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3일 수요일

궁녀宮女 1편

■ 궁녀宮女 1편

■ 궁녀(宮女) 1편

궁녀는 궁중에서 일하는 여성관리女官를 일컫는 말로서, 왕족을 제외한 궁중에 있는 모든 여인들이 이에 해당된다. 궁녀는 고대 사회부터 존재했지만, 고려시대 이후에는 궁중 생활의 규모가 커져 법으로 품계와 명칭을 정해서 운영되었다. 하지만, 고려시대의 궁녀는 명확한 제도를 알 수가 없고, 입궁 경위나 절차도 분명하지 않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태조6년 조준(趙浚)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규정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1428년(세종10년)에는 유교 이념을 바탕으로 궁내의 모든 여관(女官)들을 내명부(內命婦)로 품계·명칭·직위까지를 명시하게 했으며, 〈경국대전〉에서는 이를 수정·보완하여 정(正)·종(從)의 18관등으로 그 지위와 역할이 더욱 체계화되었다. 정5품의 상궁(尙宮)에서 종9품인 주변궁(奏變宮)까지의 궁관으로서 궁중의 살림살이와 왕의 가족들에 대한 시종의 업무를 맡았는데, 후궁(後宮)이 될 경우는 정1품 빈(嬪)부터 종4품 숙원(淑媛)의 품계가 내려진다.

일반적으로 궁녀는 정5품에서 종9품의 내명부 궁관(宮官)으로, 각자의 업무를 담당하는 여관(女官)을 가리키지만, 넓은 의미의 궁녀에는 비자, 무수리, 각심이, 방자, 의녀 등 궁중에서 일하는 여성들을 모두 포함한다. 이들은 대개 상궁, 나인의 시중을 들거나 궐내의 하찮은 일을 하였다. 이들은 품계도 받지 못했고 대우 또한 일반 궁녀들에 비해 매우 좋지 않았다.

수사(水賜)라고도 불린 무수리는 불때기와 물긷기 등의 막일을 담당하는 여성들로 궁궐 안에 머무르지 않고 출퇴근하였다. 각심이는 상궁이나 나인의 처소에서 막일을 하던 여성들로 방자(房子)·비자(婢子)라고도 했다. 이들은 무수리와 달리 궁궐에 머무르며 생활했다. 의녀(醫女)는 궁중의 의약을 맡아보던 내의원(內醫院)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간단한 진맥이나 침술 등을 배웠으며 출산 때에는 조산부 역할을 했다. 조선 시대에는 궁녀가 5백~6백 명쯤 있었고, 달마다 직급에 따라 쌀이나 옷감을 급료로 받았다. 그러니까 궁녀는 나라에서 월급을 받는 공무원이라고 할 수 있다.

궁녀의 신분적 등급은 견습나인(애기나인) → 나인 →상궁의 세 종류로 나뉘며, 그 세 종류 가운데에서도 입궁 햇수와 소속 부서에 따라 신분이나 대우에 차등이 있었다. 애기나인은 아직 정식 나인이 되지 않은 어린 견습나인이다. 지밀(至蜜:임금의 침실)과 침방(針房:바느질 하는 곳), 수방(繡房:수놓는 곳)의 애기나인은 머리카락을 두 가닥으로 갈라서 땋아 말아 올린 생머리를 하였기에 ‘생각시’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견습나인은 무려 15년이나 궁중 법도, 한글, 천자문, 대학, 소학 등 다양한 교양을 익히면서 훈련을 받아야 나인이 될 수 있었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과 함께 역사 다시보기

봉이鳳伊 김선달 6편

■ 봉이鳳伊 김선달 6편

■ 봉이(鳳伊) 김선달 6편

10. 어느 날 김선달이 주막에 가서 외상술을 청했다. 주모는 식전에 외상술은 안 판다면서 거절했다. 주모가 식사하러 간 사이에 김선달이 하릴 없이 마당 끝에 쪼그려 앉아 있는데, 돼지 한 마리가 우리에서 빠져 나오더니 마당에 널어놓은 술밥을 먹으면서 더러운 발로 마구 헤집고 다녔다. 하지만 김선달은 돼지를 쫓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잠시 후 방에서 나온 주모가 깜짝 놀라 돼지를 붙잡아 우리에 집어넣은 다음 김선달에게 항의했다. “아니, 나리는 돼지가 술밥을 저 지경으로 만드는 걸 그냥 보고만 있었소?” 그러자 김선달은 멀뚱한 표정을 지으며 “나는 돼지가 돈내고 먹는 줄 알았지.” 라고 했다. 주모가 외상술을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김선달은 인간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복수를 한 것이다.

