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2일 금요일

구중형극口中荊棘 - 입 안의 가시, 남을 해치는 말 

구중형극口中荊棘 - 입 안의 가시, 남을 해치는 말 

구중형극(口中荊棘) - 입 안의 가시, 남을 해치는 말\xa0

입 구(口/0) 가운데 중(丨/3) 가시 형(艹/6) 가시 극(木/8)

나무의 가시를 말하는 荊棘(형극)은 가시밭길같이 온갖 고생을 비유적으로 이르기도 한다. 또한 가시나무의 얽히고설킨 모습에서 분규를 나타낸다. 입안(口中)의 가시(荊棘)라고 하면 가시나무의 찌르려는 속성에서 원한, 또는 해치려는 음험한 말을 가리키지만 대뜸 떠올리기는 독서와 연관 짓는다. 바로 安重根(안중근) 의사의 유묵으로 널리 알려진 口中生荊棘(구중생형극) 때문이다.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一日不讀書/ 일일부독서) 입 안에 가시가 돋는다는 뜻으로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옥중에서 독서를 멈추지 않았던 의사의 표현이니 숙연하다.\xa0

안 의사 유묵 이전부터 많이 사용하게 된 것은 ‘推句(추구)’에서일 듯하다. 千字文(천자문), 四字小學(사자소학)과 함께 학동들이 가장 먼저 익히는 추구는 五言(오언)으로 된 좋은 대구 모음이다. 입안의 가시란 말은 ‘십년동안 등잔 밑에서 공부하여 사흘간 말 타고 영화 누린다(十年燈下苦 三日馬頭榮/ 십년등하고 삼일마두영)’는 구절 뒤에 따른다. 또 조선 말기 선비들의 필독서였던 ‘簡牘會粹(간독회수)’에 ‘요사이 책을 읽은 지 오래되어 입안에 가시가 자라고 가슴 속이 띠풀로 꽉 막혔다(近日 不讀書久矣 口中荊棘 胸裏茅塞/ 근일 부독서구의 구중형극 흉리모색)’란 표현이 나온다고 한다.

독서와는 달리 남을 해치는 음흉한 말을 뜻하는 유래는 더 오래 됐다. 宋(송)나라 葉廷珪(섭정규, 葉은 잎 엽, 땅이름 섭)란 사람이 엮은 ‘海錄碎事(해록쇄사)’에는 ‘가시는 입안에서 돋고 자황은 혀끝에서 어긋난다(荊棘生於口中 雌黃謬於舌杪/ 형극생어구중 자황류어설초)’는 구절이 있다.\xa0

謬는 그르칠 류, 杪는 나무끝 초. 자황은 유황과 비소의 화합물 결정체로 오늘날의 지우개처럼 글자를 잘못 썼을 때 지우고 다시 쓰는 약품이다. 여기서 함부로 말하거나 남의 말이나 글을 첨삭하여 시비를 가린다는 口中雌黃(구중자황), 信口雌黃(신구자황)이란 말도 나왔다. 가시 돋친 말은 남을 해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인격을 깎아내리니 조심하라는 교훈이다. / 제공 : 안병화(전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병촉지명炳燭之明 - 밝은 촛불의 빛, 노년의 배움의 재미

병촉지명炳燭之明 - 밝은 촛불의 빛, 노년의 배움의 재미

병촉지명(炳燭之明) - 밝은 촛불의 빛, 노년의 배움의 재미

불꽃 병(火/5) 촛불 촉(火/13) 갈 지(丿/3) 밝을 명(日/4)

자그마한 초 하나가 빛을 발한다. 자신의 몸을 태우면서 스스로는 비추지 않고 주위를 환하게 밝힌다. 시인들은 그것을 겉으로는 눈물짓고 속이 탄다고 했고, 타인을 위한 희생으로 느낀다. ‘촛불 하나가 다른 촛불에게 불을 옮겨 준다고/ 그 불빛이 사그라지는 건 아니다’고 박노해 시인이 잘 표현했다. 그뿐 아니다.

색깔을 입힌 신방의 華燭(화촉)은 가냘프지만, 촛불이 하나둘 야간의 광장에 모이면 추모하는 의미에서 거대한 혁명을 이뤄내는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이렇게 촛불의 다양한 의미를 사그라지는 절망 속에 희망을 갖다 주는 존재로 표현한 것이 초의 불꽃(炳燭)이란 이 성어다.

