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4일 목요일

절영지연絶纓之宴 - 갓끈을 끊고 노는 잔치

절영지연絶纓之宴 - 갓끈을 끊고 노는 잔치

절영지연(絶纓之宴) - 갓끈을 끊고 노는 잔치

끊을 절(糸/6) 갓끈 영(糸/17) 갈 지(丿/3) 잔치 연(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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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끈과 푸근한 술자리는 무슨 관계가 있을까. 옛 사람들은 주연에서도 근엄하게 의관을 정제하고 기품 있게 즐겼는데 갓끈을 풀어헤치다니 그만큼 격식을 잊고 분위기를 즐기라는 의미였겠다. 성대한 술자리에서 흥겹게 논다는 의미의 성어는 杯盤狼藉(배반낭자)나 觥籌交錯(굉주교착, 觥은 뿔술잔 굉, 籌는 산가지 주), 주야로 술 마시고 논다는 卜晝卜夜(복주복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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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더한 절영지연(絶纓之宴)은 남에게 너그러운 덕을 베푸는 것을 비유하여 단순히 노는 술자리만이 아니고 화합이 잘 되어 생산성을 높이는 회의를 연상할 수 있는 뜻도 포함한다. 絶纓之會(절영지회)나 간단히 줄여 絶纓(절영)이라고도 한다. 劉向(유향)이 지은 說苑(설원)에서 유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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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秋五覇(춘추오패)의 하나로 세력을 떨치던 楚(초)나라 莊王(장왕) 때의 얘기다. 어느 해 일어난 반란을 평정한 뒤 공을 세운 문무백관들을 궁중에 초청해 성대한 연회를 베풀고 궁녀들로 하여금 시중을 들게 했다. 밤이 이슥하도록 주연을 즐기고 있는데 갑자기 광풍이 불어 촛불이 모두 꺼져 버렸다. 그 때 왕의 애첩이 비명을 질렀다. 어둠 속에서 누가 가슴을 더듬고 희롱했다며 갓끈을 끊었는데 불을 켜서 갓끈이 없는 사람을 잡아 처벌해 달라고 애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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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만 켜면 왕의 애첩을 희롱한 자가 드러나고 목숨을 잃을 판이었다. 그러자 장왕이 ‘오늘은 과인과 함께 마시는 날이니 갓끈을 끊지 않은 자는 이 자리를 즐기지 않는 것으로 알겠다(今日與寡人飮 不絶冠纓者不歡/ 금일여과인음 부절관영자불환)’며 모두에게 불 켜기 전에 갓끈을 끊도록 명령하고 여흥을 즐겼다. 3년 뒤 장왕은 晉(진)나라와의 전쟁에서 선봉으로 큰 공을 세운 장수에게 상을 내렸는데 그가 이미 왕에게 죽었던 목숨을 건졌던 사람이라고 실토했다. / 제공 : 안병화(전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포신구화抱薪救火 - 섶을 안고 불을 끄다, 재난을 구하려다 더 큰 화를 부르다.

포신구화抱薪救火 - 섶을 안고 불을 끄다, 재난을 구하려다 더 큰 화를 부르다.

포신구화(抱薪救火) - 섶을 안고 불을 끄다, 재난을 구하려다 더 큰 화를 부르다.

