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14일 목요일

열혈 재상, 김육 5편

■ 열혈 재상, 김육 5편

■ 열혈 재상, 김육 5편

1649년(효종 1년) 효종이 즉위하자, 그는 전후 복구가 이루어지지 않음을 지적하고, 전후 복구와 민심 수습, 대동법 시행을 적극 건의하였다. 그해 5월 효종 즉위 초에 특별히 발탁되어 사헌부대사헌을 거쳐 동년 9월 특진하여 의정부 우의정이 되었다. 그는 나이가 많은 것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였고,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재차 사임을 요청하면서 또 다시 대동법(大同法:조선시대에 공물을 쌀로 통일하여 바치게 한 납세제도) 확대 실시를 간하였다. 옳다고 생각하는 바에 대하여 줄기차게 주장을 거듭한 열혈재상이었다. 결국 우의정에 제수된 김육은 간곡한 상소를 올렸다.

『신으로 하여금 나와서 회의하게 하더라도 말할 바는 이에(대동법 시행) 불과하니, 혹 쓰이게 되면 백성들의 다행이요, 만일 채택된 것이 없다면 다만 한 노망한 사람이 일을 잘못 헤아린 것이니, 그런 재상을 어디다 쓰겠습니까? 일을 꾀하는 것은 사람이지만, 성사시키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다고 하였으니, 신이 믿는 바는 오직 전하뿐입니다." 《효종실록》

이 말은 대동법을 실시하려면 자신을 쓰고 그렇지 않으면 ‘노망한 재상’으로 치부해 쓰지 말라는 말이었다. 효종이 대동법의 시행을 약속함에 따라 우의정에 취임하였으나, 조정 일각에서는 왕을 압박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김육의 반대 세력들은 이 글의 형식과 내용이 방자하다며 공격의 재료로 삼았지만 그 속마음은 대동법을 반대하는 데 있었다. 김육은 효종에게 대동법의 내용을 설명하고 이 법의 시행 여부는 오직 왕의 결단에 달려 있으니 만일 시행하지 못하겠으면 자신을 벌해달라는 강경한 의지를 보인 것이다. 한편 그가 명리(名利)를 취하는 사람으로 일부 대동미 업자들에게 뇌물을 받았다는 등의 각종 유언비어들이 돌면서 그를 괴롭혔다. 소문이 계속되자 효종은 한때 그를 의심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김육은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위해 옳다고 생각한 바를 끝까지 관철시키려 했을 뿐이다. 만약, 그가 현실을 무시한 탁상 행정을 밀어붙였다면 그의 강한 추진력은 그냥 옹고집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그의 강한 추진력은 많은 실무 경험이 뒷받침되었기에 그 빛을 발할 수 있었다.

김육은 조정에 나섰을 때부터 주요 실무직, 특히 호패와 재정, 외교 분야와 관련된 관직을 두루 섭렵했고, 이 덕에 현장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었다. 따라서 김육은 실현 가능성이 높은 정책이 무엇인가를 정확히 파악하여 추진할 수 있었다. 물론 실무에 있어서는 김육도 인정하는 전문 관료들이 많이 있었고, 김육의 역할은 직접 실무를 담당하기보다는 구체적 실천에 있어서 이들과 의논하고 이들에게 맡기면서 정치적 보호를 해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대동법의 성공 원인이 오로지 김육의 일관된 고집만이 아니라 뛰어난 능력을 갖춘 전문 관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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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열혈 재상, 김육 4편

■ 열혈 재상, 김육 4편

■ 열혈 재상, 김육 4편

병조 좌랑을 거쳐 당시 조선 관료의 꽃인 사헌부 지평, 사간원 정언을 거친 김육은 내직에 있으면 외직을 반드시 돌아야 하는 제도 때문에 다시 음성 현감으로 부임하였다. 그가 임기를 마치고 돌아갈 때 송덕비가 세워질 정도였다.

정묘호란 직후 다시 국토가 황폐해지자 그는 양서의 사정을 논하는 《논양서사의소:論兩西事宜疏》를 올렸다. 전쟁의 참화와 인명 피해, 흉년, 재물 손실, 각종 잡역의 부담 때문에 백성들이 전국적으로 고통을 받고 있으며, 특히 그 피해가 심한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 백성을 살리기 위해 세금 감면과 지원 등의 대안을 제시하였다. 또, 그는 전쟁 직후인 당시의 과제는 백성을 어린애 어루만지듯 안정시키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구체적으로 전쟁에 지고 도망한 군졸을 용서해 주고, 그들을 성 쌓는 데로 동원하여 기력을 고갈시키지 말 것이며, 살기가 어려워 고향을 떠나는 백성을 억지로 붙잡지 말 것을 주장하였다.

