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11일 월요일

수원 제암리 학살 사건 1편

■ 수원 제암리 학살 사건 1편

■ 수원 제암리 학살 사건 1편

수원 제암리교회 학살사건은 만세운동에 대한 일제의 보복 행위로 일어난 가장 대표적인 참변이다. 만세시위운동에 대한 일제의 대책은 비인도적인 대량살육과 만행, 그리고 대규모 검거였다. 만세운동의 주동자로서 검거된 인사에 대해서도 참혹한 고문을 가한 뒤에 그들의 식민지 통치 법규에 따라 처형하였다. 우리나라의 만세운동 상황과 일제의 무력탄압은 국제적으로 여론화되어 열강들은 일제의 야만적 행위를 비난, 공격하였다.

3월 31일 제암리에서 가까운 발안(發安)장터에서는 장날을 기해서 약 1,000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태극기를 세워 놓고 독립 연설회를 개최하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장거리를 행진하였다. 흥분한 시위 군중이 일본인 가옥이나 학교 등을 방화, 파손하였다. 이튿날인 4월 1일 밤, 주변 산봉우리 80여 곳에서 봉화를 올리고 만세운동을 널리 확대시키려했다. 그래서 그곳에 살고 있던 일본인 부녀자와 어린이는 조금 떨어져 있는 삼계리(三溪里)로 피신하여 숨어지내기도 했다. 이처럼 3월 말을 전후로 만세시위운동이 맹렬히 일어나자, 몇 개의 일본군 검거반이 파견되면서 3·1운동에 대한 보복 행위가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4월 2일 제1차 검거 작전을 시작하였다. 경기도 경무부에서는 하세베 이와오(長谷部巖) 대장이하 헌병과 보병, 순사로 이루어진 검거반을 보냈으며 6일까지 이어졌다. 시위의 진원지 역할을 한 마을을 습격 방화하고 시위 주모자를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항거하여 4월 3일 수촌리 구장 백낙렬 천도교 전교사, 수촌 제암리 감리교회 김교철 전도사, 석포리 구장 차병한, 주곡리 차희식 등이 주축이 되어 우정면, 장안면 주민 2천여명이 모여 각 면사무소를 부수고 화수리 주재소로 몰려가 주재소를 불태우는 한편 순사 가와바타를 처단하였다. 마침내 4월 5일 새벽 3시 반경에 검거반이 수촌리를 급습하여, 종교 시설은 물론 민가에 불을 질러 마을 전체 42호 가운데 38호가 소실되었다(수촌리 학살 사건).

4월 9일부터 16일까지 검거반은 제2차 검거 작전을 벌였다. 4월 13일 육군 ‘보병 79연대’ 소속 중위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가 지휘하는 보병 11명이 발안에 도착하였다. 토벌 작전이 끝난 발안 지역의 치안 유지가 그들의 임무였다. 그러나 다른 지역의 시위 주모자들은 2차에 걸친 검거 작전으로 대부분 체포된 반면, 발안 시위를 주도했던 제암리 주모자들은 체포되지 않아 불안 요소로 남아 있음을 안 아리타는 제암리를 토벌할 계획을 세운다. 제암리는 주로 안씨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며, 일찍부터 천도교의 교세로 민족정신이 고양되었고, 제암리감리교회에서는 문맹퇴치 및 신문화 운동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또한 대한제국 시위대 해산군인 홍원식이 낙향하여 사람들을 모아 교육하고, 동지들을 규합하여 ‘구국동지회’를 만들었던 민중의 의식화가 상당히 이루어졌던 동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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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여성독립운동가 4편

■ 여성독립운동가 4편

■ 여성독립운동가 4편

"남(南)에는 유관순, 북(北)에는 동풍신"이라며 두 열사를 찬양하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1919년 3월 14일 오전 11시, 함경북도 명천군 하기면 화대동에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의 소식을 전해 듣고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어느새 5000명 가까운 사람들이 물결을 이루며 화대 장터에 모였다가 헌병들이 모여 있는 부대인 화대헌병분견소 앞으로 향했다. 사람들이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자, 일본 헌병들이 나와 사람들을 향해 마구 총을 쏘아댔다. 헌병분견소 앞에 모인 사람들 중 5명이 총에 맞아 목숨을 잃고 수십 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 소식을 듣게 된 박승룡, 김성련 등 몇몇 인물들은 이튿날 일본 헌병들의 만행에 항의하는 만세 운동을 벌이기로 뜻을 모아 1919년 3월 15일, 이들이 이끄는 군중 5000여 명이 화대 장터에 모여 만세 운동을 벌였다. 이들 중에는 병으로 오래 자리에 누워 있던 동민수라는 인물도 있었다. 그는 일제의 만행에 동포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죽음을 각오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나 만세 운동 중 일본 기마 헌병과 경찰의 무차별 사격으로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동민수의 둘째 딸 동풍신은 현장으로 달려와 아버지의 시체를 부둥켜안고 통곡했다. 동풍신은 이내 마음을 다잡고 뿌리치고 일어나 앞장서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동풍신의 의연함에 크게 감동한 군중은 힘을 모아 만세 운동을 펼쳐나갔다.

