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6일 토요일

인종과 김인후 1편

■ 인종과 김인후 1편

■ 인종과 김인후 1편

조선의 왕 중 가장 짧은 기간 동안 왕위에 있었던 사람은 고작 8개월 재위한 조선의 12대 왕 인종(1515~1545년)이다. 왕으로서 재위 기간은 짧았지만 인종은 사실 준비된 왕이었다. 1515년 2월 중종과 장경왕후 사이에서 태어나 1520년 6세의 나이에 왕세자로 책봉됐다. 25년간 왕세자로 있다가 1544년 중종을 이어 왕위에 올랐다. 인종은 세자로 있던 시절 사림파를 적극 중용했는데, 그 핵심 인물이 스승이던 김인후(金麟厚, 1510∼1560년)였다.

16세기는 조선 사회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은 신진 세력인 사림파가 정계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였다. 비록 훈구파와 정치적 대결에서 패배하면서 몇 차례의 사화로 피해를 당했지만, 사림파는 시대가 흘러가면서 제자가 양성되면서 자연적으로 성장했다. 사림파는 영남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됐지만 호남 지역에서도 주목할 만한 학자들이 나타났는데, 김인후가 그 대표자이다. 그는 장성에서 성장해 호남 지역에 성리학을 전파한 학자였다.

‘시경’을 탐독하고 성리학에 전념하던 김인후는 22세던 1531년 사마시에 합격해 성균관에 들어갔다. 이때 이황과 함께 공부했는데, 이황은 “더불어 교유한 자는 오직 김인후 한 사람뿐이다”라고 할 만큼 김인후에게 돈독한 우의를 표현했다. 1540년 31세로 별시문과에 급제해 본격적으로 관직에 진출했다. 1541년에는 독서당에 들어가 사가독서(賜暇讀書·조선시대에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줘 학문에 전념하게 한 제도)를 지냈으며, 이후 홍문관 저작, 시강원 설서, 홍문관 부수찬 등을 지냈다.

김인후는 관직 생활을 하면서 1519년 기묘사화 때 죽임을 당한 조광조 등의 명예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인종 대 이후에는 주로 고향인 장성에 은거하면서 후학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조광조 등의 학맥을 이으면서 그 한계를 극복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당시 ‘영남에 이황이 있다면 호남에 김인후가 있다’고 할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

인종이 세자로 있던 1543년 4월 세자를 보필하는 시강원의 설서(說書)가 된 김인후는 한 달에 10일을 궁궐에 머물면서 인종의 학습을 도와줬다. 시강원의 여러 스승 가운데서도 인종이 김인후를 특히 믿고 따랐다. 하지만 인종과 김인후의 인연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543년 12월 김인후가 부모의 봉양을 위해 옥과현감을 자청해 지방으로 내려갔고, 인종은 다음 해 11월 즉위했다가 1545년 7월 승하했기 때문이다. 정작 왕이 된 인종을 가까운 거리에서 보필할 기회는 없었다. 김인후는 인종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탕약을 만들기 위해 약방에 참여하려 했지만 결국 인종의 죽음을 막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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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중종의 여인들 희빈 홍씨

■ 중종의 여인들 희빈 홍씨

■ 중종의 여인들 희빈 홍씨

중종은 폐비 신씨에 이어 장경왕후, 문정왕후 등 3명의 왕비(王妃)와 9명의 후궁을 두었고, 그 사이에 자녀는 20명(9남11녀)을 두었다. 여러 후궁 들 중에서도 경빈 박씨와 희빈 홍씨를 특별히 아끼고 총애하였다. 희빈 홍씨는 조광조 일파를 제거하려는 공신들이 포섭한 홍경주의 딸이다. 중종하면 떠오르는 가장 유명한 인물이 조광조이다. 중종은 어떤 업적을 남겼는지 머리를 갸우뚱할 만큼 별로 한 일이 없고, 그 시대의 모든 제도개혁은 조광조의 작품이다.

