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1일 목요일

약이 되는 바다 음식

약이 되는 바다 음식

약이\xa0되는\xa0바다\xa0음식

1.\xa0가다랭이\xa0:\xa0스트레스

2.\xa0가리비\xa0:\xa0고혈압,\xa0동맥경화,\xa0간장병

3.\xa0가자미\xa0:\xa0스트레스

4.\xa0게\xa0:\xa0동맥경화,\xa0뇌졸중,\xa0시력감퇴,\xa0미각장애

5.\xa0고등어\xa0:\xa0고혈압,\xa0뇌졸중,\xa0간장병,\xa0골연화증,\xa0빈혈,\xa0감기,\xa0구내염,\xa0구각염\xa0

6.\xa0굴\xa0:\xa0동맥경화,\xa0간장병,\xa0미각장애,\xa0스태미너\xa0부족

7.\xa0김\xa0\xa0:\xa0고혈압,\xa0변비,\xa0체력저하

8.\xa0꽁치\xa0:\xa0고혈압,\xa0동맥경화,\xa0뇌졸중,\xa0골연화증,\xa0감기,\xa0구내염,\xa0구각염

9.\xa0농어\xa0:\xa0구내염,\xa0구각염

10.\xa0다시마\xa0:\xa0고협압,\xa0변비,\xa0체력저하\xa0\xa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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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xa0대합\xa0:\xa0동맥경화,\xa0간장병,\xa0시력감퇴,\xa0빈혈,\xa0미각장애

12.\xa0도미\xa0:\xa0고혈압,\xa0스트레스

13.\xa0멍게\xa0:\xa0스태미너\xa0부족

14.\xa0멸치\xa0:\xa0고혈압,\xa0골다공증,\xa0빈혈

15.\xa0명란\xa0:\xa0노화,\xa0피부질환,\xa0스트레스\xa0

16.\xa0모시조개\xa0:\xa0동맥경화,\xa0간장병,\xa0부종,\xa0미각장애

17.\xa0문어\xa0:\xa0동맥경화,\xa0간장병,\xa0시력감퇴,\xa0변비,\xa0미각장애

18.\xa0미꾸라지\xa0:\xa0구내염,\xa0구각염

19.\xa0미역\xa0:\xa0고혈압,\xa0변비,\xa0체력저하

20.\xa0바지락\xa0:\xa0동맥경화,\xa0간장병,\xa0골다공증,\xa0빈혈,\xa0미각장애\xa0

21.\xa0뱀장어\xa0:\xa0감기

22.\xa0뱅어\xa0:\xa0골다공증

23.\xa0붕어\xa0:\xa0빈혈,\xa0부종

24.\xa0빙어\xa0:\xa0골다공증,\xa0노화,\xa0빈혈

25.\xa0삼치\xa0:\xa0고혈압\xa0\xa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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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xa0새우\xa0:\xa0동맥경화,\xa0골다공증,\xa0미각장애

27.\xa0성게\xa0:\xa0스태미너

28.\xa0소라\xa0:\xa0동맥경화,\xa0시력감퇴,\xa0미각장애

29.\xa0송어\xa0:\xa0골연화증

30.\xa0아귀\xa0:\xa0노화\xa0\xa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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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xa0연어\xa0:\xa0고혈압,\xa0골연화증,\xa0감기

32.\xa0연어알\xa0:\xa0노화,\xa0피부질환,\xa0스트레스

33.\xa0우무\xa0:\xa0고혈압

34.\xa0은어\xa0:\xa0스트레스

35.\xa0잉어\xa0:\xa0부종,\xa0구내염,\xa0구각염,\xa0스트레스\xa0

36.\xa0장어\xa0:\xa0시력감퇴,\xa0빈혈,\xa0감기,\xa0피부질환

37.\xa0전갱이\xa0:\xa0고혈압,\xa0동맥경화,\xa0스트레스

38.\xa0정어리\xa0:\xa0뇌졸중,\xa0골연화증,\xa0골다공증,\xa0구내염,\xa0구각염

39.\xa0참치\xa0:\xa0고혈압,\xa0동맥경화,\xa0뇌졸중,\xa0간장병,\xa0골연화증,\xa0노화

40.\xa0청어\xa0:\xa0노화

41.\xa0톳\xa0:\xa0고혈압,\xa0빈혈,\xa0체력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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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변을 참으면 빨리 늙는다?

소변을 참으면 빨리 늙는다?

소변을 참으면 빨리 늙는다?

