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10일 일요일

선조의 여인들 - 인목왕후 1편

■ 선조의 여인들 - 인목왕후 1편

■ 선조의 여인들 - 인목왕후 1편

선조가 집권하던 16세기 말. 조선의 조정은 서로 뜻이 같은 관리들끼리 뭉치며 당이 만들어졌는데, 이 당들을 ‘벗들이 뭉친 조직’이라 하여 ‘붕당(朋黨)’이라 했다. 처음에는 동인과 서인, 이후 동인은 북인과 남인,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누어져 흔히 ‘사색당파(四色黨派)’라 한다. 조선 시대에 왕비는 국왕의 정실부인으로서 중궁(中宮)의 지위에 있던 여인이다. 임금과 함께 ‘전하(殿下)’로 불리며 국모(國母)로서 자리매김하던 존재로, 처신 여하에 따라 정국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기도 했다. 특히 붕당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드라마틱한 인물로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 김씨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냈다. 그녀의 생애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궁녀가 쓴 《계축일기》를 통해 널리 알려졌고, 오늘날까지도 광해군 시대를 담은 수많은 소설이나 드라마에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다.

인목왕후는 선조의 정비(正妃)인 의인왕후가 죽고 맞이한 선조의 계비(繼妃)이다. 사극(史劇) 속 비련의 주인공으로 인목대비라는 호칭으로 우리에게 더 익숙하다. 조선 전기에는 왕후가 승하하면 3년 뒤에 후궁을 왕비로 승진시키는 형식을 택했지만, 선조는 중종이 문정왕후를 외부에서 간택한 전례에 따라 전국에 금혼령을 내리고, 14세 이상의 딸을 가진 모든 양반가에 처녀단자를 올리게 했다. 그렇게 해서 간택된 김제남의 딸이 바로 인목왕후이다. 선조의 나이 51세, 인목왕후는 19세였다.

인목왕후 김씨는 1584년(선조 17년) 연흥부원군 김제남과 광산부부인 광주 노씨의 차녀로 태어났다.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아버지 김제남은 서인이었지만, 당파와는 거리가 먼 인물로 가문도 중종 때 권신 김안로가 몰락하면서 힘을 잃은 지 오래였다. 인목왕후가 왕비에 책봉되자 제일 당황한 인물은 세자 광해군이었다. 자신보다 9살이나 어린 새어머니가 거북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가 만약 적장자(嫡長子) 아들이라도 낳는 날에는 후궁 소생인 자신의 입지가 불안해 지기 때문이다.

인목왕후는 1603년(선조 36년)에 정명공주를 낳고, 3년 뒤 1606년(선조 39년)에는 적장자(嫡長子) 영창대군을 낳았다. 고대하고 고대했던 적장자의 탄생이었던 것이다. 선조 입장에서 늘그막에 얻은 막내아들은 하늘의 축복 그 자체였을 것이다. 전부인은 아이를 낳지 못한 채 죽었고, 후궁들이 낳은 아들들만 있었는데, 새장가를 든 젊은 부인에게서 55세의 늦은 나이로 적장자를 얻었으니 선조는 몹시 기뻤다. 하지만, 광해군으로서는 매우 불편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장차 혹시라도 왕위계승을 둘러싼 분쟁이 일어날 불씨가 생겼기 때문이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 그림 값은 어떻게 정해지는가?

◇ 그림 값은 어떻게 정해지는가?

◇ 그림 값은 어떻게 정해지는가?

먼저, 현재 여러분이 주변에서 접하는 대부분의 그림 값은 적절하다는 말씀부터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그림 값은 어떻게 정해질까요? 대략 이런 구도이지 싶습니다.

먼저, 화가의 입장입니다. 생애 첫 전시를 할 때 제일 먼저 난관에 부딪히는 게 있는데, 바로 ‘그림 값을 어떻게 정할까’일 겁니다. 스스로 자기 그림에 가치를 부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죠. 그래서 먼저 전시한 친구 그림 값에 연동도 하고, 하나뿐인 작품이란 자신감으로 얼토당토않게 비싸게 부르기도 하고, 예술을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며 값을 정하지 않기도 하죠.

