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6일 토요일

조광조의 등장과 죽음 4편

■ 조광조의 등장과 죽음 4편

■ 조광조의 등장과 죽음 4편

현량과가 실시됨으로써 참신 발랄한 30대 소장학자들이 기용되었고, 신진사류들이 한꺼번에 정계에 참여했다. 이들은 사림세력으로 뭉쳐 훈구파의 기득권에 맞섰다. 추천제 시험인 현량과를 통해 신진인사를 대거 영입해 개혁의 지원군으로 삼았다. 현량과는 조광조 세력의 확대를 가져왔다고 얘기할 수 있다. 조광조의 개혁정책은 백성의 지지를 받았지만, 기득권 세력인 훈구파에는 커다란 정치적 부담으로 다가왔다.

또한, 경연 활성화를 통해 왕이 끊임없이 성리학 이념을 교육받게 했다. 도교 제천행사를 주관하던 관청 ‘소격서’를 폐지함으로써 성리학이 아닌 이단 사상이 보급될 수 있는 길을 차단했으며, ‘소학(小學)’ 보급, 향약(鄕約) 실시를 통해 성리학 이념을 지방 구석구석까지 전파했다. 조광조는 중종이 경연에 지쳐 조금 쉬자고 하면 그 자리에서 "모범을 보여야 할 국왕이 그러시면 안된다" 고 면박을 주곤 했다. 또 경연 도중 중종이 하품을 하면 "국왕이 품행이 그러시면 안된다" 하고 조광조가 질문을 해서 중종이 잘 모른다고 하면 "그것도 모르시냐" 면서 중종을 면전에서 비난하기를 서슴치 않았다. 조광조는 중종의 자기에 대한 애정을 철저히 과신하고 있었던 것 같다.

중종은 조광조에 대한 사랑이 넘쳐 있을 때는 조광조의 이런 대범함(?)을 멋지게 보고 웃어 넘겼다. 그러나 조광조가 너무 태연한 모습으로 신하들 앞에서 그러한 모습을 자주 보이자 중종은 조광조가 자기를 인간적으로 능멸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중종의 조광조에 대한 믿음은 점점 변하기 시작했고, 더 나아가 이제 증오로 넘치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눈치없는 원칙주의자 조광조는 그런 행동과 개혁정책을 중종에게 계속 밀어부치니 중종은 조광조에 이제 인간적으로 진절머리를 내기 시작했다.

중종은 조광조와 신진사류가 반정공신들을 적당히 견제 해주기를 바랬을 뿐인데, 아예 자기 머리 꼭대기 위에서 논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조광조와 신진사류가 훈구파보다 더 지나치게 신권을 강화시키고 왕권을 제약한다고도 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결정적으로 조광조를 궁지에 몰아넣게 된 것이 위훈삭제(僞勳削除)다.

조광조와 신진사류는 공신(功臣)이 너무 많아 국가 재정을 축내고 있다면서, 실천 대안으로 반정공신 2·3등 중 가장 심한 것은 개정해야 하고, 4등 50여 인은 모두 공이 없이 녹을 함부로 먹고 있으므로 삭제함이 좋을 것이라는 위훈삭제(僞勳削除)를 강력히 주장하고 나섰다. 이는 중종반정 때 거짓 공훈을 내세워 공신이 된 이들을 골라 공신명단에서 삭제하는 조치였다. 그러나 조광조와 신진사류들의 주장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미 반정공신들은 기득권이 되어 있었고, 현실적으로 원로가 된 훈구세력을 소인배로 몰아 배척하려는 급격한 개혁주장은 씨가 먹힐 리가 없었다. 그리고 중종도 위훈삭제만은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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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의 등장과 죽음 3편

■ 조광조의 등장과 죽음 3편

■ 조광조의 등장과 죽음 3편

개혁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공신에 의해 왕권이 제약당했던 중종 역시 이들을 견제할 새로운 정치세력이 필요했다. 이때 등장한 것이 성종 때 김종직을 필두로 조정에 등용된 바 있던 사림세력이었다. 이들은 개국공신세력을 뿌리로 하는 훈구파와 달리, 불사이군의 성리학 원칙을 견지하면서 정치에 뛰어들지 않고 향촌에 묻혀 성리학을 탐구하던 재야세력이었다. 사림세력은 도덕성과 수신을 강조하는 성리학이 사회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학문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 세력을 대표해 개혁의 전면에 나선 인물이 바로 조광조 (1482~1519)였다.

기세가 왕 못지않던 반정공신들 중 박원종 등 반정 실세들이 중종 7년에 이르러 대부분 죽게 되자, 힘의 공백이 생겼고. 중종은 비로소 왕 노릇을 할 기회를 잡게 되었다. 이때 중종은 성균관 유생으로 있던 조광조를 만나게 되었다. 중종은 조광조의 이상정치의 실현방법을 수용하고 실천에 옮기려고 애썼다. 당시는 폭군 연산군이 정치와 사회를 휘저어 놓은 직후라서, 그 수습방안으로 조광조의 이상적인 정치관이 현실적 대안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종은 홍문관 부제학, 동부승지 등에 조광조를 임명해 늘 가까이에 뒀다. 1518년 10월에는 오늘날 검찰총장에 해당하는 대사헌으로 발탁했다. 파격적인 승진이었다.