조광조는 얼굴도 잘 생긴 미남에다가 성정도 곧고 반듯한 선비의 표상이었다. 지나치게 꼿꼿한 그의 성정(性情)이 결국 그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화를 자초하기는 했지만.........

홍경주는 딸인 희빈 홍씨를 통해서 중종에게 조광조 등의 사림파를 헐뜯게 했다. 애교도 많고 영리한 희빈 홍씨가 중종이 처소에 들 때마다 조광조를 헐뜯고 이간질을 했다.

"전하! 지금 나라의 인심이 모두 조광조에게 쏠려 있사옵니다. 그들이 공신록에서 공신들을 없애라는 것(위훈삭제)은 자신들이 조정을 한손에 거머쥐고 떡 주무르듯이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량과를 만든 것은 자기들을 반대하는 사람을 조정에서 모두 없애고 자기편으로 채우려는 심사입니다."

게다가 홍경주는 궁녀들을 시켜 대궐 후원에 있는 나뭇잎에 꿀물로 ‘주초위왕(走肖爲王:조씨가 왕이 된다)’이라는 네 글자를 쓰게 한다. 벌레들이 꿀물을 파먹어 들어가자 나뭇잎에 ‘주초위왕’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들어났다. 희빈 홍씨는 이 나뭇잎을 모아 중종에게 보여주었다. 이를 본 중종은 노발대발! 그렇지 않아도 지나치게 과격한 개혁과 곧은 성품으로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조광조에게 열받아 있던 중종은 이것을 계기로 조광조 일파를 싹쓰리 해버리고 말았다. 이것이 기묘사화(己卯士禍)다.

많은 사림파들이 귀양을 가고 죽임을 당하며 피바람이 불었던 사건에 이런 교활한 후궁의 입김이 작용했다하니 참 어이가 없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섬말나리】

【섬말나리】

【섬말나리】

백합과에 속하는 다년생 초본식물.

울릉도에서 자라는 다년초이며 인경은 달걀모양이고 약간 붉은 빛이 돌며 간혹 비늘 모양의 조각에 관절이 있다.

꽃잎이 열편에 검은 점이 없는 것을 새섬말나리라고 하며 울릉도의 동쪽 사면에서 자라고 있다. 섬말나리와 더불어 좋은 관상자원의 하나이며 일본에도 분포한다

▷ 학명 : Lilium hamsonii LEICHTL.

▷ 분류 : 백합과

▷ 분포지역 : 울릉도 및 한국 동북부 지역, 만주·연해주 지역, 일본

▷ 서식장소 : 산과 들

▷ 특징 :

아름답고 꽃을 볼 수 있는 기간도 길어 관상식물로도 인기가 있다. 한국 특산종으로 강원도 금강산, 함경도 원산·무산령 등지와 만주·아무르·우수리 지방까지 분포한다. 일본에서는 관상용으로 건너간 것이 귀화하여 널리 자란다.

중종의 여인들 경빈 박씨 2편

■ 중종의 여인들 경빈 박씨 2편

■ 중종의 여인들 경빈 박씨 2편

그때 경빈은 중종에게 세숫물을 올린다는 핑계로 강녕전으로 찾아 갔다. 중종이 문정왕후와 서침실에서 점심을 드는 동안 경빈은 동침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점심을 마친 중종이 동침실로 오다가 뜨락을 보니 죽은 쥐가 있었다. 별일 아니라 생각한 중종은 “가져다가 버려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궁녀들은 그 쥐를 문정왕후에게 보여줬다. 문정왕후가 즉시 정현대비에게 보고하자 정현대비는 크게 놀랐다. 누군가 동궁을 넘어 중종까지 죽이려 저주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정현대비는 경빈 박씨를 의심했다. 경빈이 새로 들어온 문정왕후를 질투한 것은 물론 동궁을 제치고 자신의 아들 복성군을 세자로 만들려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4월14일, 정현대비는 경빈 박씨를 주모자로 지목하는 글을 대신들에게 내렸다. 하지만 정말로 경빈 박씨가 주모자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문정왕후의 자작극일 수 있었고, 아니면 다른 누군가의 음모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정현대비는 중전 문정왕후와 세자에게 혹시라도 문제를 일으키지나 않을까하는 염려로 엉뚱한 야망을 품고 있는 경빈 박씨를 제거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여겼다.