11. 봉이 김선달의 옆집에 장님이 한 명 살았다. 어느 날 김선달은 장님에게 목욕하러 가자면서 동네를 대여섯 바퀴를 빙빙 돈 다음, 오줌통에 큰 돌을 넣어 ‘첨벙’ 소리를 낸 다음 “내가 먼저 물속에 들어왔으니 당신도 빨리 들어오게.”라고 재촉했다. 장님이 멋모르고 옷을 벗고 첨벙 들어갔다가 오줌만 실컷 들이 마시게 되었다.

이처럼 김선달 설화는 기발한 재치와 지혜, 익살, 유머가 총동원된 일종의 풍자극인 것 같지만, 여러 일화를 통해 그의 이기심과 사회적 약자를 무시하고 괴롭히는 일면도 엿볼 수 있다. 김선달은 기득권자인 양반이나 그들과 결탁하여 큰돈을 번 부자를 목표로 삼기도 했지만, 무고한 서민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는 어느 누구든 이득을 취할 수 있는 존재라면 이용하였고, 만일 상대가 자신을 골탕 먹이려 하면 몇 배로 고스란히 갚아주었다. 이런 그에게서 시대를 앞서가는 민중의식이나 변혁의지는 결코 보이지 않으며, 그가 서민의 친구이거나 정의의 사도 또는 호탕한 풍류객으로도 결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김선달의 기발한 행각은 당대의 백성들에게 대리만족을 안겨주기도 했다. 물론 그가 행한 방법을 현실에서 시도한다면 성공 확률은 그리 높지 않을 것이고, 더구나 요즘 세상이라면 사기나 횡령죄에 해당할 것이 뻔하다. 이처럼 보통 사람들은 불가능한 일이기에 오히려 그의 활약상에 대한 기대감과 성취감이 배가되었을 수도 있다. 김선달 설화에는 무능한 선비를 조소하는 이야기도 많이 등장한다. 바야흐로 공고했던 신분제가 흔들리면서 사회가 급격하게 바뀌고 있는데, 여전히 공자 왈 맹자 왈 하면서 무위도식을 일삼고, 한겨울에 홑옷차림으로 벌벌 떨면서도 겻불조차 쬐지 않는 몰락한 양반들이 한심스러웠던 것이다. 김선달은 이런 선비들을 마음껏 조소하고 희롱하기도 했다.

"

김선달이 행한 여러 행동들은 사람들에게 어떤 교훈을 전해주려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남을 속이는 행위를 통해 통쾌함을 유발시키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러기에 김선달설화 가운데에는 《고금소총》류의 음담패설도 많이 있다. 등장인물도 팥죽장수, 순라꾼, 고을사또, 평양감사 등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았고, 누구든 속일 수 있고 누구든 바보로 만들 수도 있었다. 돈 한 푼 없이 한양으로 갔다가 물에 빠진 척해서, 건져준 나그네에게 오히려 보따리를 내놓으라고 한 일화는 물에 빠진 사람 구해줬더니 내 보따리 내놓으라 한다 는 속담의 유래가 됐다.

",

♣ 제공 : KIMSEM과 함께 역사 다시보기

봉이鳳伊 김선달 5편

■ 봉이鳳伊 김선달 5편

■ 봉이(鳳伊) 김선달 5편

5. 반대로 그가 한방 먹은 일화도 있다. 동문수학했던 옛 친구가 고을 사또가 되어 부임해 왔는데, 자신에게 인사를 하러 오지도 않는 것을 기분 나빠하여, 그 친구가 물갈이로 복통이 났다는 얘기를 듣자 쥐똥에 참기름 묻힌 것을 약이라고 속여서 그 친구에게 갖다 먹였다. 나중에 그 친구는 속았다는 걸 알고 국화주를 준비해 놨으니 같이 마시자고 김선달을 초대해서는 자기 오줌을 국화주라고 속여 김선달에게 먹여 복수를 제대로 했다고 한다.

6. 어느 한겨울밤에 산골짜기를 헤매다가 조난당할 위기에 처한 김선달이 간신히 불이 켜진 누추한 집을 발견하고 찾아가 늙은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아들에게 후한 대접을 받았다. 고향이 어딘지 밝히던 중 평양에 산다는 말에 늙은 아버지가 "그럼 혹시 김선달을 아시오?" 하고 묻는데, 알고 보니 이 아버지는 김선달의 팬이었던 것이다. 겨울이 지나가면 노부(老父)를 모시고 김선달을 뵈러 갈 예정이라는 효자 아들의 말을 듣고 낯이 붉어진 김선달이 자신의 신분을 밝히자, 아버지는 거의 칙사 대접하듯 자기가 캐낸 산삼주로 김선달을 대접하면서 그의 재미난 이야기를 청해 들으며 긴긴 밤을 재미나게 보냈다는 훈훈한 일화도 있다.

7. 한겨울에 얼어붙은 호수에다가 젖은 짚단을 잔뜩 깔아놓고 추수한 이후의 논인 것처럼 속여서 팔아먹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봄이 되어서 논을 산 사람이 다시 찾아와보니 논은 없고 웬 호수만 덩그러니 있었더라는 웃지 못할 이야기.

