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13일 수요일

조선수군 대표전함 ‘판옥선板屋船’ 6편

■ 조선수군 대표전함 ‘판옥선板屋船’ 6편

■ 조선수군 대표전함 ‘판옥선(板屋船)’ 6편

평저(平底)형의 판옥선은 물에 닿는 면적이 넓어 속도는 느리지만 안정적이었다. 한반도 서해·남해처럼 수심이 낮고 조수차가 큰 바다에서 항해가 용이하다. 전투 중 필요하면 제자리에서 360° 급선회도 가능했다. 조선 수군의 강점인 화포를 쓰기에 유리한 조건이었다. 화포 발사에 따른 반동을 효과적으로 분산시키는 것도 평저선의 장점이었다. 반면 세키부네는 바닥이 뾰족한 첨저선(尖底船)이었다. 선체 바닥이 V자 형태로 좁다 보니 물의 저항을 덜 받아 속력이 빨랐다. 수심이 깊은 바다에서 운용하거나 해협을 건너기에 유리했다. 다만 회전 반경이 커 방향 전환이 어려웠다. 조수 차가 크고 파도가 세게 치는 바다에서는 판옥선보다 기동하는 것이 불리했다.

두 나라 배의 돛도 달랐다. 조선과 일본의 군선은 기본적으로 노와 돛을 모두 이용할 수 있는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바람을 이용한 장거리 항해를 할 때는 돛을 이용했다. 전투에 돌입해 섬세한 기동이 필요하면 격군이 노를 저어 움직였다. 돛 하나로 움직이는 외돛배인 일본 군선은 순풍만 이용할 수 있었다. 반면 판옥선은 쌍돛대를 달아 역풍이 불어도 갈지(之)자 모양으로 전진할 수 있었다. 판옥선은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며 섬·암초가 많은 조선 해역에 최적화된 배였으므로 우리 해역에서는 절대 질 수 없는 무적함이었던 것이다.

판옥선의 전투력을 극대화한 ‘화룡점정(畵龍點睛)’은 화포(火砲)였다. 조선은 고려 말의 화포 제작·운용 기술을 계승해 발전시켰다. 크고 튼튼한 선체가 장점인 판옥선은 포 발사에 따른 충격을 충분히 견딜 수 있었다. 조선 수군은 판옥선에 천자총통(天字銃筒)·지자총통(地字銃筒) 등 다양한 화포 약 24문을 탑재했다. 전투원은 개인 화기인 승자총통(勝字銃筒)과 활로 무장했다. 반면 일본 수군의 세키부네는 크기가 너무 작아 선상에 화포를 거의 탑재할 수 없었다. 아타케부네에 장착한 화포를 시험 발사하자 선체가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파손된 일도 있었다. 결국 화포 3문 정도를 설치하는 것이 한계였다.

양국 수군의 무기체계가 다르므로 전술에도 그 차이가 그대로 반영됐다. 일본은 적함에 빠르게 접근해 조총을 쏘거나, 갈고리 달린 밧줄을 상대방 배에 걸고 올라타 백병전(白兵戰)을 치렀다. 일명 ‘등선육박전술(登船肉薄戰術)’이다. 조선 수군은 굳이 적함에 접근할 필요가 없었다. 일본군 조총 사거리(100m)보다 멀리 떨어져 포를 발사할 수 있었고, 추격을 피해 도망가는 척하다가 갑자기 90° 회전해 현측(舷側·배의 좌우 측면)의 포를 발사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또 수심이 얕은 곳으로 유인해 일본 군선을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 수도 있다. 일본 군선은 함상(艦上) 백병전을 시도하기 위해 접근하다 화포 세례에 침몰하거나 좌초하기 일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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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조선수군 대표전함 ‘판옥선板屋船’ 5편

■ 조선수군 대표전함 ‘판옥선板屋船’ 5편

■ 조선수군 대표전함 ‘판옥선(板屋船)’ 5편

판옥선의 주재료는 단단하고 두꺼운 소나무 판재였으므로 강도와 내구성이 높다. 소나무로 만든 판옥선은 속도는 느렸지만 대형 화포를 다량 적재해 발사할 수 있을 정도로 튼튼했다. 목재를 결합하는 방법도 차이가 있었다. 일본은 여러 장의 얇은 판재를 겹치는 데 쇠못을 이용했지만, 조선은 나무못으로 두툼한 소나무 판재를 이어 붙여 배를 만들었다. 조선 특유의 군선 건조 방식이 잠시 달라진 적도 있었다. 1430년(세종 12년) 조정은 나무못을 사용하던 기존 선박 건조 방식을 바꿀지 검토했다. 일부 신료가 일본 배는 여러 장의 판재를 쇠못으로 결합해 튼튼하면서도 가볍지만, 조선의 군선은 단일 판재와 나무못을 사용하면 내구성이 낮아진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세종 때 얇은 판재 여러 장을 쇠못과 나무못으로 결속해 만든 군선을 건조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군선의 속도는 빨라졌지만 내구력은 낮아졌다. 이런 문제점을 간파해 전통적 군선 건조 방식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한 인물이 바로 신숙주였다.

