심을 부리는 경우를 가리키는 대표적인 성어다.

중국 漢(한)나라 말기 王莽(왕망, 莽은 풀 망)이 찬탈하여 세운 新(신)나라는 무리한 개혁정책으로 정국은 혼란에 빠졌다. 한 왕조의 핏줄인 劉秀(유수)는 농민들의 반란을 이용하여 신나라를 멸망시키고 제위에 올랐는데 바로 後漢(후한)의 光武帝(광무제)다. 군웅들이 할거하여 저마다 왕을 자칭하는 중에서 동부 지역 일대를 평정했다고 해도 그때까지 隴西(농서) 지방엔 隗囂(외효, 囂는 떠들 효)가, 蜀(촉) 지방엔 公孫述(공손술)이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외효는 왕망의 부하로 있다가 유수에게 항복했다가 당시는 공손술에 붙어 있었다. 광무제 유수는 岑彭(잠팽)을 대장군으로 하여 먼저 외효군을 공략했다. 세력이 달린 외효는 도망하다 병사했고 이제 남은 것은 공손술뿐이었다. 광무제는 잠팽에게 즉시 촉으로 들어가라는 서신을 보냈다. ‘사람은 만족할 줄을 모른다지만 이제 농을 평정하고 보니 다시 촉을 바라게 되는구려(人苦不知足 旣平隴 復望蜀/ 인고부지족 기평롱 부망촉).’ 잠팽은 공손술을 토벌하다 암살당했지만 결국 광무제군이 격멸시키고 천하를 다시 통일했다. ‘後漢書(후한서)’ 잠팽전에 실려 있다.

수단을 가리지 않고 큰돈을 모은 사람이나 높은 벼슬자리에 있는 사람이라고 만족을 알까. 재산을 많이 모은 사람은 이름을 남기려 명예를 사려고 하고, 권세를 떵떵거리던 사람은 이면으로 또 돈을 밝힌다. 99원을 가진 사람이 남의 1원을 뺏어 100원을 채우려는 심보다. 중단할 줄 알면 평안할 텐데 만족을 모른다./ 제공 : 안병화(前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철면피鐵面皮 - 쇠로 만든 낯가죽, 염치가 없고 뻔뻔스러운 사람

철면피鐵面皮 - 쇠로 만든 낯가죽, 염치가 없고 뻔뻔스러운 사람

철면피(鐵面皮) - 쇠로 만든 낯가죽, 염치가 없고 뻔뻔스러운 사람

쇠 철(金/13) 낯 면(面/0) 가죽 피(皮/0)

얼굴은 체면을 나타낸다. 염치가 없고 뻔뻔스러운 사람을 낯에 비유해서 낯가죽이 두껍다고 손가락질한다. 얼굴 피부의 두께가 실제 차이 나는지 체면이 없는 사람을 욕하는 속담도 많다. ‘벼룩도 낯짝이 있다’에는 빈대도 모기도 동원된다. ‘얼굴이 꽹과리 같다’고도 한다. 같은 뜻의 성어도 줄줄이 대기한다. 얼굴에 쇠가죽을 발랐다고 面張牛皮(면장우피)라 하고, 그런 사람은 부끄러움을 모른다고 厚顔無恥(후안무치)라 한다. 천하에 박색이고 얼굴이 두꺼웠지만 지혜가 넘쳐난 齊(제)나라의 추녀 鐘離春(종리춘)은 强顔女子(강안여자)라 불렸다. 마음까지 시커먼 面厚心黑(면후심흑)도 있다.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면 이 모든 것을 압도할 정도로 부끄럼이 없고 뻔뻔할 것이다. 쇠로 만든 낯가죽(鐵面皮)이니 닳지도 않고 쇠가죽은 저리 가라한다. 이 성어는 楊光遠(양광원)이라는 사람의 행태에서 비롯됐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일찍이 진사에 합격했다. 하지만 출세욕이 대단해서 항상 권력자의 집안을 찾아다니며 비위를 맞추기에 바빴다. 고관이 쓴 형편없는 습작시를 보고도 李太白(이태백)을 능가한다고 하고, 술 취한 권력자가 매로 때려주고 싶다고 하자 등짝을 내어 주기도 했다.

모욕을 당하고서도 태연한 그를 당시 사람들은 천하게 여겼다. ‘세상 모두는 양광원의 부끄러운 얼굴은 열 겹의 철갑처럼 두껍다고 말했다(皆曰 楊光遠慚顏 厚如十重鐵甲也/ 개왈 양광원참안 후여십중철갑야).’ 중국 唐(당)나라 때 민간에 전하는 이야기를 五代(오대) 때의 王仁裕(왕인유)가 엮은 ‘開元天寶遺事(개원천보유사)’에 실려 있다. 孫光憲(손광헌)의 ‘北夢瑣言(북몽쇄언)’에는 王光遠(왕광원)이라는 사람의 이야기로 나온다고 한다.

