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11일 월요일

안사람의병대 대장 윤희순 5편

■ 안사람의병대 대장 윤희순 5편

■ 안사람의병대 대장 윤희순 5편

윤희순은 조선에서 날아드는 편지를 읽을 줄 아는 동포가 드물다는 점을 안타까이 여겨 1912년 만주 환인현에 ‘노학당(老學堂)’을 설립했다. 아마도 이곳에 학교를 세워 항일 인재를 양성하겠다는 생각을 했던 듯하다. 윤희순이 교장인 이 학교에는 독립투사들이 세운 동창학교 선생들이 와서 국어·산수·역사를 가르쳤다. 50여 명의 항일운동가를 배출했으나 3년 뒤 일제에 의해 폐교되고, 노학당 자리에는 옥수수밭이 들어섰다. 노학당 시절 윤희순은 정신적 지주를 잃었다. 1913년 12월 시아버지 유홍석이 72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1915년 윤희순은 탄광촌인 무순시 포가둔으로 이사를 갔다. 여기에서 그녀는 중국인들에게 항일투쟁을 연대하자고 꾸준히 설득했다. 그녀의 제안으로 실제로 항일운동에 가담한 중국인이 상당수 있었다고 한다. 1915년에는 남편 유제원과 재종 시숙이자 집안의 버팀목인 유인석 의병장이 잇따라 타계했다. 이런 죽음 속에서도 55세의 윤희순은 더욱 강해졌다.

1920년 만주에서 김좌진·홍범도 장군에게 대패한 일본군이 간도의 조선인을 무차별 살상하는 간도참변이 일어났다. 이때 윤희순은 위축된 독립운동을 되살리기 위해 그녀의 아들들과 함께 한·중 애국지사 180명을 찾아다니면서 규합 활동을 벌인 끝에 ‘조선독립단’을 결성했다. 조선독립단 단장은 윤희순, 유돈상, 음성국(유돈상의 장인)이었다. 조선독립단에는 이들의 가족, 친척이 모두 참여했다. 이른바 ‘윤희순 가족부대’로,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사격연습을 하며 게릴라 활동을 펼치는 항일투쟁 패밀리였다.

큰아들 유돈상, 둘째 아들 유교상, 조카 유휘상, 며느리 원주 한씨가 주전 멤버였다. 교상은 어린 시절 문서를 전하려고 말을 타고 달리다 떨어져 다리를 절었지만, 그에 아랑곳 않고 전투에 참가했다. 돈상의 아들은 굴렁쇠를 굴리고 다니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 독립운동 연락책 노릇을 했다고 한다. 또 돈상은 ‘조선독립단 학교’를 운영하기도 했다. 1932년 ‘조선독립단’에 중요한 기회가 찾아왔다. 양세봉이 이끄는 조선혁명군과 연합작전을 펼치기로 한 것이다. 9월 15일 무순을 지나는 일본군 철도 운수선을 습격하는 일이었다. 윤희순은 말이 먹을 풀과 군인 식사를 제공하는 일 그리고 부상자를 치료하는 일을 맡았다. 이때 윤희순의 나이 72세였다. 하지만, 무순 함락작전은 실패로 끝났고, 이튿날 일제는 3000명이 넘는 조선인과 중국인을 대량 학살했다. 윤희순은 눈물을 머금고 봉성현 석성으로 주소를 옮겼다.

석성에서 윤희순은 둘째 손자(유돈상의 둘째 아들)를 보았다. 기쁨도 잠시. 1934년 첩첩산중에 일본군이 들이닥쳐 마을에 불을 질렀다. 남자들은 대부분 외출하고 여자들밖에 없는 마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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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안사람의병대 대장 윤희순 4편

■ 안사람의병대 대장 윤희순 4편

■ 안사람의병대 대장 윤희순 4편

그러나 국력의 열세는 의분(義憤)만으로 만회할 수는 없었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를 당한 뒤 의병 노장(老將) 유홍석은 치욕과 절망감으로 벽장에 있던 칼을 꺼냈다. 그리고 아들들과 며느리를 불렀다. “내 이제껏 나라를 구하려고 몸부림을 쳤으나 국운이 기울어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땅의 의기가 살아 있음을 보여주고자 하니, 너희는 나의 이 마음을 거울삼아 강토를 되찾는 데 열정을 기울이거라. 나의 자결이 너희에게 슬픔이 되지 않고, 뜻을 바로 세우는 힘이 되기를 바란다.” 한참 침묵이 흘렀다. 가만히 듣던 며느리 윤희순이 말한다.