범인으로 의심받던 경빈박씨(敬嬪朴氏)의 시녀와 사위인 홍려(洪礪)의 종들이 심문을 받고 매를 맞아 죽었다. 또한 형벌에 못 이겨 거짓 자백을 한 자도 있었다. 이 때문에 경빈 박씨와 그녀의 아들 복성군(福城君)은 함께 서인(庶人)이 되어 쫓겨나고 말았다. 뒤이어 경빈 박씨가 낳은 두 옹주를 폐서인(廢庶人)하여 내쫓았다. 다시 동궁의 인형을 만들어서 나무패를 걸고 거기에 망측스런 글을 쓴 일이 다시 생기자, 서인이 된 경빈 박씨와 복성군은 결국 사사(賜死)되고 말았다. 이를 ‘작서(灼鼠)의 변(變)’ 이라고 한다.

좌의정 심정도 경빈 박씨와 결탁하였다 하여 사사(賜死)되었다. 그 뒤 1532년 이종익(李宗翼)의 상소에 의해 진범이 김안로(金安老)의 아들 희(禧)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김안로는 심정과 유자광(柳子光) 등에게 원한을 품어오던 중 아들 희를 시켜 작서의 변을 일으키게 한 것이다. 이 사건은 아들이 부마로 있음을 계기로 정권을 농단하다가 권세를 잃게 되자 권세를 만회하고자 한 김안로의 음모로, 당시 정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경빈과 복성군은 신원되었다. 하지만 이미 백골이 되어버렸으니 이런 안타까운 일이.........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경빈 박씨를 두고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경빈은 성품이 공손하지도 않고 만족할 줄도 몰라서 사랑을 얻으려는 술책에만 힘썼다. 은총을 믿고 멋대로 방자하게 구는 가 하면, 분수에 넘친 마음을 품고 뇌물을 널리 긁어 들였으므로 간청(干請)하는 사람이 구름처럼 몰려 들었다. 그러고도 전혀 경계할 줄을 모르다가 이런 화를 저지른 것이다. 그러나 시론(時論)은 박씨만의 죄가 아니라 역시 임금이 지나치게 총애한 소치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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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의 여인들 경빈 박씨 1편

■ 중종의 여인들 경빈 박씨 1편

■ 중종의 여인들 경빈 박씨 1편

중종의 조강지처인 신씨가 폐비되고 중종의 후궁이 된 경빈 박씨! 연산군 11년에 채홍사(採紅使)에 의해 궁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 이듬해 중종반정이 일어나 반정공신 박원종이 그녀를 양녀로 삼았고, 그의 힘으로 후궁이 될 수 있었다. 슬하에 아들 복성군과 혜순옹주와 혜정옹주를 낳았다. 복성군은 세자(인종)보다 나이가 많았다. 중종의 제1계비인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가 세자를 낳고 산후병으로 죽자, 왕의 총애를 받고 있던 경빈 박씨는 자기 소생인 복성군을 세자로 책봉할 야망을 품게 되었다. 왜냐하면 중종이 특별히 그녀를 가장 총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계비(繼妃)인 장경왕후가 일찍 죽은 후, 경빈 박씨가 중전의 물망에 오르기도 했으나, 가문이 좋지 않다는 이유(흥청출신)로 무산되었다. 문정왕후 윤씨가 중종의 두 번째 계비가 되어 경원대군(명종)을 낳음으로써 경빈 박씨의 꿈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오히려 억울한 누명을 쓰고 폐출되는 운명이 되고 만다.

