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31일 일요일

사관史官과 사초史草 4편

■ 사관史官과 사초史草 4편

■ 사관(史官)과 사초(史草) 4편

실록을 만들기 위해서는 방대한 자료가 동원되었다. 그 가운데 사관들이 매일매일 일어나는 일들을 기록한 사초(史草)는 실록 편찬의 가장 중요한 자료였다. 사초에는 입시사초(入侍史草)와 가장사초(家藏史草)가 있다. 입시사초는 전임사관이 왕 가까이에서 나랏일을 기록한 사초이고, 가장사초는 퇴근하여 집으로 돌아가서 다시 정리하여 기록한 사초이다. 따라서 가장사초는 입시사초에 비해 글씨도 알아보기 쉽고 내용도 정리가 잘된 편이다. 가장사초는 사관의 집에 보관해 두었다가 정해진 기일에 실록청에 제출하여 편찬의 자료로 사용되었다. 사관은 가장사초에 자신이 직접 들은 사건과 인물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기록하였다. 그래서 실록에는 ‘사실’과 함께 ‘비평’이 담겨 있다.

입시사초는 겸임사관들이 작성한 춘추관일기와 함께 시정기(時政記)로 만들어져 실록 편찬의 일차 자료가 되었다. 사관이 기록한 사초는 실록을 만들기 위한 기본 자료이기에 가장 필수적이지만 특히 조선시대의 사초는 사관 외에 왕도 볼 수 없게 함으로써 사관의 신분과 역사 기록의 객관성이 확보될 수 있었다. 사관들이 작성한 사초 외에도 각 관청의 등록·승정원일기·경연일기·일성록 등과 개인 문집·야사 등도 수집하여 실록 편찬 자료로 활용하였다. 실록 편찬에 쓰이는 이 모든 자료를 통칭하여 사초(史草)라 부르기도 한다.

실록이 완성되면 총재관 이하 편찬에 종사했던 관리들이 참석하여 실록을 궤를 가마에 싣고 춘추관으로 나아가 성대한 봉안식을 거행하였다. 지방의 사고(史庫)에 봉안할 경우 왕명을 받들어 소임을 맡은 관리와 종사관 몇 명만이 실록을 싣고 가 사고에서 의식을 거행한 후 봉안하였다. 한편 실록이 완성되면 초초(初草)와 중초(中草)는 개천물에 씻어 내용을 지우고 종이는 바위에 말린 후, 종이 제작을 담당했던 관서인 조지서(造紙署)로 보냈다. 사초를 씻어 내는 일을 세초(洗草)라 하였는데, 실록의 내용이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함과 종이 재활용이라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린 것이다.

세초는 당시 조지서와 가까웠던 세검정의 개천에서 주로 이루어졌고, 차일암(遮日巖:차일을 쳤던 바위)이라 불린 넙적 바위에서 종이를 말렸다. 차일을 치는 이유는 햇볕을 가리기 위한 원래의 목적보다 기록의 누설을 막기 위한 철저함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세초가 끝나면 수고한 관리들을 치하하기 위한 세초연(洗草宴)이 베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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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관史官과 사초史草 3편

■ 사관史官과 사초史草 3편

■ 사관(史官)과 사초(史草) 3편

조정에서는 사관이 기록하는 사초의 질과 양 및 직필(直筆)을 보장하기 위하여 국정을 논의하는 자리와 왕과 신하가 대면하는 모든 곳에 사관이 참여하도록 하고, 승정원 옆의 한 칸을 사관의 거처로 삼게 하였다. 또한 사초를 누설하거나 개작 또는 삭제한 자는 참수형 이하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국왕의 사초·실록 열람 금지, 사초 작성자의 이름 불기재(명종 이후에는 기재) 등의 조치를 행하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러한 규정에도 불구하고 사관의 직필을 꺼린 국왕이나 대신 등의 탄압이 가해지고, 국왕이 “승지가 사관직을 겸하여 국왕의 언동과 국사를 기록하니 사관은 입시하지 말라.” 등의 탄압으로 가끔 사관의 입실(入室)이 중지되기도 하였다. 또한, 정쟁(政爭)과 연루되어 직필과 공정성이 결여되기도 하였지만, 국왕과 집권관료들의 전횡(專橫:권세를 마음대로 휘두름)과 비리를 은연중에 견제하여 유교정치가 표방하는 덕치(德治)를 행하는데 기여한 바가 크다.

