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11일 월요일

능언앵무能言鸚鵡 - 앵무새도 능히 말을 한다, 말만 앞세우고 실속이 없다.

능언앵무能言鸚鵡 - 앵무새도 능히 말을 한다, 말만 앞세우고 실속이 없다.

능언앵무(能言鸚鵡) - 앵무새도 능히 말을 한다, 말만 앞세우고 실속이 없다.

능할 능(肉/6) 말씀 언(言/0) 앵무새 앵(鳥/17) 앵무새 무(鳥/7)

사람들의 말이나 소리를 흉내 내서 귀여움을 받는 새 鸚鵡(앵무)는 이칭도 많다. 작은 앵무새를 흔히 말하는 잉꼬는 鸚哥(앵가)의 일본식 발음에서 왔다. 중국 唐(당)나라 玄宗(현종)과 楊貴妃(양귀비)의 사랑을 듬뿍 받은 雪衣娘(설의랑)은 하얀 앵무새를 가리켰다. 八哥(팔가)라 하여 스님의 염불도 따라 할 줄 안다고 한 새는 앵무새라 하기도 하고 달리 말 흉내 내는 九官鳥(구관조)를 가리킨다고도 한다. 어쨌든 영리한 놈은 100단어 가량 외우기도 한다니 사랑을 독차지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앵무새는 말 잘하여도 날아다니는 새다’란 속담은 말만 번지르르하고 실천이 따르지 않는 사람을 가리킨다.

능히 말을 할 수 있는(能言) 앵무새(鸚鵡)라는 말은 재주를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말만 앞세우고 행실이나 학식은 따르지 못하는 사람을 비꼰다. 孔子(공자)가 강조한 訥言敏行(눌언민행), 말을 느리고 잘못 하더라도 실천을 앞세우라고 한 것과도 대비된다. 유교 경전 ‘禮記(예기)’는 五經(오경)의 하나인데 大學(대학)과 中庸(중용)이 四書(사서)로 독립하기 전엔 여기에 포함됐다. 예의 이론과 실제를 담아 경서의 첫손에 꼽히는 이 책은 모두 49편이 전하는 중 제일 첫 편이 曲禮(곡례) 상편이다. 성어가 나오는 이 편 앞부분에도 좋은 말이 있으니 짚고 가면 좋겠다.

‘도덕과 인의는 예가 아니면 완성되지 않으며, 교훈으로 풍속을 바로잡는 것도 예를 따르지 않으면 이룰 수 없다(道德仁義 非禮不成 教訓正俗 非禮不備/ 도덕인의 비례불성 교훈정속 비례불비).’ 다음 절에 앵무가 등장한다. ‘앵무새는 능히 말을 할 줄 알지만 하늘을 나는 새일 뿐이며(鸚鵡能言 不離飛鳥/ 앵무능언 불리비조), 성성이란 원숭이도 말을 할 수 있지만 짐승에 지나지 않는다(猩猩能言 不離禽獸/ 성성능언 불리금수).’ 그러니 사람으로서 예절을 지키지 못하면 금수의 마음과 같다는 가르침이다.

웅변가의 청산유수 같은 말은 口若懸河(구약현하)라 하여 들을 때는 넋을 놓고 빠져든다. 특히 지도자를 뽑는 연설회에선 말 잘 하는 후보자가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킨 지도자 모세도 말에는 자신이 없었다고 하고, 역사상 뛰어난 웅변가 중에서도 말더듬이가 많았다고 한다. 말을 잘 하는 것보다 청중과 공감하고 본질을 잘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 말을 앞세워 지도자가 된 사람들, 실천도 못할 空約(공약)을 내세워 사후에는 나몰라하는 사람들은 앵무와 같은 셈이다. 아니 귀여움과는 거리가 머니 앵무보다 못하다. / 제공 : 안병화(前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동공이곡同工異曲 - 같은 악공이라도 곡조를 달리 한다, 겉만 다를 뿐 내용이 같다.

동공이곡同工異曲 - 같은 악공이라도 곡조를 달리 한다, 겉만 다를 뿐 내용이 같다.