그러나 동풍신은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함흥형무소에 수감됐다. 그 후 함흥지방법원에서 열린 재판에서 동풍신은 "내가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른 것은 만세를 부르다 총에 맞아 숨진 아버지를 대신해서이다"라고 당당히 주장했다고 한다. 동풍신은 함흥지방법원에서 2년 6개월 형을 받은 뒤 경성법원에서 2심을 받기 위해 서대문형무소로 옮겨져 일제의 고문을 받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1921년 열일곱 살 꽃다운 나이로 순국했다. 일제의 총칼 앞에서도 당당하게 독립 만세를 부르다가 옥중에서 순국한 상황 등이 유관순 열사와 무척 닮아있어 ‘제2의 유관순’이라 불리웠다.

이들 외에도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수많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남자들 못지않게 목숨을 아끼지 않고 일제에 맞서서 다양한 방법으로 항일독립운동을 했기 때문에 우리는 광복을 맞이할 수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해야 하는 것이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의 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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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독립운동가 3편

■ 여성독립운동가 3편

■ 여성독립운동가 3편

또 한분, 잊어서는 안될 분은 바로 안중근의 어머니 조마리아여사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분노를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사형선고를 받은 아들에게 어머니는 “당당히 죽으라.”고 한다. 그리고 새하얀 수의를 손수 지어 보냈다. 가히 독립운동가의 어머니답다. 조마리아여사는 안중근처럼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뒷바라지했다. 독립운동가들은 조마리아의 집에서 먹고 자고 간호를 받기도 했다. 조마리아여사는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여사와 한 집에 살며 독립운동의 어머니 역할을 했다. 일제는 조선이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하도록 돈을 빌려 주었는데, 때문에 조선이 일제에 갚아야 할 돈은 1906년까지 무려 1,300만 원에 달했다. 요즘 가치로 환산하면 3,900억 원 정도이다. 사람들은 함께 돈을 모아 빚의 굴레에서 벗어나자는 국채보상운동을 펼쳤는데, 조마리아는 이때 은가락지 2쌍, 은노리개 2개, 은장도 1개 등 적지 않은 패물을 내놓았다. 국채보상운동 말고도 조마리아가 독립을 위해 자금을 모았던 기록은 많이 남아 있다.

\남도의 유관순\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윤형숙 열사도 3·1운동 당시 만세 운동에 앞장섰던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1900년 전남 여수에서 태어난 윤형숙 열사는 열여덟 살에 광주 지역 최초의 여성 중등교육기관인 수피아여학교에 진학했다. 윤 열사는 리더십이 강해 반장을 도맡으며 학교에서 민족의식을 키워가고 있었다. 그러다 2학년 때인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다. 국내 곳곳에서 항일운동의 바람이 거세게 일어나자, 광주에서도 3월 10일 만세 운동이 일어나, 광주·전남 지방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당시 윤형숙 열사는 학생들을 비롯해 군중 1000여 명을 이끌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는데, 일본군은 기마 헌병을 투입해 총칼을 휘두르며 만세 운동을 벌이는 사람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이때 윤형숙 열사가 태극기를 든 한쪽 팔이 잘리는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하지만 윤 열사는 반대편 손으로 다시 태극기를 집어 들고 만세를 불렀고, 결국 일본 헌병에게 체포당했다. 함께 시위에 나선 수피아여학교 교사와 학생 20여 명도 잡혀갔다.

