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13일 수요일

무왕과 선화공주의 러브스토리 3편

■ 무왕과 선화공주의 러브스토리 3편

■ 무왕과 선화공주의 러브스토리 3편

《삼국유사》에 실린 이 이야기에 대한 사실 여부를 따지기 보다는 숨겨진 의미를 읽어내는 일이 중요하다. 여기에는 민중의 처지를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인심을 얻을 수 있고, 그 공감을 바탕으로 민중이 바라는 정치를 해줄 수 있어야 왕 노릇을 할 수 있다는 뜻이 담겨 있다. 선화 공주와 혼인해 진평왕의 사위가 됨으로써 신라와 더는 충돌하거나 전쟁을 하지 않고 평화롭게 지내기를 바라는 백제 사람의 바람이 담겨 있기도 하다.

무왕은 사실 힘없는 왕족이었다. 성왕이 신라를 공격하다 죽고 난 이후 왕권은 약해지고 귀족들의 권력이 더욱 강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위덕왕의 뒤를 이은 법왕이 즉위 1년 만에 후손없이 죽자 무왕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무왕은 귀족 세력을 누르고 왕의 힘을 키우기에 힘썼다. 선화 공주와 결혼하여 신라와도 다시 가깝게 지내고, 수나라를 끌어들여 고구려를 공격하려고도 했다. 그러나 수나라는 무리하게 고구려를 공격하다 나라의 힘을 잃어 망하고, 신라는 등을 돌려 적이 되면서 백제는 또 다시 어지러운 상황에 빠지게 되어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무왕은 백제를 다시 한번 일으키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던 것이다.

선화공주의 요청으로 짓게 되었다고 하는 미륵사는 삼탑 삼금당으로, 중앙에는 목탑을 두고 동서로 석탑을 세운 백제 최대의 사찰이었지만 지금은 그 터만 남아있다. 중앙의 목탑과 서탑은 없어지고 허물어져 버렸고, 동탑만이 일제에 의해 콘크리트로 보강된 채 남아 있었다. 1998년 해체 복원 결정 이후, 185톤이나 되는 콘크리트 덩어리를 일일이 수작업으로 떼어내고 해체 복원하는데 13년의 시간과 140억 원의 자금이 들어가는 엄청난 일이었다.

학계의 논쟁이 가장 뜨거워졌던 것은 2009년 미륵사지 석탑 해체 과정에서 유물들이 쏟아져 나오면서이다. 2009년 1월 서탑 해체 시 주기둥 안에서 금제 사리호와 금제 사리봉안기가 발견되었다. 또한 사리호 안에는 사리병이 있었는데 이를 발견하고 꺼내는 데에만 2년이 걸렸다고 한다. 사리병 안에는 진신사리가 보관 되어 있었다. 사리봉안기는 가로 15.5㎝, 세로 10.5㎝의 크기의 판에 앞뒤로 붉게 칠한 193문자로 미륵사의 창건 내력을 적고 있다. ‘무왕의 왕후가 재물을 희사해 가람을 창건하고 기해년에 사리를 봉안함으로써 왕실의 안녕을 기원했다’는 내용과 함께 ‘백제 왕후는 좌평 사택적덕의 딸’이라고 적혀 있다는 것이다. 사택은 백제 8대 성의 하나다. 그렇다면, 이제까지 삼국유사의 기록을 토대로 선화공주가 무왕의 왕후였으며, 미륵사지도 선화공주를 위해 무왕이 지은 것이라는 내용을 완전히 뒤집는 내용이어서 논란이 일었다. 이 내용대로 왕후가 선화공주가 아니라 당대 최고의 관직 좌평인 사택적덕의 딸이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국경을 초월한 무왕과 선화공주의 사랑이야기가 결국 허구가 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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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무왕과 선화공주의 러브스토리 2편