중국의 악성으로 불리는 師曠(사광)은 소리만 듣고도 길흉을 점치는 능력을 가진 현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마음을 집중하기 위해 쑥 잎을 태운 연기를 눈에 씌어 앞을 못 보는 장님이었다. 그래서 사광은 春秋時代(춘추시대) 晉(진)나라의 平公(평공)을 도와 즉위 초기에는 주변 여러 나라가 감히 엿보지 못하는 강국으로 위세를 떨치게 했다.

새소리만 듣고도 적의 침입을 알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평공이 나이가 들어 노쇠했을 때 사광과 나눈 대화에서 초의 불꽃 비유가 나온다. 戰國策(전국책), 新序(신서) 등 많은 저작을 남긴 前漢(전한)의 학자 劉向(유향)의 ‘說苑(설원)’에 실려 있다.

고대의 제후나 선현들의 행적을 모은 이 책의 建本(건본)편을 보자. 평공이 70이 되어 공부를 하려 해도 늦은 것이 아닐까 하자 촛불을 밝혀보라고 사광이 답한다. 말장난 같다며 화를 내는 평공에게 차근차근 설명했다. ‘젊어서 배우기를 좋아하는 것은 떠오르는 아침 햇살과 같고(少而好學 如日出之陽/ 소이호학 여일출지양), 장년에 좋아 하면 중천에 떠 있는 해와 같으며(壯而好學 如日中之光/ 장이호학 여일중지광), 노년에 공부함은 촛불의 밝음과 같습니다(老而好學 如炳燭之明/ 노이호학 여병촉지명).’ 사광의 지혜에 평공이 감탄했음은 물론이다.

가냘픈 몸집에 희생만 하다 힘을 모으면 거대한 힘을 발휘하는 촛불이 노년층에 희망을 주는 상징이 되니 흥미롭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평균수명이 늘어난 데다 출산율은 점차 줄어 급속도로 고령사회에 진입했기에 더욱 관심을 끈다. 노인 빈곤층이 어느 나라보다 높다는 악조건에도 활동하는 노인층이 늘어나는 것은 건강한 사회를 이루는 긍정적인 면도 있다. 뒷방 늙은이로 퇴물 취급당하는 것보다 생활이든, 취미든 어떤 방면이든지 촛불이 밝히는 희망을 누려야겠다. / 제공 : 안병화(전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오조사정烏鳥私情  - 까마귀의 사사로운 정, 부모를 섬기는 효심 

오조사정烏鳥私情  - 까마귀의 사사로운 정, 부모를 섬기는 효심 

오조사정(烏鳥私情) \xa0- 까마귀의 사사로운 정, 부모를 섬기는 효심\xa0

까마귀 오(灬/6) 새 조(鳥/0) 사사 사(禾/2) 뜻 정(心/8)

까마귀만큼 好惡(호오)가 명확히 갈리는 새도 없을 것이다. 온 몸이 새카매서 흉물스럽다고 배척하는 것을 넘어 울음소리는 죽음을 가져오는 흉조로 여겼다. ‘까마귀가 열두 번 울어도 까옥 소리뿐이다’란 속담은 미운 사람이 하는 짓은 모조리 밉다는 말이다. 반면 ‘까마귀가 검기로 마음도 검겠나’는 겉모습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이다. 여기에 새끼가 자라서 늙은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주는 은혜를 아는 새라고 하여 慈烏(자오), 慈鳥(자조)로 불리며 反哺之孝(반포지효)는 지극정성의 효도를 가리켰다.\xa0

明(명)나라 李時珍(이시진)의 약학서 本草綱目(본초강목)에서 反哺(반포)의 이미지가 굳어졌다고 하지만 실제는 그 이전이다. 西晉(서진) 초기의 학자 李密(이밀, 224~287)의 명문 ‘陳情表(진정표)’란 글에서다. 당시의 황제 武帝(무제)가 벼슬을 내리자 사양하면서 그 사연을 적은 글이다. 이밀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는 개가해 할머니 손에서 자랐는데 지금 조정에 나가면 병환의 할머니를 돌볼 사람이 없다는 내용이다.