그 뒤로도 전후 복구와 구휼을 청하는 상소와 후금의 침략에 대비해 병력을 양성하고 변방의 성곽을 세우고, 기존의 성곽을 개보수해야 된다는 상소를 올렸다. 그는 원망을 품은 백성을 안정시켜 민심을 얻은 다음 농사짓는 것과 군사 일을 분리하고(兵農分離), 비어 있는 땅에다 둔전(屯田)을 설치하는 등 장차 오랑캐가 다시 침략할 것을 준비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을 문묘에 종사하느냐 여부를 놓고 찬성하는 서인 유생 및 학자들과 반대하는 남인 유생과 학자들이 올린 상소들에 묻혀서 물타기 또는 공리공담으로 취급되어 인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김육은 대동법을 실시해야 할 가장 큰 이유로 농촌 경제의 붕괴, 곧 농민 생활의 파탄을 들었다. 따라서 과중한 세금 과세를 지양하고 과세 과정의 부정을 없앨 수 있는 근본 대책으로 대동법 시행을 주장한 것이다. 김육은 중간에 방납업자들이 떼어가는 것, 관료들이 착복하는 것의 예를 들어 진상품 방납을 없애고 일원화된 세금 조달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거듭된 전란으로 민생은 피폐해졌는데 방납업자들이 토호나 관료들과 짜고 무거운 세금을 요구하고, 착복한다며 이를 시정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어 그는 면세(免稅) 내지는 감세(減稅)를 주장했다. 이후 그는 공납의 폐단을 없애는데 자신의 정치적 운명을 걸기도 했다.

1646년 청나라에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북경에 갔을 때 베이징에 당도한 서양인 과학자들과 만나 교류하면서 시헌력(時憲曆) 사용법을 배워왔다. 시헌력은 태양의 움직임을 기준으로 한 양력 달력이었는데, 그는 이를 확인하고자 직접 해의 변화를 관측한 자료를 입수하기도 했다. 귀국 후 시헌력의 사용을 적극 건의하면서 직접 달의 변화와 해와 날의 길이를 통해 기후를 예측하고 시간을 보다 효율적으로 활용할 것을 주장했으며, 기후의 변화를 미리 예측하여 농업에도 보탬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시헌력의 사용을 적극 건의하였고, 효종 때 1653년부터 드디어 시헌력을 시행하게 되어 농업의 발전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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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혈 재상, 김육 3편

