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일 월요일

매일 매일 건강해지는 음식 BEST 6

매일 매일 건강해지는 음식 BEST 6

매일 매일 건강해지는 음식 BEST 6

1. 베리류(아사이베리, 블루베리, 크랜베리 등)

아사이 베리는 원주민들에게 생명의 열매로 불리고 있는데요. 그 효능을 보면 항암효과, 백혈병 세포 치유, 근육과 관절에 효능, 불면증, 콜레스테롤을 낮추어 주고, 신장과 간 기능 향상, 혈류 개선으로 인해 심장질환 뇌졸중 등 예방, 노화 방지, 시력 기능 회복에 도움, 머리를 맑게 하여 정신적 질병에 도움을 준다 합니다.

2. 요거트

요거트는 발효식품으로써 발암물질, 암세포 증식을 억제시켜주며 간기능강화에 도움을 주어 피로 회복에도 좋다고 합니다. 그리고 콜레스테롤 흡수를 조절해주어 심혈관질환 예방에도 도움을 주며 칼슘 성분으로 인해 골다공증 예방, 뼈 기능 강화에도 도움을 준답니다.

3. 호두

호두는 생김새가 사람의 뇌와 비슷하게 생겼다 해서 좋은 성분이 뇌로 간다는 말이 있답니다. 호두에는 DHA, 무기질, 비타민A 비타민B 성분이 다량으로 함유되어 있어 두뇌발달에 좋은영향을 준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성인병 예방에 탁월한 불포화지방산이 다량 함유되어 항산화 작용을 하며, 노화방지에 좋고 항암작용에도 좋습니다.

4. 토마토

마치 심장같이 빨간 토마토는 심장세포의 사멸 감소, 심장 손상 감소, 심장기능 향상에 긍정적으로 작용한다는 실험 결과가 있으며 혈소판 응집을 억제하는 화합물이 있다고 합니다. 비타민B6 성분이 혈액을 깨끗하게 해주어 동맥경화증을 막아주며, 혈관을 튼튼하게 해주고 혈압을 낮추어 주므로 여러 성인병 예방에 탁월하답니다.

5. 시금치

시금치 속에는 나트륨을 제거하는 칼륨성분이 들어 있어서 몸밖으로 나트륨을 배출해내고 비만을 억제하며 혈관내 노폐물과 독소를 제거하는 효과로 혈액순환이 좋아집니다. 또한 엽산 성분과 철분이 함유되어 있어, 빈혈을 없애주고 뼈를 건강하게 유지시켜 준답니다.

6. 당근

당근은 비타민 A가 풍부하여 눈에 좋은 음식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식재료인데요! 식이 섬유도 풍부하여 대변을 부드럽게 만들어 배변활동을 원활하게 하는 작용도 있습니다. 하복부를 따뜻하게 만들어 주어 생리가 불규칙하거나 불임있는 여성을 치료해주고, 밤에 소변을 자주보는 아이들에게도 효과적이랍니다. 또한, 베타카로틴이 풍부하여 면역력을 향상시켜주고 위, 장을 튼튼하게 해줍니다.

생활 속 독소로 부터 건강 지키기

생활 속 독소로 부터 건강 지키기

생활 속 독소로 부터 건강 지키기

▶ 벽지

염화 비닐류의 벽지에는 화학 유연제인 프탈산에스테르가 들어 있다. 이는 독성이 우려되는 위험한 물질 중 하나로 오랜 시간 동안 천천히 휘발하며 실내 공기를 오염시킨다. 어린 아이가 이런 환경에 지속적으로 노출 되면 생식기에 장애가 생길 수 있으므로 주의한다.

(대처 방안)

천연 소재 벽지를 사용하는 것이 좋다. 또 벽지를 바르는 풀에 유해물질이 포함돼 있기 때문에 화학재료의 풀보다는 자연 재료로 고르도록 하자. 집 안 공기를 자주 환기 시켜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 진공청소기

청소에 있어 꼭 필요한 가전제품인 진공청소기 역시 조심해야 될 물품이다. 진공청소기를 기본적으로 공기와 먼지를 한꺼번에 빨아들이고 공기를 내보내는 방식으로 돼 있다. 조심해야 될 부분은 바로 나가는 공기이다. 이 공기는 먼지거름망으로도 걸러지지 않는 미세한 먼지를 대량으로 함유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이 반복적으로 들이마시면 천식을 유발할 수 있다.