8. 한 번은 겨울이 다가오는데 장작이 부족하자, 김선달은 시장통에 나가 모든 장작 상인들을 죄다 만나고 다니면서 돈은 나중에 주기로 하고 장작을 자기 집에 가져오라고 시켰다. 상인들이 장작을 잔뜩 짊어지고 김선달의 집에 도착하자, 김선달은 "지금은 돈이 준비되지 않았으니 장작은 마당에 던져 놓고 내일 다시 오라" 고 시켰다. 다음 날 상인들이 돈을 받으러 오자, 김선달은 "돈을 구하지 못했으니 미안하지만 그냥 장작을 도로 가져가라" 고 말하자, 상인들은 어쩔 수 없이 자기 장작을 찾아 집어들고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상인들이 떠난 후에 장작이 상하고 부서져서 생긴 잔부스러기가 마당에 한가득 남아 있었고, 그걸 죄다 모아 겨울을 잘 날 수 있었다고 하는 믿을 수 없는 치사하고 야비한 일화도 있다.

9. 가게 주인이 팔다 남은 쉰 죽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중에 김선달이 판매를 도와주겠다고 자청했다. 이 때 시골 양반이 죽을 주문하자 김선달은 죽을 줄 때 "이 사람은 식초 맛을 모를 테니 초는 치지 말라"고 했다. 그 양반은 자신을 무시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나도 초맛은 아니까 초 좀 쳐오게\ 했다. 그러자, 김선달은 “죽에 초를 쳐서 먹는 건 서울 사람들 식성이오.” 라고 얘기하자, 그 손님은 "잔말 말고 초나 더 쳐오시오"라고 했다. 그리하여 나온 쉰죽은 쉬었던 데다가 초까지 쳤으니 맛이 오죽하랴. 그래도 시골 양반은 시골사람이라고 무시당하기 싫어서 “역시 죽은 초를 쳐야 제 맛이군” 이라고 말하면서 억지로 한 그릇을 다 비웠다고 하는데, 그 사람은 아마도 탈이 나도 단단히 났을 것이다.

- 6편에 계속

♣ 제공 : KIMSEM과 함께 역사 다시보기

봉이鳳伊 김선달 4편

■ 봉이鳳伊 김선달 4편

■ 봉이(鳳伊) 김선달 4편

봉이 김선달의 일화를 좀 더 살펴보자.

1. 평양 감사의 청으로 뇌물을 겸한 선물인 귀한 벼루(또는 고려청자)를 정승에게 대신 가져다준다. 그런데 아들의 장난으로 (주막에서 만난 기녀와 노는 중이라고 하기도 하고, 또는 가는 길에 술을 진탕 먹었다가 넘어졌다고도 하는 여러 버전이 있다) 벼루가 떨어져서 깨졌다. 이후 한양으로 간 김선달은 정승 집 문지기에게 일부러 시비를 건 다음에 그가 밀쳐서 넘어질 때 이미 깨진 벼루를 땅에 패대기쳐 박살을 내버린 다음 정승에게 벼루를 바치며 문지기 때문에 박살났다고 거짓말을 했다. 이것은 사기의 범주를 벗어나서 자해공갈에 가깝다. 그 후 문지기는 어떻게 됐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무사할 리가 없다. 어쨌든 그 정승은 문지기를 나무란 뒤, 평양감사에게 물건을 잘 받았다는 답변을 보냈다고 한다.

2. 나이든 노인을 상대로 한 사기극도 있었다. 김선달이 곡물을 파는 가게의 주인인 노인 앞에서 옷을 잡아당기며 "이게 뭐요?"라고 물어보니 노인이 "옷이오(오시오)." 라고 대답해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 다음 잣을 가리키며 "이게 뭐요?" 하니 노인은 "잣이오(자시오)" 라고 했다 하여 잣을 몇 웅큼이나 집어먹었다. 지금도 싼 편이 아니지만, 당시 잣은 꽤나 고가의 물건이었다. 노인은 당연히 값을 치룰 줄 알았지만 김선달은 다 먹은 다음, 노인에게 다시 머리의 갓을 가리키면서 "이게 뭐요?" 라고 물었다. 노인은 "갓이오(가시오)." 라고 대답했고, 김선달은 그 말을 듣고 그냥 가게를 나오다가 노인에게 멱살을 잡혔다. 결국 노인의 아들이 와서 자초지종을 물으니, 김선달은 아들에게 "주인장이 오라고 해서 왔고, 자시라고 해서 자셨고, 가시오라고 해서 갔는데 뭐가 잘못됐단 말이오." 라며 역정을 냈다. 정신이 오락가락할 나이인 아버지를 모신 아들은 아버지가 정신이 나간 줄 알고 김선달을 그냥 보내줬다. 고가의 식품을 무전취식했으면서 멀쩡한 노인을 치매노인으로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3. 잣을 실컷 먹은 김선달은 드디어 배탈이 났다. 급해진 나머지 한 대가댁에 가서 뒷간을 쓰자고 사정을 하니, 문지기가 텃세를 부리며 들여보내 주지 않았다. 결국 돈 5냥을 주고 뒤를 본 김선달은 본전 생각이 나서 하루 종일 뒷간에 앉아 있었다. 그 댁 주인마님이 돌아올 시간이 되자 애가 탄 문지기는, 결국 받은 5냥의 몇 배를 돌려주고서야 김선달을 쫓아낼 수 있었다고 한다. 또 다른 버전으로는 문지기가 아니라 집에 있던 마님이 돈을 받고 들여줬는데, 의심 많은 서방님이 돌아올 때가 되어 애가 타서 돈을 몇 배로 뜯겼다고 한다.