인간을 노화시키는 가장 큰 주범은 무엇일까?

가장 쉬워 보이는 소변(오줌)을 참는 거다.

누워서 잠을 잘 때 방광에 오줌물이 쌓이면

노화의 속도가 빠르게 진행된다.

밤에 잠을 자다가 새벽에 일어나 소변을 보는 일 대단히 중요하다.

일어나기 싫어 소변을 참고 있으면 절대 안 되며 소변이 마려우면 즉시 일어나 소변을 봐야 한다.

얼굴에 기미가 생기지 않게 하려면, 심장이 아프지 않게 하려면, 방광의 센서가 작동되어야 한다. 잠에서 빨리 깨어나 소변을 보는 것이 정상적인 사람의 삶이며, 병을 미연에 방지하는 일이다.

방광의 센서가 작동하여 뇌에 신호를 전달하였는데, 게으름을 피우게 되면 결국 요산이 온몸으로 퍼져 일어나 보니 병을 얻어 몸이 나른하고 일어나기조차 싫은 경우가 있다. 이것이 바로 새벽에 병을 얻느냐 아니면 병을 쫓아내고 건강한 체질로 만드느냐는 본인의 생활의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우리가 여름에 시원한 수박을 먹고 잠을 자게 되면 고민하게 되는 것이 있었다. 새벽에 일어나 잠을 깨우는 소변보는 일을 상기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수박 때문에 잠을 깨서 소변을 보고 다시 잠을 자고 일어나면 평상시 다른 날보다 기분이 상쾌함을 느꼈을 것이다.

"

수박의 기능 중 하나가 이뇨작용에 있는데, 이것은 다름이 아닌 바로 요산을 방지해주는 것이다. 즉 요산이 방광에서 흘러나와 우리 몸 안에 쏟아지는 것을 방지해준다는 것이다.

",

그래서 물 한 컵을 자기 전에 마시는 것과 새벽에 소변을 보고 다시 물 한 컵을 먹어 주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 몸에 가장 좋은 보약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러한 습관이 없었다면 당장 실천해야 한다.

왕릉王陵 1편

■ 왕릉王陵 1편

■ 왕릉(王陵) 1편

왕릉은 대개 왕과 왕비의 무덤까지를 포함한다. 왕과 왕비(정비)의 무덤을 일컬어 능(陵)이라고 하였고, 왕의 사친(私親)이나 왕세자(세자빈포함)의 무덤은 원(園) 이라고 칭하였다. 사도세자의 무덤은 원래 현륭원(顯隆園)이었다가, 장조 (莊祖)로 추존되면서 융릉(隆陵)으로 능호(陵號)가 바뀐 것은 능과 원의 위상 차이를 보여준다. 이외에 왕으로 있다가 폐위된 연산군이나 광해군의 경우에는 대군·공주·옹주·후궁 등의 무덤처럼 묘(墓)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왕릉은 단순한 왕의 무덤이라는 측면 이외에도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무덤을 조성한 지역과 곁에 묻힌 인물을 통해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압축적으로 살펴볼 수 있고, 왕릉 주변에 조성된 석물을 통해서는 당대의 건축과 미술의 흐름까지도 읽을 수 있다. 조선시대 왕릉 조성에서 가장 크게 고려된 것은 풍수지리와 지역적 근접성이었다. 풍수 지리적으로 명당(明堂)이면서도 서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곳이 왕릉 조성의 적합지였다. 후왕(後王)들이 선왕(先王)의 능을 자주 참배하려면 우선 거리가 가까워야하기 때문이다.

현재 남아 있는 왕릉 대부분이 서울과 구리, 고양, 파주 등 경기 북부 지역에 분포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상대적으로 한강 이남에 조성된 왕릉(태종의 헌릉, 세종의 영릉, 단종의 장릉, 성종의 선릉, 중종의 정릉, 효종의 영릉, 정조의 건릉, 순조의 인릉)이 적은 것은 뱃길을 이용하는 데 따르는 부담이 컸기 때문이다. 또한 동구릉(東九陵)이나 서오릉(西五陵)처럼 왕실의 무덤이 집중적으로 조성된 것은 이 지역이 명당이라는 점과 함께 선왕의 무덤에 함께 묻히고 싶어 하는 후대 왕들의 생각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조선시대 왕릉은 죽기 전 왕이 뜻하는 대로 만들어지지는 않았다. 무덤을 만드는 주체인 후대 왕의 생각과 정치적 상황, 신하들의 의견 등 다양한 변수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왕릉을 조성하는 과정에는 기본적으로 풍수지리적인 측면 외에도 정치적인 이해관계, 정비와 계비의 갈등 등 다양한 변수들이 큰 영향을 미쳤다. 보기에는 그냥 비슷한 모습을 취하고 있는 왕릉들은 저마다의 역사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조선의 왕들은 선왕의 무덤 참배를 국가의 중요행사로 여겼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을 양주에서 수원(화성)으로 옮긴 뒤 매년 아버지 묘소를 참배했으며, 그때마다 과거시험과 경로잔치를 열었다. 이것은 단순한 아버지에 대한 추모인 것이 아니라 사도세자에 대한 존숭(尊崇) 작업을 통해 ‘죄인의 아들’이라는 굴레를 벗고 왕권을 강화하여 자신의 입지를 굳건히 하고자 하는 정치적 목적이 담겨 있었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간통죄와 숙정옹주