(대처 방안)

청소기 몸통을 철저히 밀봉해 배기가 바깥으로 새지 않고 미세 먼지를 여과해 깨끗한 공기만 배출하는 청소기를 선택한다. 최근 진공청소기는 미세 먼지 배출을 줄이기 위해 효율이 좋은 필터를 사용하며 셀프 필터 클리닝이 되는 제품까지 선보여지고 있다

▶ 전기장판

전기장판은 많은 양의 전자파를 방출하는 제품이다. 특히 임신부가 전기장판을 많이 사용하게 되면 유산이나 이상 출산 등의 위험이 커질 수 있으므로 조심하도록 한다. 또 전자파에 오래 노출되면 암을 억제하는 호르몬인 멜라토닌의 생성이 줄어들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대처 방안)

가급적 전기담요는 쓰지 않는 것이 좋지만 꼭 써야 된다면 전자파를 줄인 제품을 고르도록 하자. 히터선에 전류의 방향이 다른 두 개의 열선을 어긋나게 감아 전자파끼리 상쇄하는 구조로 돼 있어 전자파 방출량이 적다. 이미 사용하고 있는 제품이 있다면 자기 전에 10~20분 정도 따뜻하게 해두고 자기 전에는 전원을 끄는 것이 좋다.

▶ 샤워기

정수장에서 소독을 위해 대량 투입하는 염소가 욕실 공기 중의 유기물과 반응하며 생성되는 트리할로메탄은 발암물질의 하나다. 특히 샤워기로 온수를 쓰면 트리할로메탄이 욕실 전체로 휘발해 위험할 수 있다.

(대처 방안)

목욕물의 염소를 없애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것은 바로 욕조에 물을 가득 채우고 귤 껍질을 넣는 것이다. 이때 귤 껍질은 깨끗한 물에 씻어 농약이나 곰팡이 방지제가 남아있지 않도록 한다. 혹은 염소를 없애는 용기가 부착된 샤워기나 수도꼭지를 쓰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염소를 완벽하게 여과할 수 있는 안전한 정수기는 아직 없기 때문에 욕실 내의 유기물이 빠져나가도록 자주 환기시켜주는 것이 좋다.

▶ 냄비·프라이팬

테프론이라는 불소수지가공 냄비와 프라이팬은 표면이 매끄러워 조리할 때 들러붙지 않고 씻을 때도 간편해서 주부들에게 사랑 받는 제품이다. 하지만 냄비의 코팅은 일반적인 가열 온도에서도 유해한 가스나 입자를 배출해 계속 들이 마시면 에 통증을 주고 심할 경우 열, 한기, 기침 등의 증세를 유발할 수 있다.

(대처 방안)

표면이 가공되지 않은 철이나 스테인리스 조리기구로 바꾸도록 한다. 두꺼운 재질이라 처음 조리하기는 힘들지 몰라도 약간만 길들이면 잘 눌어붙지 않고 편하게 쓸 수 있다

▶ 랩

음식보관 외 다양한 용도로 상용하는 랩에는 유방암세포를 증식시키는 물질이 녹아나올 수 있다. 그 이유는 랩이 염화비닐리덴제 이라는 화학 물질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런 염소계의 랩은 불에 태우면 다이옥신이라는 발암물질이 생성된다.

(대처 방안)

유해 화학물질이 첨가되지 않은 폴리에틸렌제의 랩이 안전하다. 부착력이 좋지 않은 제품이 불편하더라도 화학물질을 쓰지 않았다는 뜻이므로 안전하다. 또 안전한 랩은 전자레인지에 넣어 돌리면 녹는 일이 있는데 랩만 깨끗하게 제거하면 음식에는 아무 문제 없다

▶ 나무젓가락

나무젓가락에는 곰팡이 방지제가 들어 있는데 뜨거운 물에 젓가락을 넣으면 녹아 나오게 된다. 주로 컵라면이나 데워 먹는 인스턴트 음식을 먹을 때 나무젓가락을 자주 쓰게 되므로 사용 시 주의가 필요하다.

(대처 방안)

나무젓가락에서 나무 냄새 외의 특이한 냄새가 난다면 녹차를 우려낸 물에 한 번 헹궈 사용하도록 하자. 단, 젓가락을 헹군 녹차물은 마시지 말고 버려야 한다.

▶ 샴푸

천연 성분과 건강을 강조하는 샴푸도 주성분은 결국 합성계면활성제라는 화학물질이다. 또 합성보존료인 파라벤이 들어가 모발과 두피를 상하게 하는 것은 물론이다. 이러한 성분으로 인해 샴푸로 인해 아토피 피부염이 발생하는 어린 아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대처 방안)

피부염이 심하다면 합성계면활성제가 들어 있는 샴푸 대신 비누로 머리를 감거나 물로만 머리를 감도록 하자. 그 후 세수대야에 물을 받고 구연산을 3g 정도 넣어 그 물에 머리를 헹구면 린스 효과를 볼 수 있다. 동백기름이나 올리브오일은 머리카락을 트리트먼트 효과가 있어 촉촉하고 윤기 있는 모발로 가꿔준다.