동공이곡(同工異曲) - 같은 악공이라도 곡조를 달리 한다, 겉만 다를 뿐 내용이 같다.

한가지 동(口/3) 장인 공(工/0) 다를 이(田/6) 굽을 곡(曰/2)

唐宋八大家(당송팔대가)는 중국 唐(당)과 宋(송)나라 때의 뛰어난 문장가를 말하는데 당에서는 韓愈(한유, 768~824)와 柳宗元(유종원) 두 사람밖에 없다. 친구 사이인 둘은 고문운동을 제창하고 형식만을 추구하는 騈文(변문, 騈은 쌍말 변)을 반대하여 후학들에 기려졌다. 이 중 한유는 어려운 집안에서 독학하여 하급관리에 나섰지만 곧은 성품으로 벼슬자리에서 쫓기고 귀양을 가는 등 파란만장한 중에서도 명문을 남겼다. 그의 호를 딴 문집 昌黎先生集(창려선생집)에 실린 ‘進學解(진학해)’에 재주나 솜씨는 같아도(同工) 표현된 내용이나 맛은 다르다(異曲)는 이 성어가 나온다.

이 글에서 한유는 자기수양과 학문 탐구에 전념하는 것이 학자의 길이라 강조하고 그러면서도 재주와 덕이 뛰어난 인재가 빛을 보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 울분을 토했다. 여기엔 재미있는 성어도 많아 이 난에서 자주 등장했다. 쇠오줌과 말똥이라도 필요한 때를 대비하여 갖추는 것이 좋다는 牛溲馬勃(우수마발), 머리가 벗겨지고 이가 빠진 노인의 모습 頭童齒豁(두동치활), 남의 비밀이나 결점을 파헤치는 爬羅剔抉(파라척결, 爬는 긁을 파, 剔은 뼈바를 척, 抉은 도려낼 결) 등이다. 같은 악공이라도 곡조를 달리 한다는 이 말은 대화체의 글에서 제자들이 한유의 문장을 높이 평가하는데서 나왔다.

여기에서 한유의 글은 春秋(춘추)와 詩經(시경) 등의 근엄하고 아름다운 문장을 본받았다고 하면서 이어진다. ‘이후의 장자와 이소,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된 양웅과 사마상여와는 정교한 기량은 같아도 그 정취는 다릅니다(下逮莊騷 太史所錄 子雲相如 同工異曲).’ 離騷(이소)는 屈原(굴원)의 작품, 태사는 司馬遷(사마천)의 역사기록을 맡은 벼슬, 子雲(자운)은 前漢(전한) 말의 문인 揚雄(양웅)의 자, 相如(상여)는 역시 전한의 司馬相如(사마상여)를 말한다. 이들 문장가들과 비견하면서 색다른 광채를 발하는 스승의 글을 높이면서도 나라의 부름도 못 받고 고생하는 것이 합당한 일인가라며 불만을 늘어놓는다.

한 곡을 연주자에 따라 지휘자에 따라 다른 정감을 나타내는 것은 당연하다. 동등한 기량을 가진 사람이라도 정취가 다르다는 것은 처리하는 방법은 같아도 그 결과까지 같을 수가 없다는 것을 비유할 때 이 말을 썼다. 한유는 자신의 불우한 처지가 孔孟(공맹)같은 성현도 불우했는데 미관말직이라도 과분하다고 겸손해 했다. 이렇게 다양한 결과로 조화를 이루면 좋겠는데 오늘날의 쓰임새는 표현은 달라도 내용은 똑 같을 때, 또는 겉만 다를 뿐 변한 것이 없을 때 사용한다. 겉모습만 번지르르하게 꾸미고 완전히 다른 모습인 채 자랑하는 사람들에게 속지 않아야 한다. / 글 : 안병화(前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 상어와 악어의 장수 비결

◇ 상어와 악어의 장수 비결

◇ 상어와 악어의 장수 비결

요즘 전 세계 아이들이 푹 빠져 있는 노래가 ‘아기 상어’다. 이 노래만 나오면 손뼉을 치며 따라 부른다. 아이들이 크면 진짜 상어도 좋아할까? 그러지 않을 것이다. 섬뜩한 이빨이 가득한 거대한 입을 쩍 벌리고 달려드는데 누가 좋아하겠는가? 커다란 입을 가진 악어도 마찬가지다. 다들 질색한다. 아무리 봐도 호감을 끌 만한 구석이 없다.