안을 포(扌/5) 섶 신(艹/13) 구원할 구(攵/7) 불 화(火/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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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이 잘 붙는 땔나무를 통틀어 섶이라 한다. ‘섶을 지고 불로 들어가려 한다’는 속담이 있다. 당장에 불이 붙을 섶을 안고(抱薪) 이글거리는 불을 끄려(救火) 속으로 뛰어든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 아닐 수 없다. 불을 끄려다 되레 큰 불로 번지게 할 것이 뻔하다. 재난을 구하려다 잘못된 방법 때문에 오히려 더 큰 화를 불러들이거나 앞뒤 가리지 못하는 어리석은 짓을 비웃는 뜻의 성어다. 負薪救火(부신구화), 救火投薪(구화투신), 負薪入火(부신입화)도 같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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戰國時代(전국시대, 기원전 403년~221년) 말엽 강성한 秦(진)나라는 힘을 믿고 이웃 나라를 수시로 침공했다. 魏(위)나라는 당시 安釐王(안희왕, 釐는 다스릴 리, 복 희)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즉위한 해에 벌써 2개 성이 점령당했다. 진나라는 다음 해에도 2개 성을 빼앗고 나중에는 수도 大梁(대량)마저 위태롭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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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나라는 할 수 없이 땅을 바치고 일시적인 평화를 찾았지만 진나라가 이에 만족할 리 없었다. 3년이 지나자 또다시 진이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와 위나라는 4개 성을 빼앗기고 15만 명의 군사를 잃었다. 이렇게 되자 백성들이 진을 두려워해 저항조차 못했다. 이 때 위의 장수 段干子(단간자)가 나서 南陽(남양) 땅을 떼어주고 화친을 하자고 건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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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을 들은 蘇代(소대)가 왕 앞에 나서며 충고했다. 땅을 탐내는 진나라에게 영토의 전부를 주지 않는 한 주권을 유지할 수 없다며 말한다. ‘땅을 바치면서 진나라를 섬긴다는 것은 마치 땔나무를 안고서 불을 끄려는 것과 같으니, 섶이 남아 있는 한 불은 꺼지지 않을 것입니다(以地事秦 譬猶抱薪救火 薪不盡 火不滅/ 이지사진 비유포신구화 신부진 화불멸).’ 이 이야기는 ‘史記(사기)’ 魏世家(위세가) 편에 실려 있고 ‘戰國策(전국책)’ 魏策(위책)에는 같은 내용이 이름만 약간 다르게 나온다. / 제공 : 안병화(전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고보자봉故步自封 - 옛 버릇으로 스스로를 옭아매다,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다.

고보자봉故步自封 - 옛 버릇으로 스스로를 옭아매다,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다.

고보자봉(故步自封) - 옛 버릇으로 스스로를 옭아매다,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다.

연고 고(攵/4) 걸음 보(止/3) 스스로 자(自/0) 봉할 봉(寸/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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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은 유전한다(panta rhei)’고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Heracleitos)는 말했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流轉(유전)하여 같은 상태로는 있을 수 없고 한 곳에 머무는 일도 없다는 것은 당연하다. 우주 만물은 생기고 없어지며 끊임없이 변천한다는 生滅流轉(생멸유전)이란 성어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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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천은 옛 모습 그대로라며 依舊(의구)하다 해도 桑田碧海(상전벽해),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그런데 이랬다저랬다 하는 人心朝夕變(인심조석변)의 경망함 말고 몸에 익숙한 것을 세태의 변화에 맞추는 일은 어렵다. 잘 아는 분야나 가진 것이 많을수록 새 것을 받아들이기를 두려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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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부터 걸어오던 걸음걸이 故步(고보)는 옛 습관, 스스로를 옭아매는 自封(자봉)은 변화를 거부하는 것으로 따로 사용돼 오다 함께 성어로 쓴 역사는 짧다. 중국 淸(청)나라 말기와 중화민국 초기의 계몽사상가로 이름 높은 량치차오梁啓超/ 양계초, 1873~1929의 ‘愛國論(애국론)’에서라 한다. 여자 아이의 纏足(전족, 纏은 얽을 전)에 대해 비판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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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족은 발이 작고 부드러운 여자를 미인으로 생각했던 중국 사람들의 낙후성을 잘 보여주는 상징이다. 어릴 때부터 엄지발가락 이외의 발가락들을 발바닥 방향으로 접어 넣듯 힘껏 헝겊으로 동여매어 자라지 못하게 했으니 큰 고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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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을 압제에서 해방한다며 풀게 했는데 그것도 고통이었다. 발을 꽁꽁 묶었던 천을 풀었으나 걸을 때 받쳐줄 것이 없어 통증이 더 심해졌고 여자들은 제 손으로 발을 동여 전족의 속박으로 되돌아갔다. 이 부분에 관한 것을 고사성어집 ‘조심’(정민 지음)에서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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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네들이 십년 동안 전족을 하다 보니(婦人纏足十載/ 부인전족십재), 묶은 것을 풀어주어도 오히려 다닐 수가 없다(解其縛而猶不能行/ 해기박이유불능행). 그래서 이전 걸음으로 스스로를 얽어매고 만다(故步自封/ 고보자봉).’ 불편하다고 해서 익숙한 것에서 급격한 변화를 주다가는 이전보다 못해 옛것을 고집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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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몸에 익은 것을 시대가 변했다고 바꾼다는 것은 쉽지 않다. 늙은 할미의 뜻이나 어린애의 떼쓰는 것을 못 이겨 그대로 따르는 것이 姑息之計(고식지계)다. 낡은 관습이나 폐단을 벗어나지 못하고 우선 편한 방법만 택한다. 자기의 의견이나 주장을 끝까지 지키는 墨守成規(묵수성규)도 좋지만 자칫 변화를 따르지 못하면 기러기발을 묶고 거문고를 연주하는 膠柱鼓瑟(교주고슬)의 어리석음을 가져온다. 스스로가 잘났다는 사람일수록 자기가 익힌 생각이 절대적이라 고집하고 새로운 흐름을 무시하는 경우가 많으니 주의할 일이다. / 제공 : 안병화(전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월하빙인月下氷人 - 결혼을 중매해 주는 사람