▶ 전자모기향

전자모기향도 약하지만 살충제이다. 장기간 지속적으로 향을 들여 마시면 신경계통과 면역계통 등에 유해할 수 있으므로 조심하자

(대처 방안)

우선 모기향을 사용하지 않도록 되도록 모기의 발생을 막는 것이 중요하다. 집 창문에는 방충망을 달고 방충망에 찢어진 곳은 없는지 확인해 모기가 집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 잠잘 때는 모기장을 설치하면 모기향을 피우지 않아도 막을 수 있다.

▶ 의류방충제

의류방충제에 쓰이는 파라디클로로벤젠이라는 약제는 발암성이 있다고 밝혀진 물질이다. 그 밖에도 방충제에는 신경계통에 이상을 일으키는 화학물질이 들어 있다. 또 발암물질이 들어 있는 나프탈렌이 방충제에 사용되므로 충분한 주의가 필요하다

(대처 방안)

의류를 해충으로부터 지키기 위해서는 의류용 방충주머니를 활용하는 것이 좋다. 옷을 넣고 단단히 밀봉해 탈산소제로 산소를 빼면 옷을 좀먹는 벌레들이 숨을 쉬지 못해 죽게 된다. 벌레 알도 2주 내에 없어지므로 옷을 보호할 수 있다. 또 옷장 안의 습도를 낮추는 것도 옷을 오래 보관하는데 도움된다.

돈 안들이는 건강관리 비법

돈 안들이는 건강관리 비법

돈 안들이는 건강관리 비법

1. 침은 뱉지 말고 삼키자.

침은 소화에 도움을 주고 향균작용을 도와준다고 합니다.

2. 눈을 자주 힘차게 움직이자.

피곤할 때 눈 운동을 하면 눈이 맑아진다고 합니다. (눈이 피곤할때에는 양손을 숨을 멈추고 여러번 비비면 손이 뜨거워집니다. 이때 손바닥을 눈에 가져다 대고 눈을 뜨고 눈을 상하좌우로 움직이면서 운동을 하고 쉬면 눈이 시원하고 피로가 풀린답니다.)

3. 얼굴을 자주 만져 주자.

혈압, 동맥경화, 혈색효과에 도움을 준다고 합니다. 허리가 아플땐 인중을 자극하면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얼굴에도 혈자리가 많아서 자주 만져주면 효과가 있다고 하네요.

4. 머리를 자주 두드려 주자.

머리가 맑아지고 잘 안 빠진다고 합니다.

머리도 깨끗하게 관리하고 두드려 주면 머리도 잘 안빠진다고 하네요.

5. 귀를 자주 만져 주자.

귀를 자주 만져주면 신장, 비뇨기, 생식기의 기능에 좋은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귀에도 각 장기와 연결이 되는 혈자리들이 있어서 자주 만져주고 귀를 당겨주면 건강에 좋은 효과가 있습니다.

6. 혀를 자주 굴려 준다.

회춘 비타민인 침을 삼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수면동안에 생긴 입안의 세균들을 양치질하고 물을 드시는것이 좋은것은 물론이고 혀를 입안에서 자주 굴려 주어 고인 침을 삼키는것이 좋습니다.

7. 치아를 자주 두드려 준다.

치아가 단련이 된다고 합니다. 고치법은 윗니와 아랫니를 마주쳐 소리가 나게 하는 운동법입니다. 회진법과 마찬가지로 생침을 넘겨 몸을 건강하게 만들어주는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8. 즐거운 노래를 불러라.

기쁜 마음으로 즐거운 노래를 부르면 기쁜마음이 회복이 되고 활기를 띄우게 됩니다. 즐거운 노래로 몸속에 있는 나쁜기운이 빠져나가는것입니다. 소리를 지르는것도 좋은 일이지요.

9. 배와 팔다리를 두드려라.

소화는 물론이고 피로회복과 관절에도 도움이 될것입니다. 배를 두드리는것은 소장이 위치하고 있어서 배를 따뜻하게 하고 배꼽밑에 있는 단전에도 영향을 미쳐서 몸의 온도를 높이는데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배를 시간이 날적마다 자주 두드려주는것이 아주 좋다고 합니다. 습관을 들이도록 해 보세요.

10. 항문을 조이고 푸는 동작을 반복하자.

사람은 항문의 힘으로 산다고 합니다. 항문조이기 운동은 괄약근 운동법이라고도 하는데 항문근육을 조이는 방법으로 요실금 예방과 치질의 완화, 질수축운동을 통하여 삶의 질은 높여 줍니다. 일명 케겔운동이라고도 하지요. 남성들은 조루증을 예방하고 빨리 사정하지 않게 해 준다고도 합니다. 특히 만성변비에는 항문의 괄약근을 하루 300번 정도만 해도 만성변비가 조절이 된다고 합니다.

