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3일 수요일

행복과 행운

행복과 행운

행복과 행운

나누다 보면 행복하다.

마음을 나누고

사랑을 나누고

고통을 나누다 보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누군가 곁에 있어 행복하고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어 행복하고

소중한 것을 함께 할 수 있어서 행복하구나

이런 소소함을 놓치지 않을 때

뜻하지 않은 행운도 찾아온다.

네잎 클로버처럼 말이다.

누구나 소망하는 행복과 행운은

스스로 찾아내고 만들어가는 것이다.

작은 행복을 느껴라

작은 울림에 감사하라

뜻밖의 행운이 주변에 대기하고 있다.

- 조미하 -

내가 서 있는 자리는

내가 서 있는 자리는

내가 서 있는 자리는

언제나 오늘입니다

오늘 나의 눈에

보이는 것이 희망이고

나의 귀에

들리는 것이 기쁨입니다

짧지 않은 시간들을 지나 면서

어찌 내 마음이

흡족하기만 할까요

울퉁 불퉁 돌부리에 채이기도 하고

거센 물살에 맥없이 휩쓸리기도 하면서

오늘의 시간을 채워 갑니다

그럼에도 웃을 수 있는 건

함께 호흡하는 사람들이

곁에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내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긍정의 눈을 떠서 시야를 넓히고

배려의 귀를 열어 소통의 귀를 열어 둡니다

그리고 제게 말합니다

오늘 내 이름

불러 주는 이 있어

감사합니다

내가 부르는 소리에

대답해 주는 이 있어

감사합니다

내 곁에

당신 같은 이가 있어

감사합니다

셀 수 없는 수많은 사실이 있지만

이런 이유 하나 만으로도

오늘이 감사합니다

- 성철 스님 -

태실胎室과 태항아리 4편

■ 태실胎室과 태항아리 4편

■ 태실(胎室)과 태항아리 4편

왕실에서 전국 방방곡곡의 명당을 찾아 태실을 조성한 배경에는 풍수사상이 만연해 있던 조선시대에 명당길지를 모두 왕실에서 차지할 의도도 숨어 있었다. 백성이나 왕실이 모두 풍수사상을 신봉하던 시대였던 만큼, 만약 일반 백성이 좋은 길지를 찾아 쓰면, 왕조에 위협적인 인물이 배출된다고 왕실에서는 생각했던 것이다. 이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뜻도 있었다. 각지의 길지를 찾아 태를 묻은 또 다른 의도는 왕실과 일반 백성간의 유대 강화다. 태실을 조성함으로써 도성과 먼 지방의 백성들에게도 왕실이 가깝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고, 거기다가 태실이 조성되는 지방은 군(郡)으로 승격시키고 세금과 노역을 덜어주는 혜택까지 주어 왕족의 태실을 서로 자기 고장에 모시려는 경쟁심을 유발하여 왕실에 대한 충성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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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남아 있는 태실 중에서 그 규모가 가장 크고,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은 ‘사적444호로 지정된 세종대왕 왕자 태실이다. 세종대왕 왕자 태실은 경북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태봉산에 있다. 월항면에 들어서서 크고 작은 몇 개의 고개를 넘어 굽이굽이 산길을 따라 걸으면 저수지를 만나게 되고, 이 저수지를 돌아 오르면 수려한 산세가 사방을 둘러싼 놀라운 풍경을 만나게 된다. 이곳이 태실이 있는 태봉산이다. 태실을 조성하기 위한 풍수학적 대길지라고 할 만한 충분한 조건을 갖춘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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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세종대왕이 낳은 18명의 아들 중 세자인 문종을 제외한 17명의 아들과 원손인 단종의 태를 묻은 곳이다. 세종대왕은 본처인 소헌왕후와의 사이에 태어난 8명의 대군을 포함하여 모두 18명의 왕자를 두었다. 이 중 세자였던 문종을 제외한 왕자들의 태실을 모두 이곳 서진산 자락의 태봉산에 모아 놓았다. 비운의 왕 단종의 태실은 숙부들과 멀리 떨어진 한 구석에 안치되어있다. 세종대왕 왕자태실 아래에는 신라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선석사’가 있다. 이곳에 태실이 조성되면서 태실을 수호하는 절이 되었다.

