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일 화요일

아로니아 효능

아로니아 효능

아로니아 효능

1.항암작용

우리 몸에는 유해산소라고도 불리우는 활성산소가 정상적인 세포를 파괴하여 암을 유발하거나 노화촉진, 각종 질병을 일으키는데요. 아로니아에는 이러한 활성산소를 제거하는 강력한 항암물질인 안토시아닌이라는 성분이 풍부해 항염 및 항암작용을 하여 암을 예방 및 치료에 좋을 뿐만아니라, 노화를 막아준다고 합니다. 특히, 아로니아의 안토시아닌 함유량은 자연계에 존재하는 식품중에서도 가장 풍부하다고 합니다.

2. 피부미용

많은 연예인들이 피부미용을 위해 아로니아를 섭취한다는 내용이 보도되면서 많이 유명해 졌는데요. 아로니아를 평소에 챙겨 먹으면 우리 몸속에 있는 콜라겐과 지질층이 산화되는 것을 막아주면서 피부노화물질인 프리라디칼을 제거하여 탱글탱글하고 탄력있는 피부를 유지할 수 있다고 합니다.

3. 면역력 향상

몸의 면역력이 강하면 외부의 바이러스와 세균에 대한 저항력을 높여 김기나 비염 등의 각종 질병에 노출될 위험을 줄일 수 있는데요. 아로니아가 면역력에 영향을 미치는 백혈구의 생성을 촉진시켜 줄 뿐만아니라, 백혈구의 손상을 막아주기 때문에 면역력을 향상시키는 아로니아 효능을 볼 수 있습니다.

4. 눈 건강

평소 컴퓨터나 스마트폰 사용이 많은분들도 눈 건강을 위해 아로니아를 섭취하면 좋은데요. 풍부한 안토시아닌 성분이 안구망막의 로돕신 색소의 생성을 도와주기 때문에 눈의 피로를 풀어주면서 시력이 떨어지는 것을 막아준다고 합니다. 또한, 루테인과 제아잔틴이라는 성분이 시력을 보호해주고 백내장이나 녹내장 등의 각종 눈질환을 예방해 준다고 합니다.

5. 정력 증진

아로니아가 천연 비아그라라고 불리울 정도로 남성분들의 정력증진에 도움이 된다고 하는데요. 특히, 정력에 좋다고 알려져있는 복분자보다 더 좋은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아로니아효능중에는 피가 흐르는 혈관을 확장시켜 생식기로 흐르는 피의 양을 증가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6. 뇌 건강

아로니아를 꾸준히 섭취하면 뇌 신경세포를 손상시키는 혈액속의 독소들을 제거하여 각종 뇌질환을 예방 및 개선하는데 좋을 뿐만아니라, 기억력을 향상시켜 치매를 예방해 주기때문에 나이드신 분들이 꾸준히 복용하셔도 좋을것 같습니다.

7. 혈관질환 예방

우리 몸에서 혈액이 흐르는 혈관내에 콜레스테롤이 많아지면 혈관이 좁아지고, 이렇게 혈관이 좋아지면 혈액의 흐름이 활발하지 못해 동맥경화, 뇌졸중, 고혈압, 협심증, 심장병, 고지혈증 등의 위험한 혈관질환을 일으키는데요. 아로니아를 섭취하면 혈관내에 침착되어 있는 콜레스테롤을 배출시키고, 혈관에 침전물이 쌓이는것을 막아주기 때문에 각종 혈관질환을 예방하는데 아로니아 효능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8. 다이어트

아로니아에 함유되어 있는 클로로겐산이라는 성분이 체내에 지방과 탄수화물의 흡수를 억제시키는 작용을 하며, 카테킨이라는 성분은 체징방을 감소시켜 다이어트에 좋다고 합니다.

