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10일 일요일

항왜降倭:투항왜병 2편

■ 항왜降倭:투항왜병 2편

■ 항왜(降倭:투항왜병) 2편

선조는 비변사에 “항복한 왜군들은 모두 죽여야 한다고 명나라 파병군에게 전하라”는 명을 내렸다. 하지만 비변사는 이를 제지했다.

『전하의 말씀은 맞습니다. 저 왜적들은 만세의 후라도 반드시 복수해야 할 원수이고, 저들의 살점을 베어 먹고 가죽을 벗겨 깔고 자도 시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중국 장수들은 ‘조선은 어찌 그리 속이 좁으냐’고 힐난하고 있습니다.』《선조실록》

당시 중국군은 ‘오랑캐가 아침에 쳐들어와서 저녁에 항복하기만 하면 다 받아준다’는 원칙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중국군에게 아무리 말을 해봐야 속 좁다는 소리만 들을 것이 뻔하니 전하께서는 참으라는 것이었다. 이처럼 조선 조정은 임진왜란 초기에는 전쟁을 일으킨 왜적에게 품은 적개심을 풀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전세가 장기전으로 접어들고 상황이 달라졌다. 전쟁 발발 2년 4개월이 지난 1594년 8월 선조가 내린 명령을 보면 생각이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조선이 전투에서 이기지도, 용기백배하여 방어하지도 못하면서 항복·귀순하는 왜인들을 거절하고 있다. 이는 옳지 않은 처사다. 항복한 왜인이 수백 명에 이른다고 한다. 왜군의 군졸을 이렇게 앉아서 얻었는데, 지나치게 의심할 필요가 있는가.』

처음에 항복한 왜병을 요동으로 보냈던 조선 조정은 차츰 경상·함경·강원·충청·황해의 바닷가와 외딴 섬으로 보냈다. 또 시간이 흐르자 제주나 진도 등지의 수군 및 각 진에 나눠 이주시켰다. 점점 ‘항왜’의 관리가 골치 아파지기 시작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1594년(선조 27년) 6월 비변사가 아뢰었다. 『투항한 왜적을 경상도 내륙지방 한 고을 당 7~8인 혹은 15~16인씩 두었는데 골치 아파합니다. 매우 후하게 대접해서 하루 세 끼를 먹여주는데도 왜노는 만족할 줄 모릅니다. 끊임없이 요구하고, 뜻이 조금이라도 맞지 않으면 칼을 들이대고, 저들끼리 싸워 서로 죽인답니다. 이들이 진심으로 투항했는지의 여부를 알 수 없습니다.』《선조실록》

그렇다면 왜인들은 왜 조선조정에 투항했을까. 전쟁이 소강상태에 빠지면서 장기주둔이 계속되자, 왜군은 보급로 차단으로 군량미 부족에 시달렸다. 1595년(선조 28년) 4월19일 비변사가 항복한 왜인인 조사랑(助四郞)과 노고여문(老古汝文) 등 11명에게 술과 안주를 먹이자 ‘항복한 이유’를 술술 털어놓았다.

『우리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등의 휘하에서 예속된 장졸들입니다. 여러 장수들의 진영을 오가며 감당해야 하는 수자리(전방수비)를 괴로워하던 차에 조선이 후히 대접한다는 소식을 접하고·········(후략).』《선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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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항왜降倭:투항왜병 1편

■ 항왜降倭:투항왜병 1편

■ 항왜(降倭:투항왜병) 1편

임진왜란·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은 2~3만 명(일본측 자료)에서 10만~40만 명(조선측 자료)에 달한다. 그렇다면 일본인은 어떨까. 조선에 귀화했거나, 혹은 항복한 일본인은 사야가(김충선) 말고는 없었을까? 아니다. 있다. 1597년(선조 30년) 5월18일 도원수 권율이 죽도와 부산의 적진에 밀파한 간첩들의 보고를 정리하여 조정에 알린 내용이 《선조실록》에 등장한다.

