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0일 수요일

위를 건강하게 하는 식품 11가지

위를 건강하게 하는 식품 11가지

위를 건강하게 하는 식품 11가지

1. 귤(귤껍질)

소화가 잘 안 되어 헛배가 부르고 식욕이 떨어질 때 먹으면 좋다.

2. 토마토

다량의 비타민과 무기질 성분이 위 점막을 보호하고 위염을 예방한다. 특히 토마토 속의 라이코펜성분은 위의 염증을 가라앉히는 데 효과적이다.

3. 당근

당근에 함유된 비타민A 성분은 위 기능을 강화한다.

4. 양배추

대표 성분은 비타민U다. 비타민U는 위 점막을 보호하고 위궤양과 십이지장궤양을 개선한다.

또 위의 상처를 치유하는 효능이 있다.

5. 브로콜리

항산화물질인 베타카로틴, 셀레늄이 풍부해 위암을 예방하는 데 효과적이다.

6. 부추

위를 따뜻하게 해준다. 부추를 꾸준히 먹으면 복부팽만감과 더부룩함 등의 증상이 개선된다.

7. 단호박

섬유질, 탄수화물, 무기질, 비타민이 풍부하다. 특히 카로틴 형태의 비타민A가 많고 위를 따뜻하게 해준다.

8. 생강

소화불량, 설사, 구토에 효과가 좋다. 위를 따뜻하게 하고 위벽을 보호해 위산으로 인한 속쓰림을 예방한다.

9. 김

항궤양 성분인 비타민U가 풍부하게 들어 있어, 위궤양 또는 십이지장궤양 등에 좋다. 약해진 위벽을 튼튼하게 하고, 장운동을 활발하게 해 원활한 배변활동에 도움이 된다.

10. 사과

주성분인 펙틴은 탄수화물의 하나로 위장운동을 도와 정장 작용을 한다.

11. 검은콩

체내 독소를 없애고 위궤양과 위염을 예방한다. 또, 신장 기능을 강화해 배뇨를 원활하게 하고, 위암 등 소화기 암을 예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위가 안 좋을 때 나타나는 증상

위가 안 좋을 때 나타나는 증상

위가 안 좋을 때 나타나는 증상

1. 목에 무엇이 걸린 듯하여 음식물을 삼키기가 힘들다.

2. 입맛이 없고 느글거리며 식후에 불쾌한 포만감을 느낀다.

3. 배불리 식사를 할 수가 없다.

4. 메스꺼움과 구토감이 있다.

5. 윗배에서 어깨쪽으로 퍼져 나가는 뜨겁거나 따스한 느낌의 가슴앓이가 있다.

6. 명치끝이 답답하고 아프다.

7. 쉽게 가스가 차고 트림을 자주한다.

8. 배가 쑤시거나 경련이 있거나 뜨겁거나 에는듯이 아프다.

9. 여러 부위의 어느 곳이든지 복통이 있으며 복통이 주기적이거나 지속적이다.

10. 배 아픈 통증이 고정되어 있거나 어느 한 쪽으로 이동하는 것 같다.

11. 소화제나 제산제를 먹어도 복통이 가라앉지 않고 계속 아프다.

12. 메스꺼움이나 구역질이 없이도 음식물을 자주 토해낸다.

13. 토한 것에 커피가루처럼 보이는 작은 입자를 함유한 갈색 또는 검은 색의 물질이 있다.

14. 대변의 색이 검정색이거나 붉은 피가 섞여 있다.

15. 지속적으로 설사가 계속되거나 전과 달리 대변이 갑자기 묽게 나온다.

16. 급하게 적은 양의 대변을 자주 본다.

17. 대변색이 짙은 황색 또는 회색이며, 미끌거리고 고약한 냄새와 거품이 많이 있다.

18. 한밤중에 설사로 인하여 잠이 깬다.

19. 대변을 보거나 방귀를 배출하면 속이 시원해진다.

20. 대변을 보려고 굉장히 노력하지만 변을 시원히 볼 수 없다.

21. 빈속에 속이 쓰리고 아프며 새벽에 통증 때문에 잠이 깬다.

22. 체중이 지속적으로 감소되며 가슴앓이가 장기간 반복된다.

23. 물 같은 설사를 하며 하복부에 경련성 통증, 그리고 메스꺼움과 구토가 동반된다.