9. 당뇨 개선

당뇨를 개선시키고 당뇨로 인한 합병증을 줄일 수 있습니다. 아로니아를 꾸준히 섭취하면 췌장의 인슐린의 생성을 촉진시켜 주면서 당뇨 합병증을 유발시키는 물질은 감소시켜 주기때문에 당뇨병을 개선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여성들이 꼭 먹어야 될 음식

여성들이 꼭 먹어야 될 음식

여성들이 꼭 먹어야 될 음식

1. 키위

키위에는 모발 건강에 좋은 아미노산, 판토텐산, 엽산, 티로신 등이 들어있다. 또, 흑색 입자의 구리-철과 같은 무기질과 미용효과를 갖고 있는 마그네슘도 들어 있어 미용 과일이라 할 만하다. 또 비타민 C, E, K와 풍부한 섬유소를 함유하고 있는 저지방 식품으로, 다이어트와 미용에 특별한 효능이 있다. 키위는 벌레가 잘 생기지 않는 특성으로 인해 농약을 사용하지 않는 것도 건강식품으로 각광 받는 이유 중 하나다.

2. 쇠고기

많은 여성들이 불포화 지방산의 함량이 높아서 쇠고기를 꺼린다. 하지만, 쇠고기 살코기의 지방 함량은 돼지고기의 5분의 1에 불과하며, 콜레스테롤 함량도 낮다. 이런 점에서 다이어트 중인 여성에게 쇠고기는 최상의 건강 식품이다. 쇠고기에 들어있는 엽산은 피부가 아름다운 색과 탄력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준다. 국을 끓여 먹으면 얼굴과 다리가 붓는 것을 치료할 수 있으며, 만성설사에도 좋다.

3. 김

체내 단백질, 지방, 당의 대사에 관여하는 리보플라빈이 풍부하게 들어 있다. 리보플라빈이 부족하면 인체 내 점막층이 얇아져 여성의 경우 질 내벽 건조-충혈 등으로 인해 성관계 도중 통증을 느끼는 원인이 된다. 김에는 100g당 4.8g의 섬유소가 들어있어, 체내 불순물을 배출하고 미세순환을 촉진시켜 다이어트에도 효과적이다. 매일 아침 공복에 1~2 그릇 정도의 김 국을 마셔주면 변비 해소에 좋다.

4. 대두

대두에 함유된 사포닌은 인체 노화를 방지하고 레시틴 성분은 혈관벽의 콜레스테롤을 제거하며, 피니톨 성분은 당뇨병 치료에 효과가 있다. 철분, 이소플라본 등은 여성의 갱년기 증상 완화와 암 예방에도 좋다. 특히, 토코페롤이 풍부하게 들어 있어 피로를 풀어주는 효과도 있다. 대두는 에스트론과 유사한 성분이 들어있어 성장기 여성의 유방 조직 발육에 좋으며, 성장기 이후에는 유방 건강에도 유익하다. 사포닌은 지방 분해를 돕지만 요오드를 방출시켜 갑상선 기능을 저하시키기 때문에 김과 함께 먹는 것이 가장 완벽한 음식궁합이다.

5. 대추

여러 과실 중 노화를 방지하는 비타민P의 함량이 가장 많다. 우리 몸에 피를 보충해 주는 작용도 하기 때문에 월경으로 빈혈에 걸리기 쉬운 여성을 위한 식품이라 할 수 있다. 우울증이 있는 여성의 경우엔 대추와 감초, 보리를 함께 끓여 먹으면 마음을 안정시켜준다. 대추는 물에 끓여먹는 것이 가장 좋은 조리법이다. 단, 대추의 당분이 충치를 유발할 수 있으므로 적당량만 먹고 양치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6. 시금치

장과 위를 자극하고 췌장액의 분비를 촉진시켜 소화를 돕고, 배변을 용이하게 하는 효과가 있어 피부 트러블을 예방해 준다. 또 두 눈을 맑게 하며 머리결을 윤기있게 해 준다. 특히, 혈액 순환을 돕는 효과로 인해 다리에 신선한 영양과 산소를 공급, 다리가 가늘어지고 탄력 있게 만들어준다. 시금치 즙에 우유와 꿀을 섞어 만든 음료를 매일 한 컵씩 마시고, 같은 성분으로 마사지를 1~2달 동안 계속하면 얼굴의 기미가 없어지는 효과도 있다.

