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10일 일요일

이몽학의 난 4편

■ 이몽학의 난 4편

■ 이몽학의 난 4편

명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점차 조선에 유리해지자 의병을 독려하던 선조의 태도가 급변한 것이다. 선조는 의병을 관군으로 흡수시키라는 명을 내리지만 그것은 형식적인 것이었고, 결국에는 의병들이 군량미만 축내고 있다며 강제 귀농 조치를 명했다. 사실상의 의병 해체 작업을 실시한 것이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나선 의병들에게 돌아온 것은 바로 군량미나 축내는 쓸모없는 사람 취급뿐이었다. 전쟁이 끝나면 자신들의 과오(過誤)가 드러나고, 전공(戰功)이 의병들에게 돌아갈 것을 두려워하였고, 그렇게 되면 자신들의 체면이 말이 아닌 것이다. 참으로 치졸하고 한심한 군주에 그 신하들이다.

의병으로 나섰던 백성들은 이에 크게 분노했지만, 자기들이 의병으로 나선 것은 어차피 선조나 조정을 위해 싸운 것이 아니라, 나라와 자신들의 고향과 가족들을 위해 싸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불만을 누른 채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선조와 조선의 관료들은 의병들에게 상을 주기는커녕 일본과 잠시 휴전하는 동안에도 전쟁에 지친 백성들을 다시 수탈의 대상으로 삼기 시작했다. 이 때 일어난 것이 ‘이몽학의 난’이었고, 이 난을 계기로 선조는 의병장들을 반역자로 처리하는 좋은 구실로 삼았던 것이다.

이몽학의 난으로 인하여 선조는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으며 정치에 대한 자신감을 잃었다. 이 때문에 의병장들을 의심하기 시작하였고 이순신 등 공훈이 많은 관군 장수들 역시 의심하며 경계하였다. 이 덕에 본의 아니게 원균이 선조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기도 하였는데 선조가 이순신을 견제하기 위해 원균을 우대한 것이다. 사실 이몽학의 난 이전까지만 해도 선조는 상대적으로 이순신의 후원자에 가까웠다. 애초에 북방에서 이일의 장계를 받고도 백의종군으로 처벌을 낮췄고, 평소대로라면 수군절도사로 진급할 수 없는 낮은 계급이었던 이순신을 고집을 피워 전라좌수사로 임명한 게 선조였다.

선조는 전쟁이 끝난 후 이순신 같은 명장들이 민심을 얻고 의병장들 또한 전공을 차지하는 것을 두고 볼 만큼 현명한 명군(名君)이 아니었던 것이다. 선조는 그들이 백성을 버리고 도망 간 선조를 위협하는 세력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선조는 의병장 중 단 한 명도 공신으로 칭하지 않았고, 의병들을 해체하거나 김덕령처럼 역모를 뒤집어 씌워 죽이기까지 했다. 오죽하면 이순신장군의 최후에 대해서도 그러한 결과를 예견하고 마지막 전투가 될 노량해전에서 전사를 가장하여 자살을 한 것이라는 가설과 추측도 나오고 있을 정도이다. 그래서인지 정묘호란이나 병자호란 때는 의병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이몽학의 난은 실패로 끝나기는 하였지만, 임진왜란을 통해 극심한 사회적 모순과 민심의 이반 현상이 상당했음을 단적으로 드러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천안 지역에서 이몽학의 반란군에 얼마나 호응하였는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충청도에서 반란군이 승승장구한 것은 이 지역의 민심이 어떠하였는지 짐작하게 해준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이몽학의 난 3편