성군으로 불리는 세종대왕도 史草 앞에서 약한 인간적인 면모를 보인 일화 한 토막이 전한다. 하루는 아버지 태종의 치적을 사관이 어떻게 평가할 지가 궁금해 태종 때의 사초(史草)를 보자고 했다가 원칙을 고수한 사관으로부터 정중하게 거절당하고 만다. 아마 세종대왕이 폭군이었다면 왕명을 거절한 그 사관을 죽여서라도 사초를 열람했을 수도 있었을 터이다.

조선왕조의 사관은 전임사관(專任史官)과 겸임사관(兼任史官)으로 구성된다. 전임사관은 이른바 한림팔원(翰林八員)이라 불리기도 했던 예문관 관원인 봉교(奉敎) 2명, 대교(待敎) 2명, 검열(檢閱) 4명 등 총 8명이다. 왕이 계시는 곳이면 어디서든 붓을 들고 기록하기에 이들이 작성한 기록을 입시사초(入侍史草)라 부른다. 비록 미관말직이라도 맡은 임무가 워낙 중요하고 임용절차도 까다로워 세인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한편 겸임사관은 주요 관청의 관원들로 춘추관의 관원을 겸직한 사관들이다. 겸임사관들은 각각 자신이 속해 있는 관청에서 일어나는 나날의 사건과 업무를 기록하여 춘추관에 보고하였다. 이를 춘추관일기(春秋館日記)라 불렀다. 입시사초와 춘추관일기는 연월일 순서로 정리하여 시정기(時政記)로 만들어 실록 편찬에 활용하였다.

한편 외사(外史)라 하여 각 도의 관찰사나 수령을 별도로 임명해 지방의 일들을 춘추관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중앙뿐 아니라 지방 곳곳에도 사관을 배치하여 실록 편찬의 자료들을 평상시에 기록하고 모아둠으로써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은 그 어느 역사서보다 상세하고 생생한 특징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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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관史官과 사초史草 2편

■ 사관史官과 사초史草 2편

■ 사관(史官)과 사초(史草) 2편

사관(史官)은 임금 앞에서 경서(經書:유교의 경전과 사서오경)를 강의하는 경연(經筵), 정2품 이상의 관리들이 하는 중신회의(重臣會議), 모든 문·무 관리들이 하는 백관회의(百官會議) 등에 참석하여 그 회의 내용을 기록(記錄)하였다. 사관(史官)의 기록은 어느 한편으로 치우침없이 공(公)과 사(私)를 명확히 하여, 임금과 백관(百官)들의 언행(言行)과 정치적(政治的)인 시시비비(是是非非) 그 외 국가적인 사건·사고와 백성들의 생활 등을 직필(直筆)하여 후세에 남기는 것이 주요 목적이다.

그러므로 사관은 다양한 지식과 글을 잘 쓰는 능력뿐만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거짓 없이 그대로 기록직필(直筆)해야 하기에 권력 앞에 맞서는 용기도 필요했다. 그래서 사관들은 여러 분야에서 능력이 뛰어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직업이고, 관리들 중에서 가장 청렴결백하였다. 이들은 당하관(정7품, 정8품, 정9품)으로 비록 직위(職位)는 낮았으나, 국왕의 측근에서 근무하였기에 과거급제자 중 문벌(門閥)이 좋은 사람을 임명하였다.

1417년(태종 17년) 이전에는 추천받은 인물을 이조(吏曹)에서 계문(啓聞:국왕에게 아룀)하여 제수(除授:임금이 벼슬을 내림)하였지만, 후에는 선발하고자 하는 사관의 품계(品階)에 해당하는 인물들을 대상으로 문장이 뛰어나고, 내·외 4조(증조·조·부·외조)에 흠이 없고, 인품이 공정한 자를 3배수로 뽑아 이조(吏曹)에 보내면 이조에서 엄격한 심사를 거쳐 제수하였다. 요즘으로 치면 청문회를 거쳐서 임명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겠다.