이상한 건 이들이 서식하는 지역의 사람들이다. 평생 만날 일이 없을 우리는 질색하는데 의외로 추앙의 대상으로 삼은 곳이 많다. 우리가 호랑이를 영물로 대하듯 대단한 능력을 경외하는 까닭이다.

어떻게 이런 능력을 가졌을까? 삶의 내력이 간단치 않다. 무엇보다 ‘족보’가 길다. 우리 호모 사피엔스가 살아온 20만 년으로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인데 악어는 2억 년, 상어는 4억 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정도면 생명체 대부분이 사라지는 대멸종을 몇 번이나 겪었다는 건데, 도대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상어 중 가장 거대한 백상아리는 다 크면 몸무게가 3t에서 5t쯤 나간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영화 ‘죠스’에 출연시켜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바로 그 주인공인데, 사실 백상아리를 비롯한 상어들은 생각만큼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 워낙 험악해 보이는 데다 스필버그와 다른 영화인들이 전생에 무슨 악연이라도 있는 듯 과장되게 묘사해서 그럴 뿐이다.

하지만 스필버그가 제대로 짚은 게 있다. 덩치가 산(山)만 해서 둔할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보다 200배나 더 소리를 잘 듣고, 몸 옆으로 뻗은 측선으로는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진동까지 느낀다. 후각은 더 뛰어나 여의도만 한 넓이에 떨어진 피 한 방울을 감지할 정도다. 주변 상황 파악에 아주 탁월하다. 행동력은 말할 필요도 없다.

악어 역시 뒤지지 않는다. 녀석은 우리가 들을 수 없는 저주파로 상황을 감지해 잔물결 하나 일지 않게끔 길이 5m, 무게 500kg의 커다란 덩치를 스텔스처럼 움직인다. 그렇게 사정거리에 들어온 먹이를 초속 9m로, 그러니까 눈 깜짝할 사이에 잡아챈다.

더 놀라운 건 이들의 형태다. 아득히 먼 시대에 살았던 조상들과 거의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대멸종 같은 환경은 생명체들에게 엄청난 변화를 필수적으로 요구하는데 별 변화가 없었다는 건 바꿀 필요가 많지 않은, 한마디로 시작을 잘했다는 뜻이다. 시작을 잘했으니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개선하고 수선하는 시행착오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었고 덕분에 에너지 소모를 최소화할 수 있어 변화의 파고를 잘 이겨낼 수 있었을 것이다. 좋은 시작이 장수의 바탕이 됐다는 얘기다.

하긴 무엇이 그렇지 않겠는가. 시작이 좋아야 마무리도 좋다.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에 속수무책으로 휘둘린 한 해가 가고 새로운 해가 밝았다. 기분 좋은 시작이 필요할 때다.

-동아일보-

◇ 비디오테이프에 담긴 딸들 옹알이, 이제 폰으로 볼 수 있어요

◇ 비디오테이프에 담긴 딸들 옹알이, 이제 폰으로 볼 수 있어요

◇ 비디오테이프에 담긴 딸들 옹알이, 이제 폰으로 볼 수 있어요

서울 중랑구에 사는 장경순(63)씨는 이달 초 장롱에서 30년 묵은 비디오테이프를 발견했다. 1989년 자신의 결혼식 때 촬영한 영상 테이프였다. 반가운 마음에 틀어보고 싶었지만 집에 VCR(비디오테이프 재생기)이 없었다. 수소문 끝에 장씨는 지난 9일 한 영상업체를 찾아 이를 디지털 영상으로 변환했고 최근 아내, 세 자녀와 나란히 앉아 영상을 봤다. 스물다섯인 막내딸은 부모님의 결혼식 영상을 소셜미디어 인스타그램에도 올렸다.