월하빙인月下氷人 - 결혼을 중매해 주는 사람

월하빙인(月下氷人) - 결혼을 중매해 주는 사람

달 월(月/0) 아래 하(一/2) 얼음 빙(水/1) 사람 인(人/0)

남녀에게 짝을 맺어주는 이 말은 뜻이 어디서 왔는지 아리송하지만 각각 月下老(월하로)와 氷上人(빙상인)이라는 두 이야기를 묶어 된 성어다. 요즘같이 젊은이들이 결혼할 형편이 안 되어 무작정 미루기만 하는 때에 꼭 필요한 사람이다.

최근 통계청이 발표한 3분기 혼인건수가 전년동기보다 2.8% 늘어난 1,221건 이었지만 증가폭이 감소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혼인한 지 30년 이상 된 부부의 "황혼 이혼"도 늘어났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월하빙인(月下氷人)도 가히 속수무책일는지 모른다.

唐(당)나라 때 李復言(이복언)이라는 사람이 쓴 ‘續幽怪錄(속유괴록)’ 이야기부터 보자. 韋固(위고)라는 청년이 이곳저곳 여행을 다니다 宋城(송성)이란 곳을 갔을 때 달빛 아래 한 노인이 담장에 앉아 무슨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무엇을 하는지 여쭤 보았더니 붉은 실이 가득 든 보따리를 보여주며 세상 사람들의 혼처를 알아보고 있다고 했다. 끈을 맺어 놓으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부부로 맺어진다고 하자 위고가 자신의 짝이 어디 있는지 물었다. 그러자 북쪽 성 아래 노파가 안고 있는 젖먹이 계집아이가 짝이라고 말해 실없는 노인이라며 스쳐버렸다.

14년의 세월이 흘러 관리가 된 위고가 태수의 딸과 혼인하게 되어 지난 이야기를 말해보니 자신은 송성에 있었고 태수의 양녀라고 해 깜짝 놀랐다. 월하의 노인이 한 말이 꼭 맞았던 것이다.

‘晉書(진서)’의 藝術傳(예술전)에는 索紞(색담, 紞은 면류관드리울 담)이란 용한 점쟁이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날 狐策(호책)이란 사람이 와서 얼음 위에 서 있는데 그 밑에 사람과 이야기를 나눈 꿈을 해석해 달라고 했다. 색담은 얼음 위는 陽(양)이고 아래는 陰(음)인데 이야기를 했다는 것은 중매를 해서 잘 진행될 징조라고 풀어주었다. 과연 봄이 오자 고을 태수로부터 중매 서 달라는 부탁이 와 그 결과 순조로운 혼인을 맺어 주었다고 한다.