처음에는 한 명만 입시하여 기록하였는데, 기록에 누락이 없게 하기 위해서 1425년(세종 7년)부터 사관 2명이 좌우에 입시하여 말과 행동을 나누어 기록하게 하였다. 지방에서 올라오는 장계(狀啓)나 왕이 내리는 교서(敎書)는 반드시 사관을 거쳐 이를 초록(抄錄)한 뒤에 육조(六曹)에 넘기게 하였다. 사관제도는 정확한 직필(直筆)로써 국가적인 사건, 왕의 언행, 백관의 잘잘못, 사회상 등을 기록하여 후세에 정치를 하는 데 거울로 삼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관이 기록한 사초는 시비(是非:옳고그름)를 가리거나 수정을 가하지 못하며, 사관의 기록 행위도 일종의 면책권이 있어 신분이 보장되었다. 또한, 사관(史官)의 기록은 일절 공개하지 않아서 국왕(國王)도 볼 수가 없었다.

사관이 직필의 원칙을 얼마나 지켰는지는 다음의 예시로 알 수 있다.

1404년(태종4년)에 태종은 사냥을 나갔다가 실수로 말에서 떨어져 체통이 말이 아니었다. 태종은 급히 일어나서 좌우를 둘러보며 “이 사실을 사관이 알지 못하게 하라” 고 말했다. 그러나 "사관(史官)이 알게 하지 말라(勿令史官知之)"는 왕의 명까지 ‘태종실록’에 고스란히 기록되었다. 사관의 붓이 얼마나 두려웠으면 이런 어명을 내렸을까? 역사를 기록하는 붓을 ‘사필(史筆)’이라고 한다. 정종 또한 임금이 두려워할 것은 오로지 사필(史筆)이라고 말했다. 사관들은 직필의 원칙을 지켰고, 조선시대의 국왕은 사관의 기록에 언제나 긴장하고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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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관史官과 사초史草 1편

■ 사관史官과 사초史草 1편

■ 사관(史官)과 사초(史草) 1편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태조로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 25대 472년간의 역사를 연월일 순서에 따라 기록한 책이다. 조선시대의 정치, 외교, 경제, 군사, 법률, 통신, 종교 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총망라하고 있어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우수한 역사기록물이고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실록을 편찬할 때 이용하는 자료는 정부 기관의 각종 기록과 개인의 문집들이 있지만, 이 중에서도 특히 사초(史草)는 사관(史官)이 국가의 모든 회의에 참여하여 보고 들은 내용을 빠짐없이 적은 기록이다. 사관(史官) 이외에는 국왕조차도 볼 수 없게 하여 사관의 신분을 보장하고, 기록의 객관성과 진실성을 확보하였다. 그 덕분에 우리는 오늘날 조선시대의 왕실은 물론 일반 백성들의 생활까지도 세세하게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었다.

사관(史官)은 ‘역사 사(史) 벼슬 관(官)’ 으로, 글자 그대로 ‘역사(歷史)를 기록(記錄)하는 관리(官吏)’ 이다. 사관(史官)은 중국에서 황제(黃帝)와 신하의 좌우에 위치하면서 그들의 행동을 기록하는 좌사(左史)와 말言을 기록하는 우사(右史)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있다. 왕의 언행과 관료들의 행정 등 시정(時政)을 기록하는 일을 했다. 우리나라도 고구려·백제·신라 때 여러 역사책이 편찬된 것으로 보아 사관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정식으로 사관(史館=관아)을 설치하고 사관(史官)이란 관리가 있었는지는 명확한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아 확실하지 않다. 고려시대에 이르러 광종 때에 당(唐)의 사관제도(史館制度)를 받아들여 궁내에 사관(史館)을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직접 실무를 맡은 한림원(翰林院)의 수찬관, 직사관이 사관(史館=관아)에서 왕이나 백관들의 언행, 정치 등 모든 기록을 담당하여 이를 사관(史官)이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도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예문관과 춘추관의 공봉, 수찬, 직관이 다른 직과 겸하여 국사의 기록을 담당하였는데 이들을 사관(史官) 또는 한림(翰林)이라 하였다. 사관(史官)은 최고 권력자인 국왕의 언행과 행동 뿐 아니라, 관리들에 대한 평가와 주요 사건, 사고 등 당시의 기록을 후대에 남기기 위해 국왕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가서 국왕의 언행 및 행동을 기록했다. 이러한 사관의 역할로 인하여 왕과 신하는 은밀히 만나 정사를 의논할 수 없었다.