『왜인들의 시름이 큽니다. 항왜(降倭:항복한 일본인)의 수가 이미 1만 명에 이르렀는데, 이들이 일본의 용병술을 다 털어 놓았을 테니 심히 걱정된다고 수근거립니다. 지금 경상우병사가 거느린 항왜만 해도 1000명에 달합니다.』고 했다. 또 1595년(선조 28년)의 보고서를 보면 『북쪽 변방에 이주시킨 항왜의 숫자가 5000~6000명에 이른다.』고 했다.

《선조실록》에 등장하는 항왜(귀화 혹은 항복한 일본인)의 수는 42건에 600명에 달한다. 기록된 숫자가 이 정도니 실제로 엄청난 수의 왜인이 갖가지 이유로 항복하거나 귀화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선조실록》 등을 살펴보면, 심상치 않은 이름들이 상당수 등장한다. 즉 사고소우, 연노고, 산여문, 요질기, 훤도목병위, 평구로, 요시지로, 조사랑, 노고여문, 사백구, 세이소…. 일본임임을 알 수 있는 이름들이다. 또 김귀순(金歸順), 김향의(金向義), 이귀명(李歸命) 등은 귀순하고(귀순), 의를 좇았으며(향의), 천명에 귀의했다(귀명)는 뜻에서 조선 조정이 하사한 이름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왜인들은 왜 투항했을까. 전쟁이 나자마자 귀화의 길을 택한 김충선 같은 특수한 예를 제외하면 초기에는 항왜(降倭)가 없었다. 왜군이 전쟁 발발(4월13일) 20일 만에 서울을 함락하고 평양으로 질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병이 전국에서 일어나고 명나라가 참전함에 따라 전쟁이 장기전 양상을 띠게 된다. 항왜의 기록은 1593년(선조 26년) 5월22일 처음으로 등장한다. 왜적 중에 100여명이 명나라 군에게 항복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명나라군은 항복하는 왜병들을 다 받아주고 심지어 상급(賞給)까지 내렸다. 선조는 “불구대천의 원수인 왜적에게 명나라 군이 상까지 내린다니 있을 수 없다”고 무척 못마땅하게 여겼다. 무엇보다 항복한 왜병들이 조선 땅을 가로질러 명나라로 압송될 경우 평양 서쪽의 지리를 꿰뚫어보게 될 것이고, 이 포로들 가운데 다시 일본으로 도망가는 자가 있다면 조선 지리의 허실(虛實)이 다 드러날 것이 아닌가. 이것이 선조의 걱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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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은 ‘노예전쟁’

■ 임진왜란은 ‘노예전쟁’

■ 임진왜란은 ‘노예전쟁’

임진왜란은 우리 민족에게 큰 상처를 남긴 처참하기 짝이 없는 전쟁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대륙 침략 야욕으로 시작된 이 전쟁은 어느 의미에선 가장 전투력이 왕성한 국가와 가장 준비되지 않은 국가 사이의 전쟁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당시 일본은 150여년에 이르는 전국시대를 거치며 어떤 군대보다 전투력이 높은 상태였다. 특히 1543년 ‘조총’이라 불리는 장총을 서양으로부터 전래 받은 이후, 대대적으로 생산하고 실전에 배치한 상태였다.

이런 무력을 갖춘 군대 15만8천명이 1592년 조선을 침략한 것이다. 당시 부산성을 지키고 있던 조선군의 병력은 600명이었다. 7년 동안 계속된 이 전쟁에서 일본군은 조선인 18만5738명, 명나라인 2만9014명 등 모두 21만4752명의 수급(首級:적군의 머리)을 베었다고 집계된다. 일본은 이런 잔인한 만행을 저지르는 한편, 5만~10만명에 이르는 조선인을 무더기로 끌고 갔다. 이에 따라 임진왜란을 ‘노예전쟁’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당시 도공들이 얼마나 많이 잡혀갔는지 조선에선 거의 30여 년 동안 찻잔도 제대로 생산하지 못했다고 한다. 일본에 끌려간 도공들은 큐슈의 사쓰마 등지에서 세계적인 도자기를 생산해 유럽에 대거 수출하는 등 일본 도자기 산업의 발전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래서 ‘도자기전쟁’ ‘문화전쟁’이라고도 한다. 일본에 끌려간 사람 가운데 일부는 노예로 또 다시 포르투갈 등 유럽으로 팔려가기도 했다.