24. 흥분하거나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 접하면 항문부위가 찬 듯한 느낌을 가지며, 변을 제대로 볼 수 없다.

25. 식후에 가슴이 답답하고 손발에 불쾌한 열감이 한동안 지속된다.

전자레인지 청소하는 방법

전자레인지 청소하는 방법

전자레인지 청소하는 방법

1. 레몬즙을 짜서 그릇에 담는다.

먼저 레몬즙을 그릇에 짜서 담는다. 꼭 레몬즙이 아니더라도 귤껍질과 물을 함께 그릇에 담으면 레몬즙과 같은 효과를 볼 수 있다. 레몬즙이나 귤껍질에는 구연산 성분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살균 효과를 가져 올 수 있다.

2. 3분~5분간 돌린다.

레몬즙 또는 귤껍질이 담긴 그릇을 전자레인지에 넣고 3분에서 5분간 돌린다. 그럼, 전자레인지가 구연산 성분을 가진 습기로 가득 차게 된다. 이후 3분에서 5분간 대기하면서 전자레인지의 묵을 때를 불린다.

3. 마른 행주로 닦아낸다.

습기로 불어난 묵은 때는 마른 행주로 구석구석 닦아내면 쉽게 청소가 된다. 위 방법으로 전자레인지의 눌어붙은 묵은 때뿐만 아니라 살균 청소까지 가능하다.

성종의 서증暑症 1편

■성종의 서증暑症 1편

■성종의 서증(暑症) 1편

성종을 한평생 괴롭힌 질환은 더위 먹는 병인 ‘서증(暑症)’이었다. 서증(暑症)은 11세 무렵부터 시작돼 승하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고통을 호소한 질병이었다. 최초의 관련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성종 14년 6월 11일에 나타난다. 『정해년에 심한 더위를 먹어 여름만 되면 이 증세가 발병한다.』 같은 해 6월 25일 기록엔 정희왕후의 제사를 임금이 지내지 못해 미안하다는 내용도 있다. 성종 19년 6월 7일엔 의정부에서 더위 때문에 경연과 국정 활동을 중지했고, 25년엔 머리가 아프고 더위 먹은 증상이 있어서 경연을 취소했다고도 한다.

《동의보감》에서는 서증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하지 이후에 열병을 앓는 것은 서병(暑病)이다. 서(暑)란 상화(相火)가 작용하는 것이다. 여름에 더위를 먹으면 답답증이 생기고 말이 많아지며 몸에서 열이 나고 갈증이 나서 물을 들이키고, 머리가 아프며 땀이 나고 기운이 없어진다.』 여기서 상화란 신장(腎臟)에 소속된 명문(命門·생명의 문 또는 생명의 근본이라는 뜻으로, 오른쪽 콩팥을 이르는 한의학 용어)의 화를 가리킨다. 신장은 차가운 쪽신수(腎水)과 뜨거운 쪽명문(命門) 양면이 있다. 신장의 뜨거운 부분인 명문은 생명의 문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인체의 보일러이다. 상화가 있어 더위를 잘 탄다는 점은 보일러가 지나치게 잘 달아오르는 걸 의미한다. 인간은 체온 36.5℃의 항온동물로, 보일러도 있지만 반대편엔 에어컨도 있어 체온을 유지해 준다. 하지만, 에어컨으로 진정하는 힘은 약하고 보일러로 달아오르는 힘이 더 큰 게 곧 상화다. 성종은 에어컨인 신수는 약하고 보일러인 상화, 즉 명문은 강한 열성 체질이었다. 그리고 상화를 더 고조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 분노(憤怒)이다.

세조의 장자(長子) 의경세자는 왕위에 오르지 못한 채 일찍 세상을 떠났다. 의경세자의 동생인 예종이 왕위에 오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자,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인 자을산군이 갑자기 왕위에 오른다. 그가 제 9대 임금인 성종이다. 형인 월산군과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당시 4세)이 있었는데도 대군 칭호도 받지 못한 채 자산군에서 자을산군으로 봉해진 성종이 왕위에 무난히 오른 배경에는 당시 최고 권력자 한명회의 존재가 크게 작용했다는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성종은 왕위에 오르기 전 장인인 한명회의 집에 거주할 때 서증이 시작되었다. 성종은 한명회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게 아닐까. 당시 최고의 권력을 쥐고 있던 한명회의 집에 있는 동안 성종은 사실 별 볼일 없는 존재였다. 그래서 상화가 발동할 만큼 분노할 상황이 있었던 건 아닐까.