■ 간통죄와 숙정옹주

■ 간통죄와 숙정옹주

2015년 헌법재판소는 말도 많고 탈도 많던 간통죄에 대하여 위헌 판결을 내렸다. 이로써 우리나라 형법에 있는 간통죄는 62년 만에 사문화(死文化) 되었다. 조선 500년 동안 공주님이나 옹주님 중에 사약을 받고 돌아가신 분이 딱 한분 계시는데, 바로 간통죄로 사약을 받고 돌아가신 중종의 서녀(庶女) 숙정옹주(淑靜翁主)이다. 숙정옹주는 조선 제11대 왕 중종과 후궁 숙의 김씨 사이의 유일한 딸이다.

숙정옹주는 10살에 한 살 더 많은 능창위(綾昌尉) 구한(具澣)에게 시집을 갔다. 구한은 시문(詩文)에 능하고 문인화(文人畵)에도 뛰어났다. 성품이 온화하고 용모가 단아하였으며, 효도와 우애가 깊었다고 하나 안타깝게도 35세에 요절하고 말았다. 34살에 과부가 된 숙정옹주는 40살에 어머니인 문정왕후로부터 사약을 받고 죽었다. 사위와 간통(姦通)을 하였다는 이유에서다. 왕실의 숨기고 싶은 이런 일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의외의 일이다.

옹주가 죽은 지 2년 뒤, 그리고 모후인 문정왕후가 죽은 지 1년 뒤에 옹주의 배다른 동생 명종이 옹주의 큰 아들인 구사근에게 벼슬을 내리게 된다. 당시 사관(史官)은 이러한 임금의 처사가 매우 못마땅했던 것인지, 숙정옹주의 간통사건을 사초에 기록하였고, 결국 실록에도 실리게 된 것이다. 그런데 명종임금은 왜 옹주의 아들에게 벼슬을 내렸을까? 관련 기록이 없으니 명종의 뜻은 알 수가 없지만, 아마도 모후인 문정왕후가 누나를 죽인 일이 지나치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니 모후인 문정왕후가 죽자마자 누나의 아들에게 벼슬을 내린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조선시대에 간통죄는 과연 죽을 죄였던 것일까? 그건 아닌 거 같다. 조선시대 간통의 대명사하면 어우동이 떠오른다. 그런 어우동을 죽인 죄목은 간통죄일까? 아니다. 명나라 법률인 《대명률(大明律)》에 따라 ‘남편을 배반하고 도망하여 바로 개가(改嫁)한 것’이다. 당시 임금인 성종이 어우동을 죽이려고 할 때, 영의정 정창손뿐만 아니라 예절을 관장하는 예조의 부장관인 예조참판 김순명도 사형에 반대했다. 그럼에도 성종은 어우동의 사형을 강행하였는데, 참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왜냐하면 형벌을 가볍게 쓰는 게 성군(聖君)의 지표인데, 이런 걸 너무나 잘 아는 성종이 어우동을 앞장서서 죽였으니 말이다. 이 이해하기 힘든 처사 때문에 성종이 어우동과 은밀한 스캔들이 있었다는 구설(口舌)이 있었던 것도 그럴듯하게 들린다.