어쨌거나 그 첫 전시를 정신없이 치르고 나면 어렴풋하게나마 감이 잡힙니다. 반성을 많이 하게 되는데, 자신의 의지와 현실은 상당한 격차가 있다는 걸 알게 되거든요. 하지만 좌절하지 않고 전시를 거듭할수록 들쭉날쭉하던 그림 값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게 됩니다. 그즈음이 돼서야 화랑들도 관심을 갖기 시작하는데, 특정 화랑과 연결까지 되면 비로소 미술시장에 들어서게 되는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화랑의 입장을 짐작해 보겠습니다. 매년 수많은 화가가 전시를 하지만 어느 정도 이름을 얻기 전까지는 주로 관망합니다. 섣부른 판단으로 일찍 화가와 손잡으면 기회비용이 높아지고, 너무 늦으면 다른 화랑이 ‘찜’할 수도 있지요. 그래서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단어인 ‘적당한’ 시기에 특정 화가와 연을 맺습니다. 그리고 전시를 계획하게 되는데, 화가로서는 여태 전시와는 다른 수익 배분이라는 생소한 환경을 만나게 됩니다.

언뜻 화랑은 폼 나는 문화사업으로 알고 있지만, 정확히 말하면 문화를 거래하는 수익사업입니다. 그래서 팔리면 좋고 안 팔리면 그만인 이전의 그림 값과는 다른, 현실성 있는 그림 값을 의논하게 되는데 대부분 화랑의 뜻이 반영됩니다. 소위 그 분야의 프로들이니까요. 그림을 척 보면 딱 맞는 구매자들이 연상된다는 말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진짜 그림 값이 매겨지게 됩니다.

구매자의 입장에도 서 보겠습니다. ‘사는 게 그림 값’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최종 결정은 구매자가 한다는 뜻이지요. 그림 값이 천정부지로 쭉쭉 오르면 참 좋겠으나 그건 그림이 전부인 화가나 수익을 내야 하는 화랑의 바람이고, 구매자는 그림 값에 대해 가장 객관적이고 냉철한 쪽이지요. 새 집에 필요해서든지, 투자로 구매하든지 간에 화랑의 조언은 듣겠지만, 저 정도 그림에 이 정도는 지불할 용의가 있다고 생각될 때 비로소 지갑을 열게 되거든요. 그래서 그 전시가 흡족하게 잘 끝나면 그림 값이 무사히(?) 통과된 것이나 마찬가지고, 화랑은 그 작가와 다음 전시를 웃으면서 같이 준비할 수 있지요.

이렇게 그림 값은 화가의 그림과 화랑의 판단력, 구매자의 수긍이라는 세 가지가 잘 조화가 돼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대부분 그림 값은 신뢰할 수 있다고 한 말이 어느 정도 이해되는지요? ‘부르는 게 그림 값’이라는 소위 성층권의 대가들에게는 상관없는 얘기일 것 같으나 그들 역시, 이런 과정을 다 거치며 체급을 올린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림 값은 ‘사는 게 값’과 ‘부르는 게 값’ 사이의 영원한 줄다리기 혹은 숙제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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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 칸딘스키의 블루마운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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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

◇ 2021년 소의 해, 전국의 소 있는 마을을 살펴보니

◇ 2021년 소의 해, 전국의 소 있는 마을을 살펴보니

◇ 2021년 소의 해, 전국의 소 있는 마을을 살펴보니

강원 평창군 진부면 하진부2리 오대산 자락에 ‘소도둑놈 마을’이 있다. 그 옛날 산적들이 마을로 내려와 소를 훔쳐 잡아먹는 일이 잦아 소도둑놈골로 불린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고랭지 채소와 당귀 재배로 먹고살던 이 외딴 마을은 2006년 수해를 겪은 뒤 활로를 찾다 옛 이름을 공식 명칭으로 되살렸고, 2013년 산촌 생태체험 마을로 선정되며 전국에 이름을 널리 알렸다. 200여명이 사는 작은 마을에 한 해 3000명 이상의 관광객이 몰리기도 했다. 역사 속에 숨어 있던, 소에 얽힌 지명 이야기가 행운을 부른 것 같다.