■ 열혈 재상, 김육 3편

■ 열혈 재상, 김육 3편

성균관을 팽개치고 가평 잠곡으로 낙향한 김육은 직접 밭을 갈고 물길을 만드는 등 농부로서의 삶을 살았다. 낙향 후 2년이 지난 후에야 겨우 집 1칸을 마련할 수 있었다. 산에서 직접 나무를 해다가 숯을 굽고 한양에 내다 팔아 생활했는데, 가평에서 무거운 지게를 지고 한양까지 가려면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새벽에 파루가 치고 도성 문이 열리면 제일 먼저 김육이 왔다고 할 정도로 부지런했다고 한다. 김육은 양반이자 성균관 유생으로서의 특권 의식도 없이 농민의 생활을 철저히 한 셈이다. 그렇게 30대를 보낸 김육이 몸소 체험한 힘든 노동과 전세, 공납, 군역을 모두 부담하는 백성으로서의 고단한 삶이 그에게 대동법을 실현시키게 했고, 현실 감각이 뒷받침이 된 정무 능력을 갖춘 관료가 되는 밑거름이 되어 전 생애를 국가 경제와 농촌 경제의 안정, 그리고 농민 생활의 향상에 바쳤다. 김육의 잠곡 생활은 10년 만에 끝이 났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면서 광해군의 북인 정권이 몰락하고 서인들의 세상이 되었다. 하지만, 광해군이 재위하는 15년 동안 많은 관료들이 숙청됐고, 이항복, 이덕형 같은 서인, 남인의 유력인사들도 사망하거나 긴 유배로 건강을 해친 상태였으므로 반정세력들은 인재가 필요했다. 젊은 관료들을 새로 기용하는 것이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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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로서 분별력까지 갖춘 김육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반정 직후, 광해군 때 귀양 간 관료나 지조와 절개가 가상한 사람(낙향자)들을 6품직에 우선 서용하고, 자리가 나는 대로 품을 올려주는 천거 인사가 있었던 것이다. 이때 약 20여 명이 천거됐는데, 김육도 이 때 의금부도사(종5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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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2년(1624년) 음력 1월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몽진하는 인조를 호종(護從)했고, 그 공으로 아직 반란 도중인데도 충청도 음성 현감에 임명됐다. 김육은 부임 2개월 만에 업무에 관한 상소를 올렸다. 공납 부담이 고을의 크기에 따라 공정하지 못하므로 행정구역을 조정하여 불균형을 완화하자는 내용이었다. 백성의 피폐하고 곤궁한 상황을 직접 조사하여 보고서를 작성하고, 백성들의 재난과 피폐한 가계 등을 구체적으로 열거하면서 부역과 조세를 감면해줄 것을 제의했다. 그는 토지의 많고 적음을 참작하지 않은 과중한 세금 부과와 부과 과정의 부정을 세세히 나열하면서 제도개혁을 주장하였다. 공납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개선하려는 노력을 다했지만, 공납 문제는 고을 현감 정도로는 해결할 수 없는 꿈이었다. 대과에 급제하지 않고는 더 이상의 힘을 가진 관료가 될 수 없다는 현실을 깨달았다.

마침 그해(1624년) 겨울 이괄의 난이 진압됨을 축하하는 증광시(增廣試:나라에 경가가 있을 때 시행되는 시험)가 열렸다. 김육은 업무 때문에 제대로 공부를 할 수 없었지만 분명한 목표가 있었기에 장원으로 급제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김육이 제출한 답안지는 책상머리에만 앉아있던 서생들로서는 도저히 쓸 수 없는 내용이라 채점관이 크게 감동했다. 이렇게 갑과 장원한 덕에 고위 관료로서의 앞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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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혈 재상, 김육 2편

■ 열혈 재상, 김육 2편

■ 열혈 재상, 김육 2편

모친상을 마친 1603년 사마시(司馬試)에 응시해 합격하고, 1604년 2차 회시(會試:복시)에도 합격해 생원(生員)이 됐다. 성균관에서 공부할 자격이 주어진 그는 27세에 윤진사의 딸 파평 윤씨와 결혼했는데, 당시로서는 상당히 늦은 편이었다. 파평 윤씨와의 사이에서 김좌명, 김우명을 뒀는데, 장남 김좌명은 선조의 딸인 정숙 옹주의 딸에게 장가를 갔다. 그의 아들이 우의정 김석주로 할아버지 김육의 대동법을 전국으로 확대 시행하는데 이바지했다. 차남 김우명이 은진 송씨와 결혼해 낳은 딸은 후에 현종의 비(妃) 명성왕후가 되었고, 김우명의 5대손이 정조의 정비인 효의왕후이고, 동백꽃, 봄봄으로 유명한 소설가 김유정은 김육의 10대손이다.

그는 당색으로는 서인이었지만 학통으로는 이황의 학통을 일부 계승하였다. 동인이었던 첫 스승 조호익이 퇴계 이황의 문인이었고, 다른 스승들인 윤근수와 윤두수도 비록 당색으로는 서인이었지만 그들 역시 퇴계 이황의 문인들이었다. 그래서 그는 학문적으로 성리학적 정통파와 중상주의 실학자 북학파 사이를 잇는 중간 고리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그의 학풍이 그에게 대동법 시행과 같은 민생안정정책에 평생을 걸도록 했던 것 같다.