태실은 조선왕조 초기부터 지방관의 책임 하에 엄격하게 관리되었다. 태봉에 불이 나서 군수를 좌천시켰다거나(중종실록), 태봉 관리를 소홀히 한 지방관을 잡아들인 일(선조실록)이 있는 것을 보면, 왕실에서 태를 안치한 이후에도 지속적인 관리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성계의 태실 역시 옥계부사를 두어 수호케 하고 3년마다 안위제(安慰祭)를 지내는 것이 관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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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실胎室과 태항아리 3편

■ 태실胎室과 태항아리 3편

■ 태실(胎室)과 태항아리 3편

태실은 일반적으로는 태옹(胎甕)이라는 항아리에 태를 담아 안치하지만, 왕세자 등의 경우는 특별히 석실로 만들어 보관하였다. 왕자나 공주가 태어나면 일단 태(胎)를 백자항아리에 넣어 길한 방향에 안치한다. 그 후 길일을 택해 태를 무려 백 번이나 씻고 엽전 한 개를 작은 내항아리 밑바닥에 깔고 그 위에 태를 올려놓았다. 작은 내항아리를 기름종이와 비단으로 밀봉해 좀 더 큰 외항아리 속에 넣었다. 내항아리가 깨지지 않도록 밑바닥과 공간을 솜이나 고운 흙으로 메웠다.

왕자나 공주 등이 태어나면 예조의 관중감(觀衆監)에서 태를 봉안할 장소를 물색하고, 선공감(繕工監)에서는 태를 봉송할 도로를 보수해 이송에 지장이 없게 했다. 당상관으로 안태사를 정해 봉송 책임을 맡게 하고, 배태관은 태를 봉송하는 도중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상황에 대비하게 했다. 그리고 상토관을 두어 태실이 길지(吉地) 인가를 재확인하게 했다. 조선왕조는 전국의 태실지(胎室地)를 1등지에서 3등지까지 분류하고, 아이가 태어나면 원손(元孫)은 1등지, 대군(大君)은 2등지, 옹주(翁主)는 3등지로 구분하여 태를 묻었다. 그 장소를 물색할 때에는 지관이 풍수설에 따라 세 곳의 후보지를 선정하되 왕으로부터 최종 낙점을 받았다.

원손(元孫, 元子)의 탄생은 단순히 왕실의 경사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고, 왕위계승 체계를 엄격하게 지켜오던 조선 왕실에서 종묘와 사직을 지킬 수 있는 국가 전체의 안녕과 존속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따라서 원자 탄생을 기념하기 위해 임금은 원자탄생 당일 즉시 감옥에 갇혀 있는 수인들과 섬에 유배중인 죄인들을 방면하고, 관직을 박탈당한 이들을 재임용하기도 했다.

완벽하게 만반의 준비가 끝나면 고후토제(告后土祭), 태신안위제(胎神安慰祭), 사후토제(謝后土祭) 등의 제례를 치르고 태실지 주위에 금표를 세워 접근을 금하는 한편 채석, 벌목, 개간, 방목 등의 행위를 못하게 했다. 또한 태(胎)를 묻은 뒤 태실의 주인공이 임금의 자리에 오르면 가봉(加封)이란 절차를 거쳐 새로운 석물과 외양을 갖추어 다시 손질하게 된다.