전쟁 뒤 조선은 일본군의 살육과 전염병, 질병 등으로 인구가 격감해 경지 면적이 170만결에서 54만결로 크게 축소됐다. 3분의 1 이하로 줄어든 것이다. 한마디로 국가의 존립마저 불투명할 정도의 피해를 입었다. 한양의 경우 임진왜란 170년 전인 1428년(세종 10년) 11만명에 이르던 인구가 전쟁 뒤 3만8천명으로 줄어들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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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와 한명회의 비교

■ 황희와 한명회의 비교

■ 황희와 한명회의 비교

파주에서 서쪽으로 시오리 임진강가에 반구정(伴鷗亭)이라는 작은 정자가 있는데, 세종대의 명상이며 청백리의 귀감인 방촌 황희(尨村 黃喜) 정승의 정자이다. 18년간의 영의정 직을 사임하고, 90세의 천수를 다할 때까지 이름 그대로 갈매기를 벗하며 노년을 보낸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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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남에는 압구정이라는 곳이 있다. 압구정은 세조의 모신(謀臣)이던 한명회(韓明澮)가 그의 호를 따서 지은 정자인 압구정이 있던 곳에서 비롯된 지명이다. 반구정의 반(伴)과 압구정의 압(狎)은 글자는 다르지만 둘 다 벗 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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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정자는 다 같이 노재상이 은퇴하여 한가로이 갈매기를 벗하며 여생을 보내던 정자인데, 남아있는 지금의 모습은 아주 다르다. 반구정은 지금도 갈매기를 벗하며 철새들을 맞이하고 있음에 비하여, 압구정은 이미 그 자취마저 없어지고, 아파트 옆 작은 표석(標石)으로 그 터임을 가리키고 있을 뿐이다. 각 정자의 주인인 황희 정승과 한명회의 일생만큼이나 대조를 보이고 있다. 두 사람은 모두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이라는 영의정의 자리에 올랐던 재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은 언제나 명상(名相)·현상(賢相)으로 칭송되는가 하면, 또 한 사람은 권신(權臣)·모신(謀臣)으로 역사에 오명(汚名)을 남기고 있다.

세종의 위대한 업적 뒤에는 언제나 황희정승의 보필이 있었지만, 그는 언제나 눈에 뜨이지 않는 자리에 있었고, 심지어 물러나 임진강가에서 어부들과 어울릴 때에는 그가 당대의 재상이었음을 아무도 몰랐을 정도였다고 한다. 반면, 한명회는 그의 두 딸을 왕비로 들이고 네 차례나 1등공신이 되었으며, 그의 뒤에는 언제나 쿠데타와 모살(謀殺)과 옥사(獄事)가 함께 하고 있었다. 한명회는 뒤에 신원(伸冤)되기는 하였지만, 부관참시(剖棺斬屍:죽은 뒤 큰 죄가 드러난 사람에게 내리는 극형)의 화를 입은 권력자였고, 스스로 실력자 곁에서 앞질러 헤아리고 일을 도모한 모신(謀臣)이었다. 황희정승은 두문동에 은거하기도 하고 유배되기도 하지만, 언제나 자신의 원칙에 따라 진퇴(進退)를 결정했다.

