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4일 목요일

백범 김구 1편

■ 백범 김구 1편

■ 백범 김구 1편

1919년부터 1945년까지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우리나라의 공식 정부로서 활동을 이어 나갔다. 비록 나라의 주권은 없었으나, 조약 자체가 불법이었기에 백범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원들은 해방의 그날까지 악조건 속에서도 그 명맥을 이어갔다. 1940년, 백범은 미주 교포들이 보내준 자금으로 임시정부의 정규국군이 광복군을 창설하고 일본제국주의와 나치 독일에 대항해 선전포고를 한다.

광복군은 중국 대륙 각처에서 중국군과 함께 활동한 것을 비롯해, 1943년 8월 인도 미얀마 전선에 공작대를 파견하여 1945년 7월까지 2년여 동안 영국군과 함께 대일항전을 전개했고, 미국의 전략첩보기구인 OSS와는 독수리작전이란 이름으로 공동작전을 추진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광복군의 참전은 자주독립을 위한 중요한 활동이었다. 드디어 미국과 함께 국내진입작전을 실행하기로 합의했으나,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으로 이는 시작도 전에 좌절되고 말았다.

이는 우리 역사에서 매우 안타까운 순간이다. 왜냐하면 전쟁에서의 패전국과 승전국은 희비가 완전히 뒤바뀌는데, 일본이 패망을 했다면 일본에 대항해 전쟁을 벌인 국가들은 승전국으로서 국제사회에서 목소리를 높일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백범의 이런 걱정은 현실로 드러났고, 한반도는 광복 후 우리의 정부가 아닌 미국과 소련에 의해 38도선으로 경계가 나뉘어지고, 스스로 힘을 키울 때까지 미국과 소련이 통치해야 한다는 신탁통치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만약 승패를 떠나 우리의 광복군이 한반도로 진격해 일본군과 전쟁을 했다면 우리는 세계 2차 대전의 떳떳한 승전국 반열에 올랐을 것이고, 일제가 물러간 한반도에 우리의 힘으로 태극기를 꽂을 수 있었을 것이다. 1945년 8월 조국이 광복되자 백범은 서둘러 귀국하고자 하였으나, 미국은 9월7일 맥아더 사령부 포고 1호를 통해 미군정을 선포하고 임시정부 요인들은 개인 자격으로서 귀국하기를 허용했다. 이는 미군정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정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목숨을 걸고 30여 년 동안 해외에서 조국 독립을 위해 애쓴 우리 정부를 부정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임시 정부 내부에서는 크게 분개하였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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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島山 안창호 2편

■ 도산島山 안창호 2편

■ 도산(島山) 안창호 2편

다시 미국으로 간 도산은 1912년 해외 한인사회를 조직적으로 통합하여 한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이익을 증진시킬 중추기관으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발족하였다. 대한인국민회는 미 국무성과 캘리포니아주 정부로부터 자치단체의 자격과 권위를 인정받아 한인사회의 자치와 권익을 신장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로 인해 당시 유학생과 망명 애국지사들은 여행권을 갖지 않고도 대한인국민회의 보증으로 입국이 가능하였고, 영주권을 발급받을 수도 있었다.

도산이 상해에 도착했을 때 이미 상해에는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있었다. 임시정부 청사를 마련하고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서리로 업무를 시작한 도산은 독립운동의 전략을 세우고 헌법과 법률 제정을 검토했다. 또한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대한미국적십자회, 임시사료편찬위원회를 설립하는 등 다방면에서 사업을 전개하였다.

중국과 미국을 오가며 국외 독립활동에 매진한 도산은 1932년 4월29일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연류되어 체포되고 말았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그는 심문 조사 후 4년 실형을 언도받았다. 일제의 모진 고문에도 도산은 꿋꿋이 버텨 출옥을 했고, 이후에도 허약해진 몸을 이끌고 일본 경찰의 감시와 방해를 무릎 쓰고 전국을 순회하면서 강연을 다녔기도 했다. 하지만 이때 도산은 모든 활동을 금지당한 상태였기 때문에 결국 다시 일제에 체포되어 서울 종로경찰서에 수감되었다.