■ 무왕과 선화공주의 러브스토리 2편

■ 무왕과 선화공주의 러브스토리 2편

백제는 신라처럼 성씨를 이유로 결혼에 대해 엄격한 제한을 두지는 않았다. 하지만 서기 6세기 후반 경에 태어난 서동은 백제 위덕왕의 아들로 알려져 있고, 위덕왕의 아버지인 성왕을 죽인 자가 바로 신라 진평왕의 아버지인 진흥왕이었다.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원수 놈의 손녀를 데려올 수는 없는 일이었다. 미래에 서동의 아내가 될 사람은 선대의 원수인 진흥왕의 손녀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당시 백제와 신라의 왕이나 신하들은 대개 두 나라간의 살육 전쟁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자손이기 때문에 이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사정이 이런데도 서동은 성장하면서 아름답기로 소문이 자자한 선화공주의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싶다는 일념으로 신라의 동경(지금의 경주)을 찾아갔다. 그리고 거기에서 그는 머리 깎고 어느 대사의 제자가 되었다. 당시 신라는 불교를 숭상했다. 왕이나 왕족이 궁중에 승려를 초청하여 불공을 올리거나 설법을 듣곤 하던 때였다. 서동은 설법이 열리는 기회를 이용하여 오래도록 그리던 선화공주를 만나게 되었는데, 먼발치에서 바라만 보아도 첫눈에 반할만큼 아름다웠다. 그녀에게 푹 빠진 서동은 선화공주를 아내로 삼겠다고 결심하고 궁리를 했다. 하지만 국적도 다르고, 신분도 다른데다 수중에 가진 것도 없으니 그야말로 첩첩산중이었다. 하지만 서동은 포기하지 않고, 한 가지 꾀를 냈다. 서동은 서라벌의 마을 아이들에게 자신이 가져온 마를 나눠주며, 자기가 지은 동요를 가르쳐주고 따라 부르게 했다. 『선화 공주님은 남 몰래 짝을 만나 서동을 몰래 밤에 안고 간다.』

이 동요는 순식간에 서라벌 곳곳으로 퍼졌고, 마침내 진평왕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몹시 노한 진평왕은 선화공주를 멀리 귀양 보내고 말았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귀양길에 나선 선화공주가 유배지로 향하고 있었을 때, 갑자기 한 사내가 나타나 공주님을 모시고 가겠다면서 말고삐를 잡았다. 선화공주는 그가 노래의 주인공인 서동일 것이란 생각은 꿈에도 모른 채 동행하기로 했다. 선화공주는 서동과 함께 먼 길을 떠나면서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느 새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둘은 마침내 사랑을 이루고 장래를 약속했다. 그제서야 서동은 자신이 한 행동을 밝혔고, 선화공주는 정말로 노래의 내용이 맞았다면서 기뻐했다. 그리하여 서동은 선화공주를 데리고 백제로 돌아왔다.

공주는 가난한 서동의 살림을 보고는 어머니가 몰래 싸준 황금을 서동 앞에 내놓았다. 그제서야 황금의 가치를 알게 된 서동은, 자기가 마를 캐는 산에 널려있는 황금을 캐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은 황금은 어느새 산처럼 쌓이게 됐고, 두 사람은 이것을 선화공주의 아버지인 진평왕에게 보내기로 했다. 하지만 너무나 무겁고 많은 황금을 몰래 보내기는 어려운 일인지라 두 사람은 신통력 있다고 소문난 지명법사를 찾아갔다. 공주는 황금과 함께 부모님에게 쓴 편지를 법사에게 맡겼고, 법사는 이것을 신통력을 이용해 신라 궁궐로 보냈다. 이것을 받은 진평왕은 몹시 놀랐으며, 서동의 지혜와 도량에 매우 감탄하여 두 사람의 혼인을 인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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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왕과 선화공주의 러브스토리 1편

■ 무왕과 선화공주의 러브스토리 1편

■ 무왕과 선화공주의 러브스토리 1편

삼국시대 백제 무왕과 신라 선화공주의 ‘러브 스토리’는 역사적 사실일까. 아니면 가공된 설화일까. 한국 고대사에 있어서 유명한 이 이야기는 숱한 논쟁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명확하게 규명되지는 않았다. 무왕과 선화공주가 묻혀 있는 것으로 전해지는 전북 익산의 ‘쌍릉’(사적 87호)에서 인골이 담긴 나무상자 등이 확인되면서 무왕과 선화공주의 사랑이야기는 실화였을 것이라는 의견이 관심을 끌고 있다. 쌍릉이 무왕과 선화공주의 무덤이라는 내용은 《고려사 지리지》나 《동국여지승람》 등 조선시대에 편찬된 문헌들에도 일부 기록되어 있다.