왕명을 출납하는 승지(承旨)와 함께 궁중에서 숙직하고, 각종 회의에 빠짐없이 참석하여 국왕과 신하들이 국사를 논의・처리하는 것을 사실 그대로 기록할 뿐만 아니라, 그 잘잘못과 인물에 대한 비평까지 기록했다. 임금이 신하를 대면(對面)할 때엔 정승\uf0a0판서와 같은 고관이라 할지라도 독대할 수 없었고, 반드시 승지와 사관이 자리를 같이함으로써 사사로운 청탁이나 남을 중상・모략하는 것을 막도록 하였다. 또한 국왕과 대신들의 부적절한 권력남용과 부패를 방지할 수도 있었고, 열린 정치를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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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궤儀軌

■ 의궤儀軌

■ 의궤(儀軌)

‘의궤(儀軌)’란 의식(儀式)과 궤범(軌範)을 합한 말이다. 조선시대에 국가나 왕실에서 거행하는 주요 행사를 글이나 그림으로 남긴 보고서 형식의 책으로, ‘의식의 모범이 되는 책’이란 뜻이다. 국왕의 혼인을 비롯하여 세자책봉, 왕실잔치, 장례, 궁궐건축 등 국가의 중요한 행사가 있으면 전왕(前王) 때의 사례를 참고하여 거행하는 것이 관례이다. 그러므로 행사 관련 기록을 ‘의궤’로 정리해둠으로써 후대에 참고로 삼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만약 의궤라는 기록 유산이 없었다면, 오늘날 왕실 혼례식을 비롯한 궁중의식은 결코 재현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의궤 중에서도 『가례도감의궤』는 활기차고 신명 나는 혼례식 장면에서 축제 분위기가 느껴진다. 특히 행사 때 사람과 기물의 배치, 행사의 주요 장면을 그린 반차도(班次圖)는 오늘날로 치면 결혼식 기념사진이나 동영상 파일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반차도는 행사 당일에 그리는 것이 아니었다. 행사 전에 참여 인원과 물품을 미리 그려서 실제 행사 때 최대한 잘못을 줄이는 기능을 했다. 오늘날 국가 행사 시 미리 도면을 그리고 대본을 만들어 리허설을 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에도 당시 친영일은 6월 22일이었지만 친영의 모습을 담은 반차도는 6월 14일에 이미 제작되어 국왕에게 바쳐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가례(嘉禮)는 원래 왕실의 큰 경사를 뜻하는 말인데, 주로 왕실의 혼인이나 책봉 등의 의식 예법을 뜻한다. 왕실의 혼인 중에서도 왕이나 왕세자의 혼인만을 특별히 가례라고 칭했다. 현재 전해지는 조선시대 ‘가례도감의궤’를 살펴보면, 왕의 가례가 9건, 왕세자의 가례가 9건, 왕세손의 가례가 1건, 황태자의 가례가 1건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조선전기부터 왕실의 혼인을 위하여 ‘가례도감’이 설치되고 이때의 상황을 기록한 『가례도감의궤』가 편찬됐음을 확인할 수 있으나, 안타깝게도 전기의 의궤 중 현재 전해지는 것은 없다. 지금 남아 있는 『가례도감의궤』 가운데 가장 최초의 것은 1627년(인조 5년) 12월 27일 소현세자와 강빈(姜嬪)의 『소현세자가례도감의궤』이며, 순종과 순종비의 결혼식을 정리한 1906년의 『순종순종비가례도감의궤』가 가장 최후의 것이다. 280년간 20건의 가례가 의궤로 정리되어 있는 셈이다.