- 5편에 계속

♣ 제공 : KIMSEM과 함께 역사 다시보기

봉이鳳伊 김선달 3편

■봉이鳳伊 김선달 3편

■봉이(鳳伊) 김선달 3편

가장 유명한 일화로 대동강 물을 팔아먹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김선달은 어느 날 한양에서 욕심 많은 부자 상인이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실로 기상천외한 사기극을 연출한다. 김선달은 대동강가 나눗터에서 사대부집에 물을 길어다 주는 물장수들을 데리고 주막에 가서 얼큰하게 한잔을 사면서 “내일부터 물을 지고 갈 때마다 내게 한닢 씩 던져주게나” 하면서 동전 몇 닢씩을 물장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이튿날 의관을 정제하고 평양성 동문을 지나는 길목에서 의젓하게 앉아서 물장수들이 물을 지고 가면서 주는 엽전을 헛기침을 하면서 점잖게 받고 있었다. 엽전을 내지 못한 물장수가 선달로부터 호되게 야단을 맞기도 했다. 이를 본 한양 사람들은 대동강물이 선달 것인데 물장수들이 물 값을 내지 못하게 되자, 호되게 야단을 맞고 있는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사람들이 내일부터는 밀린 물 값까지 다 지불하여야 한다고 엽전준비에 야단이었다.

이를 지켜보던 한양 상인들은 이처럼 쉽게 돈을 버는 장사가 너무나 부러웠다. 그래서 그 강물을 사기 위해 김선달을 주막으로 모시게 된다. 술잔이 오가고 흥정이 시작되었다. 선달은 조상대대로 내려온 것이므로 조상님께 면목이 없어 못 팔겠다고 버티면서 이를 물려줄 자식이 없음을 한탄까지 하였다. 한양상인들은 집요하게 흥정을 했다. 처음에는 천냥부터 시작하여 결국 4천냥에 낙찰되었다. 4천냥이면 당시 황소 60마리를 살 수 있는 돈이었다. 선달은 못내 팔기가 아까운 듯 도장 찍기를 주저했다. 그러자 안달이 난 상인들이 졸라대면서 결국 계약이 체결되었다. 이쯤 되면 희대의 전문 사기꾼임에 틀림없다. 이후 상인들은 대동강 물세를 거두려다가 물을 퍼가던 사람들한테 몰매를 맞았다고 전해진다.

사기행위의 진수를 보여준 일명 ‘대동강 매매’ 사건으로 인해 김선달은 다른 설화의 주인공들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존재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황해도에서 전래되는 김선달설화에는 그가 대동강뿐만 아니라 대동강변의 오리 떼까지 팔아치웠다는 이야기도 있다.

김선달은 어수룩한 시골 부자에게 대동강에 있는 오리를 팔아먹기로 했다. 김선달은 겨울날 시골 부자를 대동강 변에 데려간 다음 물 위에서 놀고 있는 수천 마리의 오리를 가리키며 “저 오리들은 다 내가 기르고 있는데 길이 잘 들어서 내 말을 잘 듣는다.”라고 말했다. 이윽고 오리가 날아갈 만한 시간에 지팡이를 번쩍 드니 오리 떼가 일제히 하늘로 날아올랐다. 잠시 후 지팡이를 아래로 내리니 오리 떼가 모두 물가에 내려앉았다. 그러자 시골 부자는 감탄하면서 김선달에게 거금을 주고 오리 떼를 사들였다. 며칠 후 시골 부자가 대동강 변에 나와 보니 오리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이 놈들이 대체 어디로 갔을까?” 하면서 사방으로 찾으려 다녔고, 지금까지도 찾으러 다닌다나 어쩐다나.........