그동안 미륵사지 발굴조사나 미륵사지 석탑의 해체보수 과정 등에서도 선화공주와 무왕의 관계를 밝혀줄 유구(遺構), 유물(遺物)들이 확인된 바가 있다. 그러나 그 유물이나 유구의 해석을 놓고도 학자들의 견해는 다시 엇갈려 명확한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무왕과 선화공주 이야기는 고려시대에 편찬된 일연이 지은 역사서 《삼국유사》에 실려 있다. 부여의 남쪽 어느 마을에 남편을 잃고 혼자 살아가는 여인이 있었다. 그녀의 집 앞에는 커다란 연못(궁남지)이 있었는데 어느 날 밤, 그 연못에서 커다란 용이 나왔다. 용은 여인이 자는 방에 들어와 입에 물고 있던 커다란 여의주(如意珠)를 뱉어 놓았다. 여인은 갑자기 용이 나타나자 매우 놀랐지만 침착함을 잃지 않고 떨어지는 여의주를 치마로 받아 소중하게 간직했다. 그로부터 열 달 후, 여인은 사내아이를 낳게 되었는데, 이름은 장이다. 이것은 당시 위덕왕이 과부로 홀로 지내고 있던 여인과 정을 통해 아이를 낳은 이야기를 설화적인 요소를 가미해서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정실소생의 적자가 아니고 어머니는 미천한 과부 출신이므로, 이는 무왕의 최대 약점인 동시에 또한 극복 요소였다.

어려서부터 용감하고 똑똑했던 이 아이는 어머니와 함께 마를 팔아서 생활을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아이를 ‘마를 파는 아이’라는 의미로 마동(서동:薯童)이라고 불렀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서동요(薯童謠)’의 주인공으로, 그 당시로는 파격적인 삼국시대 판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을 이루어 냈다. 서동과 선화공주는 장애요소를 극복하고 국경을 뛰어넘는 사랑을 마침내 이루어내어 삼국에서 가장 유명한 커플이 된 것이다.

신라 진평왕에게는 아들은 없고 딸만 있었다. “신라의 왕이 된 것이 나의 자랑이 아니라 선화의 아비가 된 것이 나의 자랑이노라.”라고 말할 정도로 둘째 딸인 선화공주를 특히 이뻐하였다고 한다. 당시 신라에서는 대대로 박·석·김 3성이 상호 결혼했다. 다른 성씨의 딸을 3성의 집에 들일 수는 있어도, 3성의 딸을 다른 성씨에게 시집보낼 수는 없었다. 신라 소지왕이 백제 동성왕에게 딸을 주었다는 예가 있다고 하지만, 실은 친딸이나 친누이가 아니라 6부 귀족의 딸이거나 누이였다. 그러므로 진평왕의 입장에서는 자기 딸인 김선화의 미래 남편은 박씨가 아니면 석씨이거나 동성인 김씨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선화공주는 신라인도 아닌 백제 부여씨인 서동의 아내가 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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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성왕 3편

■ 백제 성왕 3편

■ 백제 성왕 3편

554년 성왕은 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태자 창(昌)의 강경한 주장을 받아들여 신라를 침공하기 위한 군사를 일으켰다. 이 신라 정벌군에는 가야와 일본의 원군도 합세하였다. 백제의 이와 같은 군사 동원으로 양국 간의 대결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전투의 절정은 관산성 전투였다. 성왕의 최후는 비극적이었다. 일본서기에 보면 음력 12월 아들인 창(昌)이 신라를 쳐들어가 구타모라(久陀牟羅)에 요새를 쌓고 있었는데, 오랫동안 전장에서 침식도 잊고 지내던 아들을 안쓰럽게 여긴 성왕(聖王)은 이를 위로하러 관산성으로 향했다. 관산성은 지금의 충청북도 옥천에 있었으며, 지금 옥천군 군서면 월전리 9-3번지 부근은 성왕사절지(聖王死節地), 즉 성왕이 최후를 맞이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성왕이 온다는 정보를 미리 입수한 신라군은 주요 도로를 차단하고 성왕에 대한 기습을 감행했고, 불과 50명밖에 데리고 있지 않았던 성왕은 매복하고 있던 신라의 고도(苦都)가 이끄는 군사에 사로잡혀 죽음을 당하였고, 이 전투에서 백제군은 성왕을 비롯하여 3만에 가까운 군사를 잃을 정도로 대패(大敗)를 당했다. 성왕의 목은 신라 왕궁 북청의 계단 밑에 묻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밟히는 수모를 당하게 되었고, 나머지 몸은 백제로 반환되었다. 이로써 그동안 강력하게 추진되어온 왕권강화와 이를 통한 백제의 중흥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와 더불어 1세기 이상 신라와의 사이에 맺어졌던 나제동맹 관계는 이 싸움 이후부터 완전히 결렬되었다. 이리하여 두 나라는 최후까지 적대적으로 대결하는 불구대천의 원수 관계가 되었다. 백제는 신라 타도를 기치로 내걸며, 어제까지만 해도 서로 적이었던 고구려와 새롭게 손을 맞잡고 공동으로 신라에 대항하는 새로운 상황이 전개됐다.

