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13일 수요일

◇ 미얀마의 세 손가락 경례

◇ 미얀마의 세 손가락 경례

◇ 미얀마의 세 손가락 경례

미국 작가 수잔 콜린스의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한 ‘헝거게임:판엠의 불꽃’은 독재 정권에 대한 민중의 저항을 다룬 2012년 영화다. 미래 가상국가 판엠은 12개 구역에서 2명씩 추첨해 마지막 한 명이 남을 때까지 목숨을 건 서바이벌 게임을 벌이고 이를 24시간 생중계하면서 주민들을 통제한다. 동생이 뽑히자 자원자로 나선 주인공 캣니스 에버딘을 향해 주민들은 감사와 경의를 표하며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세 손가락 경례(Three-finger salute)를 한다. 주인공이 게임 중 동료가 숨진 뒤 주민들을 향해 세 손가락 경례를 하면서 혁명은 시작된다. 전 세계 스카우트 회원끼리 우정과 예의를 표하는 스카우트 삼지례에서 원형을 찾기도 한다.

영화의 장면이 현실이 된 건 2014년 5월이다. 태국에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자 시위대는 저항의 표시로 세 손가락 경례를 택했다. 태국 시위대는 프랑스 혁명의 자유 평등 박애를 표방했다. 세 손가락 경례는 2019년 홍콩 민주화 시위에도 등장했다. 지난달부터는 미얀마에서 군부 쿠데타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세 손가락 경례를 저항의 상징으로 쓰고 있다.

초 모 툰 유엔 주재 미얀마 대사가 유엔총회에서 미얀마 군부를 향해 쿠데타를 즉각 종식하고 무고한 시민에 대한 억압도 당장 멈출 것을 촉구했다. 그는 “국가 권력을 국민에게 돌려줘 민주주의를 회복할 수 있도록 국제사회도 필요한 조치를 해달라"며 세 손가락 경례를 했다. 군사 정권의 서슬에도 굴하지 않은 외교관의 울림은 컸다. 일격을 당한 군정은 곧바로 그를 해임했지만 그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맞서 싸울 것"이라며 의지를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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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일요일을 보낸 미얀마에서 희생자가 크게 늘고 있다. 군부는 시민들을 향해 실탄을 발사하며 유혈 진압을 서슴지 않고 있다. 미얀마의 세 손가락 경례는 비폭력 민주주의 운동이란 점에서 가깝게는 촛불 시위, 멀게는 3·1운동과도 연결점이 있다. 군부 쿠데타에 대한 저항이란 점에선 5·18광주민주화운동을 떠올리게 된다. 실제로 미얀마에선 ‘임을 위한 행진곡’도 울려 퍼진다고 한다. 엄혹한 시절, 국제 사회의 관심은 우리에게 큰 힘이 됐다. 이젠 우리가 미얀마에 힘이 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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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지평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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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 나라의 지폐에 실린 얼굴을 살펴보니

◇ 각 나라의 지폐에 실린 얼굴을 살펴보니

◇ 각 나라의 지폐에 실린 얼굴을 살펴보니

지폐는 한 나라의 영웅 전시장이다. 지폐에 등장하는 인물을 주기적으로 바꿔 온 영국이 대표적 사례다. 도안으로 쓰인 인물 면면에서 한때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위용을 느낄 수 있다. 만유인력을 발견한 아이작 뉴턴,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윈스턴 처칠, ‘국부론’을 쓴 애덤 스미스, ‘오만과 편견’의 작가 제인 오스틴, 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이 파운드화를 장식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국력이 뻗어나가던 시기에 각 분야에서 활약했던 선각자들을 엔화 도안으로 즐겨 쓴다. 19세기 후반 “서양 문물을 배우자”며 대규모 사절단을 이끌고 2년간 구미 10여국을 누볐던 이와쿠라 도모미를 비롯해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외친 후쿠자와 유키치 등이 번갈아 등장했다. 여성 소설가 히구치 이치요를 5000엔권 인물로 택한 것은 근대화 시기에 이미 여성 문인들이 활약하던 문화 선진국이란 이미지를 국내외에 선전하기 위해서였다. 2024년엔 일본 경제의 아버지로 불리는 시부사와 에이이치를 새로 선보일 예정이다.