7. 오이

하이드록시 말로닌산 성분이 들어있어 당분이 지방으로 전환되는 것을 억제하기 때문에 다이어트에 효과적이다. 노화 방지성분인 비타민E도 풍부하게 들어있다. 오이는 생으로 먹을 때 영양분을 최대한 흡수할 수 있다. 오이 즙이 피부 노화 방지에 효과가 있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

8. 모과

모과를 많이 먹으면 간과 위가 편안해지고 혈관이 굳는 것을 예방할 수 있다. 또 바이러스에 대한 저항력이 생기고 노화 방지 및 피부 보양 효과도 있으며 체력도 보강된다. 여성의 경우에는 특히 모과 효소가 유선 발육을 촉진시키기 때문에 가슴을 풍만하게 만들어주는 효과가 있다. 껍질에 두 번째 붉은 반점이 나타났을 때가 가장 먹기 좋은 상태.

9. 셀러리

단백질, 지방, 섬유소, 광물질, 비타민이 풍부한 셀러리는 생리불순, 냉증 등 여성 질환에 보조치료 효과가 있다. 특히, 불감증이나 부인병을 앓고 있는 여성은 셀러리를 자주 먹으면 성욕이 회복되는 치료효과도 있다. 셀러리 뿌리는 굽거나 볶아서 먹기에 알맞고 국으로 끓이거나 샐러드·전병을 만들어도 좋다.

딸기의 건강효능

딸기의 건강효능

딸기의 건강효능

겨울부터 초봄까지 많이 나와 후식으로 많이 먹는 과일, 딸기.

하지만 사실 딸기의 제철은 겨울이 아닌 여름이다.

더운 날씨에는 쉽게 상하는 딸기가 겨울에 하우스로 재배되면 단단한 과육에 일정한 당도를 유지하여 겨울 과일의 대명사로 알려지게 된 것.이러한 딸기의 건강 효능 3가지...

1. 항산화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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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의 빨간 색을 내는 성분 안토시아닌은 항산화 효과가 높아 암 예방에 도움을 주고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춰 노화예방, 암 예방에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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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피로 회복과 감기 예방

비타민 C의 하루 권장 섭취량은 100m, 딸기의 비타민 C 함량은 100g당 81mg, 딸기만 잘 먹어도 비타민 C의 피로회복과 감기예방 효과를 볼 수 있다.

3. 시력 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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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망막에 로돕신이라는 색소체가 부족하면 시력 저하, 각종 안구질환이 생기는데 안토시아닌 성분이 로돕신의 재합성을 촉진해 시력 회복, 시력 보호에 효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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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를 망치는 10가지 실수

인간관계를 망치는 10가지 실수

인간관계를 망치는 10가지 실수

1.첫번째 실수

버림받을 것이 두려워 중대한 사실을 숨기는 것. --진정한 사랑은 신뢰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

2.두 번째 실수

사랑하는 사람보다 내 자유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이기적인 태도는 가정을 파탄으로 만든다.

3.세 번째 실수

아무 것도 아닌 일에 과민 반응하는 것. --지나치게 예민해 별 것 아닌 일로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일을 조심해야 한다.

4.네 번째 실수

내 방식만을 고집하는 것. --어리석은 지배욕과 책임 전가 의식은 누구의 인정도 받기 어렵다.

5.다섯 번째 실수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엉뚱한 곳에 쏟아붓는 것. --일의 우선 순위를 제대로 정해야 서로 혼란에 빠지지 않는다.

6.여섯 번째 실수

순간의 쾌락을 쫓으며 원초적 욕망만 채우는 것.--이런 미성숙함은 상대에게 실망을 안겨 준다.

7.일곱 번째 실수

도무지 사과할 줄 모르는 것.--실수를 인정하거나 책임지지 않는 태도는 관계를 악화시킨다.

8.여덟 번째 실수

부적절한 관계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것.

9.아홉 번째 실수

미심쩍고 내키지 않는 관계를 끊지 못하는 것. --우유부단함은 결국 더 큰 상처만 남긴다.