암튼 어우동에게 사형을 내렸을 때 실록에는 어우동 엄마의 발언을 실었다. “사람이 누군들 성욕이 없겠는가? 다만 내 딸이 남자를 좋아하는 게 유난히 심할 뿐인데......” 어찌 그게 죽을죄냐는 엄마의 항변이다. 어우동의 엄마도 남종과 바람이 나 쫓겨난 바 있다. 이들은 시대를 잘못 만난 비운의 여인들일까? 아니면 성의 자유를 갈구하는 앞선 선각자였을까?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국장國葬 4편

■ 국장國葬 4편

■ 국장(國葬) 4편

산릉도감은 왕의 능을 조성하는 기관이다. 공조판서 등이 제조로 임명되고 왕이 승하 후 5개월 후에 있을 장례의식 전까지 왕릉조성을 마무리해야 한다. 산릉도감이 설치되면 지관이나 대신이 능을 조성할 지역을 결정하는데 이를 ‘택지(擇地)’라 한다. 때로는 왕이 생전에 직접 묻힐 곳을 정하고 무덤을 만드는 경우도 있는데 이를 ‘수릉’이라 한다. 풍수지리를 중요시했던 조선사회에서 택지는 중요한 사안으로 정치적 대립이 있기도 했다. 회의를 거쳐 공사일정과 필요인력을 정하여 왕릉 조성을 시작했다. 조선 초기에는 백성들에게 부역의 형태로 임금을 지급하지 않았으나 17세기 이후 인력을 고용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태조의 건원릉을 조성할 때는 6,000~9,000명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3도감의 도제조(都提調:총책임자)는 좌의정이 맡았고, 장례에 관한 모든 일은 총골 처리했다.

시신을 넣는 관을 ‘재궁(梓宮:가래나무로 만든 국왕의 관)’이라 하는데, 왕이 즉위하는 해에 만들어서 1년에 한번 씩 옻칠을 한다. 그 뒤 왕이 죽으면 붉은 비단을 사방에 붙이고 네 모퉁이에 녹색 비단을 붙인다. 칠성판(七星板:관속에 까는 얇은 판자)을 까는 등 여러 가지 치장을 하고, 모든 준비가 완료되면 발인을 한다. 발인(發靷) 전, 출관(出棺)을 위해 빈전을 여는 절차로 ‘계빈의(啟殯儀)’라고 하는데, 곡을 하며 슬퍼하는 의식이다. 빈전에서 재궁이 능지를 향하여 움직이는 것을 ‘발인의’라고 한다. 궁을 떠나 정해진 능지로 가는 행렬을 ‘발인반차(發引班次)’라 하고, 국장행렬을 그린 그림을 ‘발인반차도’라 한다. 발인을 하면서 길에서 제사를 지내는 절차는 ‘노제의’라 한다. ‘대여(大輿)’는 궁궐문 밖에서 능까지 왕의 시신이 담긴 관을 운반하는 가마다. 가마를 메고 가는 사람을 ‘담배군’이라고 하는데, 정조 발인에는 2,200명이 동원되기도 했다고 한다. 왕의 재궁을 왕릉에 안치한 후에 신주(神主:위패)를 받들어 궁으로 돌아와 혼전(魂殿)에 모신 후, 3년 상이 끝나면 종묘로 모신다. 이를 ‘부묘(祔廟)’라 한다. 왕은 삼년상이 끝나는 대로 부묘하고, 왕이 살아생전에 죽은 왕비는 삼년상이 끝나더라도 계속 혼전에 모셔졌다가 왕의 삼년상이 끝나면 함께 부묘하였다. 부묘의 준비와 진행은 부묘도감이 담당하였다.

국장이 끝나면 국장도감, 빈전도감, 산릉도감 등 각 기관에서는 국장을 치를 때마다 진행하는 업무내용을 세밀하고 자세하게 기술하였다. 즉, 국장을 한번 치르고 나면 『국장도감의궤(國葬都監儀軌)』, 『빈전도감의궤(殯殿都監儀軌)』, 『산릉도감의궤(山陵都監儀軌)』라는 3종의 의궤가 동시에 작성되었다. ‘의궤’는 조선시대 국장의 진행상황을 한 눈에 볼 수 있어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었고, 조선시대 기록 문화의 높은 수준을 보여준다. 조선시대 ‘의궤’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국장國葬 3편