‘짚신도 제짝이 있다’고 했듯이 결혼할 짝은 있게 마련이다. 경제 상황이 나아져야 하는 것이 우선이지만 주위 사람들이 모두 月下氷人이 되어 짝을 찾아주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 제공 : 안병화(전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고황지질膏肓之疾 - 오랫동안 앓고 있어 고치기 어려운 병이나 버릇

고황지질膏肓之疾 - 오랫동안 앓고 있어 고치기 어려운 병이나 버릇

고황지질(膏肓之疾) - 오랫동안 앓고 있어 고치기 어려운 병이나 버릇

기름 고(肉/10) 명치끝 황(肉/3) 갈 지(丿/3) 병 질(疒/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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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에 든 병이라고 흔히 말하지만 膏(고)는 심장 아래 부분의 작은 비계, 肓(황)은 가슴 위의 작은 막으로 심장과 횡격막 사이를 말한다. 만약 병균이 이곳에 침범하면 고치기가 어렵다고 전해진 곳이다. 몸 깊은 곳에 병이 들었으니 침이 미치지 못하므로, 병을 고칠 수 없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뜻이 넓혀져 사물의 고치기 어려운 병폐나 나쁜 버릇을 가리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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孔子(공자)의 春秋(춘추)를 주석하는 春秋三傳(춘추삼전) 중에서도 역사적 실증적 해석을 중심으로 한 左丘明(좌구명)의 ‘左氏傳(좌씨전)’에 이 말이 사용됐다. 晉(진)나라의 景公(경공)이 병이 위독해져 秦(진)나라에 명의를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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秦伯(진백)은 醫緩(의완)을 보내 병을 다스리게 했다. 의사가 도착하기 전 경공이 꿈을 꾸었는데 더벅머리 두 총각으로 변한 병이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한 놈이 ‘그 사람은 용한 의사라던데 우리가 어디로 숨어야 하지?’ 하고 말하니 다른 놈이 답하길 ‘황의 위쪽과 고의 아래쪽에 가 있으면 그도 어쩌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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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의원이 와서 진맥하더니 병을 고칠 수 없다며 말했다. ‘병의 뿌리가 황의 위쪽과 고의 아래쪽에 있어 뜸을 할 수도 없고 침을 찔러도 닿지 않으며 약을 써도 미치지 못합니다(在肓之上膏之下 攻之不可 達之不及 藥不至焉 /재황지상고지하 공지불가 달지불급 약부지언).’ 成公(성공) 10년 조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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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고황에 든 병은 명의도 고칠 수 없다고 痼疾(고질)이라고도 했다. 痼(고)는 훈도 고질 고이지만 병중에서도 단단히 난(固) 병이고 疾(질)은 화살(矢)처럼 빠른 설사, 복통, 식중독 같은 급성질병을 말한다. 疾은 고칠 수 있어도 痼는 암이나 당뇨병 같은 쉽게 고칠 수 없는 병이라 고황과 통한다.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 고질병처럼 깊음을 비유하는 泉石膏肓(천석고황)은 고황이라도 좋은 고황이다. / 제공 : 안병화(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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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선秋扇 - 가을철의 부채, 철이 지난 물건, 남자의 사랑을 잃은 여인