1473년(성종 4년) 신숙주는 “왜선을 관찰하니 판자가 얇고 쇠못을 많이 썼다. 왕래하는데 경쾌하고 편하지만 배가 요동치면 못 구멍이 차츰 넓어져 물이 새기 때문에 배가 쉽게 썩는다”며 일본식 군선의 약점을 지적했다. 신숙주는 1443년(세종 25년) 서장관으로서 일본을 직접 방문해 현지 사회상을 관찰해 《해동제국기》를 저술했다. 그는 “일본에서 갑자기 해적의 기습을 받았으나 (타고 있던 조선식 배의) 돛을 달고 항해해 곧 따돌렸다”며 조선식 배의 기동력도 손색없다고 주장했다. 결국,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나무못을 이용한 군선 건조 방식으로 복귀했다. 판옥선 건조의 기본 틀이기도 하다. 판옥선은 나무의 접합 부위에 ㄱ자와 ㄴ자 모양의 홈을 판 후 나무못으로 잇는 전통방식을 사용했다. 이음새 부분은 외부 충격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 견고하게 결합됐다. 나무못은 바닷물을 머금으면 부피가 팽창해 이음새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다. 선박의 손상 없이 해체해 수리하기도 쉬웠다. 반면 쇠못을 사용한 일본의 군선은 못과 나무가 완전히 결합하지 못하여 선체에 미세한 빈틈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음새의 쇠못이 녹슬어 배의 전반적인 내구성이 떨어지게 되어있다.

양국 군선은 배의 바닥 구조도 달랐다. 판옥선은 배 밑바닥이 평평한 평저선(平底船)이었다. 조선 시대의 모든 배들이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인 것은, 연안 항해에 용이하기 때문이다. 평저선은 비록 대양에서는 풍랑에 취약하지만, 선회력이 매우 뛰어나다. 선회력이 좋다는 것은 배의 방향 전환에 필요한 회전 반경이 짧다는 것으로, 암초가 많아서 좁고 물살이 거친 남서해안을 다니기에 유리했다. 또한, 내구력에 모든 설계를 집중하였기 때문에 비슷한 규모의 다른 국가의 함선과 비교했을 때, 구조적으로 판옥선이 훨씬 튼튼한 경우가 많다. 전시 교전능력과 튼튼함을 제외하면, 사실 항해성능은 매우 떨어졌고, 오로지 수비 목적의 전투용 배로 만들어졌다. 쓰임새를 연안에서의 화포를 이용한 해전에만 한정해서, 항해 목적보다는 전투를 위한 모든 기술을 배끼리의 충돌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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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수군 대표전함 ‘판옥선板屋船’ 4편

■ 조선수군 대표전함 ‘판옥선板屋船’ 4편

■ 조선수군 대표전함 ‘판옥선(板屋船)’ 4편

왜란이 발발한 직후 조선이 보유한 판옥선은 숫자적으로 그리 많은 것은 아니었다. 전라 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이 처음으로 출동한 옥포해전(玉浦海戰)에 동원된 것이 겨우 28척(그 중 4척은 경상우도의 것)이었고, 2차 출동인 당포해전(唐浦海戰) 때에 전라좌도 23척, 전라우도 25척, 경상우도 3척을 합한 51척, 부산해전 때에 전라 좌우도의 판옥선을 합하여 74척에 불과했다. 1593년(선조 26년) 8월 삼도의 판옥선이 100여 척에 이르고 각기 작은 배를 거느릴 수 있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가장 척수가 많이 확보된 때에도 180여 척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임진왜란의 여러 해전에서 압승을 거두고 바다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판옥선이 매우 뛰어난 전투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판옥선의 장점은 아주 튼튼하고 크기가 크다는 것인데, 약 125명 이상의 군사를 수용할 수 있는 그 크기는 종전에 기껏 80명을 정원으로 한 대맹선이나 일본 군선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때 판옥선의 크기는 저판(底板:밑넓이) 길이 50~55척, 탑승인원 130명 정도로 파격적으로 컸다. 후대로 내려오면서 크기가 점점 커져 정조 때는 저판 길이 90척, 일반 판옥선이 저판 길이 70척 정도였고 탑승인원도 160명 내외로 늘었다.