■ 국장國葬 3편

■ 국장(國葬) 3편

왕의 시신은 릉에 안치하기까지 빈전(殯殿:상여가 나갈 때까지 관을 모시던 전각)에 안치한다. 빈전은 왕이 집무를 보던 편전이나 침전을 주로 이용한다. 이때 조정에서는 국장도감, 빈전도감, 산릉도감의 세 기관을 임시로 만들어 국상에 대비한다. 국장도감(國葬都監)은 장례 시 소요되는 물건을 준비하는 기관이고, 빈전도감(殯殿都監)은 장례기간 동안의 제사와 의례(염이나 습)를 행하는 곳이며, 산릉도감(山陵都監)은 왕릉을 축조하는 임무를 맡은 기관이다. 오늘날의 장례 풍습으로 말하면 장례를 총괄하는 집행부는 국장도감이, 빈소를 차리고 조문객을 맞는 일은 빈전도감이, 장지에서 묘를 만드는 일은 산릉도감이 담당했다고 보면 된다. 또한 빈전도감과는 별도로 혼전도감(魂殿都監)이 설치되었는데, 이곳은 장례를 치른 후 가신주(假神主: 뽕나무로 만든 가신주를 만들어 혼전에 모시고 삼년상을 치르는 혼전(魂殿: 사망한 국왕이나 왕비의 신주를 모셔 놓는 곳)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빈전도감이 혼전에 관한 업무까지 함께 담당하였다.

왕이 승하하면 온 궁궐과 나라가 슬픔에 잠기지만 국장을 치르기 위해 관련자들은 분주하게 움직인다. 가정에서도 직계가 아닌 친척이 주관하여 장례 절차를 진행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국장 3도감 책임자는 정승이 맡고 각 기관에 관리들을 임명하여 업무를 분담하도록 하였다. 빈전도감은 왕의 옥체를 모신 빈전(빈소의 높임말)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을 총괄하고, 국장도감은 장례에 필요한 물품과 문서들을 총괄하고, 산릉도감은 왕릉을 조성하는 업무를 총괄하였다.

조선의 왕과 왕비의 국장은 5개월, 정4품 이상 사대부는 3개월, 그 아래 관직은 1개월로 장례기간을 정했다. 여름에 시신은 ‘빙반’이라는 냉동 영안실을 만들어서 보관했다. 겨울 한강에서 오염되지 않은 곳의 얼음을 채취해서 사용했다. 서울 용산구 동빙고동과 서빙고동은 얼음 창고가 있었던 곳에서 유래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동빙고는 왕실 장례와 제사 전용이고, 서빙고는 왕실의 주방용과 문무백관에게 하사하기 위해 얼음을 저장했던 곳이다. 하지만 목재를 사용하였던 탓에 지금은 그 형태가 남아있지 않다. ‘빙반’은 길이 3M 너비 1.6M 깊이 90CM로 만들었다. 빙반을 바닥에 놓은 다음 그 위에 평상을 놓고 평상위에 시신을 올려놓는다. 그 위에 다시 빙반을 놓는다. 마른 미역을 가득 쌓아 갈아가면서 습기를 제거했다. 이것이 ‘국장미역’이다.

국왕이 사망한 다음 달에는 새 국왕이 애지(哀旨: 전 국왕의 죽음을 애도하는 교지)를 내려 묘호(廟號), 능호(陵號), 시호(諡號)를 정하여 올리게 한다. 또한 국왕의 평생 행적을 기록한 행장(行狀), 책문(冊文), 비문(碑文), 지문(誌文)도 고위 신료들이 분담하여 작성하였다. 이때에 작성된 글들은 『조선왕조실록』에서 각 국왕의 실록 마지막 부분에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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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장國葬 2편

■ 국장國葬 2편

■ 국장(國葬) 2편

시신을 목욕시킨 후에는 두 번에 걸쳐 시신을 묶고 이불과 옷에 싸는 렴(殮)과 관에 넣는 입관(入棺)을 행한다. 처음 하는 렴이 소렴(小殮), 두 번 째가 대렴(大殮)이다. 소렴과 대렴 시에 사용되는 의복과 이불은 소렴 시 19겹, 대렴 시 90겹이다. 영조의 경우에는 90벌의 옷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선조 비(妃)인 의인왕후의 경우에는 임진왜란 직후에 상이 있었기 때문에 시집올 때 해온 옷을 집어넣기도 하는 등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아무튼 이 렴은 갖은 종류의 옷과 옷감이 모두 사용되는 엄청난 물량을 요하는 행사였다. 그러나 렴(殮)은 단순히 시신을 묶고 관에 넣는 것만은 아닌 듯하다. 조선시대 왕의 장례기간은 보통 3개월에서 5개월이다. 겨울이라도 이 기간은 시체가 부패할 우려가 높은데 더운 여름엔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물론 평상을 마련하여 그 위에 관을 놓고 평상 밑에는 빙반이라 하여 석빙고에서 떠온 얼음을 채워 넣기는 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시체에서 흐르는 액과 악취를 막기엔 역부족이다.