추선秋扇 - 가을철의 부채, 철이 지난 물건, 남자의 사랑을 잃은 여인

추선(秋扇) - 가을철의 부채, 철이 지난 물건, 남자의 사랑을 잃은 여인

가을 추(禾/4) 부채 선(戶/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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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를 쫓는데 가장 간편한 부채는 다른 곳에도 쓰임새가 많다.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접부채 合竹扇(합죽선)은 전통혼례 때 신랑신부의 얼굴을 가리는 의례용에서 고전 무용 부채춤으로, 무당들이 굿을 할 때도 빠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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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서화가의 그림이나 시를 쓴 작품으로 내려오는 문화재도 된다. 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무더위를 가시게 했던 것이 선풍기나 에어컨이 흔한 요즈음에는 주목적을 잃어가는 중이다. 이것을 애틋하게 여기며 노래한 것이 있다. ‘선풍기나 에어컨은 인간의 피부를 시원하게 한다. 그러나 부채는 피부보다 마음을 더 시원하게 한다.’(이어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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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더위를 쫓고 몸과 마음을 시원하게 해 주는 부채라도 계절에 맞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가을의 부채(秋扇)라는 말은 날이 무더웠던 여름철에 귀한 존재였던 것이 서늘한 계절이 돌아오면 홀대를 받는다는 말이다. 秋風扇(추풍선)도 같다. 필요할 때는 대접을 받다가 쓸모가 없어지면 경시되는 상황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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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남자의 사랑을 잃은 여인을 뜻한 것으로 중국 前漢(전한)의 12대 황제 成帝(성제, 재위 기원전33~7) 때의 후궁 班婕妤(반첩여)의 시에서 비롯됐다. 婕은 궁녀 첩, 첩여는 한나라 때 궁중여관의 관직명이다. 반첩여는 漢書(한서)를 저술한 班固(반고)의 왕고모가 된다는데 성제의 즉위년에 후궁으로 들어가 총애를 한 몸에 받고 단기간에 첩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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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기간도 잠시, 황제의 손바닥에서도 춤춘다는 날씬한 미모의 趙飛燕(조비연)이 들어오자 사랑이 식었다. 더군다나 조비연의 모략으로 옥에 갇혔다가 풀려나서도 임금의 총애는 돌아오지 않았다. 반첩여는 번뇌와 서글픔으로 자신이 가을의 부채 신세라며 ‘怨歌行(원가행)’이란 시를 지었다. 뒷부분에 한탄이 스며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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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 품과 소매 속을 드나들며 움직일 때마다 미풍을 일으켰지(出入君懷袖 動搖微風發/ 출입군회수 동요미풍발), 항상 두려운 것은 가을바람이 불어와 서늘한 바람이 더위를 앗아가듯(常恐秋節至 凉飇奪炎熱/ 상공추절지 양표탈염열), 대나무 상자 안에 버려져 은혜와 애정마저 끊겨버리네(棄捐篋笥中 恩情中道絶/ 기연협사중 은정중도절).’ 飇는 폭풍 표, 篋은 상자 협, 笥는 상자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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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첩여는 서인 신세가 된 후에도 후일 성제의 능묘를 지키며 그의 시가 文選(문선)에 실려 오랫동안 기억됐다. 唐(당)의 문인 張九齡(장구령)이 읊은 대로 가을 기운에 사랑을 빼앗겨도 ‘작은 상자 속에서 은혜는 남아 감사(終感恩於篋中/ 종감은어협중)’하게 된 셈이다(白羽扇賦/ 백우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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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부채는 조금의 미련이 남아도 겨울까지 가면 夏爐冬扇(하로동선)이란 말대로 철에 맞지 않거나 쓸모없는 사물을 빗대 아무 소용없는 말이나 재주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 말도 계절은 돌고 도니 지금 쓰이지 않아도 함부로 괄시할 일은 아니다. / 제공 : 안병화(전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요원지화燎原之火 - 언덕에 번지는 불