宋(송)나라 때 관리의 부정을 감찰하는 趙抃(조변, 抃은 손뼉칠 변)이라는 죄지은 사람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탄핵했기에 鐵面御史(철면어사)로 불렸다고 宋史(송사)에 전한다. 강직하다는 뜻의 이런 철면은 갈수록 더욱 필요한데 오늘날엔 뻔뻔한 철면만 남았다. 지위가 낮은 사람도 직책에 따라 거들먹거리지만 높은 나리들은 범죄의 혐의가 드러나도 눈도 깜짝 않는다. 쇠가죽으로 된 낯짝을 가진 사람에게는 철면어사를 불러야 될 것인가./ 제공 : 안병화(前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이목지신移木之信 - 나무를 옮겨 믿음을 주다.

이목지신移木之信 - 나무를 옮겨 믿음을 주다.

이목지신(移木之信) - 나무를 옮겨 믿음을 주다.

옮길 이(禾/6) 나무 목(木/0) 갈 지(丿/3) 믿을 신(亻/7)

한 곳에 긴 장대를 세워 놓고 다른 쪽으로 옮기면 상을 준다. 이렇게 공고를 냈다면 요즘도 정신 나간 짓이라고 손가락질할 것이다. 이 포고문이 戰國時代(전국시대, 기원전 403년~221년) 뒤숭숭한 秦(진)나라에서 있었다면 더 안 믿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商鞅(상앙)이란 재상이 믿게 했다. 장난삼아 한 사람에게 상을 준 것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백성을 속여서는 안 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실천한 후 차차 법령을 개정할 수 있었다. 나무를 옮겨 믿음을 준 것이라 하여 移木之信 또는 같이 옮길 徙를 써서 徙木之信(사목지신)이라고도 한다.

상앙은 일찍 형명학을 공부하여 法家(법가)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본래 衛(위)나라 사람이었지만 뜻을 펼치지 못하자 진의 孝公(효공)에 의해 발탁되어 재상이 되었고 법치에 의한 부국강병책을 시행하여 국가의 기틀을 확립했다. 상앙은 각종 정책을 시행하기 전 백성들이 믿고 따라줄지 몰라 묘책을 냈다. 남쪽 성문에 3丈(장, 약9m)이나 되는 긴 장대를 세운 뒤 북쪽 성문으로 옮기면 황금 10냥을 준다고 한 것이다.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상금을 50냥으로 올렸더니 밑져야 본전이라며 한 정신 나간 사람이 달려들어 옮겨 놓았다. 상앙이 즉시 이 사람을 불러 약속대로 거금을 주었다. 이 일이 있은 후 조정의 법령은 어느 누구도 어기는 사람이 없었고 나라는 크게 부강해졌다.

상앙의 후일담. 엄격한 법치로 나라를 반석에 올려놓았지만 그만큼 반감도 많이 샀다. 태자 때 법을 어겨 벌을 받은 惠文王(혜문왕)이 즉위하자 반대파들에게서 반역죄로 몰려 처형되었고 그의 시신은 사지가 찢어지는 車裂刑(거열형)에 처해졌다. 이러고 보면 곧이곧대로의 법집행도 얼마든지 원성을 사게 될 때가 있다./ 제공 : 안병화(前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청이불문聽而不聞 - 들어도 들리지 않음, 관심을 두지 않음

청이불문聽而不聞 - 들어도 들리지 않음, 관심을 두지 않음

청이불문(聽而不聞) - 들어도 들리지 않음, 관심을 두지 않음

들을 청(耳/16) 말이을 이(而/0) 아닐 불(一/3) 들을 문(耳/8)

예부터 말하는 것은 줄이고 귀담아 듣는 것을 늘리라 했다. 모든 재앙은 말하는 데서 나온다고 口禍之門(구화지문), 禍生於口(화생어구)란 말이 전한다. 물론 말할 때와 침묵할 때를 잘 분간해야 한다는 어려운 성어 語嘿囋噤(어묵찬금, 嘿은 고요할 묵, 囋은 기릴 찬, 噤은 입다물 금)도 있지만, 듣는 것은 하나같이 귀담아 들으라고 했다. ‘팔십 노인도 세 살 먹은 아이한테 배울 것이 있다’, ‘부모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는 우리 속담이 그렇다. 귀를 씻고 남의 말을 경청한다는 洗耳恭聽(세이공청),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들으면 현명해진다는 兼聽則明(겸청즉명)의 교훈도 있다.