마지막 성어가 나오는 부분을 보자. 이밀은 44세이고 조모는 96세이니 할머니 은혜를 갚을 날은 짧고 황제에 충성할 날은 아직 길다고 하면서 이어진다. ‘까마귀가 먹이를 물어다 늙은 어미에게 먹여 은혜를 갚듯이, 조모가 돌아가시는 날까지 봉양하게 해 주시기를 바라옵니다(烏鳥私情 願乞終養/ 오조사정 원걸종양).’ 왕은 처음 자기를 배척하는 줄 알고 화를 냈다가 구구절절 읽어본 뒤에는 감동하여 큰 상을 내리기까지 했다. 또한 이 글은 읽고서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효자가 아니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두고두고 명문으로 꼽혔다. 諸葛亮(제갈량)의 出師表(출사표)를 읽고 눈물이 없으면 충신이 아니라고 한 것과 같다.

미물도 이런데 사람은 물론 끔찍이 부모를 섬겼다. 외국에서 가장 부러워하던 것이 우리의 敬老孝親(경로효친)이었다. 그런데 핵가족이 급속히 진행되고 너나없이 장수하다보니 아무래도 이전 같지 않다. 부모학대의 패륜이나 어떻게 생활하는지 소식을 끊은 자식들도 숱하다. 홀로 사는 노인들을 가장 괴롭히는 것이 외로움이다. 객지의 자식들도 사는 게 어렵긴 마찬가지겠지만 자주 내왕을 했으면 좋겠다. / 제공 : 안병화(전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상유이말相濡以沫 - 거품으로 서로 적셔주다, 어려울 때 서로 돕다.

상유이말相濡以沫 - 거품으로 서로 적셔주다, 어려울 때 서로 돕다.

상유이말(相濡以沫) - 거품으로 서로 적셔주다, 어려울 때 서로 돕다.

서로 상(目/4) 젖을 유(氵/14) 써 이(人/3) 물거품 말(氵/5)

게가 물고 있는 빈 방울 게거품을 사람이 물면 싸움난다. 거품을 품는다는 것은 감정이 격하여 몹시 흥분한 상태로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거품이 많은 것도 환영받지 못한다. 어떤 일을 겉포장만 잘 하고 실질적인 내용이 없을 때를 비유한다. 거품이 필요할 때가 있다. 물고기가 뭍으로 나왔을 때 피부가 마르기 전에 서로 거품을 끼얹어주면 숨을 계속 쉴 수 있어 그 때는 생명이다.

거품을 서로 적셔준다는 이 말은 어려움을 당한 사람끼리 서로 돕는 相扶相助(상부상조)를 의미한다. 젖을 濡(유)가 들어가는 성어 爭魚者濡(쟁어자유)는 고기를 서로 잡으려면 옷 젖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고생을 감수해야 이룰 수 있다는 의미다.

재미있는 비유로 심오한 뜻을 전하는 ‘莊子(장자)’에 이야기가 나온다. 자연의 질서를 터득하고 그 질서에 따라 살아가는 인격체 眞人(진인)이 이상을 설명하는 大宗師(대종사)편을 먼저 보자. ‘샘물이 마르면 물고기들은 바닥이 드러난 곳에서 서로 입김을 불어 상대방을 적셔주거나 서로 거품을 내어 뿌려준다(泉涸 魚相與處於陸 相呴以溼 相濡以沫/ 천학 어상여처어륙 상구이습 상유이말). 그러나 이는 강이나 호수 속에서 서로를 잊고 지내는 것만 못하다(不如相忘於江湖/ 불여상망어강호).’ 涸은 마를 학, 呴는 숨내쉴 구, 溼은 젖을 습. 서로 돕는 것은 가상한 일이지만 원래의 상태가 바람직하다는 말이다.\xa0

老子(노자)가 孔子(공자)의 仁義(인의)에 대한 설명을 듣고는 그것이 도리어 마음을 번거롭게 한다는 내용이 天運(천운)편에 실려 있다. 똑같이 물고기의 거품을 예로 들고 서로 문질러주면서 축여 주지만 서로 상대의 존재를 잊고 노는 것만 못하다고 반박한다. 장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유교서 말하는 仁(인)이나 忠(충), 孝(효) 등은 모두 인위적인 것이니 자연에 맡기는 것만 못하다는 주장이다. 장자의 또 다른 물고기 비유, 수레바퀴 자국에 괸 물에 있는 붕어라는 涸轍鮒魚(학철부어)는 몹시 곤궁한 처지를 말한다. 涸은 물마를 학.