요원지화燎原之火 - 언덕에 번지는 불

요원지화(燎原之火) - 언덕에 번지는 불

횃불 료(火/12) 언덕 원(厂/8) 갈 지(丿/3) 불 화(火/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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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원의 불길이란 말을 쓸 때가 있다. 이 때의 요원이 횃불, 불탄다는 뜻의 燎다. 너른 벌판에 삽시간에 번지는 불길이니 무서운 형세다. 바람이라도 불면 걷잡을 수 없다. 온 산을 물들이는\xa0진달래는\xa0철쭉의 명소인 지리산 바래봉이나 합천의 황매산 등지에\xa0만산의 장관을 보여준다고\xa0봄이오면 매체마다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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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의 불길과 같이 멀리서 본 철쭉도 요원과 다름없다. 이와 함께 이 말은 세력이 매우 대단하여 원상태로 회복하기 어려움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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尙書(상서)라고도 하는 중국 고대의 기록 ‘書經(서경)’ 商書盤庚(상서반경)편에 이 말이 먼저 등장한다. 商(상)나라 반경은 19대 왕의 이름인데 시조 湯王(탕왕)의 10세 손이다. 상나라는 殷(은)나라라고도 부른다. 처음 亳(박, 은나라서울 박)이라는 곳에 도읍을 정했다가 몇 번 옮겨 그 때는 耿(경)이라는 곳이 수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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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땅은 비교적 편리한 곳으로 백성들도 만족하고 살았는데 반경이 즉위할 때 홍수가 나 도읍을 옮길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천도가 쉬운 일이 아니고 백성들도 정착지를 바꾸려 하지 않아 왕이 먼저 조정의 문무백관을 불러 꾸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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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은 어찌하여 나에게 고하지 않고서 들뜬 말로 부추겨 사람들을 두려움에 빠지게 하는가? 마치 불길이 들판을 태우는 것과 같아서 나아가 가까이 갈 수도 없는데 어찌 그것을 없앨 수 있겠는가(若火之燎于原 不可嚮爾 其猶可撲滅/ 약화지료우원 불가향이 기유가박멸)? 그대들이 스스로 편안치 못하게 한 것이니 내게 허물이 있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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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해를 본다고, 귀찮다고 일을 하려하지 않는 벼슬아치들에게 무엇이 백성을 위한 길인가를 잘 알고 행정을 집행하라는 교훈을 주는 말이다. / 제공 : 안병화(전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학철부어涸轍鮒魚 - 수레바퀴 자국에 괸 물에 있는 붕어.

학철부어涸轍鮒魚 - 수레바퀴 자국에 괸 물에 있는 붕어.

학철부어(涸轍鮒魚) - 수레바퀴 자국에 괸 물에 있는 붕어.

물마를 학, 바퀴자국 철, 붕어 부, 고기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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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장이 안 된 길로 수레가 다녀 움푹 팬 곳에 비가 오면 물이 고인다. 곧 비가 그치면 말라붙을 참이다. 그런데 어디서 들어왔는지 그곳에 붕어가 한 마리 들어있다. 붕어의 처지가 어떨까. 바로 ‘독 안의 쥐’ 신세다. 이처럼 바퀴자국 물이 마른 곳(涸轍)에 있는 붕어(鮒魚)라는 비유의 성어는 매우 위급한 처지에 있거나 몹시 고단하고 옹색한 사람을 이른다. 물마를 涸(학) 글자는 잘못 읽기 쉬운 글자로 조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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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戰國時代(전국시대, 기원전 403년~221년) 때 道家(도가)의 대표자 莊子(장자)가 쓴 ‘莊子(장자)’에 나온다. 이 책은 사람의 힘을 더하지 않은 그대로의 자연, 無爲自然(무위자연)을 이상으로 한 그의 철학사상서이자 우수한 문학서다. 寓言寓話(우언우화)의 비유가 많고, 종횡무진한 상상과 표현으로 친근한데 33편 중 外物(외물)편에 이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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莊周(장주, 장자의 이름)는 누구에게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분방의 생활을 즐겼기에 항상 궁색했다. 어느 날 끼니가 떨어져 監河侯(감하후, 하천을 살피는 관리)의 벼슬을 하고 있는 친구를 찾아가 약간의 식량을 꾸어달라고 했다. 도와 줄 생각이 없었던 친구는 그러나 딱 잘라 거절할 수가 없어 2~3일 뒤에 오면 300금을 빌려줄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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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이 급했던 장주는 이렇게 비꼬았다. “이 곳에 올 때 무슨 소리가 나서 살펴봤더니 수레바퀴 자국에 괸 물 속에 한 마리 붕어가 말라죽게 생겼다(車轍中有鮒魚焉/ 거철중유부어언)면서 물 한 되를 달라고 했다. 그래서 남방의 임금을 만나고 오는 길에 강물을 끌어다 주겠다고 했지. 그랬더니 붕어는 한 되가 당장 급한데 나중의 강물이 무슨 소용이랴 하며 나를 욕하더라.” 붕어를 통해 친구를 꾸짖은 것이다. / 제공 : 안병화(전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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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발철시大鉢鐵匙 - 큰 주발에 놋수저로 먹는 밥, 일본인이 탐욕으로 봄