패전의 결과로 국내 정세도 심대한 영향을 받아 동성왕 이후 성왕 대까지 어렵게나마 확립되어 가던 왕권 중심의 정치 체제가 다시 귀족 중심의 정치 운영 체제로 전환되었다. 귀족들이 다 뜯어말린 전쟁임에도 성왕 본인과 태자가 강행했다가 왕은 전사하고 무려 3만에 이르는 전사자가 발생하였으며, 어마어마한 피해가 누적되었으니 왕권의 추락은 불가피한 결말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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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성왕 2편

■ 백제 성왕 2편

■ 백제 성왕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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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비 천도 후 국호를 일시적으로 남부여(南扶餘)라 개칭하여 부여의 정통 후손으로서의 전통을 강조하였다. 알다시피 백제는 고구려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세력이 세웠고, 또 고구려는 부여에서 내려온 세력이 세운 나라였기 때문이다. 백제 나름 새로운 분위기와 문화의 창조를 위한 전략적인 선택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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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왕은 백제의 힘을 더 키우기 위해 남쪽에서 세력을 넓히던 가야 땅의 일부를 차지하며 계속해서 가야를 압박했다. 성왕은 사비에서 나라를 새롭게 꾸미려고 노력했다. 우선 중앙에 22개의 관청을 만들어서 각 부서가 맡은 일을 책임지고 처리하도록 했다. 수도는 5부, 지방은 5방으로 나누어서 왕의 명령이 지방에까지 잘 전달되도록 체계적인 행정 체계를 만들었다. 이는 모두 왕권을 강화시키고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중앙 관제와 지방의 통치 조직을 정비함으로써 성왕은 정치 운영에 있어서 귀족 회의체의 정치적 발언권을 약화시켜 왕권 중심의 정치 운영 체제를 확립할 수 있었다. 또한, 백제는 중국 특히 남조와 교류하면서 문화 수용에 힘썼는데, 침류왕 때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불교를 온 백성들이 믿도록 적극적으로 후원했을 뿐 아니라, 발전된 백제의 불교문화를 일본에 전해줌으로써 대일관계에서도 특별한 족적을 남겼다.

왕권이 확립되고 불교문화를 꽃피우며 중흥의 시기를 맞이하게 된 성왕은 고구려에게 빼앗긴 한강을 되찾을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성왕은 국제 관계에도 힘을 기울여 전대부터 유지되어온 신라와의 동맹 관계를 꾸준히 이어나감으로써 고구려의 남진 압력에 대항하였다. 그리고 중국 남조의 양(梁) 및 왜(倭)와의 외교 관계를 지속하는 한편, 무역과 이에 따르는 문화 교류 역시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백제의 국제적 위상을 더욱 높였다. 그래서 동맹을 맺은 신라와 함께 이전에 고구려 장수왕에게 뺏겼던 한강 유역을 되찾게 되었다. 하지만 성왕의 기쁨도 잠시, 한강 유역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신라의 진흥왕은 성왕을 배신하고 한강을 독차지했다.