그 후 윤형숙 열사는 만세 운동의 주동자로 감옥에 있는 동안 갖은 고문으로 오른쪽 눈이 실명되는 고통도 겪어야 했다. 감옥에서 나온 뒤에는 고향 여수의 기독교학교에서 일하는 등 학생 교육에 힘쓰다 광복을 맞이하게 됐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윤 열사는 비극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해 9월 기독교 전도사라는 이유로 북한 인민군에게 붙잡혀 총살을 당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윤형숙 열사의 삶은 사후(死後) 54년 만에 다시 재조명되어 알려지면서 2004년 정부는 윤형숙 열사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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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독립운동가 2편

■ 여성독립운동가 2편

■ 여성독립운동가 2편

1930년 중국 상해. 25살의 한 아가씨가 도착했다. 그녀의 이름은 이화림. 14살에 3·1운동을 했고, 22살에 학생운동을 했던 이화림은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상해로 왔다. 그리고 김구가 만든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여 여기에서 윤봉길을 만나게 된다. 이화림은 윤봉길의 암살 계획이 성공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왔다. 윤봉길과 함께 일왕 히로히토의 생일 행사가 열리는 홍코우공원을 여러 번 답사했고, 사건 당일에도 암살 현장에서 윤봉길을 끝까지 지켜봤다고 한다. 또 이화림은 1938년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의용대에서 부녀대 부대장을 맡았다. 조선의용대는 독립운동을 했던 무장부대인데, 1942년 조선의용대가 일본군에 맞서 전투를 벌였을 때, 이화림은 전투에 참여하며 선전활동과 남성대원들의 식사 준비까지 도맡아했다. 거칠고 숨 막히는 전투와 암살 현장에서 나라를 구하려는 일념으로 청춘을 바친 여인이다.

영화 ‘암살’의 실제 모델이기도한 남자현은 1919년 3·1운동 당시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을 목격하고 무장 항쟁에 뛰어들기로 결심했다. 남자현은 중국으로 가 ‘서로군정서’라는 독립군 단체에 가입하여, 그곳에서 독립군 뒷바라지를 하면서 아들을 무관학교로 보내 독립군으로 키운다. 그러던 1926년 어느 날, 조선 총독을 두 번이나 지낸 사이토 마코토가 순종 황제의 장례식에 참가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남자현은 사이토를 죽이기로 결심하고 한국으로 왔다. 그러나 남자현보다 먼저 사이토의 목숨을 노린 송학선이 사이토가 탄 자동차에 뛰어올라 칼을 휘둘렀는데, 아쉽게도 그가 찌른 건 사이토가 아니었다. 이 사건으로 경호가 강해지자 남자현 일행은 다음 기회를 노렸다.

그로부터 7년 뒤, 남자현은 일본 관동군 사령관이자 일본 전권대사 무토 노부요시 육군대장이 중국 장춘에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당시 남자현의 나이 61세. 남자현은 “나는 죽어도 아무런 여한이 없는 나이가 되었다.”며 암살을 결심했다. 하지만, 남자현은 권총과 폭탄을 몸에 숨기고 노부요시에게 가던 중 경찰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조선인 스파이가 경찰에게 정보를 흘린 것이다. 경찰에게 붙잡혔을 당시 남자현은 의병 활동을 하다 전사한 남편의 피 묻은 옷을 껴입고 있었다고 한다. 남자현은 일본영사관 감옥으로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고, 감옥에서 풀려나지만 얼마 버티지 못하고 결국 숨을 거두었다. 남자현은 우리나라의 독립투쟁사에서 30년 동안 무장 투쟁을 벌인 유일한 여성이라고 한다. 몸과 마음을 바쳐 나라를 사랑했던 남자현의 숭고한 정신에 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1919년 3월 1일, 조선총독부 병원. 3·1운동에 참가했던 조선인들이 일본 경찰의 총과 칼에 맞아 병원으로 실려 왔다. 조선인 부상자들을 치료하며 큰 충격에 빠진 간호사가 있었으니, 그녀의 이름은 박자혜. 그때까지만 해도 독립운동에 관심이 없었던 박자혜는 그날을 계기로 독립운동에 참여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박자혜는 조선총독부 병원에서 일하는 조선인 간호사들과 함께 간호사의 독립운동단체인 ‘간우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독립운동과 관련된 인쇄물을 만들고, 조선인 의사들과 힘을 합해 일본인은 진료를 하지 않는 방식으로 일제에 저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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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독립운동가 1편

■ 여성독립운동가 1편

■ 여성독립운동가 1편

여성 독립운동가 하면 우리는 거의 유관순 열사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독립운동에 젊음을 바친 여성 독립 운동가들은 수도 없이 많다. 영화 ‘암살’의 흥행 이후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숨은 독립운동가들은 많이 있다.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남성 독립운동가들보다 두세 배 분량의 일들을 감당해 내야만 했다. 독립을 위해 나섰지만 그들은 여전히 엄마, 아내, 며느리이자 주부였다. 자녀를 양육하고 시부모를 봉양하며 가사노동과 농사일을 독립운동과 병행했다. 독립운동을 하는 남편을 둔 여성들은 남편을 대신해 가정의 경제를 책임지며 남편의 뒷바라지를 해야만 했다. 그러므로 보다 많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업적을 밝혀내 자랑스러운 그들의 활약상을 우리 가슴에 새겨야 할 것이다.