황희의 성품을 잘 나타내는 많은 일화들이 남아있다. 황희정승의 집안 노비 두 사람이 서로 다투다가 그를 찾아와 서로 상대방의 잘못을 일러바치자, 사내종에게도 ‘네 말이 옳다’ 계집종에게도 ‘네 말이 옳다’ 하며 돌려보냈다고 한다. 이를 지켜보던 부인이 그의 무정견(無定見)을 나무라자 ‘부인 말도 옳다’고 했다는 일화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야기이면서, 황희의 성품을 잘 나타내주는 일화이다. 황희 정승이 겸허하고 관대한 일화의 주인공으로 알려진 것에 비하여 한명회는 그와 정반대인 모사꾼과 간신배로 이름을 알리고 있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 ‘신데렐라 편의점’… 밤이 되면 알바가 사라진다

◇ ‘신데렐라 편의점’… 밤이 되면 알바가 사라진다

◇ ‘신데렐라 편의점’… 밤이 되면 알바가 사라진다

편의점 ‘이마트24′ 서울 성수백영점은 매일 밤 11시가 되면 무인(無人) 점포로 바뀐다. 손님들은 입구에서 신용카드를 긁어 신분을 증명한 뒤 입장한다. 물건을 들고 와 셀프 계산대에서 바코드를 찍고 카드로 결제한 뒤 나가면 된다. 직원은 다음 날 오전 6시에 출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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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야에 무인으로 운영되는 ‘하이브리드 편의점이 최근 1년 새 배(倍) 이상 급증한 것으로 집계됐다. 최저임금 인상에 코로나로 야간 유동 인구가 줄고, 언택트(비접촉) 선호 심리가 확산한 게 기폭제가 됐다는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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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계열 하이브리드 편의점은 작년 초 250여 곳에서 올해 550여 곳으로 늘었다. 현재 GS25와 CU가 각각 약 200개 점포를, 이마트24 113개, 세븐일레븐이 43개 점포를 야간에 무인으로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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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소벤처기업부도 ‘스마트슈퍼라는 이름의 하이브리드 모델 확산에 적극 나서고 있다. 운영 컨설팅을 제공하고 시설 개선 비용도 저금리로 빌려준다. 중기부 관계자는 “일반 소매점이 야간 장사가 가능한 ‘스마트슈퍼’로 변신한 뒤 일 평균 매출이 32.6% 증가했다”면서 “올해부터 매년 스마트슈퍼를 800개씩 열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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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 무인 편의점을 전문으로 하는 프랜차이즈도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다. 작년 4월 창업한 ‘꽁꽁냠냠’이 전국에 무인 가맹점 125곳을 열었고, ‘신구멍가게24’ ‘마켓무’ 등도 각각 90곳과 36곳을 열었다. 신구멍가게24 관계자는 “코로나 이전 1년간 가맹점이 5개뿐이었는데, 작년에만 85개를 새로 열었다”고 말했다. 대기업 편의점 관계자는 “편의점주 입장에서 야간 8시간을 무인으로 돌리면 월 인건비를 250만원 가까이 절감할 수 있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 현빈-손예진, 골프로 정 쌓고 세 번 열애설 끝 ‘사랑의 안착’

◇ 현빈-손예진, 골프로 정 쌓고 세 번 열애설 끝 ‘사랑의 안착’

◇ 현빈-손예진, 골프로 정 쌓고 세 번 열애설 끝 ‘사랑의 안착’

배우 손예진(38)과 현빈(38)이 연인 사이임을 인정했다. 2021년 새해 첫날 터진 열애 소식이자 한류 특급 커플이 탄생한 것이다. 둘은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 이후 사랑하는 마음을 키워왔다고 양측 소속사가 밝혔다.

손예진은 1일 자신의 소셜미디어를 통해 “그렇게 됐습니다”라며 쑥스러운 듯 소감을 밝혔다. 손예진은 “처음으로 일이 아닌 내 개인적인 이야기로 여러분 앞에 서려니 왜 이토록 부끄러운지 모르겠다”면서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음에 감사드리고 예쁘게 잘 가꿔가 보도록 노력하겠다”고 덧붙였다.