10.열 번째 실수

터무니없는 이유로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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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라 슐레징어 박사의 남녀 관계를 망치는 10가지 실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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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구정狎鷗亭 2편

■ 압구정狎鷗亭 2편

■ 압구정(狎鷗亭) 2편

1476년 성종의 나이 스무 살이 되자, 7년간 수렴청정을 해오던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고 성종에게 친정을 시키겠다는 언문교지를 내렸다. 정희대비가 물러나겠다고 하자 훈신 세력들은 이를 극구 만류했다. 자신들을 비호하던 정희대비가 물러나고 성종이 친정을 하면 입지가 줄어들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생각은 맞아떨어졌다. 성종은 정희대비가 수렴청정을 거두겠다고 하자 몇 번 만류하다가 곧 그 뜻을 받아들였다. 성종 입장에서는 성년이 된 자신을 여전히 믿지 못하는 장인에 대해 불만이 쌓였을 것이다. 장인의 힘으로 왕위에 오른 성종이지만, 그리 만만한 왕이 아니었다. 성종에게 있어서 장인 한명회는 최고의 정치 후원자이면서, 새 시대로 나가는 데 있어서 최대의 걸림돌이 되는 존재였다.

친정을 시작한 성종은 훈신 세력의 영향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했다. 사실 세조, 예종, 성종을 거치면서 강력한 정치 세력으로 부상한 훈구파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쇠퇴하고 있었다. 성종 즉위 초부터 친정이 시작된 시점에 이르러서는 구치관, 한백륜, 신숙주, 홍윤성, 정인지 등 대표적 훈신들이 차례로 세상을 떴다. 영향력 있는 훈신은 한명회와 정창손 정도만 남아 있었다. 성종은 첫 번째 부인인 공혜왕후의 아버지이자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한명회와의 관계 청산에 들어갔다. 그 빌미는 한명회가 결국 제공한 셈이다.

1481년(성종12년) 6월의 일이다. 한명회는 성종에게 중국 사신과 함께 자신의 개인 정자인 압구정에서 연회를 열고자 하는데 장소가 좁으니 왕실에서 사용하는 용봉(龍鳳)이 새겨진 천막을 칠 수 있게 허락해 달라고 청했다. 성종은 장소가 좁으면 왕실 소유의 정자인 제천정에서 잔치를 열고 압구정에는 장막을 치지 말라고 했다. 그러자 한명회는 심기가 불편해져서 부인의 병을 핑계로 잔치가 열리는 제천정에는 나가지 않겠다고 했다. 이 말이 전해지자 대간들이 한명회를 불경죄로 다스려야 한다고 탄핵했다. 이에 성종은 희우정과 제천정을 제외한 모든 정자를 없애겠다는 강경한 선언을 했다.

한명회에 대한 성종의 의중을 알아차린 승지와 대간들은 연이어 한명회를 비난했다. 성종은 잘못을 꾸짖는 선에서 일을 매듭지으려 했지만 반발이 계속되자, 결국 한명회의 국문을 지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명회는 추락하고 말았다.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한명회는 압구정 관련 일을 해명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결국 이 일로 한명회는 파직되었다. 이로써 계유정난 때 공신이 되어 세 왕에 걸쳐 최고의 권력을 누리던 한명회의 시대도 끝이 났다. 그것은 훈구파의 몰락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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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구정狎鷗亭 1편

■ 압구정狎鷗亭 1편

■ 압구정(狎鷗亭) 1편

서울의 ‘압구정동’이라는 동명(洞名)은 이곳에 조선 세조 때의 권신 한명회(韓明澮)가 지은 ‘압구정(狎鷗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던 데서 유래되었다. ‘압구정’은 한명회의 호로 일찍이 중국 송(宋)의 재상이었던 한기(韓琦)가 만년에 정계에서 물러나 한가롭게 갈매기와 친하게 지내면서 머물던 그의 서재 이름을 압구정(狎鷗亭)이라 했던 고사에서 따온 것이다.