11. 박수를 자주 쳐라.

박수를 치되 숨을 멈추고 박수를 치면 손바닥이 빨리 따뜻해집니다. 따뜻해진 손으로 온몸을 두드리기만 해도 몸의 혈들이 풀리고 몸의 온도가 1도이상 올릴 수가 있습니다.

12. 종아리 맛사지를 자주 하자.

종아리 맛사지는 만병을 예방하고 개선시켜주며 언제 어디에서나 쉽게 할 수 있는것으로 치매, 요통, 무릎통증, 어깨결림, 냉증, 불면증, 갱년기증상까지도 좋아진다고 합니다. 종아리 맛사지는 하루 5분씩만 주룰러도 몸이 따뜻해지면서 면역력이 5배나 높아진다고 합니다.

13. 머리는 차게 발은 따뜻하게 하자.

수승화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차가운 기운을 올라가게 하고 뜨거운 기운은 내려가게 해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는 한의학 원리의 하나입니다.

예종 4편

■ 예종 4편

■ 예종 4편

예종은 즉위 후 “권세가의 집에 드나드는 자가 있으면 공신을 불문하고 칼을 씌워 잡아와라”, “불법이 있다면 공신, 당상관을 가리지 말고 구금하고, 고문을 해서라도 진상을 밝혀라”는 명을 내리는 등 공신들을 장악하는 한편,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 것을 천명하였다. 아울러 몇 년 안에 기어코 부왕인 세조를 능가하는 강력한 군주가 되겠다는 의사를 밝히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예종은 실제 그럴만한 재주와 배짱을 갖춘 인물이었다. 그러나 예종의 이러한 꿈은 미처 봉우리를 피워볼 수도 없었으니, 이는 예종이 그 전부터 앓고 있던 족질(足疾)이 원인이었다. 예종이 앓던 족질은 요즘으로 말하면 당뇨병으로 인한 합병증인 것 같다.

조선 8대 왕인 예종은 왕성한 의욕에도 불구하고 족질로 인하여 급격히 기력을 잃고 죽고 말았다. 재위 1년 2개월, 20세의 나이였다. 예종의 이런 갑작스런 죽음에 대해서는, 겨우 족질로 그리 쉽게 갑자기 사망했다는 것이 개운치 않은 점 등을 이유로 공신세력에 대해 강경 정책을 펼친 예종에 불안을 느낀 한명회 등의 공신세력과 자기 아들을 왕으로 세우려는 의경세자의 부인이 독살한 것이라는 설(說)이 있기도 하지만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예종이 죽은 후 후계자를 결정해야 하는데, 여기에는 3명의 대상자가 있었다. 먼저, 죽은 예종의 아들인 원자(제안군)는 나이가 겨우 4살에 불과하다는 문제가 있었다. 다음으로, 예종의 형인 죽은 의경세자가 남긴 월산군과 자을산군이 있었다. 자을산군은 후계서열로는 3위이지만 결국 이 3위인 자을산군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던 것은 자을산군의 아내가 한명회의 4녀인 점도 큰 작용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후계자를 결정할 권한이 있는 대왕대비(세조의 부인)도 실질적 권세가인 한명회가 새 임금의 후원자가 되는 것이 종묘사직을 보존하는 길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열세 살에 예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조선 9대 임금 성종은 세종과 더불어 조선시대 최고의 성군(聖君)에 꼽힌다. 성종은 할머니(세조의 부인, 정희왕후 윤씨)의 수렴청정을 거친 후에도 어머니인 인수대비의 간섭, 한명회 등 공신들의 득세로 인해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한명회를 비롯한 공신들이 하나 둘 사라지면서 유교적 정치이념을 펼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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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 3편

■ 예종 3편

■ 예종 3편

귀성군 준을 27세의 나이로 병조판서에 제수 했다가 곧바로 남이에게 병조판서를 넘기고, 다음해에는 귀성군을 28세의 나이에 영의정으로 임명했다. 병조판서가 된 남이 또한 귀성군과 같은 28세의 젊은 나이였다. 서른도 안 된 영의정과 병조판서는 조선역사 상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파격적인 인사였다. 지금으로 보면 28세의 총리와 국방장관인 셈이었다.

세조는 그만큼 한명회, 신숙주등 권신들에게 신물이 난 것이었다. 하지만 귀성군 준이나 남이는 너무 젊었다. 그들이 노회한 권신들을 상대하기에는 너무 벅찼다. 게다가 세조는 이러한 일들을 완전히 정리하지 못한 채 죽고 만다. 더 큰 문제는 세조가 예종의 왕권강화를 위해 파격적으로 등용한 귀성군 준과 남이를 예종이 아주 질투하고 경계했다는 것이다.