以沫相濡(이말상유)라고 해도 되는 거품 덮어주는 물고기의 同病相憐(동병상련) 이야기는 같은 처지에 서로 돕는다는 좋은 의미를 지녔다. 그런데 이 말은 중국 시진핑習近平/ 습근평 국가주석이 2014년 서울대를 방문했을 때 인용하는 등 자주 애용하는 말이라 한다. 하지만 2016년 사드(THAAD)사태 때 속 좁은 보복을 하는 것을 보면 자기 필요할 때만 쓰는 것 같다. 서로 거품을 발라주는 것보다 힘을 길러 넘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 제공 : 안병화(전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천부소지千夫所指 - 많은 사람의 손가락질을 받다. 

천부소지千夫所指 - 많은 사람의 손가락질을 받다. 

천부소지(千夫所指) - 많은 사람의 손가락질을 받다.\xa0

일천 천(十/1) 지아비 부(大/1) 바 소(戶/4) 가리킬 지(扌/6)

손가락(指/ 지)이 들어가는 관용어 중에 見指望月(견지망월)이란 것이 있다. 손가락으로 달을 보라고 가리키니 見指忘月(견지망월), 즉 달은 잊고 손가락 끝만 본다는 불교의 가르침이다. 性徹(성철) 스님의 법문에서 왔다는 이 말은 본질은 보지 않고 겉핥기만 하는 세태를 꼬집었다. 이 손가락이 어떤 사람을 향할 때 당사자는 영광일 수 없다.

모든 사람이 얕보거나 흉볼 때 하는 손가락질을, 잘했다고 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여럿의 말이 쇠도 녹인다’는 속담이 있듯이 많은 사람이(千夫) 손가락으로 가리킨다면(所指) 指彈(지탄)이란 말대로 탄환을 맞은 듯 견디지 못한다.\xa0

이 성어는 班固(반고)가 20년에 걸쳐 완성했다는 ‘漢書(한서)’ 열전 王嘉(왕가)전에 나온다. 내용을 보자. 前漢(전한) 말기 13대 哀帝(애제) 때 승상을 지낸 왕가는 성격이 강직하고 아부를 몰랐으며, 직언을 잘 하여 두루 신망을 받았다. 애제도 바른 말을 하고 쓸 만한 인재를 추천하는 왕가를 무척 신임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애제는 董賢(동현)이란 미소년을 애지중지하여 그는 물론 가족들까지 벼슬을 내렸다. 행차할 때에는 항상 함께 태우고 다니며 떨어지지 않았다. 앞서 斷袖之嬖(단수지폐, 嬖는 사랑할 폐)에서 소개했듯 애제는 팔베개를 하여 함께 낮잠도 자고, 깨우지 않으려 용포소매를 자르고 일어날 정도였다.\xa0

애제가 많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동현에 작위를 주고 2천 호를 하사하자 왕가는 참을 수 없어 글을 올렸다. ‘동현은 폐하의 은총만을 믿고 밖에서 멋대로 행동하여 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사고 있습니다. 속담에 말하길 천 사람의 손가락질을 받으면 병이 없어도 죽는다고 했습니다(流聞四方 皆同怨之 里諺曰 千人所指 無病而死/ 류문사방 개동원지 리언왈 천인소지 무병이사).’ 애제가 대로하여 독을 마시고 자살하게 하였으나 왕가는 감옥에서 음식을 20일 동안 거부한 채 피를 토하고 죽었다. 1년 뒤 애제가 죽자 권세를 잃은 동현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 제공 : 안병화(전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방휼지쟁蚌鷸之爭 - 조개와 도요새의 다툼, 양보 않고 싸우다 제삼자가 득보다.

방휼지쟁蚌鷸之爭 - 조개와 도요새의 다툼, 양보 않고 싸우다 제삼자가 득보다.

방휼지쟁(蚌鷸之爭) - 조개와 도요새의 다툼, 양보 않고 싸우다 제삼자가 득보다.