■ 이몽학의 난 3편

■ 이몽학의 난 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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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몽학의 본관은 전주로 본래 왕실의 서얼 출신으로 서울에서 살았으나, 성품이 불량하고 행실이 좋지 않아서 아버지에게 쫓겨나 충청도와 전라도 등지를 전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한현의 부하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반란 계획을 꾸민 다음, 의병을 모은다는 명목으로 ‘동갑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장정들을 모집하였다. 1596년 충청도 홍산에서 이몽학의 난으로 불리는 반란을 일으켜 한때는 홍산·청양·대흥 등을 차례로 함락시켜 홍주(지금의 홍성)까지 돌입했으나, 반란군 중에서 관군에 붙은 자가 많아져서 전세가 점점 불리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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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함락이 어렵다는 것을 안 이몽학은 11일 새벽에 무리를 이끌고 덕산(德山)을 향해 달아나게 되는데, 반란군 중에 도망자가 속출하였다. 이때를 이용해 관군은 반란군 진영에 무사를 보내어 혼란시키면서 이몽학의 목을 베는 자는 반란에 가담하였다 하더라도 큰 상을 내리겠다고 회유하였다. 그러자 반란군 중에서 앞다투어 이몽학의 목을 먼저 베려는 자가 속출하였고, 결국 반란군 김경창 등에 의해 이몽학은 참수되었다. 이때 한현은 반군 수천 명을 이끌고 홍주에 주둔하고 있었으나, 홍가신의 진군으로 패주하다 사로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서울로 압송되어 처형된 사람은 33명이며, 외방에서 처형된 사람이 100여 명이나 되었다. 연좌율(緣坐律)을 적용하게 되면 그 수가 너무 많아짐에 따라 특별한 경우에만 적용해 희생자를 가급적 줄였다. 이리하여 반란 주모자의 처리는 일단락되었으나, 반란자들의 입에서 나온 의병장 김덕령(金德齡)·최담령(崔聃齡)·홍계남(洪季男)·곽재우(郭再祐)·고언백(高彦伯) 등이 붙잡혀 와 모진 고문을 당했다. 그 중에서 김덕령과 최담령은 혹독한 심문 끝에 억울하게 장살(杖殺)당하거나 옥사하였다. 김덕령은 뒤에 신원되었으나 반란 사건으로 희생된 사람은 난의 처리가 끝난 뒤에도 더욱 늘어났다. 난을 토평(討平)하는 데 공을 세운 사람은 1604년 청난공신(淸難功臣)으로 책록되었다.

그렇다면 이몽학은 왜 전쟁의 와중에 국가에 저항하는 난을 일으킨 것일까? 국가를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던 백성들이 전쟁이 끝나지도 않은 상태에서 왜 국가를 향해 칼 끝을 겨누었을까? 그것은 전쟁 중 상황에서 일본군이 아닌 조선의 의병들에게 먼저 칼날을 겨눈 것은 선조와 조선 조정이었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난 후 선조가 의병들에게 한 일들을 보면 정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선조는 의병활동을 이렇게 평가절하 했다.

“적을 평정한 것은 오로지 명나라 군대의 힘이었다. 조선의 장수나 의병들은 명 장수 뒤를 쫒아 뒷처리나 했을 뿐이다. 오로지 임진왜란이란 국난극복을 한 것은 명나라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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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몽학의 난 2편

■ 이몽학의 난 2편

■ 이몽학의 난 2편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들은 모두 양반 출신들이었다. 구한말 의병으로 신돌석이라는 평민 의병장도 있기는 했지만, 임진왜란 당시 일반 백성이 의병장이 되는 것은 불가능했다. 올바른 의식을 가진 양반들이 의병장으로 나섰고,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일반 백성들은 의병으로 나서서 목숨 바쳐 왜군과 싸웠다.