예종은 세자시절부터 세조가 그 둘을 너무 총애하는 것에 질투심을 느낀 듯하다. 귀성군 준과 남이는 예종에게 있어서 양날의 칼이었다. 그래도 귀성군은 젊지만 신중했고, 겸손한 편이었다. 그는 정치적으로는 훈구파에도 가까웠지만, 신진세력 및 사림파와도 가깝게 지냈다. 권신들과도 두루 두루 잘 지내는 편이었다. 예종에게도 깍듯이 대하며 자기를 낮추었다. 한 마디로 귀성군 준은 성격이 원만하게 좋았고 적을 만들지도 않았다.

그러나 남이는 달랐다. 세조의 권신 중의 한 사람인 권람의 사위였고, 태종 이방원의 외증손자이기도 했다.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 출신인 남이에게는 남다른 패기와 야욕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이런 남이가 나이 먹고 노회한 한명회 등의 구공신들의 좋은 먹이감이 되기에는 충분했다.

1468년 9월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했다. 세조의 둘째 아들인 예종은 형인 의경세자가 20세의 나이로 요절함으로써 세자가 되었고, 5년여의 세자 생활을 거친 후 등극하였다. 당시 조선은 한명회 등 공신들이 정사를 농단하는 공신의 시대였는데, 온건한 성품의 예종은 등극하자 의외로 강하게 공신들을 압박하였다. 조선 최대 비극인 4대 사화의 서막이 열리는 시점이었다. 예종이 조금만 깨어난 군주였고, 신진세력과 함께 기득권 세력들인 세조의 권신들에게 대항할 힘을 키웠다면 4대 사화는 아마도 없었을 지도 모른다.

- 4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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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 2편

■ 예종 2편

■ 예종 2편

세조는 의리를 지키는 왕이었다. 공신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고, 술을 좋아하는 세조는 공신들과 허물없이 술자리도 하며 지냈다. 이 점은 태종 이방원과 다른 점이었다. 세조는 태종처럼 공신들을 숙청하지 않고 그들을 돌보았다. 이처럼 세조가 공신들을 죽이지 않고 우대하자 세월이 갈수록 한명회, 신숙주 등 구공신들의 세력은 점점 강대해졌다. 세조가 추구한 왕권강화정책이 물거품이 되게 생겼다. 그러할 때 세조는 병이 들었고 세자는 아직 채 스물도 안 된 어린 나이였다.

그래서 세조는 죽음을 앞두고 변화를 시도했다. 아직은 어린 세자를 위해 구공신들인 한명회나 신숙주를 경계 할 신진세력을 육성하며 키우려고 했다. 세조는 자신의 친동생 임영대군의 아들 귀성군 준과 권람의 사위인 남이를 총애하고 있었다. 이때 이시애 난이 터졌다. 이시애는 길주 출신으로, 함길도를 근거로 한 토착 호족이었다. 이시애는 세조의 중앙집권체제 강화의 일환으로 한양에서 직접 관리를 파견하자, 크게 반발하여 난을 일으켰다. 지금으로 말하면 이시애는 지방자치파였던 것이다. 이시애는 함길도 백성들에게 세조의 뜻을 받들어 중앙의 여러 중신과 결탁한 반신(叛臣)을 평정했다고 속여 그들의 협력을 구하였다. 계유정난 이후 절대 권력을 누리던 한명회, 신숙주 등 구공신들에게 절대 절명의 위기가 찾아 왔다.

이시애는 함길도 절도사 강효문과 중앙에서 파견한 관리들을 살해하는 동시에, 조정에 사람을 보내어 강효문이 한명회, 신숙주등의 중신과 결탁해 모반하려 하였기 때문에 그들을 죽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반란이 아니라 그런 간신들을 제거하기 위한 의거(義擧)라고 주장했다.

이 소식을 접한 세조는 한명회, 신숙주 등 구공신들을 일단 대궐 안에 구금시켰다. 물론 세조는 이들이 관련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오히려 너무 커져버린 구공신들을 제압 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세조는 구공신들을 제외한 반란토벌단을 편성했다.

세조는 한명회, 신숙주 등 권신들을 감금한 채 서른 살도 되지 않은 왕족 귀성군 준을 함길·강원·평안·황해의 4도병마도총사에 임명하고, 강순·어유소·남이 등을 대장으로 삼아 3만명의 군사를 함흥을 향해 출발하도록 했다. 이들 토벌단은 난 발생 후 7개월 만에 어렵사리 난을 진압했다. 세조는 이시애 난을 진압하는 데 성공한 장수들에게 공신 녹훈을 내리고, 조선역사상 유래 없는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했다.

