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14일 목요일

명실상부名實相符 - 이름과 실상이 서로 꼭 맞음, 겉과 속이 맞아 떨어짐

명실상부名實相符 - 이름과 실상이 서로 꼭 맞음, 겉과 속이 맞아 떨어짐

명실상부(名實相符) - 이름과 실상이 서로 꼭 맞음, 겉과 속이 맞아 떨어짐

이름 명(口/3) 열매 실(宀/11) 서로 상(目/4) 부호 부(竹/5)

사람 뿐 아니라 모든 동식물, 사물에게는 이름이 있다. 다른 것과 구분하기 위해 이름은 필요하다. 꽃도 이름 없이 자연에 그대로 있었으면 아무도 몰랐지만 꽃이라는 이름을 불러주자 자신에 다가와 꽃이 되었다고 시인은 노래했다(김춘수의 ‘꽃’). 존재의 이유인 이름은 명예도 된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遺臭萬年(유취만년)이라 악명으로 기록되면 후세에 영원히 먹칠한다고 이름을 더럽히지 않게 조심했다. ‘사람은 죽으면 이름을 남기고, 범은 죽으면 가죽을 남긴다’는 속담도 같은 의미다.

孔子(공자)는 특히 바른 이름을 중시했다. 목이 말라도 이름이 도둑의 샘인 우물물은 마시지 않았다는 渴不飮 盜泉水(갈불음 도천수)란 말이 잘 나타낸다. 공자에게 정치를 맡게 되면 무엇부터 하겠느냐는 질문에 이름을 바로잡는(正名/ 정명) 일을 우선하겠다고 했다. 齊(제)나라 景公(경공)이 이상적인 정치에 대해 물었을 때도 서슴없이 답했다. ‘論語(논어)’ 顔淵(안연)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다.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답게 되는 것입니다(君君 臣臣 父父 子子/ 군군 신신 부부 자자).’ 모든 이름은 그에 합당한 실이 갖추어져 있을 때에만 비로소 그 이름이 진정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宋(송)나라의 朱熹(주희)가 선대 학자들의 해석과 자신의 주석을 모아 엮은 ‘論語集註(논어집주)’에는 程子(정자)의 말이라면서 이에 대해 더 명확하게 설명한다. ‘이름이나 실제는 서로 어울려야 한다. 한 가지 일에 있어 이것을 소홀히 하면 나머지도 모두 구차하게 된다(名實相須 一事苟 則其餘皆苟矣/ 명실상수 일사구 즉기여개구의).’

그런데 실생활에선 이름이 실제와 맞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름만 그럴듯하고 속은 맹탕이다. 처음엔 맞았더라도 지나면서 有名無實(유명무실)이 된 것도 있다. 가래떡이나 칼국수에 가래와 칼이 들어갈 리 없다. 팽이버섯은 팽이와 관련 없고 철가방은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졌다. 大寒(대한)이 小寒(소한)에 와 얼어 죽는다고 했다. / 제공 : 안병화(전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 반도체 관련, 대만 TSMC vs 한국 삼성전자

◇ 반도체 관련, 대만 TSMC vs 한국 삼성전자

◇ 반도체 관련, 대만 TSMC vs 한국 삼성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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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SMC 창업주 모리스 창은 ‘대만 반도체 아버지로 불린다. 미국 반도체 기업에서 부사장으로 일하다 조국의 부름을 받고 귀국, 1987년에 TSMC를 창업했다. 그는 사업 모델을 미국 IT 기업이 주문하는 반도체를 만들어주는 공장으로 설정했다. 미국이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반도체 분업망을 개편하려는 흐름에 올라타기 위한 것이었다. “고객과는 절대 경쟁하지 않는다”는 그의 선택은 ‘신의 한 수’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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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이 세계 최초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반도체를 TSMC에 주문했다. 양쪽 다 대박이 났다. ‘윈-윈 모델’로 점수를 얻은 TSMC는 퀄컴, AT&T, 엔비디아 등 미국 IT 공룡 기업들을 단골로 확보했다. 세계 주문형 반도체 시장의 60%를 장악, 시가총액 세계 11위 기업이 됐다. 반도체 덕에 대만 경제도 순항 중이다. 지난해 29년 만에 성장률이 중국을 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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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는 대만의 지정학적 가치를 한껏 올려놓았다. 중국 반도체 굴기를 막고 미국 중심 반도체 동맹을 구축하려는 미국 입장에서 대만은 핵심 파트너다. 바이든 대통령은 ‘반도체 전략회의’에 TSMC를 초대했고, TSMC는 미국에 반도체 공장을 6곳 짓겠다고 화답했다. 대만 정부도 홍콩 사태 이후 미국의 반중 민주주의 연대에 적극 공조하고 있다. 1979년 대만과 단교했던 미국은 대만의 국제 기구 가입을 지지한다는 ‘G7 선언문 채택으로 보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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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중국 시진핑 주석과 대만 마잉주 총통은 싱가포르에서 66년 만의 양국 정상회담을 가졌다. “어떤 세력도 우리를 갈라 놓을 수 없다”면서 ‘세기의 악수’를 나눴다. 하지만 요즘 대만해협엔 전운이 감돈다. 중국 전투기가 연일 대만 항공식별구역을 침범하고, 중국 항공모함이 위력 시위를 벌인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최신호 머리기사에서 “대만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 됐다”고 보도했다.