성종은 잘 흥분하고 예민했다. 까칠하고 직설적으로 반응하는 특징은 실록에도 여러 차례 나타나 있다. 성종은 자주 수반(水飯)을 들었다. 물에 밥을 말아먹는 수반은 본질적으로 속이 타는 체질의 특성이 잘 드러난 습관이라고 할 수 있다. 《단계심법》이란 책은 『여름철에 찬 음식을 많이 먹거나 찬물이나 얼음물을 너무 자주 마시면 토하거나 설사를 한다. 더위 먹은 데는 비위를 따뜻하게 하여 소화를 잘 시키고 습(濕)을 없애며, 오줌이 잘 나가게 해야 한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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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세종의 싱크탱크Think Tank, 집현전 3편

■세종의 싱크탱크Think Tank, 집현전 3편

■세종의 싱크탱크(Think Tank), 집현전 3편

집현전은 세종의 각별한 배려 속에서 수백 종의 연구 보고서와 50여종의 책을 편찬하였다. ‘향약집성방’, ‘삼강행실도’, ‘자치통감’, ‘국조오례의’, ‘역대병요’와 같이 의학, 역사, 의례, 국방 등 전 분야에 걸쳐 많은 책들이 편찬되어 세종시대 문화의 꽃을 활짝 피우게 하였다. 집현전의 설치는 무엇보다 세종이 혼자만의 힘으로 국가정책을 결정하지 않고 다수 인재들에게 학문 연구를 지원하고 그 성과를 국가정책으로 활용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리고 집현전에서 배출된 쟁쟁한 인적자원은 15세기 찬란한 민족문화를 완성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집현전이라는 국가의 인재를 최대한 활용하면서 ‘함께하는 정치’의 모범을 보였다는 점에서 세종은 가장 위대한 국왕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세종이 집현전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과도 함께 정치 현안을 의논하고자 했던 점은 토지 세법에 관한 의견을 직접 물어 본 것에서 그 면모를 엿볼 수 있다. 1430년(세종 12년) 세종은 ‘공법’이라는 새로운 세법(稅法) 시안을 갖고 백성들에게 그 찬반 의사를 묻는, 요즈음으로 치면 ‘국민투표’를 실시하였다. 토지 1결당 일정하게 10두(斗)의 세금을 정하는 것이 핵심적인 내용이다. 이전까지 관리가 직접 논밭을 돌아보면서 수확량을 확인하고 그에 따라 세금을 정하는 방식이 부정이 저질러지면서 문제점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1430년 3월 5일부터 8월 10일까지 무려 5개월간에 걸쳐 찬반 투표가 실시되었다. 17만 여명의 백성들이 투표에 참여해 9만8000여명이 찬성, 7만4000여명이 반대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찬반 상황은 지역별로 ‘세종실록’에 기록될 정도로 국가의 총역량이 집중된 사업이었다. 당시 인구수를 고려하면 17만 여명의 참여는 전 백성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그러나 찬반 의견이 워낙 팽팽했기에 세종은 바로 세법을 확정하지 않고 다시 면밀한 조사를 거쳤다. 1437년 8월 전라도와 경상도부터 공법의 시범 실시가 이루어졌고, 1441년(세종 23년)에는 충청도까지 확대되었다. 1444년(세종 26년) ‘공법’은 마침내 토지의 크기와 풍흉(豐凶)의 수확량을 모두 고려하는 ‘연분 9등법’ ‘전분 6등법’으로 최종 확정되었다. 국민투표를 실시한 지 14년 만의 일이었다.