- 4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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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실胎室과 태항아리 2편

■ 태실胎室과 태항아리 2편

■ 태실(胎室)과 태항아리 2편

태의 처리를 위해 아기가 태어나기 전부터 준비를 했으며, 아기가 태어나면 왕실은 물론 민간에서도 태를 항아리에 넣어 땅에 묻었다. 태항아리는 외항아리와 내항아리로 이루어져 있다. 내항아리에 태(胎)를 담은 후, 외항아리 속에 내항아리를 넣어 봉했다. 봉해진 태항아리를 좋은 땅에 묻으며 아기의 건강과 미래를 기원했다. 그럼 좋은 땅이란 어떤 곳일까? 우선 땅이 반듯하고 우뚝 솟아 위로 공중을 받치듯 하고 있어야 했다. 이런 곳을 길지(吉地)라 불렀다.

영아 사망률이 높고 평균수명이 짧았던 당시, 남자 아이는 가문의 대를 이을 존재였고, 태는 생명의 근원으로 간주됐다. 때문에 아기의 태를 몹시도 중하게 여겼던 당시 왕가에서는 왕족의 남아가 태어나면 아기의 태를 아름다운 항아리(주로 백자)에 담아서 길일을 택하여 매장하는 풍습이 전해오고 있다. 이러한 풍습이 왕가뿐 아닌 양반 가정에도 점차 전해지고 나중에는 일반 백성들도 이 풍습을 따랐던 것이다.

다만 구별 되는 것은 왕가나 양반들은 백자나 값나가는 항아리를 사용 했고, 일반 백성은 질 항아리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 풍습은 근대까지도 전해져서 시골이나 산간 지방에서는 가끔 아장사리터라해서 그 흔적이 발견되곤 한다. 보통 서민들이 사용하던 장소는 돌들이 많은 곳을 택했는데, 그곳을 약간 파고 항아리를 묻고 그 위를 돌로 덮었다. 왜 하필 돌로 묻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마도 아기를 묻으면서 아무도 보지 않는 밤이나 새벽녘에 간편하게 작업을 하려고 그랬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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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왕실과 민간의 차이점은, 왕실은 길지를 전문가들이 전국을 대상으로 찾았고, 민간에서는 동네 뒷산이나 마당에 묻었다는 것이다. 왕실에서 왕의 자녀가 태어나면 관상감에서 태항아리를 묻을 좋은 터와 날짜를 따로 잡아서 안태식을 크게 치르고 태를 묻었다. 특히 왕세자의 태는 장래의 국운(國運)과도 관련이 크다 하여 의식에 더욱 정성을 쏟았다. 그러므로 태를 수습하고 태실을 만드는 일은 왕실의 일이기도 했지만 국가적 사업이기도 했다. 이 일을 관할하던 관청이 ‘관상감’이란 곳이고, 이를 관장하는 관리는 ‘안태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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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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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실胎室과 태항아리 1편

■ 태실胎室과 태항아리 1편

■ 태실(胎室)과 태항아리 1편

현대의학은 인간의 유전자 구조를 해독하여 ‘생로병사’의 신비한 순환체계를 밝혀내고 있다. 그리하여 생명공학은 인간의 수명을 연장하고 난치병을 정복하면서 현대과학을 한층 더 인간 생활에 접목하여 꽃을 피우고 있다. 각국은 생명공학 기술을 선점하기 위해 무한경쟁을 벌이고 있다. 생명공학 연구에서 핵심이 되는 것이 바로 ‘줄기세포’이다. 몇 년 전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황우석박사 사건에서 보았듯이 인간의 생로병사의 키를 쥐고 있는 ‘줄기세포’ 연구는 인간의 미래를 크게 바꾸어놓을 수 있는 분야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이 줄기세포를 우리의 선조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소중히 다루고 보관하였다는 놀라운 사실.

태실(胎室)이란 태를 묻는 곳을 말한다. 전국 곳곳에는 태봉, 태실, 태장, 태묘라는 지명이 더러 보이는데, 산모가 태아를 출산한 후 나오는 태반을 묻은 장소라서 얻은 이름이다. 양반 사대부집 자녀들의 태를 묻은 곳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이 조선시대 왕손들의 태를 묻은 곳이다. 태실(胎室) 문화는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우리의 독특한 문화이다.