서울 양천구에 사는 김윤경(47)씨도 작년 12월 구청 산하 문화원을 통해 비디오테이프 8개를 디지털 영상으로 변환했다. 김씨는 “두 딸의 어린 시절 모습을 담은 영상을 함께 보면 사춘기 때문에 말수가 줄어든 고2, 중3인 딸과 대화를 더 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신청했다”고 했다. 영상에는 옹알이하는 첫째가 갓 태어난 둘째를 돌보는 모습, 딸이 아빠에게 뽀뽀하는 모습들이 담겨 있었다. 김씨는 “영상을 함께 보고 나서 대화가 더 많아졌다”고 했다.

집 안 곳곳에 ‘유물(遺物)’처럼 보관해 온 비디오테이프를 디지털 영상으로 변환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과거의 추억이 담긴 테이프를 찾아내더라도 VCR이 사실상 사라져 이를 재생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시민들의 이런 수요를 파악한 지자체들은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코로나 확산 이전 서울시 지자체 중 디지털 영상 변환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은 강서구 한 곳이었다. 최근엔 동대문·성동·송파·양천구 등 5곳으로 늘었다. 구청이나 산하 문화원에서 5000원 안팎의 비용을 받고 변환 서비스를 제공한다. 서울 동작구·성북구도 올 상반기 중 서비스를 시작할 계획이다.

서비스를 제공하는 이들은 “생각보다 반응이 뜨겁다”고 입을 모은다. 서울 양천구 관계자는 “작년 9월 처음 서비스를 시작할 때는 377건의 변환 요청이 들어왔는데, 12월에는 929건으로 거의 3배가 됐다”고 했다. 작년 11월 서비스를 시작한 성동구는 ‘한 달에 10명쯤 오겠거니’ 했다가 300명이 몰리자, 부랴부랴 변환 장비를 기존 3대에서 5대로 늘렸다.

서울 송파구의 영상 변환 업체 스마트메모리즈 관계자는 “작년 12월 한 달에 들어온 의뢰 접수만 2700여 건으로 1년 전보다 1000건 가까이 늘었다”고 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마스크를 쓰지 않았던 과거 가족들의 얼굴을 보며 편안함과 안락함을 다시금 느끼려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이라며 “제약이 많은 현실 대신 과거의 영상을 일종의 도피처로 삼는 것 같다”고 했다.

-조선일보-

◇ 반갑다, 싸이월드

◇ 반갑다, 싸이월드

◇ 반갑다, 싸이월드

“정보화 시대가 되면 한국 사람이 세계를 주름잡을 것이다.” 김영삼 정부에서 경제부총리를 지내고 부산 동래구 등에서 3선 국회의원을 거친 강경식 전 부총리가 자주 하던 말이다. 여기엔 나름 근거가 있다. 과거에는 더하기를 알아야 곱셈을 이해하는 계단식 학습이었지만 컴퓨터가 등장하면서 별 관계없는 프로그램을 여기저기 오가며 배우는 널뛰기가 가능해졌다. 불분명하고 애매모호함 속에서 길을 찾아가는 일종의 퍼지(fuzzy) 방식이다.

아날로그 시대에는 치밀하고 정교하고 조직적인 일본이나 독일식 문화가 통했지만 디지털 시대가 오면 유행에 민감하면서도 대충대충 속도전에 능한 한국 사람들이 훨씬 더 빨리 적응할 것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같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시작은 ‘아이러브스쿨’을 빼놓고 말할 수 없다. 한국 뿐만 아니라 세계 최초의 SNS였기 때문이다. 온라인 동창회 개념은 인맥을 중시하는 한국인의 기호와 맞아 떨어지며 인기가 폭발했다. 1999년 서비스 개시 1년도 안돼 가입자 500만 명을 찍었다. 그러나 콘텐츠의 진보와 확장이 없었던데다 온라인 모임이 오프라인으로 이어지자 친구찾기 놀이는 시들해졌다.