농업이 근본 산업이었던 당시, 백성들이 경작하는 토지에 대한 세금 결정은 백성들의 최대 관심사였다. 이처럼 중요한 사안이었기에 세종은 오랜 시간을 두고 신하와 백성들의 충분한 의견을 수렴한 끝에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흔히들 왕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전제왕권 시대에 이처럼 민주적인 의사결정 과정을 거쳤다는 사실이 실로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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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싱크탱크Think Tank, 집현전 2편

■세종의 싱크탱크Think Tank, 집현전 2편

■세종의 싱크탱크(Think Tank), 집현전 2편

집현전에서는 주로 옛 제도에 대한 해석과 함께 현안의 정책 과제들을 연구하였다. 주택에 관한 옛 제도를 조사한다거나 중국 사신이 왔을 때의 접대 방안, 염전법에 관한 연구, 외교문서의 작성, 조선의 약초 조사 등 다양한 연구와 편찬 활동이 이곳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리고 집현전에 소속된 학자들은 왕을 교육하는 경연관, 왕세자를 교육하는 서연관, 과거시험의 시관(試官),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史官)의 임무도 동시에 부여받았다. 그야말로 국가의 싱크탱크(Think Tank)로 자리매김 한 것이다.

집현전에서는 각종 편찬사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역사서, 유교 경서, 의례, 병서, 법률, 천문학 등 국가에 필요한 서적 편찬의 과제가 집현전에 부여되면 학자들은 과거의 법제와 학문 연구를 통해 이를 완수해 세종에게 올렸다. 이러한 편찬사업은 세종 당대에 완성된 것도 많았지만 ‘고려사’와 같이 전대의 역사를 정리한 편찬사업은 세종대에 시작하여 문종대에 완성되었다. 그만큼 긴 안목을 가지고 과제를 부여하고 이를 완성했던 것이다. 집현전은 세종의 지대한 관심 속에 국가의 중요 정책을 연구하고 결정하였다. 세종 또한 수시로 이곳을 방문하여 학자들을 격려하였다. 어느 겨울 밤 집현전에 여전히 불이 꺼지지 않은 것을 본 세종이 이곳에서 깜빡 잠이든 신숙주에게 자신이 입고 있던 담비 가죽 옷을 덮어준 일화는 널리 알려진 미담(美談)이다.

그러나 집현전 학자들은 세종의 결정으로 오랜 기간 이곳에 근무하게 했기 때문에 승진이 늦어져 학자들 간에는 불만이 쌓였고 다른 부서로 옮기려는 학자들도 나타났다. 정창손은 22년, 최만리가 18년, 박팽년이 15년, 신숙주가 10년을 근무하는 등 집현전 근무 연한은 다른 어떤 부서보다도 길었고, 이에 따라 승진에 불만을 가지는 학자들이 일부 나타났다. 이런 상황을 파악한 세종은 집현전 학사들을 제도적으로 배려하는 조치도 취하였다. 세종은 집현전 학자들을 위해 사가독서(賜暇讀書), 즉 왕이 하사하는 유급 휴가제도를 실시하였다. 심신이 지친 학자들에게 재충전의 기회를 준 것으로, 오늘날 대학교 교수의 연구년(또는 안식년) 제도와 비슷하다. 역시 시대를 초월한 성군(聖君)임에 틀림없다.

사가독서(賜暇讀書)는 세종 8년인 1426년 12월에 집현전 학사 권채, 신석견, 남수문 등을 집에 보내 3개월간 독서하면서 재충전할 수 있는 시간을 준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처럼 처음에는 집으로 보내 쉬게 했다가, 이후에는 학문하기 좋은 조용한 절(진관사)에 보냈다가, 성종대에 이르면 아예 독서당(호당이라고도 칭함)을 만들어 사가독서 제도를 정착시켰다. 처음에 독서당은 용산에 있어 남호(南湖)라 하였다가 중종대인 1507년 현재의 서울 금호동 산자락으로 옮긴 후에는 동호(東湖)라 하였다. 지금 서울 성동구의 독서당길이나 한강의 다리 중 동호대교는 조선시대에 동호 독서당이 있었던 흔적을 말해주고 있다.

-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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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싱크탱크Think Tank, 집현전 1편

■세종의 싱크탱크Think Tank, 집현전 1편

■세종의 싱크탱크(Think Tank), 집현전 1편

세종대왕은 그 자신의 능력도 뛰어났지만 나라의 인재를 적재적소에 잘 활용한 군주였다. 능력을 우선하면서도 포용성과 객관성을 가진 세종의 인재등용은 오늘날의 정치인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황희와 같은 명재상, 북방을 개척한 김종서, 집현전의 성삼문과 신숙주, 음악가 박연, 천민 출신의 과학자 장영실까지 세종대에 배출된 인재들은 우리 역사에서 가히 ‘드림팀’이라고 부를 만하다. 인재를 알아본 세종의 눈이 이들을 역사의 인물로 영원히 남게 한 것이다.

