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8일 월요일

아침을 바꾸는 11가지 사소한 행동

아침을 바꾸는 11가지 사소한 행동

아침을 바꾸는 11가지 사소한 행동

1. 아침은 밤에 시작한다

많은 사람들이 아침을 우습게 생각한다.

밤에 늦게까지 일해도, 늦게까지 놀아도, 늦게까지 술을 마셔도 아침이 온전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천만의 말씀이다. 이미 전날 밤에 다음날 아침이 결정된다.

성공적으로 하루를 시작하려면 당신의 밤 생활부터 관리해야 한다.

2. 일찍 일어난다

늦게 일어나 허둥지둥 회사로 달려 가야 한다면 그 날 하루는 이미 망친 것이다.

일하러 나가지 않는다 해도 늦게 일어나면 늦게 일어난 만큼 하루를 손해본 것이다.

밤에 늦게 자서 시간을 보충하면 된다고 하지만 대개 저녁 시간은 온전한 자기 시간으로 만들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다.

아침보다는 저녁 때 약속이 많아 저녁은 사교의 시간이 되는 경향이 있다.

3. 아침의 일과를 정해진 순서에 따라 반복하라

아침에 일어나 매일 같은 일을 같은 순서에 따라 반복하라.

아침에 하면 좋은 일들을 일련의 습관처럼 만들어 몸에 배게 하면 아침이 더욱 여유있고 알찬 시간이 된다.

4. 스트레칭을 한다

몸은 일어났지만 아직 완전히 깨어난 것이 아니다.

몸을 쭉쭉 펴고 목과 허리, 어깨를 돌려 주면서 몸 하나 하나를 깨우자.

아침의 스트레칭은 몸을 피어나게 해준다.

5. 명상한다

몸이 깨어났다면 이제 머리를 깨울 시간이다.

눈을 감고 멍하니 내 마음을 바라보자.

무엇인가를 생각하려 하지 말고 그저 멍하니 마음과 정신을 비워 있는 그대로 깨어나게 기다린다.

명상을 하면 마음이 당신의 충성스러운 종으로 길들여져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함부로 날뛰지 않게 된다.

6. 기록한다

이젠 머리 속에 떠오르는 일들을 자유롭게 기록해본다.

그날 해야 할 일도 좋고 그 순간 느끼는 감정도 좋다.

5분간 마음 가는대로, 뭐든 기록해보면 하루가 바뀔 것이다.

7. 집을 정리한다

주위 환경은 당신의 마음과 같다.

집을 깨끗하게 정리하다 보면 마음까지 청소된다.

이른 아침부터 전기청소기를 돌리고 걸레질을 할 필요는 없다.

단지 버릴 것은 버리고 흩어져 있는 물건은 제자리에 갖다 놓아 시선을 깨끗하게 비우는 것만으로도 효과가 있다.

8. 사랑하는 사람을 안아준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감정을 적절한 상태로 유지하려면 매일 8번의 포옹이 필요하다고 한다.

아침에 사랑하는 사람을 안아주면 에너지가 온 몸에 퍼진다.

꼭 사람이 아니더라도 개나 고양이 같은 반려동물이라도 안아주면 하루를 기분 좋게 열 수 있다.

9. 샤워한다

아침 샤워는 게으름을 털쳐 버리게 해준다.

일하러 나가지 않는다 해도 일단 샤워하고 옷을 갖춰 입으면 나태해지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10. 그날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3가지 장면을 그려본다

그날 경험하고 싶은 순간 3가지를 상상해보라.

구체적으로 장면을 그려가며 떠올려 보라.

머리 속에 그렸던 그 일이 종종 실제 그대로 일어난다.

11. 누군에게든 감사하다고 말한다

누구든 아침에 만나는 사람에게 감사하다고 말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아침에 특별히 만날 사람이 없다면 누구에게든 감사 편지를 써보자.