경남 거창군 가북면 ‘우혜 마을’ 이름에도 소가 들어간다. 한자말 우혜(牛惠)는 소의 은혜를 뜻한다. 어느 날 호랑이가 나타나서 농부가 일하느라 논두렁에 눕혀놓은 어린아이를 해치려 했는데, 소가 맞서 싸운 덕에 아이를 구했다는 얘기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사람을 지키고, 사람을 위해 헌신하는 소의 은혜를 기리는 마음을 마을 이름에 담았다. 강원 강릉 주문진 바닷가에는 길게 누운 소 모양의 ‘소돌 마을’이 있다. 이곳 사람들은 마을 제사 때 소고기를 쓰지 않고 닭고기를 올린다 한다. 풍수에서 소 형상의 마을은 풍요와 자손의 번창을 이뤄준다고 하니 소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전국 각지에 한글 ‘소’나 한자 소 ‘우’(牛)자가 들어간 지명이 무척 많다. 국토지리정보원은 전국의 소 관련 지명이 731개로 십이간지 중 용(1261개), 말(744개)에 이어 세번째로 많다는 조사결과를 27일 발표했다. 소가 누운 형상의 와우산(臥牛山)은 서울·부산 외에 전국 곳곳에 있다. 제주의 우도(牛島)는 소 이름 들어간 섬의 대표다. 서울의 우면산(牛眠山), 우이동(牛耳洞)도 친숙하다. 쇠소깍·소똥령·소티재·쇠물뿌리 같은 우리말 지명도 정겹다.

2021년은 신축년(辛丑年), 소의 해다. 한자 축(丑)이 소를 뜻한다. 소는 은근과 끈기를 상징하는 동물이다. 힘과 고집은 세지만 온순하고 듬직하며 의로운 존재로 여겨졌다. 2021년 소의 해에는 ‘집콕’에서 벗어나 우직하고 강건한 소의 이름이 들어간 우리 땅을 마음껏 다닐 수 있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코로나19 감염병에 시달린 2020년 쥐의 해를 어서 떠나보내고 싶다.

-경향신문-

◇ 부적절한 고인 마케팅, 안중근 명예 훼손

◇ 부적절한 고인 마케팅, 안중근 명예 훼손

◇ 부적절한 고인 마케팅, 안중근 명예 훼손

관직에 오르자마자 왕의 신임을 얻어 개혁 정치의 선봉장이 된 인물이 있다. 노비법을 고쳐 노비가 양인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고 능력 있는 서얼이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잘못 선정된 반정공신들의 위훈 삭탈을 추진했다. 조선 중종 때 개혁을 진두지휘한 조광조 얘기다. 어느 시대건 개혁은 기득권 세력의 불만을 키우기 마련이다. 그는 훈구파가 기획한 기묘사화에 엮여 38세의 젊은 나이에 억울한 죽음을 맞이했다.

지난 3월 황희석 열린민주당 최고위원이 “(검찰개혁을 추진한) 조국을 보면 조광조 선생이 떠오른다”고 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한양조씨 대종회는 “조광조 선조님과 우리 문중을 모독한 황희석은 사죄하라”며 강력 반발했다. 뇌물수수 등 11개 죄명으로 기소된 조국 전 법무장관을 조광조에 비유했으니 이런 반응이 나올 만도 하다.

정치인이 이미지 개선이나 후광 효과를 노리고 역사적 위인을 동원하는 일은 흔하다. 이른바 고인 마케팅 정치다. 부적절한 고인 마케팅은 위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결과를 낳아 문제가 된다.

지난 9월 추미애 법무장관 아들의 군복무 특혜 의혹에 대해 더불어민주당 박성준 원내대변인이 “추 장관 아들은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이 군인의 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위국헌신군인본분)’이라는 안중근 의사의 말을 몸소 실천한 것”이라고 말해 논란을 불렀다. 네티즌 사이에선 “안 의사가 독립운동을 하면서 특혜성 병가를 갔느냐, 휴가에서 미복귀했느냐”는 비판이 쏟아졌다.