한국의 저커버그가 탄생할 수 있었다는 아쉬움과 함께 회상되는 회사가 ‘싸이월드’다. 1999년 탄생한 싸이월드는 가상공간을 꾸미는 미니홈피부터 가상화폐 도토리까지 파격과 신선함 그 자체였다. 한때 누적 가입자가 3200만 명에 달했던 국민 사이트다. 페이스북의 원조격을 5년이나 먼저 내놓았지만 모바일 시대의 변화 흐름을 읽지 못하고 해외시장에 눈뜨지 못해 슬슬 도태됐고, 사이트에 저장된 100억 장 이상의 사진과 동영상은 디지털 수몰 위기까지 갔다. 다행히 완전히 사라질 줄 알았던 싸이월드가 회생 기미를 보이고 있다.

싸이월드Z라는 신설 법인이 운영권을 양수해 다음달 중으로 기존 서비스를 정상화한다는 소식이다. 싸이월드 모바일은 물론, 도토리도 새롭게 부활한다고 한다.

1980, 90년대 ‘가장 한국적인 게 가장 세계적이다’는 말 속에는 약간은 국수주의적인 자기 합리화와 억지가 있었다. 그러나 유튜브를 타고 퍼진 BTS와 블랙핑크의 음악이 세계 음원시장을 휩쓸고 한류 드라마가 넷플릭스를 점령하는 지금은 한국의 소프트파워가 세계의 표준이 되어가는 세상이다. 그런 한국인의 잠재력을 일찌감치 선보였던 싸이월드가 돌아온다는 건 ‘추억의 소환’ 이상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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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신문 도청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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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얀마 쿠데타와 세 손가락 경례

◇ 미얀마 쿠데타와 세 손가락 경례

◇ 미얀마 쿠데타와 세 손가락 경례

쿠데타가 일어난 미얀마의 시민들 사이에서 ‘세 손가락 경례’가 번지고 있다. 하늘을 향해 펼치는 검지·중지·약지는 선거, 민주주의, 자유를 뜻한다. 거리에 나선 시민들의 세 손가락 경례엔 저항의 뜻이 담겼고, 세 손가락 사진이나 그림이 ‘미얀마는 민주주의를 원한다’ ‘시민불복종 운동’ 같은 해시태그를 달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퍼지고 있다.

세 손가락 경례는 지난해 태국 민주화 시위 때도 쓰였다. 시민들은 군부가 제정한 헌법 개정, 의회 해산과 총리 퇴진, 왕실 개혁 등을 요구하며 세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한 시위 참가자가 ‘세 손가락 경례’를 하며 경찰의 물폭탄에 맞서는 사진이 전 세계의 주목을 끌기도 했다. 태국에서는 2014년 군부 쿠데타 때 세 손가락 경례가 처음 등장했으며, 이후 태국 민주진영의 상징처럼 각인됐다.

세 손가락 경례는 영화 <헝거 게임: 판엠의 불꽃>(2012년)에서 차용된 것이다. 가상국가 ‘판엠’의 독재정부 캐피털은 반란 지역인 12개 구역에서 12~18세 청소년들을 뽑아, 한 명이 남을 때까지 서로 죽이도록 하는 헝거 게임을 매년 치르게 한다. 16세 소녀 캣니스 에버딘이 여동생을 대신해 헝거 게임에 나서자, 주민들은 지지 뜻으로 세 손가락을 펼쳐보인다. 캣니스는 완결편인 4탄에서 혁명군의 중심이 돼 독재정부를 무너뜨린다.

세 손가락 경례처럼 세상에는 다양한 저항운동 방식이 이어지고 있다. 미얀마에선 냄비와 깡통을 두드리며 “민주주의”를 외치는 ‘발코니 시위’가 벌어지고, 태국에선 경찰의 물대포 사용을 풍자하는 노란색 오리보트가 등장했다.

낙태 합법화를 요구하는 아르헨티나 시위는 녹색 머플러와 옷이 물결을 이뤘다. 2019년 홍콩 민주화 시위 때 시민들은 행정장관 직선제 등 5대 요구사항을 뜻하는 다섯 손가락을 편 채 행진했으며, 일부는 영화 <브이 포 벤데타>에 등장해 저항 상징이 된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쓰고 거리로 나섰다.