미국 달러화의 주인공은 단연 대통령들이다. 현재 통용되는 지폐 7종 중 5종이 역대 대통령이다. 20달러 지폐 인물인 7대 대통령 앤드루 잭슨은 오바마 정부와 트럼프 정부에서 퇴출과 회생 사이를 오락가락하다가 엊그제 바이든 정부에 의해 최종 퇴출로 결론났다. 유색인종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를 강조하는 바이든 정부가 인종차별주의자로 악명 높았던 잭슨 대신 19세기 흑인 여성 인권 운동가 해리엇 터브먼을 쓰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터브먼은 그 암흑 시절 여성의 몸으로 흑인 노예 수백명을 탈출시킨 사람이다.

지폐 도안에 한 나라가 이룩한 업적과 지향하는 가치만 담기는 것은 아니다. 국가 정체성을 확립하고 국민을 하나로 모으는 구심점도 된다. 영국은 지폐 뒷면에 어떤 인물이 오든 앞면은 국가원수인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다. 미국 연방법은 1달러에 새긴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초상을 바꿀 수 없도록 못 박고 있다. 마오쩌둥은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으로 수천만 명을 굶겨죽이고 살해했는데도 모든 위안화 지폐의 전면을 장식하고 있다.

우리 지폐에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세운 초대 대통령도, 민족을 가난의 질곡에서 구출한 중흥 대통령도 없다. 마라토너 손기정도 없고, 안중근도 없다. 조선시대 인물들뿐이다. 지폐 인물이 정치 논란의 대상이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어쨌든 우리 지폐에선 한민족이 이룩한 기적의 나라 대한민국의 70년 역사는 볼 수 없다.

-조선일보-

무령왕릉 6편

■ 무령왕릉 6편

■ 무령왕릉 6편

무령왕릉은 발굴 직후 한동안 폐쇄됐다가 유물을 모두 수습한 뒤 빈 고분은 송산리 고분군 5, 6호와 함께 일반 관광객에게 1976년 2월부터 공개되었다. 당시 무덤 입구를 거쳐 무덤방까지 관람객들이 들어가서 무덤방 입구에 설치된 유리창 너머로 안쪽을 구경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때 문제가, 무령왕릉의 봉분은 이미 허물어져 있어 얼마나 컸는지 원형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재단장과 공개 과정에서 마치 신라 왕릉처럼 봉분을 거대하게 쌓아버렸다. 혹시나 백제 왕릉이 신라 왕릉만큼 웅장해야 한다는 근거없는 경쟁심 때문은 아니었을까.

아무튼 무덤방 위에 지나치게 거대하게 봉분을 쌓고, 무게중심도 무덤방 중심 부분에서 서북쪽으로 기울어진 곳으로 쌓다보니 봉분 무게 때문에 왕릉 무덤방이 찌그러지고 있다는 지적이 끊이질 않았다. 게다가 1989년에는 무덤방 벽면과 그 앞에 관람객 차단 유리벽에 물기가 맺히고 곰팡이가 피는 현상이 관찰됐다. 이어 1997년에도 왕릉이 기울고 물이 샌다는 보도가 나왔다. 이 때문인지, 1998년 5~12월에 공주시의 의뢰를 받아 무령왕릉을 포함한 송산리 고분군의 보수 상태를 점검했는데, 이 때 무령왕릉은 내부에 금이 가고 봉분 내부로 물이 스며들고 있다고 진단받아 보수 공사에 들어갔다.

결국 발굴 26년째인 1997년 7월 15일 무령왕릉을 포함한 송산리 고분군 5, 6호분의 석실들은 관람목적의 개방이 전면 금지되었다. 당시에는 1년간 한시적 폐쇄였지만 이후 지금까지도 다시 일반 관광객에 공개하지 않고 있으며, 그 대신 송산리 고분군 모형전시관을 2003년 만들어 관광객들이 대신 내부 구조를 체험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국립공주박물관에 무령왕의 유물을 전시해 놓은 ‘무령왕릉실’을 ‘웅진백제실’로 개편하면서 무령왕과 왕비의 실제 목관을 2017년에 46년 만에 최초로 공개했다.