이 편지는 굳이 상대방이 정해져 있을 필요도 없고 반드시 부칠 필요도 없다.

감사 편지는 자기 자신에게 쓸 수도 있고 세상을 떠난 누군가에게 쓸 수 있다.

아침에 꿀물을 마셔야 하는 이유 9가지

아침에 꿀물을 마셔야 하는 이유 9가지

아침에 꿀물을 마셔야 하는 이유 9가지

01. 체중 감량 효과

꿀물을 마시는 것은 음료의 단맛에도 불구하고 체중 감량에 도움이 됩니다. 꿀의 천연 설탕은 청량음료에 사용되는 가공된 백설탕이나 옥수수 시럽보다 훨씬 건강하며 칼로리의 건강한 원천입니다. 청량 음료를 꿀물로 대체하면 밤새는 아니지만 차이점을 볼 수 있습니다.

02. 건강한 배변 유지

어떤 사람들은 이 주제에 대해 부끄러워하지만 논쟁에 부끄러운 점은 없습니다. 하루에 1잔의 꿀물은 소화 기관을 도와 배변을 규칙적으로 유지해줍니다. 꿀의 항박테리아 성질은 복통과 소화 불량을 예방하고 몸속 위장기관을 강화하도록 도와줍니다.

03. 면역 체계 강화

꿀은 천연 항균 물질로 효소, 비타민 및 미네랄이 풍부한데요. 특히 유기농 꿀이 우리 몸을 세균으로부터 보호합니다. 몇몇 연구에서 마누카꿀, 뉴질랜드 공장에서 만든 꿀 등이 심지어 항생제 내성 박테리아를 죽이고 헬리코박터균을 위한 자연적 치료로 사용될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04. 알레르기 증상 감소

연구에 따르면 국내산 꿀을 먹으면 신체가 지방화된 꽃가루에 익숙해져서 알레르기 증상을 줄이는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계절성 알레르기가 있는 경우 토종꿀을 먹으며 물 한 컵과 섭취하세요.

05. 아픈 목 치료

어르신들은 모든 꿀이 인후염과 기침에 완벽한 치료법이라고 알려줄 것 입니다. 꿀물을 마시면 식도 주위에 코팅이 형성되어 기침과 통증을 진정시켜 목구멍이 부드럽고 쾌적한 느낌을 줍니다. 얼마전 나혼자산다에서 헨리가 꿀을 먹으면 성대에 좋다며 강조한 적이 있는데요. 이는 사실을 기반으로 한 정보입니다.

06. 건강한 에너지 활력 증가

가벼운 탈수증 조차도 피로감을 느끼게 할 수 있으므로 물과 꿀이 당신의 에너지 수준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상상해보세요. 커피와 달리 에너지 활력은 가라 앉지 않습니다. 대신, 몸은 오랜 기간 동안 활력을 유지합니다.

07. 해독작용

꿀물은 항균성 뿐 아니라 결장을 도우면서 몸에서 독소를 제거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몸을 정기적으로 해독하면 기분이 나아지고 감염을 예방하는데 도움이 되는데요. 해독을 높이려면 갓 짜낸 레몬을 꿀물에 넣으세요. 레몬은 항박테리아 성질을 포함하고 이뇨 작용을 하며 간 기능을 돕습니다.

08. 건강한 마음 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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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꿀물은 좋은 콜레스테롤 수치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됩니다. 또한 몸이 심장 및 심장 혈관계에 압력을 가하는 스트레스 호르몬을 생성하는 것을 방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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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팽만감 감소

팽만감이 들면서 가스가 흐르는 느낌이라면 꿀물 한잔을 마시세요. 몸속 가스를 중화시키면서 팽만감을 줄여주는데 도움이 됩니다. 특히 과식을 한 후에 마시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김구 암살의 진실 5편