이후 재판을 거쳐 다시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되었으나 위장병과 폐결핵 증세로 위급한 상태에 빠지자 조선총독부에서는 급히 도산을 보석시켜 경성제국대학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당시 도산은 위하수증·간경화·만성기관지염 증세로 응급치료를 받았지만 친형인 안치호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1938년 3월10일 60세의 나이로 서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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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島山 안창호 1편

■ 도산島山 안창호 1편

■ 도산(島山) 안창호 1편

많은 애국지사들이 오직 조국의 광복을 위해 피땀을 흘리고 목숨을 바쳤다. 이런 독립투사들 중에서 민족의 지도자, 민족의 스승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한 명이 바로 도산 안창호이다. 도산 안창호는 확고한 사상과 신념을 바탕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해 나갔던 인물이다. 나라를 잃은 슬픔과 분노에 감정적으로만 대응한 것이 아니라, 독립운동의 방법과 이론을 체계적으로 세우고 꾸준히 실천하며 민족을 위한 비전을 제시한 지도자였다. 특히 도산이 지녔던 사상은 다른 사람의 이론이나 지식에서 모방한 것이 아닌, 도산이 직접 독립운동과 투쟁의 삶을 통해서 몸소 창조해 낸 것이라는 데 큰 의의가 있다.

어린 시절 안창호는 16세 때까지 서당과 집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청일전쟁 당시에는 평양에서 전투가 벌어져 주민들이 피난하고 명승고적과 가옥들이 파괴되는 것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이를 지켜보며 우리 민족의 불행은 우리에게 힘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이 무렵 기독교에 입교(入敎)했다. 도산은 기독교를 통해 서구의 자본주의를 접하게 되었고 약육강식의 논리가 세계 질서를 지배하고 있다는 현실을 배웠고, 철저한 자기비판 의식을 통해 우리 민족도 실력 양성, 즉 ‘힘’을 길러야 함을 깨달아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그리고 미국으로 가는 뱃길에서 일몰 때 우뚝 솟은 하와이 섬의 웅장한 모습을 보고 감격한 도산은 이때 자신의 호를 직접 ‘도산(島山)’ 이라고 지었다.

당시 샌프란시스코에는 약 20여 명의 한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100년 전 미국의 한인들은 노예와 같은 생활을 했다고 한다. 도산은 이런 동포들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학업보다는 동포들의 생활 개선지도가 더 시급함을 깨달았고, 교민신문을 발행하는 등 다양한 사업을 펼쳤다. 그러나 1907년 국내 정세가 점차 악화되자 귀국하게 된다. 귀국 후 도산은 신민회(1907년 안창호가 만든 비밀 결사단체), 청년학우회(청년운동단체) 등을 결성하고 국권회복을 위하여 교육, 언론, 실업, 학회 등 다양한 방면에서 구국운동을 전개하며 군대교육과 애국교육을 실행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리고 한국 최초의 주식회사 형태로 평양 마산동에 회사를 설립하고 민족 산업을 육성하여 경제 발전을 이루고자 했다.

안중근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이 있고 나서 도산은 일제로부터 더욱 더 경계와 감시 대상이 되었다. 이에 도산은 망명을 결심하게 된다. 도산이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때는 1910년 8월 24일 경으로 러시아에서 한일병합 소식을 전해듣게 된다. 이는 전 세계에서 한국이란 나라가 없어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러시아에 체류하는 짧은 기간 동안 도산은 러시아에 사는 한인들의 당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러시아 당국과 교섭을 통해 한인의 권리 획득 활동을 했다. 그런데 일제는 ‘안창호는 블라디보스토크 재류 한인들의 수뇌이며, 한인들이 기획하는 모든 일들에는 안창호가 관련되었다’ 고 보고하고 그에 대한 체포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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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희망 청년 윤봉길 2편

■ 아시아의 희망 청년 윤봉길 2편

■ 아시아의 희망 청년 윤봉길 2편

윤봉길 의사는 미리 봐 두었던 뒤편 오른쪽 군중 속에 들어가 투척 장소와 시간을 맞추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전 11시 50분 경, 윤봉길은 도시락으로 위장한 폭탄을 땅에 내려놓고 어깨에 메고 있던 수통의 폭탄 덮개를 벗기고 가죽 끈이 붙어 있는 채로 2m 가량을 전진하여 17m 정도 떨어진 중앙 단상 위로 힘껏 투척을 했다. 폭탄은 노무라와 시게미쓰의 면전에 명중하면서 폭발했고, 식장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윤봉길은 재빨리 다음 폭탄을 꺼내 들었다. 자폭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안전핀을 뽑으려는 순간, 주변의 일본군들에게 잡히고 말았다.