1605년(선조38년) 진사시에 급제하고, 이후 성균관에 입학하여 성균관 유생으로 공부하였다. 성균관 유생의 신분으로 1610년 3번이나 상소를 올려 이른바 오현(五賢: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을 문묘에 모시는 오현종사(五賢從祀)를 주장했다. 선조 때부터 사림은 오현종사를 추진하는데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을 문묘에 배향하자는 운동이었다. 이는 1610년(광해군 2년) 7월에 실현을 본다.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는 문묘에 배향할 때 누구를 넣고 누구를 빼느냐를 두고 갑론을박이 심했기 때문이었다. 문묘에 종사된다는 것은 곧 그 인물의 학문과 도통(道統)이 국가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받음을 의미하므로, 이는 단지 학문상의 문제만이 아니라 그의 학파가 곧 정치적 집단의 모태가 되는 상황이었으므로 대단히 중요한 정치적 문제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붕당간의 갈등이 심화되던 시기에 자파(自派) 인물의 문묘 종사 문제를 둘러싼 갈등 역시 자주 표출되었다.

1610년(광해군 2년) 정인홍(鄭仁弘) 등이 이황(李滉)을 극렬하게 비난하는 상소를 올리자 그는 선현을 헐뜯는다며 이에 격분하여, 정인홍의 이름을 유생들의 명부인 청금록(靑襟錄)에서 삭제하는 것에 앞장서서 가담했다가 성균관에서 퇴교당했다. 이 사건으로 김육은 과거 응시 자격이 박탈되는 정거(停擧) 처분을 받았는데, 이 사건은 그 이듬해 광해군이 양보해서 오현이 문묘에 종사되고 그의 과거 응시 자격 박탈 조치가 취소되었다. 다른 퇴교학생들은 모두 성균관에 복귀했으나 그는 경기도 가평으로 내려가 끝내 복귀를 거부했다. 이후 관직을 단념하고 경기도 가평군 잠곡리(潛谷里) 고향으로 낙향, 농사를 지으며 학업에 열중하였다. 이후 그는 10여 년 동안 농촌에 파묻혀 농민들의 곤궁한 생활상을 직접 목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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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혈 재상, 김육 1편

■ 열혈 재상, 김육 1편

■ 열혈 재상, 김육 1편

김육(金堉, 1580~1658)은 민생이 도탄에 빠진 난세(亂世)에 민생 안정을 위한 많은 정책을 주장하여 실현시킨 대표적 인물이다. 어린 나이에 임진왜란을 겪고, 장년(長年)에는 왕이 뒤바뀌는 인조반정을 목격했으며, 늙은 나이에는 병자호란을 맞이했다. 이런 역사의 격동기(激動期) 속에서 벼슬아치로서의 역할을 성실하고 책임감 있게 해낸 인물이다. 그는 이 어려운 시기에 민중의 비참한 생활을 접하고 이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를 고민했다. 김육이 평생을 바친 현실 개혁은 조선이 처해있던 당시 위기 상황을 뼈저리게 간파했기 때문이다. 왜란과 호란은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했고, 정부는 국가 재정을 비롯한 전후 복구 문제가 급박한 실정이었다. 전란 후 재정복구책이 절실한 상황에서 가장 영향력을 발휘하였던 인물이 바로 김육이었다. 당시의 위정자(爲政者)들은 파탄 난 국가 재정만을 생각했지만, 김육은 그보다 백성들을 구제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김육은 조선시대에 몇 안 되는 경제 전문가이자 과학 기술자였다. 그의 정치철학의 근본은 오로지 위민(爲民) 정신에 있었고, 이를 위해서 줄기차게 특권층 철폐를 주장하였으며, 부의 편중(偏重)이 백성을 고통스럽게 할 뿐 아니라 나라도 위태롭게 한다고 생각했다.

김육(金堉:1580년 8월 23일~1658년 10월 1일)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유학자, 실학자, 사상가, 작가, 정치가, 철학자이다. 효종과 현종 연간에 대동법의 확대 시행을 주장하고 실현시켰다. 아울러 화폐경제의 중요성을 피력하고, 화폐(동전) 보급에도 힘썼다. 자는 백후(伯厚), 호는 잠곡(潛谷), 회정당(晦靜堂),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그는 조광조의 동지로서 기묘사화 때 희생된 우당 김식(友堂金湜)의 4대손이었다. 그의 본가는 경기도 가평군 잠곡이었으므로, 호를 처음에 회정당이라고 했다가, 뒤에 어려서 나고 자란 마을이름을 따서 잠곡(潛谷)이라 하였다.