각 국왕과 왕세자의 결혼식이 연속적으로 기록돼 있어, 의궤를 통해 조선시대 결혼 풍속의 흐름을 살펴볼 수 있고, 각종 혼수품과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변화된 모습도 파악할 수 있다. 또한 의궤에는 육례에 맞추어 조달했던 각종 의복과 물품 내역을 비롯해 의장기, 가마 등을 준비한 장인들의 명단, 소요된 물자의 구체적인 내역을 도설(圖說)과 함께 첨부했다. 게다가 그림을 그린 화원들의 이름까지도 세세히 기록하고 있어 매우 소중한 역사자료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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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혼國婚 2편

■ 국혼國婚 2편

■ 국혼(國婚) 2편

혼례식에서는 왕실의 화려함과 함께 위엄을 돋보이게 하는 각종 도구들이 활용되었는데, 의장 깃발에는 해·달·산천을 비롯해 사신도에 표현된 동물, 가구선인(駕龜仙人) 등의 그림을 그려넣어 왕실의 위엄을 더했다. 의장물은 시각적인 것과 악기와 같은 청각적인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시각적인 것은 창·칼·도끼 등과 같은 군사적인 힘을 상징하는 것과, 그늘을 만들어주는 실용성과 신선들이 주로 사용했다는 상징성을 겸비한 부채인 선(扇)·양산(陽橵)·개(蓋) 등이 활용되었다. 악기는 축제 분위기를 조성하고, 행렬의 앞뒤의 동작을 일치시켜주는 기능을 하기도 했다. 오늘날 구령붙이는 것과 같은 기능을 했을 것이다.

왕비는 별궁에서 조선시대 최고 신분의 여성을 상징하는 복식 적의(翟衣)를 입고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왕의 책봉문을 받았다. 책비(冊妃) 이후에는 상궁과 궁녀들이 왕비에게 대궐 안주인에 대한 예를 차려 네 번의 절을 올렸다. 이때부터 왕비로 인정되는 것이다. 이날 왕은 최고의 예복인 면류관(冕旒冠)에 곤복(袞服), 상(裳), 중단(中單), 폐슬(蔽膝), 혁피, 패옥, 말석, 규(圭) 등으로 구성된 구장복(九章服)을 입었다.

왕과 왕비도 최고의 복식을 입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을 수행하는 행렬의 모습도 화려했다. 의례복은 형태나 색채가 화려하고 독특한 개성이 나타났고, 일부 여성들은 너울과 같은 가리개를 착용했다. 행렬에는 화려하게 장식된 백마를 비롯해 흑마·갈색마 등 다양한 색깔을 띤 말의 모습도 보인다.

대궐로 들어온 왕비는 그날 저녁에 왕과 함께 술과 음식을 들고 침전에서 첫날밤을 치르는 절차를 거친다. 왕은 대궐의 침전 문까지 나와 왕비를 맞이한 다음 침전의 중앙 계단을 통해 음식상이 차려진 방으로 갔다. 왕과 왕비는 하나의 박을 쪼개어 만든 잔으로 석 잔의 술을 마신 후 왕의 침전에서 첫날밤을 보냈다.

여기까지 진행되면 국왕의 혼례 절차는 사실상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후 왕비에게는 대비나 왕대비 등 왕실 어른들을 뵙고 인사하고, 조정백관과 내·외명부의 여성들로부터 인사를 받는 절차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왕비가 정해진 후에 왕은 중국 황제에게 왕비 책봉을 요청하였다. 조선의 왕비는 중국 황제가 보내준 고명(誥命)을 받음으로써 국내외적으로 지위가 공인되었으며, 국왕혼례도 완결되었다.

혼례가 끝난 후 왕비의 친정에는 당연히 많은 혜택이 주어지는데, 왕비의 아버지는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지고, 어머니는 부부인(府夫人)으로 봉해지게 된다. 그리고 왕비의 본향은 행정단위를 승격 시켜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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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혼國婚 1편

국혼國婚 1편

국혼(國婚)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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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례식은 조선시대 왕실의 최고 축제 중의 하나였다. 왕세자의 혼례식이 일반적이었지만 계비를 맞이하는 경우 숙종, 영조의 경우처럼 왕의 혼례식도 몇 차례 거행되었다. 왕실에서 혼례식이 열리면 총괄 본부인 가례도감이 구성되었고, 총책임자인 도제조는 정승급에서, 부책임자인 도제는 판서급에서 임명했다. 도제 3인 중 2인은 호조판서와 예조판서인데 의식 절차는 예조판서가, 행사에 들어가는 총 비용은 호조판서가 집행했다. 행사의 실무를 맡은 사람은 도청이나 낭청인데 현직에 있는 관리들이 겸직하고 행사가 끝나면 원래 직책으로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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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혼(國婚)은 육례(六禮: 납채. 납폐, 고기, 친영. 부현구고. 묘현)로 진행되었다.