그의 의거로 총사령관 시라카와는 전신에 탄편을 맞아 신음하다 결국 사망했고, 해군 총사령관인 노무라는 실명을 하였으며, 제9사단장 우에다는 다리를 절단하는 등의 치명상를 입었다. 현장에서 체포된 윤봉길은 감당하기 힘들 만큼 고통스러운 취조와 고문을 받았다. 6개월에 가까운 취조와 고문으로 윤봉길의 심신은 한계를 드러냈고, 11월16일 윤봉길 의사를 태운 배는 상해를 떠나 일본 고베로 향했다.

윤봉길은 1932년 12월18일 가네자와 형무소로 옮겨졌고, 다음날인 12월19일 7시30분 무장한 헌병들이 그를 교외의 미고우시 공병작업장으로 끌고 갔다. 일본 헌병은 윤봉길의 두 팔을 십자형 기둥에 묶었고 그의 눈을 흰 천으로 가렸다. 헌병의 총탄은 윤봉길의 이마를 관통했다. 25살 청년 윤봉길의 고귀한 순절의 순간이었다. 일본군은 그의 죽음을 확인하고 그곳에서 3km 떨어진 가나자와시 공동묘지 한 모퉁이에 그를 암매장하고 봉분임을 알지 못하게 위장했다. 만약 그의 시신을 한국으로 보내게 되면 3·1운동 때처럼 분명 한국인들을 결집시키는 원인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대 죄인이라도 처형 후에 유족의 요청이 있으면 인도를 하든가 그렇지 못하면 형무소 내에 적어도 묘표를 세우도록 그들의 육군형법에도 명시되어 있었지만, 윤봉길 의사의 경우는 아무도 모르게 암매장을 했던 것이다. 윤봉길 의사의 유해는 일본 패전 후 환국한 백범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주도한 ‘윤봉길의사 유해 봉환단’에 의해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유해발굴단은 1946년 3월2일부터 200명이 넘는 인원으로 3일 동안 작업한 끝에 모닥불을 피워놓은 묘지관리소 건물 바로 아래 길 한복판에서 그의 유해를 발굴하였다. 십자가 형틀이 나오고 나무뿌리와 엉킨 유골이 발견되었다. 윤봉길 의사의 유해는 그해 5월21일 이봉창, 백정기의사의 유해와 함께 부산에 환국하여 부산공설운동장에서 합동추도식을 올리고, 같은 해 7월7일 삼의사(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국민장으로 서울 효창공원 의사묘역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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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희망 청년 윤봉길 1편

■ 아시아의 희망 청년 윤봉길 1편

■ 아시아의 희망 청년 윤봉길 1편

윤봉길 의사는 안중근 의사 등과 함께 조국의 독립과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목숨을 바친 대표적 인물이다. 윤봉길은 어려서부터 우리 민족은 깨어야 살 수 있다는 생각으로 농촌계몽운동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일제의 야욕이 노골화되던 1931년 24살의 윤봉길은 더욱 큰일을 하기 위해 상해로 건너가 백범 김구를 만나게 되었다.

1931년 당시 한국을 무단통치한 일본 제국주의의 다음 목표는 중국의 만주지역이었다. 이를 위해서 그들에게는 전쟁을 일으킬 명분이 필요했다. 그래서 몰래 남만주지역의 철도 선로를 의도적으로 폭파하고, 이를 중국군 소행이라며 몰아붙이고 전쟁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를 ‘만주사변’ 이라고 한다.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1932년에는 중국인을 매수해 승려를 사살하고, 이를 빌미로 중국군과 전투를 벌인 ‘상해사건’을 일으켰다.

이러한 불안한 국제 정세 속에서 윤봉길은 조국의 독립과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했다. 1933년 4월 거사를 4일 앞두고 윤봉길은 한인애국단에 입단하는 선서식을 했다. 선서를 마친 윤봉길은 임시정부 재무장 김구와 나란히 기념촬영을 했다. 이렇게 기념촬영을 하는 이유는 이런 거사가 단순한 개인적 충동에 의한 행동이 아니라 대한독립을 위한 노력임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1932년 4월 29일, 아침 식사를 마친 윤봉길은 자신의 손목에 찬 시계를 풀어 백범에게 건냈다. “선생님, 이 시계는 일전에 선생님께서 주신 돈으로 산 것입니다. 저는 이제 좋은 시계가 필요치 않으니 제 시계와 바꾸시지요.” 김구의 배웅을 받으며 윤봉길은 택시에 몸을 실었다.