중종 22년(1527년) 2월25일, 동궁(세자:호)의 13세 생일잔치가 경복궁에서 열렸다. 당시 동궁은 장경왕후 윤씨의 아들로 훗날 인종이 되는 인물이다. 잔치에 동원된 궁녀들은 복잡한 화장실을 피해 으슥한 곳으로 가서 볼일을 봤다. 한 궁녀가 소변을 보려고 동궁 뒷동산으로 갔다. 볼일을 보다가 나무 위를 올려다보니 죽은 쥐 한마리(사지와 꼬리를 자르고 입·귀·눈을 불로 지짐)가 매달려 있었고, 생나무 조각으로 만든 방서(榜書: 써서 걸어둔 글)가 걸려있었다.

동궁(東宮)은 세자가 거처하는 곳으로 동쪽에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세자는 해생(亥生)이고, 2월 25일이 생일인 데다가 ‘해(亥)’는 돼지에 속하고 쥐도 돼지와 비슷하므로 당시의 조정 대신들은 동궁을 저주한 주술이라고 하여 난리가 났다. 유모는 정현대비 윤씨(중종의 어머니)에게 보고하는 한편 동궁의 외할아버지 윤여필에게도 알렸다. 범인을 색출해 처벌하라는 뜻이었다. 궁중에서의 이런 저주사건을 조사하면 모든 궁녀들이 혐의 대상이었다. 말로만 조사해서는 안되기에 참혹한 고문이 뒤따랐다. 그 과정에서 온갖 개인사정과 원한관계가 폭로되면서 궁중의 여러 사람이 연루될 수밖에 없었다. 이를 우려한 정현대비(성종비)는 그냥 조용히 덮기로 했다. 하지만 동궁에 대한 저주보다 더 심각한 일이 벌어졌다.

3월1일, 정현대비는 중종과 왕비에게 특별 점심을 내렸다. 장경왕후 승하 후 두 번째 왕비로 들어온 문정왕후 윤씨는 중종의 사랑을 못 받는 형편이었다. 당시 중종이 경빈 박씨에게 푹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를 딱하게 여긴 정현대비는 함께 점심이라도 하며 부부간의 정을 쌓으라는 뜻에서 특별 점심을 내렸던 것이다. 중종은 대비의 뜻에 따라 강녕전으로 가서 문정왕후와 함께 점심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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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의 여인들 문정왕후 2편

■ 중종의 여인들 문정왕후 2편

■ 중종의 여인들 문정왕후 2편

중종은 제1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에게서 인종을, 제2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에게서 경원대군(명종)을 낳았다. 문정왕후는 딸만 넷을 낳고 31살에 드디어 경원대군(훗날 명종)을 낳았다. 애타게 기다리던 왕자였다. 경원대군이 인종과 나이 차가 스무 살이나 나지만, 문정왕후는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만들겠다는 신념이 확고했다. 인종이 세자시절 동궁에 불이 난 사건과 인종이 문정왕후가 준 떡을 먹고 죽었다는 설(說) 등이 나도는 걸 보면, 인종이 죽음으로써 자신의 아들이 왕이 될 것을 누구보다 바라던 문정왕후가 의심받을 만도 하다. 문정왕후는 형제들을 시켜 장경왕후의 외척 김안로가 자신(문정왕후)를 폐하려 한다는 밀고를 하여 김안로를 제거했다. 왕위 계승을 둘러싼 중종의 두 계비(繼妃), 장경왕후 윤씨의 집안과 문정왕후 윤씨의 집안간의 대립은 막을 올렸다. 을사사화(乙巳士禍)의 불씨가 당겨진 것이다.

중종의 제1계비 장경왕후 윤씨가 낳은 원자(元子:호)가 이미 세자로 책봉되어 있었던 터에 제2계비 문정왕후 윤씨가 경원대군(뒤의 명종)을 낳자,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로(尹元老)·윤원형(尹元衡) 형제는 세자를 교체할 음모를 꾸미게 되었다. 이에 세자의 외숙인 윤임(尹任)은 세자를 보호하려 했다. 두 외척 간에 왕위승계를 둘러싸고 싸움이 벌어지게 되는데 윤임 일파를 ‘대윤(大尹)파’, 윤원로·윤원형 형제를 ‘소윤(小尹)파’ 라고 했다.