왕으로서, 정치가로서 세종의 위대함을 부인하는 한국인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훈민정음 창제, 백성들을 위한 ‘농사직설’ ‘향약집성방’ 등의 농서와 의서 간행, 천재 과학자 장영실의 발탁과 해시계·자격루·측우기 등의 각종 과학기구들의 발명, 박연으로 대표되는 궁중음악의 완성 등 세종대의 찬란한 민족문화의 성과는 일일이 나열하기도 힘들 정도이다. 그런데 세종대왕의 면면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점이 바로 역량 있는 국가 인재들을 폭넓게 활용했다는 점이다.

특히, 집현전의 설치는 세종의 인재활용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세종은 즉위와 함께 집현전을 국가기관으로 승격시켜 학문의 중심기구로 삼았고, 집현전에 재주와 행실이 뛰어난 젊은 인재들을 모았다. 신숙주, 성삼문, 정인지, 최항 등 세종 시대를 대표하는 학자들이 속속 집현전에 모여들었다.

집현전은 1420년(세종 2년)에 설치되어 세조 2년에 없어질 때까지 약 37년간을 존속하였다. 그러나 이처럼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집현전이 우리에게 깊이 각인되어 있는 것은 이곳에서 세종시대의 대표적인 학문과 문화가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집현전은 세종대에서 단종대까지 총 96명의 학자가 거쳐 갔다. 조선시대 문과 합격자 명단을 기록한 ‘국조방목’의 기록을 보면 집현전 학자 전원이 문과 급제자 출신임을 알 수 있다. 그것도 수석인 장원급제자가 정인지를 비롯한 16명, 2등이 6명, 3등이 신숙주 등 11명, 4등이 7명으로 전체 집현전 학자 중 절반에 가까운 46명이 5등 안에 합격한 그야말로 국가의 최고 인재들이 발탁되었다. 이들 우수한 인재에게 세종이 부여한 임무는 독서와 학문연구,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정책 결정과 편찬 사업이었다.

집현전은 현재의 경복궁 수정전 자리로, 국왕이 조회와 정사를 보는 근정전이나 사정전과 매우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만큼 세종이 집현전에 대한 관심이 컸음을 의미한다. 세종은 학문이 매우 뛰어난 군주였음에도 불구하고 홀로 정책을 결정하지 않았다. 집현전 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충분히 반영하려 했다는 점에서 인재를 활용하는 세종의 면모가 잘 나타나고 있다.

-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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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싱크탱크Think Tank 3편

■ 조선의 싱크탱크Think Tank 3편

■ 조선의 싱크탱크(Think Tank) 3편

유성룡은 명나라 제독 이여송과 평양성 탈환을 성공시켰고, 평양성 수복 후 이여송이 왜군과의 강화(講和) 협상에 나서자 이에 반대하고 왜군에 대한 총공세를 주장했다. 1593년 10월 다시 영의정에 오른 후에는 전쟁에 대비한 체계적인 대책 수립에 나섰다. 직업군으로 구성된 훈련도감의 설치와 ‘전수기의십조(戰守其宜十條·전쟁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10조목)’를 올리기도 했다. 이 중에는 전쟁에서 공을 세운 천민의 신분을 해방하는 면천법도 포함돼 있다. 1597년 정유재란 때도 경기도와 충청도를 순시하면서 최일선에서 활약한 유성룡은 1599년 2월 고향 경북 안동 하회로 낙향했다. 이곳에서 쓴 <징비록>은 7년에 걸친 임진왜란의 원인과 경과·전황·상황에 대한 반성 등을 자세히 기록한 책으로, 끝까지 공직자의 책무를 다한 유성룡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이원익은 조선의 관료로서 최고위 직책인 영의정을 여섯 번이나 지냈다. 그것도 선조·광해군·인조 3대에 걸쳐 한 정권마다 두 번씩이었다. 이원익이 여러 차례 영의정을 지낼 수 있었던 것은 탁월한 위기관리 능력에 있다. 선조가 평양에 있을 때 이원익은 이조판서로, 평안도 도체찰사를 겸직하며 선조를 수행했다. 이원익은 평안도의 이반된 민심수습과 병사들의 사기진작을 위해 군량 조달에 힘을 기울였다. 이여송이 이끄는 명나라 원병 파견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뛰어난 중국어 실력으로 조선의 입장을 정확히 명나라에 전했다. 이원익은 군량과 군수품 조달을 독려해 운송하도록 했고, 성벽을 수리하거나 명으로부터 화포에 관한 기술 등을 전수받았다.