무령왕릉을 두고 건축이나 문화사와 고고학적인 면에서도 많은 이들이 최고의 걸작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하지만, 무령왕릉의 최고의 가치는 세계로 열린 개방성 그리고 많은 문화를 하나로 묶어서 품어내는 포용성 그리고 그 속에서 새로운 문화, 새로운 우리의 것을 만들어 낸 독창성이라고 하겠다. 무령왕릉 속에 한, 중, 일 세 나라의 문화와 문물이 모두 녹아 들어 있을 뿐만 아니라 무령왕릉에는 우리의 토착신앙, 불교, 도교 문화도 함께 녹아들어 있어 정신문화를 한데 아우르는 결정체라 할 수 있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무령왕릉 5편

■무령왕릉 5편

■무령왕릉 5편

2009년 12월 8일 무령왕릉에서 출토되었던 뼛조각 4개가 무려 38년 만에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서 발견되었다. 발굴현장이 워낙 엉망이었던지라 바닥에 있는 유물들을 빗자루로 봉투에 쓸어 담아 가져가다 보니 뒤늦게 발견된 것이다. 무령왕릉 발굴이 얼마나 비전문적이었는지 다시 한 번 보여준 사례이다. 발굴 유물의 이송과 보존 과정에서도 발굴조사단과 지역 주민과의 마찰이 일어났다. 1970년대 당시 공주박물관의 시설이 미흡해서 서울로 이송하여 보존하려고 했는데, 공주 주민들이 소식을 듣고는 공주의 유물을 영구히 서울에 가져가 돌아오지 못할 것을 우려해 몰려와서 단 한 점도 서울로 가져가게 할 수 없다고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서울로 옮겨갔던 무령왕릉의 유물은 그 뒤 새로운 국립공주박물관이 건립되면서 대부분 공주로 다시 돌아왔다.

총체적으로 경험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발굴단도, 기자도, 주민들도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성숙한 지식을 얻을 기회가 없었고, 결국 당대 사람들의 인식이 미숙한 탓에 역사에 남을 실수를 한 것이다. 하지만, 50년 전 한국 고고학(考古學)의 수준이 오늘날과는 크게 달랐다는 사실도 감안해서 이해해야 할 부분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 국내의 모든 유적 발굴은 대부분 일본인 학자들이 독점해 주도하였으며, 더러 서양인이 하기도 하였다. 한국인들은 단순 일꾼이나 낮은 위치에서 보조 역할만 맡았다. 광복과 함께 일본인 고고학자들이 한꺼번에 떠나버렸기 때문에 일어난 후회스러운 발굴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무령왕릉의 실패는 후대 한국 고고학계의 반면교사가 되어 그 뒤 경주 고분을 발굴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교훈이 되었다, 무령왕릉 발굴과 같은 일은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는 인식이 이후 우리 고고학의 큰 성장을 이룬 것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다. 현재는 고고학적 유물의 발굴에는 꼭 현장 지휘부의 설치와 경비가 중시된다. 천마총 발굴 때에는 전체 브리핑 외에는 기자들의 보도를 최대한 통제하고, 발굴단원들이 기자들의 취재에 일부러 응하지 않거나 발굴현장에 철조망을 치는 등 현장을 거의 봉쇄한 상태로 발굴을 진행하였다.