의병들의 활약과 명나라의 참전으로 전쟁은 소강상태에 빠졌다. 전쟁으로 전국의 농촌은 황폐화되고, 은결(실제로 경작하고 있으면서 국가 토지대장에서 빠진 토지. 즉 세금을 안내는 토지)은 증가되고, 국가재정은 악화되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관리들의 부정행위는 더욱 악랄해졌다. 조선의 지배계층이나 토착관리들은 전쟁의 와중에도 정신을 못 차리고 일본과 잠시 휴전하는 동안에도 전쟁에 지친 백성들을 다시 수탈하기 시작했다. 또 일본의 재침략에 대비한 산성 축조 등으로 농민들의 삶은 피폐할 대로 피폐해 있었다. 전쟁 초기에 큰 활약을 했던 각지의 의병들은 전쟁이 장기화되고 유능한 의병장들이 관인이 되거나 전사함에 따라, 의병으로서의 기능은 약화되어 있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이후 계속되는 흉년으로 민중들의 생활은 비참하였다. 당시 조정에서는 명(明)·일(日) 사이에 강화(講和)를 둘러싸고 찬반양론의 논쟁이 치열하였다. 일본의 재침을 방비하기 위해 각처의 산성을 수축하는 등 민중의 부담이 가중되자, 민중의 원성과 고통은 확대되어가고 있었다. 장기간 계속된 전쟁으로 인해 사람들의 삶은 비참해지고 조정에 불만을 품은 사람도 늘어났다. ‘이몽학의 난’ 역시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일어났다. 이몽학이 반란을 일으키자 순식간에 많은 사람이 이에 호응한 것도 이 같은 현실을 벗어나고자 했던 민중의 간절한 소망 때문이었다.

이몽학의 반란 과정에서 사실상 도화선 역할을 했던 인물은 한현이었다. 그는 임진왜란 발발 이후 의병장으로 활약하여 그 공으로 1594년(선조 27) 겸사복(兼司僕)이 되었다. 그 뒤 이시발(李時發)의 휘하에서 충청도 지방의 속오군을 훈련시켰는데, 이때 반란을 획책하여 그 부하로 있던 이몽학을 사주하여 거병하도록 했던 것이다. 한현이나 이몽학은 각각의 직책과 활동 속에서 당시 전쟁으로 인해 각종 부담에 시달리고 있던 백성들의 고통과 그에 따른 불만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거사에 착수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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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몽학의 난 1편

■ 이몽학의 난 1편

■ 이몽학의 난 1편

역사상 어느 인물의 공과(功過:공로와 과실)를 논할 때, 아무리 뛰어난 영웅이라 할지라도 전혀 결점이 없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개인사적이든 정치적이든 다소의 실수나 실책은 있기 마련이지만, 그가 남긴 공적이 그것을 덮을 만큼 크다면 우리에게 역사상 위인으로 이름을 남길 수가 있을 것이다. 선조에 대한 평가도 다소 복합적이기는 하나, 우리에게는 비겁하고 무능한 임금이라는 이미지가 크다.

선조는 왕위계승과는 거리가 먼 위치에 있던 인물이었으나 1567년 명종이 후사 없이 죽자, 조선 최초로 방계 혈통으로 왕위에 즉위하였다. 선조는 이 점이 항상 열등감으로 작용했다. 실록에 나오는 선조에 관한 이야기들은 다음과 같다.

『선조는 즉위 초 오로지 학문에 정진하여 매일 강연(講筵)에 나가 경사(經史)를 토론하였다. 이전까지 조정의 주 세력이었던 훈구세력(勳舊勢力)을 물리치고 사림(士林)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명유(名儒) 이황(李滉)과 이이(李珥) 등을 극진한 예우로 대하여 침체된 정국에 활기를 불러일으키고자 힘을 다하기도 하였고, 두 대비마마 모시기를 친어머니 섬기듯 효성이 지극하였다. 성품 또한 검소하여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색(色)이나 오락에 괘념하지 않았고, 서화에도 뛰어났다. 음식과 의복도 절제하여 비빈이나 궁인들까지도 감히 사치하지 못하였다. 항상 절약하고 농민들의 노고를 생각해 한 톨의 낟알을 땅에 떨어뜨리는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

이 내용으로 보면 선조는 천성이 검소하고 효심이 깊으며, 백성들을 위하는 마음 또한 소홀치 않았음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인물의 진가(眞價)는 위기 때 발휘되는 능력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데, 선조는 이러한 점에서 정반대의 평가를 받는다. 평상시에는 군주로서 봐줄만한 리더쉽을 갖고 있었지만, 위기 시에는 최악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나라 역사적으로는 큰 불행이었다.