대발철시大鉢鐵匙 - 큰 주발에 놋수저로 먹는 밥, 일본인이 탐욕으로 봄

대발철시(大鉢鐵匙) - 큰 주발에 놋수저로 먹는 밥, 일본인이 탐욕으로 봄

큰 대(大/0) 바리때 발(金/5) 쇠 철(金/13) 숟가락 시(匕/9)<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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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鉢(대발)은 흔히 말하는 발이 큰 사람 ‘대발’이 물론 아니고 큰 밥그릇이다. 사기로 만든 沙鉢(사발), 놋쇠로 만든 周鉢(주발)이라 하는 것과, 스님의 공양할 때 쓰는 그릇 바리때를 鉢盂(발우)라 할 때와 같은 글자를 쓴다. 숟가락과 젓가락을 말하는 수저는 匙箸(시저)에서 왔는데 鐵匙(철시)는 쇠로 만든 숟가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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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그릇에다 위로 수북하게 담은 高捧(고봉)밥에 튼튼한 쇠수저라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있다. 많이 먹어야 힘을 쓸 수 있다며 머슴들에 권하고, 예전 할머니들이 잘 큰다고 손자들에게 권했던 정이 느껴진다. 배불리 잘 먹기만 하면 걱정이 없다고 하는데 의외로 이것을 탐욕스럽다고 일본인들은 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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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英祖(영조) 때의 실학자 李瀷(이익, 瀷은 강이름 익)의 다채로운 독서록 ‘星湖僿說(성호사설, 僿은 잘게부술 사)’에 성어와 관련된 내용이 나온다. 음식에 관한 기록이 많이 실린 人事門(인사문)에서다. 鄭運經(정운경)이라는 사람이 제주도 풍물과 생활상을 관찰하여 기록으로 남긴 耽羅聞見錄(탐라문견록)에 나온다면서 인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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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어부가 풍랑으로 대마도에 표류했을 때 그곳의 통역사인 通事(통사)가 했다는 이야기다. ‘조선은 진실로 좋은 나라다(朝鮮固樂國/ 조선고락국). 그러나 사람들이 탐욕이 많다(然人多貪慾/ 연인다탐욕), 큰 주발에 밥을 놋수저로 다져서 배부르게 먹으니(大鉢銕匙 搏飯以飽/ 대발철시 박반이포), 욕심내지 않고서 어찌 견디겠는가(不貪胡得/ 불탐호득).’ 銕은 쇠 鐵(철)의 이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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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밥에 김치를 얹어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운 뒤 배를 쓰다듬으며 한숨 자는 모습을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중국인은 의복에 사치를 하고(侈於衣服/ 치어의복) 일본인은 집 장식에 재산을 투자하는데(侈於第宅/ 치어제택) 조선인은 음식에 사치한다(侈於飮食/ 치어음식)는 이야기도 떠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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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다녀온 사신의 燕行(연행) 기록 聞見雜記(문견잡기)에 실려 있다. 그러나 밥심으로 힘을 쓴다는 백성들이 호화판으로 사치하기에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을 테다. 이익은 척박한 환경에 농사도 적어 고달픈데다 늘어나는 관원들의 착취도 심해져 깨끗한 淸白(청백)도 죽음은 구원하지 못하니 수북한 밥에 놋수저가 욕심이 될 수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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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세대의 너도나도 못살았을 때 좁은 땅에서 생긴 적은 양식으로 많은 식구들이 연명하려면 한 끼라도 고봉밥이 필요했다. 작은 접시에 나눠 담아 젓가락으로 깨작거리는 사람들이 더 욕을 먹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풍요해진 오늘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비만이 두려워 식단 조절하며 음식을 적게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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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음식을 찾아 가는 미식가나 다른 목적을 위해 단식하는 사람이나 이익 선생의 시 구절을 기억하자. ‘음식을 먹을 때는 예의 있으니 그 원리 하늘에서 나온 거라네(維食有儀 厥則由天/ 유식유의 궐즉유천)’, ‘먹으면서 두려워할 줄 안다면 감히 배를 채우길 어이 바라랴(坐啖知懼 敢睎充哺/ 좌담지구 감희충포).’ 啖은 씹을 담, 睎는 바라볼 희, 哺는 먹일 포. / 제공 : 안병화(전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행재요화幸災樂禍 - 남이 재난과 화를 입는 것을 보고 기뻐하다. 