우리나라에는 아기의 태를 항아리에 담아 명산에 묻는 풍습이 있었다. 그 외에도 아들이 전쟁에 나가거나 식구 중에 먼 길 떠나는 이가 있으면 머리카락 몇 가닥과 손톱, 발톱을 깎아서 한지에 곱게 싼 다음 주머니에 넣어두었다가 식구가 집으로 무사히 돌아온 뒤 태워버리는 풍습이 있었다. 만약 죽게 되어 시신을 수습하지 못할 때는 보관했던 신체일부를 대신 묻어 장사를 지내곤 했다.

우리 선조들의 태아에 대한 태중교육 즉 태교는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 어미는 아기를 잉태하기 전 천지신명과 삼신할머니께 좋은 아기를 점지해 달라고 간절하게 기원했으며, 잉태를 하면 정성껏 태교를 했다. 뱃속의 아기와 어머니를 이어주는 생명줄- ‘태(胎)’는 새 생명을 창조하는 영양 공급원이며, 하늘에서 점지하신 자식을 만나게 되는 인연의 연결이었다. 따라서 우리 조상들은 아기가 태어난 후에도 태를 아주 소중하게 다뤘다.

아기 배꼽에서 떨어져 나온 탯줄을 한지에 곱게 싸고 명주실로 꼼꼼히 묶은 뒤 안방 높은 곳에 걸어 두었다가 아이가 아프면 건조된 태를 잘게 썰어 달여 먹이기도 했다. 그만큼 태(胎)가 지닌 생명력에 대한 믿음이 각별했던 만큼 좋은 항아리에 태를 담아 좋은 땅에 묻는 풍습이 정착할 수 있었다.

태호는 아기의 태를 담아서 매장했던 항아리를 말하며, 아기의 태뿐 아니라 아기가 죽으면 아기의 시체를 담아서 매장하는 아기무덤으로도 사용했다. 아기가 죽으면 아기 시체를 관에다 넣을 수는 없으니까 간단하게 아기의 시신을 묻는 데 사용했다. 이 무덤을 산간 지방에서는 아장(아기를 장사한곳)사리라고도 하였다.

-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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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녀宮女 4편

■ 궁녀宮女 4편

■ 궁녀(宮女) 4편

입궁 연령은 지밀이 가장 어려 4∼8세, 침방·수방이 6∼13세, 그 밖은 12∼13세가 관례였다. 원칙적으로 신분, 조상, 건강 등의 까다로운 조건으로 선발하였다. 그러나 대개 연줄과 세습이라 할 수 있으며, 친인척을 들여놓는 경우가 많았다. 궁녀의 선출은 원칙적으로 10년에 한번이었지만 예외도 있었다. 지밀나인의 경우 조건이 까다로워서 상궁들이 두세번씩 선을 보러 나갔다. 왕실에선 좋은 출신의 궁녀를 원하여 양가에서 강제로 차출해 수차례 사회적 문제가 되기도 했다. 10세 이상의 딸 가진 집안에서는 서로 다투어 혼인을 시켜 조혼의 풍습까지 생겼다. 조선 후기 경종 3년에 이를 금하는 어명이 내려졌고, 영조 22년(1746년)에 이르러 양녀(良女) 차출을 금지하는 제도가 세워져 양인 여성을 궁녀로 만들었을 경우 60대의 장형과 1년의 도형에 처해졌다.

근무는 대개 하루씩 당번과 비번을 교대로 했다. 궁궐내의 모든 궁녀들은 입궁(入宮)에서 퇴출(退出)까지 원칙적으로 종신제였다. 왕의 직계 및 그 배우자 외에는 후궁도 궁중에서 죽을 수 없었으므로, 늙고 병들면 궁녀는 궁궐을 나가야 했다. 가뭄으로 궁녀 방출이 결행될 경우(단, 젊은 궁녀), 모시고 있던 상전이 승하했을 경우에도 중도에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궁궐에서 나온 뒤에도 혼인이 금지되는 등 행동에 제약을 받았다. 결국 궁녀 제도는 절대군주국가 시기의 희생물이라고 할 수 있다.