<의혼(議婚) - 사가의 중매를 넣어 혼인을 의논하는 것이다. 이것은 간택 과정이다.>

1. 납채(納采) - 왕이 혼인을 청하는 의식으로, 약혼식이라 보면 된다.

2. 납폐(納幣) - 성혼의 징표로 예물을 보내는 것으로, 폐백을 받는 것이라 보면 된다.

3. 고기(告期) - 왕비 책봉의 날짜를 잡는 것이다.

4. 친영(親迎) - 신랑이 신부집으로 가서 색시를 데리고 오는 것으로, 왕은 직접 친영을 행할 수 없으므로 대신 사자를 보낸다. 친영은 초저녁에 행한다. 따라서 신랑이 신부를 집으로 데리고 와서 혼례를 치르는 시각은 밤이 된다. 밤에 예를 치러야 바로 초야를 치를 수 있다.

5. 부현구고(婦見舅姑) - 첫날밤을 치른 신부가 시부모를 뵙는 의식이다.

6. 묘현(廟見) - 시집온 신부가 사흘만에 사당의 조상님들을 뵙는 의식이다. 왕비의 경우는 당연히 종묘에서 예를 치러야 한다. 왕비는 이외에 중국 황제의 고명장을 받는 절차가 또 있다.

이런 절차는 당연히 일반 사가의 혼례보다 훨씬 복잡하고 화려했다. 육례 중에서도 최고의 의식은 친영으로 오늘날 예식장 등에서 행해지는 결혼식에 해당한다. 친영은 별궁에서 신부수업을 받고 있던 왕비를 궁궐에 모셔오는 의식이다. 조선시대 왕실의 혼례식을 기록과 함께 그림으로 담은 <가례도감의궤(嘉禮都監儀軌)>의 ‘반차도(班次圖)’에는 혼례식 현장 모습이 생생하게 표현돼 있다. ‘반차도(班次圖)’는 ‘지위와 임무에 따라 배치한 그림’이란 뜻이다.

반차도(班次圖)에는 당시의 의장물을 비롯하여 복식, 악기, 말 등이 오늘날의 동영상 자료처럼 생동감 있게 표현되어 있다. 앞부분에는 왕의 행차를 앞에서 인도하는 병력과 함께 왕의 존재를 알리는 둑기(纛旗·쇠꼬리로 장식한 큰 깃발)가 보인다. 혼례식은 크게 왕의 가마가 중심이 되는 어가(御駕) 행렬과 왕비의 가마가 중심이 되는 왕비 가마 행렬로 구성된다.

왕의 행렬 바로 뒤에는 문무백관과 군사 지휘관 등 왕을 수행하고 호위하는 신하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왕의 행렬에 이어 왕비의 행렬이 등장하는데, 왕비 책봉 문서인 교명(敎命)을 담은 교명 요여(腰輿)와, 왕비의 도장인 금보(寶)와 옷을 담은 가마가 먼저 나타나고 이어서 왕비의 가마가 보인다. 왕의 가마는 문을 열어 지나가는 군중들이 왕의 모습까지 직접 볼 수 있게 했으나, 왕비의 가마는 문을 닫아 왕비의 모습을 볼 수 없게 했다. 친영 행렬의 뒷부분에는 뒤에서 왕을 경호하는 후사대(後射隊)가 등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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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질호피羊質虎皮 - 속은 양이고 거죽만 호랑이, 실속은 없이 겉만 화려하다.

양질호피羊質虎皮 - 속은 양이고 거죽만 호랑이, 실속은 없이 겉만 화려하다.

양질호피(羊質虎皮) - 속은 양이고 거죽만 호랑이, 실속은 없이 겉만 화려하다.