그 이후 판옥선은 전선(戰船)으로 개명되었다. 임진왜란의 3대 대첩은 한산도대첩·행주대첩·진주성대첩이다. 해전으로 범위를 국한하면 이순신장군이 이끈 한산도대첩·명량대첩·노량대첩이다. 이순신과 조선 수군을 빼놓고 임진왜란을 논할 수 없다. 조선 수군의 연전연승이 이순신의 뛰어난 지휘 덕분이기도 하지만, 군선과 군수지원 시스템이 조선 수군을 뒷받침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육상의 전투도 무기체계·전투 장비가 중요하지만 해전은 더더욱 그렇다. 해군에게 군선은 무기인 동시에 병력이 주둔하는 부대 그 자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일본 수군이 운용한 군선과 전술의 차이를 비교해 보면 왜 이순신이 이길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당시 일본 수군의 주력함은 세키부네(関船)였다. 세키부네는 아타케부네(安宅船)와 고바야부네(小早船) 사이의 중형 전함으로 약 70명이 승선했다. 아타케부네는 ‘집이 달린 배’라는 뜻의 대형 군선이었다. 일본에서 ‘해상의 성’이라 불릴 만큼 거대한 위용을 자랑했다. 일본 전국시대 봉건 영주들이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만든 배였다. 실제 전투보다 장수들의 기함으로 쓰였다. 일본 군선과 조선 군선은 구조적으로도 큰 차이를 보였다. 우선 선체를 만드는 목재가 달랐다. 일본 전함들은 가벼운 대신 강도가 떨어지는 녹나무, 삼나무를 사용한데다 선체의 구조 자체가 얇아서 내구성이 약했다. 소나무에 비해 덜 단단한 데다 판재가 얇아 배를 제작하기 쉽고, 배가 가벼워져 기동력이 향상된다. 반면 무거운 화포를 다량 실을 수 없고, 조선의 단단한 판옥선과 충돌하면 선체가 쉽게 깨졌다. 일본 수군의 주력 전선 세키부네와 기함으로 쓰인 아타케부네 모두 판옥선에 들이받히면 속수무책이었다. 판옥선은 참나무, 소나무 등 단단한 나무를 이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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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수군 대표전함 ‘판옥선板屋船’ 2편

■ 조선수군 대표전함 ‘판옥선板屋船’ 2편

■ 조선수군 대표전함 ‘판옥선(板屋船)’ 2편

제승방략 체제에 따라 수군의 경우도 유사시 중앙에서 달려온 지휘관이 지휘를 맡아야 했다. 수군은 작전 지역의 해로(海路)에 능통해야 한다. 각 군선을 운용하는 노하우도 하루아침에 터득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특성 때문에 수군은 제승방략하에서도 개별 함대·군선 지휘관의 재량권이 많이 주어지고 있었다. 그 덕에 수군은 임진왜란 개전 직후의 혼란 속에서도 효과적으로 적에 맞설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은 건국 초기에 대선(大船)·중대선(中大船)·중선(中船)·쾌선(快船)·맹선(孟船)·별선(別船) 등 총 13종의 군선을 829척 보유했다. 숫자는 많았지만 명확한 규격에 따라 건조하지 못했기 때문에 전투력의 한계가 뚜렷했다. 이에 1461년(세조 7년) 신숙주는 기존 군선을 개량해 전투와 조운(漕運)을 겸하자고 주장했다. 그 결과 1465년 개발된 것이 병조선(兵漕船)이다. 이름 그대로 군사작전(兵)과 조운(漕運)에 모두 사용할 수 있는 배다. 유사시 전시체제로 재빠르게 전환할 수 있는 획기적 방법이었다. 평소 선체 윗면의 상장(上粧·선체 최상층의 갑판)을 철거해 조운선으로 활용하다가, 전쟁이 일어나면 상장을 설치해 군용(軍用)으로 썼다.