-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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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 1편

■ 예종 1편

■ 예종 1편

예종은 1450년(세종 32년)에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의 2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황(晄) 자는 명조(明照)이며, 세조가 즉위하자 해명대군(海陽大君)에 봉해졌다. 하지만 예종은 재위 1년3개월 만에 스무 살의 나이로 급사하고 만다. 독살설, 복상사설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말 그대로 급사(急死)였다. 재위기간이 1년여 밖에 되지 않아 조선 역사에서는 별로 존재감이 없는 왕 중의 한 분이다.

예종은 본래 서열대로라면 형인 의경세자가 있어 왕이 되지 못했을 운명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의경세자는 용상에 올라보지도 못하고 스무 살의 꽃다운 나이에 죽고, 후에 덕종으로 추존되었다. 의경세자의 부인은 왕비가 되어 보지도 못하고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고 말았다. 우리가 역사드라마 속에서 예종과 성종, 연산군시대를 거치면서 많이 보아 왔던 인수대비이다. 당시 인수대비는 시동생(의경세자의 동생)인 예종이 죽기 직전까지는 통한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인수대비에게는 의경세자와의 사이에서 아들이 둘 있었는데, 예종이 죽은 후 둘째 아들인 자을산군(잘산군, 자산군)이 왕이 되었다. 그가 바로 조선 전기 문물을 완성시키고 유교적 통치이념을 완성시킨 성종이다. 성종이 된 자을산군은 한명회의 사위이기도 했다. 이러한 점 때문에 인수대비와 한명회의 합작으로 예종을 독살했다는 설도 있다. 설(說)일 뿐이지만 설(說)로만 볼 수 없는 당시의 여러 정황들이 있기는 했다.

야사에는 세조의 큰아들인 의경세자가 현덕왕후 권씨(단종의 친모)의 저주로 젊은 나이에 죽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의경세자가 단종보다 1년 먼저 죽었으므로 이것은 꾸며진 이야기로 보인다. 세조는 시간이 지날수록 조카를 죽인 것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렸다. 야사에 의하면 세조가 꿈을 꾸는 데 현덕왕후 권씨(단종 친모)가 저주를 내리면서 세조에게 침을 뱉었는데 그 자리에 피부병이 생겨 세조는 죽기 직전까지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다고 한다. 피부병이 세조 얼굴까지 번졌고, 온 몸이 썩어 가고 세조에게서는 심한 악취도 풍겼다고 한다. 세조가 극심한 피부병에 시달렸다는 것은 실록에도 나오는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세조 초기에 강력하게 실천했던 왕권강화와 부국강병 정책도 세조 말기로 갈수록 힘을 잃어가고 한명회, 신숙주 등 권신들에게 힘이 실렸다. 세조는 재임기간동안 왕권강화를 위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공신녹훈을 했다. 그렇게 공신이 된 사람들은 계유공신과 적개공신으로 나뉘어진다. 이들을 각각 구공신과 신공신으로도 불리어 졌다. 구공신은 세조가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계유정란에 도움을 준 신하들인 한명회, 신숙주, 권람 등이고, 신공신은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운 귀성군 준과 남이 등이다.

-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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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사랑에 빠진 세조의 후궁

■ 짝사랑에 빠진 세조의 후궁

■ 짝사랑에 빠진 세조의 후궁

세조에게는 후궁이 세 명 있었다. 박팽년의 딸인 근빈 박씨 , 신숙주의 딸인 숙원 신씨, 그리고 소용 박씨이다. 이 중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삶을 산 사람이 소용 박씨이다. 본명은 박덕중으로 세조가 즉위 전 잠저(潛邸)에 있을 때 첩으로 맞이하였다. 세조가 즉위하자 궁에 함께 들어왔다가 세조 5년(1459년)에 아들을 낳았고, 그 공로로 정3품 소용(昭容)이 되었다. 그런데 박씨가 낳은 왕자 아지(阿只)는 다섯 살이 되던 해에 요절(夭折)하고 말았다. 세조는 정희왕후 윤씨와 금슬이 매우 좋은 편이었고, 그다지 여색을 탐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나이가 들면서 피부병과 종기 등으로 건강이 좋지 않은 탓에 자연스럽게 소용 박씨를 찾는 일은 거의 없었다.

아직 20대의 젊은 나이로 아들을 잃은 슬픔에 더해 극심한 외로움을 견뎌야만 했던 소용 박씨는 ‘송중’이라는 환관을 짝사랑하게 되었다.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박씨는 환관 송중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의 마음을 거리낌없이 표현했다. 반면 송중은 아주 곤란함을 느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왕의 후궁이 구애를 해오니, 이 일이 알려지면 둘 다 죽은 목숨이다. 결국 송중은 세조에게 이 일을 그대로 고해바쳤다.