“아버님의 뜻은 참으로 귀하고 뭇사람이 경배할 것이옵니다. 하지만 살아서 싸워도 힘이 모자라는 판국이고, 죽음을 보여준다 하여도 적들이나 이 땅의 사람들에게 무슨 놀라움이 되겠습니까. 차라리 굳세게 살아 내서 목숨을 걸고 독립을 쟁취하는 것이 더 마땅하지 않을까 합니다. 아버님, 칼을 거두시고 저희와 함께 뒷일을 도모하소서.”

며느리의 말을 들은 뒤 그는 천천히 일어나서 마당으로 걸어갔다. 정미의병 때 다리를 심하게 다쳐 절뚝거리는 그는 마을 아래로 펼쳐진 길을 한참 내려다보며 눈물을 삼켰다. 며느리의 말이 구구절절 옳지 않은가. 이 날 이후 유홍석과 유제원 부자는 만주로 떠났다. 윤희순은 나중에 합류하기로 했다.

1911년 발산리 시골집의 좁다란 마당에서 한 소년이 고통에 몸을 뒤틀고 있었다. 윤희순이 어렵사리 얻은 늦둥이 맏아들 유돈상이었다. 회초리로 17세 소년을 매질하고 있는 사람들은 일제 경찰이었다. 유홍석이 의병 활동을 주도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의 집으로 들이닥친 것이다. 경찰들이 시아버지의 행방을 캐물어도 윤희순이 입을 꾹 다물고 있자, 옆에 있던 소년을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17세 소년의 입에서 비명이 터지고 찢어지는 옷에 피가 배어들었다. “이제 유홍석이 어디로 갔는지 말하라. 네 아이를 죽이겠다.” 그러자 윤희순이 나직이 말했다. “죽일 테면 죽여라. 아이도 죽이고 나도 죽여라. 너 같으면 네 아비를 팔아 네 자식의 목숨을 살리겠느냐.” 여인의 당찬 태도에 경찰들도 움찔하여 쓰러진 소년을 내려놓고 물러갔다. 이후 윤희순의 친인척들은 모두 짐을 싸서 중국 요령성으로 향했다. 의병장 유인석과 유홍석을 중심으로 친척, 처가 45가구가 만주로 집단이주를 한 것이다.

그들이 정착한 곳은 요령성 흥경현 평정산 ‘고려구’였다. 이곳은 ‘고려구’라는 이름이 붙은 만큼 주변에 조선인이 많았다. 주민들은 조선에서 하는 방식대로 황무지를 개간하고 강물을 끌어들여 벼농사를 지었다. 밀, 콩, 옥수수 농사를 주로 하던 한족은 조선인에게 새로운 농법을 배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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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사람의병대 대장 윤희순 3편

■ 안사람의병대 대장 윤희순 3편

■ 안사람의병대 대장 윤희순 3편

윤희순의 시댁에는 의병 활동가들이 자주 들락거렸다. 시아버지는 집에 머무는 날이 드물었다. 규방에 틀어박혀 있는 것이 갑갑하고 좀이 쑤셨던 며느리 윤희순은 어느 날 남장(男裝)을 하고는 시아버지를 따라 나섰다. “아버님, 저도 조선 사람이니 의병이 되고자 합니다.” 유교 윤리에 투철했던 유홍석은 펄쩍 뛰었다.

“얘야,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규중 여인으로 어찌 나를 따르겠다는 것이냐. 전쟁터는 여자들이 갈 곳이 못 된다. 내가 지금 나가면 생사를 알 수 없으니 너는 남아서 조상을 잘 받들고 자손을 잘 길러서 애국하는 것이 옳지 않겠느냐.”