양 양(羊/0) 바탕 질(貝/8) 범 호(虍/2) 가죽 피(皮/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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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은 화려하고 속은 보잘 것 없는 경우를 잘 나타내는 우리 속담이 ‘빛 좋은 개살구’다. 비슷한 ‘개 발에 편자’는 옷차림이나 지닌 물건 따위가 제격에 맞지 않는 것을 비유한다. 어느 것이나 본바탕은 빈약한데 겉모양만 꾸미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여기에 부합하는 성어는 양의 머리를 내걸고 개고기를 판다는 羊頭狗肉(양두구육)이 가장 잘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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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바탕은 양(羊質)이고 껍데기만 호랑이(虎皮) 무늬라는 뜻의 이 말도 위엄이 있는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연약한 겉 다르고 속 다른 것을 나타낸다. 바로 表裏不同(표리부동)이고 魚質用紋(어질용문), 蛇心佛口(사심불구) 등도 같은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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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가 쉽고 적합해서인지 여러 곳에서 인용되어 있는 말이다. 먼저 前漢(전한)의 문장가 揚雄(양웅)이 論語(논어)의 문체를 빌려 쓴 ‘法言(법언)’에 나오는 이야기다. 옛날 성이 孔(공)씨인 어떤 사람이 자를 仲尼(중니)라 쓰면 孔子(공자)라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무늬는 맞더라도 바탕은 아니라며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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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의 몸뚱이에 호랑이 가죽을 씌어 놓았더니 모두들 무서워했지만 ‘풀을 보면 여전히 좋아하고 이리를 보면 벌벌 떨었다(羊質而虎皮 見草而說 見豺而戰/ 양질이호피 견초이열 견시이전)’고 했다. 豺는 승냥이 시. 본질은 바뀌지 않은 채 겉보기만 호랑이니 양이 승냥이를 만나면 가죽을 덮어쓴 사실을 잊는 법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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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漢書(후한서)’ 劉焉(유언)전에는 ‘양 몸뚱이에 호랑이 가죽을 씌웠어도 이리를 보면 떨었다(羊質虎皮 見豺而恐/ 양질호피 견시이공)’으로 약간 바꿔 사용됐다. 曹丕(조비)의 ‘與吳質書(여오질서)’에 나오는 ‘개나 양의 자질로 호랑이나 이리의 무늬를 뒤집어썼다(以見羊之質 服狐豺之文/ 이견양지질 복호시지문)’란 표현도 모두 같은 이야기에서 활용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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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로 전 계층서 인기를 끌던 연예인이 자신의 표현대로 ‘쫄딱 망했다.’ 그는 노래뿐 아니라 다양한 그림으로 화가로도 명성을 얻었다. 그런데 그 그림들이 무명화가가 代作(대작)한 것이 밝혀지고 아이디어가 본인 것이니 자신의 독창이라 변명했다가 질타를 받았다. 소유권이 자신에게 있더라도 작품 구입자들은 겉과 속이 다른 작품을 산 것이라 우롱 당한 것이나 다름없다. / 제공 : 안병화(前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무계지언無稽之言 - 근거가 없는 말

무계지언無稽之言 - 근거가 없는 말

무계지언(無稽之言) - 근거가 없는 말

없을 무(灬-8) 머무를 계(禾-10) 갈 지(丿-3) 말씀 언(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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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말을 상대방에 믿게 하려면 참말을 하거나 거짓말을 보태더라도 그럴싸한 근거를 대야 한다. 하나의 거짓말을 하려면 남이 믿을 수 있도록 항상 다른 거짓말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언젠가는 들통이 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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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나 행동 따위가 참되지 않고 터무니없을 때는 莊子(장자)에 나오는 荒唐無稽(황당무계)란 말을 쓴다. 이처럼 유례를 찾을 수 없고 황당한 이야기를 할 때 이 성어를 쓴다. 그러나 제법 믿을 만하게 근거가 있고 진실에 가까운 허언은 가장 혐오스런 거짓말이라고 했으니 어쨌든 "어떤 바보라도 할 수 있는" 참말만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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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의 기록 "書經(서경)"에 이 말이 등장한다. 항상 숭상해야 한다고 尙書(상서)라고도 하는 서경은 三經(삼경)이나 五經(오경)에 꼭 들어갈 정도로 중요시했다. 제일 먼저 나오는 虞書(우서)의 大禹謨(대우모) 편에 舜(순)임금이 禹(우)에게 임금을 맡기를 바라면서 대담하는 내용에서 유래한다. 大禹(대우)는 우가 순의 신하로 있을 때 높여서 부른 말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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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임금이 믿음을 이루고 공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우가 홍수를 다스린 공적에 힘입은 것이라 치하했다. 그러면서 나라일은 부지런하고 집안에서는 검약하며 스스로 만족하거나 뽐내지 않았고 교만하지 않으니 천하에 공을 겨룰 자가 없어 왕을 맡을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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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당부한다. "사람의 마음은 위태롭기만 하고 도를 지키려는 마음은 극히 미약한 것이니 정신을 집중하여 그 중심을 진실하게 잡아야 하오. 근거 없는 말은 듣지 말며, 상의하지 않은 계책은 쓰지 말아야 하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無稽之言勿聽 弗詢之謀勿庸/ 인심유위 도심유미 유정유일 윤집궐중, 무계지언물청 불순지모물용)."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자가 근거 없는 말을 믿고 그대로 따르면 큰 피해가 따른다는 것이다. / 제공 : 안병화(前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좌고우면左顧右眄 - 왼쪽 오른쪽을 돌아보다, 앞뒤를 재고 망설이다.