미국 반도체 기업 엔비디아 대표는 중국발 대만 리스크에 대해 “우리에게 플랜B는 없다. 모든 게 TSMC의 어깨 위에 달려 있다”고 한다. 이런 사정은 중국도 마찬가지다. 대만 반도체가 없으면 중국 경제도 망가진다. 대만 정부는 반도체를 국가 전략자산으로 간주하고 물심양면 지원한다. 최근 극심한 가뭄이 발생하자 대만 정부는 벼 농사까지 중단시킨 채 반도체 공장에 물을 대고 있다. 우리 정부는 어떤가. 미국 대통령이 “저걸 미국에 지었어야 하는데”라고 입맛을 다셨던 반도체 공장에 송전선 연결하는 것조차 도와주지 않았다.

-조선일보 만물상-

◇ 일하는 여성에게 인기 있는 “꽃무늬 원피스에 벨트, ‘전투복’ 완성”

◇ 일하는 여성에게 인기 있는 “꽃무늬 원피스에 벨트, ‘전투복’ 완성”

◇ 일하는 여성에게 인기 있는 “꽃무늬 원피스에 벨트, ‘전투복’ 완성”

‘일하는 엄마들이 입기 편하면서도 세련돼 보이는 옷은 없을까?’

지난 2003년 어느 날 프랑스 여성 바바라 보카라와 샤론 키에프는 커피 한 잔을 나누다 동시에 눈이 마주쳤다. 고등학교 때부터 ‘절친’ 아니랄까 봐, 두 사람은 마치 서로의 마음을 읽은 듯 “우리 옷 만들자” 외쳤다.

패션지 홍보 전문가였던 바바라와 변호사였던 샤론은 당시 육아를 위해 직장을 그만둔 이른바 ‘경단녀(경력단절여성)’였다. 둘 다 패션을 전문적으로 배우지는 않았지만 살면서 느낀 점을 ‘자신들의 옷’에 담고자 했다. 파리의 한 버려진 빈 가게에서 시작해 지금은 전 세계 400여 개 매장을 갖춘 패션 기업으로 성장했다. 2030 여성들이 사랑하는 프랑스 패션 브랜드 바쉬(BA&SH)는 그렇게 탄생했다. 둘의 이름 앞 글자를 딴 브랜드.

“둘 다 일찍 결혼해 아이를 어느 정도 키우고 나니 다시 일하고 싶었어요. 무엇이든 도전해보겠다는 생각이었지만 ‘패션’이 공동의 관심이었죠. 특히 일할 때 여성의 옷은 왜 불편한가, 격식 있어 보이는 옷은 왜 비싸야만 하는가 같은 주제를 주로 다뤘어요. 우리는 잃을 게 없었고, 얻을 일만 있었죠.”

바쉬의 창업자 겸 디자이너 바바라와 샤론은 최근 이메일 인터뷰에서 “고객을 생각할 때 ‘나 같으면 입겠는가’를 제1 원칙으로 삼았다”면서 “일할 때 어떤 옷을 입고 싶은지, 셔츠는 어떤 식으로 똑 떨어지길 원하는지, 결혼식 갈 때 어떤 의상이 필요한지 그런 질문을 수도 없이 했다”고 말했다. 올 초부터 국내 패션 브랜드 LF를 통해 공식 판매·유통되는 바쉬가 내건 문구는 ‘이상적인 옷장’. 따갑지도 않고 가려움도 없으면서 움직이기 편하고 미치도록 비싼 가격이 아닌 콘셉트. 꽃무늬나 화려한 도형무늬(패턴) 등 휴양지에 온 듯한 스타일을 선보이면서도 벨트나 재킷을 이용해 긴장감을 주는 것이 특징이다. 환경을 고려해 재생 원단이나 지속가능 가죽 같은 것을 55% 이상 사용한다. 높은 성장세에 세계적인 패션 그룹인 LVMH가 계열 펀드를 통해 지분 투자를 했다