■ 김구 암살의 진실 5편

■ 김구 암살의 진실 5편

1981년 12월 17일 안두희는 "백범 암살 진상에는 더욱 복잡한 사연이 있다. 그래서 진상을 폭로하면 엄청난 사회적 파문이 일 것이다.(중앙일보:1981.12.18.)“ 라며 증언한 바 있다. 또한, 세간의 눈을 피해 살던 안두희는 죽기 전인 1989년 병든 몸으로 침대에 누운 채 TV에 출연해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암살의 배후에 대한 질문에 안두희는 “조금 더 마음 놓고 말할 수 있는 세월이 되어야 이야기할 수 있다”라며 아직도 건재한 그 배후 세력에 대해서 끝까지 침묵을 지켰다.

부족하나마 끈질기게 끌어낸 안두희의 단편적 증언을 종합해 보면, 백범 암살사건은 안두희에 의한 우발적 단독범행이 아니라 면밀하게 준비, 모의되고 조직적으로 역할 분담된 정권적 차원의 범죄였다. 안두희는 거대한 조직과 역할에 비추어 볼 때 일개 하수인에 불과하였다. 정권적 차원의 비호를 받았지만, 그 일차적 배후는 군부였다. 이승만이 직접적인 지령을 하였다는 증거는 없으나 사건의 뒤처리에 개입하였던 것은 충분히 짐작된다. 암살 사건 이후 안두희의 행적과 군부의 보호 조치가 이승만의 묵인 없이는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건에 대해 도덕적·정치적 책임을 져야 하는 위치에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사전개입을 하거나 암살을 지시했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없을 뿐이다. 미국의 관련 여부에 대해서도 미국이 암살사건에 대해 상당한 정보와 지식을 갖고 있었지만, 암살사건에 직접 개입했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운 결론이다.

김구 암살사건은, 김구가 친일청산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왔다는 점에서, 1949년 6월 전후에 일어난 국회프락치사건이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습격사건 등 정부 내 친일세력이 친일청산에 앞장선 반대세력을 물리적으로 탄압하고자 했던 일련의 사건들과 같은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당시 김구가 정계에 복귀할 가능성이 있었다는 점에서, 정권 차원에서 가장 위협적인 정치적 경쟁자를 제거하는 동시에, 김구와 한국독립당을 친공세력으로 몰아붙임으로써 정권의 기반인 극우반공체제를 강화하려 했던 조치였다고 추측할 수 있다.

안두희의 시신은 화장되어 한강에 뿌려졌다. 이승만 정권과의 결탁 의혹과 자세한 배후 등에 대해서는 당사자인 안두희가 확실한 증언을 하지 않은 채 사망하면서 이 의문은 끝내 미해결 과제로 남게 되었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김구 암살의 진실 4편

■ 김구 암살의 진실 4편

■ 김구 암살의 진실 4편

권중희씨의 안두희에 대한 추적 및 응징은 안두희가 부인과 자녀를 모두 미국에 보내고 서울 가락동의 한 아파트에서 안영준이라는 가명으로 필사적인 은둔생활을 하며 외롭게 숨어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1983년 본격화되었다. 1987년 3월 28일 그를 알아본 「민족정기구현회장」 권중희씨는 서울 마포구청 앞에서 몽둥이로 그를 폭행했다. 병원에 실려가 치료를 받던 안두희는 언론과 세인들의 관심이 쏟아지자 병원에서 몰래 도망쳐 다시 몸을 숨겼다.

1992년 2월에 다시 안두희를 찾아낸 권씨는 안두희를 강제로 백범 묘소에 참배케하였고, 같은 해 9월에는 안두희를 납치해 경기도 가평의 한 농장에 감금해 놓고 동아일보 기자와 함께 사건진상을 캐물었다. 이때 안두희는 중대한 고백을 했다. 안두희는 범행 직전 이승만 대통령을 만났고, 김창룡으로부터 김구 살해를 지시 받았다고 증언했다. 이 증언은 큰 화제가 되었으나, 증언의 세부 내용이 번복되거나 내용의 진위가 의심되는 부분들이 있어 논란이 되었다.