본시 고구려를 확실히 눌러서 백제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하는 것은 신라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고, 신라는 강력해진 백제를 원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백제가 삼국의 패권을 장악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백제 성왕은 신라의 진흥왕을 주시하면서 경계했어야 했다. 그런데 성왕은 그러지 않았던 것 같다. 자신 스스로를 백제를 30년간 통치해온 경험 많고 노련한 성공적인 임금으로 자신감이 넘쳤던 것 같다. 당시 신라 진흥왕은 이제 나이 약관도 안 된 애송이이며, 실제 국정을 맡은 지도 얼마 안 된 설익은 임금으로 치부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제대로 뒤통수를 맞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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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성왕 1편

■ 백제 성왕 1편

■ 백제 성왕 1편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로 위축되어 있던 백제의 중흥(中興)과 고구려에게 빼앗긴 한강유역을 회복하기 위해 한평생을 바친 백제의 왕은 제26대 성왕(聖王:재위523~554)이다. 《삼국사기》보다 《일본서기》에 더 많은 기록이 나오는 왕이기도 하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로 한강 유역을 빼앗긴 백제의 왕으로 가야를 백제의 영향력에 넣고 고구려에게 복수하려는 집념의 소유자로 묘사하고, 천도지리에 통달하여 그 이름이 사방에 퍼졌다고 찬양하고 있다. 또한 《삼국사기》에도 『지식이 영매(英邁)하고 결단력이 있어 나라 사람이 모두 성왕(聖王)으로 칭하였다. 지혜와 식견이 뛰어났고 일을 처리함에 결단성이 있다.』라고 성왕을 매우 긍정적으로 평하는 기록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성왕의 인물 됨됨이가 비범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운이 따라주지 않았던 비운의 임금이다.

성왕(聖王)의 이름은 명농(明穠)으로, 무령왕(武寧王)의 아들이다. 30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백제 후기의 역사를 장식한 왕이다. 동성왕과 무령왕이 웅진으로 도읍을 옮겨 정치적 불안정을 수습하면서 추진해온 왕권 강화 정책을 계승하였고, 재위 16년(538년)에 사비(泗沘)로의 천도를 단행하였다. 기존 수도였던 웅진성(熊津城)은 계획된 수도 선정이 아니라 고구려의 남침으로 위례성을 빼앗기자, 내쫓기는 형태로 문주왕이 급히 천도한 것으로, 전시수도이며 임시수도의 성격이 컸다. 위성 지도로 공주 공산성 주변을 보면 주변 산세와 강줄기가 침략을 방비하기에는 도움이 되지만, 터가 좁아서 오래도록 쓸 나라의 중심지로는 아쉬움이 있었다.

반면 사비성(泗沘城)은 금강의 중류, 백마강이 휘감아 흐르고 넓은 평야가 펼쳐진 곳이다. 백마강을 통해 서해로 통하고, 나라의 중심부에 위치하며 온갖 물산이 모이는 풍요로운 곳. 사비는 농사지을 땅이 넓은데다가 바다를 통해 다른 나라들과 교류하기에도 좋았다. 이미 동성왕 때부터 주목하고 준비해온 일을 이어받아 무령왕을 거쳐 드디어 성왕은 오랜 시간을 두고 부지가 넓고 웅진성과도 멀지 않은 사비로의 천도 계획을 진행했다. 철저하게 계획된 선진적인 계획도시, 세계로 열린 국제도시인 사비성이 모습을 드러냈고, 백제의 사비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사방으로 넓게 뻗은 도로, 네모반듯하게 바둑판처럼 계획된 도시계획, 왕궁과 관청, 공방, 사원, 능묘, 민가가 채워지고, 왕궁 배후엔 부소산성과 왕도 둘레를 두른 나성(羅城)이 완성되었다. 백마강으로 이어진 나루엔 하루에도 몇 십, 몇 백 척의 배가 백제 전국과 중국, 일본 등으로 왕래했다. 그 규모는 우리가 지금 상상할 수 있는 그 이상으로 엄청난 대도시였다고 한다. 백제가 멸망하면서 잿더미가 되었으나, 부소산성 앞 관북리 유적으로 보면 백제의 왕궁과 부속 건물터, 도로 등이 출토되어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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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수 새조개 삼합