들어도(聽而) 들리지 않는(不聞) 상태는 어떤 경우일까. 한번만 들어도 척 알아들었거나 듣지 않아도 무슨 말인지 알아챌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孔子(공자)는 예가 아니면 듣지도 말하지도 말라(非禮勿聽 非禮勿言/ 비례물청 비례물언)고 했지만 그것도 아니다. 유가의 四書(사서) 가운데 분량은 가장 적지만 내용은 간단하지 않은 ‘大學(대학)’에 성어가 실려 있다. 전7장의 내용을 보자. ‘마음이 그 일에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心不在焉 視而不見 聽而不聞 食而不知其味/ 심부재언 시이불견 청이불문 식이부지기미).’ 보거나 듣거나 먹는 것까지 그것에 마음을 두지 않으면 헛일이란 이야기는 자신의 덕을 닦는데 있어 자신의 마음을 바르게 잡는 것이 가장 중요한 첫걸음이란 것이다.

중국 齊(제)나라의 명재상 管仲(관중)은 ‘管子(관자)’에서 명군이 되기 위해서는 현명한 신하를 두어야 한다며 이 말을 썼다. ‘비록 현명한 군주라도 백보 밖의 소리는 들으려고 해도 들을 수가 없고, 담장 너머로는 보려고 해도 볼 수가 없다(雖有名君 百步之外 聽而不聞 閒之堵牆 窺而不見/ 수유명군 백보지외 청이불문 한지도장 규이불견).’ 君臣(군신) 상편에 있는 이 말은 훌륭한 지도자는 직접 듣지 못하더라도 세상의 의견을 바로 들려주는 강직한 사람을 두어야 잘 다스릴 수가 있다는 이야기다.

남의 이야기를 집중하여 듣지 않고 듣는 둥 마는 둥 하거나, 상대가 말을 하든 말든 관심을 나타내지 않으면 소통할 수가 없다. 정치인이나 한 조직의 지도자가 자기 이야기만 하는 것은 물론 꼴불견인데 아랫사람의 말을 듣는 것까지 대충 한다면 윗사람의 자격이 없다. 또 한 가지 현명해진다고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들으면서 일부에 치우쳐 믿으면 되레 어리석어지니(偏信則暗/ 편신즉암) 주의할 일이다./ 제공 : 안병화(前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송양지인宋襄之仁 – 송나라 양공의 인자함, 쓸데없이 하찮은 인정을 베풂

송양지인宋襄之仁 – 송나라 양공의 인자함, 쓸데없이 하찮은 인정을 베풂

송양지인(宋襄之仁) – 송나라 양공의 인자함, 쓸데없이 하찮은 인정을 베풂

성 송(宀/4) 도울 양(衣/11) 갈 지(丿/3) 어질 인(亻/2)

남을 생각하고 양보하거나 먼저 배려하는 것은 보통 사람들이 행하기 어려운 미덕이다. 성인들이 양보를 찬양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성공의 가장 좋은 방법이 되기도 한다는 격언도 있다. 하지만 아무 때나 양보할 수는 없다. 더군다나 죽고 살기로 싸우는 전쟁 통에는 남에게 이겨야 한다. 병사를 전쟁에 출전시켰을 땐 계책을 써야 할 뿐만 아니라, 속임수를 쓰는 것도 부끄러워하거나 싫증을 내어서는 안 된다는 兵不厭詐(병불염사)란 말이 잘 말해준다. 그런데 싸움터에 나가서도 쓸데없이 대의명분만 따지다가 두고두고 웃음거리가 된 사람이 있다. 宋(송)나라 襄公(양공)의 인자함이라는 뜻의 성어를 남긴 양공이다. 불필요한 동정이나 배려를 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비유하는 말이다.