“나라가 없으면 어찌 애국이 있겠습니까?”

“허어, 혈육을 팽개치고 어찌 미래가 있겠느냐?”

시아버지의 추상같은 말에 윤희순은 마음속으로 끓어오르는 의기(義氣)를 접어야만 했다.

윤희순의 집안은 절간처럼 고요했다. 시어머니는 결혼 전에 이미 돌아가셨고, 시아버지와 남편은 일 년에 열 달은 나가 있는지라 여자 혼자서 살림을 꾸려가는 상황이었다. 오래 함께한 하인 내외가 간간이 돌봐주기는 했으나 생계조차 어려웠다. 그녀는 숯을 구워 팔며 살림을 꾸려 나가고 있었다. 시아버지가 출타한 어느 날 마을에 의병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몹시 굶주린지라 마을 사람들에게 밥을 해 달라고 청했다. 당시엔 의병을 돕는 일도 중죄(重罪)였기에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윤희순은 제사를 받들기 위해 숨겨놓은 쌀 세 됫박을 털어서 밥을 지었다. 전장(戰場)의 시아버지를 봉양하는 마음으로 상을 차려 그들에게 올렸다.

윤희순은 마을 여인들에게 안사람들도 의병을 해야 한다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노래를 지어 부르며 의병대를 조직하자고 말했다. 사람들은 고개를 저었다. “집안 남자들이 의병을 한다고 모두 나가 버리니 며느리가 드디어 미쳤어.” 그렇게들 수군거렸다. 그러나 그녀는 동네 아이들에게 노래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안사람 의병가>는 그렇게 하나 둘씩 따라 부르기 시작해서 인근 동네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행가’가 되었다. 10년간의 노력 끝에 마을에서 ‘안사람의병대’가 조직되었다. 1907년 정미의병이 일어나던 무렵이었다. ‘숨은 의병’으로서 놋쇠를 모으고, 부족한 유황을 대신해 소변을 달여 화약을 제조하여 의병이 쓸 탄약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들이 만든 무기로 이 지역 의병들은 상당한 전력을 갖추고 일제에 타격을 입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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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사람의병대 대장 윤희순 2편

■ 안사람의병대 대장 윤희순 2편

■ 안사람의병대 대장 윤희순 2편

윤희순은 조선말의 대학자였던 화서(華西) 이항로(1792~1868)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은 윤익상과 평해 황씨 사이에서 맏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집안은 1506년 중종반정의 정국공신이었던 윤희평을 자랑으로 삼는 가문이다. 윤희평은 뛰어난 무인(武人)으로 1510년 삼포왜란을 평정한 공으로 병조참의에 이르렀다.

아마도 윤희순은 조상의 이런 장수(將帥) 기질과 DNA를 물려받은 듯하다. 윤희순 주위의 인물들은 1866년 병인양요 때 주전론(主戰論)을 펼쳤고, 대원군에 맞섰던 강직한 지식인 이항로의 위정척사론을 따르고 있었다. 그래서 이항로의 가르침이 그녀의 삶에도 깊이 스며들었다. 윤희순이 시집간 해는 그녀가 16세이던 1876년. 해안측량을 구실로 조선의 해안을 넘나 들던 일본 군함 운요호를 강화도의 초지진(草芝鎭) 조선 수비병이 발포하자, 일본은 이를 빌미로 개항을 요구했다. 강화도에서 굴욕적인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 이른바 ‘강화도조약’이 맺어지고, 우리나라는 강제 개항을 했다. 강화도조약은 우리나라의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불평등 조약이었다.

춘천시 남면 발산리에서 산자락을 개간해 농사를 지으며 살던 고흥 유씨 집에 한양에서 새색시를 태운 꽃가마가 도착했다. 그런데 잔칫집에 큰 사고가 일어나고 말았다. 저녁이 되자 동네 아낙들이 새댁 구경을 한다고 관솔불을 켜서 들고 왔는데, 초가 처마 끝에 불이 붙어 화재가 난 것이다. 불길이 거센 가운데 시아버지 유홍석은 신방에 있던 신부 윤희순을 번쩍 들어 안고는 집 바깥에 있는 보리밭으로 옮겨놓았다. 그러나 그녀는 새색시답게 가만히 앉아있지 않고 족두리와 저고리를 벗어던지고 불을 끄러 달려갔다고 한다.