처음엔 ‘워킹맘’을 타킷으로 했지만 최근 들어선 해외 톱 모델들이 자주 입고 다니면서 화제가 됐다. 국내에서도 탤런트 최여진 등이 최근 드라마에서 입어 인기를 끌었다. 입고, 일하기 편한 옷이 기본지만 옷을 통해 마음까지도 밝게 하는 게 목표라고 했다. “세계적으로 인기 높은 K팝 걸그룹 등 한류 스타들은 저희에게도 트렌드 풍향계가 됩니다. 최근 들어 꽃무늬 원피스를 자주 입고 나오는 걸 볼 수 있었어요. 코로나 사태로 답답했던 속내를 아름다운 의상으로 꽃피우며, 극복과 희망의 메시지를 선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일보-

◇ 덕유산서 100년 묵은 산삼, 심봤다!

◇ 덕유산서 100년 묵은 산삼, 심봤다!

◇ 덕유산서 100년 묵은 산삼, 심봤다!

경남 함양군 덕유산 자락에서 100년 넘은 산삼(山蔘)이 발견됐다. 최초 감정가로 9000만원이 책정됐다.

한국전통심마니협회는 함양에서 약초를 채집하는 이모씨가 의뢰한 산삼을 감정한 결과, 수령 100년 이상 된 천종산삼(天種山蔘)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이씨는 지난 7일 함양 덕유산 자락 해발 700m 지점에서 이 삼을 발견했다. 감정 결과 무게 68g, 뿌리 길이는 63㎝에 이른다.

산삼 감정은 삼의 진위 여부를 파악한 뒤, 뿌리 길이와 뇌두 상태, 무게와 향, 식감, 당도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수령을 추정한다. 정형범 협회장은 “삼의 발견 장소가 부엽토(풀과 나무 등의 낙엽 같은 것이 썩어서 이루어진 흙)층 영양분이 적은 암반 사이 척박한 환경이었다는 점, 삼 뇌두 형태와 크기, 짙은 황색에 매우 진한 향이 나는 점, 무게 등을 종합해 수령 100년이 넘는 것으로 추정했다

심마니들은 산삼을 구분할 때 천종·지종·인종으로 분류한다. 천종은 50년 이상 자연적으로 자란 산삼이며, 지종(地種)은 보통 30~50년 자란 산삼이다. 인종(人種)은 사람에 의해 씨가 뿌려져 산에서 자란 삼이다.

지금까지 한국전통심마니협회가 감정한 산삼 중 가장 비쌌던 것은 2018년 전남 화순군 모후산에서 발견된 130년 추정 천종산삼 4뿌리로 당시 3억5000만원에 달했다.

-조선일보-

외교행낭은 죄가 없다

외교행낭은 죄가 없다

외교행낭은 죄가 없다

외교행낭이 불가촉 특전을 누리게 된 60년 전이다. 1961년 외교관계에 관한 빈 협약에 이런 특전이 명문화됐다. 세관검사도 받지 않고 X-레이 검사대상에서도 제외됐다. 말 그대로 프리패스였다.

외교행낭은 겉모습부터 다르다. 다른 화물과 구분하기 ‘diplomatic pouch’란 영문이 찍혀 있다. 규격 제한은 없다. 서류봉투부터 이민 가방까지 형태도 다양하다. 한국의 경우 가장 작은 것은 가로 70㎝, 세로 80㎝ 정도다. 드물지만 가로·세로가 2m에 달하는 것도 있다. 주로 본부와 재외공관 사이에서 서류나 외교관 생활용품을 옮기는 목적으로 활용하고 민간 여객기 등이 나른다.