지금은 1970년대 이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서 옛 모습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지만, 한강물이 발 아래로 유유히 흐르고 강 건너 북쪽으로 도성의 여러 산과 저 멀리 북한산 연봉과 도봉산 수락산 불암산이 바라보인다. 동남서쪽으로 강 건너 살곶이벌과 그 뒤의 아차산 남한산 청계산 관악산 등이 두루 바라다 보이는 뛰어난 경관을 가진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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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치가 이토록 빼어난 곳이니 역대 권문세가들이 항상 이곳을 탐내어 별장을 짓고자 했다. 압구정을 처음 지은 사람은 한명회였다. 그는 수양대군의 심복이 되어 김종서와 안평대군 등 조정대신과 왕자들을 죽이고, 수양대군으로 하여금 어린 조카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게 한 장본인이다. 성종이 왕으로 즉위한 후 한명회의 위세는 더욱 커졌다. 권모술수의 달인 한명회(韓明澮)가 세조의 총애를 바탕으로 성종 대까지 꾸준히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두 딸을 예종과 성종에게 각각 시집보냄으로써 왕실의 장인으로 오래도록 굳건한 지위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13세의 사위 잘산군, 즉 성종(成宗)을 왕위에 올리는 데 정치력을 발휘함으로써 세조 때부터 승승장구해 온 그의 권력에는 ‘왕의 장인’이라는 프리미엄이 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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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권력을 구가하던 한명회는 1476년(성종 7년) 만년(晩年)에 한강가에 압구정(鴨鷗亭)이란 정자를 짓고, 명나라 사신인 문인 예겸에게 압구정, 즉 갈매기와 친하게 지내는 정자라는 뜻의 이름을 받는다. 갈매기를 벗하며 유유자적하게 여생을 마무리 짓겠다는 의지를 나타내기도 한 압구정은 권력의 정점에 있었던 한명회의 위상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공간이기도 했다. 당시 한강 주변에는 왕실 소유의 희우정(喜雨亭)이나 제천정(濟川亭) 등 만이 있었다. 최고 조망을 가진 곳에 신하의 신분으로 정자를 건립한 것 자체만으로도 한명회의 위상이 어떠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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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구정이 완성되던 날, 성종은 이를 기려 직접 시를 지어 내릴 정도로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이듬해 한명회를 견제한 젊은 관료들의 반발로 현판에 걸린 성종의 시는 철거됐다. 하지만 압구정은 한명회의 화려했던 정치 인생에 종지부를 찍는 부메랑으로 날아왔다.

-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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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나들이

■ 우리말 나들이

■ 우리말 나들이

1. 개거품? 게거품?

“미친 듯이 화를 내며 개거품을 물고 따지다.” 등과 같이 ‘개거품’은 생활 속에서 꽤 쓰이는 말이다. ‘개망나니’ ‘개떡’ ‘개살구’ 처럼 별로 좋지 않은 상황이나 좋지 않은 물건을 지칭할 때 ‘개’가 들어가는 단어가 많다 보니, ‘개거품’을 바른말로 아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나 동물이 몹시 괴롭거나 흥분했을 때 입에서 나오는 거품 같은 침”을 일컫는 말은 ‘개거품’이 아니라 ‘게거품’이 바른말이다.

우리의 밥상에도 자주 등장하는 ‘게’는 위험에 처하거나 주변 환경이 바뀌면 입에서 뽀글뽀글 거품을 뿜어낸다. 그래서 생겨난 말이 ‘게거품(을) 물다’ 이다. 하지만 ‘개’가 입가에 잔뜩 침을 흘리며 으르렁거리는 경우도 있으니 ‘개거품’ 도 말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때도 ‘개거품’은 쓸 수 없다. 물론 “개가 입에 거품을 물고 으르렁거렸다”로는 쓸 수 있지만, 이를 “개가 입에 개거품을 물고 으르렁거렸다”가 아닌 ‘게거품’이라고 하는 것이 맞는 표현이다.