따라서 이 엄청난 양의 옷과 이불은 이 기간 동안의 불쾌함을 없애는데 요긴하게 사용되었던 것이다. 렴이 끝나고 입관을 하면 왕과의 관계에 따라 각기 상복을 입게 된다. 왕과 부자(父子) 관계면 3년 복, 조손(祖孫) 관계면 1년 복을 입고, 모든 신하들과 백성들도 흰 소복(素服)을 입는다. 왕이 죽은 지 3일 후 종묘에 왕의 죽음을 고하고, 5일을 기다렸다가 입관한다. 이 닷새 동안 옥새는 왕실의 가장 어른, 통상적으로 대비에게 전달된다. 다행히 적장자가 있으면 자연스레 그에게 왕위가 이어지지만 후사가 없는 경우는 대비의 결정에 따라 다음 왕이 정해진다. 6일이 지나면 왕세자가 왕위를 계승하는 의식으로 국새를 전해 받고 왕위계승을 공포한다. 유교적 장례절차에서 새 왕은 선왕의 죽음을 막지 못한 죄인에 해당한다. 하지만 중요한 국정을 비울 수 없으니 자신의 능력을 보이기 위해서는 최고의 예를 갖춰 왕위를 이어받아야만 한다.

새 국왕은 전 국왕의 장례 절차가 한창 진행되는 도중에 간략한 의식을 거쳐서 왕위에 올랐다. 그러므로 즉위식의 분위기는 한껏 침울하다. 왕의 즉위식은 궁궐의 중심인 정전(正殿)에서 하지 않는다. 아직 왕도 아니고 죄인이기 때문에 즉위식은 궁궐의 중심인 정전의 문 앞에서 한다. 경복궁에서는 근정전으로 들어가는 근정문 앞에서 열었다. 문 앞에서 옥새를 받아 왕이 된 다음에 정전으로 이동해서 새 국왕은 즉위 교서를 반포한다. 그 내용은 대체로 선왕의 공적을 찬양하고 부족한 자신이 이를 계승하여 국왕이 되었음을 천명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왕으로서 처음 해야 하는 국가 대사가 선왕에 대한 장례가 된다. 이 절차를 어긋남이 없이 잘 마무리하는 것이 효의 시작이고, 왕의 정통성과 능력을 검증하는 과정인 것이다. 그러므로 선왕의 장례는 새로 등극한 왕과 신하들의 시험대이기도 했다. 즉위식을 마친 후에는 아침과 저녁의 문안과 곡(哭), 초하루와 보름날에 의정부에서 모든 관리를 거느리고 제사를 지내는 등의 여러 제사가 장례일 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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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장國葬 1편

■ 국장國葬 1편

■ 국장(國葬) 1편

국장(國葬)은 국가 차원에서 국비로 치르는 장례식으로 매우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 가장 격식 높은 장례의식이다. 조선의 국장제도는 태조 이성계가 죽자 처음으로 국장을 맞은 제3대 태종이 중국 송나라의 제도를 도입해서 확립했다. 고려시대의 국장은 1개월 이내로 두 달을 넘긴 예(例)가 드물다. 조선은 신생 왕국의 위엄과 권위를 보이려고 왕과 왕비의 국장 기간은 5개월, 정4품 이하 사대부는 3개월, 그 아래 관직은 1개월로 장례기간을 국법(國法)으로 정했다. 어쩌다 장례가 겹치게 되면 상복을 입고 1년 내내 지내야 하는 경우도 생겼다.

그러나 법적인 기간은 이렇게 정해져 있었지만 꼭 이대로 했던 것은 아니고, 조선 후기가 되면 백성들을 괴롭힌다하여 왕과 왕비의 경우도 3개월로 줄어들게 되었다. 장례절차는 ‘세종실록’과 ‘국조오례의’ 등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왕이 승하한 후 3년 동안 60단계가 진행되고, 능에 안장될 때 까지만도 36가지 절차가 진행되었다.