남편 유제원은 결혼 후에도 여전히 학문에 몰두하고 있었기에 집을 줄곧 비웠다. 어린 신부는 첫날밤의 화재로 불 냄새가 나는 집에서 그녀는 늘 독수공방이었다. 거기다가 나라는 강제로 개항하여 외세(外勢) 앞에 풍전등화(風前燈火) 처지였다. 오랫동안 아이도 없었다. 외로운 가운데 무심한 세월이 흘러, 그녀가 첫 아이를 낳은 것은 결혼한 지 20년이 지난 뒤(1894)였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나자, 전국의 유생들은 역적을 토벌해야 한다는 상소(討逆疎)를 냈고,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한 의병을 일으켰다. 윤희순의 시아버지 유홍석은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관군과 교전하다가 패배하고 춘천으로 돌아왔다. 그는 고향에서 의병을 규합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의 부대는 춘천부사로 부임하던 조인승을 붙잡아 죽이는 전과(戰果)를 올리기도 했다. 조인승은 갑신정변 이후 김옥균의 처형을 청한 인물이며, 일제의 조선개혁안에 동의한 부역자(附逆者)였는데, 당시 단발령에 따라 머리를 빡빡 깎고 춘천으로 들어오다가 의병들에게 걸려 죽임을 당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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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사람의병대 대장 윤희순 1편

■ 안사람의병대 대장 윤희순 1편

■ 안사람의병대 대장 윤희순 1편

윤희순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의병대장이다. 16살의 윤희순이 시집 온 강원도 춘천 유씨 집안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유난히 깊은, 온 가족이 독립운동에 헌신한 집안이었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시아버지 유홍석은 ‘춘천의병대’를 만들었고, 윤희순은 의병들에게 음식과 옷을 제공했다. 그러나 나라의 상황은 점점 나빠져만 갔다. 일제에 외교권을 빼앗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제가 고종 황제를 강제로 폐위시키고, 군대를 해산시켰다. 보다 못한 윤희순은 마을 여성들을 모아 ‘여성 의병대’를 만들었는데, 이름 하여 ‘안사람의병대’. ‘안사람 의병대’ 대원들은 병사의 식사를 준비해 날라주고 옷가지를 세탁하고, 부상자나 환자를 치료하는 일을 맡았지만 군사 훈련에도 열심이었다. 창을 가지고 덤불 사이에 숨어 있다가 일본군이 지나가는 것을 가상해서 찌르기 연습도 했다. 탄약제조소를 운영하며 의병들에게 탄약을 공급하기도 했다.

『아무리 왜놈들이 강성한들 우리들도 뭉쳐지면 왜놈 잡기 쉬울세라

아무리 여자인들 나라사랑 모를소냐 아무리 남녀가 유별한들 나라 없이 소용있나

우리도 의병하러 나가보세 의병대를 도와주세 금수에게 붙잡히면 왜놈 시정 받들소냐

우리 의병 도와주세 우리나라 성공하면 우리나라 만세로다 우리 안사람 만만세로다』

이 노래는 윤희순이 지은 <안사람 의병가>다. 윤희순은 8편의 의병가를 직접 작사해서 유포했고, 관군·조선인 밀고자· 일본군을 향한 몇 편의 경고문도 지었다.

『왜놈대장 보거라. 만약에 너희 놈들이 우리 임금, 우리 안사람네를 괴롭히면 우리 조선 안사람도 의병을 할 것이다. 우리 조선 안사람이 경고한다…남의 나라 국모를 시해하고, 네놈들이 살아갈 줄 아느냐. 빨리 사과하고 돌아가. 우리나라 사람 화가 나면 황소나 호랑이 같아서 네놈들을 잡아서 처단하고 말 것이다.』 - 조선 선비의 아내 윤희순 -