오전 7시 50분경, 윤봉길은 공원 안으로 들어가 미리 정해 두었던 지점에 이르러 거사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홍구공원 안은 상해 거주 일본인과 일본군은 물론이고, 각국 사절과 각계 초청자 등 2만 명이 넘는 인파가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행사 식장 뒤편에는 기마 헌병이 단상을 호위했고, 그 뒤로는 수 미터의 간격을 두고 경비 병력이 이중 삼중으로 삼엄하게 경계를 하고 있었다.

기념식장 단상 위에는 일제의 사령관 시라카와 대장과 함대 사령관 노무라 중장이 중앙에 자리를 잡았고, 좌우로 일제 제9사단장, 주중 공사, 주중 총영사 등 7명의 상해사변 원흉들이 착석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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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도 감동한 안중근의사 2편

■ 일본인도 감동한 안중근의사 2편

■ 일본인도 감동한 안중근의사 2편

1910년 3월26일은 안중근의사의 사형이 집행되는 날이었다. 아침 일찍 안중근의사는 어머님이 보내주신 하얀 명주 한복으로 갈아입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고, 간수(看守) 치바 토시치는 부동자세로 그의 감방을 지키고 있었다. 치바는 일본군 헌병이면서 안중근을 감시하는 간수이기도 했다. 그는 처음에는 다른 일본인들처럼 일본인의 우상인 이토를 살해한 살해범인 안중근에 대해 분노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안중근의사가 단순한 살해범이 아닌 진정한 동양의 평화를 생각하는 굳은 의지와 높은 인품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존경하며 깊은 우정을 나누게 되었다.

사형 당일 날, 안중근은 치바 토시치에게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나라 위해서 몸을 바침은 군인의 당연한 본분이다)’라고 유묵(遺墨)을 써서 선사했다. 치바 토시치는 군대를 제대하고 고향 센다이에서 철도원으로 일하면서 안중근의사의 위패와 안중근의사가 생을 마감하면서 선물한 그 유묵(遺墨)을 모셔놓고 평생 그의 명복을 빌어줬다고 한다. 그리고 1980년 이 유묵은 안중근의사 기념관에 기증되었다.

형장에 도착한 안중근은 검찰관, 변호인 등이 입회한 가운데 교수대의 계단을 올랐다. 교수대에 오른 안중근은 잠시 마지막 기도의 시간을 갖는다. 그리고 사형집행문의 낭독이 끝나고 집행부는 최후의 유언을 묻는다. ‘나의 이 거사는 동양 평화를 위하여 결행한 것이므로 오늘 임검한 일본 관헌들도 앞으로 한일 화합에 힘써 동양의 평화에 이바지하기 바랍니다“ 이것이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3월26일 오전 10시4분 예정대로 사형은 집행됐고, 10시15분에 안중근의사는 순국했다. 검시가 끝나고 안중근의 유해는 작은 통 속에 넣어져 여순감옥 묘지에 매장되었다. 형제들의 간곡한 탄원과 절규에도 불구하고 안중근의사의 유해는 유족에게 인도되지 못했다. 일제는 안중근의사의 유해가 한국인의 손에 넘어가면 분명 그의 묘소가 독립운동의 성지가 될 것이고, 이로 인해 많은 저항이 따를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이를 거부한 것이다.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안중근의사의 유해는 정확한 소재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국권이 회복되면 고국으로 반장(返葬)해 달라는 유언을 아직도 지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효창공원에 가면 김구 선생의 주선으로 만들어진 삼의사 묘가 조성되어 있다. 그러나 무덤의 수는 4개인데 그 곳에 영면한 분은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의사 뿐이다. 왼쪽에 비석 없는 무덤이 바로 안중근 의사의 빈 무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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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도 감동한 안중근의사 1편

■ 일본인도 감동한 안중근의사 1편

■ 일본인도 감동한 안중근의사 1편

손가락 마디가 잘린 안중근의사의 손도장은 오늘날 우리에게 태극기만큼 강한 애국심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안중근은 용맹한 군인이며 동시에 위대한 사상가였다. 그리고 이를 실천하려는 실천가였다.