역사의 심판은 박기서(1950년~ )씨에게로 넘어갔다. 1996년 10월 23일 경기도 부천에서 시내버스 기사로 일하던 박기서씨는 백범 김구 암살범인 안두희를 처단하기로 결심한 후, 부천시장의 그릇가게에서 홍두깨(40cm크기의 몽둥이)를 4천원 주고 샀다. 홍두깨에는 ‘정의봉(正義棒)’이라는 글씨를 직접 크게 썼다. 같은 날 오전 11시 30분 인천광역시 중구 신흥동에 있는 안두희가 사는 아파트에 들어가 안두희와 같이 살고 있던 부인을 묶어두고 안두희에게는 장난감 권총을 겨누며 두 손을 묶고, 정의봉으로 사정없이 내려쳐 때려 죽였다.

박기서씨는 안두희가 숨진 것을 확인하고 곧바로 성당에 가서 고해성사를 한 뒤 경찰에 자수했다. 그는 범행동기에 대해 자신은 학창시절부터 김구를 존경해 왔고 1995년 초 『백범일지』를 읽은 뒤 백범의 유지를 이어야겠다고 결심했으며, 권중희가 쓴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라는 책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고 진술했다. 박씨가 언론에 밝힌 안두희 살인의 동기는 순전히 애국심과 백범에 대한 존경심이었다. 그는 경찰에 자수한 직후 “의로운 일을 했으니 후회라지 않는다”라고 했다. 그리고 당시 기자들에게 “나는 비록 배운 것은 없으나, 최소한 민족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인간쓰레기 하나를 처단하는 것이다.”라고 얘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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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행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사회 각계 인사들은 「백범 김구 암살범 안두희 처단 박기서 의사 석방 대책위원회」를 조직하여 9,200명이 서명한 탄원서를 인천지방법원에 제출하는 등 구명 운동을 펼쳤다. 시민들은 그의 자택에 격려금과 위로 편지들을 보내기도 했다. 1997년 3월 검찰은 징역 8년을 구형하였으며, 4월 인천지법은 정황을 참작하여 살인죄 최소형량인 징역 5년을 선고했다. 이후 항소심에서 징역 3년으로 형량이 감형되었고, 1997년 11월 대법원 상고심에서 징역 3년이 확정되었다. 재판부는 박씨의 범행 동기는 주관적으로는 정당성을 가지고 있으나, 법질서 전체 관점에서는 용인될 정당성을 가진다고 볼 수 없다.라며 형량 확정의 취지를 밝혔다. 박기서는 1998년 3월 13일, 1년 3개월 만에 정부의 대사면 때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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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홍도에서 본 꽃입니다. 수줍은듯 보일락말락 피어있네요. 무슨 꽃일까요?

홍도에서 본 꽃입니다. 수줍은듯 보일락말락 피어있네요. 무슨 꽃일까요?

홍도에서 본 꽃입니다. 수줍은듯 보일락말락 피어있네요. 무슨 꽃일까요?

김구 암살의 진실 3편

■ 김구 암살의 진실 3편

■ 김구 암살의 진실 3편

1960년 4·19혁명 직후인 6월 26일 결성된 「백범김구선생 시해진상규명위원회」는 10여 개월의 추적 끝에 1961년 4월 18일 안두희를 붙잡아 김구 암살의 배후를 자백 받고 본인의 요청에 의해 검찰에 인계하였다. 하지만,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의 원칙에 따라 형사처벌 불가의 판정을 받았다. 또한 테러당할 우려가 있으니 당국에서 보호조치를 하기로 결정되었으며, 1961년 5·16군사정변 이후에 귀가 조치되었다.