- 4편에 계속

♣ 제공 : KIMSEM과 함께 역사 다시보기

봉이鳳伊 김선달 2편

■ 봉이鳳伊 김선달 2편

■ 봉이(鳳伊) 김선달 2편

민간에서 전승되어 오던 김선달 설화가 처음으로 문헌으로 나타난 것은 1906년 황성신문에 연재된 한문소설 〈신단공안(神斷公案)〉의 네 번째 이야기에 나오는 김선달이라는 인물이 있다. 여기에서 그려낸 김선달은 평양 출신의 선비 김인홍(金仁鴻)이고, 호가 낭사(浪士)이다. 하지만 이것도 소설 상의 설정일 뿐이고, 실존 인물과는 거리가 멀다.

구전설화에서는 희대의 사기꾼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이 소설에서 김선달은 몰락양반 출신으로 큰 뜻을 품고 한양에 올라왔지만, 변변찮은 문벌과 서북인을 차별하는 풍조로 멸시 당하자, 권세가와 부유한 상인 등을 골탕 먹이고 당대의 정치현실을 비판하고 풍자하는 위트 넘치고 의식 있는 해학적(諧謔的)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선달은 과거에 급제하고도 벼슬을 얻지 못한 양반을 부르는 칭호이다. 사기꾼 기질이 강한 중년에 비해 젊었을 적에는 무술에 능한 청년이였기에 무과에 급제해 선달 호칭을 받았다 하기도 하고, 또 다른 설(說)로 학질에 걸린 척하고 시험을 봤다는 이야기도 있다. 내용인즉, 한여름에 김선달이 솜옷을 둘둘 껴입고 시험장에 나타나자 시험관이 의아하게 생각했다. 이에 학질에 걸렸다고 일러두자, 시험관이 병이 옮을까 무서워서 멀찍이 떨어져서 경전을 외우라고 했고, 무슨 말인지 잘 들리지 않았지만(김선달은 대충 아무렇게나 중얼거리고 있었다) 얼른 보내버려야겠다 싶어서 그냥 바로 합격시켰다는......???

이렇게 해서 초시(初試)에 합격했고, 이후 중앙의 유력자를 찾아가 적당히 뇌물(?)을 건네면서 말빨로 구워삶아 합격증을 샀다고도 한다. 아무튼 어느 쪽이든 제대로 시험을 본 것이 아님을 얘기하는 것 같다. 조선 후기에는 과거 응시자가 수만 명에 달했지만 관직은 제한적이었던 데다가, 세도정권의 매관매직이 성행하면서 재산이나 배경이 없는 급제자들은 평생 미관말직조차 얻지 못했다. 이런 사회상황을 비꼬는 설정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름 앞에 별호(別號)처럼 붙은 ‘봉이(鳳伊)’는 어떻게 얻어졌을까?

김선달이 장날에 시장 구경을 갔는데, 닭을 파는 가게 안에 유난히 큼직하고 빛깔이 좋은 닭 한 마리를 발견했다. 주인에게 저 봉황을 어디에서 얻었느냐고 묻자, 주인은 봉황이 아니라 장닭이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봉황은 실존하는 새가 아니라 상상의 새이다. 김선달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계속 묻자, 닭 장수는 처음에는 아니라고 하다가 김선달이 계속 봉황 같다며 값을 물어보자, 욕심이 생긴 주인은 마침내 봉황이 맞다고 말하고 비싼 값에 팔았다.

김선달은 그 장닭을 안고 관아로 달려가 희귀한 봉황을 구했다며 사또에게 바쳤다. 사또는 거짓임을 알고 화를 내며 볼기를 치자, 김선달은 자신은 닭장수에게 속았을 뿐이라고 항변했다. 관아에 끌려와 사또의 추궁을 받은 닭장수는 김선달에게 받은 닭값에 볼기 값까지 더하여 몇 배의 배상을 해주게 되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그를 ‘봉이(鳳伊) 김선달’이라고 불렀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과 함께 역사 다시보기

봉이鳳伊 김선달 1편

■ 봉이鳳伊 김선달 1편

■ 봉이(鳳伊) 김선달 1편

봉이 김선달은 실존한 인물일까? 아닐까? 수많은 일화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면서 실재 인물인 것으로 착각하기 쉽지만, 그는 구전설화 속의 인물이다. 조선 후기의 부패한 세상을 풍자하고 해학과 위트로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낸 인물인 것이다.

왜란(倭亂)과 호란(胡亂)이 전 국토를 휩쓸고 지나가 민생이 도탄에 빠진 뒤에도, 조정은 붕당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여전히 민생은 외면한 채, 당리당략(黨利黨略)을 위한 소모적인 논쟁만을 일삼고 있었다. 영조와 정조가 즉위하면서 조선은 제2의 중흥기라 일컬을 만큼 간신히 정치·경제가 안정되는 듯 했으나, 그 후 어리거나 준비 안 된 왕들이 줄줄이 즉위하면서 외척들이 날뛰면서 정권을 좌지우지(左之右之)하는 세도정치가 이루어졌다. 그래서 순조부터 철종 때까지 정치적 혼란과 민생파탄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지방에서는 탐관오리의 수탈에 견디다 못한 백성들이 야반도주하는 통에 유랑민(流浪民)이 속출했고, 학정에 저항하는 민란이 연이어 발생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회 현실을 풍자하고 정치를 비판하는 이야기들이 민간에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평양의 김선달, 서울의 정수동, 영일의 정만서, 영덕의 방학중 등이 그런 이야기의 주인공이었다. 즉, 당시의 정치와 사회상황이 비슷한 행적을 가진 풍자적 인물들의 설화를 탄생시켰고, 이상적인 사회와 미래를 갈구하는 민초들의 희망사항을 반영하는 인물들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었다.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봉이 김선달’도 그 시대가 만들어 낸 전설적 인물인 것이다.