궁궐에서 일하는 궁녀는 일단 모두가 ‘왕의 여자’인 셈이다. 그러므로 행동이 바르고 얼굴이 예뻐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궁녀라고 해서 다 예쁘게 생긴 것은 아니었다. 조선 시대에는 ‘고수대’라고 하는 궁녀가 있었는데, 고수대는 예쁘기는커녕 흉물스러울 정도로 덩치도 크고 못생겨서 고수대를 처음 본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러나 고수대는 오히려 못생긴 얼굴 때문에 궁녀로 뽑힐 수 있었다. 고수대와 같은 궁녀를 액막이 궁녀라고 하는데, 나쁜 기운이 궁으로 들어오다가 못생긴 액막이 궁녀를 만나면 되돌아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액막이 궁녀가 나쁜 기운을 쫓기 위해 특별히 어떤 일을 한 것은 아니고, 다른 궁녀들과 마찬가지로 부엌에서 불을 때거나 물을 긷는 일을 했다.

늙고 병들어 궁에서 나온 궁녀들은 함께 모여서 서로 의지하며 살았으며, 종교를 통해 외로움을 달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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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녀宮女 3편

■ 궁녀宮女 3편

■ 궁녀(宮女) 3편

같은 상궁이라도 경력에 따라 품계가 달랐고, 또 같은 품계라 할지라도 소속 부서의 격에 따라 지위가 달라진다. 상궁은 다음과 같이 구분되었다.

후궁과 승은상궁을 제외한 모든 궁녀들의 가장 우두머리에 해당하는 상궁이 제조상궁이다. 큰방상궁이라고도하며, 학식과 지도력이 모두 뛰어나야 했다. 제조상궁은 중전이나 대비마마와 직접 대면을 할 정도로 영향력이 막강했다. 많은 궁녀들 중 가장 어른으로 왕명을 받들고 내전(內殿)의 재산 관리를 담당했다. 부제조상궁은 내전 금고(창고, 물품)를 관리하는 상궁인데, 아리꼬阿里庫상궁으로도 불렀다.

대령상궁이라고도 불리는 지밀상궁은 국왕이나 왕비, 대비, 후궁 등의 윗전을 옆에서 직접 모시는 상궁이다. 왕의 측근에서 항상 그림자처럼 시위(侍衛)했다. 궁녀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었던 곳이기도 한데, 그것은 아무래도 왕의 눈에 뜨이기 쉬운 위치에 있으므로 신분이 상승될 수 있는 로또라도 당첨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왕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기 때문에 얼굴도 예뻐야 하고, 몸가짐도 항상 바르게 해야 했던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보모상궁은 왕자와 공주의 육아를 맡는 상궁이다. 이들 중에서 왕세자의 보모가 가장 격이 높았다. 시녀상궁은 상감마마나 중전마마의 비밀스런 서적을 관리하고, 문서를 작성하고, 서찰을 쓰고 정리하는 일을 했다. 중전이나 대비, 왕대비의 친정집에 특사로도 가고, 때론 어명을 받아 상감마마 행차에 동행하기도 한다. 궁중 의식이나 잔치 때 왕을 비롯한 왕비·왕대비 등의 인도와 진행을 담당했던 시녀상궁(侍女尙宮)은 서책 관리와 국상(國喪) 때 곡읍(哭泣)을 담당하기도 했다. 궁녀들의 상벌을 담당하고, 감시병 구실을 겸한 두려운 존재로 감찰상궁이 있다.

궁녀들은 궁중에서 일하는 대가로 그 지위에 따라 차등있게 월봉(月俸)과 생활필수품을 지급받았으나, 그 액수가 고정된 것은 아니었고 재정형편에 따라 감해지기도 하는 등 유동적이었다. 식생활은 궁중에서 해결되었으므로, 이러한 보수는 친가 부모·형제들에게 보탬이 되었다. 궁녀는 사용자인 정부에 노무를 제공하고, 임금과 복지를 경제적 보상으로서 받는 임금노동자인 셈이다.