◇ 여수 새조개 삼합

◇ 여수 새조개 삼합

전남 여수 넙너리에 닿은 배가 조가비가 노란 조개들을 내린다. 가막만에서 막 건져온 새조개들이다. 가막만은 여수 반도 끝에 있는 내만이다. 신월항 넙너리와 가깝다. 그곳은 물 좋은 새조개를 구할 수도 있고, 맛볼 수 있는 식당도 있다. 새조개는 겨울에 시작해 2월에 맛이 최고에 이른다. 여수 가막만은 일제강점기에도 새조개로 유명했다. 1990년대 후반까지 일본으로 수출했다. 지금 여수는 새조개 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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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심이 깊지 않은 10m 내외의 펄이 발달한 곳이 새조개가 자라기 좋은 곳이다. 새조개는 배로 조개그물(형망)을 끌어서 잡는다. 달콤하고 부드러워 일찍부터 초밥 재료로 이용한 명품 조개다. ‘자산어보에는 ‘조가비가 참새 빛깔이며 무늬도 참새 털과 비슷해 참새가 변한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다’고 했다. 조가비를 열고 이동하기 위해 내놓은 발이 꼭 새의 부리를 닮아 ‘갈매기 조개나 ‘오리 조개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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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조개는 값이 비싸 어장에 유생이 붙어 있는 것을 확인하면 주민들은 불침번을 서며 어장을 지켰다. 어민들은 삼 년에 한 번만 제대로 새조개가 어장에 오면 그간 진 빚을 모두 갚는다 해서 ‘로또 조개’라고 한다. 비쌀 때 조개 하나에 7000~8000원이나 되기도 한다. 바다에서 새조개를 긁어 올리면 바지선에서 온전한 것, 조가비가 깨진 것, 크고 작은 것 등을 나눈다. 온종일 흔들리는 바지선에 쪼그리고 앉아서 선별한다. 각각 가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새조개는 꼬막과 달리 껍데기도 얇고 오래 보관하기도 힘들다. 싱싱할 때 회로 먹을 수 있지만, 주로 데침, 무침과 구이로 많이 먹는다. 특히 여수에서는 삼합 구이<사진>가 유명하다. 새조개 삼합은 키조개 관자와 돼지고기 혹은 소고기를 더한다. 여기에 겨울철 대표 채소 시금치를 올린다. 주인을 잘 만나면 굴이나 낙지 등을 얻을 수 있다. 몸값이 비싸니 새조개만으로 배를 채우려면 호주머니가 가벼워진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새조개가 나오는 철에 맛이 좋은 키조개와 육고기다. 주인공이 그렇듯 새조개는 가장 늦게 올려서 구워야 한다.

-조선일보-

◇ ‘낭만식객’ 노회찬 이야기 담은 '음식천국 노회찬' 출간

◇ ‘낭만식객’ 노회찬 이야기 담은 음식천국 노회찬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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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낭만식객’ 노회찬 이야기 담은 음식천국 노회찬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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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노회찬 전 의원은 진보정치의 대중화에 기여한 걸출한 정치가였다. 구수한 표정에 다소 생경하게 느낄 수 있는 진보정치를 쉽게 설명하는 그의 입담은 압권이었다. 노 전 의원은 또한 미식가였다. 소박한 맛집을 찾아 골목을 누비는 낭만 식객이었다. 평소 “살기 위해 먹느냐, 아니면 먹기 위해 사느냐. 나는 먹기 위해 산다”고 농담을 즐겨 했다.

노 전 의원이 대중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04년 총선 때 ‘판갈이론’을 펴면서였다. 그의 “50년 동안 같은 판에다 삼겹살을 구워 먹으면 판이 시커메진다. 판을 갈 때가 왔다”는 식객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촌철살인의 비유였다. 실제 삼겹살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회식할 때면 직접 고기를 굽고 잘랐다. 보좌진이 고기를 잘못 구우면 “내가 할게”라며 바로 집게를 집어들었다. 삼겹살 위에 마늘, 된장을 올린 뒤 구운 신김치에 싸서 먹는 방식을 특히 즐겼다. 반면 상추와 삼겹살의 조합은 좋아하지 않았다.

노 전 의원은 깊고 담백한 맛의 평양냉면도 사랑했다. 을밀대, 을지면옥, 우래옥, 의정부 평양면옥 등 평양냉면 맛집 중 안 가본 곳이 없다고 한다. 특히 마포의 을밀대는 그가 1990년대 초 창간한 매일노동뉴스 발행인으로 일할 때부터 드나들었다. 노 전 의원은 기본 조리법에서 벗어난 요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노 전 의원의 최장수 보좌관이었던 박규님 노회찬재단 운영실장은 “한번은 돼지고기가 들어간 된장찌개를 드시는데 얼굴 표정이 바뀌더라. 다시는 그 집에 안 가셨다”고 했다.