인종은 원래 중종 시대의 외척간의 반목과 갈등 속에서 성장한 유약한 군주로, 죽은 자신의 어머니(장경왕후) 대신으로 새엄마인 문정왕후에게 효도를 다했지만 문정왕후의 야심을 꺽지는 못했다. 문정왕후의 뜻을 얻지 못함을 항상 상심하던 중 병을 얻어 재위 8개월 만에 승하하였다. 인종의 뒤를 이은 경원대군 명종은 12세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모후인 문정왕후가 수렴정치를 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정권은 대윤파에서 소윤파인 윤원형에게로 넘어갔다. 문정왕후의 밀지를 받은 윤원형이 이기(李芑), 지중추부사 정순붕(鄭順朋) 등과 모의하여 명종의 보위를 굳힌다는 미명 아래 윤임 등의 대윤파 제거에 나섰다.

윤원형(소윤파)은 핵심 동조 세력과 결탁하여 형조판서 윤임, 이조판서 유인숙(柳仁淑), 영의정 유관(柳灌) 등 대윤파를 제거하려 했다. 중신회의를 통하여 위 3명의 죄상을 날조하여 아뢰고, 일단 윤임은 유배, 유인숙은 파직, 유관은 체차(遞差:교체)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에 대하여 홍문관을 비롯하여 양사의 사림파가 그 부당성을 지적하고 항의하자 이기 등은 3명에 대한 처벌을 더욱 강화하고 반대하는 양사의 관원을 파직시켰다. 또 위의 3명을 역모로 몰아 귀양 보냈다가 죽이고, 이어 종친인 계림군도 관련되었다 하여 죽였으며 윤임을 동조하던 사림 10여 명을 죽임으로써 대윤파를 모두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이것이 을사사화(乙巳士禍)이다. 명종의 외척 소윤파에 의해 인종의 외척이던 대윤파가 대거 제거당하는 화를 입은 것이다.

이 정치적 갈등의 한 가운데에서 권모술수를 행하던 문정왕후는 양주 회암사 절에 불공을 드리기 위해 간다고 찬물에 목욕재계하다가 감기에 걸려 허망하게도 65세에 돌아가셨다 하니 인생의 무상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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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의 여인들 문정왕후 1편

■ 중종의 여인들 문정왕후 1편

■ 중종의 여인들 문정왕후 1편

장경왕후가 죽고 다시 왕비 자리가 공석이 되자, 그해 10월 영의정 유순, 좌의정 정광필, 우의정 김응기 등이 왕비 책립을 건의했지만, 중종은 이미 국본이 정해졌으니 서두를 필요가 없다며 거절하다가 결국 처녀간택을 허락했다. 그리하여 17세의 새 왕비가 간택되었으니 바로 파산부원군 윤지임(尹之任)의 딸 문정왕후 윤씨이다. 그녀의 자태는 비록 아름다웠으나 성질이 매우 앙칼스러워 앞으로의 순탄치 않은 궁중생활이 예상되었다.

문정왕후는 인수대비와 정순왕후 등과 함께 사극드라마의 단골 주인공이되었다. 그만큼 정치사에 있어서도 최고의 치맛바람을 일으켜서 그런 것 같다. 그녀로 말미암아 전비(前妣) 장경왕후 소생인 인종의 수명까지 단축시켰다는 이야기도 있다. 문정왕후 이전에는 왕비가 사망하면 후궁에서 왕비를 선발했었는데, 문정왕후는 후궁을 거치지 않고 바로 왕비에 책봉된 조선 왕조 최초의 외부 간택 왕비이다.