현빈 소속사 VAST엔터테인먼트 역시 “현빈⋅손예진 두 배우는 작품을 통해 인연을 맺게 되었고 드라마 종영 이후 서로에 대한 좋은 감정을 가지고 연인으로 발전하게 됐다. 두 사람을 따뜻한 시선으로 응원해주시길 부탁드린다”고 당부했다. 동갑내기인 둘은 취미인 골프를 즐기며 사랑을 키워왔다. 동종 업계로 서로를 잘 이해하는 점도 연인 사이로 발전하는 데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현빈과 손예진은 지난 2018년 개봉한 영화 ‘협상’으로 호흡을 맞췄다. 친구처럼 잘 어울리는 모습에 미국 동반 여행설 등 세 차례 열애설이 나기도 했다. 당시 소속사는 “친분은 있지만 시간이 맞아 만나게 된 것”이라며 열애설을 부인했다.

둘을 잇는 연결고리는 지난해 2월 종영한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 재벌가 상속녀 윤세리와 북한 장교 리정혁의 러브 스토리에 ‘진짜 커플이 되면 좋겠다’는 팬들의 응원이 상당했다. 해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국내에서 21.7%의 높은 시청률(닐슨코리아 기준)을 기록한 드라마는 일본에서 넷플릭스 1위를 하며 일본의 ‘한류 붐’을 재점화했다. 특히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 190여 국에 스트리밍되면서 일본뿐만 아니라 대만⋅필리핀⋅태국 등에서 넷플릭스 톱 10에 드는 등 국제적 인기를 누렸다.

이번 열애 소식 역시 해외 매체들이 빠르게 타전했다. 일본 요미우리신문은 이날 “일본에서도 큰 인기를 끈 드라마 주인공 현빈과 손예진이 열애를 인정했다”고 전했다. 마이니치와 산케이신문 등도 주요 뉴스로 다뤘다. 일본 야후 재팬은 둘의 열애를 톱기사로 올렸다. 필리핀⋅싱가포르⋅인도네시아 매체들도 둘의 열애 소식을 빠르게 보도했다.

세련되면서도 다정한 눈빛으로 인기를 끈 현빈은 2003년 KBS 드라마 ‘보디가드’로 데뷔했다. 2005년 최고 시청률 50.2%를 달성한 ‘내 이름은 김삼순’을 통해 스타성을 입증했고, 드라마 ‘시크릿가든’에선 “최선입니까. 확실해요?” “이태리 장인들이 한 땀 한 땀” 같은 대사들을 유행시키기도 했다. 2001년 MBC 드라마 ‘맛있는 청혼’으로 데뷔한 손예진은 ‘청순’의 대명사로 불리며 영화 ‘클래식’ ‘내 머리 속의 지우개’ 등으로 톱 여배우로 성장했다.

-조선일보-

영창대군 3편

■ 영창대군 3편

■ 영창대군 3편

영창대군을 죽인 광해군에게는 걸림돌인 인목대비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인목대비를 처리하는 시간도 얼마 걸리지 않았다. 얼마 후 광해군 8년(1616년) 1월 경운궁에 광해군을 비방하는 익명서가 날아들어 왔다. 기자헌이 대비와 협력하여 유희분과 박승종을 몰아낸 다음 큰일을 도모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광해군은 조신들을 모아 놓고는 그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였다. 성균관 유생들의 폐비 상소가 제출되었으며, 이이첨과 허균(許筠)은 김개(金介) 등을 시켜 무뢰배와 거지들을 모아서 유생의 복색을 입혀 놓고, 궐문 밖에 엎드려서 대비는 역적이니 어서 폐서인하여 추방함이 옳다고 아뢰게 하는 연극을 꾸몄다.