1485년(성종16년) 《경국대전》에서 병조선(兵漕船)은 맹선(猛船)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맹선의 ‘맹(猛)’은 재빠르다는 뜻이다. 여전히 조세 운송과 전투 겸용으로 쓰이고, 크기에 따라 대·중·소맹선으로 구분했다. 대맹선은 군사 80명이 탑승할 수 있었고, 조운선으로 사용할 때 곡물 약 800석(石·144㎏) 정도를 운반할 수 있었다. 맹선은 전투보다는 조운에 더 많이 쓰였으므로, 몸집이 둔하고 기동력도 부족해서 일찍부터 군용으로는 별 쓸모가 없다는 논란이 있었다. 적선보다 느리고 둔했던 것이다. 중종과 명종대의 삼포왜란(三浦倭亂)·사량왜변(蛇梁倭變)·을묘왜변 등을 거치면서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해 전투 임무 수행에 부적합하다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남으로써 새로운 전투함이 개발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명종 이후 왜구도 중국에서 화포를 일부 도입하여 대형 군선을 만들고, 선상에 방패를 설치해 중국과 조선 정규군과의 싸움에 대비했다. 왜선의 규모 커지고 화포가 강화되어 조선의 맹선으로는 이들을 격퇴하기가 어려워졌다. 이에 맹선이 아닌 새로운 전투함이 개발돼야 한다는 필요성이 제기됐다. 1555년(명종10년) 조선은 덩치가 크고 화력을 대폭 보강한 전투 전용 선박을 개발했다. 바로 판옥선이다. 점점 대형화되는 왜구의 군선에 효과적으로 대항하기 위해서였다. 판옥선은 임진왜란 중 조선 수군의 대표전함으로 대활약을 한 널빤지로 지붕을 덮은 전선(戰船)이다. 오늘날 우리는 임진왜란 중 조선 수군의 상징이라 하면 거북선을 떠올리지만, 사실 거북선은 가장 많이 보유했을 때도 7척 내외에 불과했다. 반면 판옥선은 임진왜란 발발 2년차에 그 수가 200여 척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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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1일 월요일

2명의 이순신 3편

■ 2명의 이순신 3편

■ 2명의 이순신 3편

충무공 이순신의 보고를 받은 선조는 무의공 이순신을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제수, 특진시켰고, 1594년(선조 27년) 충청도수사(忠淸道水使)로 임명했다. 충청수사 재직 중 군율을 매우 엄히 적용했는데, 왕명을 받고 파견된 왕명특사(王命特使)는 무의공 이순신이 군율을 너무 엄격하게 한다며 형벌과중(刑罰過重)으로 보고하였고, 보령(保寧) 토호 김태국(金泰國)이 사노(私奴) 한손(漢孫)을 시켜서 낸 고변(告變)도 조정에 보고되자, 구금(拘禁)되어 조사를 받게 되었다. 1595년(선조 28년)에 다시 풀려나 고령진첨사(高嶺鎭僉使)로 강등되어 임명되었다.

그 후 무의공 이순신은 1594년에는 충청 수사로, 1597년에는 명량해전이 끝난 직후 경상 우수사에 임명되었다. 1598년 충무공 이순신이 전사한 노량해전에도 중위장으로 참전해 충무공과는 임진왜란의 시작과 끝을 함께 했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명나라 제독 진린에 의해 충무공 이순신의 뒤를 이을 통제사로 천거를 받기도 했다. 1599년(선조 32년) 1월에 수사직을 물러나서 포도대장 겸 도총사 총관에 임명되었으며, 1600년(선조 33년)에 충청수사 · 수원부사 · 경상부사를 역임하였다. 1601년 황해도병마절도사가 되었으나 재물을 탐한 죄로 다시 파직되었다가, 1602년(선조 34년) 창원부사로 부임했다. 1604년 첨지부사가 되었고,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에 녹훈되었다. 1604년부터 전라방어사·수원부사·함경도병사(咸鏡道兵使)·전라병마절도사를 역임하였고, 이후 포도대장, 훈련대장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 등을 지냈다.

1611년(광해군 3년) 9월 2일에 59세로 별세하여 현재 경기도 시흥군 서면 일직리(현 광명시 일직동)에 장사(葬事)되었다. 인조 때 의정부좌찬성에 추증(追贈)되었고, 1679년(숙종 6년)에 무의(武毅)라는 시호를 제수 받았다. 무의공 이순신의 묘는 1987년 9월 10일 광명시의 향토문화유산 제4호로 지정되었다.

충무공 이순신은 언제나 최선을 다했던 무의공 이순신을 신뢰했고, 국난극복을 위해 함께 목숨을 걸었다. 무의공 이순신은 충무공 이순신과 임진왜란의 시작과 끝을 함께 하며 눈부신 활약을 했다. 충무공이 있는 곳에 무의공이 있었고, 무의공이 있는 곳에 충무공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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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명의 이순신 2편