외교행낭의 특전은 최근 깨지는 추세다. X-레이는 아니지만 금속탐지기는 거친다. 빈발하는 국제 테러로 외교행낭을 검사하는 국가도 늘고 있다. 특전을 악용한 사례가 많아서다. 2017년 김정남 독살에 사용한 신경작용제 VX도 외교행낭으로 반입됐을 것이라고 국가정보원은 추측했다. 2015년 방글라데시 주재 북한대사관 1등 서기관은 금괴 170개를 외교행낭에 넣어 반출하려다 체포됐다. 금괴는 약과다. 수류탄과 편지폭탄을 외교행낭으로 밀반입하려다 적발된 사례도 있다. 외교행낭이 납치 용품으로 악용된 적도 있다. 나이지리아는 1984년 영국 런던 스탠스테드 공항에서 망명한 알하지디코 전 운수장관을 납치해 외교행낭에 담아 본국으로 납치하려다 적발됐다.

외교행낭은 제대로 활용하면 요긴하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은 2008년 국제우주정거장(ISS) 화장실 수리에 외교행낭을 활용했다. 러시아가 설치한 우주인 공용화장실이 펌프 고장으로 작동하지 않았던 것. 남자 우주인 3명은 임시 처리 방법으로 화장실 문제를 해결했으나 소변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곤란을 겪었다. NASA는 우주왕복선 디스커버리호 발사를 앞두고 러시아에서 0.5m 길이의 특수펌프를 들여왔다. 촉박한 일정 탓에 각종 장비는 외교행낭에 넣어 특별기편으로 운송했다.

박준영 해양수산부 장관 후보자 부인의 영국 도자기 밀수 의혹으로 정치권이 시끄럽다. 야당은 “외교행낭을 악용한 사례”라고 비판한다. 박 후보자는 “외교행낭을 이용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해양수산부는 “외교행낭 반입 물품의 영리 행위는 처벌 대상”이라는 입장이다. 외교행낭은 죄가 없다.

-중앙일보 분수대-

【노루귀】

【노루귀】

【노루귀】

새로 돋아나는 잎의 뒷면이 기다란 흰털로 덮여 있어 그 모습이 노루의 귀를 닮았다 하여 "노루귀"

▷ 학명 : Hepatica asiatica

▷ 분류 : 미나리아재비과

▷ 분포지역 : 한국(전지역)·중국·헤이룽강 등지

▷ 서식장소 : 산과 들판의 양지바른 곳

▷ 특징 : 이른봄에서 4월까지 흰색 또는 연한 붉은색 꽃이 피는데 잎보다 먼저 긴 꽃대 위에 1개씩 붙는다.

봄에 어린 잎을 나물로 먹으며 관상용으로 심는다. 민간에서는 8∼9월에 포기째 채취하여 두통과 장 질환에 약으로 쓴다.