- 6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무령왕릉 4편

■ 무령왕릉 4편

■ 무령왕릉 4편

지석에 따르면 무령왕은 사마라는 이름을 썼다. 동성왕의 아들로 왕위에 오르기 전에는 일본 지역을 다스리던 사마왕이었다. 아버지가 죽자 귀국하여 왕위에 올라 귀족 세력을 제압하고 백제 부흥을 위해 애썼다. 이는 백제의 지배력이 일본에까지 미쳤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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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12월, 전(前) 일왕 아키히토(明仁)가 던진 한마디가 일본 사회를 술렁이게 만들었다. 아키히토 일왕은 “나 자신도 간무(桓武)왕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후손이라고 속일본기에 기록되어 있어 한국과의 인연을 느낍니다.” 라고 했다. 말하자면, 일왕의 가계(家系)가 한국에서 왔다는 고백이 되는 것으로 일본 사회에 크나큰 파장을 던졌다. 2004년 8월에는 그런 이유로 아키히토 전(前) 일왕의 당숙인 아사카노미야가 방한(訪韓)해서 무령왕릉을 참배하고 일본에서 가져온 제사물품을 기증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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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무열왕릉은 이런 역사적·학술적 가치와 대비되는 어처구니없는 졸속 발굴 때문에 ‘사상 최악의 발굴’로도 알려져 있다. 무령왕릉의 발굴은 당시 ‘하룻밤 삽질로 이루어진 도굴 수준의 발굴’이라고 비판받았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1971년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장으로 발굴의 총책임자이자 현장책임자였던 작고(作故)한 고고미술사학자 김원룡 선생은 발굴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발굴대원들은…철야작업을 해서라도 발굴을 속히 끝내기로 합의했다. 철조망을 돌려치고, 충분한 장비를 갖추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눌러앉았어야 할 일이었다. 몇 달이 걸렸어도 그 나무뿌리들을 가위로 하나하나 잘라서 장신구들을 들어냈어야 했다. 고고학 발굴의 ABC가 미처 생각이 안 날 정도로 예기치 않던 상태의 흥분 속에서 내 머리가 돌아 버린 것이다.”

도굴이 한 번도 되지 않은 귀중한 왕릉의 발굴이었지만, 보통은 몇 년은 걸릴 법한 발굴 조사를 17시간, 겨우 하룻밤 만에 해치워버린 것이다. 비록 유물은 다 챙겼지만, 유물만큼이나 중요한 유물의 배치를 비롯한 현장 사진과 기록이 너무나도 부실했다. 남아있는 자료는 급하게 끝낸 부실한 실측자료와 약간의 사진, 그리고 사진 기자들의 학술적인 가치가 결여된 사진뿐이었다. 희대의 발굴을 취재하던 기자들 역시 유물이 발견되자, 어떻게든 내부로 들어가 사진을 찍으려고 일부는 책임자를 폭행하고 유물을 파손하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현장이 이렇듯 전혀 통제되지 않았기 때문에 관계자들은 유물이 도난 될 수도 있다는 조급한 마음에 기록도 없이 유물을 자루에 쓸어 담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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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무령왕릉 3편

■ 무령왕릉 3편

■ 무령왕릉 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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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 발굴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지석(誌石)이다. 지석이란 죽은 사람의 인적 사항이나 무덤의 소재를 기록하여 묻은 판석(板石)이나 도판(陶板)을 말한다. 이 석판을 통해 백제 제25대 무령왕(재위 501~523)과 왕비가 합장(合葬)된 무덤임이 밝혀졌다. 왕릉은 왕이 죽기 11년 전부터 만들기 시작했고, 왕과 왕비를 2년 3개월 동안 가매장한 후에 정식 왕릉으로 옮기는 백제의 매장 풍습, 땅과 지하의 신들에게서 토지를 사서 무덤을 쓰는 개념 등을 알 수 있었다. 지석 앞면에는 ‘영동대장군 백제사마왕(寧東大將軍 百濟斯麻王)’이라는 무덤 주인공에 대한 정보가 적혀 있고, 뒷면에는 『무령왕은 523년 5월에 사망했고, 525년 8월에 왕릉에 모셨으며, 왕비는 526년 11월에 사망했고, 529년 2월에 안치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왕과 왕비가 세상을 떠난 지 28개월 만에 무덤에 안치된 것이다. 28개월 동안은 능 부근에서 임시로 장사지냈으며, 이것은 삼국에서 모두 유행하던 장례 형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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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은 입구가 있는 돌로 된 방 형태여서 다른 무덤에 비해서 도굴되기 쉬운 무덤 구조였다. 그런데도 발견될 당시에 그 내용물이 하나도 훼손되지 않고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서 큰 화제가 됐었다. 무덤의 입구에는 왕과 왕비의 이름이 새겨진 지석 2매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오수전 한 꾸러미가 얹혀 있었다. 오수전을 올려놓은 이유는 여행갈 때 여비를 가지고 가는 것처럼 죽은 왕과 왕비가 저승에 갈 때 노잣돈으로 사용하라고 올려놓은 돈이다. 이 돈은 중국 양나라의 돈으로, 이를 통해 백제와 양나라 사이에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지석 뒤에는 무덤을 지키는 상징적인 동물인 진묘수가 남쪽을 향해 서 있다. 입구를 지나 무덤의 방안으로 들어서면 관을 올려놓을 수 있는 대 위에 왕과 왕비의 시신을 넣은 나무관이 나란히 두 개 놓여 있다.