하지만, 안두희에 대한 응징은 계속되었다. 가장 먼저 응징을 다짐하고 이를 행동에 옮긴 사람은 곽태영씨다. 곽씨가 백범 암살범을 응징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그의 나이 19세 때였다. 곽씨는 “고향인 김제에서 서울로 올라와 고등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효창공원에 있는 백범 묘소에 참배를 갔다. 그 때 나는 10년 안에 어떤 일이 있어도 암살의 진상을 밝히고 안두희를 처치해 한을 풀어드리겠다고 선생님께 다짐했다”라고 그 때를 회상했다.

곽씨가 응징의 의지를 실천에 옮긴 것은, 안씨를 처단하겠다고 맹세했던 ‘10년 기한’의 마지막 해인 1965년 12월이었다. 당시 안두희는 강원도 양구에서 ‘신의기업사’라는 군납회사를 운영해 도내 납세 실적 1~2위를 다툴 정도로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행상을 가장해 양구에 잠입한 곽씨는 며칠 동안 안씨 집 주변을 배회하며 치밀하게 기회를 엿본 끝에 12월 22일 ‘거사’를 결행했다. 아침 9시쯤 안씨 집에 침입하여 세수하던 안씨와 격투를 벌인 끝에, 그의 목덜미를 칼로 찌르고 마당에 있던 돌로 머리를 내리쳤다.

안씨는 이 사건으로 뇌수술을 세 번이나 한 끝에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이듬해 2월 곽씨는 춘천지법에서 재판을 받았는데, 1심에서 5년 실형을 언도 받았다가 2심에서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고 1966년 7월30일 풀려났다.

이 사건이 잊혀갈 무렵, 백범 암살에 대한 진상 규명 문제를 다시 사회적 관심사로 끌어올리며 민족반역자 안두희 응징의 바톤을 이어받은 사람은 권중희씨(1936-2007)다. 권중희씨가 안두희를 응징할 결심을 하게 된 것은 안두희가 미국으로 도피하기 위해 은밀히 여권을 발급 받았다는 신문 기사가 보도된 1981년 12월 즈음이었다. “중학교 때 존경하던 백범 선생 암살범이 안두희라는 소리를 듣고 마음 한구석에서 응징의 칼을 갈아왔다”는 권씨는 이 소식을 듣자마자 안두희를 붙잡아 암살의 진상을 자백하게 하고, 그에게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실된 사죄를 받아내겠다고 다짐했다.

- 4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김구 암살의 진실 2편

■ 김구 암살의 진실 2편

■ 김구 암살의 진실 2편

안두희는 해방 후 서북청년회 단원으로 활동하다가 육군사관학교 8기로 입교했다. 포병장교로 임관된 안두희는 1949년 6월 26일, 권총을 몸에 숨기고 김구가 기거하던 경교장을 방문했다. 서재에서 붓글씨를 쓰고 있던 김구는 아무런 대비 없이 안두희가 쏜 총에 맞아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백범 김구의 암살 배후에 대해서는 이승만이나 미국 OSS, 김창룡 등 여러 설(說)이 있지만 아직까지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놀랍게도 사건과 관련된 공식적인 기록이 현재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안두희의 심문기록은 물론 재판기록조차도 남아있지 않다. 이승만 정권은 민간과 군 정보기관 그리고 경찰을 동원하여 백범 암살에 관련된 모든 기록을 제거했다. 조직적인 기록 말살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실제로 국회에서도 「김구선생 암살진상규명조직위원회」를 통해 조사를 진행했지만 이렇다 할 결실을 맺지 못했다.

김구선생 암살로 ‘민족의 대역(大逆)죄인’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안두희(1917~1996)는 1949년 8월 5일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중앙고등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으나, 석 달 뒤에는 15년으로, 1950년 3월에는 10년형으로 감형을 받았다. 이것은 유례없는 ‘초고속 감형’이었다. 서울 육군형무소에서 복역 중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수감자 중 15년형 이상을 선고받은 사람들은 모두 처형하는 가운데 안두희는 참모총장의 지시로 형집행정지를 받고 풀려나 바로 군에 복귀했다. 그리고 1951년에는 잔형을 면제받았고 대위로 전역(轉役)하였으며, 1953년 2월 15일에는 완전 복권(復權)되었다.