■ 2명의 이순신 2편

■ 2명의 이순신 2편

1589년(선조 22년)에 함경도 혜산진첨사(惠山鎭僉使)에 임명되어 여진족의 침략을 막으러 나갔으나 부임 도중 병이 나서 적군의 침입을 제대로 막지 못하여 상사로부터 문책을 받았으나, 선조가 특별히 은전을 베풀어 징계를 면했다. 그러나 상사와의 불화가 계속되자 결국 선조는 그를 파직하여 귀양보냈다. 2년 후, 일본의 침입 움직임이 있자 재등용되어 1591년(선조 24년)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관할인 방답진첨사(防踏鎭僉使)로 부임하게 되었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전선(戰船) 제작에도 참여하여 자문하였고, 관내의 성지(城池)를 정비하고 기계(機械)와 축성 제작에도 전력을 다함으로써 망루(望樓)와 군기영기(軍旗令旗)들이 일제히 정비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그는 충무공의 막하 중위장(中衛將)으로 첫 해전인 옥포·합포해전 때부터 출전해 대활약을 했다. 첫 전투일인 1592년 음력 5월 7일, 옥포해전을 막 끝낸 뒤에 합포로 도망친 5척의 일본군 전선(戰船) 대선(大船) 1척을 무의공 이순신이 파괴했다. 5월 8일 적진포에서도 일본군 대선 1척을 파괴했다. 이순신이 2차 출전했던 1592년 5월 29일에는 하동 선창에 있는 일본군 전선을 불태워 없앴다. 6월 6일에는 무의공 이순신이 충무공 이순신에게, “산에 올라간 일본군이 반드시 당항포에 남겨둔 배를 타고 새벽에 몰래 나올 것이니, 그들을 바다에서 공격하자”고 제안했다. 충무공 이순신은 무의공의 전략에 따랐고, 무의공은 배를 타고 도망치던 일본군을 공격해 파괴했다. 1592년 9월 1일 부산해전에서도 무의공 이순신은 선봉장으로 참전해 일본군 대선을 파괴했다.

그런 공로에도 불구하고, 다른 장수들과 달리 무의공 이순신은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 무의공 이순신의 공로가 묻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충무공 이순신은 조정에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올렸다.

『많은 장수들 중에서도 순천 부사 권준, 광양 현감 어영담, 흥양 현감 배흥립, 녹도 만호 정운, 그리고 방답 첨사 이순신(李純信) 등은 특별히 신뢰할 수 있어 함께 죽기를 약속하고 모든 일을 같이 의논하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권준과 다른 장수들은 모두 당상관((堂上, 정3품 절충장군 이상)으로 승진했는데, 이순신(李純信)만이 은혜를 입지 못했습니다. 이순신(李純信)은 호남 영남 개전 이래 10회에 걸쳐 1회는 중군(中軍)을, 9회는 선봉을 맡아서 오직 적의 기세를 꺾는 데 전념하느라고 적의 수급(首級)을 모아 공적을 자랑할 겨를이 없기에 특별히 앞세워 상계(上啓)했건만 논공(論功)이 홀로 순신(純信)에게 미치지 못하여 유전지공(有戰之功) 무전지상(無戰之賞)이라는 군심(軍心)의 원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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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명의 이순신 1편

■ 2명의 이순신 1편

■ 2명의 이순신 1편

난중일기 속에 이런 대목이 있다. 『1592년 1월 10일. 비가 내내 내렸다. 방답(防踏)의 신임 첨사(僉使) 이순신이 들어왔다.』 방답은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관할하던 전라좌수영의 5관(官:순천·광양·보성·흥양·낙안)·5포(浦:방답·사도·발포·녹도·여도) 가운데 5포의 한 곳으로, 새로 부임한 방답의 신임 첨사 이순신이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인사를 하러 왔다는 내용이다. 첨사는 고위직인 종3품으로 정식명칭은 첨절제사다. 육군에는 병마첨절제사, 수군에는 수군첨절제사가 있는데, 정3품이었던 수사 바로 밑의 계급이었다. 이순신이 전라좌수사인데, 방답 첨사도 이순신이라니.........

전라좌수사도 이순신이고, 그 전라좌수사 이순신을 찾아온 방답의 신임 첨사의 이름도 이순신이었다. 이 두 사람은 이름은 같지만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발음은 같지만 한문 이름은 다르다. 즉 전라좌수사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이고, 방답의 신임 첨사는 무의공 이순신(李純信)이다. 무의공 이순신은 훗날 원균이 이순신을 비판할 때 “너에게는 다섯 아들이 있다”라고 했는데, 그 다섯 아들이라고 평가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다섯 아들은 바로 이순신과 동고동락했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처럼 긴밀했던 사람들로서, 순천 부사 권준, 녹도 만호 정운, 흥양 현감 배흥립, 광양 군수 어영담, 그리고 방답 첨사 무의공 이순신이 그들이다.

무의공 이순신은 이순신보다는 9살 아래인 1554년생이다. 태종의 맏아들인 양녕대군의 후손이다. 즉 조선 왕실의 후예이다. 자(字)는 입부(立夫)이고, 시호는 무의(武毅)다. 그래서 무의공이라고 한다. 장군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문학에 힘썼으며 지혜가 뛰어났다. 장성하면서 준엄하고 단정한 인품으로 지조가 굳었다고 한다. 어려서는 이황의 제자인 김성일(金誠一)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32살의 충무공 이순신이 1576년 정기시험인 식년시에서 급제했는데, 무의공은 그 이듬해인 1577년에 23살의 나이에 특별시험인 무과 별시에서 급제했다. 활쏘기 대회에서 장원한 상으로 북방 방위에 차출되는 것을 면제받았다. 빠른 출세에 시기한 무리들에 의해 모함을 받아 1580년(선조 13년)에 탄핵을 받고 선전관(宣傳官)에서 파직되었으나, 그 해 겨울 다시 복관하여 선전관이 되었다.