세월이 오래되어 썩고 부스러진 나무관 밑에서는 왕과 왕비가 사용했던 장신구와 부장 유물이 출토됐다. 금관 장식, 금귀고리, 금동 신발, 금팔찌 등과 같은 장신구는 물론 왕의 허리에서는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용과 봉황이 새겨진 환두대도가 출토됐다. 또 왕과 왕비가 편하게 머리와 발을 괼 수 있도록 두침과 족좌가 목관 안에 놓여 있었고, 그밖에 청동 거울 3면과 동탁 은잔 등도 출토되었다. 두침은 왕비 주검의 머리 부분을 받쳐 놓았던 받침대이고, 족좌는 나무로 만든 발받침 장신구이다. 왕의 다리를 받치는 족좌와 왕비의 머리를 받치는 목침의 경우 왕의 것은 검은 옻칠과 금으로 장식했고, 왕비의 것은 붉은 단청과 금칠을 했다.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의 배치로 무덤의 입구에서 무덤방을 바라볼 때 왕은 오른쪽이고 왕비는 왼쪽이며, 무덤의 입구 방향으로 머리를 두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나무 관 조각들에서 일본산 금송(金松)과 삼나무가 쓰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당시 백제와 일본의 밀접한 관계를 짐작하게 해주는 유물이며, 일본에서 목재를 수입했다는 근거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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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무령왕릉 2편

■ 무령왕릉 2편

■ 무령왕릉 2편

《삼국사기》에는 무령왕의 키가 8척이나 되고 인자하며 너그러워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신흥 귀족 세력으로 큰 힘을 가지고 있던 백가의 반란을 진압하고 왕권을 튼튼히 했으며, 지방에 왕족이나 충성스러운 신하를 관리로 파견하여 다스리는 담로 제도를 실시해 전국을 안정시켰다. 또한 무령왕은 수리 시설을 정비하여 농사 활동을 돕고, 국방을 튼튼히 하는 한편 일본이나 양나라와 친밀한 관계를 다지기도 했다. 그리고 고구려와 말갈과의 전쟁을 준비는 등 북방정책을 추진했다. 당시 백제는 고구려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긴 뒤 매우 큰 혼란에 빠져 있었으며, 전염병이 창궐하는 등 백성들의 삶도 피폐해져 있었다. 그래서 무령왕은 고구려의 남하에 맞서 국방 체제를 정비하는 한편, 백성들의 삶을 보살피려 노력하였다.

그의 재위 기간에는 흉년이 자주 들었는데, 《삼국사기》에 기록된 것만으로도 502년(무령왕 2년), 506년(무령왕 6년), 521년(무령왕 21년)에 홍수와 가뭄, 전염병, 메뚜기 떼의 창궐 등으로 백성들이 크게 굶주렸다고 나타나 있다. 무령왕은 창고를 열어서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는 한편, 510년(무령왕 10년)에는 왕명으로 하천의 제방을 대대적으로 정비하고 도회지로 몰려든 유민들을 농촌으로 보내 농사를 짓게 하였다. 백성들의 유랑(流浪)은 세수(稅收)의 감소 뿐 만 아니라 인력 동원 등 여러 면에서 국력의 약화를 가져올 수 있었다. 이에 무령왕은 적극적인 민생구제정책으로 농민층의 안정을 추진하여, 국가재원의 확보로 이어지는 경제정책을 펼쳐나갔다. 이러한 대민정책은 한강 유역의 상실 이후 축소된 경제기반을 확대하고 농업생산의 증대를 도모하여 정권의 물적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백성들의 안정을 통해 강력한 국가를 재건하고자 한 것이다.

도굴이 어려운 구조인 신라 왕릉과 달리, 백제 왕릉은 출입구가 따로 존재하고 돌무지로 덮혀 있지도 않은 굴식 돌방 또는 벽돌무덤 양식이었으므로, 백제가 멸망한 이후 거의 도굴(盜掘)이 된 상태였다. 하지만, 무령왕릉처럼 도굴을 피해 거의 온전하게 남아있는 건 한국판 투탕카멘급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무령왕릉은 무덤이 통째로 지하에 있었기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도굴과 일제강점기의 약탈에도 온전하게 발굴되어서 전국적으로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무령왕이 지금과 같이 유명해진 이유이다.