『금수들아 받아 보거라. 금수보다 못한 인간들아! 너희 부모 살을 베어 남을 주고도 너희 부모는 살 수 있나. 왜놈의 앞잡이 놈들, 참으로 불쌍하고 애달프다.』 - 조선 안사람 윤희순 -

19세기의 조선 여인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거침없는 말투가 쏟아져 나온다. 글의 마지막에는 꼭 자신의 이름 ‘윤희순’을 적어 넣었다. 두려움이 없고 뚜렷한 자아와 치열한 애국심으로 똘똘 뭉친 조선의 여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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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 '1998 김대중-오부치 선언- 기억하시나요

◇ 1998 김대중-오부치 선언- 기억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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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8 김대중-오부치 선언- 기억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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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18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드러낸 대일본관의 변화는 놀라웠다. “우리는 다시는 일본에게 지지 않을 것”(2019년 8월 임시 국무회의)이라며 휘두르던 채찍이 불과 1년 반 만에 “과거사는 과거사이고, 미래지향적으로 발전해 나갈 것은 그것대로 해야 한다”는 올리브 가지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올해 정부의 한·일 관계 개선 의지는 두드러진다. 미국에서 바이든 행정부가 출범한 영향도 있고, 무엇보다 도쿄 올림픽을 남·북·미 대화 재개의 계기로 삼으려는 계산으로 보인다. 하지만 시종일관 밀기만 하다 갑자기 당기려 하니, 일본은 오히려 당황하는 분위기다. 오죽하면 한 일본 인사는 “갑자기 우리한테 왜 이러는 거죠?”라고 되물었을 정도다.

문 대통령은 “2015년 위안부 합의는 정부의 공식 합의였음을 인정한다”며 이를 토대로 해결책을 찾겠다는 입장도 밝혔다. 하지만 이를 보며 2014년 아베 정권의 고노담화 검증을 떠올리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당시 일본은 위안부 동원에 군이 관여했다고 처음으로 인정한 1993년 고노담화 발표 과정을 검증했고, 진정한 사과가 아닌 한·일 간 정치적 주고받기의 산물인 것처럼 폄훼했다. 그래놓고선 “그래도 고노담화를 계승한다”고 결론내렸다. 당시 한국 외교부 당국자들의 반응은 이랬다. “계승은 한다니까 다행이긴 한데 거 참….”

문재인 정부도 출범 직후 위안부 합의를 검증했다. “하자가 중대하다”며 있는 대로 흠집을 냈는데, 결론은 “재협상은 안 한다”였다. 그러면서도 일본이 낸 10억엔의 지급을 중단해 합의를 사실상 무력화했다. 일본이 이제 와 문 대통령의 진정성을 믿지 못한대도 이해는 간다는 뜻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양국은 수많은 난관에 부딪히면서도 성공의 경험을 만들어낸 역사가 있다는 점이다. 19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이 그것이다. 당시 오부치 총리가 식민 지배를 사죄한 것만큼이나 중요한 건 김대중 대통령도 이를 받아들이며 일본의 전후 평화 복원 노력을 평가했다는 것이다. 일본과 새판짜기를 시도하며 유념할 것은 이처럼 양국 지도자들의 결단에 녹아 있는 상호 존중이다. 정부가 이를 되새기지 않으면 아무리 의욕을 보여도 ‘나 홀로 밀당’만 하다 끝날 수도 있다.

-중앙일보-

◇ 겨우살이, 추운 계절에야 비로소 보이는 것

◇ 겨우살이, 추운 계절에야 비로소 보이는 것

◇ 겨우살이, 추운 계절에야 비로소 보이는 것

겨울 산에서만 보이는 나무가 있다. 이름하여 ‘겨우살이’다. 우연히 겨우살이를 발견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다른 계절에는 안 보이던 녀석이어서 반갑기도 하고, 그만큼 깊은 산 속에 들어와 있다는 뜻이기도 해서다.