조정에서도 한효순이 백관을 거느리고 들어가 폐모(廢母)를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이이첨은 모든 것을 자신이 조종하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있다가 유생들의 상소와 한효순의 정청(廷請:세자나 삼정승이 모든 벼슬아치를 거느리고 궁정에 이르러 큰일을 임금께 아뢰어 하교를 기다림)을 빙자하고 이위경(李偉卿)을 시켜 폐모 상소를 지어 올리게 하였다. 그리고 문무 백관들에게 찬성 서명하기를 강요하였다. 일부는 회피하고 서명을 하지 않았고, 특히 원임대신 이원익과 기자헌(奇自獻)은 강경히 반대하였다.

또한 이항복은 신병으로 요양하고 있다가 그 말을 듣고 참지 못하여 강경한 어조의 반대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이들 반대세력들은 계속된 대간들의 탄핵을 받아, 마침내 이원익은 관직을 삭탈당한 뒤 남해로 귀양갔다가 수원으로 옮겨졌다. 기자헌과 이항복은 처음 정평과 용강으로 유배되었다가, 죄가 중하다하여 다시 삭주와 창성으로 가게 되었다. 그 뒤 다시 기자헌은 종성으로, 이항복은 북청으로 옮겨졌다.

철령 높은 재를 쉬어 넘는 저 구름아.

고신(孤臣) 원루(怨淚)를 비삼아 실어다가

임 계신 구중 궁궐에 뿌려 준들 어떠리.

이 노래는 그때 오성 이항복이 북청으로 귀양가면서 지은 것이다. 이항복과 기자헌을 귀양 보낸 다음, 이이첨 등은 정청에 참여하지 않은 정창연(鄭昌衍) 등을 ‘십사(十邪)’라 하여 내몰아 정배시키고 의창군 등 20여 명도 그렇게 함으로써 반대파들을 모두 제거한 셈이다. 그리고 늙고 병들어 참여하지 못한 재상들은 모두 벼슬을 깎아버리고, 끝내 저희들 뜻대로 인목대비를 폐서인하여 경운궁으로 내몰았다. 이것을 가리켜 ‘계축사화(癸丑士禍)’ 또는 ‘계축옥사’ 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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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창대군 2편

■ 영창대군 2편

■ 영창대군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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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집권당 대북파가 장악한 삼사와 승정원 등에서는 영창대군의 처벌을 계속 상소하였다. 그러나 남인 및 일부 소북, 서인은 처벌을 반대하였고, 이항복(李恒福)·이덕형(李德馨)·곽재우(郭再祐) 등은 배가 다른 이복형제이지만 계통상 모자, 형제지간의 의가 있다며 영창대군 처형을 반대하였다. 하지만, 대북세력의 다수는 토역(討逆)의 논리를 내세워 죽일 것을 주장했다. 결국 이항복 등이 유배를 당하고, 대북파는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광해군의 세력기반을 다지기 위해서 1614년 이이첨 일파가 강화부사(江華府使) 정항(鄭沆)을 시켜 악의적으로 영창대군의 방에 불을 때게 하였고 음식도 끊었다. 영창대군은 뜨거운 바닥 위에 앉지도, 눕지도 못한 채 밤낮없이 창살을 부여잡고 울부짖다가 기운이 다해 죽었고, 이이첨과 정항은 영창대군이 병으로 죽었다고 보고했다. 이때 영창대군의 나이는 9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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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일기》에 의하면, 정항이 영창대군을 굶겨서 죽게 하였다거나 정항이 온돌을 뜨겁게 달구어 영창대군을 증살(蒸殺)했다고 되어 있으나, 《인조실록》에는 광해군의 밀명을 받은 별장(別將) 이정표(李廷彪)가 음식물에 잿물을 넣어 영창대군을 죽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어 확실한 죽음의 경위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그 후 1623년 인조반정 후 관작(官爵)은 복구되었고, 이복 형 경창군의 넷째 아들 창성군을 사후양자로 지명하여 가계를 이어갔다.