1582년 4월에는 강진현감으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강진의 지역 호족(豪族)들과 마찰을 빚어 1585년(선조 18년)에 또 파직 당하였다. 그 뒤 특별 별명(別命)을 받아 선전관에 복직되어 어전(御殿)을 호위하다 옛 스승인 김성일(金誠一)의 천거로 1586년(선조 19년) 함경도 온성부 판관이 되었다. 1588년(선조 21년)에는 의주판관(義州判官)으로 발탁되어 명나라 사신 수행업무를 맡게 되었다. 이때 사절단이 뇌물을 요구하는 것을 모르는 체하자, 명나라 사절단이 본국에 귀국하여 이 문제를 트집잡았고, 이로 인해 탄핵당하여 파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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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 대기업 성과급 공정성 논란-성과 보상 vs 손실 보상

◇ 대기업 성과급 공정성 논란-성과 보상 vs 손실 보상

◇ 대기업 성과급 공정성 논란-성과 보상 vs 손실 보상

기업의 연말 성과급 지급 기준은 다양하다. 국내 기업 인사담당자 대상 설문조사(잡코리아)를 보면, 개인별 또는 사업부문별 실적에 따른 차등 지급이 각각 32.4%, 30.2%로 가장 많다. 호봉·직급 등 연공서열에 따른 차등 지급(20.8%)도 여전히 적지 않다. 그냥 전체 회사 실적 기준으로 일괄 지급을 하는 곳은 15.6%다.

어느 것이 효과적일까. 성과급의 목적은 보상을 통해 목표 달성의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다. 개인, 사업(부서), 전체 조직 중에 어디에 얼만큼 방점을 찍느냐의 문제다. 집단 성과급, 즉 정률 혹은 정액으로 일괄 지급하는 건 구식이다. 동기부여가 약하고 무임승차 문제를 발생시킨다. 그러면 완전한 개인 성과급은 어떨까. 동기부여는 확실하겠지만, 지나친 내부 경쟁, 무리한 영업, 공동체 의식 약화 등이 단점이다.

성과급 지급 방식은 대부분 다단계다. 일단 목표 이익 초과분에 연동해 전체에 지급할 평균 성과급률을 정하고, 목표 달성률에 따라 사업부문과 개인에게 추가 인센티브를 주는 식이다. 특정 개인이나 사업부로 쏠림을 막기 위해 상한선을 두는 곳도 많다. 명확한 기준과 방식을 공개하는 기업은 거의 없다. 노사 협의에 따르거나 경영진 고유 판단으로 지급하는 게 관행이다.

국내 대기업 성과급이 공정성 논란에 휩싸였다. 단지 더 많이 달라는 게 아니고, 투명성과 형평성에 문제가 있다는 내부 문제제기다. 노조를 통해서가 아니라 소셜미디어를 통해 공론화하고 집단행동을 한다. 이른바 ‘MZ 세대’(엠제트 세대, 1980년 이후 출생 세대)가 불합리한 기업 관행에 적극 대응하는 ‘구성원 행동주의’라는 해석이 나온다.

기업 성과는 구성원의 노력만으로 결정되진 않는다. 우리처럼 수출 중심의 산업구조에선 유가, 경기, 환율, 정책 등 외부 경영환경이 주요 변수일 때가 더 많다. 예컨대 매출 1조원보다 환율 10원이 이익률에 끼치는 영향이 훨씬 크다. 지난해 국내 대기업의 실적 호조는 ‘성공적 방역’이란 경영환경이 긍정적 변수로 작용했다. 여기엔 기본권·재산권 제한을 감수한 다른 경제주체들의 희생이 깔려 있다. 언감생심 성과급보다 이들의 희생을 공정하게 다루는 게 더 절박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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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유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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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폭, “나는 10년 전 네가 한 일을 알고 있다”

◇ 학폭, “나는 10년 전 네가 한 일을 알고 있다”

◇ 학폭, “나는 10년 전 네가 한 일을 알고 있다”

10년 전 지방 대도시에서 학교 폭력에 시달리던 중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피해 학생 유서에 물고문과 구타, 금품 갈취에 시달렸다는 사실이 적혀 있었다. 극단적 선택을 하기 몇 시간 전 엘리베이터에 쪼그려 앉아 소매로 눈물을 훔치는 모습이 CCTV에 녹화됐다. 그걸 본 전국의 학부모들 가슴이 무너졌다. 몇 해 전 또 다른 도시에선 여중생 4명이 또래 여학생을 집단 구타한 사건이 터졌다. 얼마나 가혹하게 때렸는지 맞은 학생이 피눈물을 쏟았다. 10대 아이들의 일탈로 볼 수 없는 범죄행위였다.