몇 해 전 광복 제73주년을 맞이하여 여성독립운동가들을 재조명하면서 여성 독립운동가 202명을 새로 찾아냈다고 한다. 이들 중 26명이 1차로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았다. 우당 이회영선생의 아내 이은숙여사,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김상옥의사를 숨겨줬다가 고문을 당한 김아기여사, 독립운동가 이규풍·이규갑 형제의 어머니 박안라여사, 만세 시위를 벌여 투옥됐던 배화여학교·수피아여학교·기전여학교 학생들,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지원했던 여성들이 포함되었다.

현재 국가보훈처에서 훈장과 포상을 받은 독립유공자는 1만 4,329명인데, 이 가운데 여성은 전체의 1.9%인 272명에 불과하다.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임시정부의 살림을 도맡고, 독립군의 군복을 만들고, 군수품을 운반하는 등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일을 주로 해서 기록이 부족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 선조들의 독립운동에는 남녀 구분이 없었는데, 실로 부끄럽고 송구스러운 일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우리나라에 서양의 근대식 학교가 세워지고, 그때부터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했던 여성들이 체계적인 학교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교육을 받으며 의식에 눈을 뜬 여성들은 ‘일본에 대항해 나라를 구하겠다’는 신념에 사로잡혔다. 그들 중에는 남성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며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도 있고, 남성 독립운동가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독립군 군복과 화약을 만들고, 도피자를 숨겨 주거나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모으는 등 보이지 않는 곳에서 헌신한 사람들도 상당히 많았다. 독립운동가에게 식사를 준비해 주고, 따뜻한 잠자리를 마련해 주는 일들은 공식적인 문서에 기록되지 않았으므로, 실제로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의 대우를 받는 여성이 드물다. 하지만 분명한 건, 여성들이 했던 활동들도 독립운동이 잘 진행되게 하는 데에 꼭 필요했다는 것이다. 훈장 하나 받지 못하고 잠들어 있는 많은 여성 독립운동가들. 한 분 한 분께 마음으로나마 훈장을 달아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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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 형무소 3편

■ 서대문 형무소 3편

■ 서대문 형무소 3편

대부분의 감옥은 옥문을 닫아놓았지만 몇 개는 열어놓아서, 3평 남짓한 옥내를 구경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유관순열사가 갇혀있던 지하 감옥은 유리로 막아놓았기 때문에 위에서 내려다보는 구조로 내부를 관찰할 수 있다. 대부분의 감옥은 3평에서 5평 정도로 운신의 폭이 있지만, 지하 감옥은 독방이라 그런지 한 평 남짓으로 매우 좁다. 갇혀있던 독립 운동가들의 옥고를 짐작하게 할 수 있을 만한 구조이다.

여성 미결수(재판이 끝나지 않아 법적 판결을 받지 않은 상태로 갇힌 피의자 또는 형사 피고인)를 가뒀던 구치감이 1916년 즈음 지어졌다가 1979년에 철거되었던 것을 2011년에 복원했으며, 여성 독립항일운동 관련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여성 항일 독립운동가들이 이곳에 갇혀 얼마나 참혹한 고문을 당했을지 가늠조차 할 수 없다.