하지만, ‘봉이 김선달’은 ‘홍길동’과 같이 정치인을 비판하고 서민들을 도우는 의로운 행동과는 좀 거리가 멀고, 기발한 착상과 허를 찌르는 행동으로 상대를 농락함으로써 금전적 이득을 취하여 일시적인 즐거움을 얻거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정도의 인물이다. 요즘 세상에 이런 인물이 있다면, ‘사기죄’로 형사처벌을 받을 만한 한마디로 희대의 사기꾼이다. 김선달의 경우는 상대를 농락하여 얻어진 이득은 거의 전적으로 자신에게만 돌아오지 다른 사람을 도운다든지 정의로운 일에 쓰이지 않는다는 것이 특징이다. 정의롭지 못한 상대를 골탕먹이고 한방 먹였다든지, 상대가 개과천선했다는 식의 이야기는 거의 없다. 오히려 이 과정에서 잘못 없이 피해를 보는 애꿎은 사람이 생기기도 했다.

평양을 중심으로 서북지역에서 발생한 김선달 설화는 각종 야담집과 입소문을 통해 조선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설화 속에서 김선달은 주로 한양 사람을 골탕 먹이는 경우가 많다. 조선 왕조 내내 정계에서 소외받았던 서북인들의 정서를 조금은 대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과 함께 역사 다시보기

◇ 목 디스크 예방을 위한 생활속 건강 수칙

◇ 목 디스크 예방을 위한 생활속 건강 수칙

◇ 목 디스크 예방을 위한 생활속 건강 수칙

1. 물건을 들 땐 양 손을 번갈아 사용하기

보통 사람들은 자신이 많이 쓰는 쪽으로만 물건을 들고 가방을 자주 메는데 이는 몸의 균형을 깨는 행동이다. 이런 습관이 쌓이면 목과 어깨에 부담을 주고 반복되면 자세가 흐트러져 근육의 피로감을 가져오고 목과 연결된 척추 전체가 비뚤어지는 결과를 가져올 수 도 있다. 따라서 무게가 많이 나가지 않은 작은 물건이나 가방이라도 양쪽 어깨에 번갈아 가며 메거나 들고 짐을 들 때도 양쪽 손에 번갈아 드는 습관을 갖도록 한다.

2. 바르게 앉고 50분마다 자리에 일어나 휴식 취하기

의자에 앉을 때 엉덩이를 의자 깊숙이 넣고 몸을 살짝 뒤로 젖혀 엉덩이부터 어깨 끝까지 등 전체가 등받이에 닿게 해 체중을 분산시켜야 한다. 의자에 살짝 엉덩이를 걸치듯 앉거나, 허리를 너무 꼿꼿이 세우고 앉으면 목과 허리에 부담을 주게 된다. 바른 자세로 앉아 있더라도 하루 종일 앉아 있는 것은 척추 건강에 좋지 않다.

50분 마다 일어나 5분씩 몸을 움직이고 쉬게 하는 것이 몸에 무리가 없다. 필요하다면 목과 허리를 이완 시켜주는 스트레칭을 하거나 허리를 좌우로 돌리거나 실내를 가볍게 한 바퀴 도는 것이 뼈와 근육의 만성피로를 예방하는 데 효과적이다.

3. 몸을 항상 따뜻하게 유지하기

찬물로 샤워를 하거나 머리 감기, 머리를 감은 후 머리카락을 말리지 않고 외출하는 등의 행동은 찬 기운이 근육을 수축시켜 결림 증상이나 통증을 유발할 수 있으니 삼가야 한다. 더운 여름이더라도 실내는 냉방시설로 온도가 낮기 때문에 시원함을 넘어 추위를 느낄 때도 있다. 이를 대비해 얇은 긴 팔 상의를 입거나 스카프를 두르면 목과 어깨를 냉기로부터 보호할 수 있다.

4. ‘걷기’운동으로 지키는 목 건강

걷기는 목뿐만 아니라 척추 건강에도 가장 좋은 운동 중 하나이다. 몸 전체를 골고루 무리 없이 움직이게 할 뿐 아니라 혈액순환을 원활히 해주고 심폐기능과 장 기능 강화, 무엇보다 척추 균형을 잡아주고 지구력을 향상시키는 장점이 있다.