송나라는 唐(당)을 멸망시킨 송이 아니고 春秋時代(춘추시대)의 소국이었다. 그래도 殷(은)나라를 계승한다는 자부심이 컸다. 양공은 태자 때 이복형인 目夷(목이)에게 왕위를 양보하려 했으나 부왕이 죽어 왕위에 올랐다. 즉위 7년째 되던 해 송나라에 강풍을 동반한 심한 비와 함께 운석이 계속해서 퍼부어졌고 얼마 안 있어 첫 霸者(패자)였던 齊(제)의 桓公(환공)이 죽었다. 양공은 이제 자신이 패자가 될 징조라며 야망을 품었다. 초기엔 제법 제나라를 치고 추종세력을 만들었고 盂(우)라는 곳에서 회맹하여 맹주로 자처하기도 했다. 재상으로 있던 형 목이는 작은 나라가 패권을 다투는 것은 화근이라며 말렸지만 듣지 않았다. 그즈음 이웃 鄭(정)나라가 자기를 무시하고 楚(초)나라와 통교했다는 이유로 쳐들어갔다. 정나라를 구원하기 위한 초나라의 대군이 泓水(홍수)라는 강을 건너오고 있었다. 목이가 적이 강을 건너기 전에 쳐야 한다고 건의했지만 듣지 않았고, 건너와 진을 칠 때 공격해야 한다고 해도 물리쳤다. ‘군자는 다른 사람이 어려울 때 곤란하게 만들지 않는 것이오(君子不困人於厄/ 군자불곤인어액).’ 전열을 가다듬은 초군이 공격해 오자 송군은 대패했고 양공은 허벅다리에 부상을 입어 그것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세상 사람들은 이를 송나라 양공의 인이라며 비웃었다(世笑以爲宋襄之仁/ 세소이위송양지인). ‘史記(사기)’ 송세가, ‘十八史略(십팔사략)’, ‘左氏傳(좌씨전)’ 등 여러 곳에서 실려 전한다.

양보를 할 때도 그에 못지않은 이득을 차려야 성공한 협상이다. 당연한 권리를 주장 못하고 상대방의 힘에 눌려 자꾸 뒷걸음질을 한다면 결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다. 작은 규모의 상담이나 국가 간의 외교전도 마찬가지다./ 제공 : 안병화(前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총욕불경寵辱不驚 - 총애 받거나 모욕당해도 놀라지 않다.

총욕불경寵辱不驚 - 총애 받거나 모욕당해도 놀라지 않다.

총욕불경(寵辱不驚) - 총애 받거나 모욕당해도 놀라지 않다.

사랑할 총(宀/16) 욕될 욕(辰/3) 아닐 불(一/3) 놀랄 경(馬/13)

윗사람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고 우쭐거리거나 질책을 받고서는 금세 기가 죽는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의 능력에 비해 높은 지위나 대우를 받으면 기뻐 놀라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약간의 불안감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을 나타내는 말이 受寵若驚(수총약경), 被寵若驚(피총약경)이다. 반면 칭찬을 받거나 지위가 올라도 태연하고, 욕을 당해도 별로 흔들리지 않는 경지의 사람도 드물지만 있다. 이런 사람이 총애를 받거나 모욕을 당하거나(寵辱) 놀라지 않는다(不驚)는 바로 이 성어다.

약간 놀라거나 흔들리지 않거나 차이가 나지만 글자 한 자 차이이고 뜻이 통하므로 유래를 다 살펴보자. 老子(노자)의 ‘道德經(도덕경)’ 13장 厭恥(염치)장에는 ‘총애를 받거나 치욕을 당하면 놀란 것같이 하고 세속적인 큰 걱정을 귀하게 여기기를 내 몸과 같이 하라(寵辱若驚 貴大患若身/ 총욕약경 귀대환약신)’고 했다. 총애를 받더라도 잃을 때가 오고, 굴욕도 시간이 해결해 주니 일희일비하지 말고 겸손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를 가졌다.

唐(당)나라 초기에 盧承慶(노승경)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관리들의 언행을 살펴 고과 점수를 매기는 벼슬을 갖고 있었는데 아주 공정하게 처리한다는 평을 받았다. 한 번은 식량을 싣고 가던 배가 뒤집혀 침몰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노승경은 책임진 관리를 하로 평정하고 이의가 없는지 물었다. 관리는 순순히 받아들였다. 배 침몰이 혼자만의 책임도 아니고 과한 것 같다며 중으로 올린 후 노승경이 어떠냐고 물었다. 기뻐할 줄 알았던 관리는 여전히 이의 없다고 했다. ‘노승경은 이 관리를 가리켜 총애를 받을 때나 수모를 받을 때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니 참으로 대단하다고 칭찬했다(承慶嘉之曰 寵辱不驚/ 승경가지왈 총욕불경).’ ‘新唐書(신당서)’ 열전에 전하는 이야기다.

‘菜根譚(채근담)’에는 이런 말이 있다. ‘영예와 치욕에 놀라지 아니하니 뜰 앞에 꽃이 피고 지는 것을 한가로이 바라볼 수 있다(寵辱不驚 閒看庭前花開花落/ 총욕불경 한간정전화개화락).’ 가고 머무는 것이나 높아지고 낮아짐을 생각 않으니 한층 풍성해진다. 한 때의 변화에 휘둘리지 말고 자신의 길을 뚜벅뚜벅 간다면 앞날이 밝다. 이해와 득실을 마음에 두지 않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제공 : 안병화(前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