1909년 3월 연해주의 한 마을, 안중근을 비롯한 몇몇의 청년들은 단지(斷指)동맹 취지문을 읽어나갔다. 안중근과 11명의 동지들은 손가락 한 마디를 절단하고 그 피로써 태극기에 네 글자를 써내려갔다. 안중근은 그해 10월,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대장 대신 코코프체프와 만나 동양 침략정책을 협상하기 위해 북만주를 시찰한다는 소식을 듣고 거사 일정을 잡았다.

마침내 1909년 10월26일 오전 9시20분 삼엄한 경계망을 편 하얼빈역에 특별 열차가 도착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열차에서 내려 도열한 의장대를 사열하고 각국 사절단 앞으로 나가 인사를 받기 시작했다. 안중근의사는 마음속으로 ‘조금만 더 가까이.....’를 외치며 러시아 의장대 뒤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토가 사열을 마치고 일본인 환영단 쪽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두어 걸음을 옮겼을 때, 안중근의 오른손에 쥐어진 블로닝 권총에서 발사된 3발의 총탄은 정확히 그의 복부에 명중했다. 순간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러시아 관헌대는 그를 덮쳤다.

수행원들은 곧바로 이토를 침대로 옮기고 응급치료를 했다. 탄환은 몸을 관통하지 않고 모두 몸에 박힌 상태였다. 한 발은 오른팔을 뚫고 왼쪽 가슴에, 두 번째 총탄은 가슴과 배를 뚫고 왼쪽 갈비뼈 밑에, 그리고 세 번째 총탄은 왼쪽 복부에 박혔다, 피격 30분 후인 오전 10시 이토 히로부미는 그렇게 31세 청년 안중근에 의해 68세의 생을 마감했다.

일제는 현장에서 체포된 안중근의 신병을 국제법도 무시한 채 신속하게 처리했다. 안중근의사는 수차례의 재판 과정에서도 논리 정연한 언변으로 일본인 재판관들을 당황시켰다고 한다. 이는 단지 말을 잘해서가 아니라 정확한 사상과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1910년 2월 안중근의사는 사형 선고를 받았다. 순국 하루 전인 3월25일 안중근의 두 동생인 안정근과 안공근 형제가 마지막 면회를 왔다. 삼형제는 잠시 기도를 한 뒤 서로의 손을 꼭 잡았다. 두 동생들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안중근의사는 어머니와 부인, 가족들을 위한 유서를 동생에게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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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을 세계에 알린 이방인, 앨버트 테일러

■ 3·1운동을 세계에 알린 이방인, 앨버트 테일러

■ 3·1운동을 세계에 알린 이방인, 앨버트 테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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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1일.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00년 전 전국 방방곡곡에 울려 퍼진 대한독립만세. 이 함성은 어떻게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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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독립선언을 세계에 알린 미국연합통신의 기사는 서울시 종로구 행촌동에 위치한 붉은 벽돌집에서 시작된다. 힌디어로 기쁨 이상향을 뜻하는 ‘딜쿠샤’라는 이름의 이 집은 미국 광산업자였던 앨버트 W. 테일러와 그의 아내 메리 린리 테일러가 살았던 집으로, 그 주인이 밝혀지지 않아 한 때 대한매일신보 사옥 혹은 베델의 집으로도 추측되기도 했다. 그러던 지난 2006년 브루스 티겔 테일러가 자신의 부모님이 살았던 딜쿠샤를 찾으면서 비로소 제 주인을 찾게 되는데, 동시에 3‧1운동과 테일러가(家)의 인연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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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2월 28일 메리 테일러는 세브란스 병원에서 아들 브루스를 낳았는데, 그 때 마침 한 간호사가 브루스의 요람에 인쇄뭉치를 몰래 숨겨두었다. 우연히 이를 발견한 앨버트 테일러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대한 독립선언서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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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미국연합통신사(AP통신)의 임시 한국 특파원으로 임명되었던 그는 서둘러 기사를 작성해 독립선언서와 함께 동생 윌리엄 구두 뒤축에 숨겨 도쿄로 보냈고, 얼마 후 무사히 미국으로 전달되었다. 그리고 3월 12일자 신문에 한국인들이 독립을 선언하다(Koreans Declare For Independence)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실리며 3‧1운동은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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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앨버트는 1923년 행촌동에 딜쿠샤를 짓고 이상향을 꿈꾸며 기자 활동을 이어갔지만, 1941년 태평양 전쟁 발발로 인해 일제의 감시를 받다가 결국 이듬해 메리와 함께 강제로 추방을 당하게 되었다. 한국을 그리워한 앨버트는 해방 후 미 국방부에 통역사로 한국에 가게 해 달라며 편지를 쓰는 등 노력했지만, 1948년 심장마비로 사망해 끝내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후 그의 유언에 따라 유해는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원에 안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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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칫 역사 속에 묻힐 뻔했던 그의 사연은 아들 브루스 테일러가 딜쿠샤를 찾으며 전환점을 맞았다. 브루스를 통해 메리 테일러가 한국에서의 생활을 정리한 글(이후 호박목걸이란 이름으로 출판)과 당시 사진 등이 전해진 것이다. 지난 2016년 앨버트의 손녀 제니퍼 린리 테일러가 조부모의 유품들을 한국에 기증하면서 딜쿠샤는 복원공사에 들어갔고, 올해 2020년 시민들에게 공개될 예정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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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의 상징, 유관순열사