안두희는 강원도 양구에서 1956년 10월부터 10년 정도 여러 사단과 군단에 두부, 콩나물, 쇠고기, 돼지고기 등을 납품하는 군납 식료품 공장인 ‘신의기업사(信義企業社)’를 창업하여 경영하였다. 그는 중형을 면하였을 뿐 아니라 1년여 밖에 복역하지 않았다. 석방 후에는 군부가 군납사업을 알선해 주었던 사실에서 그를 비호하는 세력이 있거나 배후에 분명히 누군가가 있다는 합리적 의심을 자아내게 하였다. 이승만(李承晩) 정권 하에서 그는 막대한 부를 축적하며 강원도에서 납세액 2~3위를 차지하는 등 경제적으로는 윤택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안두희는 평생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민족주의자들에게 납치와 협박을 당하였고, 흉기 피습도 여러 번 당했다. 테러를 피해 신분을 감추고 거처를 여러 번 옮겨가며 살아야만 했다. 가족들은 이미 그의 정체를 알고 이혼 후 다른 나라로 이민 간 상태였다. 안두희 자신도 전처와 자녀들처럼 이민을 시도하였으나 정체를 알아본 출입국관리 담당자들이 출국을 허락하지 않아 무산되었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김구 암살의 진실 1편

■ 김구 암살의 진실 1편

■ 김구 암살의 진실 1편

1949년 6월26일. 탕! 탕! 총성이 울리고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지주이며 민족지도자인 김구선생이 숙소인 경교장에서 암살당했다. 인중과 배에 1발씩, 목 아래에 2발의 총탄을 맞고 그 자리에서 숨졌다. 범인은 당시 현역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 범행의 동기에 대해 “김구가 정부 수립을 앞두고 남한의 총선거를 반대하고, 남북협상을 위해 김일성을 방문하는 등 혼란을 조장해서 정부수립에 방해가 되었기 때문에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총을 쐈다.”라고 밝혔다. 안두희는 자신의 단독 범행이라고 진술했으나, 그럴 가능성은 매우 낮았고 분명히 배후 세력이 있었다는 것이 정설(定說)이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직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으로서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백범 김구는 해방 직후 중국에서 귀국하여 새로운 국가 건설에 앞장섰다. 김구선생은 해방 이후 치열한 좌우대립의 과정에서 신탁통치 반대운동 등 우파의 정치활동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1947년 말 남북 분단의 가능성이 커지면서 김구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던 이승만과 결별하고, 중도파였던 김규식(金奎植)과 함께 ‘남북협상’ 등 분단을 막기 위해 마지막까지 힘썼다. 하지만, 결국 분단을 막지 못한 김구는 1948년 8월 15일 수립된 남한만의 단독정부에 참여하지 않고, 사실상 정계 2선으로 물러났다.

그러던 중 1949년 6월 26일 현역 육군 포병소위이자 김구가 이끌던 한국독립당(약칭 한독당) 당원이었던 안두희에게 숙소이자 집무공간이었던 서울 경교장에서 4발의 총탄을 맞고 사망한 것이다. 당시 안두희의 나이는 32세였고, 김구선생의 나이는 73세였다. 김구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온 국민들은 깊은 애도를 표하였다. 김구 암살 후 장례식까지 10일 간 다녀간 조문객은 약 120여 만 명으로 추산되었고, 건물 안에 들어오지 못한 문상객도 많았다. 장례식이 있던 7월 5일 서울에서 거행된 장례식에는 약 40∼50만의 인파가 몰려들었고, 다른 도시에서도 각각 수만 명씩이 모여 고인을 애도하였다.