김육의 가족은 평구(현재 경기도 가평군 부근)를 떠나 강원도, 평안도, 황해도, 충청도, 경기도 등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았다. 이 와중에 아버지가 1594년 4월 향년 31세로 사망하여 김육은 15세에 소년 가장이 됐다. 전쟁의 발발과 갑작스런 부친의 죽음, 연이은 흉년으로 김육은 모친을 모시고 청주에 살던 이모부 남익수의 집으로 가서 의탁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오래 머물지 못하고 연안 지봉촌이라는 곳으로 이주했지만, 전란이 끝난 직후인 1600년 1월에 어머니를 잃었다. 당시 21세 청년이었던 김육은 평구(현재 남양주 삼패동)에 부친과 모친의 묘를 합장하였는데, 인부를 부를 돈이 없어 본인이 직접 흙과 잔디를 날라 묘역을 만들었다고 한다. 부모를 모두 잃은 뒤에는 서울에 사는 고모댁에 얹혀 살았는데, 삼년상 동안 새벽마다 묘소까지 걸어가서 곡을 하고 돌아오는 생활을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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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덩굴】

【거지덩굴】

【거지덩굴】

어찌 보면 담쟁이덩굴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작은 잎이 잎자루 긑에 5개가 모여있으며, 사진과 같은 꽃이 핍니다.

식물의 이름이 아름답지 못한 거지덩굴이라 정감이 가지 않지만 쉽게 접할 수 있는 식물입니다.

사람이나 식물이나 처음에 이름을 붙일 때 신중에 신중을 기하여야 한다는 교훈을 주는 것 같습니다.

▷ 학명 : Cayatia japonica

▷ 분류 : 포도과

▷ 분포지역 : 한국(제주)·일본·타이완·중국·인도

▷ 서식장소 : 산이나 들

▷ 특징 :

7∼8월(여름)에 황록색 꽃이 산방상(揀房狀) 취산꽃차례로 피고, 꽃잎과 수술이 각각 4개이고 1개의 암술이 있다.

편평한 꽃잎은 홍색 또는 등황색이며 꽃대는 막대 모양으로 곧게 선다. 열매는 장과(漿果)로 둥글고 검게 익는다.

뿌리는 오렴묘라고 하며, 한약재로 쓰이는데 진통제 및 이뇨제로 쓰인다

【끈끈이대나물】

【끈끈이대나물】

【끈끈이대나물】

줄기의 마디 사이에 끈끈이가 있어 하루살이와 같은 작은 곤충이 붙지요.

곤충의 사체인 단백질을 흡수하는 식충식물입니다.

▷ 학명 : Silene armeria

▷ 분류 : 석죽과

▷ 원산지 : 유럽

▷ 서식장소 : 강가 또는 바닷가

▷ 특징 :

꽃은 6∼8월(여름)에 붉은(분홍) 색 또는 드물게 흰색으로 피고 취산꽃차례(聚 -:줄기 끝에 달린 꽃 밑에서 1쌍의 꽃자루가 나와 각각 그 끝에 꽃이 1송이씩 달리고 그 꽃 밑에서 다시 각각 1쌍씩 작은 꽃자루가 나와 그 끝에 다시 꽃이 1송이씩 달리는 꽃차례)를 이루며 줄기 끝 부분에서 갈라진 가지 끝에 빽빽이 달린다.

비선실세 김개시 6편

■ 비선실세 김개시 6편

■ 비선실세 김개시 6편

그녀의 권세가 얼마가 높았던지 궁녀들은 뇌물을 바쳐야만 왕과 잠자리를 할 수 있었고, 광해군조차도 그녀가 지목하는 궁녀하고만 합방을 해야 했다고 한다. 이처럼 왕보다 더한 권력을 손에 쥐고 있던 김개시는 친척 딸의 남편인 ‘정몽필’을 양자로 삼아, 그에게 고관 뇌물 챙기기와 백성 수탈하기를 맡기며 본격적인 국정 농단과 매관매직 등 악덕 정치를 펼치기 시작하였다. 이에 보다 못한 윤선도·이회 등 충신들은 광해군에게 상소를 올리며 그녀를 비난하였지만, 김개시를 철썩 같이 믿고 있던 광해군은 오히려 충신들을 유배 보내어 그들의 바른 소리를 차단하였다. 그녀는 광해군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친구요. 동지였던 것이다. 광해의 지위는 늘 불안하여 김개시 같은 지략가의 도움이 꼭 필요했던 것이다.