죽음을 앞둔 왕은 승하하기 직전에 유언(遺言)으로 왕위계승자를 정하는데, 고명(顧命)이라고 한다. 대개 국왕의 신임을 받던 측근 신하가 고명을 받으며, 왕위를 전한다는 ‘전위유교(傳位遺稿)’를 작성한다. 왕이 숨을 거두면 코앞에 명주솜을 대고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음을 확인한 다음, 의관(醫官)은 왕이 승하(昇遐)했음을 왕실 내외(內外)와 백관(百官)에게 알리고 곡(哭)을 한다(초종). 그리고 왕을 바로 가까이에서 긴밀히 모시던 내시는 왕이 평상 시 입으시던 옷을 들고 왕이 승하한 궁의 동쪽 지붕 위로 올라간다. 왼손으로 옷깃을, 오른 손으로 옷 허리를 잡고 북쪽을 바라보고 옷을 흔들며 상위복(上位復:왕이여 돌아오소서!)을 세 번 외친다. 왕의 영혼이 육신으로 돌아오라는 의미이다. 동쪽은 생명의 방향이고 북쪽은 죽음의 방향이므로 동쪽에서 북쪽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 후, 옷을 아래로 던지면 함으로 이것을 받고, 서쪽 지붕처마로 내려와 승하한 왕의 시신을 덮는다(복). 이러한 절차 후에 왕의 빈소를 마련하고 시신을 목욕시키는 의식을 거행한다. 국왕이 사망하면 왕세자 이하 신료들은 머리에 썼던 관과 입었던 옷을 벗고 머리를 푼다. 그리고 흰색의 옷과 신발, 버선을 착용하며, 3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 또한 졸곡(卒哭) 때까지 궁중의 모든 제사와 음악 연주가 중지되며, 이후 삼년상이 끝날 때 까지 사직 제사만 올리고. 음악은 대사(大祀) 때에만 연주한다. 또한 민간에서도 국왕의 사망을 애도하기 위해 5일 동안 시장이 열리지 않으며, 결혼과 도살이 금지된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우리말 나들이

■ 우리말 나들이

■ 우리말 나들이

<말짱 도루묵>

‘말짱 도루묵’은 열심히 노력했지만 아무런 소득도 없이 헛수고로 돌아가 버렸을 때 사용하는 말이다. 조선 정조 때 이의봉이 지은 어휘집 《고금석림》에 나오는 유래를 보면, 고려의 왕이 ‘목어(木魚)’를 드신 뒤 그 맛이 일품이라 ‘은어(銀魚)’라고 이름 붙였으나, 이후 그 맛이 그리워 다시 먹어보니 예전 같지 않자 “다시 목어라 하여라.”고 명하여 ‘환목어(還木魚)’가 되었다고 한다. 환목어를 한글로 풀어쓰면 ‘도로목’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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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유래로 조금 다른 이야기도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宣祖)는 피란을 가게 되었다. 피란을 떠날 때 먹을 것을 충분히 가지고 갈 수도 없고, 전쟁 통에 맛난 먹을거리가 갖추어질 여건도 아니어서 왕이라도 초라한 수라상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한 어부가 동네 앞 바다에서 잡은 눈이 큰 물고기 ‘목어(目魚:흔히 묵이라고 불렀다)’라는 생선을 잡아 왕에게 바쳤다. 선조(宣祖)는 이 생선을 아주 맛있게 먹고, 그 이름을 물어보았다. 어부가 묵이라고 대답하자, 이 맛있는 생선에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라 하여 즉석에서 은어라는 근사한 이름을 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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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끝나고 선조는 환궁을 했고, 피란지에서 맛보았던 \은어\가 생각나서 그 생선을 다시 찾았다. 하지만, 산해진미가 가득한 궁궐에서 ‘은어’를 다시 먹어보니 이전에 먹었던 그 맛이 아니었다. 그래서 선조(宣祖)는 "에이, 도로(다시) ‘묵’이라 불러라!" 라고 했다. 화장실 갈 때 마음과 나올 때의 마음이 다르다고 해야 할까? 앞서 고려 때의 이야기와 거의 비슷하지만, 《고금석림》에서 말하는 ‘목어(木魚)’가 선조가 드신 ‘목어(目魚)’와 같은 물고기인지는 명확한 증거가 없다. 또 한편에서는 ‘말짱 도루묵’ 의 주인공을 인조나 태조라고 주장하는 학설도 있다고 한다. 어쨌든 이 ‘도로 묵’이 ‘도루묵’이 되고, 앞에 ‘말짱’ 이라는 단어를 붙여 관용어로 쓰이고 있다. ‘도로 아미타불’이라는 말도 ‘말짱 도루묵’과 같은 뜻으로 쓰인다. 평생을 두고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외웠지만 아무 소용없게 되었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도로’는 이전과 다름없이 되었다는 뜻으로, 한자어 ‘도로(徒勞)’를 써서 헛수고라는 뜻이다.