서대문 형무소에는 사형을 집행했던 장소도 남아있다. 지상 1층과 지하 1층의 일본식 목조건물로 1916년 즈음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사형장은 5m 높이의 담장으로 둘러싸고 있어 서대문형무소 안에서도 보이지 않게 차단되어 있다. 1층 안에는 교수형을 집행하기 위해 여닫히는 마루판과 교수형에 쓰는 줄, 가림막 뒤쪽에 마루판을 밑으로 내리는 장치가 있다. 마루판이 열리면서 그 위에 있던 사형수가 교수형을 당하게 되는 구조이다. 마루판 아래의 지하실은 시신을 수습했던 공간이다. 사형 집행 후 시신을 바깥의 공동묘지로 내보내기 위해 밖으로 연결한 통로인 수구문이 있다. 붕괴되었던 것을 1992년에 독립공원을 만들 때 발굴하여 40m를 복원하였는데, 원래 길이는 약 200m라고 전해진다. 일제는 시신에 구타나 고문의 흔적이 많은 경우나 사형 사실이 알려져 사회적으로 문제가 생길 우려가 되는 경우, 그리고 시신을 받아갈 유족이 없는 경우에 이 문을 통해 시신을 바깥으로 내보냈다고 한다.

일제에 의한 강제점령 시기는 민족의 자존심이 훼손당하고, 민족 스스로의 발전이 중단되는 고통의 역사였다. 그러나 우리에겐 역사적 현실에 굴복하거나 타협하지 않는 민족 독립을 향한 투쟁의 역사가 있으며, 그로 인해 지금 우리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바로 그러한 역사의 계승을 위한 배움터로 마련되었다. 미래를 책임질 청소년들은 물론, 온 국민들이 순국선열들의 뜻을 기리고, 지난날의 역사를 극복하기 위한 애국애족의 뜻을 배우는 역사의 산 교육장이 되었으면 한다.

독립, 민주, 역사, 문화 관련 시민단체들이 2014년 2월 23일 서대문형무소역사관 교육장에서 서대문형무소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위한 시민모임 발족식 및 심포지엄을 개최하였고, 같은 해 11월 1일에는 서대문구청에서 서대문형무소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가능성이 있는지를 알기 위한 심포지엄이 열렸다. 이듬해인 2015년에는 한국인 강제징용의 아픔이 담겨 있는 일본의 군함도가 과거 식민지 탄압을 은폐하고, 근대 일본의 발전만 부각하면서 한국 외교부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각종 로비로 인해 결국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우리도 일본의 과거 만행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아우슈비츠처럼 서대문형무소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는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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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 형무소 2편

■ 서대문 형무소 2편

■ 서대문 형무소 2편

일제는 표면적으로는 재소자에 대해 정해진 작업, 정량의 식료품 배급, 교육과 운동에 대한 교정 규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형무소에 투옥된 독립운동가에게는 형기(刑期)가 확정되기 전부터 온갖 취조와 고문이 자행되었다. 또한 옥사 내에는 겨울철에 난방이 되지 않아 동상을 입는 경우가 다반사였으며, 동사(凍死)하는 일도 빈번했다. 여름철에는 각종 전염병으로 병사자가 속출하는 등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처우는 가혹하였다.

서대문 감옥이 서대문 형무소로 이름이 바뀐 것은 1923년이다. 이로부터 오늘날 일반인에게 익히 알려진 ‘서대문형무소’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현재 1930년에 작성된 「서대문형무소 배치도」가 남아 있다. 광복 이후 미군정 치하에서도 구치소, 교도소로 이용되다가, 1948년 8월 대한민국이 주권을 가지게 되면서 대한민국 정부가 형무소로 쓰게 되었다. 그러면서 이름이 1945년 11월 21일 서울형무소로 바뀌었고, 이 시기에는 반민족행위자와 친일세력들이 대거 수용되었다. 김원봉, 김성숙도 수감된 적이 있으며, 여운형도 수감된 적이 있었다.

1950년대에는 수감자의 70퍼센트가 좌익인사들이었고, 정치·사회문제로 관련하여 간첩 및 사상범이 많이 투옥되었다. 근대화 과정에서는 특히 운동권학생과 재야인사 등이 투옥되어 민주화운동의 성지(聖地)로 이해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일제 강점기 때의 독립 운동뿐만 아니라 광복 이후 정치적 격변과 민주화 운동에 이르기까지, 근·현대사의 여러 주요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이 투옥되거나 사형집행이 이루어진 역사적 장소가 되었다.