복잡한 인간사, 시위 없는 세상은 없다. 그나마 이러한 창의적 시위는 물리적 충돌과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눈여겨볼 만하다. 소리 없는 저항이지만, 어떤 구호나 함성보다 파급효과가 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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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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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장수 독립운동가 정남국 2편

■ 엿장수 독립운동가 정남국 2편

■ 엿장수 독립운동가 정남국 2편

1926년 일제는 소안면민들이 스스로 힘을 모아 만든 사립소안학교를 강제로 폐교시켜 공립학교로 개편하려고 하였다. 7월 13일 그는 공립학교 개편에 반대하는 면민대회에서 사회를 맡아 진행하였다. 그리고 전남도청을 방문하여 항의하였으나, 성과는 없었다. 선생은 그 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1927년 5월 10일 일본 오사카에서 ‘완도향우회’와 ‘동경향우회’가 힘을 합해 재 일본노동총동맹을 조직하고 집행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사립소안학교를 강제 폐쇄하는 총독부에 대항하기 위해 ‘조선총독부 실정반대실행위원회’를 조직하고 규탄대회를 개최하였다. 1927년 6월 재일조선노동총동맹위원장으로 추대 받고 오사카 항구에서 4개 단체 회원 8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합동대회를 열었다. 축사를 하는 도중 일본 경찰이 들이닥쳐 대회는 무산되고, 선생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다시 옥고를 치렀다.

다시 국내로 돌아왔다. 당시 전라도는 총독부에서 일본이 만든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일본인에게 국유지(國有地)를 불하(拂下)하고 있었다. 그래서 선생은 이번에는 농민운동을 하기로 작심한다.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일본인들이 총독부로부터 불하받은 땅은 원래 현지에서 농민들이 경작하고 있던 농토였다. 당연히 현지 농민들은 자기가 벌어먹고 사는 땅이었기 때문에 자기 땅으로 알고 있었지만, 자신들의 땅으로 등기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국유지로 되어있었던 것이다. 농민들 입장에서는 갑자기 농토를 잃고 소작인이 되어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다. 게다가 일본인들은 소작료를 터무니없이 높게 받았다. 그 대표적인 지역이 완도를 비롯한 신안의 섬 지역과 영광, 무안, 해남등지였다.

이때부터 시작된 전라도의 소작쟁의(小作爭議)는 결국 항일운동으로 이어졌다. 선생은 소안도에서 토지반환소송에 승소했던 경험을 살려 다른 지역의 농민들을 선동하였다. 대표적인 소작 쟁의로는 1923년의 암태도 소작쟁의가 있고 다음으로 하의3도를 시작으로 영광, 해남등지에서 대대적으로 펼쳐졌다. 이 농민운동에 불을 붙여준 사람이 바로 정남국선생이다. 청산도 출신 김흥곤은 광주에서 기자 생활을 하면서 신안으로 내려가 소작쟁의를 취재하여 전국에 알리는 역할을 했다.

해방 이후 선생은 1951년 5월 31일 실시한 국회의원선거에서 제2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하지만, 항일운동으로 체포되어 수많은 고문과 감옥살이로 병들고 허약해진 선생은 4년 임기가 끝나고 바로 여수병원에 입원하여 치료하던 중 1955년 6월 19일 타계하였다. 1990년 8월 15일 건국훈장애국장(제83호)이 추서되었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엿장수 독립운동가 정남국 1편

■ 엿장수 독립운동가 정남국 1편

■ 엿장수 독립운동가 정남국 1편

정남국(鄭南局:1897-1955)선생은 한평생 항일운동을 하다가 수감과 석방을 반복했는데, 생애 58년간 일경(日警)에 체포되어 수감된 것이 무려 93회, 기간은 약 10년으로 감옥살이 횟수는 항일민족운동자 중 최고의 기록일 것이다. 선생은 일본어를 잘했기에 재판과정에서 변호사 없이 본인을 변론하여 감형을 받았기에 그나마 10년이지, 그러지 못했다면 20년도 넘었을 것이라는 것이 당시 사람들의 이야기다.