- 4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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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녀宮女 2편

■ 궁녀宮女 2편

■ 궁녀(宮女) 2편

궁녀의 선출 방법은 특별히 정해져 있지 않았고, 일반적으로 10세 전후에 애기나인으로 궁에 들어왔다. 왕과 왕비의 시중을 담당하는 지밀의 경우에는 4∼8세에 입궁했으며, 의복을 짓고 수를 놓는 침방과 수방도 상대적으로 입궁 시기가 빨라 6세에 궁으로 들어온 경우도 있었다. 궁에 처음 들어온 애기나인은 궁중 생활에 필요한 훈련을 받은 뒤 18세 정도가 되면 정식 나인이 되었다. 나인이 된 뒤에는 15년이 지나야 상궁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데, 만약 왕의 승은을 입게 되면 그 기한을 채우지 않고도 상궁이 될 수도 있었다. 이런 궁녀를 승은상궁(承恩尙宮)이라고 했는데, 이들은 다른 업무는 하지 않고 왕의 시중만 담당했다. 그리고 이들은 왕의 아이를 낳기 전까지는 궁관인 상궁에 머물러 있지만, 아이를 낳은 뒤에는 내관인 종4품 숙원(淑媛) 이상으로 봉해지는 것이 상례였다.

궁녀는 입궁시기와 소속부서에 따라서 격이 달라진다. 그들 나름대로 위계질서가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궁녀의 업무는 지밀(至密), 침방(針房), 수방(繡房), 소주방(燒廚房), 생과방(生果房), 세답방(洗踏房), 세수간(洗水間) 등으로 구분된다. 왕과 왕비의 시중을 담당하던 몸종격인 지밀(至密)의 지위가 가장 높았다. 지밀(至密)은 ‘매우 은밀하고 비밀스럽다’ 는 뜻으로 임금이 거처하던 대전(大殿)이나 왕비의 내전(內殿)을 가리키는 말이다. 침방과 수방은 궁궐에서 쓰이는 의복을 만들고 수를 놓았으며, 소주방은 음식을 담당하는 수라간으로 궁녀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왕의 건강이 나빠지거나 배탈이 나기라도 하면 수라간 궁녀들은 그 책임이 막중했다. 생과방은 음료와 과자 등을 만들었으며, 세답방은 빨래와 염색, 다리미 등 옷의 손질을 담당했다. 세수간은 세숫물과 목욕물, 타구(唾具:침뱉는 그릇)와 변기 등을 담당했다. 일반 개인 가정으로 비교해보면, 지밀나인은 몸종이고, 침방·수방나인은 침모(針母), 소주방과 생과방은 식모인 셈이다. 세수간이나 세답방을 담당하는 궁녀들이 가장 하급인 무수리이다.

궁녀는 입궁 후 15년이 되면 정식 나인이 되었다. 남색 치마에 옥색 저고리, 머리에는 개구리첩지를 단 제복이 일생 동안 그들의 유니폼인 셈이다. 나인이 된 뒤 다시 15년이 경과되면 상궁으로 승격했으므로, 가장 빠른 4∼5세 입궁을 기준으로 할 경우에 35세 이후라야 상궁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20대의 상궁도 있을 수 있는데, 임금의 승은을 입어 상궁으로 봉해진 승은상궁이다. 나인 출신이므로 당연히 상궁들 중에서 나이가 어리다. 그러나 신분은 상궁임에도 복식은 상궁의 복장이 아닌 후궁의 복장을 입게 된다. 다른 상궁과는 달리 승은상궁은 왕의 승은을 입는 그날 바로 상궁이 되는 특별상궁이다.