열혈 재상, 김육 8편

■ 열혈 재상, 김육 8편

■ 열혈 재상, 김육 8편

김육은 스스로의 생활에 대하여 엄격하고 철저하였으며, 우의정이 된 71살까지 한성에 집 한 칸 없이 살 정도로 청렴결백하였다. 김육은 황희나 류성룡, 이원익이나 채제공 등과 더불어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명재상으로 손꼽힌다. 그는 절대 굴하지 않는 강한 추진력으로 유명했다. 대동법 시행에 있어 그는 반대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일관된 정책을 수행해 나아갔으며, 화폐 유통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굽힘 없는 강한 추진력과 고집이야말로 김육의 최대 장점이라고 할 수 있으나, 종종 \한 가지를 고집하는 병통\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를 깊이 신임한 효종도 가끔 "죽을 때까지 못 고칠 병"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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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8년 말 그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효종은 특별히 어의와 유명 의사를 보내 그를 진료하게 하였으나, 잠곡은 그해 9월 한성부 회현방 자택에서 별세한다. 향년 79세. 마지막 순간까지 김육은 호남 대동법을 걱정했으며, 효종에게는 대동법의 실무를 맡게 될 신임 호남 감사 서필원을 격려해달라고 청했다. 그의 부음 소식을 접한 효종은 탄식하며 말하기를 어떻게 하면 국사를 담당하여 김육과 같이 확고하여 흔들리지 않는 사람을 얻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효종은 5일간 조회를 보지 않았고 무척 슬퍼했다고 한다. 그는 생전에 대동법이 호남지방에 확대 시행되는걸 보지 못하고 죽었지만, 그의 열정은 헛되지 않았다. 이후 그의 유지를 이은 전라감사 서필원(徐必遠)의 노력으로 대동법은 그의 사후 전라도 각지로 확산되었다. 어느새 대동법의 시행에 대해 동의하는 사람들이 크게 불어나 있었고, 송시열조차도 대동법의 효력에 동의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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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법의 시행에 덕을 본 충청도 백성들은 충청도에 통문(通文“통지문)을 돌리고, 부의(賻儀)하려고 했던 돈으로 비석을 세웠는데, 그것이 현재 평택에 있는 대동법 시행 기념비이다. 이는 이경석이 쓴 김육의 신도비(神道碑) 문에서도 나타난다. 그만큼 그는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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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그는 정책적 반대파들이 사(私)적인 원수지간이 되지 않게끔 신중하게 처신했다. 김집이나 김상헌 등 대동법과 관련하여 그와 충돌했던 인사들은 김육과 개인적으로는 술도 같이 마시던 친한 친구의 형(김집)이거나, 아버지의 비문도 써주고 스승으로 여기던 존경스러운 이웃동네 선배(김상헌)였다. 또한 김육이 강하게 정치적으로 견제했던 원두표는 당시 권세가 매우 강력한 인조반정 공신이었다. 이런 반대파들과 정책 측면에서의 대립을 넘어 정치적 정적(政敵)이 되거나 개인적인 적이 되어버린다면, 김육이 추진하던 각종 정책뿐 아니라 그 개인의 신상까지도 위기에 처할 수 있었다. 때문에 김육은 항상 이들과의 관계에 신경을 썼다. 김집과의 관계는 김집이 대범하게 처신하여 원활하게 유지되었으며, 김상헌과의 관계도 크게 나빠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원두표를 여러 차례 정치적으로 공격하여 그가 대동법과 관련된 사무에 있지 못하게 막았지만, 그와 동시에 원두표의 할아버지인 원호(元豪)를 추증하는 사당을 세워줄 것을 건의하는 등 원두표를 배려해 주기도 했다. 즉 김육은 정치적 반대파들을 어디까지나 정치적인 반대파로만 대했을 뿐, 그들과 개인적인 원수는 되지 않게끔 관계를 좋게 유지하는 신중한 처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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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열혈 재상, 김육 7편

■ 열혈 재상, 김육 7편

■ 열혈 재상, 김육 7편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후 서적의 인쇄를 맡고 있던 교서관의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고 말았다. 그 사이 주조해 놓았던 금속 활자가 다 없어지고 인력도 부족했다. 전란 후에 경제적인 궁핍으로 인해 금속활자를 새로 주조하지 못하고 전란 전에 나온 책들을 본떠서 목활자를 어설프게 만들어 임시로 병영인 훈련도감에서 서적을 인쇄하고 있었다. 김육은 인조와 효종에게 금속활자 제조에 대해서도 건의했다. 이후 구리로 금속활자를 제조하여 전란 후 중단되고 있던 서적 간행을 활발히 전개되었다.

효종 2년인 1651년에 실록청 총재관이 된 김육은 금속활자를 재주조하여 《인조실록》 50책의 간행과 《선조수정실록》 8책의 간행에 성공한다. 이후로 서적 간행에 힘써 개량된 목활자로 새로운 서적을 인쇄하는데 성공했고, 어쩔 수 없이 훈련도감 시설을 빌려 쓰던 것에서 벗어나 정식 주무 관청인 교서관의 기능도 되살려 활기를 불어넣었다. 그밖에도 ≪황명기략(皇明紀略)≫, ≪종덕신편(種德新編)≫, ≪송도지(松都誌)≫ 등을 저술, 간행하기도 하였다. 그는 자신의 저술들을 널리 보급하기 위해 직접 활자를 제작하고 인쇄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후 그의 활자 인쇄술 주조 사업은 아들 김좌명과 김우명이 이어받았고, 그의 자손들이 하나의 가업(家業)으로 계승하며 이어졌다. 이는 주자(鑄字)와 인쇄 사업, 책 간행의 확산에 기여한 바가 크다. 김우명의 일부 후손은 강원도 춘성에 정착하여 소설가 김유정의 선조가 된다.