전쟁이 일어나자 선조가 했던 행동은 백성들을 크게 실망시켰고, 그 중에서도 의병에 대한 대우와 처리는 최악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땅에 상륙한 일본은 지리멸렬한 관군의 큰 저항없이 파죽지세로 수도 한양까지 밀고 올라갔다. 하지만, 상상치도 못했던 복병(伏兵)을 만나 전황(戰況)이 크게 바뀌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당시 의병장들로는 김덕령, 곽재우, 고경명, 조헌, 영규대사, 서산대사, 사명당, 정문부 등이 있었다. 그래도 그나마 이들은 역사에 이름이라도 남는 의병장이 되었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이름 없는 의병들은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쳐 왜군과 싸우다가 죽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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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의 여인들 - 인목왕후 7편

■ 선조의 여인들 - 인목왕후 7편

■ 선조의 여인들 - 인목왕후 7편

서인 주도의 반정이 성공한 이후, 광해군과 인목대비의 인생은 역전되었다. 경운궁에 감금되어 한 많은 세월을 보내야 했던 인목대비 앞에 광해군은 죄인 신분이 되었다. 반정 이후 왕 자리에서 쫓겨난 광해군은 가족과 함께 쓸쓸히 강화도로 귀양 갔다가 훗날 바람 많은 제주에 이배(移配:귀양지를 다른 곳으로 옮김)되어 한 많은 일생을 마쳤다. 인목대비는 다시 왕실 최고 어른으로 복귀했다. 인조는 인목대비를 핍박한 것을 패륜의 상징으로 부각시키며 광해군 정권의 부도덕성을 강조했다. 인조는 즉위 후 인목대비에 대해 존호(尊號)를 높여주고, 잔치를 자주 베풀면서 광해군과의 차별성을 부각시켜 나갔다.

인목대비는 이후 전국의 명산대찰을 돌아다니며 부처님께 아들과 아버지의 명복을 빌었다. 안성의 칠장사를 김제남과 영창대군의 원찰로 삼았으며, 금강산의 여러 사찰에 아들과 아버지의 위패를 모셔 그들의 명복을 빌었다.

정명공주가 혼인하여 출궁한 뒤 인목대비는 계속 창덕궁에 머물렀다. 1624년(인조 2년)에 일어난 이괄의 난으로 창덕궁이 불타자 광해군이 지은 인경궁으로 옮겨 살았다. 1631년부터 잦은 설사와 복통, 고열로 잠 못 이루던 인목대비는 1632년 4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인목대비는 글씨를 잘 써서 많은 한글과 한문 친필이 남아있다. 『열성어필 숙종대왕편(列聖御筆肅宗大王篇)』에서는 인목왕후의 서예 풍격에 대해 "더욱 건강(健强)하고 천기(天機)가 비동(飛動)하며, 서운(瑞雲)이 휘상(輝祥)하다. 종이는 오래 되고 먹은 새로우나 여전히 향기가 머무른다."라고 하였다. 왕후의 서예가로는 인목왕후가 최초이며, 기존의 여류서예가보다도 격(格)과 질(質)이 높은 글씨를 썼고, 그리하여 신사임당(申師任堂)과 더불어 서예에서 쌍벽을 이루는 존재였다는 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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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인목대비(仁穆大妃)로 불리나, 인목(仁穆)은 죽은 뒤에 받은 시호(諡號)이다. 선조 때 소성(昭聖)이라는 존호를, 광해군 때 정의(貞懿)라는 존호를 받아 통칭 소성대비(昭聖大妃)라 불렸다. 인조가 반정으로 즉위한 뒤 대왕대비가 되어 명렬(明烈)이라는 존호가 더해졌고, 죽은 뒤 광숙장정(光淑莊定)이라는 휘호와 인목이라는 시호가 올려졌다. 고종 때에 정숙(正肅)이라는 존호가 추가로 더해짐으로써, 정식 시호는 소성정의명렬광숙장정정숙인목왕후(昭聖貞懿明烈光淑莊定正肅仁穆王后)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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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의 여인들 - 인목왕후 6편