최강욱 열린민주당 대표가 그제 서울중앙지법 결심 공판에 ‘위국헌신군인본분’이라는 글과 안 의사 손 모양이 새겨진 흰색 마스크를 쓰고 출석해 눈총을 받았다. 검찰은 이날 조 전 장관 아들에게 허위 인턴경력 확인서를 발급해준 혐의로 기소된 최 대표에게 징역 1년을 구형했다.

최 대표가 이런 마스크를 쓴 속내를 알 길은 없다. 국민의 시선은 차갑기만 하다. 관련 기사엔 “안중근 의사의 이름에 먹칠하지 맙시다.” “일제차 렉서스 몰면서 안중근 마스크 쓴다고?” 등의 비판 댓글이 달렸다. 안 의사가 살아 있다면 역정을 냈을 것이다. “내가 왜 거기서 나와.”

-세계일보-

◇ 부통령 아내 위해 임원직 버렸다, 美 세컨드 젠틀맨은 사랑꾼, 그래서 미국이 반했다

◇ 부통령 아내 위해 임원직 버렸다, 美 세컨드 젠틀맨은 사랑꾼, 그래서 미국이 반했다

◇ 부통령 아내 위해 임원직 버렸다, 美 세컨드 젠틀맨은 사랑꾼, 그래서 미국이 반했다

“내가 최초이긴 하지만 마지막은 아닐 겁니다.”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 당선인이 지난달 수락 연설에서 남긴 이 명언은 그의 남편 더글러스 엠호프에도 해당된다. 다음 달 20일(현지시간) 부인 해리스가 미국 역사상 첫 여성 부통령이 되면 남편 엠호프는 미국 최초의 ‘세컨드 젠틀맨(the Second Gentleman)’으로 기록된다.

해리스 부통령과 56세 동갑내기인 엠호프는 스스로를 ‘Mr. 카멀라 해리스’라고 소개하기를 즐긴다. 트위터 자기소개란엔 “카멀라 해리스의 남편이라 자랑스러운 사람”이라고 써놨다. 그를 향해 “현대적인 남편”(CNN) “페미니스트가 꿈꾸는 이상형”(가디언) 등의 수식어가 붙는다. 첫 여성 부통령에 대한 여론의 관심은 남편으로도 향하고 있다.

그의 ‘사랑꾼’ 면모는 비밀이 아니다. 2019년 해리스가 민주당 후보 경선에 한창일 때 한 토론회에 참석한 자리에선 몸을 날려 부인을 지켰다. 한 남성이 갑자기 무대에 난입해 해리스를 공격하려 하자 연단으로 바로 뛰어들어와 제압한 것.

엠호프는 직후 “내가 카멀라를 위해 하지 못할 일은 없다”고 트윗을 올렸다. 해리스 부통령 당선인 역시 엠호프를 애칭 ‘두기(Dougie)’라고 부르며 애정을 숨기지 않는다. 연설에서도 “두기가 가장 잘생겨 보일 때가 언제게요? (양파 썰 때 눈 맵지 말라고 쓰는) 어니언 고글을 착용했을 때랍니다”라는 게 단골 멘트였다. 수영할 때 착용하는 수경처럼 생긴 어니언 고글을 써도 잘생겼다는 자랑이자, 양파를 자주 썰며 요리도 잘 한다는 자랑까지 섞여 있다.

검사 출신인 해리스처럼 엠호프도 법조인이다. 엔터테인먼트 분야가 전문인 대형 로펌 DLA파이퍼의 임원인 파트너 변호사로 활약했다. 미국 대형 로펌 특성상 정부 로비를 빼놓을 수 없기에 부인의 공식 취임 이전에 사퇴할 예정이다. 30년 넘게 캘리포니아를 거점으로 일했으나 부인의 워싱턴DC 입성을 위해 자신의 경력은 ‘잠시 멈춤’을 택했다.

엠호프는 대신 워싱턴DC 소재 조지타운대 법대에서 교편을 잡는다. 조지타운대는 지난 10일 “미디어와 엔터테인먼트 및 지적 재산권 분야에서 어려운 소송을 해결해오며 두각을 드러낸 엠호프 변호사를 교수진으로 맡게 되어 기쁘다”는 공식 입장을 냈다. 엠호프 역시 “차세대 변호사 양성에 기여하고 싶은 꿈이 이뤄졌다”고 소감을 밝혔다.