무령왕릉은 송산리 고분군 중 5호분과 6호분의 침수를 방지하기 위해 배수로 작업하던 중 우연히 발견되어 무려 1400년 만에 그 베일을 벗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무령왕릉은 중국 육조(六朝)의 전실분(塼室墳) 형식을 띤 연화문(연꽃무늬) 벽돌로 아치를 쌓은 아치형 벽돌무덤이다. 백제 고분으로서 전축분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은 당시 중국 남조의 영향이 강하게 작용했음을 보여준다. 이 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은 108종 2,906점의 장신구와 유물로, 지금까지 발견된 어떠한 발굴보다도 원형을 잘 간직한 백제 시대의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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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무령왕릉 1편

■ 무령왕릉 1편

■ 무령왕릉 1편

백제의 고분은 시대에 따라 크게 서울 석촌동·구의동 일대의 초기 돌무지무덤과 웅진(공주) 천도(遷都)이후의 송산리 고분군, 그리고 사비(부여)시대의 능산리 고분군으로 구분할 수 있다. 무덤을 칭할 때 보통 왕이나 왕비의 무덤은 능이라 하고(태릉, 정릉 등) 일반인의 무덤은 ‘~묘’라고 한다. 주인을 특정(特定)할 수 없는 옛날 무덤을 통상 글자그대로 고분(古墳)이라 칭하는데(일정지역에 여러 기의 고분이 모여 있을 때 고분군), 발굴은 했지만 왕에 준하는 사람 무덤 같긴 한데 주인공을 알 수 없는 경우에는 장군총처럼 ~~총이라고 한다. 1971년 7월 무령왕릉이 발견되기 전까지 삼국시대의 고분 중 무덤의 주인을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신라 무열왕릉도 있긴 하지만 실제 위치가 특정되거나 발굴이 이뤄진 건 아니기 때문에 고고학·역사학계가 인정하는 삼국시대의 ‘능’은 무령왕릉 뿐 이다.

일제강점기의 국내 유적은 일본인들이 전부 발굴과 연구를 독차지했는데, 대부분 조선총독부 박물관 차원에서 담당하였다. 반면에 공주 일대 무덤을 발굴한 가루베 지온은 공주고등학교 교사이자 아마추어 고고학자로, 일제강점기 당시에도 박물관 측 일본인 조사자들과 유적, 유물의 발굴 문제로 갈등을 빚기도 했었다. 박물관 또는 박물관 소속의 일본인 고고학자들의 발굴은 어쨌거나 박물관으로 유물이 옮겨져 전시되었던 반면, 가루베 지온은 발굴된 유물을 일본으로 빼돌렸다. 이러한 일제의 발굴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백제 특유의 낮은 봉분으로 인해 고분임을 인지하지 못했던 것에 그 이유가 있다.

무령왕릉은 백제 무덤 중 유일하게 주인이 확인된 왕릉이면서 도굴되지 않고 고스란히 발굴된 유적이었으므로, 축조연대·내부구조·부장유물을 온전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덕분에 백제의 국가상, 사회생활, 중국 남조 양나라와의 문화교류, 장사(葬事) 예법을 알 수 있게 되었으며,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 상호 간의 문화교류, 각국 문화의 특수성과 공통점 등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무령왕릉마저 도굴되었다면 우리는 백제의 예술 수준이나 국제관계 등을 영원히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무령왕릉의 발견으로 그 동안 연구 자료의 빈약으로 미궁같았던 백제 문화의 참모습을 알 수 있었다는 점에서 학술적으로도 문화재 측면에서도 그 가치가 뛰어나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고고학사(考古學史)에 있어서도 가장 획기적인 사건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였다. 올해는 무령왕릉 발굴 5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그래서 문화재청과 공주시는 올해를 ‘무령왕의 해’ 로 정하고, 여러 가지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 지긋지긋한 편두통의 원인.. '이것' 부족하지 않나요?