해방 후 1946년에는 경성형무소로, 다시 1950년에는 서울형무소로 개칭되었다. 1961년 개정된 행형법(行刑法)에 따라 서울교도소가 되었으며, 1967년 7월 7일에는 서울구치소로 개칭되었다. 1987년 3월부터 서울특별시는 민족의 수난과 독립운동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이곳 전체를 사적으로 지정, 서대문 독립공원으로 조성했다. 같은 해 11월 15일 구치소의 시설과 인원이 의왕시로 이전한 이후, 모두 15개 동 가운데 5개 동과 중앙사, 나병사 등을 보존했다. 김구, 강우규, 유관순 등의 인물이 투옥되었던 제10·11·12사의 감옥 건물과 사형장이 1988년 사적 제324호로 지정되었고, 1988년부터 공원이 조성되기 시작해서 1992년 8월 15일 서대문독립공원으로 개원했다. 1998년에는 체계적인 전시와 홍보를 위해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이 개관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의 구성은 출입문 바로 앞으로 보이는 전시관, 바로 뒤로 중앙사, 그리고 그를 이어서 제9~12 옥사와 공작사, 한센 병사, 추모비, 사형장, 시구문, 격벽장, 여옥사(유관순 지하감옥), 취사장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시관 지하 고문실에는 밀랍인형으로 고문을 받는 독립운동가들의 모습을 실감나게 재현하여 당시 일본이 자행하던 고문의 잔혹함을 보여주는데, 여성 독립지사를 고문하는 장면에서는 처절한 고통의 비명까지 들린다. 한 사람이 서 있을 공간만 있어 2~3일 동안 갇혀있으면 전신마비가 온다는 고문실인 벽관도 재현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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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 형무소 1편

■ 서대문 형무소 1편

■ 서대문 형무소 1편

1905년, 일제는 대한제국과 을사늑약을 강제로 맺어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빼앗았다. 그 후 일제는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삼기 위해 혈안이 되었고, 한국인들은 의병 전쟁과 애국 계몽 운동을 벌이며 대항했다. 1906년 경무 고문이었던 마루야마 시게토시〔丸山重俊〕가 한국 내 감옥의 수용능력 부족을 지적하면서 의병 등 반일세력을 탄압·수용할 목적으로 새로운 신축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경성 감옥(현재 서대문 독립공원이자 옛날 서대문형무소)이다. 건물은 본래 아연판을 붙인 판자로 두른 허술한 형태였다. 건립비용은 약 5만원이었고, 규모는 청사 및 부속건물 80평, 감방 및 부속건물 480평이었다. 일본인 건축가 시텐노 가즈마(四天王要馬)의 설계에 의해 한국 최초의 근대식 감옥이 준공된 것이다. 수용능력은 500명 정도였는데, 이후 증·개축을 반복하여 1938년의 수용인원은 2,763명이었다.

이 감옥은 본래 1907년 8월에 완성되었으나, 군대 해산 이후 해산 군인의 의병 가담과 순종황제 등극 이후 시국의 불안정 등으로 인해 바로 개소되지 못했다가 1908년(순종 2년) 10월에야 비로소 개소하게 되었다. 감옥이 설립된 이후 초기에는 허위(許蔿, 1854∼1908), 이강년(李康秊, 1858∼1908), 이인영(李麟榮, 1867∼1909) 등 후기 의병 주도자들이 많이 투옥되었다. 허위 등은 모두 경성감옥에서 사형으로 순국하였다. 일제는 1908년 경성감옥 이외에도 공주, 함흥, 평양, 해주, 대구, 진주, 광주 등 전국 7개 주요 지역에 감옥(監獄)을 세웠다.

1910년, 일제는 한·일 병탄조약을 강제로 맺어 대한제국의 주권을 빼앗고 식민지로 삼았다. 일제는 식민통치에 저항하는 한국인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지만, 독립운동을 벌이는 사람들의 숫자는 늘어만 갔다. 경성 감옥으로는 그 숫자를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일제는 서울 마포에 새로운 감옥을 지어 그곳을 ‘경성 감옥’ 이라 칭하고, 원래 서대문에 있던 경성 감옥은 서대문 감옥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1911년 105인 사건으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수감되었고, 김좌진장군은 1911년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다 일경(日警)에 체포되어 2년 6개월 형을 받아 수감되었다. 이곳은 전국의 10년 이상이나 무기형(無期刑)을 언도 받은 기결수가 수감되어 있었던 점이 특색이었고, 여느 감옥과는 달리 18세 미만의 소녀수(少女囚)를 모두 수감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관순 열사도 이곳에 구금된 후 옥사하였다.

1919년에는 3·1운동으로 인해 수감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민족대표 33인을 비롯하여 당시 시위관련자 1,600여 명을 포함해 3,000여 명이 수용되었다. 독립선언과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수많은 시민과 학생들이 이곳에 투옥되었다. 이밖에도 일제강점기에 양한묵·강우규·안창호·여운형 등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수감되면서 항일독립운동사의 수난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 되었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 코로나시대 재택근무, ‘얼굴마담’은 긴장한다!