시신은 1614년(광해군 6년) 경기도 광주군 남한산성 아래(현 성남시 태평3동 근처)로 운구되어 매장하였다가, 광주군의 성남시 개발지역에 포함되어 1971년 8월 경기도 안성군 일죽면 고은리(현 안성시 일죽면 고은리 산24-5)에 이장되었다. 이장 과정에서 묘지명(墓誌銘) 등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고 매몰돼 있다가, 1993년 성남시 태평3동 4911 골목길에서 도시가스 시설 배관공사 도중 다섯 조각으로 파손된 채 발견되었다. ‘영창대군묘’는 1983년 9월 19일 경기도의 기념물 제75호로 지정되었다. 전주이씨 안성군 종친회에서 관리해오고 있다.

봉분 앞에 상석과 춘로석이 있고, 장대석으로 단을 쌓아 아래와 구분하였다. 아래 전방에는 동자석이 좌우에 있고 동자석 앞에는 망주석과 문석인이 좌우에 세워져 있다. 석물의 재질은 화강암이고 묘비는 대리석이다. 묘비에는 ‘영창대군증시소민공지묘(永昌大君贈諡昭愍公之墓)’라는 명문이 있다. 이수와 비신은 동체이며 쌍룡이 섬세하게 새겨져 있다. 묘단에는 직사각형 모양에 연화무늬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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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창대군 1편

■ 영창대군 1편

■ 영창대군 1편

영창대군의 이름은 이의, 제14대 선조의 열네 째 아들이다. 선조의 첫 번째 부인인 의인왕후가 후사를 보지 못하고 죽은 뒤 맞이한 두 번 째 부인 인목왕후의 아들이다. 선조는 6명의 후궁을 두어 임해군과 광해군을 비롯하여 여러 왕자와 옹주를 두고 있었으나, 정비(正妃) 소생의 적장자는 영창대군이 유일하다. 그것도 55세의 나이에 얻은 늦둥이다보니 선조의 특별한 총애를 받은 것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선조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국가비상사태에 대비하여 권정례(權停例:절차를 밟지 아니하고 거행하는 의식)로 공빈 김씨(恭嬪金氏)의 둘째 아들인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그러나 그 뒤 정비 소생인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선조는 세자를 바꾸고 싶어했다. 방계승통에다가 서출이라는 점을 의식하던 선조는 이미 세자로 책봉한 광해군을 싫어하여 유영경 및 몇몇 신하들과 영창대군의 세자책봉을 몰래 의논하였다. 당시 실권을 잡고 있던 유영경(柳永慶)을 위시한 소북파(小北派)가 이 뜻을 지지하여 영창대군을 왕세자로 추대하려 하였으나, 선조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이 일은 광해군 집권 후에 유영경 등이 처형당하는 원인이 되었다.

선조는 자신이 죽은 뒤의 사태에 대비하여 특별히 한준겸 등 7명에게 영창대군의 뒤를 부탁하였다. 이를 유교칠신(遺敎七臣)이라 부른다.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직 나이 어린 영창대군을 남겨두고 가는 선조의 마음이 어떠하였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 대목이다. 이를 간파한 이이첨, 정인홍 등 대북파들은 세자를 바꿔서는 안된다고 계속 주장하다가 사실무근한 소문을 퍼뜨린다는 죄목으로 귀양가게 되었다. 귀양 출발을 차일피일 미루던 차에 선조가 갑자기 승하(1608년)하게 되었고, 그 뒤를 이어 즉위한 광해군은 이들을 다시 등용하였다. 하지만, 광해군과 이이첨(李爾瞻) 등 대북파들에게 있어서 아직 영창대군은 그 존재 자체가 위험 요소였다.