조개 방(虫/4) 도요새 휼(鳥/12) 갈 지(丿/3) 다툴 쟁(爪/4)

토끼를 쫓는 개가 산을 몇 번 오르내리다 모두 지쳐 쓰러진다. 지나던 농부가 개와 토끼를 노력 없이 잡는다. 욕심을 부려 많이 차지하려다 모두 잃게 되는 犬兎之爭(견토지쟁), 田父之功(전부지공)의 고사다. 농부는 불로소득이지만 개와 토끼는 엉뚱한 사람에게 이로운 일을 했으니 이럴 때 ‘죽 쑤어 개 준다’는 말이 들어맞는다.

같은 이야기로 새가 조개의 살을 먹으려고 부리를 넣자마자 입술을 꼭 다물어 오도가도 못 한다. 지나가던 어부가 조개도 줍고 새도 잡는다. 남들 싸우는 틈에 가만히 앉아 득을 보는 漁父之利(어부지리)이고 漁人之功(어인지공)이다.

같은 뜻인데 무명조개와 도요새(蚌鷸)의 싸움(之爭)이란 어려운 글자로 된 이 성어다. 열을 내려주고 주독을 풀어준다는 조개와 부리가 길고 꽁지가 짧은 도요새가 싸운다면 둘 모두 꼼짝 못한다. 개와 토끼를 얻은 농부와 마찬가지로 지나가던 어부만 새도 잡고 조개도 얻어 횡재를 했다.

어금버금한 두 세력이 조금도 양보 않고 싸우다 결국은 제삼자에게 득을 보게 하는 경우를 가리키게 됐다. 중국 前漢(전한) 시대 학자 劉向(유향)이 전략가들의 책략을 모은 ‘戰國策(전국책)’에서 유래했다. 이 책은 春秋時代(춘추시대)를 잇는 戰國時代(전국시대)란 말을 낳게 했다 해서 유명하다.

약육강식이 판치고 싸움으로 지새던 당시 북부의 燕(연)나라에 蘇代(소대)라는 세객이 있었다. 合從說(합종설)을 주장한 유명한 종횡가 蘇秦(소진)의 동생이다. 연나라를 노리고 趙(조)나라가 침범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왕은 소대를 파견하여 막도록 했다. 조나라 惠王(혜왕)을 만난 소대는 易水(역수)를 건너면서 본 이야기를 전했다.

‘조개가 입을 벌리고 햇볕을 쬐고 있는데 도요새가 보고 조갯살을 쪼려 하자 얼른 오므려 부리를 놓아주지 않았습니다(蚌方出曝 而鷸啄其肉 蚌合而鉗其喙/ 방방출포 이휼탁기육 방합이겸기훼).’ 曝는 쬘 포, 鉗은 집게 겸, 喙는 부리 훼. 조나라와 연나라는 싸우면 이와 같이 이웃 강국 秦(진)나라만 좋은 일 시킨다고 설득하여 공격 계획을 중지시켰다.

경쟁을 하더라도 서로 발전을 위한 것은 쌍방이 바람직하다. 사이가 나쁜 이웃이 잘 되면 배가 아프다며 적을 끌어들이면 나중엔 칼끝이 나를 향할 수 있다. 당이 다르다고 항상 으르렁거리며 화합을 모르는 정치권은 민생은 아랑곳없다. 상대방이 잘 되는 것은 보지 못한다고 ‘너 죽고 나죽자‘식 끝장을 보려 하면 진짜 망한다. / 제공 : 안병화(전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화광동진和光同塵 - 빛을 감추고 세속을 따르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어울리다.

화광동진和光同塵 - 빛을 감추고 세속을 따르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어울리다.

화광동진(和光同塵) - 빛을 감추고 세속을 따르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어울리다.

화할 화(口/5) 빛 광(儿/4) 한가지 동(口/3) 티끌 진(土/11)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소중하고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가기를 원한다. 하지만 잘 알지도 못하는 분야서도 마구잡이로 일을 처리해서는 망치기 마련이다. 이럴 경우 ‘빈 수레가 요란하다’고 실속 없는 사람이 되지 말라고 가르친다. 다른 사람들의 수준은 자기에 비할 수 없이 낮기 때문에 자기의 결정에 따라야 한다고 믿는 높은 사람들이 많을수록 사회가 시끄러운 것은 보통 사람들이 아는 이 가르침을 무시하기 때문이다.\xa0