덧붙여, ‘게’와 관련해서 잘못 쓰기 쉬운 말이 하나 더 있다. 바로 ‘게껍질’이다. 게장을 좋아하는 사람이 “게껍질에 밥을 비벼먹으면 정말 맛있다.”라고 한다면 이는 틀린 표현이다. ‘껍질’은 “딱딱하지 않은 물체의 겉을 싸고 있는 질긴 물질의 켜”를 뜻하는 말로, 사과껍질ㆍ귤껍질 등에서 쓸 수 있다. ‘게’의 등짝처럼 딱딱한 겉부분은 ‘껍질’이 아니라, 조개껍데기, 달걀 껍데기처럼 ‘껍데기’라고 해야 옳다. 그러면 의미상으로 게껍데기가 맞는 표현이 되어야 하지만, ‘게’의 경우는 딱딱한 등짝을 가리키는 말로 ‘게딱지’로 쓰는 것이 옳은 표현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도 ‘게딱지’가 “게의 등딱지”로 풀이돼 있다. 여기서 ‘딱지’는 “게나 거북 따위의 몸을 싸고 있는 단단한 껍데기”를 뜻하는 말이다.

2. 이판사판(理判事判)

조선시대 사찰에는 이판승과 사판승의 구별이 있었다. 이판(理判)이란 참선하고 경전을 강론하기도 하고 수행하는 스님이다. 속칭 공부승(工夫僧)이라고도 한다. 사판(事判)은 생산에 종사하고 절의 업무를 꾸려나가고 사무행정을 해나가는 스님들이다. 속칭 산림승(山林僧)이라고도 한다. 이판과 사판은 그 어느 한쪽이라도 없어서는 안 되는 상호 관계를 갖고 있다. 이판승이 없다면 부처님의 지혜로운 말씀이 실천되지 않을 것이고, 사판승이 없으면 가람이 존속할 수 없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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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불교를 억압하고 유교를 국교로 세우면서 스님은 성 안에 드나드는 것조차 금지되었다. 이 때문에 조선에서 스님이 된다는 것은 이판이건 사판이건 천한 신분계급을 벗어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인생의 막다른 마지막 선택이고, 이판이나 사판은 그 자체로 끝장을 의미하는 말로 전이되고 말았다. ‘최악의 상황이나 처지가 되는 것’, 막다른 궁지 또는 끝장을 뜻하고 뾰족한 묘안이 없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조선뿐만 아니라 일제와 8·15광복 후의 건국 초기에도 불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면서 서로 분열 반목케 하여 이판사판은 더욱 부정적 이미지로 쓰이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뾰족한 대안이 없을 때 무의식으로 이판사판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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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구勳舊와 사림士林의 대립 4편

■ 훈구勳舊와 사림士林의 대립 4편

■ 훈구(勳舊)와 사림(士林)의 대립 4편

성종 후반부터 이미 삼사(三司)의 권위는 지나친 수준까지 팽창했다. 붕어(崩御:돌아가심)하기 직전 성종은 당시의 정국을 “두 마리 호랑이가 싸우는 것 같으니 참으로 아름답지 못한 일이다”라고 개탄했다(성종25년 5월 5일). 성종은 삼사의 활동을 제도로 보장하고 후원을 아끼지 않았지만, 현실적 갈등을 말끔하게 봉합하지 못한 채 승하(昇遐)하게 되었다.

삼사의 위상이 높아진 것은 유교정치 실현에 있어서는 의미 있는 발전이었지만, 국왕과 대신의 입장에서는 불편하고 불만스러운 것이 분명했다. 즉위 직후부터 왕권 강화에 남다른 관심과 의지를 보인 연산군에게는 더욱 그랬다.

선왕의 장례를 어떻게 치를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 시작된 논쟁은 이후 계속 확대되어 나갔다. 그런데 이 문제는 단지 장례를 불교식으로 치를 것인가 아닌가 하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것은 연산군 즉위 초 정치세력의 주도권 동향과 관련된 것이고, 왕권의 향방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치세 초반부터 이렇게 연산군·대신과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는 수륙재(水陸齋)의 시행뿐만 아니라, 외척·내시의 임용과 포상, 폐모(폐비 윤씨)의 추숭(追崇) 등 거의 모든 사안에서 충돌했다.