그러던 중 1613년(광해군 5년) 소양강을 무대로 시주(詩酒)를 즐기던 서양갑(徐羊甲)·박응서(朴應犀) 등 7명의 서출(庶出)들이 역모를 꾸몄다는 이른바 ‘7서의 옥’이 일어났다. 이이첨 등은 이 기회를 이용하였다. 그들이 영창대군의 외조부 김제남과 함께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역모를 도모했다는 자백을 받아내고, 광해군은 이이첨ㆍ정인홍 등의 농간으로 형 임해군(臨海君)을 죽이고 인목왕후를 서궁(西宮)에 잡아 가두었다.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을 반역죄로 몰아 서소문(西小門) 밖에서 사형에 처하고, 영창대군을 서인으로 강등시켜 강화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하였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이몽학의 난 4편

■ 이몽학의 난 4편

■ 이몽학의 난 4편

명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점차 조선에 유리해지자 의병을 독려하던 선조의 태도가 급변한 것이다. 선조는 의병을 관군으로 흡수시키라는 명을 내리지만 그것은 형식적인 것이었고, 결국에는 의병들이 군량미만 축내고 있다며 강제 귀농 조치를 명했다. 사실상의 의병 해체 작업을 실시한 것이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나선 의병들에게 돌아온 것은 바로 군량미나 축내는 쓸모없는 사람 취급뿐이었다. 전쟁이 끝나면 자신들의 과오(過誤)가 드러나고, 전공(戰功)이 의병들에게 돌아갈 것을 두려워하였고, 그렇게 되면 자신들의 체면이 말이 아닌 것이다. 참으로 치졸하고 한심한 군주에 그 신하들이다.

의병으로 나섰던 백성들은 이에 크게 분노했지만, 자기들이 의병으로 나선 것은 어차피 선조나 조정을 위해 싸운 것이 아니라, 나라와 자신들의 고향과 가족들을 위해 싸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불만을 누른 채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선조와 조선의 관료들은 의병들에게 상을 주기는커녕 일본과 잠시 휴전하는 동안에도 전쟁에 지친 백성들을 다시 수탈의 대상으로 삼기 시작했다. 이 때 일어난 것이 ‘이몽학의 난’이었고, 이 난을 계기로 선조는 의병장들을 반역자로 처리하는 좋은 구실로 삼았던 것이다.

이몽학의 난으로 인하여 선조는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으며 정치에 대한 자신감을 잃었다. 이 때문에 의병장들을 의심하기 시작하였고 이순신 등 공훈이 많은 관군 장수들 역시 의심하며 경계하였다. 이 덕에 본의 아니게 원균이 선조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기도 하였는데 선조가 이순신을 견제하기 위해 원균을 우대한 것이다. 사실 이몽학의 난 이전까지만 해도 선조는 상대적으로 이순신의 후원자에 가까웠다. 애초에 북방에서 이일의 장계를 받고도 백의종군으로 처벌을 낮췄고, 평소대로라면 수군절도사로 진급할 수 없는 낮은 계급이었던 이순신을 고집을 피워 전라좌수사로 임명한 게 선조였다.

선조는 전쟁이 끝난 후 이순신 같은 명장들이 민심을 얻고 의병장들 또한 전공을 차지하는 것을 두고 볼 만큼 현명한 명군(名君)이 아니었던 것이다. 선조는 그들이 백성을 버리고 도망 간 선조를 위협하는 세력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선조는 의병장 중 단 한 명도 공신으로 칭하지 않았고, 의병들을 해체하거나 김덕령처럼 역모를 뒤집어 씌워 죽이기까지 했다. 오죽하면 이순신장군의 최후에 대해서도 그러한 결과를 예견하고 마지막 전투가 될 노량해전에서 전사를 가장하여 자살을 한 것이라는 가설과 추측도 나오고 있을 정도이다. 그래서인지 정묘호란이나 병자호란 때는 의병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이몽학의 난은 실패로 끝나기는 하였지만, 임진왜란을 통해 극심한 사회적 모순과 민심의 이반 현상이 상당했음을 단적으로 드러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천안 지역에서 이몽학의 반란군에 얼마나 호응하였는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충청도에서 반란군이 승승장구한 것은 이 지역의 민심이 어떠하였는지 짐작하게 해준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