빛을 온화하게 조화시켜(和光) 속세의 티끌과 같이 한다(同塵)는 이 성어는 자기의 지혜를 내세움이 없이 오히려 그 빛남을 줄여 세속과 함께 한다는 위의 가르침을 응축하고 있다. 불교에선 부처님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지덕과 재기를 감추고 속세에 나타나 불법으로 인도하는 것을 말할 때 이 말을 쓴다고 한다. 더 상세한 것은 老子(노자)의 ‘道德經(도덕경)’에서 찾을 수 있다.\xa0

제4장 無源章(무원장)에서 道(도)는 비어 있어 아무리 쓴다고 해도 넘치지 않는다면서 이어진다. ‘날카로운 것을 무디게 하고 어지러움을 풀어준다. 그 빛을 부드럽게 하며 티끌과도 어울리게 만든다(挫其銳 解其紛 和其光 同其塵/ 좌기예 해기분 화기광 동기진).’ 挫는 꺾을 좌.\xa0제56장 玄德章(현덕장)에는 유명한 말이 앞선다.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知者不言 言者不知/ 지자불언 언자부지), 감각기관을 막고 욕망의 문을 닫으며(塞其兌 閉其門/ 색기태 폐기문), 날카로움을 꺾고 어지러움을 풀며(挫其銳 解其紛/ 좌기예 해기분), 빛을 부드럽게 하여 티끌과 한 몸이 되어라(和其光 同其塵/ 화기광 동기진).’ 그렇게 하면 현묘한 한 몸 되기, 즉 玄同(현동)이 된다고 했다.

온통 제 잘난 맛에 사는 사람들은 어쭙잖은 광채를 더욱 빛내려고 안달이다. 자그만 지위에 오르기만 해도 무소불위인양 권력을 휘두르려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벼 이삭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하여 교양이 있고 수양을 쌓은 사람일수록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다. / 제공 : 안병화(전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여시아문如是我聞 -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불교 경전의 첫머리에 쓰는 용어

여시아문如是我聞 -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불교 경전의 첫머리에 쓰는 용어

여시아문(如是我聞) -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불교 경전의 첫머리에 쓰는 용어

같을 여(女/3) 옳을 시(日/5) 나 아(戈/3) 들을 문(耳/8)

이와 같이(如是) 나는 들었다(我聞), 또는 내가 들은 바는 이와 같다는 뜻의 이 말은 불자가 아니라도 불경을 암송할 때 처음 나오는 것이라고 알 수 있을 정도로 잘 알려져 있다.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조금도 거짓이 없이 진실 되게 옮긴다는 의미를 갖는다. 我聞如是(아문여시), 聞如是(문여시)라고도 한다.

부처님은 釋迦牟尼(석가모니)의 존칭으로 고대인도 샤카Sākya/ 釋迦 민족의 성인을 뜻하는 모니muni/ 牟尼란 뜻이다. 본명은 성이 고타마Gautama/ 瞿曇(구담), 이름이 싯다르타Siddhārtha/ 悉達多(실달다)인 것도 상식이 되어 있다. 4대 성인으로 추앙받는 부처님 말씀은 어떻게 불경으로 남아 전해졌을까.

훌륭한 말씀이라도 전하는 사람이 믿음직스럽지 못하면 신뢰받지 못한다. 부처님의 말씀은 涅槃(열반)하기 전까지 25년간 시중을 들었던 阿難陀(아난타)의 기억으로 전해졌다. 석가모니의 사촌이며 10대 제자 중의 한 사람인 아난타는 곁에서 가장 많은 말을 들었으므로 多聞第一(다문제일)이라고도 불린다. 그렇더라도 자기 개인의 의견이 아닌 부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한다는 뜻을 강조하여 경전 앞에 썼다.\xa0초기 불교의 경전은 석가의 사후 제자 중의 영도자 역할을 하여 頭陀第一(두타제일)이라 불린 摩訶迦葉(마하가섭)의 영도로 결집사업이 이뤄졌다고 한다.

大般若經(대반야경)의 전반적인 주석서 ‘大智度論(대지도론)’에 아난이 모든 경전의 앞에 어떤 글자를 붙여야 하는지 여쭙자 부처님께서 답했다는 내용이 나온다고 한다. ‘모든 경전의 앞에 제가 들은 바는 이와 같습니다란 말을 두면 된다(一切經首置 如是我聞等言/ 일체경수치 여시아문등언).’