1529년(중종 24년) 9월 13일에도 부여의 선비 김식이 다시 상소를 올려 신씨 폐출의 부당함을 제기했지만 무시되었다. 이제 폐비 신씨의 복위 논의는 완전히 물 건너가 버렸다. 중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인종은 승정원에 명하여 폐비 신씨의 거처를 폐비 궁으로 부르고, 모든 일을 후궁의 거처인 자수궁의 예와 같이 행하라고 전교했다. 조선의 임금 중에 가장 짧은 8개월의 재위 기록을 세운 인종이 왕비 중에 7일이라는 가장 짧은 기록을 가진 폐비 신씨를 살뜰하게 배려했다하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 후 사가(私家)에서 홀로 살던 폐비 신씨는 1557년(명종12년) 12월 7일, 71세를 일기로 외로운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부음을 들은 명종은 신하들에게 명하여 왕후의 예로 장사지내게 했다. 또 왕실 가족의 관을 다루는 장생전의 관을 내리게 하고, 부의를 보냈으며 자식이 없는 그녀의 사정을 고려하여 친정조카인 신사원에게 상주가 되어 제사를 받들게 했다.

그처럼 인종과 명종은 모두 폐비 신씨가 중종의 원비(元妃:조강지처)로서 모후와 같은 위상을 지녔고, 그녀를 대신하여 자신들의 어머니가 중전의 자리에 올랐음을 인식하고 나름대로의 예를 다했던 것이다. 그 후 신씨의 복위 문제는 1698년(숙종 24년) 신규의 상소문에서 단종 복권 문제와 함께 거론되었지만 주목받지 못했지만, 결국 신씨의 복위는 1739년(영조15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당시 유생 김태남이 복위 상소를 올리자 영조는 흔쾌히 받아들여 그녀의 신주를 대궐 안에 옮겨 모시게 했다. 이어서 대신들과 논의 끝에 시호를 단경(端敬)으로 하고 능호를 온릉(溫陵)으로 올렸다. 그렇게 해서 폐비 신씨는 궁궐에서 쫓겨난 지 무려 232년 만에 단경왕후(端敬王后)라는 왕비의 칭호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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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의 여인들 장경왕후 2편

■ 중종의 여인들 장경왕후 2편

■ 중종의 여인들 장경왕후 2편

장경왕후의 죽음은 정치적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장경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왕비 자리는 다시 비게 되었다. 그 당시 숙의 박씨에게는 아들 복성군이 있었는데, 복성군은 장경왕후가 낳은 원자(元子:훗날 인종)보다 위였고, 숙의 박씨 또한 후궁 중에서 가장 총애를 받고 있었으므로 당연히 자신이 중전이 될 것이라는 야심을 가지고 엉뚱한 마음을 품게 되었다.

그해 8월 8일, 담양부사 박상과 순창군수 김정, 무안현감 유옥이 첫째부인 폐비 신씨를 복위하고, 과거 중종을 위협하여 신씨를 폐출시킨 박원종의 관직을 추탈하라는 상소문을 올렸다. 세 사람은 일찍이 전라북도 순창의 강천산 계곡에서 회동한 뒤 목숨을 걸고 폐비 신씨의 복위 상소를 올리기로 결의하고 각자의 관인을 소나무 가지에 걸어놓고 맹세했다. 훗날 그들이 상소를 결의한 장소를 삼인대(三印臺)라고 하고 그 상소를 일컬어 ‘삼인대 상소’라고 불렀다.

그 무렵 중종반정을 주도했던 공신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은 이미 모두 세상을 떠난 뒤였으므로, 세 사람은 이 때를 기회라고 생각하여 폐비 신씨를 복위시킴으로써 대의를 실현하고 그녀의 원통함을 풀어주어야 한다는 상소문을 올린 것이다. 세 사람은 이 상소문에서 우선 국모의 위중한 지위를 강조하면서 중대한 이유와 명분 없이 신씨를 폐출하였음을 지적했다. 아울러 장경왕후의 죽음으로 비어있는 왕비의 자리에 부당하게 쫓겨난 신씨를 복위시켜야 하며, 동시에 폐출에 가담한 박원종 등 공신들의 행위에 대한 법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서 그들은 박원종 등이 중종의 대통 계승이 정당함에도 불구하고 연산군이 선위(禪位)한 것으로 조작하여 명나라에 보고했음을 지적하면서, 공명정대한 대의를 은폐한 자들을 처단해야 한다고도 했다. 그리고 장차 후궁이 중전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금할 것을 주장했다. 대간들은 그들이 임금과 관련된 민감한 부분을 지적했으니 그 죄를 물어야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하여 사림에서는 이들의 상소는 정당한 내용이며 처벌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맞섰다.