음식을 대하는 태도도 사뭇 진지했다. 처음 가는 식당은 꼭 관련 정보를 검색한 뒤에야 방문했다. 저녁 약속이 있을 때면 점심 무렵부터 속을 비웠다. 맛있게 먹기 위해서였다. 심지어 정치적 결단을 내려야 하는 순간에도 맛을 포기하지 않았다. 비공개 모임 장소도 맛집으로 정했다. 수타자장면으로 유명한 마포의 ‘현래장’이 단골이었다.

식객 노회찬의 이야기를 담은 <음식천국 노회찬>이 출간됐다. 고인의 옛 동지와 벗들이 그가 즐겨 갔던 식당과 주점에 모여 그가 꿈꿨던 비전을 더듬으며 나눈 이야기가 담겨 있다. 책을 쓴 이인우 한겨레 기자는 “왜 우리는 잃고 나서야 알게되는 것일까”라고 적었다. 문득, 지금 정의당의 모습이 노 전 의원이 꿈꿨던 것과 얼마나 비슷할까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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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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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장도笑裏藏刀 - 웃음 속에 칼을 감추다, 겉과 속이 다르다.

소리장도笑裏藏刀 - 웃음 속에 칼을 감추다, 겉과 속이 다르다.

소리장도(笑裏藏刀) - 웃음 속에 칼을 감추다, 겉과 속이 다르다.

웃음 소(竹/4) 속 리(衣/7) 감출 장(艹/14) 칼 도(刀/0)

여기서 이 말하고, 저기서 다른 말 하는 사람은 누구나 따돌린다. 속에는 딴 생각이 가득해도 면전에서 듣기 좋은 말만 꾸며대서는 오래 가지 못한다. 面從腹背(면종복배)다. 말로는 온갖 칭찬을 늘어놓고 속에 해칠 생각을 갖고 있다면 이야말로 경계할 사람이다.

부드러운 솜 안에 날카로운 바늘을 감춘 綿裏藏針(면리장침)이다. 달콤하게 듣기 좋은 말만 하면서 속으로는 칼을 숨긴 口蜜腹劍(구밀복검)도 마찬가지다. 중국 唐(당)나라 6대 玄宗(현종)이 楊貴妃(양귀비)에 빠졌을 때 자신을 위협하는 충신들을 교묘한 방법으로 없앤 간신 李林甫(이임보)의 수법에서 나왔다.

속에 칼을 감춘 간신이 등장하는 성어가 더 있다. 이임보보다 앞선 2대 太宗(태종) 때의 李義府(이의부, 614~666)다. 그는 글을 잘 짓고 업무 능력도 뛰어나 임금으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3대 高宗(고종)이 즉위한 뒤 태종의 후궁이었던 則天武后(측천무후)를 황후로 삼는데 적극 찬성하여 벼슬이 더 높아졌다. 이의부는 겉으로는 온화하게 웃으면서(笑裏) 태도가 겸손했지만 속으로는 해칠 칼을 숨기는(藏刀) 재주가 있었다. 이런 가면성을 아는 사람은 가까이 하지 않았다.

이의부가 어느 때 사형수가 갇힌 옥을 둘러보다가 淳于(순우)라는 절색의 여인이 눈에 띄었다. 그는 온갖 감언이설로 옥리를 꾄 뒤 여자를 빼돌려 자신의 첩으로 삼았다. 소문이 돌고 이의부는 모른 체하며 되레 옥리에 죄를 뒤집어씌워 자살에 이르게 했다.

이의부가 손끝 하나 다치지 않자 어사 王義方(왕의방)이란 사람이 어전에서 처벌을 주장했다. 하지만 왕의 신임을 믿고 계략을 꾸며 왕의방을 변방으로 쫓아버렸다. 당시의 사람들은 이 일을 두고 ‘이의부의 웃음 속에는 칼이 들어 있다’고 말했다(故時人言 義府笑中有刀/ 고시인언 의부소중유도). 중국 唐(당)나라의 정사 ‘舊唐書(구당서)’에 실려 있다.