이름과 달리 겨우살이는 겨울에만 사는 나무가 아니다. 1년 열두 달 산다. 다만 겨울에만 보인다. 왜 그럴까. 이 녀석 잘못은 아니다. 겨우살이는 원래 살던 데서 원래 살던 대로 살았을 뿐이다. 문제는 세상이다. 이 녀석이 뿌리를 내린 세상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겨우살이는 기생식물이다. 참나무 같은 다른 나무에 뿌리를 내리고 산다. 겨우살이 열매를 먹은 새의 똥을 매개로 다른 나무에서 싹을 틔운다. 광합성을 안 하는 건 아니지만, 양분 대부분은 숙주가 되는 나무에서 얻는다. 나뭇잎이 다 떨어진 겨울날, 그러니까 나무가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는 계절이 돌아오면 나뭇잎에 가려 안 보이던 겨우살이가 나타난다. 사람 눈에 비로소 띄는 것이다. 추운 계절이 된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푸르다는 걸 안다고 했던가. 그 유사 사례가 겨우살이다. 그러니까 겨우살이는, 철저히 인간의 시선이 투영된 이름이다.

참나무 입장에선 제 양분 빼먹는 얄미운 녀석이겠으나, 인간 입장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귀한 존재다. 하여 유럽에선 행운의 상징처럼 인식됐다. 고대 유럽 제사장이 겨우살이를 제물로 썼다고 하고, 요즘도 북유럽에선 성탄절 날 겨우살이를 문에 걸어둔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겨우살이는 약으로 쓰인다. 물론 인간 입장에서다. 겨우살이의 숙주가 되는 나무는 생장 속도가 느리고 수명도 짧다.

어느 날 세상이 변했다. 인간이 살던 방식은 그대로인데, 인간이 비벼대고 사는 세상이 변했다. 어쩌다 인간도 맨몸을 드러내게 되었다. 무의미한 연명의 나날이 이어지는 요즘, 인류가 긴 세월 지향했던 가치는 유보되거나 부정되고 있다. 그래, 이제는 인정해야 할지 모르겠다. 생존은 본래 비루한 것이라고. 겨우살이에 새똥이 유일한 희망인 것처럼.

겨우살이는 세상이 달라져도 달라지는 게 없다. 인간은 아니다. 달라진 세상에 맞춰 인간도 달라져야 한다. 세상 빨아먹고 사는 건, 겨우살이나 인간이나 똑같지만.

사진설명 : 한라산 해발 1300m 지점에서 촬영한 겨우살이. 제주도 겨우살이는 열매가 빨갛다.

-중앙일보-

◇ 삼성의 미국 투자 30조원?

◇ 삼성의 미국 투자 30조원?

◇ 삼성의 미국 투자 30조원?

‘경제 구세주’는 무엇일까. 기업이다. 아무리 척박한 땅이라도 기업이 투자한 곳에는 젖과 꿀이 흐른다. 일자리와 소득이 만들어지고 거둘 세금도 절로 샘솟는다. 그뿐 아니다. 사회간접자본(SOC)과 교육시설도 덩달아 발전한다.

25년 전, 영국 북부의 조용한 도시 윈야드. 갑자기 떠들썩해졌다. 평생 한번 보기 힘든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그곳에 갔기 때문이다. 왜 갔을까. 삼성전자 복합단지 준공을 축하하기 위해. 전자레인지·TV·팩시밀리를 만드는 공장이 무에 그리 대단할까. 하지만 그들은 알고 있었다. 바로 기업의 투자가 구세주와 같은 존재라는 것을. 땅을 거저 주고, 세금을 깎아주는 것은 구세주를 맞는 예였을까.

미국의 주요 언론이 삼성의 미국 투자 소식을 전했다. 월스트리트저널, “삼성전자가 170억달러를 투자해 텍사스·애리조나·뉴욕주에 반도체 생산라인을 건설한다.” 블룸버그통신, “삼성전자가 100억달러 이상을 투입해 텍사스 오스틴공장에 파운드리 라인을 증설한다.” 두 투자액을 합치면 270억달러. 약 30조원이다.