좀 더 풀이를 옮겨 보면 불법의 큰 바다는 믿음으로 들어갈 수 있고 지혜로 건널 수 있는데 ‘이와 같이(如是/ 여시)’의 의미가 바로 믿음이라 했다. 그러면서 깨끗한 믿음이 있어야 불법에 들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 믿음을 말하는 표현은 열반 500년이 지나 편찬된 초기 경전에도 그대로 전통이 이어졌다고 한다.

부처님이 어디서 누구에게 설법한 내용은 이와 같다고 전한 아난의 말은 사실대로 전하는 뉴스와 닮았다. 없는 사실을 전하고 실제보다 부풀려 말하고, 악의적으로 왜곡하는 가짜뉴스가 판치는 세상에서 느끼게 하는 점이 크다. 목소리 크게, 여러 매체를 동원하여 동시다발로 전한다고 해도 사실이 아니면 일시적인 믿음은 곧 사라진다. 전하는 사람이나 그 내용이나 믿음이 앞서야 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 제공 : 안병화(전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자원자예自怨自艾 - 스스로 잘못을 원망하고 스스로 고쳐 다스리다.

자원자예自怨自艾 - 스스로 잘못을 원망하고 스스로 고쳐 다스리다.

자원자예(自怨自艾) - 스스로 잘못을 원망하고 스스로 고쳐 다스리다.

스스로 자(自/0) 원망할 원(心/5) 스스로 자(自/0) 쑥 애, 다스릴 예(艹/2)

사람은 모두 완벽할 수가 없으니 잘못을 저지른다. 잘못에 대하는 태도는 가지가지다. 잘못을 하고서도 자기의 책임이 아니라고 뻗대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전혀 느끼지도 못하는 무신경도 있다. 그래서 法句經(법구경)은 이렇게 가르친다. ‘남의 허물을 보지 말라, 남이 했건 말았건 상관하지 말라, 다만 내 자신이 저지른 허물과 게으름만을 보라(不務觀彼 作與不作 常自省身 知正不正/ 불무관피 작여부작 상자성신 지정부정)’고 했다.

남의 눈 티끌보다 제 눈 들보를 보아야 한다. 잘못은 부끄러워해야 하지만 그것을 뉘우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曾子(증자)는 三省吾身(삼성오신), 매일 세 번씩 자신을 반성했다.

자신의 과오를 스스로 뉘우치며 원망하고(自怨) 다시는 그러한 잘못이 없도록 베어 다스린다는(自艾) 이 성어는 ‘孟子(맹자)‘에 나온다. 쑥 艾(애)의 여러 뜻 중에서 다스리다, 베다로 해석될 땐 ’예‘로 읽는다. 맹자의 제자인 萬章(만장)이 禹(우)임금에 이르러 덕이 쇠퇴해져 어리석은 자에게 천자의 자리가 전해지지 않았는가 여쭈었다. 맹자는 그렇지 않다면서 堯(요)와 舜(순), 우임금은 하늘의 뜻대로 선양되었는데 이후 아들 啓(계)에 이어진 것도 백성에 덕을 베풀었기 때문이라 설명했다. 만장 상편에 실린 계속되는 이야기를 보자.

요리사 출신의 현명한 재상 伊尹(이윤)은 湯王(탕왕)을 도와 夏(하)나라의 포악한 桀王(걸왕)을 몰아낸 뒤 商(상)나라를 세웠다. 탕이 세상을 떠난 뒤 아들들도 3~4년을 넘지 못하고 죽자 이윤은 장손 太甲(태갑)을 즉위시켰다.

3년이 지나 태갑이 탕의 법령을 따르지 않고 덕을 어지럽히자 이윤은 그를 桐(동)지역으로 쫓아내고 직접 정치를 맡았다. ‘태갑은 3년간 그곳에서 잘못을 뉘우치고 자기를 원망하며 어질고 의롭게 행동했다(三年 太甲悔過 自怨自艾 於桐處仁遷義/ 삼년 태갑회과 자원자예 어동처인천의).’ 그러자 이윤은 다시 태갑을 수도로 불러 왕위에 복귀시켰다.

모든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좌를 바르게 이끌어 찾아주는 일이 쉬울까. 왕의 자리를 주무르는 이윤은 막강한 재상이었지만 욕심을 내지 않고 제 위치를 잘 지켰다. 또한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친 태갑도 대단하다. 死生決斷(사생결단)으로 치고받던 黨爭(당쟁)은 오늘이라고 다르지 않다.