1515년(중종 10년) 8월 21일, 의정부에서는 상소문을 올린 이들에 대하여 장 100대, 유배 3년에 삭탈관직(削奪官職)을 건의했지만, 중종은 장형을 감하고 각각 남평과 보은 등지로 유배형에 처하라고 명했다. 그런데 그해 11월에 조광조는 언로(言路)를 넓히고 상소를 자유로이 허용하는 것이 옳거늘 대간들이 거꾸로 상소문을 트집삼아 죄를 청한 것은 잘못된 일이라며 대간(사헌부, 사간원)들의 파직(罷職)을 청함으로써 한동안 조정이 시끄러웠다.

1516년(중종11년) 4월, 중종이 그 해 거듭되는 천재지변에 대한 대책을 널리 자문하자 대신과 간관들은 일제히 김정(삼인대상소) 등을 석방하여 언로를 넓히라고 주청했다. 그러자 중종은 5월 김정 등의 죄를 용서하고 유배를 해제함으로써 폐비 신씨 복위상소와 관련된 논란은 종지부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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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의 여인들 장경왕후 1편

■ 중종의 여인들 장경왕후 1편

■ 중종의 여인들 장경왕후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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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은 부인 12명(왕비와 후궁), 자녀 20명(9남 11녀)를 두었다. 아버지 성종처럼 부인도 많고 자녀도 많다. 父傳子傳(부전자전) 이라고 할까. 중종은 성종과 정현왕후 사이에 태어난 진성대군이다. 성종과 폐비윤씨 사이에 태어난 이복형 연산군을 몰아내고 반정군에 의해 추대되어 왕위에 올랐다. 이를 중종반정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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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정공신들은 조강지처인 첫째부인 신씨를 7일 만에(최단기 중전) 사가(私家)로 내친 다음날부터 중종에게 서둘러 중전을 책봉하라고 보챘다. 그들의 내심은 하루빨리 자신들의 세력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이미 내정된 공신의 여식(女息)을 왕비로 삼아 내명부를 장악하여 권력을 다지려는 것이었다. 중종의 어머니 정현대비는 “중궁 간택은 용모만 보아서는 안 된다. 두세 명의 처녀를 간택하여 후궁에 두었다가 그 행실을 보아 중궁으로 임명하자.” 라고 제안했다.

공신들은 그녀의 뜻을 받아들여 숙의 윤씨, 숙의 박씨, 숙의 홍씨가 입궁했다. 숙의 윤씨는 박원종의 조카딸(윤여필의 딸)로서 훗날 인종을 낳은 장경왕후 윤씨이다. 또 숙의 박씨는 상주 출신으로 복성군을 낳고 궐내에 숱한 파란을 일으켰던 경빈 박씨이다. 숙의 홍씨는 반정공신이자 훗날 기묘사화를 주도한 홍경주의 딸이다.

1508년(중종 2년) 1월 18일 실권을 쥐고 있던 박원종은 유순정과 함께 중종을 찾아와 서둘러 중궁을 정하라고 재촉했다. 중종이 차일피일 결정을 미루자 5월에는 대간을 동원하여 왕비 간택을 재촉했다. 그들의 등쌀에 지쳐버린 중종은 6월 17일 숙의 윤씨를 왕비로 결정하고, 두 달 뒤인 8월 4일 근정전에서 책봉례를 거행했다. 이처럼 단경왕후 신씨의 폐출이나 장경왕후 윤씨의 책립은 모두 박원종의 뜻대로 이루어졌다.