임금의 승은을 입은 터라 다른 상궁들이 함부로 대할 수 없다. 일단 승은을 입게 되면 나인 시절 부여되었던 모든 직무에서 벗어나게 되나, 한번 승은을 입고는 왕이 다시 찾지 않아 외로운 나날을 보내던 상궁들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승은상궁은 왕의 아기를 갖게 되는데, 이들이 왕의 아기를 가진다면 내명부 종4품 숙원(淑媛)의 후궁이 될 수 있었다. 대표적 일례로 숙종의 아들인 경종을 낳은 희빈 장씨와 숙종의 아들인 영조를 낳은 숙빈 최씨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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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녀宮女 1편

■ 궁녀宮女 1편

■ 궁녀(宮女) 1편

궁녀는 궁중에서 일하는 여성관리女官를 일컫는 말로서, 왕족을 제외한 궁중에 있는 모든 여인들이 이에 해당된다. 궁녀는 고대 사회부터 존재했지만, 고려시대 이후에는 궁중 생활의 규모가 커져 법으로 품계와 명칭을 정해서 운영되었다. 하지만, 고려시대의 궁녀는 명확한 제도를 알 수가 없고, 입궁 경위나 절차도 분명하지 않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태조6년 조준(趙浚)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규정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1428년(세종10년)에는 유교 이념을 바탕으로 궁내의 모든 여관(女官)들을 내명부(內命婦)로 품계·명칭·직위까지를 명시하게 했으며, 〈경국대전〉에서는 이를 수정·보완하여 정(正)·종(從)의 18관등으로 그 지위와 역할이 더욱 체계화되었다. 정5품의 상궁(尙宮)에서 종9품인 주변궁(奏變宮)까지의 궁관으로서 궁중의 살림살이와 왕의 가족들에 대한 시종의 업무를 맡았는데, 후궁(後宮)이 될 경우는 정1품 빈(嬪)부터 종4품 숙원(淑媛)의 품계가 내려진다.

일반적으로 궁녀는 정5품에서 종9품의 내명부 궁관(宮官)으로, 각자의 업무를 담당하는 여관(女官)을 가리키지만, 넓은 의미의 궁녀에는 비자, 무수리, 각심이, 방자, 의녀 등 궁중에서 일하는 여성들을 모두 포함한다. 이들은 대개 상궁, 나인의 시중을 들거나 궐내의 하찮은 일을 하였다. 이들은 품계도 받지 못했고 대우 또한 일반 궁녀들에 비해 매우 좋지 않았다.

수사(水賜)라고도 불린 무수리는 불때기와 물긷기 등의 막일을 담당하는 여성들로 궁궐 안에 머무르지 않고 출퇴근하였다. 각심이는 상궁이나 나인의 처소에서 막일을 하던 여성들로 방자(房子)·비자(婢子)라고도 했다. 이들은 무수리와 달리 궁궐에 머무르며 생활했다. 의녀(醫女)는 궁중의 의약을 맡아보던 내의원(內醫院)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간단한 진맥이나 침술 등을 배웠으며 출산 때에는 조산부 역할을 했다. 조선 시대에는 궁녀가 5백~6백 명쯤 있었고, 달마다 직급에 따라 쌀이나 옷감을 급료로 받았다. 그러니까 궁녀는 나라에서 월급을 받는 공무원이라고 할 수 있다.

궁녀의 신분적 등급은 견습나인(애기나인) → 나인 →상궁의 세 종류로 나뉘며, 그 세 종류 가운데에서도 입궁 햇수와 소속 부서에 따라 신분이나 대우에 차등이 있었다. 애기나인은 아직 정식 나인이 되지 않은 어린 견습나인이다. 지밀(至蜜:임금의 침실)과 침방(針房:바느질 하는 곳), 수방(繡房:수놓는 곳)의 애기나인은 머리카락을 두 가닥으로 갈라서 땋아 말아 올린 생머리를 하였기에 ‘생각시’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견습나인은 무려 15년이나 궁중 법도, 한글, 천자문, 대학, 소학 등 다양한 교양을 익히면서 훈련을 받아야 나인이 될 수 있었다.

-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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