■ 선조의 여인들 - 인목왕후 6편

■ 선조의 여인들 - 인목왕후 6편

반정(反正)에 성공한 이튿날 아침 능양군은 경운궁으로 가서 11년 동안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에게 반정을 공식적으로 승인받고자 했다. 하지만, 인목대비는 갑자기 병사들이 몰려오자 무슨 일인지 몰라 문을 걸어 잠그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랫동안 핍박받아온 그녀로서는 최후를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광해군일기》에 따르면 이귀가 군사를 시켜 담장을 넘어 문을 열게 한 다음 경운궁 안으로 들어가 바깥뜰에서 울면서 고했다. 인목대비가 내시를 시켜 까닭을 묻자, 이귀는 자신들이 반정을 일으킨 사유를 고하면서 창덕궁으로 행차하기를 청했다. 하지만 그녀가 행차를 꺼리자 능양군이 친히 경운궁으로 나아가 인목대비를 뵙고 행차하기를 재촉했다. 능양군은 경운궁에 이르자 말에서 내린 뒤 서청문을 통해 궁 안에 들어가 재배하고 통곡했다.

“혼란 중에 일이 많고 겨를이 없어 지금에야 왔사오니 황공할 따름입니다.”

인목대비는 그제야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고 절차에 따라 능양군에게 어보(御寶:옥쇄)를 전달한 뒤, 광해군에게 당한 원한을 갚아주기를 간절히 청했다. 반정의 주역들은 광해군 측의 반격을 염려하여 현장에서 곧바로 즉위식을 치르고자 했다. 그러자 인목대비는 경운궁 별당인 즉조당에서 예식을 치르게 했다. 이튿날 인목대비는 즉위 교서를 내려 반정의 정당성을 공표했는데, 앞부분에 광해군에 대한 분노가 솔직하게 드러나 있다.

『내 비록 부덕하나 천자의 고명을 받아 선왕의 배우자가 된 사람으로 일국의 국모가 된 지 여러 해가 되었으니, 선묘(宣廟: 선조)의 아들이 된 자가 나를 어미로 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광해는 참소하는 간신의 말을 믿고 스스로 시기하여 나의 부모를 형살하고, 나의 종족을 어육으로 만들고, 품안의 어린 자식을 빼앗아 죽이고, 나를 유폐하여 곤욕을 주는 등 인륜의 도리라곤 다시없었다. 이는 대개 선왕에게 품은 감정을 펴는 것이라 미망인에게야 그 무엇인들 하지 못하랴.』

인목대비는 당시 광해군의 죄를 38가지나 열거했다. 그 첫째로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죽이고 계모인 자신을 서궁에 유폐한 ‘폐모살제(廢母殺弟)’를 들었다. 이것은 성리학의 이념을 신념화한 서인들에게 주요한 반정의 명분이 되었다. 이어서 광해군대에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지 못하고 중립외교를 한 것과 무리한 토목 공사로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린 것 등을 광해군의 악행으로 열거하였다.

- 7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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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의 여인들 - 인목왕후 5편

■ 선조의 여인들 - 인목왕후 5편

■ 선조의 여인들 - 인목왕후 5편

인목왕후는 당시 왕실 최고의 어른이고 법통으로도 군주인 광해군의 어머니였지만, 그때부터는 실질적으로는 원수와 다름없는 관계가 되었다. 광해군은 1615년(광해군 7년) 4월 자신의 거처를 재건된 창덕궁으로 옮기고 인목대비를 경운궁에 유폐(幽閉:깊숙히 가둠)시켰다. 경운궁은 태조의 계비 강씨의 무덤인 정릉(貞陵)이 있던 곳으로, 당시에는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사가(私家)였다. 선조가 임진왜란이 끝난 뒤 궁궐에 불타 거처할 곳이 없었으므로 행궁으로 삼은 장소였다. 정릉동행궁(貞陵洞行宮)이라고 불린 이곳에서 선조가 승하했고 광해군이 즉위했다. 그 해 창덕궁이 재건되면서 광해군이 이 곳을 떠나게 되자 경운궁(慶運宮)이라는 궁호(宮號)가 붙게 되었다.