2019년 교육부가 전국 초등4~고3 학생 372만명에게 학폭 경험을 물었다. 무려 6만명이 고통을 토로했다. 폭력 수위가 어른 뺨친다. 말로 괴롭히거나 따돌리는 것은 기본이고, 폭행과 금품 갈취처럼 중범죄에 해당하는 사례도 1000건당 1~2건에 이른다. 학교가 아니라 야수가 우글대는 정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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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폭 피해가 아무리 극심해도 시간이 지나면 세상에서 잊힌다. 그러나 피해자도 잊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가해자가 연예인이나 운동선수로 대중의 박수를 받게 되면 피해자는 불공평함과 억울함을 느끼고 심리적 2차 가해를 입을 수 있다. 과거엔 이를 토로할 수단이 없었지만 소셜 미디어가 ‘게임 체인저가 됐다. 몸의 상처는 나아도 심리적 타격은 아물지 않는다. 학폭 폭로의 시효가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10년 전, 20년 전 일이 어제 일처럼 퍼져나간다. 가해자가 유명 아이돌이나 걸그룹, 스타 운동선수라면 더욱 치명적이다. 학생 때 또래를 괴롭히려면 평생 두 발 뻗고 못 잘 것을 각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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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배구 이재영·다영 쌍둥이 자매에 이어 남자 배구에서도 송명근·심경섭 선수가 잇따라 학폭 시비에 휘말렸다. 대략 10년 전 사건들이지만 죗값을 치르라는 여론이 비등하다. 청와대 국민청원에는 수만 명이 몰려가 해당 선수들의 영구 제명을 요구하고 있다. 운동 꿈나무, 연예인 지망생이라면 타산지석(他山之石) 삼아야 할 것이다.

청소년기 폭력은 어른이 되어 겪는 것보다 더 깊고 오랜 상처를 남긴다. 어린 탓에 적절한 대응을 못 해 피해를 키운다. 학폭을 반드시 근절해야 하는 이유다. 그러나 가해 아이들만 탓해선 재발을 막지 못한다는 지적도 있다. 뇌과학 연구에 따르면 청소년기 전두엽엔 충동 조절 세포를 연결해 주는 백질이 부족하다. 이로 인해 타인은 물론 훗날 자신까지 망가뜨리는 ‘중2병’을 앓는다는 것이다. 청소년들이 사고 치지 않고 이 시기를 잘 넘기게 하려면 학교 당국과 사회가 힘을 합쳐 학폭의 심각성과 10년 뒤 닥칠 후과를 가르치라고 조언한다.

-조선일보-

◇ 국내 상륙 음성 전용 SNS '클럽하우스'

◇ 국내 상륙 음성 전용 SNS 클럽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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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 상륙 음성 전용 SNS 클럽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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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신세계가 있나.’ 지난 주말 무렵부터 체험기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국내에 본격 상륙한 음성 전용 소셜미디어 ‘클럽하우스(Clubhouse)’ 얘기다. 한 지인은 클럽하우스와의 첫 만남을 이렇게 떠올린다. ‘예전 아마추어 무선통신이 이런 분위기 아니었을까. 아직은 누가 인사를 하면 화들짝 놀라서 나가기 버튼을 누르게 된다.’

클럽하우스는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벤처기업인 폴 데이비슨과 구글 출신 로한 세스가 지난해 3월 개발한 음성 앱이다. 그런데 1일 테슬라의 최고경영자 일론 머스크가 게임스톱 주가와 관련해 이 앱에 참여해 토론하면서 인기가 치솟았다. 아직은 아이폰 운영체계에서만 가능하다 보니 중고 아이폰 거래가 늘어났을 정도다. 이 앱에서 금기 이슈 토론이 활발해지자 중국 당국은 이 앱의 접속을 막기까지 했다.

클럽하우스에 들어가려면 일단 기존 가입자로부터 받은 모바일 초대장 또는 지인의 수락이 있어야 한다. 그 다음엔 직접 방을 만들어 청취자 중 일부를 발표자로 선정해 대화를 이끌거나 또는 다른 방에 청취자로 참여해 손 모양 버튼을 눌러 발언권을 받을 수 있다. 해외 유명 인사들이 만든 방에도 영어 등 외국어로 참여할 수 있다. 스타트업 분야 종사자가 초기에 몰려 관련 내용의 대화방이 많다가 최근엔 취미, 성대모사 방도 생겼다. 카카오톡 대화방의 음성판으로 이해하면 된다.