나는 잘못이 없고 상대방이 자리를 차지할까봐 온갖 술수를 다 부린다. 菜根譚(채근담)의 명언을 보자. ‘자기를 반성하는 사람은 부딪치는 일마다 다 약이 되고, 남을 원망하는 사람은 움직이는 생각마다 다 창이 된다(反己者 觸事皆成藥石 尤人者 動念卽是戈矛/ 반기자 촉사개성약석 우인자 동념즉시과모).’ / 제공 : 안병화(전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시사여귀視死如歸 - 죽음을 편안히 돌아가는 것처럼 여기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다.

시사여귀視死如歸 - 죽음을 편안히 돌아가는 것처럼 여기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다.

시사여귀(視死如歸) - 죽음을 편안히 돌아가는 것처럼 여기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다.

볼 시(見/5) 죽을 사(歹/2) 같을 여(女/3) 돌아갈 귀(止/14)

모든 생명체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언제 죽을지 모르니 ‘대문 밖이 저승이라’고 했다. 사람 목숨이 그만큼 덧없다. 왕이나 거지나 죽음은 모두에 공평하게 다가온다. 사람은 어차피 한 번 죽게 마련인데 쓰임에 따라 이룬 일에 따라 泰山鴻毛(태산홍모)의 차이가 있다고 했다.

구차하게 목숨을 빌다 개죽음을 당하는 貪生怕死(탐생파사, 怕는 두려워할 파)도 있고, 영광의 최후를 맞아 영원히 추앙받기도 한다. 적탄을 맞고도 왜군을 물리치고 승리로 이끈 忠武公(충무공)이 바로 죽음으로써 살아난 必死則生(필사즉생)의 삶을 살았다.

죽음을 여기기(視死)를 마치 집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은 것으로 안다(如歸)는 이 말도 용감하기는 마찬가지다. 물불을 가리지 않고 옳은 길을 향하여 돌진하는 용사들이 떠오른다. 중국의 고전 곳곳에 이 말이 사용됐다.

먼저 呂不韋(여불위)가 빈객들의 지혜를 모은 ‘呂氏春秋(여씨춘추)’의 士節(사절)을 보자. ‘어려운 일에 임해서는 이익을 잊고, 생명을 돌보지 않고 의로움을 행할 때는 죽음 보기를 마치 편안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여긴다(臨患忘利 遺生行義 視死如歸/ 임환망리 유생행의 시사여귀).’ 죽음으로 보답하는 선비들의 절개에 대해서 강조했다.

齊(제)나라 桓公(환공)이 管仲(관중)에게 관리를 뽑으면서 조언을 구했다. 관중은 청렴한 사람에 형벌을 관장하게하고, 공손한 사람에게 접객을 맡겨야 한다며 잇는다. ‘삼군을 지휘하고 진영을 만들어 병사들로 하여금 죽음을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바라보게 하는(三軍既成陣 使士視死如歸/ 삼군기성진 사사시사여귀)’ 成父(성보)란 공자가 제일이라고 추천했다. 그러면서 관중은 覇王(패왕)이 되려면 역시 자신을 등용해야 한다고 자신만만했다.

‘韓非子(한비자)’ 外儲說(외저설, 儲는 쌓을 저) 좌하에 실려 있다. 列子(열자)에 나오는 視死如生(시사여생)도 죽음을 삶과 같이 보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똑 같다. 부를 가난과 같이 여긴다는 視富如貧(시부여빈)의 대구로 仲尼(중니)편에 등장한다.

사람이 죽은 후 비로소 평가가 제대로 된다는 蓋棺事定(개관사정)이란 말은 杜甫(두보)의 시구에서 왔다. 떵떵거리던 삶을 산 사람이 오명이 만대에 이르고 이름 없던 삶을 살다가 流芳百世(유방백세)인 사람도 있다.\xa0

우리의 오늘을 있게 한 구국선열들과 적과 싸워 목숨을 바친 전몰장병들은 후자의 사람들이다. 나라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친 장병들을 자그마한 규정에 의해 섭섭하게 대우한 사례가 종종 드러난다. 특혜를 바란 희생은 아니라 해도 우대는 많이 할수록 좋다. / 제공 : 안병화(전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