이순신과의 인연도 주목된다. 이원익은 한산도에서 병력을 지휘하는 이순신을 만나 완벽한 군비 태세를 보고 잔치를 베풀어 병사들을 치하했다. 선조와 대신들이 수군 대책을 논의하는 자리에서는 이순신을 적극 옹호해 원균을 변호하는 이산해·윤두수와 팽팽히 맞섰다. 이순신 역시 “나를 참소(讒訴:헐뜯는 말)하는 말들이 길을 메웠는데, 상국(이원익)이 오로지 나의 계책을 써주었으므로 오늘날 수군이 완전할 수 있었으니, 이것은 나의 힘이 아니고 바로 상국의 힘이었다”고 이원익에 대해 감사함을 표시했다.

1627년 1월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을 가면서 이원익을 도체찰사로 삼았다. 고령으로 사양하는 이원익에 대해 인조는 “누워서 장수들을 통솔해도 될 것”이라며 부탁했다. 80세가 넘어도 그는 여전히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원로(元老)였던 것이다. 그의 소박했던 삶도 널리 본보기가 되었다. ‘금천(衿川·현재의 경기 광명)에 돌아가 비바람도 가리지 못하는 몇 칸의 초가집에 살면서 떨어진 갓에 베옷을 입고 쓸쓸히 혼자 지냈으므로, 보는 이들이 그가 재상인 줄 알지 못했다’는 실록에 표현된 기록은 최후까지 청백리의 삶을 살았던 그의 모습을 잘 말해 준다.

이러한 왕의 참모들이 있었기에 조선은 위기와 전란을 극복하고 500여년의 역사를 이어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도 위기와 난국을 슬기롭게 타개하고, 세계 속의 대한민국으로 거듭나게 해주는 인물들이 많이 등장하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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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싱크탱크Think Tank 2편

■ 조선의 싱크탱크Think Tank 2편

■ 조선의 싱크탱크(Think Tank) 2편

태조에게 정도전이 있었다면 태종에게는 하륜(河崙, 1347~1416년)이 있었다. 하륜은 태종을 왕위에 올리는 데 기여하고, 왕이 된 태종을 보필하면서 마지막까지 ‘태종의 참모’로 살아갔다. 하륜이 본격적으로 태종의 참모가 되어가는 과정에는 ‘관상(觀相)’에 관한 일화가 있다.(태종실록) 하륜이 본래 관상 보는 것을 좋아했는데, 친구이자 태종의 장인인 민제를 보고, “내가 관상을 많이 보지만 공의 둘째 사위 같은 사람은 없었다. 내가 뵙고자 하니 공은 그 뜻을 말해주십시오”라 부탁했고, 결국 민제의 주선으로 태종을 만난 하륜은 마음으로 태종을 섬기게 됐다고 한다. 관상을 본 하륜이 이방원의 풍모(風貌)를 보고 먼저 접근했다는 것은 킹메이커로서 하륜의 자질을 잘 보여준다.

1402년(태종 2년) 하륜은 명 영락제의 등극을 축하하는 사절로 가서 이듬해 4월에 명나라 사신 고득(高得) 등과 함께 황제의 고명(誥命)과 인장(印章)을 받고 귀국했다. 궁궐 안 신문고 설치와 지폐인 저화(楮貨) 유통과 같은 태종 시대의 주요 정책에도 늘 하륜이 있었다. 1401년 태종은 백성들의 민원을 듣는 신문고 설치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조정 신료들 다수가 우려를 표방했으나, 하륜은 신문고의 설치가 백성들에게는 큰 혜택이 될 수 있음을 역설했다. 태종의 절대적인 신임 속에 하륜은 고령임에도 관직에 있었다. 하륜은 70세가 되던 1416년 선왕의 능침을 순시하러 함길도(함경북도와 함경남도 지역의 조선 전기 명칭)에 들렀다가 객지에서 생을 마감했다. 죽는 날까지 태종의 참모로서 그 역할을 다했던 것이다.