엠호프는 해리스를 2013년 지인이 주선한 소개팅에서 만났고, 1년도 안 돼 프러포즈했다. 엠호프는 슬하에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둔 이혼남이었고 해리스는 초혼이다. 해리스는 결혼 뒤에도 자신의 성(姓)을 고수했다.

해리스는 2019년 엘르 매거진에 기고한 글에서 “나도 이혼한 가정에서 자랐기에 아이들이 얼마나 힘든지 안다”며 “더그의 두 자녀에게 조심스레 다가갔고 조금씩 친해졌다”고 적었다. 해리스의 트위터 자기소개란엔 ‘마말라(Momala)’, 즉 엄마(mom)과 자신의 이름을 합성한 단어가 적혀있다. 해리스는 당시 엘르 매거진에 엠호프의 전 부인 커스틴과도 원만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커스틴은 멋진 엄마”라며 “우리가 함께 아이들 수영 경기에서 너무 큰 소리로 응원을 해서 애들이 ‘엄마들 창피해’라고 한 적도 있다”고 덧붙였다.

엠호프와 해리스는 곧 백악관의 새 역사를 쓴다. 엠호프는 최근 몇 주 동안 조 바이든 대통령 당선인과 퍼스트레이디가 될 질 바이든 등에 대한 적극적 옹호 목소리를 내왔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지난 11일 질 바이든에 대해 박사 자격이 있는지 비판하는 요지의 칼럼을 싣자, 바로 트윗으로 반박했다. “바이든 박사는 노력과 끈기로 학위를 취득했다”며 “만약 그가 남자였다면 이런 칼럼은 쓰이지 않았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미국 매체들은 “엠호프가 어린 시절을 보낸 브루클린의 낡은 아파트 현장” “엠호프에 대해 당신이 알아야 할 몇 가지” 등 사소한 것까지 보도하고 있다. 그에 대한 관심을 반영한다. 그중에서도 지난달 워싱턴포스트가 실은 칼럼은 독자의 큰 호응을 받았다. 여성 칼럼니스트인 알리사 로젠버그는 “엠호프가 어떤 역할을 할지는 아직 미지수이지만 이것만큼은 분명하다”며 “미국이 드디어 자신보다 아내의 커리어를 우선하는 첫 남성을 세컨드 젠틀맨으로 맞이하게 됐다”고 적었다.

-중앙일보-

◇ 코로나 생이별 국제 커플들 “특별비자 달라”-하늘길 막히자 외교부·靑에 호소

◇ 코로나 생이별 국제 커플들 “특별비자 달라”-하늘길 막히자 외교부·靑에 호소

◇ 코로나 생이별 국제 커플들 “특별비자 달라”-하늘길 막히자 외교부·靑에 호소

“결혼한 사람만 사랑입니까?”

이달 초 외교부 홈페이지에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국제 커플을 제발 도와달라”는 글이 올라왔다. 코로나로 하늘길이 막히면서 일본인 여자 친구를 9개월째 보지 못하는 A씨 사연이었다. 그는 “매일 밤 울먹이며 전화하는 것도 지치고 힘들다”며 “군대에서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도대체 언제 만날 수 있을까”라고 했다.

코로나로 대부분 국가가 외국인 입국 제한 정책을 펴고 있는 가운데, 1년 가까이 생이별을 겪는 이른바 ‘국제 커플’들의 호소가 외교부에 밀려들고 있다. 영사·재외국민 담당 부서에는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버티고 있는데 너무 힘들다” “남친(남자 친구) 한 번 보고 죽는 게 소원”이라는 애절한 사연이 한 달에 수십 건씩 쏟아진다고 한다. 지난달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도 “연인과 만날 수 있도록 특별 비자를 만들어달라”는 글이 올라왔다.