세자 시절부터 궁녀 김개시는 광해군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어느 관료보다 충성심이 강했고, 총명한 두뇌로 판단력이 뛰어났으며 업무처리 능력도 훌륭했기 때문이다. 또한, 오랫동안 광해군을 보필해 왔기 때문에 그의 기분을 잘 맞췄다. 광해군은 그런 김개시가 자신의 눈과 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김개시는 광해군의 총애와 신임을 등에 업고 ‘제조상궁(提調尙宮)’으로서 당대 최고의 권력자 이이첨과 함께 정치판을 좌지우지하는 실세로 성장한다.

실록에서 김개시는, 이이첨과 더불어 광해군시대 최대 악인으로 묘사된 부분이 있다. 《광해군일기》 중 5년 8월11일자에 보면, 이이첨과 김상궁을 비교 평가한 구절이 있다. 그 둘의 비슷한 점 세 가지를 들고 있는데, 이이첨은 영상의 자리에 오르지 않고 김상궁은 후궁의 자리에 욕심을 두지 않는 것. 그러면서도 실익은 마음대로 챙긴다는 점을 들고 있다.

첫째, 역적을 토벌해야 한다며 과격한 역적 토벌론을 일삼는 것.

둘째, 벼슬 욕심을 줄이되 실권을 최대한 갖는 것.

셋째, 악역은 다른 이에게 맡기고 그 일에 대한 공은 자신이 차지하는 것.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선조의 독살에 간여했기 때문에 광해군의 약점을 틀어쥐고 있었다고 적고 있다. 광해군은 김개시에게 절대적인 신임과 사랑을 보냄으로써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게 만들었고, 광해군의 제조상궁으로서 당대의 실력자 이이첨과 함께 당시의 정치판을 좌지우지한 실세였다. 왕의 신임을 배경으로 권력을 틀어쥔 김개시는 오직 광해군만을 위해 충성했고, 광해군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궁중에서 온갖 악역을 떠맡았다. 김개시는 광해군에게 위협이 되는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을 없애려고 했다. 광해군이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그 악역을 떠맡았다. 김개시의 끈질긴 공작에 의해 인목대비는 기어이 서궁에 유폐되고 말았으며, 그 이후에도 죽음 직전까지 몰리는 수난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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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선실세 김개시 1편

■ 비선실세 김개시 1편

■ 비선실세 김개시 1편

조선 시대 궁녀들 중에서 명성을 떨친 예는 평범한 궁녀로 입궁하여 왕의 총애를 받고 후궁이나 왕비의 자리에 올랐거나 후대 왕을 출산한 경우이다. 숙종의 궁녀로 들어가서 경종을 낳고 왕비의 자리까지 올랐다가 쫓겨난 장희빈, 숙종의 무수리로 들어갔다가 훗날의 영조를 출산한 최숙빈, 고종의 궁녀로 들어가서 영친왕을 출산하고 황귀비(皇貴妃)까지 오른 엄비 등이 있다.

장희빈, 최숙빈, 엄비 등은 궁녀 출신이라고 해도 후대 왕을 출산했지만, 이에 비해 궁녀로서 왕의 총애만 받고 후대 왕을 낳지 못했던 장녹수(張綠壽)와 김개시(金介屎)는 온갖 비난을 받아야만 했다. 특히 장녹수와 김개시는 연산군과 광해군이 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났기에 그 비난이 더더욱 심했고, 남겨진 기록에도 모두 요부(妖婦)로 남겨져 있다. 역설적으로 갖은 비난을 받다 보니 장녹수와 김개시는 오히려 조선 시대 궁녀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김개시는 장녹수처럼 노래나 춤이 아니라 뛰어난 판단력과 두뇌로 광해군의 신임을 얻었다. 게다가 장녹수는 입궁 후 곧바로 후궁이 되었지만 김개시는 어렸을 때 입궁하여 상궁까지 올랐을 뿐 정식 후궁이 되지는 못했다.