연산군이 추진하려는 불사(佛事)를 반대하는 세력들은 대개 부왕인 성종 대에 등용되었던 사림세력들이거나 그들과 정치적 성향을 같이 하는 세력들이었다. 사림세력들은 성리학으로 이론적 기반을 확고히 하여 조선 사회를 유교적 이상사회로 재편(再編)하려는 세력이었다. 유교적 이상사회는 공자가 지향하던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이상으로 하며, 패권(覇權)정치와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사림세력들은 임금과 신하가 함께 다스리는 정치, 이른바 군신공치(君臣共治)를 정치적 이상으로 하였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연산군의 불교식 장례 주장은 그들이 구상하는 모습과 완전히 다른 것이었던 것이다. 연산군의 행동은 패권(覇權)정치를 지향하는 독단적 행동으로 보일 뿐이었고, 사림파들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로써 두 세력은 일마다 대립하였고,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서로 타협할 수 없는 적대관계로까지 진행되어 갔다. 결국 유교적 이상사회를 지향하는 젊은 사림세력과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훈구세력과의 대결양상은 첨예화되어 갔다.

만약, 성종이었다면 강력한 왕권으로 어느 한쪽도 기울지 않으면서 현명하게 양쪽 세력의 균형과 견제를 유지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새롭게 왕위에 오른 연산군은 아직 두 세력 사이에서 균형과 중심을 잡기보다는, 오히려 초반 우위를 선점(先占)하기 위해서 강압적으로 이를 밀어붙이려고만 했던 것이다. 그 결과 상당수의 성균관 유생들에게 과거시험 응시를 제한하는 정거(停擧) 조치를 내려 왕의 의지를 강력히 표현하였다. 형식적으로는 연산군의 승리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후 양자(兩者)의 정치적 대립은 더욱 골이 깊어졌고, 그것이 표면화되면서 피바람을 몰고 올 사화(士禍)의 서막(序幕)이 열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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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구勳舊와 사림士林의 대립 3편

■ 훈구勳舊와 사림士林의 대립 3편

■ 훈구(勳舊)와 사림(士林)의 대립 3편

예조판서 성현이 문제를 제기한 다음 날 사헌부 장령 강백진, 사간원 정언 이의손 등은 불교식 장례절차인 수륙재(水陸齋:떠도는 잡귀를 쫓는 재) 시행에 반대하면서 말하기를,

“대행대왕을 위하여 수륙재(水陸齋)를 시행하라는 전교(傳敎)를 들었습니다. 대행대왕께서 일찍이 불법(佛法)을 좋아하지 않으셨고, 또 지금 신정(新政)으로 신민이 좋은 정치를 바라는 시기이니, 사도(邪道)를 버리고 예문(禮文)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삼사(三司)의 반대에 연산군은 이렇게 말하였다.

“선왕께서 어찌 다 불법을 좋아하셨으랴마는, 수륙재의 거행은 선대(先代)로부터 이미 그러하였고, 대행대왕께서도 그만두라는 유명(遺命)이 없었으니, 이제 와서 폐지할 수는 없다.”

연산군의 의지가 분명히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후에도 홍문관부제학 성세명, 예문관 봉교 이소 등은 불사(佛事)의 중단을 요구하였으며, 홍문관 관리 손주는 수륙재에 사용할 글을 지으라는 국왕의 명령을 거부하였다. 이후 이 일은 일파만파(一波萬波)로 확대되어, 해가 바뀌고 젊은 성균관 유생들마저 요즘으로 말하면 집단 등교거부로 공부를 버리고 집단상소하는 움직임까지 보이게 되었다. 물론 이를 반대한 경우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당시 정승의 지위에 있던 노사신은 연산군을 편들고 나섰다.