정남국은 1897년 완도군 소안면 비자리의 가난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은 15세가 넘도록 가정이 빈곤하여 완도읍으로 유학할 수가 없어 바다에서 해조류를 채취하며 가정을 꾸려나갔다. 선생은 또래들이 완도읍에 유학하여 사립보통학교에 다니는 것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고 한다. 완도 유학을 갈망하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던 부친에게은 어려운 형편이지만 선생을 완도사립보통학교에 입학시켰다. 입학은 하였으나 어려운 형편에 월사금(학비)을 감당할 수가 없어 이듬해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해조류 수집상에서 일하면서 일본어를 습득하였다. 여기에서 4~5년간 모은 돈을 통틀어 일본대학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이것도 오래가지 못하고 2학기에 중퇴하고 고향인 소안도로 다시 돌아왔다.

1914년 소안도에 ‘배달청년회’가 결성되자 부회장을 맡게 되었고‘ 그때부터 항일투쟁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 1919년 3.1만세운동 때는 완도에서 만세운동을 하고, 전남노동연맹 상임위원으로 활약하면서 항일운동의 대표적인 사람인 송내호의 권유로 상해임시정부 지원군자금 모금원이 되었다. 당시에 일경의 감시를 피하기란 매우 어려웠다. 그래서 감시를 피하고자 엿장수로 변장하여 전남 일원을 돌아다니면서 동지를 규합하고 동지들 간 비밀연락책이 되었다.

스스로 ‘일황 사형선고장’을 만들어 엿판 아래 숨겨 다니면서 동지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엿장수는 일경의 감시를 피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엿장수독립운동가’로 알려지면서 다시 ‘소쿠리장수’로 변장하여 전남 일대를 누볐다. 당시 전라도 동지들 간에는 ‘엿장수 정서방’ 또는 ‘소쿠리장수 정도령’으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어렵게 모은 자금을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하기 위해 한양에서 출발 신의주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일본헌병대 검문이 삼엄하고 자신은 전과가 있기에 동지에게 자금 보따리를 맡기고 검문이 끝나면 만나자고 약속하고, 만약 내가 체포되더라도 이 자금은 임시정부에 꼭 전달해야 한다고 부탁했다. 예상대로 선생은 검문에서 다른 전과 때문에 체포되어 신의주 법원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항소하여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받아 복역하였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안사람의병대 대장 윤희순 6편

■ 안사람의병대 대장 윤희순 6편

■ 안사람의병대 대장 윤희순 6편

이듬해 6월 13일 유돈상이 처갓집에 머물러 있다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됐다. 무순감옥에서 한 달간 고문에 시달리던 그는 7월 19일 숨을 거뒀다. 감옥 밖으로 내던져진 시신은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칼에 찔린 자국 천지였다고 한다. 아들의 시신 앞에서 윤희순은 부르짖었다.

“차라리 내가 죽고 말면 오죽 좋겠습니까. 우리는 만리타국에서 누굴 의지하고 살며 연직이와 연익이 이 어린 것을 누구에게 맡기오리까.” 며느리도 울부짖었다. “어머니, 만날 나가서 독립운동 하려고 하시더니 이 꼴을 보려고 그러셨습니까. 좋은 세상은 더욱 멀어지고 갈수록 험악하니 독립운동이 사람만 죽인 꼴이니 하늘이 원망스럽습니다.”

절망에 몸부림치던 며느리는 남편을 따라 세상을 떴다. 아들 유돈상과 며느리의 연이은 죽음에 말을 잃은 윤희순은 곡기를 끊었다. 아들이 숨진 지 열하루 째 되던 날 침묵 속에서 붓을 떨며 집필하던 <일성록>을 내놓았다. 그리고 그녀는 파란 많은 생애를 마감했다. 윤희순의 나이 일흔 다섯이었다. <일성록>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적혀 있다.

“매사를 시대에 따라 옳은 도리가 무엇인지 생각하며 살아가기 바란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던지는 말인 것 같다.

윤희순은 여성의 연대를 꾀하고 투쟁 노래를 통해 독립의 의지를 다지는 삶을 살다 갔다. 그녀에게는 열혈 투혼을 가진 가족이 있었고, 가문 전체가 독립부대가 되어 싸웠다. 윤희순은 외세와 타협 없는 투쟁을 몸소 실천한 ‘춘천의 잔다르크’였다.