많은 논란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대동법은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로 확대되었다. 김육은 더 나아가서 호남지방에까지 대동법 시행을 주창하였으나, 대신들은 상소를 올려 김육을 탄핵했다. 대동법을 시행하면 나라를 망칠 것으로 몰고 갔다. 이 상소로 인해 김육의 입지는 크게 흔들렸지만, 김육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밀어붙인다. 김육은 결국 사직하려 했지만 효종은 그를 붙잡았다. 어느덧, 김육의 고집스런 대동법 주창에 동조하는 이들이 늘어갔다. 많은 대신들이 호남, 영남 지방에 대동법을 시행할 것을 건의하며 김육의 주장에 동조하고 나섰다. 김육은 아픈 몸에도 불구하고 호남 대동법에도 온 신경을 기울였다. 죽기 직전인 효종 8년(1657년) 11월 초까지 대동법에 대한 호남 각 읍의 여론 조사 결과를 취합해 직접 효종에게 보고했다. 또한 호남 대동법의 주요 쟁점인 진상 물품을 어떤 형식으로 거둘 것인가에 대해서도 자신의 주장인 경각사(중앙 관청 모두를 일컬음)가 일괄 징수하는 것으로 관철시켰다. 즉, 지방 관청 말고 중앙 관청이 직접 파견해 거둔다는 방식이다. 그러나 김육은 병세가 악화되어 영의정직을 사직하고 다시 영돈령부사로 물러났다. 그는 죽기 직전 왕에게 올린 글에서조차 효종에게 선정을 펼치고 민생을 구제할 것을 청하며, 호남의 대동법 시행을 강조하였다.

효종이 대신들에게 "대동법을 시행하면 대호(大戶)가 원망하고, 시행하지 않으면 소민(小民)이 원망하니 그 원망은 어느 쪽이 큰가?"하고 물었다. 신하들이 "소민들의 원망이 더 큽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국왕 효종은 \그 대소를 참작하여 시행하는 것이 옳다.\라며 드디어 대동법 확대 시행령을 내린다.

- 8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열혈 재상, 김육 6편

■ 열혈 재상, 김육 6편

■ 열혈 재상, 김육 6편

대동법은 당대에 획기적인 세제 개혁이었다. 백성들의 부담이 크게 줄어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한 비정상적인 세제로 인해 도망치는 백성들이 줄어들게 되어 세금을 걷는 어려움도 줄어들 것이고, 재정을 튼튼히 할 수 있어 식량도 원활하게 비축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대동법을 충청도에 확대 실시하자는 김육의 주장은 전국에 파란을 일으켰다. 조정 여론이 찬반양론으로 나뉘었다. 조정 내에서 김육의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은 소수였다. 좌의정 조익(趙翼)과 연양군 이시백 형제 정도가 찬성했고, 이조판서 김집, 호조판서 이기조, 사헌부집의 송시열 등 대부분의 관료들은 이에 격렬히 반대하였다. 김육을 공격하는 데 선두에 선 인물은 이조판서 김집이었다. 이 논쟁은 서인을 분당시키는 데까지 이르렀다. 대동법 시행에 찬성한 김육을 중심으로 소수당인 한당과 이를 반대하는 김집, 송시열을 중심으로 다수당인 산당으로 분당되었던 것이다. 대동법 시행에 자신의 정치 생명을 걸다시피 했던 김육은 이 때문에 반대파로부터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다. 그리고 송시열 등은 산당 세력을 움직여 대동법을 비판하는 상소를 계속 올리게 했다. 그러나 김육은 물러서지 않았다. 김육은 1649년 11월 다시 왕에게 농촌 생활의 안정 뿐 만 아니라 국가 재정을 튼튼히 하기 위해 대동법을 확대 실시할 것을 거듭 주청했다.

1650년(효종1년) 중국 사행(使行)길에 중국인들의 화폐 사용을 목격하고 귀국 후 조선 조정에 동전 유통을 건의하여 왕의 허락을 받는 한편, 아랫사람을 시켜 조선의 특산물인 인삼과 비단을 마련하여 중국 동전 15만문(十五萬文)을 구입하여 평안도에 유통 시켰다. 이후에도 청나라의 동전을 구입하여 조선에 유통시켜, 물물교환 대신 화폐를 유통케 하여 정확한 액수에 거래하고, 물물교환으로 발생하는 마찰을 최소화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는 평안도, 울산 등 일부 지역에서만 부분적인 성공을 거뒀다. 현재 5만원권이 유통보다 저장 목적이 크듯, 당시 화폐를 아무리 뿌려도 유통이 잘 안됐다. 하지만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훗날 친손자인 김석주, 허적 등은 상평통보를 유통시키는데 성공했다. 1651년(효종 2년) 그의 적극적인 건의로 십전통보가 주조되었는데, 개성 지방의 민간인 상인을 영입하여 직접 만들어 보았다. 그는 이 과정에서 훼손여부, 강도 등을 친히 시험하고 수시로 주조과정을 감독, 관리하였다. 김육은 평소 상공업을 천시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상공업이야 말로 국력을 부강케 할 근간이라 하였다. 그러나 김육은 당시 사대부들로부터 장사로 천한 이익을 취하는 자들과 얄팍한 기술로 잘난 척을 하는 소인(小人)들을 옹호한다는 비난을 받았고, 상인이나 기술자들에게 얼마나 뇌물을 받았느냐는 등의 인신공격에도 시달려야 했다.