◇ 코로나시대 재택근무, ‘얼굴마담’은 긴장한다!

◇ 코로나시대 재택근무, ‘얼굴마담’은 긴장한다!

하지만 세상을 꼭 실력이나 능력만으로 사는 건 아니어서 이런 게 별로 없는 사람도 리더 자리에 오른다. 좋은 리더는 앞서 말한 영화감독처럼 디렉션을 해야 하고 디렉션을 하려면 치열한 고민 끝에 찾아낸 비전으로 함께 일하는 동료, 후배들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하지만 능력이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다 사는 법이 있기 마련이라 이들은 ‘얼굴마담’이 되어 국면을 돌파한다. 자리를 채워주며 다정하게 웃는 얼굴을 내보이는 거다. 그러나 이런 리더를 존경할 수는 없다. 필요할 때 그에 상응하는 존경심을 잠깐 보일 뿐이다. 그러니 영향력을 갖기 어렵다. 리더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 여러 관점이 있지만 핵심 중의 하나는 영향력이다. 자기 생각이 없는 리더, 얼굴마담이 영향력을 갖기는 어렵다.

코로나로 기업들이 재택근무를 시작한 지도 거의 일 년이 되어 간다. 처음에는 만나지 않고도 일이 될까 염려가 많았지만 그런대로 일은 돌아갔고 경험이 쌓이니 재택근무에 대한 여러 평이 나온다. 출퇴근에 드는 시간이 없어 효율적이다, 윗사람을 만나지 않으니 스트레스가 적다, 일과 여가의 경계가 모호해져 오히려 일하는 시간이 늘었다 등.

직원들의 반응이 다양한 가운데 경영자들이 주목하는 점이 한 가지 있다. 생산자와 아닌 사람, 일에 기여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명확하게 드러나더라는 점이다. 특히 직급과 기여도가 비례하지 않는 경우를.

비대면 회의를 하면 잡담을 늘어놓기는 어렵다. 곧장 업무로 들어간다. ‘언컨택트’의 저자 김용섭 소장이 말하듯 화상회의 화면 속에선 직급에 상관없이 모두가 10분의 1, 20분의 1로 균등하다. 직급이 초래하는 차이는 줄고 업무 외적인 것들은 설 자리가 없다. 일 중심이 되고 능력과 실력이 핵심이 된다. 젊은 세대로 내려갈수록 재택근무를 선호하는 이유다. 일찍이 워런 버핏이 그랬다. 바닷물이 빠지면 누가 발가벗고 헤엄쳤는지 알게 된다고.

가치를 생산하지 않고 적당히 묻어갔던 사람들은 긴장한다. 회사는 그런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으니까. 한 가지 질문이 생긴다. 코로나가 진정되면 비대면 업무 방식도 끝이 날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 방식이 효율적이라는 천기가 누설된 이상 원복은 어려울 것이다. 얼굴마담의 설 자리도 점점 좁아질 것이다. 만나야 얼굴마담의 역할을 할 텐데 비대면으로도 일이 되고 더구나 효율적이라는 평이 따르니 말이다. 자기 머리로 살지 않는 얼굴마담들에겐 앞으로 쭉 추운 계절이 될 것 같다. 그동안이 호시절이었다.

-동아일보-

◇ 공업용 미싱

◇ 공업용 미싱

◇ 공업용 미싱

올림픽 ‘호돌이’만큼 1988년을 잊지 못하게 하는 것이 하나 있다. 드라마 ‘인간시장’이다. 그해 한 방송사에서 한 이 드라마를 보려고 월요일 저녁마다 밥상을 물리고 온가족이 TV 앞에 모여 앉았다. 불의에 맞서는 주인공 ‘장총찬’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드라마의 원작자는 김홍신(74)씨다. 동명의 원작 소설이 나온 것이 1981년. 서슬 퍼렇던 계엄 하에서 주인공 이름을 ‘권총찬’으로 붙였다가 검열에 걸려 장 씨로 성을 바꿔냈다. 책이 불티나게 팔리면서 대한민국 최초 밀리언셀러란 수식어가 붙었다. 소설을 쓰며 시민운동을 하던 그의 가슴팍에 국회의원 금배지가 달린 것도 이 영향이 컸다.