광해의 오른팔 궁녀 ‘비선실세’로 주목받았던 개똥이라 불리던 상궁 김개시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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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아이들이 태어났을 때 단명하지 않고 오래 살라는 의미로 이름을 아무렇게나 지어서 부르는 경우가 있었다. 김개시(金介屎)는 ‘개똥’이라는 아명을 한자로 바꾼 이름이다. ‘똥 시(屎)’ 자를 해자(解字)하면, 쌀米이 시체尸가 되었으니 똥인 것이다. 인분(人糞)의 ‘똥 분(糞)’ 자도 마찬가지다. 쌀米이 변했으니異 똥이 된 것이다. 한자의 재미있는 묘미다. 김개시는 ‘개똥이’라 불리다가 궁에 들어오면서 한자이름 ‘개시’로 불리게 되고, 선조의 총애를 받으면서 ‘가희’란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광해군일기》의 기록에는 ‘김가희’보다 ‘김개시’란 이름으로 더 많이 등장한다. 왕의 여인이 될 수 있는 첫 번 째 조건은 보통 왕을 유혹할 수 있는 뛰어난 미모와 예술적 재능이 필요하다. 그러나 김개시는 이런 조건과는 거리가 멀었다.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에 의하면 김개시는 천예(賤隸)의 딸 즉 천한 노예의 딸이었다고 한다. 궁녀로 입궁한 후에도 주로 공노비인 내수사 출신의 궁녀들과 어울렸다. 게다가 나이가 차서도 용모가 피지 않았다고 한 실록의 기록으로 보아 미인은 아니었다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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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궁에 입궐한 궁녀들의 최고의 목표는 왕의 승은을 입고 후궁이 되는 것이다. 김개시는 본인이 원하면 얼마든지 후궁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김개시는 후궁의 자리를 욕심내지 않았다. 후궁의 신분보다는 궁녀 신분을 유지하는 것이 자신이 맡은 임무를 수행하기에 더 효율적이라 생각했다. 왕의 강력한 신임을 얻은 김개시는 상궁에 불과했지만, 어떤 권세가가 부럽지 않을 정도로 권력을 휘둘렀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왕위다툼을 벌인 왕건의 아들들

■ 왕위다툼을 벌인 왕건의 아들들

■ 왕위다툼을 벌인 왕건의 아들들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은 나라를 안정시킨다는 이유로 권력이 있는 지방 호족의 딸과 결혼을 하여 인척관계를 맺는 혼인 정책을 펼쳤다. 이 때문에 무려 25명의 배다른 형제를 둔 왕건의 아들들은 왕 자리를 놓고 치열한 암투를 벌이면서 왕건 사후(死後) 한동안 왕권이 불안정할 수 밖에 없었다.

왕건이 죽고 난 뒤 943년 왕건의 둘째 부인 장화왕후 오씨의 아들 왕무가 2대 왕 혜종이 되었지만, 오씨는 다른 후궁들에 비해 세력 기반이 약해 혜종의 정치적 입지는 매우 불안했다. 왕건도 살아생전 이런 점을 의식한 듯, 왕무를 태자로 삼으면서 측근들에게 "태자를 잘 지켜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하지만 혜종의 이복동생이자 왕건의 셋째 부인인 신명 순성왕후 유씨의 아들 왕요·왕소 형제는 혜종이 왕이 된 이후에도 호시탐탐 왕의 자리를 노렸다. 어머니 유씨가 충주의 힘 있는 호족이자 장군인 유긍달의 딸이었기에 왕요와 왕소를 왕으로 만들려는 세력은 점점 더 야심을 품게 되었다.

이에 혜종의 측근들은 "왕요 형제가 왕위를 넘보고 있으니 이들을 애초에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혜종은 이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맏딸을 왕소에게 시집 보내 그들을 달래려 했다. 하지만 왕요 형제의 위협은 계속되었고, 이에 시달리던 혜종은 왕이 된 지 2년 4개월 만에 병으로 죽고 말았다. 혜종의 죽음에 대해 여러 학자들은 혜종이 왕요 형제에게 살해당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고려사\에는 혜종이 병으로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병 이름이 분명하지 않은 데다 혜종이 살해 위협을 걱정하며 늘 군사를 시켜 자신을 호위하게 한 점 등을 미루어 볼 때 타살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혜종이 죽은 뒤 왕요는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3대 왕 정종이 되었지만, 4년 만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그의 동생 왕소가 4대 왕 광종이 되었다. 광종은 과거제도와 노비안검법(노비해방)을 도입해 외척과 지방 호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시키면서 고려 왕실을 안정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다. 하지만 광종은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수많은 신하를 숙청하고 혜종과 정종의 외아들을 살해하는 무시무시한 공포정치를 펼치는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