“일에는 늦출 것과 서두를 것이 있는데, 지금 재를 지내는 한 가지 일이 나라의 흥망(興亡)이 조석에 달린 중대한 일이라면 몰라도, 선왕을 위하여 재를 지내는 것은 선대왕(先大王)때 부터의 관습이니, 이 일을 가지고 불교를 숭상하는 것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곡위(哭位)에서 애달프신 이 때 할 일을 버리고 대궐에 모여서 논란만 하니, 신은 이는 매우 잘못된 것이라 여기며, 큰 일 외에 이런 일은 반드시 논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주로 사림파들이 등용된 삼사(三司)는 자신들의 의견이 조금이라도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즉시 사직했다. 사직은 60~70번에서 1백 번까지 지속되기도 했다(1497년 6월 12일). 연산군도 이런 삼사의 행태에 큰 분노를 거듭 표명했지만, 그들은 좀처럼 제어되지 않았다. 스스로 인정했듯이 삼사는 연산군이 즉위한 이래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상소를 올렸고(1496년 3월14일), 사안에 따라 그 기간은 57일 동안 지속되기도 했다(1497년 4월25일).

훈구대신과 삼사의 갈등도 증폭되었다. 특히 대신들을 겨냥한 삼사의 탄핵이 매우 거칠어졌다. 이로써 연산군대 초반 국왕·대신·삼사의 상호관계는 명확해졌다. 국왕은 삼사의 강력한 언론활동을 가장 심각한 폐단인 능상(凌上:임금을 깔보다)으로 규정했고, 일부 대신들은 거기에 깊이 동조했다. 국왕은 삼사의 언론을 계속 불만스럽게 생각했고 강력히 경고했지만, 삼사는 훈구대신들을 극단적인 표현으로 탄핵했고, 갈등의 골은 깊어졌다.

- 4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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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구勳舊와 사림士林의 대립 2편

■ 훈구勳舊와 사림士林의 대립 2편

■ 훈구(勳舊)와 사림(士林)의 대립 2편

성종이 승하한 후 원자 융이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그가 연산군이다. 그의 어머니는 성종의 비(妃)에서 폐위당한 윤씨이다. 연산군이 새로 왕위에 올랐을 때 조정과 민간에서는 모두 ‘영명(英明)한 임금’이라 일컬었다. ‘영명한 군주’라는 평판을 듣던 연산군이 즉위식보다 더 먼저 거쳐야 할 가장 큰 관문이 바로 선왕(先王)의 장례를 주관하는 일이었다. 선왕 시신의 염습(殮襲:관에 안치함)을 마치고 대신들과 장례절차를 논의하다가 연산군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버렸다. 그는 부왕의 장례를 주관하면서 처음으로 정치적 시험대에 오르게 되었다. 그동안 관습적으로 내려오던 불교식 장례 절차를 놓고 신료들과 논쟁을 벌인 것이었다.

조선은 유교 국가이므로 당연히 이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성종의 장례를 불교식 관례대로 진행하는 문제에 대해 처음으로 의의를 제기한 사람은 당대 대문호(文豪)로 알려진 예조판서(禮를 주관하는 부서) 성현이었다.

성현은 성종 승하 직후,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인 세자 융에게 말하기를, “조정의 구례(舊例)로는 국상(國恤) 칠칠일(七七日) 및 소대상(小大祥)에는 모두 절에서 재(齋)를 지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문(禮文)에는 없는 것으로, 유학의 가르침에도 어긋나는 것입니다. 대행대왕(大行大王:임금이나 왕비가 죽은 뒤, 시호를 정하기 전 칭호, 죽은 성종을 가르킴)께서도 불교를 믿지 않으셨는데, 이번에는 어찌 하오리까?”

이 말을 들은 세자는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내시 김효강을 왕비(성종의 계비:정현왕후)에게 보내 여쭈어 보기로 하였다. 그러자 왕비는 “대행대왕께서 불교를 좋아하지는 않으셨으나, 재를 지내지 말라는 유교(遺敎)가 없었으며, 또 그동안 선대(先代)에서도 다 행하셨으니, 이제 와서 폐지할 수는 없다.”

그리하여 성종의 장례식은 선대(先代)와 마찬가지로 불교식 장례절차를 진행하게 되었다. 이 일에 대해 《연산군일기》에서는 『세자가 이를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왕비에게 문의한 것이며, 왕비의 의견에 따라 시행한 것』이라고 되어있다. 그러나 과연 연산군은 스스로 결정하지 못해서 왕비의 의견을 물은 것일까? 이후에 전개되는 상황을 보면 연산군의 의지임이 명백히 나타난다.

-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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