그에게 ‘공업용 미싱’이란 ‘연관 검색어’가 생긴 건 단 하나의 사건 때문이다. 지난 1998년 지방선거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던 그는 “김대중 대통령이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한다. 거짓말한 만큼 입을 꿰맨다는 염라대왕이 공업용 미싱으로 박아야 할 것”이라고 독설을 날렸다. 발언은 일파만파. 당시 김 대통령은 정작 “며칠동안 입이 자꾸 이상했다”며 농으로 받았지만 분위기는 험악하게 굴러갔다.

경남 사천의 한 철물점 주인이 “김 의원에게 주겠다”며 공업용 미싱을 차에 싣고 상경했다. 설상가상 검찰에서 구속 이야기까지 나오자 김 의원의 친구인 가수 조영남 씨마저 등판했다. 그는 당시 이런 사과문을 대신 썼다.

“다행히 불구속 처리로 끝나는 분위기라 하니 한숨이 놓였습니다. 친구가 감옥에 들어가있으면 그래도 한 번쯤은 면회를 가줘야 하는데 그게 얼마나 귀찮은 일입니까. 그래도 저는 제 친구가 자랑스럽습니다. 의정활동 하나는 폼 나게 잘했거든요. 약속을 드리겠습니다. 만일 다음 번에도 그따위 어설픈 소리를 해댈 때는 제가 그땐 미싱이 아닌 뜨개질바늘로(더 아파야 하니까) 녀석의 입을 꿰매놓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정치권에서 일종의 금기어였던 ‘공업용 미싱’이 부활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기자회견 다음 날인 지난 19일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현직 대통령은 시간이 지나면 전직 대통령이 된다. 전직 대통령이 되면 본인이 사면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고 하자, 발끈한 더불어민주당 김경협 의원이 이튿날 “공업용 미싱을 선물로 보낸다”고 되받으면서다. 기왕 터진 설전에 참전한다. 단언컨대, 미싱은 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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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분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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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업용 미싱’은 정치권에서 논란을 빚은 대표적인 막말이다. 김홍신 전 한나라당 의원은 지방선거가 임박한 1998년 5월 “김대중 대통령은 사기치는 데 일가견이 있다. 염라대왕에게 끌려가면 바늘로 뜰 시간이 없어 공업용 미싱을 입에 드륵드륵 박아야 할 것”이라고 독설을 날렸다. 당시 발언은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고 법원도 “정치적 비판의 한계를 넘어섰다”며 모욕죄로 벌금형을 선고했다.

공존·상생이 아니라 적의·증오가 지배하는 한국 정치에서 인신공격성 막말은 정치인에게 쉽게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다. 지지층을 위무하고 결집하는 데 이만 한 게 없기 때문이다. 상대 진영이 배출한 대통령을 직격할 때는 유난히 자극적인 표현이 동원된다. 노무현정부 때 한나라당 정책위의장은 노 대통령을 “등신”으로 비유했다. ‘환생경제’라는 연극에서는 노 대통령을 “노가리” “육실헐놈” 등 인격모독성 언어를 동원해 비난했다. 이명박정부 때 민주당 의원은 이 대통령을 “쥐박이”라고 했다. 박근혜정부 때는 민주당 원내대변인이 박 대통령을 겨냥해 ‘귀태(태어나지 않아야 할 사람)’ 운운해 파문을 일으켰다.

다시 입에 올리기도 민망한 공업용 미싱이 20여년 만에 또 정치권에 등장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에서 전직 대통령 사면에 부정적 입장을 내놓자,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문 대통령을 겨냥해 “전직이 되면 본인이 사면 대상이 될지 모른다”고 했다. 문 대통령도 퇴임 후 감옥에 갈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이에 발끈한 김경협 민주당 의원이 “공업용 미싱을 선물로 보낸다”고 치받았다. 그러자 주 원내대표는 “미싱을 보내면 잘 쓰겠다”고 비아냥거렸다. 정치보복을 시사하고, 저급한 말을 끄집어낸 두 의원 모두 한심하긴 매한가지다.

모름지기 정치는 언어다. 정치인의 말은 자신의 인격뿐 아니라 정치문화 수준을 가늠하는 잣대다. 정치 언어가 이렇게 추하고 경박해서는 선진 정치를 기대할 수 없다. 우리 정치는 정치자금 투명화·권력 분산 등에서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그러나 좀처럼 개선되지 못하고 오히려 퇴행하는 분야가 있다. 바로 막말이 횡행하는 정치 언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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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횡설수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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