매일 30분간 1분에 100m 걷는 속도로 운동을 지속하면 최상의 효과를 볼 수 있다. 운동 초기에는 몸에 무리가 되지 않도록 1분씩 30회로 나누어 걷는 것이 좋다. 걷기 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걷는 자세이다.

걸을 때 패션모델이 된 듯 어깨를 쭉 펴고 복근에 힘을 준 다음 보폭을 어깨 넓이 이상으로 넓게 해 걸으면 약해진 근육과 인대가 튼튼해지고 구부정한 자세 교정에도 효과가 있다. 시선은 멀리 바라보되 15도 정도 고개를 살짝 들어 위쪽을 바라보면서 걷고 가슴과 어깨는 쫙 펴도록 한다.

5. 운전 중 일어날 충격에 대비하기

운전 중 목 디스크가 증상이 나타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추돌사고로 인해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가 앞으로 튕겨나가면서 목 디스크가 발생하기도 하고, 긴장한 상태에서 운전을 하다가 고개를 돌리면서 목뼈에 무리가 가는 경우도 있다. 과속 방지턱을 통과할 때, 비포장도로를 빠른 속도로 달릴 때, 후진할 때 모두 디스크와 목뼈에 충격을 줄 수 있다.

의자 등받이 각도는 110~120도 정도로 뒤로 약간 젖힌 상태를 유지하면서 엉덩이와 등을 의자에 붙여 앉고 무릎은 60도 정도 굽히는 것이 좋다. 목 받침대는 양쪽 귀 뒤에 오도록 하고 목 받침대와 머리의 거리는 5cm이내로 유지되어야 한다.

6. 잘 때도 바른 자세로 자기

인생을 통틀어 약 3분 1 가량이 수면시간으로 쓰이는 만큼 잠은 낮 동안 쌓인 피로를 회복하고 틀어진 신체 골격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휴식 시간인 만큼 자는 자세가 건강을 지키는 중요한 열쇠 중에 하나이다. 잠자는 모습은 사람마다 각기 다른데 아침에 일어나기 전 자신의 자는 자세가 어떤지 살펴보며 일주일간 가장 많은 횟수를 기록한 자세가 자신의 잠자는 타입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자신의 수면 습관이 파악되면 바른 수면자세와 비교했을 때 무엇이 문제인지 점검해봐야 한다.

척추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편안하게 이완되도록 해서는 천정을 바라보고 똑바로 자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가급적이면 이 자세를 유지하지만 하루아침에 수면 자세를 고치는 것은 어려우므로 최대한 척추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보완하면서 자세를 교정하도록 한다.

예를 들어 옆으로 자는 경우 어깨와 목 사이만큼 베개 높이를 높여 베고, 견갑골 즉 날개죽지뼈가 눌리지 않도록 뒤로 빼고 자도록 한다. 엎드려서 자는 습관이 있다면 큰 인형이나 죽부인을 끼고 자면 척추를 편안하게 이완할 수 있다. 가족이라 해도 바닥 요와 이불은 따로 사용하고 팔베개를 해줄 경우 잠이 들면 바로 팔을 빼고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도록 수면 습관을 교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7. 목 건강의 안 좋은행위

가끔 길을 가다 보면 아이를 무등 태워 다니는 사람들을 볼 수 있는데 무등을 태우면 목뼈가 앞으로 굽게 되고, 아이 체중이 목과 어깨에 실리면서 디스크 탈출이 될 가능성도 높아진다.

놀이동산의 인기 0순위인 롤러코스터도 짜릿한 쾌감을 주긴 하지만 급강하를 반복하면서 척추 사이 디스크에 평소 몇 배 압력이 가해지기 때문에 위험한 놀이기구이다. 평소 무심코 하는 어깨동무도 몸의 균형이 한쪽으로 치우쳐 척추에 무리를 주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다.

불 켜고 자면 몸에 벌어지는 일

불 켜고 자면 몸에 벌어지는 일

불 켜고 자면 몸에 벌어지는 일

자신도 모르게 잠에 들어 불 끄는 걸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밤새 환하게 불을 켜고 자면 몸에 안 좋은 변화가 생길 수 있어 주의해야 한다.

특히 성장기 어린이를 둔 가정이라면 주의해야 한다. 수면 환경이 밝으면 멜라토닌 생성이 억제돼 성장호르몬이 잘 나오지 않는다. 취침 전 1시간 동안 밝은 빛에 노출되면 멜라토닌 생성이 억제되고, 불을 끄고 나서도 그 상태가 약 1시간 동안 지속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밤중 성장호르몬이 원활히 분비돼야 면역력, 기억력, 사고력 등이 향상된다.

밝은 수면 환경은 비만을 유발하기도 한다. 밝은 곳에서 자는 사람일수록 체질량지수(BMI)와 허리 및 엉덩이둘레 수치가 높았다. 조명뿐 아니라 TV를 비롯한 각종 전자기기에 의한 빛도 유사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확인됐다. 당뇨병의 발병 위험도 커진다.