현재 결혼하지 않은 미혼 커플은 출입국에 제약이 많다. ‘관광 비자’ 같은 단기 비자를 받아야 하는데 코로나로 대부분 국가가 비자 발급을 사실상 중단했기 때문. 그나마 법적으로 부부라면 인도적 이유 등을 들어 비자를 내주기도 하지만 연인들은 해당하지 않는다. 그러자 국제 커플들이 자신들을 위한 ‘특별 비자’ 마련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프랑스 남자 친구와 3년째 원거리 연애 중인 B씨는 “코로나가 겨울에는 사그라들겠지 하다 벌써 9개월째 발만 구르고 있다”고 했다. 프랑스에 왔다 갔다 하려면 자가 격리 기간만 각국에서 2주씩 총 한 달이나 되기 때문에 직장에서 이를 허락받기란 사실상 불가능하고, 프랑스 남자친구가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아 한국에 오려 했지만 비자를 받지 못했다고 한다. B씨는 “사랑하는 사람과 수개월째 생이별하는 게 너무나 고통스럽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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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연인들이 국경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특별 비자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장거리 연애 비자’ 발급을 요구하는 국제 청원 사이트도 등장했다. 성화에 못 이겨 독일 등 일부 유럽 국가는 자국 거주자와 장거리 연인임을 ‘입증하면 비(非)EU 출신 연인들의 입국이 가능하도록 했다. 은행 계좌나 공동임대차계약서, 사진과 소셜미디어(SNS) 게시글 등을 심사해 비자를 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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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선조의 여인들 - 의인왕후 2편

■ 선조의 여인들 - 의인왕후 2편

■ 선조의 여인들 - 의인왕후 2편

인빈 김씨는 선조의 세 번 째 후궁으로 선조가 매우 총애하고 있었다. 인빈 김씨는 자식 욕심도 대단하여 왕자를 4명이나 생산하였고, 그런 만큼 자신의 아들을 세자로 만들려고 하는 야심 또한 만만치 않았다. 물론 선조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른 사람은 광해군이지만, 결론적으로 나중에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가 된 인물이 바로 그녀의 아들인 정원군이 낳은 손자 능양군이다. 아들을 왕으로 만들지는 못했지만 손자를 왕으로 만든 셈이다.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도망을 가게 되는데, 본부인인 의인왕후 박씨가 아닌 공빈 김씨를 데리고 의주로 피난을 갔다. 의인왕후는 평양에서 먼저 함흥으로 가서 선조를 맞이하려고 했으나 평양의 군민(軍民)들에게 길이 가로막히는 일을 겪기도 하였다. 그 뒤 선조에 앞서 평양을 떠난 의인왕후는 평안도 강계로 피난을 갔으며, 한양이 수복되어 선조가 환도한 뒤에도 선조와 떨어져 황해도 해주(海州)에 머물렀다. 선조는 사간원이 잇따라 의인왕후의 환도(還都)를 간언해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의인왕후는 1595년(선조 28년) 겨울이 되어서야 한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에도 선조는 인빈 김씨만 데리고 피난을 가고, 의인왕후는 선조와 떨어져 광해군과 함께 황해도 수안(遂安)으로 피난을 갔다. 그리고 일본군이 철수한 뒤에도 환도를 하지 못하다가 1599년(선조 32년) 음력 윤4월이 되어서야 한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연이은 전쟁과 피난으로 병세가 깊어져 이듬해인 1600년(선조 33년) 음력 6월 27일에 죽었다.

선조는 "(왕비는) 투기하는 마음, 의도적인 행동, 수식하는 말 같은 것은 마음에 두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권하여도 하지 않았으니 대개 그 천성이 이와 같았다. 인자하고 관후하며 유순하고 성실한 것이 모두 사실로 저 푸른 하늘에 맹세코 감히 한 글자도 과찬하지 않는다." 고 말하며 덕망 높은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며 칭송하였다.