■ 3·1운동의 상징, 유관순열사

■ 3·1운동의 상징, 유관순열사

3·1운동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인물이 바로 유관순 열사이다.

유관순 열사는 1902년생으로, 1916년 미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입학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3월 5일 만세 시위에 참가한 뒤, 총독부의 임시 휴교령이 내려지자 3월 8일 고향으로 내려와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4월1일 아우내장터에서 수천 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시위가 시작되자, 그녀는 시위대 선두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일제의 무력진압으로 시위 도중 아버지와 어머니가 피살당하고 자신은 주동자로 잡혀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3년형을 언도받았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은 유관순의 마음은 불타올랐다.

17살의 소녀 유관순은 재판장에게 자신의 투쟁이 정당함을 역설하고 의자를 집어 던지는 의지까지 보였다. 그런 그녀에게 법정은 모욕죄까지 가산하여 징역 7년형을 선고했다.

당시 민족대표들이 받은 형량에 비하면 중형이었다. 유관순 열사는 서대문형무소에서도 틈만 나면 독립만세를 외쳤는데, 그 때마다 갖은 고문을 받았고, 특히 1920년 3월 1일 3·1운동 1주년 때에는 가장 열심히 만세를 불러 많은 독립지사들에게 용기와 위로를 주었다. 이 사건으로 유관순은 다시 끌려가 복막이 터지는 등 어린 소녀가 감당하기엔 너무 심한 갖은 고문을 당했고, 결국 그해 10월 12일 18살의 어린 나이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이화학당 교장은 서대문형무소 당국에 시신 인도를 요구했으나 일제는 거부했고, 이에 교장이 이 사실을 국제 언론에 알리겠다고 하자 마지못해 일제는 석유통 하나를 그들에게 건네주었다. 교장이 석유통을 열어보니 그곳엔 유관순의 시신이 토막 나 들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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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人生의 시간

인생人生의 시간

인생(人生)의 시간

별것이 아니라고 보면

참으로 시시하고 쓸모없고

참 바보 같은 인생이지만,

귀하다고 여기면

너무나 귀하고 고귀하여

세상의 어느 것 보다 찬란한 인생

참, 살아볼 가치가 있는 우리의 삶.

물은 쓰지 않으면 썩어버리고

쇳덩이도 사용하지 않으면

녹이습니다.

이제,

그대의 인생을 갈고 닦아

찬란하게 만들어야합니다.

한정된 인생 한 순간도

그냥 스치게 하지마세요.

빈 그릇을 들 때는

가득찬 물을 들 듯 하고

빈 방을 들어 갈때는

어른이 있는 듯 들어가세요.

인생은 값지고 값진것

알면 알수록 시간이 아까워지는

인생의 시간,

참기름 진액을 진하게

진하게 남김없이 짜내듯

우리의 삶을 참기름 보다

진한 향기를 만들어내야 겠습니다.

세상의 피조물은 결국 소멸되지만,

우리의 인생의 진액은

짜낼수록 진하여 지고,

인생을 깊이 깊이 곱씹어 볼수록

더 더욱 감칠맛 나는

인생의 그맛,

참으로 말로 다 할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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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은별 지혜의 숲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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