이 방 저 방에서 음성 대화가 진행되니 마치 고대 그리스의 아고라(광장) 같다. 클럽하우스의 세계에는 말을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자유, 듣다가 조용히 떠날 수 있는 자유가 다 있다.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비싼 콘퍼런스에 가서 듣던 고급 정보를 침대에 누워 공짜로 편하게 듣고 격의 없이 질문할 수 있다. 클럽하우스 앱 대표 이미지는 활발한 활동을 하는 사용자 얼굴 사진으로 주기적으로 바뀐다. 요즘 세대가 원하는 참여, 연결, 평등, 성장, 레트로 감성이 다 들어 있다.

그중 최고는 코로나로 인해 대화에 목말랐던 세계인들을 목소리로 연결시킨 점이다. 사용자들은 “사람의 목소리 질감이 이토록 매력적인지 새삼 깨달았다”고 한다. 클럽하우스에서는 지식과 경험을 말로 잘 풀어내는 실력자가 힘을 갖는다. 고유한 콘텐츠가 있고 영어까지 잘하면 글로벌 인플루언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양날의 검이다. 고수를 가려내지만 선동가의 육성에 여론몰이 장으로 변할 위험이 있다. 트위터는 ‘조리돌림’(다수에게 공개해 수치심을 주는 처벌), 텔레그램은 N번방 사건의 불명예를 낳았다. ‘클럽하우스 민주주의’의 향배는 사용자가 얼마나 스스로 정보 감별 능력을 키우는지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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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횡설수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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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 하는 SNS, 클럽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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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연휴 내내 자정이 넘도록 사이버 공간을 쏘다녔다. ‘이런 신세계가 있나’ 싶었다. 하필이면 연휴 직전에 지인의 ‘초대장’을 받고 가입했고, 다음 날 일정에 쫓기는 부담도 없어서 속속 열렸다 사라지는 신기루 같은 방들을 들락날락했다. 그러다 마음에 드는 주제나 사람을 만나면 그 방이 닫힐 때까지 머물렀다. 그 방들은 대화가 끝나면 모두 사라져 내용도, 기록도 남지 않았다. 미국 스타트업 ‘알파 익스플로레이션’이 지난해 4월 출시했고, 최근 국내서도 연일 화제를 몰고 다니는 오디오(음성) 기반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클럽하우스(Clubhouse)’ 이야기다.

시사·경제·예술·취미·예능 등 다루는 주제도 다양하다. ‘클럽하우스 커뮤니티’ 같은 실용적인 방이 있는가 하면, ‘카카오 김범수 의장님의 5조 원이 있다면… 우리는 한국의 교육이나 일자리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처럼 사회문제 해결을 고민하는 방도 눈에 띄었다. 미국 뉴욕증시 상장 소식이 알려진 쿠팡 투자 토크 방엔 수백 명이 모였다.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청춘을 응원하는 방’에선 방송인 김제동 씨를 만났고, ‘질문과 해결’이 뭐지 싶어서 들어간 방에선 가수 적재가 모더레이터여서 끝까지 자리를 뜨지 못했다. 클럽하우스가 가진 매력인 즉흥성과 희소성, 현장성이 확 다가왔다.

물론 클럽하우스에 가입하려면 ‘아이폰’ 사용자여야 하고, 먼저 가입한 회원이 보내 주는 ‘초대장’이 있어야 하며, ‘영어’ 사용 방이 많아 폐쇄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러한 폐쇄성이 클럽하우스 마케팅의 또 다른 핵심 포인트가 되고 있으니 아이러니하다. 클럽하우스를 이용하지 못하면 어딘가 모르게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라는 소외감을 느끼게 해 어떻게든 그 안으로 들어오게끔 하는 전략, ‘포모(FOMO·Fear of Missing Out)’ 마케팅 말이다. 오죽하면 당근마켓이나 번개장터 같은 중고 거래 플랫폼에서 클럽하우스 초대장이 버젓이 현금 거래되는 상황까지 빚어졌다.

또 하나의 새로운 플랫폼이 생겨난 것에 불과할 수 있다. 운용 원칙은 ‘쌍방향 소통’이지만, 남들이 하는 말을 그저 듣기만 한다면 ‘팟캐스트’나 ‘유튜브’와 다를 바 없어서다. 그런데도 ‘말로 하는 SNS’가 묘하게 매력적이다. 코로나19가 불러온 비대면 사회환경이 우리 사회를 급격하게 변화시킨 것처럼 오디오 콘텐츠의 미래도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확장된 소통이 새로운 공론장으로 커 나갈 수 있을지, 스쳐 가는 SNS 바람이 될지는 좀 더 지켜볼 일이다.

-부산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