의인왕후는 죽은 뒤에 유릉(裕陵)에 매장되었다. 오늘날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위치한 의인왕후의 묘역은 1630년(인조 8년)에 건원릉(健元陵) 서쪽에 조성되었던 선조의 무덤인 목릉(穆陵)이 그곳 곁으로 이전되면서 목릉으로 합해져 불리게 되었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선조의 여인들 – 의인왕후 1편

■ 선조의 여인들 – 의인왕후 1편

■ 선조의 여인들 – 의인왕후 1편

선조는 중종과 창빈 안씨 소생의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이다. 하성군 시절 그는 사리가 밝고 똑똑해서 명종에게 귀여움을 많이 받았다. 그리하여 위의 두 형을 제끼고 후사가 없던 명종의 뒤를 이어 왕이 될 수 있었다. 두 차례의 큰 전쟁을 치렀고 당쟁이 심화된 어려운 시기의 왕으로서 선조는 그다지 현명하지도 공정하지도 않은 모습을 보여 무능한 왕의 이미지가 강하다.

선조는 왕비 2명에 후궁 6명, 자녀는 25명(왕자 14명과 공주 11명)을 둔 다복(?)한 임금이었다. 선조의 조강지처 의인왕후 박씨는 명종 10년(1555년) 4월에 나주 박씨 박응순과 전주 이씨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명종의 국상 중이기도 하여 혼인이 늦어졌는데, 대비인 인순왕후는 선조가 중전을 맞이하기 전에 후궁을 들이면 후사에 복잡한 왕위계승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하였기 때문에 여자를 가까이 하지 못하도록 경계하고 있었다. 하지만, 선조는 이미 대비의 눈을 피해 소주방(燒廚房:음식 만드는 주방) 나인을 가까이 하고 있었다. 후에 임해군과 광해군를 낳은 김상궁이 바로 그녀이다.

선조 즉위 2년째인 1569년 15세의 의인왕후 박씨는 3살 연상인 18살의 선조와 결혼했다. 의인왕후 박씨는 성품이 부드럽고 검소했으며, 욕심도 적고 미인이었다. 하지만, 집안 좋고 맘씨도 착한데다가 이쁘기까지 했지만, 그녀는 안타깝게도 아기를 낳지 못하는 몸이었다. 그리하여 인순대비는 어쩔 수없이 선조가 후궁을 들이는 것을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궁이 임해군과 광해군을 낳은 공빈 김씨이고, 그녀는 선조 10년에 병을 얻어 죽고 말았다. 왕비로서 가장 중요한 소임이라고 할 수 있는 후사를 보지 못한 의인왕후는 왕비임에도 불구하고 왕실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유로 그녀는 자식의 생산을 기원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 사찰을 설치하였고, 여러 사찰에 자주 재물을 베풀기도 했다.

의인왕후 박씨는 착한 마음씨만큼 후궁들이 낳은 자식들을 잘 보살펴 주었다. 하지만 의인왕후 박씨가 후사를 못 이으니, 이 기회를 노려 자기 자식을 세자로 앉히려고 하는 후궁들의 각축전이 치열하게 벌어지게 된다. 공빈 김씨의 큰아들 임해군은 성격이 광폭하고, 둘째 광해는 성품이 온화하여 왕과 왕비는 광해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또 다른 후궁 인빈 김씨가 왕자 네 명과 옹주 다섯 명을 낳게 되자 사태는 좀 더 복잡해지고 말았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어영부영