나라없이 살 수 없네 나라 살려 살아보세

임금없이 살 수 없네 임금 살려 살아보세

조상없이 살 수 없네 조상 살려 살아보세

살 수 없다 한탄 말고 나라 찾아 살아보세

전진하여 왜놈 잡자 만세 만세 왜놈 잡기 의병 만세

- 윤희순의 <의병군가> -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안사람의병대 대장 윤희순 5편

■ 안사람의병대 대장 윤희순 5편

■ 안사람의병대 대장 윤희순 5편

윤희순은 조선에서 날아드는 편지를 읽을 줄 아는 동포가 드물다는 점을 안타까이 여겨 1912년 만주 환인현에 ‘노학당(老學堂)’을 설립했다. 아마도 이곳에 학교를 세워 항일 인재를 양성하겠다는 생각을 했던 듯하다. 윤희순이 교장인 이 학교에는 독립투사들이 세운 동창학교 선생들이 와서 국어·산수·역사를 가르쳤다. 50여 명의 항일운동가를 배출했으나 3년 뒤 일제에 의해 폐교되고, 노학당 자리에는 옥수수밭이 들어섰다. 노학당 시절 윤희순은 정신적 지주를 잃었다. 1913년 12월 시아버지 유홍석이 72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1915년 윤희순은 탄광촌인 무순시 포가둔으로 이사를 갔다. 여기에서 그녀는 중국인들에게 항일투쟁을 연대하자고 꾸준히 설득했다. 그녀의 제안으로 실제로 항일운동에 가담한 중국인이 상당수 있었다고 한다. 1915년에는 남편 유제원과 재종 시숙이자 집안의 버팀목인 유인석 의병장이 잇따라 타계했다. 이런 죽음 속에서도 55세의 윤희순은 더욱 강해졌다.

1920년 만주에서 김좌진·홍범도 장군에게 대패한 일본군이 간도의 조선인을 무차별 살상하는 간도참변이 일어났다. 이때 윤희순은 위축된 독립운동을 되살리기 위해 그녀의 아들들과 함께 한·중 애국지사 180명을 찾아다니면서 규합 활동을 벌인 끝에 ‘조선독립단’을 결성했다. 조선독립단 단장은 윤희순, 유돈상, 음성국(유돈상의 장인)이었다. 조선독립단에는 이들의 가족, 친척이 모두 참여했다. 이른바 ‘윤희순 가족부대’로,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사격연습을 하며 게릴라 활동을 펼치는 항일투쟁 패밀리였다.

큰아들 유돈상, 둘째 아들 유교상, 조카 유휘상, 며느리 원주 한씨가 주전 멤버였다. 교상은 어린 시절 문서를 전하려고 말을 타고 달리다 떨어져 다리를 절었지만, 그에 아랑곳 않고 전투에 참가했다. 돈상의 아들은 굴렁쇠를 굴리고 다니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 독립운동 연락책 노릇을 했다고 한다. 또 돈상은 ‘조선독립단 학교’를 운영하기도 했다. 1932년 ‘조선독립단’에 중요한 기회가 찾아왔다. 양세봉이 이끄는 조선혁명군과 연합작전을 펼치기로 한 것이다. 9월 15일 무순을 지나는 일본군 철도 운수선을 습격하는 일이었다. 윤희순은 말이 먹을 풀과 군인 식사를 제공하는 일 그리고 부상자를 치료하는 일을 맡았다. 이때 윤희순의 나이 72세였다. 하지만, 무순 함락작전은 실패로 끝났고, 이튿날 일제는 3000명이 넘는 조선인과 중국인을 대량 학살했다. 윤희순은 눈물을 머금고 봉성현 석성으로 주소를 옮겼다.

석성에서 윤희순은 둘째 손자(유돈상의 둘째 아들)를 보았다. 기쁨도 잠시. 1934년 첩첩산중에 일본군이 들이닥쳐 마을에 불을 질렀다. 남자들은 대부분 외출하고 여자들밖에 없는 마을이었다.

- 6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