왜 투자하는 걸까. 빤한 답을 하자면 두 가지 이유에서다. 그곳에는 큰 시장이 있고, 4차 산업혁명이 불타오르기 때문이다. 반문을 할지 모른다. “반도체 운송비가 얼마나 비싸기에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은 미국에 따로 공장을 짓느냐”고. 무거운 세금에 준조세까지 중과하는 나라. 경제자유구역에 생산법인을 설립하려면 100개 넘는 관공서 도장을 받아야 하고, 규제 3법에 징벌 3법까지 만든 나라. 발 한번 헛디디면 큰 죄를 짓지 않아도 기업인은 감방에 간다. 미국에 투자하겠는가, 한국에 투자하겠는가.

삼성전자의 국내·해외 매출 비중은 약 2대 8. 언제까지 이익을 한국본부로 모으고, 세금을 한국정부에만 낼까. 다른 기업은 또 어떨까. 2016년 12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이 뉴욕에서 연 IT서밋. 미국 IT 거물 14명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초청했다. 왜 하필 이 부회장을 초청했을까. “미국기업이 되어 주기를 원했던 것”이라고도 한다.

삼성의 미국 투자 30조원. 새로운 시대 개막을 알리는 신호가 아닐까.(사족, 내가 이재용이라도 미국에 투자한다)

-세계일보-

수원 제암리 학살 사건 2편

■ 수원 제암리 학살 사건 2편

■ 수원 제암리 학살 사건 2편

1919년 4월 15일(화요일) 오후, 일본군 보병 중위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가 이끄는 보병 11명과 순사 2명이 수원군 향남면(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에 도착하여, 강연이 있다고 속여 마을 주민 약 30명을 제암리교회에 모이게 하였다. 일본군은 돌연 출입문과 창문을 굳게 잠그고, 안에 있는 사람들을 총칼로 마구 학살한 뒤,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교회당에 불을 질렀는데 불길이 5시간쯤 타올랐다. 그때 한 부인이 어린 아기를 창밖으로 내던지며 아기만은 살려달라고 애원하였으나, 일본군은 그 아이마저 찔러 죽였다. 또 일본군은 불속에서 뛰쳐나오거나 길에 나왔다가 달아나는 사람에 대해 발포하거나 총검으로 찔러 죽였다.

교회당 안에서 22명, 밖에서 6명 등 모두 28명이 살해되었고, 일본군이 지른 불로 민가(民家) 31호가 불타버렸다. 그뿐 아니라 일본군은 근처에 있는 고주리로 가서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을 학살하여 40여 명의 주민들이 일본군에게 잔인하게 목숨을 잃었다. 연이어 이웃 마을에 며칠간 계속 사격, 방화, 구타를 자행하였으니, 사상자가 1000여 명에 달하였다.

제암리교회 학살사건이 일어난 후 신자나 일반인들은 일제의 감시 때문에 사건현장에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결국 희생자들의 시신은 사건을 전해들은 캐나다 의료선교사 스코필드박사가 이틀 뒤 불탄 교회에서 유골을 수습하여 인근 공동묘지 입구에 묻을 때까지 방치되어 있었다. 참변을 전해들은 미국 선교사이며 교육자인 언더우드(Underwood, H. H., 元漢慶)와 미국 영사관 직원 일행이 4월 16일 서울을 출발하여 그곳에 도착하였을 때, 생존자들은 먹을 것, 입을 것도 없이 겁에 질린 채 언덕에 모여 있었고, 살해된 시체와 불탄 집터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언더우드는 현장에 모여 있는 생존자 일부를 만나 사건의 자세한 내용을 듣고 참상을 확인하였다. 한편 4월 17일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이며 선교사인 영국인 스코필드(Schofield, F. W.)가 현장으로 달려가, 생생한 참상을 사진에 담고, 목격자의 증언을 수록한 「수원에서의 잔악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미국으로 보냈다.

또 영국영사 로이드 등도 학살 현장에 가서 사건 진상을 조사하였다. 또한 침묵을 지켜오던 일본 내의 영자 신문 『재팬 애드버타이저(Japan Advertiser)』 와 『재팬 크로니클(Japan Chronicle)』등도 목격자의 증언까지 곁들이며, 사건을 상세히 보도하기 시작하였다. 또 일본기독교동맹은 뒤늦게나마 대표를 보내 참상을 조사하게 하였으며, 만행의 일단을 신문과 잡지에 실어 일본인의 반성을 촉구하였다.