조선 역사상 가장 큰 전란은 임진왜란이었다. 7년에 걸친 장기전이 지속되면서 백성들의 희생은 컸고, 농업 경제 기반도 무너졌다. 왕은 백성을 버리고 피난을 갔고, 경복궁 등 문화재 손실도 엄청났다. 이런 위기의 시기에도 명 참모는 있었다. 전란 전 이순신을 천거하고 임진왜란 때 현장 지휘자의 역할을 했던 유성룡(柳成龍·1542~1607년)이나, 외교와 국방·경제 모든 분야에 능통하며 선조에서 인조대에 이르기까지 여섯번이나 영의정을 지낸 이원익과 같은 인물이 대표적이다.

유성룡은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좌의정과 병조판서·도체찰사를 겸하면서 전시 정부의 최고 책임자가 됐다. 그는 평양성 사수를 포기하고 의주로 피난하려는 선조에 대해 강하게 반발했다.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해놓고 또 골짜기까지 들어간다면 다시는 한양을 수복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6월11일 선조는 최흥원·정철 등과 영변을 향해 길을 떠났고, 유성룡은 순찰사 이원익 등과 함께 명나라 장수를 맞이하기 위해 평양에 머물렀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조선의 싱크탱크Think Tank 1편

■ 조선의 싱크탱크Think Tank 1편

■ 조선의 싱크탱크(Think Tank) 1편

조선은 왕권과 신권이 잘 조화를 이루도록 제도적 장치를 갖춘 유교적 이념국가를 표방하고 있다. 그런 만큼 왕의 싱크탱크 역할을 하면서 왕을 보필하는 참모의 발탁과 활용은 국정의 성패(成敗)를 좌우할 만큼 중요한 일이었다. 건국 초기 조선의 기반을 닦은 태조와 태종대의 정도전과 하륜, 인재 양성소 역할을 한 세종대의 집현전 학사들, 전란의 위기 극복에 나선 유성룡과 명재상 이원익 등이 저마다 시대적 상황에 맞춰 그 역량을 십분 발휘한 대표적 싱크탱크(Think Tank)라 할 수 있다.

특히 자신의 세자 책봉에 반대했던 황희를 발탁해 명재상의 반열에 오르게 한 세종의 포용 리더십이나, 선조·광해군·인조 3대에 걸쳐 영의정을 지내면서 국방과 외교·경제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청백리 정승 이원익의 활약은 오늘날 정치인들이 귀감으로 삼아야 할 표상이다. 세종의 집현전이나 정조의 규장각처럼 인재 양성기관을 설치해 왕을 보필할 참모들을 체계적으로 배출시켜 국정을 수행한 점도 뛰어난 부분이다. 물론, 왕의 사리판단을 흐리게 해 결과적으로 국정농단의 주역이 되거나 희대의 간신으로 오명을 남긴 사람들도 많다.

고려 말 역성(易姓)혁명을 완성해서 조선 건국의 주도적 역할을 했던 정도전(1342~1398년)은 대표적인 킹메이커이자 참모(參謀)이다. 정도전은 취중(醉中)을 빙자해서 ‘한나라 고조(유방)가 장량(장자방)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량이 고조를 이용한 것’이라고 할 정도로 조선이라는 새 왕조 건설의 최고 주역임을 스스로 자부했다. 1388년 위화도회군으로 이성계가 권력을 잡은 후 정도전은 이성계의 정치 참모로서 개혁과 혁명을 주도해나갔다. 과전법이라는 토지제도 개혁에 착수해 구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박탈하여 새 왕조의 관리와 백성들에게 토지를 고르게 분배함으로써 새 왕조의 기반과 지지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건국 후에는 한양 천도와 경복궁 조성, 종묘와 사직의 정비, 한양 도성(都城) 건설에 주도적 역할을 해 나갔다. 또 <조선경국전>과 같은 법전을 저술함으로써 새 왕조의 기본 플랜을 제시하고 이를 실천했다. 건국 이후 이방원에 의해 죽임을 당하면서 정작 조선에서의 그의 삶은 극히 짧았지만, 정도전이 제시한 새로운 국가 모델은 500년 조선왕조의 기본 골격이 되었다. 특히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며 임금의 하늘이다’라는 민본(民本)사상 위에 토지제도·교육제도·과거제도 등을 통해 이를 실천해 나간 점은 오늘날의 정치에도 투영되어야 할 부분이다.

-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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