1618년(광해군 10년) 인목대비는 폐서인(廢庶人)되어 경운궁에 유폐되었고, 좌의정 한효순, 공조판서 이상의, 예조판서 이이첨 등 17인이 〈폐비절목〉을 만들어 대비의 특권과 예우를 박탈했다. 하지만 명나라에서 폐서인의 고명(誥命)이 내려오지 않아 인조반정 때까지 인목대비는 대비의 신분을 그나마 유지할 수 있었다. 1622년 12월, 이이첨은 강원감사 백대형을 시켜 이위경 등과 함께 굿을 빙자해 경운궁에 들어가 인목대비를 시해하려 했으나 박승종 등이 가로막고 나서는 바람에 실패했다.

인목대비는 경운궁에서 맏딸 정명공주와 함께 비참한 생활을 해야 했다. 인목대비의 비참한 생활상은 어느 궁녀가 쓴 《계축일기》에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다. 궁에는 지저분하고 더러운 물건을 버릴 만한 빈터가 없어 그것이 쌓여 악취가 가득했으며, 구더기가 방 안과 밥 지어 먹는 솥 위에까지 기어다니고, 물로 씻어내도 없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생필품도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바가지가 없어 소쿠리로 쌀을 일어야 했다. 솜옷이 없어 7,8년 동안 추위에 시달리다가 목화씨를 심어 재배하여 간신히 솜옷을 마련할 수 있었다. 경운궁의 궁녀들이 궐내에 텃밭을 일궈 나물을 재배하여 반찬으로 삼을 정도로 궁핍한 생활이었다. 그렇게 10여 년 가량 경운궁에서 힘든 나날을 살고 있었던 인목대비에게 한줄기 빛이 비춰졌다. 1623년에 광해군을 몰아내고 서인 정권이 들어서는 인조반정이 일어난 것이다.

1623년 3월 13일, 이귀, 심기원, 김자점, 김류, 최명길 등 서인들이 능양군을 앞세워 반정을 일으켰다. 거사의 명분은 폐모살제(廢母殺弟, 어머니를 폐하고 동생을 죽임)였다. 군사를 이끌고 홍제원에 집결한 그들은 창의문을 돌파하고 파죽지세로 도성 안에 들어왔다. 그들은 훈련대장 이흥립의 내통(內通)으로 활짝 열린 돈화문을 통과하여 손쉽게 창덕궁을 점령함으로써 반정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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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의 여인들 - 인목왕후 4편

■ 선조의 여인들 - 인목왕후 4편

■ 선조의 여인들 - 인목왕후 4편

당시 문경새재에서 도적들이 상인을 죽이고 은자(銀子:은돈) 수백 냥을 탈취한 사건이 일어났다. 범인 일당은 영의정을 지낸 박순의 서자 박응서, 심전의 서자 심우영, 전 목사 서익의 서자 서양갑, 평난공신 박충갑의 서자 박치의, 박유량의 서자 박치인, 전 북병사 이제신의 서자 이경준, 서얼 허홍인 등 권세 가문의 서자(庶子) 일곱 명이었다. 그들은 허균, 이사호, 김장생의 이복동생 김경손 등과 교유하며 죽림칠현, 강변칠우로 자처했던 서자(庶子)들이었다.

그들은 광해군이 등극하자 서얼 차별을 없애달라는 상소를 올렸지만 거부당하자, 이에 반감을 품고 경기도 여주 남한강변에 ‘윤리가 필요 없는 집’이라는 뜻의 무륜당(無倫堂)을 지은 뒤, 그곳을 근거지로 전국을 오가며 화적질을 일삼고, 문경새재에서 강도짓을 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런데 피살된 상인의 노비 하나가 살아남아 그들의 뒤를 밟아 근거지를 알아낸 뒤 포도청에 고발함으로써 일망타진되었다.