사건 당시 정부와 군 당국은 이 사건을 한독당 내부 갈등에서 비롯된 것으로 몰아갔다. 사건 직후 국방부는 안두희가 김구와 한국독립당의 노선을 둘러싸고 언쟁을 벌이다가 김구를 살해한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그리고 안두희를 김구에게 소개시키고 한국독립당에 가입하게 했다는 혐의로 한국독립당 조직부장이자 광복군 지휘관이었던 김학규(金學奎)를 구속하였다.

7월 2일 이승만(李承晩) 대통령도 이 사건이 한국독립당의 내분으로 일어난 것이라는 내용의 특별성명을 발표하였다. 7월 20일 군 당국은 최종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이 사건을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하려고 하는 친공산주의인 한국독립당의 음모에 맞선 안두희의 ‘의거’라고 규정하였다. 그리하여 안두희는 재판 중에 2계급 특진(特進)을 하였고, 사건 1년여 만에 형 면제 처분을 받고 군에 복귀하는 등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특혜를 받았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홍살문 2편

■ 홍살문 2편

■ 홍살문 2편

홍살문은 대개 효행을 중심으로 포상의 형식으로 많이 주어졌으나, 조선에 들어와서는 의부(義夫)나 절부(節婦, 열녀) 등에게도 내려져 효행과 여성의 절개를 중시하는 정책의 일환으로 사용하였다. 다시 말해 유교를 대중화시켜 유교 국가를 실현시키려는 조선의 의지가 담긴 것이다. 성리학이 향촌사회에 뿌리내리면서 서원(書院)이 많이 건립되고, 유명 서원에서는 선현(先賢)들의 위폐를 모시는 경우가 많아 홍살문을 세워 신성시하기도 했다.

효자나 열녀가 나오면 고을 원님의 보고를 받은 임금은 암행어사를 보내어 조사하고 내용이 합당하면 그들이 살던 마을 입구 또는 살던 집 앞에 그 행실을 널리 알리고 본받도록 하기 위하여 홍살문을 세우도록 하였다. 홍살문이 고을에 내려지면 웬만한 죄수는 방면되고 각종 세금도 면제되었다. 천민이 그 대상이라면 곡식과 옷감 등의 상이 내려졌고, 때로는 면천(免賤)을 통한 신분 상승의 기회가 주어지기도 했다. 양반이라면 종6품의 관직까지도 내려졌는데, 종6품은 과거에서 진사시에 합격하고 대과에서 장원급제를 해야 받을 수 있는 품계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같은 대규모의 전쟁은 효자·충신·열녀들이 대량 발생하는 여건이 제공되었다. 오랜 전쟁으로 사회가 어지러워지자 나라에서는 충신이나 효자, 열녀를 열심히 찾아내어 상을 줬다.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남편에게 절개를 지키는 것이 성리학의 바탕이기 때문이었다. 열녀문이 많이 만들어진 것도 이때였다. 광해군 초기에는 임진왜란 때 효자·충신·열녀들의 실제 행적을 모아 〈동국신속삼강행실도〉를 만들었다. 15~17세기에 효자로 포상 받은 자의 신분을 보면, 양반이 차지하는 비율은 점차 줄고 양인과 천민이 차지하는 비율이 크게 늘어났다. 명예뿐만 아니라 잡역을 면제받고 신분이 상승될 수 있는 좋은 기회였기 때문이다.