세조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후궁이 환관에게 마음을 뺏긴 것이니 왕이 아닌 일반 사람의 입장에서도 이만저만한 수치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세상 사람들이 알면 그것이 더 큰 수치였으므로 세조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덮어두기로 하고 넘어갔다.

하지만 소용 박씨는 이에 그치지 않고, 귀성군 이준을 짝사랑하게 되고 말았다. 귀성군은 세종대왕의 넷째 아들인 임영대군의 아들이므로 세조에게는 동생의 아들, 즉 조카였다. 귀성군은 25살의 뛰어난 용모를 지닌 청년으로, 문무를 겸비하여 무과에 장원급제한 당시 최고의 엄친아였다. 그런 귀성군을 세조는 몹시 총애하여, 귀성군이 겨우 18세일 때 병조판서를 제수할 정도였다. 세조가 그토록 귀성군을 총애하다보니 두 사람이 자주 만나게 되었는데, 그럴 때 박씨도 귀성군을 자주 보게 되었고, 그만 짝사랑에 빠지고 말았던 것이다. 환관 최호와 김중호를 이용하여 자신 또래인 귀성군에게 한글로 연애편지를 써서 전달하였다. 귀성군은 참으로 곤란한 지경에 빠졌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던 귀성군은 아버지 임영대군과 대책을 논의했다. 임영대군이라고 뾰족한 대책이 있을 리 없었다. 결국 귀성군과 그의 아버지 임영대군은 이 사실을 세조에게 즉시 알렸다.

이번에는 세조도 더 이상 덮어둘 수 없었다. 세조는 박씨를 잔심부름을 하는 하급 궁녀로 강등시켜버렸다. 궁중법도대로 하자면 마땅히 참수형에 처해야 하는 중죄이지만, 신하들의 상소에도 불구하고 세조는 옛정을 생각해서 목숨을 살려준 것이다. 하지만 짝사랑에 눈이 먼 박씨는 또다시 귀성군에게 구애편지를 보냈고, 귀성군은 이번에도 세조에게 고해바쳤다. 결국 세조는 편지를 전달한 환관 최호와 김중호를 때려죽이고, 박씨는 교수형에 처했다. 짝사랑이 불러온 비극적 결말이었다. 신하들은 귀성군에게도 죄를 물어야 한다고 했지만, 귀성군은 아무 죄가 없다고 하여 끝내 듣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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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에디슨, 장영실 3편

■ 조선의 에디슨, 장영실 3편

■ 조선의 에디슨, 장영실 3편

세종은 자동 물시계를 만들어 궁궐에 설치하고 싶었다. 장영실은 자신의 재주를 높이 사 면천(免賤)에다가 관직까지 내려준 세종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그 꿈을 이루고자 했다. 장영실은 당시 세종과 정인지, 정초 등이 조사하고 수집한 자료를 가지고 문헌에 전하는 소송의 물시계와 이슬람의 물시계를 비교하면서 ‘자격루(自擊漏)’라고 하는 새로운 자동 물시계를 만들어냈다. 자격루는 물을 넣은 항아리의 한쪽에 구멍을 뚫어 물이 일정하게 흘러나오게 만든 것으로, 규칙적으로 떨어지는 물방울의 양을 이용해 각각 시(時)·경(更)·점(點)에 따라 종·북·징이 울리거나 시패(時牌)를 든 인형이 나타나 시간을 알려주는 일종의 자동시간알림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자격루는 세종 16년 경복궁 경회루 남쪽에 있는 보루각(報漏閣)에 세워졌는데, 세종 때 만든 이 자격루는 모두 사라지고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덕수궁에 있는 것은 1536년(중종31년)에 장영실이 만든 것을 개량한 것이다. 장영실은 1438년 세종에 대한 보은의 뜻으로 자격루보다 더 정교한 물시계인 ‘옥루(玉漏)’를 만들었다. 임금을 위한 궁중 물시계인 셈이다.

또한 농사를 과학적으로 짓기 위한 노력도 빠질 수 없다. 그동안 빗물이 땅에 스며든 깊이로 비의 양을 쟀으나, 땅의 성질이나 위치에 따라 다 달라 정확하지가 않았다. 마침내 1441년 장영실은 물통에 떨어지는 빗물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어 빗물의 양을 재는 측우기를 만들었다. 측우기는 벽돌 모양의 돌기둥에 쇠로 만든 원통을 얹은 간단한 형태였지만, 비의 양을 효과적으로 정확하게 잴 수 있는 과학적인 기구였다. 원통형의 측우기 안에 빗물이 고이면 주척(周尺)이라 부르는 자로 측우기에 고인 물을 재서 강수량을 측정했다. 우리나라 측우기는 서양보다 200년이나 앞서 발명된 것이다.