사건을 접한 대북파의 거두 이이첨은 김개, 김창후, 한희길, 정항 등과 모의해 서얼 출신 화적패들이 자금을 모아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했다는 거짓자백을 받아낸다. 그것은 일곱 명의 서자(칠서:七庶) 중에 한 사람인 박응서가 광해군에게 비밀상소를 올리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박응서는 상소문에서 자신들이 1608년 명나라 사신을 죽여 사회혼란을 야기하려 했고, 군자금을 비축하여 무사를 모은 뒤 일을 벌이려 했으며, 거사에 성공하면 영창대군을 옹립한 다음 인목대비의 수렴청정을 실행하려 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대북파는 박응서의 자백을 근거로 하여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이 역모의 수괴(首魁)이고, 인목대비까지 모의에 가담했다는 거짓 자백도 받아냈다. 그 결과 선조로부터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의 안위를 부탁받은 신흠, 박동량 등 일곱 대신, 이정구, 김상용, 황신 등 서인 수십 명이 하옥되었다. 나아가 이이첨은 유생 이위경에게 영창대군과 인목대비의 처단을 종용하는 상소를 올리게 했고, 장령 정조와 윤인 등이 폐모론(廢母論:인목왕후를 폐함)을 지지하고 나섰다.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삼사(三司:사헌부,사간원,홍문관)에서도 연일 영창대군을 벌하라고 광해군을 압박했다.

결국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은 1614년 6월 1일 서소문 밖에서 사사(賜死)되었고, 영창대군은 서인으로 강등되어 강화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그와 함께 영창대군을 비호했던 영의정 이덕형, 좌의정 이항복 등도 조정에서 쫓겨났다. 그러자 이덕형은 시국을 개탄하며 식음을 전폐한 끝에 10월 10일 세상을 떠났다. 이듬해 봄 영창대군은 강화도의 작은 골방에서 죽음을 당했다. 강화 부사 정항이 그를 밀실에 가두고 아궁이에 불을 지펴 질식사시켰던 것이다. 당시 대군의 나이는 불과 9세였다. 이 계축옥사를 통해 대북파는 서인과 남인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고 정권을 독점하게 되었다.

- 5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선조의 여인들 - 인목왕후 2편

■ 선조의 여인들 - 인목왕후 2편

■ 선조의 여인들 - 인목왕후 2편

조선시대 왕비는 입궁하면 대략 1천 결 정도의 왕실토지에 대한 수세권(收稅權)을 얻는데, 이는 매년 1천 가마 이상의 수입을 의미한다. 그녀의 재산은 친정인 명례동에 마련한 서제소(書題所)의 차지(次知) 오윤남이 관리했다. 1603년(선조 36년) 정명공주가 태어나면서 배정된 850결, 영창대군이 태어나면서 배정된 노비 450명, 전답 300여 결까지 명례본궁에서 관리했으며, 선조에 의해 영창대군이 제안대군의 후계자로 정해지면서 그가 축적했던 수천 결의 땅과 수백여 명의 노비까지 송두리째 떠안음으로써 인목왕후의 친정아버지인 김제남은 큰 재력을 쥐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위정자들이 권력을 유지하려면 많은 정치자금이 소요되고, 그 과정에서 불법적인 정경유착이 수반되기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정권을 탈취하는 데도 그만한 재력이 필요할 것이다. 바로 그 민감한 점을 간과함으로써 인목왕후나 그 아버지 김제남은 재앙을 자초한 면이 있다. 인목왕후는 본가의 세력으로 보나 개인의 성품으로 보나 특출한 인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위험한 시기에 지나치게 재산을 불림으로써 광해군과 정권을 이끌고 있던 대북파들의 눈총을 받았다. 그 때문에 김제남에게 위험을 경고한 사람도 있었지만, 김제남은 광해군의 불안감을 감지하지 못하고 오히려 재산을 불림으로써 화를 자초하게 된 셈이다.