중국의 고대 병법인 ‘三十六計(삼십육계)’중에 제10계도 똑 같이 笑裏藏刀(소리장도)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신을 믿게 하여 안심시킨 뒤에 허를 찔러 공격하는 계책이다. 적과 대치할 때는 무슨 수를 쓰든 승리해야 하지만 사회에서 이를 사용한다면 신의를 완전히 저버리는 비인간적인 전략이 된다. 어디까지나 신뢰를 바탕으로 일을 도모해야지 겉과 속이 달랐다가는 실패만 기다린다. / 제공 : 안병화(전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폭새용문曝鰓龍門 - 용문에서 아가미가 말라붙다, 어려운 환경에 처하다.

폭새용문曝鰓龍門 - 용문에서 아가미가 말라붙다, 어려운 환경에 처하다.

폭새용문(曝鰓龍門) - 용문에서 아가미가 말라붙다, 어려운 환경에 처하다.

쪼일 폭(日/15) 아가미 새(魚/9) 용 룡(龍/0) 문 문(門/0)

신령스런 동물 四靈(사령) 중에서도 으뜸인 龍(용)은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 龍門(용문)이란 지명은 실재한다. 물론 전설을 입힌 지명이라도 중국 문명의 발상지인 황허黃河/ 황하 상류의 협곡 사이에 있다. 폭포의 물살이 어찌나 빠르던지 하류의 잉어들이 오르려고 무수히 도전하지만 대부분 휩쓸려 내동댕이쳐진다.

간혹 운 좋은 잉어가 天神(천신)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오르기만 하면 때맞춰 치는 우레에 꼬리를 태우고 용이 된다. 잉어가 용문을 올라 용이 된 것을 登龍門(등용문)이라 한다는 것은 소개한 바 있다. 용이 되려면 天佑神助(천우신조)가 있어야 하니 용 되기가 별 따기만큼 어렵다.

이렇게 용이 되기가 어려운 만큼 좁은 관문을 통과하여 立身(입신) 출세하거나 높은 자리에 올라 큰 뜻을 펼칠 수 있게 된 것에 비유했다. 중국에서 進士試(진사시)나 우리나라서도 科擧(과거) 같은 어려운 시험의 통과를 말하게 된 계기가 있다. 後漢(후한) 말 혼란한 시기에 날뛰던 환관을 가차 없이 처벌하여 주위의 신망을 받은 李膺(이응, 110~169)이란 선비가 있었다.

경찰청장 격의 자리에서 주변의 눈치를 보지 않고 바로잡았으니 이응을 ‘천하의 본보기’라 부를 정도였다. 太學(태학)의 젊은 관료들은 그를 경모하여 한 번이라도 만나 인정받는 것을 용문에 오르는 영광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바다에서 큰 강에서 몰려든 잉어들이 모두들 용문에 올라 영광스런 자리에 오르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해 물살에 휩쓸리면 바위에 이마가 깨져 멍이 든다. 바로 龍門點額(용문점액)인데 큰 시험에 낙방한 것을 가리킨다. 같은 뜻으로 여러 불경에 등장하는 것이 잉어가 모래밭으로 튕겨 아가미가 말라(曝鰓) 용문에서 죽었다는 이 성어다.

목숨을 건 보살행을 거친 뒤라야 華嚴(화엄)의 경지에 오르는데 그렇지 못하면 ‘용문의 아래에서 물고기 아가미와 비늘이 말라가는(曝鰓鱗於龍門之下/ 폭새린어용문지하)’ 것과 같다고 했다. 唐(당)나라 清涼澄觀(청량징관)법사의 ‘華嚴經隨疏演義鈔(화엄경수소연의초)’에 나온다고 한다.

어려운 환경에서 이겨내고 출세한 것을 ‘개천에서 용 난다’고 비유했다. 언론사나 잡지사에서 시행하는 新春文藝(신춘문예)의 어마어마한 경쟁률을 뚫으면 문단이란 영예의 용문에 오른다. 이와 함께 선망 받는 인기 직업의 관문을 넘는 것은 용문 오르기보다 어렵다. 司試(사시)가 없어졌다 해서 고위 공무원의 문호가 넓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젊은이들이 갈 만한 직업의 문이 나날이 줄어드는 만큼 하위직 공무원 시험에도 응시자들이 구름과 같이 몰린다. 용 되기는 포기하더라도 이마에 상처 입는 사람들을 줄일 묘안을 고민해야 한다. / 제공 : 안병화(전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