◇ 지긋지긋한 편두통의 원인.. 이것 부족하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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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긋지긋한 편두통의 원인.. 이것 부족하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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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통의 왕이라고 불리는 편두통은 흔히 발생하지만 심각한 통증을 초래하곤 한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2019년 집계된 편두통 환자는 56만7057명이지만, 단순 두통(97만118명)으로 오인하거나 혼자 참다가 병원을 방문하지 않는 사람도 많아 실제 환자 수는 더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편두통은 일상생활을 크게 방해할 뿐 아니라, 각종 질병 위험까지 높일 수 있어 더욱 문제다. 최근 운동 부족이 편두통을 악화시킬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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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일에 2번 이상 진통제 찾는다면 치료받아야

편두통을 예방하고 싶거나, 평소 편두통으로 고생하는 사람이라면 규칙적으로 운동해보길 권한다. 만약 두통이 심해 운동하기 어렵다면 요가와 같은 정적인 운동을 추천한다. 요가는 편두통 치료에 약물 복용만큼이나 효과적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 인도의 한 의학연구소는 편두통이 있는 성인 114명에게 규칙적인 생활습관을 실천하도록 했다. 이중 절반은 요가를 병행했고, 나머지는 생활습관만 실천했다. 실험 결과, 요가를 병행한 그룹은 그렇지 않은 그룹보다 두통 감소 비율이 4배나 높았다. 요가를 병행하면 약물을 중단할 가능성도 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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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편두통을 방치하면 드물게 심혈관질환이나 치매 등 질병 위험을 높일 수도 있다. 특히 편두통이 나타나기 전 시야 흐려짐이나 팔·다리 저림 등 전조증상을 동반하는 조짐 편두통의 경우, 심혈관질환 발병률이 약 2.29배 높은 것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두통이 반복된다면 단순히 여기지 말고 치료를 고려해야 한다. 특히 두통이 있을 때 진통제를 과용하면 오히려 편두통을 악화시킬 수 있어 주의한다. 대한두통학회에서는 한 달에 8번 이상, 1주일에 2번 이상 진통제를 먹는다면 예방 치료를 받기를 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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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미 교수는 "편두통 개선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신체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며 "규칙적인 운동뿐 아니라 수면과 식사 시간도 일정하게 지키며 생활하는 게 가장 좋다"고 말했다. 최근엔 밤늦게 안 좋은 자세로 스마트폰을 장시간 사용하는 것도 편두통 악화 요인 중 하나로 지적된다. 잠들기 전 스마트폰 사용은 수면 패턴을 망가트릴 수 있어 최대한 줄이는 게 좋다. 자세도 중요하다. 구부정한 자세를 오래 유지해 목 부위 근육이 굳으면 편두통이나 긴장성 두통으로 이어지기 쉽다.

-헬스조선-

◇ 치매 위험 21% 낮추는 음식은?

◇ 치매 위험 21% 낮추는 음식은?

◇ 치매 위험 21% 낮추는 음식은?

콩과 같은 식물성 단백질을 많이 섭취한 여성은 그렇지 않은 여성보다 치매로 인한 사망 위험이 낮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미국 아이오와대학 연구팀은 폐경 여성 약 10만명의 건강 데이터를 분석해 식물성 단백질 섭취가 치매나 심장병 등의 질환 발병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했다. 연구팀은 1993~1998년에 작성된 식단 설문지를 바탕으로 식물성 단백질을 섭취한 정도에 따라 그룹을 나눴고 그룹별 건강 상태를 20년 동안 추적했다.

그 결과, 식물성 단백질을 가장 많이 섭취한 그룹은 거의 또는 전혀 섭취하지 않은 그룹보다 치매 관련 사망 위험이 21% 더 낮았고 심장병으로 인한 사망 위험은 12% 더 낮았다. 다만 연구팀은 식물성 단백질 식품이어도 지방이나 설탕이 많이 함유돼있으면 건강에 해로울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연구팀은 가공육 같은 동물성 단백질을 많이 섭취하면 치매로 인한 사망 위험이 20% 높아지고 붉은 육류를 많이 먹으면 심장병으로 인한 사망 위험이 12% 높아진다고 밝혔다.

연구를 진행한 미국 아이오와대학 연구팀 웨이 바오 조교수는 “이번 연구가 향후 공중 보건이 식물성 단백질을 고려한 식단 지침을 만들어야 할 필요성을 뒷받침한다”고 말했다.

-헬스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