영창대군의 탄생으로 가장 난감해 진 사람은 바로 광해군이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발발 직후 국가 비상사태에서 세자 자리에 올랐다. 그는 어머니가 후궁이었기에 태생적으로 왕위 계승에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 유교 윤리가 지배하고 있던 조선 사회에서 집안의 대는 반드시 본부인이 낳은 아들이어야 한다는 원칙이 존재했는데, 적장자가 탄생해 버렸으니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 비록 전쟁 중 분조(分朝)를 잘 이끈 공이 있고, 오랜 기간 세자 자리에 있었다고는 하나, 광해군의 처지가 불안하게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유영경 등 소북파(小北派)는 당시 세자인 광해군이 서자(庶子)이며 둘째 아들이라 하여 영창대군을 옹립하고자 하였고, 대북파(大北派)는 광해군을 지지하였다. 그 때부터 조정 신료들은 영창대군을 후사로 삼자고 주장하는 소북파와 세자인 광해군을 추종하는 대북파로 갈라져 당쟁이 확대되면서 치열하게 싸웠다. 하지만 그 무렵 갑작스레 악화된 선조의 건강이 대세를 갈라놓았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선조의 여인들 - 인목왕후 3편

■ 선조의 여인들 - 인목왕후 3편

■ 선조의 여인들 - 인목왕후 3편

1607년 10월부터 병석에 누운 선조는 만일에 대비하여 광해군에게 전위하겠다는 비망기(備忘記)를 내렸다. 어린 영창대군으로는 전란(戰亂)으로 피폐해진 조선의 재기를 도모할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에 당황한 영의정 유영경과 소북 대신들은 광해군이나 대북파들에게는 그 내용을 비밀에 부쳤다. 하지만 대세는 이미 광해군에게 기울어져 있었다. 이듬해인 1608년 1월, 죽음을 예감한 선조는 중신들을 모아놓고 광해군에게 선위(禪位)교서를 내렸다. 그런데 또 다시 유영경이 이를 감추었다가 대북파의 영수 정인홍에게 발각되었다.

그리하여 유영경의 죄상을 취조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선조가 숨을 거두고 말았다. 다급해진 유영경은 영창대군으로 후사를 삼고 수렴청정을 하라고 인목왕후를 부추겼다. 그러나 선조의 유명(遺命)을 중시한 인목대비는 언문교지를 내려 광해군으로 하여금 보위를 잇게 했다. 그리하여 광해군은 16년 동안의 위태로웠던 세자 자리에서 벗어나 드디어 왕위에 오를 수 있었고, 광해군을 지지하던 대북파가 정권을 손에 넣었다.

광해군은 즉위하자마자 무너진 국가기반을 재건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면서 왕권 회복에 박차를 가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자신의 책봉에 반대하고 세손의 원손책봉과 혼인을 지연시켰으며, 선조의 전위(傳位)를 방해한 유영경을 처단하고 소북파 인사들을 대거 축출했다. 영창대군의 후원자였던 유영경이 죽음으로써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의 입지는 크게 불안해졌다. 또 광해군의 왕위계승에 불만을 품은 임해군을 강화도로 귀양 보냈고, 마침내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강화 현감 이직이 수문장 이정표에게 명하여 임해군을 죽이자, 영창대군을 지지하던 소북파들의 불안감은 더욱 고조되었다.

1612년(광해군 4년)에는 ‘김직재의 옥사’가 일어났다. 당시 조정에서 쫓겨난 서인과 소북파는 영창대군이나 능창군을 옹립하기 위하여 은밀하게 명나라에 사람을 보내 세자책봉과정을 재심해달라고 요청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대북파는 그 정보를 반대파 말살의 계기로 삼고 역모를 조작하여 김직재, 김백함 부자를 비롯하여 100여 명의 소북파 인사들을 대거 숙청했다. 그로부터 1년 뒤인 1613년(광해군 5년) 드디어 인목대비에게도 가혹한 시련이 다가왔다. 이른바 ‘칠서(七庶)의 옥(獄)’으로부터 비화된 ‘계축옥사(癸丑獄事)’의 서막이 올랐다.

- 4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