좌고우면左顧右眄 - 왼쪽 오른쪽을 돌아보다, 앞뒤를 재고 망설이다.

좌고우면(左顧右眄) - 왼쪽 오른쪽을 돌아보다, 앞뒤를 재고 망설이다.

왼 좌(工/2) 돌아볼 고(頁/12) 오른 우(口/2) 곁눈질할 면(目/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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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쪽도 옳은 것 같고 저 쪽도 옳은 것 같다. 내가 가진 것도 좋지만 상대가 가진 것은 더 좋아 보인다. 한 쪽은 포기해야 더 나은 길을 택할 수 있을 텐데 판단을 망설일 때가 많다. 앞서 소개했던 首鼠兩端(수서양단)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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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구멍에서 나온 쥐가 이리 갈까 저리 갈까 판단이 서지 않는 모습을 그렸다. 왼쪽을 돌아보고(左顧) 오른쪽을 살펴본다(右眄)는 이 성어도 앞뒤를 재고 망설이는 것을 가리킨다. 首尾兩端(수미양단), 右盼左顧(우반좌고, 盼은 눈예쁠 반), 左右顧視(좌우고시), 瞻前顧後(첨전고후) 등 같은 뜻의 말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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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을 이끌어야 하는 지도자의 입장에서 이런 태도를 취하면 결단력이 없다고 손가락질을 하겠지만 성어가 처음 사용됐을 때는 뜻이 사뭇 달랐다. 왼쪽을 둘러봐도 오른쪽을 살펴봐도 자기만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는 자신만만한 모습을 형용하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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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魏(위)나라의 曹植(조식)이 吳質(오질, 177~230)이란 사람에게 보낸 편지에서 유래됐다. 曹操(조조)의 아들인 조식은 일곱 걸음 걸으면서 지은 칠보시로 뛰어난 시재를 자랑했고, 오질은 자가 季重(계중)으로 재능과 학식이 뛰어나 열후에 봉해진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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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식이 쓴 ‘與吳季重書(여오계중서)’에 술이 거나한 술자리에서 퉁소와 피리가 뒤에서 연주하면 독수리처럼 비상하여 봉황이 탄복하고 호랑이가 응시할 것이라고 오질을 치켜준다. 그러면서 ‘왼쪽을 돌아보고 오른쪽을 살펴보아도 사람다운 사람이 없다고 할 것이니 어찌 당신의 장한 뜻이 아니겠습니까(左顧右眄 謂若無人 豈非吾子壯志哉/ 좌고우면 위약무인 기비오자장지재)?’하며 극찬한다. 이처럼 주위의 어떤 사람보다 출중하다고 나타내던 말이 이쪽저쪽 돌아보는 눈치 보기로 변했으니 의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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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뒤 재지 않고 함부로 추진하여 일을 그르치는 것보다는 낫지만, 지나치게 신중하여 돌다리도 두드리며 건너는 것도 추진력이 떨어져 답답하다. 국가의 미래를 보고 소신 있게 밀어붙였어야 할 일이 많은데 쥐 눈만 번득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 제공 : 안병화(前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