한편 제암리 학살사건의 현장 지휘책임자인 보병 제79연대소속 아리타 중위에 대한 처벌은 직무 집행상 온당한 행위였다는 이유로 덮어두려고 하였으나, 세계 여론의 지탄을 받게 되자 7월 17일자로 군법회의에 붙여졌다. 그러나 아리타 중위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1982년 9월 29일에는 정부와 경기도가 함께 합동 장례식을 치르고 희생자들을 위로했다. 제암리교회는 현재 사적 제299호로 지정되어 보존 중이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수원 제암리 학살 사건 1편

■ 수원 제암리 학살 사건 1편

■ 수원 제암리 학살 사건 1편

수원 제암리교회 학살사건은 만세운동에 대한 일제의 보복 행위로 일어난 가장 대표적인 참변이다. 만세시위운동에 대한 일제의 대책은 비인도적인 대량살육과 만행, 그리고 대규모 검거였다. 만세운동의 주동자로서 검거된 인사에 대해서도 참혹한 고문을 가한 뒤에 그들의 식민지 통치 법규에 따라 처형하였다. 우리나라의 만세운동 상황과 일제의 무력탄압은 국제적으로 여론화되어 열강들은 일제의 야만적 행위를 비난, 공격하였다.

3월 31일 제암리에서 가까운 발안(發安)장터에서는 장날을 기해서 약 1,000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태극기를 세워 놓고 독립 연설회를 개최하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장거리를 행진하였다. 흥분한 시위 군중이 일본인 가옥이나 학교 등을 방화, 파손하였다. 이튿날인 4월 1일 밤, 주변 산봉우리 80여 곳에서 봉화를 올리고 만세운동을 널리 확대시키려했다. 그래서 그곳에 살고 있던 일본인 부녀자와 어린이는 조금 떨어져 있는 삼계리(三溪里)로 피신하여 숨어지내기도 했다. 이처럼 3월 말을 전후로 만세시위운동이 맹렬히 일어나자, 몇 개의 일본군 검거반이 파견되면서 3·1운동에 대한 보복 행위가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4월 2일 제1차 검거 작전을 시작하였다. 경기도 경무부에서는 하세베 이와오(長谷部巖) 대장이하 헌병과 보병, 순사로 이루어진 검거반을 보냈으며 6일까지 이어졌다. 시위의 진원지 역할을 한 마을을 습격 방화하고 시위 주모자를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항거하여 4월 3일 수촌리 구장 백낙렬 천도교 전교사, 수촌 제암리 감리교회 김교철 전도사, 석포리 구장 차병한, 주곡리 차희식 등이 주축이 되어 우정면, 장안면 주민 2천여명이 모여 각 면사무소를 부수고 화수리 주재소로 몰려가 주재소를 불태우는 한편 순사 가와바타를 처단하였다. 마침내 4월 5일 새벽 3시 반경에 검거반이 수촌리를 급습하여, 종교 시설은 물론 민가에 불을 질러 마을 전체 42호 가운데 38호가 소실되었다(수촌리 학살 사건).

4월 9일부터 16일까지 검거반은 제2차 검거 작전을 벌였다. 4월 13일 육군 ‘보병 79연대’ 소속 중위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가 지휘하는 보병 11명이 발안에 도착하였다. 토벌 작전이 끝난 발안 지역의 치안 유지가 그들의 임무였다. 그러나 다른 지역의 시위 주모자들은 2차에 걸친 검거 작전으로 대부분 체포된 반면, 발안 시위를 주도했던 제암리 주모자들은 체포되지 않아 불안 요소로 남아 있음을 안 아리타는 제암리를 토벌할 계획을 세운다. 제암리는 주로 안씨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며, 일찍부터 천도교의 교세로 민족정신이 고양되었고, 제암리감리교회에서는 문맹퇴치 및 신문화 운동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또한 대한제국 시위대 해산군인 홍원식이 낙향하여 사람들을 모아 교육하고, 동지들을 규합하여 ‘구국동지회’를 만들었던 민중의 의식화가 상당히 이루어졌던 동네였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