■ 어영부영

■ 어영부영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데 허무하게 시간이 흘러 하루가 다 갔던 경험이 누구나 한번쯤은 있을 것이다. 이렇게 아무 생각이나 계획 없이 되는대로 행동할 때 ‘어영부영’이라는 말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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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영부영’이란 조선 후기 5군영(조선 초기에는 5위) 중 하나인 어영청‘ 이라는 매우 기강이 엄격한 정예 부대에서 유래한 말이다. 1623년 반정(反正)으로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는 자신의 친위대 역할을 위해 어영군을 만들었다. 건장한 자 260명을 모집하여 화포술(火砲術)을 가르치고 이를 어영군(御營軍)이라 한 것이 그 시초이다. 서인 세력의 무력 기반을 강화하고 국왕을 경호하여 새로운 반정을 막겠다는 것이 창설의 주 목적 이었다. 이들은 주로 포격 훈련을 했다. 당시 포는 조총이나 활, 칼 등을 능가하는 최신 병기였고, 혹시라도 일어날 수 있는 반란이 있을 경우 초장에 강력한 화포와 조총으로 적의 사기를 꺾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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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4년 인조반정 후 논공행상(論功行賞)에서 2등 공신으로 밀려 평안도 군사령관에 임명된 이괄이 이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켜 급기야 한양을 점령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는 어영군의 경호를 받으며 충남 공주의 공산성까지 피난을 갔다. 그 곳 공주에서 솜씨가 뛰어난 민간인 포수를 뽑아 정예부대를 편성하여 어영군의 규모는 더욱 커졌다. 이후 인조는 자신의 친위부대로 어영군을 키워서 그 군사를 5천 명까지 증원하고, 명칭도 어영청으로 승격시켰다. 국왕의 친위부대인 어영청의 주력군대는 총이나 포 로 무장한 사수와 포수 정예병들이었고, 근접전을 위해서 살수병(화살부대)도 양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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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2년(효종 3년) 효종의 북벌(北伐)계획에 따라 어영청은 보다 더 정비되고 강화되어 이완(李浣)을 어영대장으로 삼아 북벌계획의 본영(本營)역할을 하였다. 효종 재위기인 1652년에 어영청의 병력은 무려 정예군 2만1천 명으로 대폭 확대되었다. 어영청은 이제까지 국왕호위 혹은 친위대라는 방어적 전략에서 북벌을 위한 공격적 군대 로 전환하고, 특수훈련을 받는 직업군인 으로 편성했다. 어영청의 전투력은 1654년, 1658년 두 차례 나선정벌을 통해 가늠할 수 있다. 나선정벌은 청나라 요청을 받은 조선 조총부대가 러시아군과 중국에서 벌인 전투다. 함경도에서 모집된 조총부대는 무기 성능이 뛰어나고 용맹하기로 소문난 러시아군에 대승을 거둔다. 하지만, 북벌계획은 준비만 하다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끝내 무산되었고, 목표가 사라진 어영청의 사기는 급격히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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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에 오면서 어영군의 군기(軍紀)는 문란해지고 병기(兵器)마저 너무 낡아 도저히 군대라고 할 수 없을 지경의 형편없는 오합지졸(烏合之卒) 군대가 되고 말았다. 양반 자제로 구성된 지휘부는 주색잡기로 소일하였고, 훈련이나 고된 부역은 종들이 대신토록 하였다. 이를 본 사람들이 어영청은 군대도 아니라는 뜻으로 어영비영(御營非營)이라고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어영비영이 발음의 편리를 따르다 보니 어영부영으로 바뀌게 되었다. 1881년(고종 18년) 4월, 일본인 교관의 훈련 하에 새로 조직한 신식 군대인 별기군이 만들어지면서, 신식군대에 비해 차별대우를 받고 봉급조차 받지 못하던 구식군대는 1882년 6월 봉기하여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났다. 결국, 3년 후 갑오개혁 때(1894년) 어영청은 폐지되었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운을 부르는 풍수인테리어 기법

운을 부르는 풍수인테리어 기법

운을 부르는 풍수인테리어 기법

거실 풍수인테리어 기법 ㉓

거실 인테리어로 거실 창으로 들어오는 채광이 너무 강하면, 화분이나 매다는 소품 등으로 인테리어를 하면 거실의 기운(氣運)을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 또한 거실 창가나 소파 옆에는 키가 작고 잎이 무성한 식물 화분을 두면 밖에서 들어오는 기운을 정화하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화분이나 꽃을 놓아 둘 때 같은 장소에, 같은 종류의 것을 너무 많이 놓아두면 기의 흐름에 방해가 된다.

거실은 TV와 오디오, 비디오 등 전자제품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이다. 전자파 때문에 기가 손실 되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 한다.

너무 큰 TV나 에어컨 등은 창가 모서리를 이용해 대각선으로 배치하면, 기의 흐름이 원할하다.

TV 위의 벽면에는 그림이나 벽걸이 장식품을 걸지 않는 것이 좋으며, 가전제품 위에 베이지색 계열의 패브릭 커버를 덮거나 화분을 놓아두면 흉한 기(氣)를 중화 시키는 역할을 한다.

♣ IFSA 국제풍수협회 선정 2018 대한민국 최고 풍수인테리어 전문가 / 문의 : 010-2432-5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