대동법의 실시를 둘러싸고 확연히 갈라지는 이해관계 때문에 반대하는 수령, 관료, 지역 유지들 등의 반발을 잠재워야 했고, 반발을 부추기는 장사꾼들의 계략에도 대응해야 했다. 김집이 이조판서에 제수되자 송시열, 송준길 등 자신의 제자들을 출사시켰는데 이들은 김육을 공격하는 돌격대 역할을 하였다.

- 7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열혈 재상, 김육 5편

■ 열혈 재상, 김육 5편

■ 열혈 재상, 김육 5편

1649년(효종 1년) 효종이 즉위하자, 그는 전후 복구가 이루어지지 않음을 지적하고, 전후 복구와 민심 수습, 대동법 시행을 적극 건의하였다. 그해 5월 효종 즉위 초에 특별히 발탁되어 사헌부대사헌을 거쳐 동년 9월 특진하여 의정부 우의정이 되었다. 그는 나이가 많은 것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였고,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재차 사임을 요청하면서 또 다시 대동법(大同法:조선시대에 공물을 쌀로 통일하여 바치게 한 납세제도) 확대 실시를 간하였다. 옳다고 생각하는 바에 대하여 줄기차게 주장을 거듭한 열혈재상이었다. 결국 우의정에 제수된 김육은 간곡한 상소를 올렸다.

『신으로 하여금 나와서 회의하게 하더라도 말할 바는 이에(대동법 시행) 불과하니, 혹 쓰이게 되면 백성들의 다행이요, 만일 채택된 것이 없다면 다만 한 노망한 사람이 일을 잘못 헤아린 것이니, 그런 재상을 어디다 쓰겠습니까? 일을 꾀하는 것은 사람이지만, 성사시키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다고 하였으니, 신이 믿는 바는 오직 전하뿐입니다." 《효종실록》

이 말은 대동법을 실시하려면 자신을 쓰고 그렇지 않으면 ‘노망한 재상’으로 치부해 쓰지 말라는 말이었다. 효종이 대동법의 시행을 약속함에 따라 우의정에 취임하였으나, 조정 일각에서는 왕을 압박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김육의 반대 세력들은 이 글의 형식과 내용이 방자하다며 공격의 재료로 삼았지만 그 속마음은 대동법을 반대하는 데 있었다. 김육은 효종에게 대동법의 내용을 설명하고 이 법의 시행 여부는 오직 왕의 결단에 달려 있으니 만일 시행하지 못하겠으면 자신을 벌해달라는 강경한 의지를 보인 것이다. 한편 그가 명리(名利)를 취하는 사람으로 일부 대동미 업자들에게 뇌물을 받았다는 등의 각종 유언비어들이 돌면서 그를 괴롭혔다. 소문이 계속되자 효종은 한때 그를 의심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김육은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위해 옳다고 생각한 바를 끝까지 관철시키려 했을 뿐이다. 만약, 그가 현실을 무시한 탁상 행정을 밀어붙였다면 그의 강한 추진력은 그냥 옹고집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그의 강한 추진력은 많은 실무 경험이 뒷받침되었기에 그 빛을 발할 수 있었다.

김육은 조정에 나섰을 때부터 주요 실무직, 특히 호패와 재정, 외교 분야와 관련된 관직을 두루 섭렵했고, 이 덕에 현장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었다. 따라서 김육은 실현 가능성이 높은 정책이 무엇인가를 정확히 파악하여 추진할 수 있었다. 물론 실무에 있어서는 김육도 인정하는 전문 관료들이 많이 있었고, 김육의 역할은 직접 실무를 담당하기보다는 구체적 실천에 있어서 이들과 의논하고 이들에게 맡기면서 정치적 보호를 해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대동법의 성공 원인이 오로지 김육의 일관된 고집만이 아니라 뛰어난 능력을 갖춘 전문 관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 6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