새로운 중전이 책봉됨과 동시에 이미 쫓겨난 신씨(단경왕후)는 혹시나 하는 기대도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완전히 짝 잃은 기러기 신세가 되어 버렸다. 자식도 없고 남편도 없는 그녀는 재혼조차 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원망과 그리움으로 쓸쓸한 세월을 보내야 했다.

두 번째 부인이 된 장경왕후는 성종 22년(1491년) 7월에 파평 윤씨 윤여필과 어머니 순천 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8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이모인 월산대군의 부인에게서 자랐다. 외삼촌은 당연히 반정의 주역인 박원종이다. 신씨가 쫓겨나자마자 16살에 후궁으로 입궐하여 숙의에 봉해졌다가 중종 즉위 2년 8개월 만에 중전이 되었다. 그로부터 8년 후 딸 하나(효혜공주)와 아들 하나(원자:뒷날 인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25세의 한창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장경왕후의 산후병을 돌본 사람이 바로 ‘대장금’ 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장금에 대한 기록이 요리사가 아닌 의녀로 10번 등장한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알고 보니 나쁜 습관

알고 보니 나쁜 습관

알고 보니 나쁜 습관

1. 식사 직후 양치하기

식사를 하자마자 바로 양치를 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합니다. 최소한 30분에서 1시간 정도 기다렸다 하는 게 좋습니다. 침이 입안에 있는 산을 중화시킬 시간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2. 매일 헬스장 가서 웨이트 트레이닝 하기

우리 몸의 근육은 운동하는 사이사이 회복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오랜 시간 운동을 하거나 매일매일 하게 되면 근육이 회복할 시간이 없어 몸에 무리가 갈 수 있다고 합니다. 웨이트트레이닝의 이상적인 횟수는 주 4~5회라고 하니 충분한 휴식도 함께 취해주세요.

3. 아침 일찍 운동하기

사실 이른 아침 우리 몸은 매우 민감한 상태로 세균과 바이러스 감염에 저항할 준비가 안 되어 있어 야외에서 하는 격한 운동은 피하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아침에는 실내에서 가벼운 스트레칭을 해주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합니다.

4. 매일 샤워하기

우리 피부에서는 스스로 바디오일을 발산하고 있다고 합니다. 매일 뜨거운 물과 바디샤워 제품으로 이것을 씻어내면 오히려 피부를 손상시킬 수 있다고 합니다. 하루 이틀 정도는 건너뛰고 뜨거운 물 보다는 미지근한 물로 샤워하는 것이 피부 건강에 더 좋습니다.

5. 속이 더부룩할 때 탄산음료 마시기

속이 더부룩할 때 콜라나 사이다 같은 탄산음료를 마시면 답답했던 속이 조금 뚫리는 느낌이 들지만, 이건 진짜로 소화가 되는 것이 아니라 기분 탓이라고 합니다. 단지 뱃속에 차 있던 가스가 나와서 편안해지는 느낌이 들 뿐이고, 습관적으로 탄산음료를 자주 마시면 오히려 소화기능의 장애를 일으킬 수 있으니 자제하는 것이 좋습니다.

6. 술 마신 다음날 맵고 짠 음식으로 해장하기

술 마신 다음날 맵고 짠 음식을 먹게 되면 위 점막에 자극을 주게 되어 위장에 무리가 갈 수 있다고 합니다. 숙취해소를 위해서는 콩나물국, 북어국 같은 해독작용을 도와주는 아미노산이 풍부한 음식을 권장합니다.

7. 빈속에 우유 마시기

우유의 단백질과 칼슘이 위산 분비를 촉진하여 위벽을 손상시킬 수 있습니다. 아침이나 공복에 우유를 마실 땐 섬유소가 풍부한 견과류나 빵, 시리얼 등과 같이 먹는 것이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