하지만, 측우기를 처음 생각해내고 주도한 인물은 문종이라는 설(說)도 있다. 물론 문종이 측우기를 실험하고 제작하는 과정에서 장영실 등 과학기술자의 도움을 받았겠지만, 측우기 발명의 원조는 문종이라는 것이다.

장영실이 약 53세였던 1442년 3월(세종24년), 세종이 온천욕을 위해 이천을 다녀오던 중 어가(御駕)가 갑자기 부서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조정에서는 장영실이 기술자로서 그 책임이 있다 하여, 임금에 대한 불경죄로 간주하고 곤장 100대와 파직(罷職)을 구형했다. 이때 그토록 총애하던 장영실을 위해서 세종이 해주었던 것은 100대 맞을 것을 80대로 깍아 준 것뿐 이라하니 좀 야속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이 사건은 세종의 비대한 몸무게를 감안하지 않은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다. 대신들의 눈치를 본 것일까, 아니면 결국 신분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 것일까. 아쉬움이 드는 부분이다. 조선의 위대한 과학자 장영실은 이후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삼사(三司)의 건의로 사형을 당했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장영실은 이순지·이천 등과 함께 조선 전기 최고의 과학자로 지금도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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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에디슨, 장영실 2편

■ 조선의 에디슨, 장영실 2편

■ 조선의 에디슨, 장영실 2편

조선은 정책적으로 농사를 장려하는 농본정책을 기본으로 하고 있었다. 이러한 국가 정책에 힘입어 특히 세종대에는 집현전 학사들과 장영실을 중심으로 과학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방법과 농업 기술을 연구하였고, 농사를 과학적으로 지을 수 있게 해주는 많은 과학 기구가 발명되었다. 장영실은 1421년(세종3년)에 윤사웅·최천구와 함께 중국으로 유학하여 각종 천문기구를 익히고 돌아왔다. 이후 세종의 총애를 받아 정5품 상의원(尙衣院) 별좌(別坐)가 되면서 관노의 신분을 벗게 되었고, 궁중기술자로 활약하게 된다. 상의원(尙衣院)은 왕의 의복과 궁중에서 사용하는 물품을 담당하는 기관이었는데, 별좌는 종5품의 문반직이었다. 월급은 없는 무록관(無祿官)이었고, 작은 고을을 다스리는 현감 정도의 지위였다.

세종의 배려(配慮)로 궁중 기술자가 된 장영실은 얼마 뒤 별의 움직임을 살펴보고, 이를 기록할 수 있는 기구를 만들라는 명을 받았다. “우리나라는 별을 살피는 기구만큼은 중국보다 앞서 있다. 그러니 이를 잘 활용하면 더 훌륭한 기구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라는 세종의 명을 받고 정인지, 정초, 이천 등의 학자들과 함께 새로운 관측기구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하여 몇 번의 실패를 거쳐 1433년쯤 마침내 천체의 위치나 움직임 등을 살피고 기록하는 기구인 간의와 혼천의를 만들어냈다. 세종은 그 뛰어난 성능에 탄복하며 간의대를 설치하고, 그 곳에 이 기구들을 두어 세자들에게 해와 달, 별 등이 움직이는 이치를 배우게 했다.

뒤이어, 세종의 명령으로 장영실이 만든 ‘앙부일구(仰釜日晷)’는 지구를 반으로 자른 듯 한 솥 모양의 청동으로 만든 해시계이다. 그 속에 침을 세워 놓아 그림자의 길이에 따라 절기를 재고, 그림자 끝의 위치에 따라 시간을 알 수 있게 하였다. 이 해시계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사람이 많이 오가는 큰길가인 종묘 앞에 세워 놓았다. 특히 글을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시간 옆에는 쥐, 소, 호랑이, 말 등의 동물을 그려 놓아 쉽게 시간을 알 수 있게 했으니, 정말로 백성을 생각하는 세심한 배려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해시계는 밤이나 흐리고 비가 오면 시간을 알 수가 없는 단점이 있었다. 이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만든 것이 물시계이다. 물시계는 중국에서 기원전 7세기에 발명되었다고 전해지는데, 매일 물을 갈아주어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고 항상 사람을 시켜서 시간을 재어야 했다. 이를 게을리 하면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없었고, 시간이 안 맞아 큰 소동이 일어나는 게 다반사였다. 그래서 사람이 일일이 물을 갈아주지 않아도 자동으로 움직이는 물시계를 만들고자 하는 바램으로 중국 송나라의 과학자 소송(蘇訟)이 결국 만들어냈다. 그러나 그 장치들이 어찌나 복잡한지 소송이 죽은 뒤에는 아무도 그것을 다시 만들지 못해 곧 사라지고 말았다. 12~13세기에는 아라비아 사람에 의해 쇠로 만든 공이 굴러 떨어지면서 종과 북을 쳐서 자동으로 시간을 알리는 자동 물시계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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