행재요화幸災樂禍 - 남이 재난과 화를 입는 것을 보고 기뻐하다. 

행재요화(幸災樂禍) - 남이 재난과 화를 입는 것을 보고 기뻐하다.\xa0

다행 행(干/5) 재앙 재(火/3) 좋아할 요(木/11) 재앙 화(示/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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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대로 남이 잘 되는 것에 시기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이웃사촌’이란 말이 퇴색되어 가는 요즘에는 인격이 성숙한 사람이라도 흥미로운 일에 더 관심이 갈수밖에 없다고 ‘남의 집 불구경 않는 군자 없다’란 속담이 생겼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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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남의 불행을 자기의 행복으로 여기고 즐거워한다면 참으로 고약한 이웃이 아닐 수 없다. 자신이 아닌 남의 재앙을 다행으로 여기고(幸災) 재앙을 즐거워하는(樂禍) 이 성어는 樂자가 즐길 락, 노래 악, 좋아할 요로 읽혀 행재낙화로 쓰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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魯(노)나라 左丘明(좌구명)이 쓴 ‘春秋左氏傳(춘추좌씨전)’에 나오는데 幸災는 僖公(희공)조에, 樂禍는 莊公(장공)조에서 찾아볼 수 있다. 晉(진)나라 惠公(혜공)은 왕에 오르기 전 망명했던 이웃 秦(진)나라에 성 5개를 준다고 약속하고 도움을 받았다. 왕이 되자 약속을 저버린 혜공은 어느 해 나라에 큰 흉년이 들자 이번엔 이웃에 식량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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秦나라로서는 괘씸했지만 천재는 도와야 한다는 대부 百里奚(백리해, 奚는 어찌 해)의 권유로 식량을 줬다. 이번엔 秦나라가 흉년이 들어 晉 혜공에 도움을 청하자 거절당했다. 이 때 慶鄭(경정)이란 대부가 ‘베풂에 등 돌린다면 외롭게 될 것이고 남의 재앙을 다행으로 여기면 어질지 못한 일(背施無親 幸災不仁/ 배시무친 행재불인)’이라 간언했다. 하지만 못난 혜공이 듣지 않아 침략을 받고 포로 신세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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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주)나라 莊王(장왕)이 죽은 뒤 대신들에 의해 왕위에 오른 꼭두각시 子頹(자퇴)는 아무 것도 모르고 주색과 가무에 도취되어 있었다. 이에 사람들은 ‘지금 왕자 퇴는 가무에 취해 지칠 줄 모르면서 화를 즐기고 있다(今王子頹歌舞不倦 樂禍也/ 금왕자퇴가무불권 요화야)’고 손가락질했다. / 제공 : 안병화(전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