조선 초기에 열녀문을 받은 여성들은 대개 남편이 죽은 뒤 재혼하지 않고 혼자 사는 여성들이었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는 재혼하지 않은 것만으로는 열녀로 인정받기 힘들었다. 열녀로 인정받기 위해 남편이 죽으면 따라 죽거나, 약혼자가 죽어도 평생 결혼하지 않고 수절(守節)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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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양반의 숫자가 늘어나자 같은 양반이라도 여러 층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한 가문이 있는가 하면 낮은 관리직을 얻어 양반 체면을 겨우 유지하는 집안도 있고, 몇 대째 벼슬을 못 해 평민보다 못한 양반과 직접 농사를 지어 먹고 사는 양반 그리고 빈털터리에 가까운 양반도 있었다. 그래서 며느리나 딸이 죽어 집안에서 열녀가 나오면 더할 나위 없는 가문의 영광인데다가 몰락한 양반은 부귀영화를 되찾을 기회를 얻게 된다. 그래서 집안사람들은 남편이 죽어 홀로 남은 여성에게 은근히 따라 죽기를 강요하기도 했다. 마을 입구나 집 앞에 자랑스럽게 서 있는 홍살문은 그러한 남성위주의 봉건적 발상으로 희생을 강요당한 여인들의 한과 피눈물이 서려있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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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홍살문 1편

■ 홍살문 1편

■ 홍살문 1편

홍살문(紅箭門)은 주로 충신·열녀·효자 등을 배출한 집안이나 마을 또는 서원이나 향교 그리고 능과 묘에 설치되어있다. 집안의 재실에도 설치하기도 하였는데, 신성시 되는 장소를 보호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홍전문(紅箭門) 혹은 홍문(紅門)이라고도 한다. 문(門)이라고 부르지만, 출입의 기능보다는 상징성이 더 중요시 되었던 문(門)이다. 문이지만 주변에 담장이 없었기 때문에 방어를 하거나 출입을 통제하는 목적은 없다고 볼 수 있다.

이 홍살문이 언제부터 어떤 연유로 해서 세워지게 되었는지는, 문헌상 기록이 없어 확실히 알 수는 없다. 다만 세워진 장소로 보아서는 경의(敬意)를 표하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충청남도 청양군에서 발견된 칠갑산 암각화에 약 1,500년 전 마을 풍경을 묘사한 그림이 새겨져 있는데, 이 암각화에서도 현재와 같은 홍살문의 형태를 뚜렷하게 찾아볼 수 있다. 이는 이미 홍살문 문화가 삼국시대 말 고구려 및 백제 일대에까지 전파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려시대에 본격적으로 성행하기 시작했으며, 유교를 권장하던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충신·효자·열녀를 바람직한 인물로 추앙하여, 이들의 집 앞에 일종의 표창하는 의미로 홍살문을 세우게 되었다.

흔히 말하는 열녀문이 홍살문의 일종으로 분류되며 당대에 홍살문이 집이나 마을 앞에 있다는 것은 가문 및 지역에 큰 명예가 되었다. 이 때문에 홍살문을 유치하기 위해 남편을 잃은 여성이 남편을 따라 자결하기를 바라는 분위기가 온 마을에 형성되기도 했다고 한다.

9m 이상의 둥근기둥을 지주석 위에 고정시키고 두 개의 기둥을 양쪽에 두고 문짝은 달지 않았다. 기둥과 기둥 사이 위에는 지붕 없이 화살 모양의 뾰족한 나무를 나란히 박아 연결하고, 그 가운데에는 삼지창을 설치하거나 태극 문양을 설치했다. 하지만 태극문양과 삼지창이 없는 형태도 많다. 홍살문(紅箭門)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된 것은 기둥의 색을 붉은색으로 칠했고 상부에 설치한 화살모양의 나무살 때문이다. 붉은색은 악귀를 물리치고 화살은 나쁜 액운을 공격한다는 의미를 가진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 풍속에 동짓날 붉은 팥죽을 쑤어 먹거나 대문에 뿌리는 것 등은 붉은색을 귀신이 꺼리는 색이라 하여 악귀를 물리치고 집안의 안녕과 무병을 기원하는 의미가 있다. 홍살문의 붉은색도 이와 같은 의미로 쓰인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홍살문 앞에는 대개 하마비(下馬碑)를 세운다. 아무리 지체 높은 사람도 홍살문 앞에서부터는 말에서 내려 걸어 들어가란 뜻이다. 홍살문부터는 청정하고 신령스런 공간이라는 상징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