불을 켜놓은 상태로 자는 사람은 불을 모두 끄고 자는 사람에 비해 멜라토닌 수치가 50% 이상 떨어지는데, 멜라토닌은 혈압 및 체온을 낮추는 데도 관여한다. 미국수면의학회의 연구 결과, 수면 중 희미한 빛에만 노출돼도 인슐린 저항성이 증가하면서 제2형 당뇨병의 발병률이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뇌 기능도 저하될 수 있다. 젊은 남성 20명을 대상으로 실험을 진행한 바 있다. 자는 동안 10lux 정도의 빛에 노출되게끔 했는데, 10lux는 물체를 겨우 인식할 정도의 약한 빛이다.

불빛은 다음날 뇌 하부 전두엽에 악영향을 미쳤으며 이는 작업기억능력 저하로 이어졌다. 작업기억능력은 인지능력과 집중력, 감정 조절, 식욕 조절 등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 오래 사는 사람들은 '이렇게' 먹는다

○ 오래 사는 사람들은 이렇게 먹는다

"

○ 오래 사는 사람들은 이렇게 먹는다

",

오래 살고 싶다면 식사 습관부터 바꿔 보자. 기상 후 12시간 이내로 식사를 제한하고, 콩과 견과류 등 식물성 단백질을 섭취하는 것이 수명 연장에 도움됐다. 식단을 구성하는 음식 및 영양소와 수명의 상관관계를 조사해 장수하는 사람들의 식단에 공통된 특성을 몇 가지 추려냈다.

☞ 기상 후 11~12시간 내로만 식사하고 그 외엔 공복 유지

하루 중 일정 시간대에만 음식을 섭취하고 나머지 시간엔 빈속을 유지하면 지방이 줄어든다. 연구진이 검토한 한 논문에 따르면, 비만인 중년 여성들이 공복 16시간 후 8시간 내 식사하는 패턴을 3개월간 유지한 결과, 식사 시간에 제한을 두지 않은 집단보다 체중이 최대 4kg 감소했다. 식사 시간을 제한한 집단은 이외에도 자신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으로 변화해 삶의 질이 향상됐으며, 심혈관계 질환은 최대 12% 감소했다.

식사 시간을 제한하면 살이 빠지는 이유는 공복으로 있는 동안 열량 섭취 없이 에너지만 소모하기 때문이다. 살이 빠지려면 섭취한 열량보다 소비하는 에너지가 커야 한다. 일과 중 특정 시간대에만 음식을 먹고 나머지 시간에 음식 섭취를 제한한다면, 열량 섭취 없이 에너지만 소모하는 시간대가 안정적으로 확보돼 체중 감소로 이어진다.

다만, 약 12시간 공복 후 11~12시간 이내에 식사하는 패턴이 현재로서는 최선이다. 식사 시간을 제한하면 체중이 줄어든다는 게 입증됐지만, 공복 시간과 식사 시간의 비율을 어떻게 조정하는 게 보편적으로 안전한지에 대해서는 추가 연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

☞ 장년층은 단백질 하루 권장량만큼 식물성으로 섭취

",

탄수화물 식품을 줄이는 대신 단백질 식품을 더 먹어 하루에 필요한 총 열량을 섭취하는 사람도 있지만, 장년(長年)에겐 이것이 오히려 독이다. 특히 50~65세 장년층이 하루 총열량의 20% 이상을 단백질로 섭취하는 경우 사망률이 75% 증가하고, 암으로 인한 사망률은 4배, 당뇨병으로 인한 사망률은 5배 증가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었다.

단백질 하루 섭취 권장량보다 적지도 많지도 않은 양을 동물성 급원이 아닌 ▲콩 ▲견과류 등 식물성 급원에서 섭취하기를 권장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몸무게 1kg당 단백질 약 0.8g을 섭취하도록 권한다. 몸무게가 60kg인 사람이라면 하루에 단백질 약 48g을 섭취하는 게 적당하단 뜻이다.

평균수명이 긴 지역의 주민은 동물성 식품을 적게 섭취하는 경향이 있었다. 100세 이상 장수하는 사람들이 많은 일본 오키나와, 이탈리아 사르디니아, 미국 로마 린다 주민의 식습관을 조사한 결과, 오키나와의 전통적 식단에서 동물성 식품이 차지하는 비율은 약 1%에 불과했으며, 사르디니아 및 로마 린다 주민들 역시 고개나 동물성 식품 섭취 빈도가 현저히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하루 권장 섭취량만큼의 단백질을 식물성 단백질로 섭취할 경우, 콩과 식물의 섭취량이 늘어나 수명이 연장된다고 추정했다. 식물성 식품을 섭취하면 체내 염증 수치가 낮아져 다양한 질병을 예방할 수 있다고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