실제로 도루묵이라는 생선은 ‘은어’라 불릴 만큼 그 맛이 좋다고 한다. 알 밴 도루묵을 굽거나 찌개로 끓이면 탱글탱글한 알이 입에서 톡톡 터지며 뛰어난 식감을 자랑하고, EPA와 DHA가 많이 함유되고 불포화지방산이 적당량 포함되어 있어, 성장기 어린이의 두뇌 발달과 성인병 예방에 효과적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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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적 임꺽정 4편

■ 의적 임꺽정 4편

■ 의적 임꺽정 4편

1562년 1월 8일, 임꺽정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은 들은 명종은 “국가에 반역한 임꺽정 무리가 모두 잡혀 내 마음이 몹시 기쁘다”고 말하며 공을 세운 자들에게 큰 상을 내렸다. 임꺽정은 조정에서 그의 이름을 알고 대대적인 수색을 벌인 지 약 3년 만에 잡혀 서울로 압송되었고, 잡힌 지 약 15일 만에 사형 당하였다.

이익(李瀷)은 『성호사설』에서 앞 시대의 홍길동(洪吉童), 뒷시대의 장길산(張吉山)과 함께 임꺽정을 조선의 3대 도둑으로 꼽았다. 성호가 3대 도적으로 이들을 꼽은 것은 비단 대도(大盜)여서만은 아닐 것이다. 당시 위정자들은 이들을 도적떼로 몰고 갔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일삼는 위정자에 대한 농민의 저항이자 신분해방의 부르짖음이 담긴 의적(義賊)이라는 시각이 담겨있다고 본다.

비록 실패로 끝났으나 임꺽정 집단의 활동은 정부·지배층에게는 불안과 공포의 대상이 되었으며 농민들에게는 희망을 안겨 주었다. 이에 따라 그에 대한 평가도 상반되어 지배층은 그를 흉악무도한 도적이라고 했고, 백성들은 의적으로 영웅시했다. 그 뒤 임꺽정에 관한 많은 설화가 민간에 유포되었고, 그의 행적이 소설로 그려지기도 했다. 벽초(碧初) 홍명희(洪命熹)의 『임꺽정』이 가장 유명하다. 홍명희가 생각한 임꺽정은 도적이 아닌 민중의 영웅이었다. 실존하는 인물에 역사적 해석을 달리하여 새로운 역사 인물을 재창조한 것이다. 1928년부터 10년간 조선일보에서 연재된 소설 임꺽정은 민족해방운동이자 현실적 저항 운동의 일환이었다.

임꺽정의 난은 역대 반란 가운데서도 상당히 장기적으로 지속되었고 조선 전체를 뒤흔들었다. 영의정 상진, 좌의정 안현, 우의정 이준경, 중추부 영사 윤원형등 당대 최고의 실권자가 모여서 황해도를 휩쓰는 도적떼를 없앨 대책을 세운 것이 1559년(명종14년) 3월 27일이었다. 이후 관군에 의해 소탕된 것이 1562년(명종 17년) 1월 초였으니 무려 3년이 넘게 황해도를 중심으로 오랜 기간 지속되었다.

《명종실록》의 사관(史官)은 이렇게 평하였다. “나라에 선정이 없으면 교화가 밝지 못하다. 재상이 멋대로 욕심을 채우고 수령이 백성을 학대해 살을 깎고 뼈를 발리면 고혈이 다 말라버린다. 수족을 둘 데가 없어도 하소연할 곳이 없다. 기한(饑寒)이 절박해도 아침저녁거리가 없어 잠시라도 목숨을 잇고자 해서 도둑이 되었다. 그들이 도둑이 된 것은 왕정의 잘못이지 그들의 죄가 아니다.” “도적이 성행하는 것은 수령의 가렴주구 탓이며, 수령의 가렴주구는 재상이 청렴하지 못한 탓이다. 오늘날 재상들의 탐오한 풍습이 한이 없기 때문에 수령들은 백성의 고혈을 짜내어 권력자들을 섬겨야 하므로 돼지와 닭을 마구 잡는 등 못하는 짓이 없다. 그런데도 곤궁한 백성들은 하소연할 곳이 없으니, 도적이 되지 않으면 살아갈 길이 없는 형편이다.”

한마디로 요약하여 정치만 잘했다면 임꺽정의 난이 일어날 리 없다는 말이다. 임꺽정을 흉악범으로 기록해 놓은 《명종실록》이지만, 사관(史官)은 그 사태의 본질을 제대로 읽고 있었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