조광조는 중종의 신임을 바탕으로 개혁 세력의 선두에 서서 성리학에 입각한 급진적 개혁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젊은 피를 수혈해 연산군과 차별화되는 왕이 되고자 했던 중종과 조광조의 개혁 의지가 맞물리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깊어졌다. 조광조의 개혁정치를 한마디로 말하면 유교적 이상정치와 도덕정치의 실현이다. 왕이 왕도정치를 수행하고 성리학 이념에 입각한 교화가 백성에게 두루 미치는 사회를 구현하는 것이 그가 추진한 개혁정치의 핵심이었다.

민생을 위한 개혁에도 착수해 농민을 가장 괴롭힌 공물(貢物·지방 특산물을 바치는 세금)의 폐단을 시정하고, 균전제 실시로 토지 집중을 완화했다. 아울러 토지 소유 상한선을 정해 부유층의 재산 확대를 막았다. 조광조는 자신과 뜻을 함께하는 정치 세력을 만들기 위해 기존의 과거시험 대신에 현량과(賢良科)를 실시하여, 숨은 인재등용에 힘썼다. 조광조는 과거제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기풍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현량과 실시를 강조하여, 1519년 처음으로 현량과가 실시되었다. 현량과의 선출 방법은 유관 기관의 추천을 받아 성품 · 기국(器局) · 재능 · 학식 · 행실 · 지조 · 생활태도 등 일곱 가지를 중심으로 뽑아 임금이 참석한 자리에서 대책(對策, 시무의 방안을 적은 글)만으로 최종 시험을 보여 뽑았다. 과거시험과는 방법이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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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의 등장과 죽음 2편

■ 조광조의 등장과 죽음 2편

■ 조광조의 등장과 죽음 2편

연산군을 몰아내고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한 중종반정(1506년)은 태조 이래 세력을 더해가고 있던 공신세력의 힘을 더욱 강화시켜주었다. 특히 중종반정은 신하들이 직접 왕을 몰아내고 새 임금을 추대했던 만큼 반정공신들의 힘이 막강했다. 이들은 요직을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막대한 경제적 기반을 확보했다. 또한 공신의 수도 이전과 달리 엄청나게 많아졌다. 개국공신이 45명이었던 반면, 중종반정 때의 공신은 117명에 이르렀다. 이들 중 다수는 실제로는 공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실권을 잡은 박원종, 성희안 등의 주모자가 친인척이란 이유로 공신명단에 끼워놓은 것들이 대다수였다.

일단 공신이 되면 본인은 벼슬이 최고 3등급, 가족들은 2등급이 상승했다. 또한 최고 30명의 노비를 하사받고, 토지도 100결에서 250결까지 얻게 되었다. 게다가 공신전은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었으니 이들이 받는 특혜는 막대했다. 공신의 급증은 중종반정이 물론 큰 계기가 되긴 했지만, 조선 초 태종, 세조, 예종, 성종 등 즉위과정에서 신하들의 도움을 받았던 임금들이 40~50명씩 공신을 남발한 탓도 있었다. 때문에 경기도 일원의 땅 대부분이 공신들의 땅이 될 정도였다. 이렇게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훈구세력은 조선의 기반을 좀먹는 특권층을 구축해 권력을 과시했다. 이들 훈구세력은 고려 말의 권문세족이 그러했듯이 일반민의 토지를 빼앗고 대규모 농장을 조성했다.

어린 나이에 진성대군은 변덕스러운 연산군 밑에서 살아남기 위해 한껏 몸을 낮추고, 칼날 위에 선 것과 같이 극도로 조심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 몸에 밴 탓인지, 왕이 되고나서도 힘이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중종은 서슬 퍼런 반정 공신들의 눈치를 보기에 급급했고, 그런 까닭에 중종의 살아가는 법은 바로 “연산과 반대로 하기”였다. 사냥이나 연회를 피하고 학문에 열중했으며 신하들의 말에 항상 귀를 기울였다. 중종의 모든 결정은 항상 “조정이 모두 마지않으니 따르노라” 이런 식이었고, 왕의 주도 아래 추진되는 경우는 좀처럼 없었다.

이 시기의 백성들의 고달픔은 연산군 시대와 매한가지였다. 개나 소나 공신이니 이로 인해 국가 재정은 궁핍해지고, 점차 국고는 비어갔다. 비는 액수는 백성들에게 거둬들여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져갔다. 고려 말 농촌이 그러했듯, 그 부담은 고스란히 백성들 차지가 되었으며, 불안한 정국에 임금이 허약하니 관직의 기강 해이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수령들은 돈을 주고 관직을 샀으니 그 몇 곱절로 본전을 뽑으려 백성의 등골에 빨대를 꽂았고, 어사를 파견하여 적발하고 처벌을 했지만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여기에 가뭄, 홍수, 우박에 지진까지 찾아오니, 고향을 떠나 떼도적이 되는 백성들이 부지기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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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의 등장과 죽음 1편

■ 조광조의 등장과 죽음 1편

■ 조광조의 등장과 죽음 1편

선비는 물에 빠져도 개헤엄을 치지 않는다는 속담이 있다. 조광조(趙光祖, 1482~1519)는 너무나 곧아서 휘어지지 않고 부러져버리는 사람으로, 조선시대 개혁의 아이콘, 곧은 선비의 상징으로 불리는 인물이다, 그의 이름을 《조선왕조실록》에서 검색하면 총 910건이 나온다. 38세 짧은 생을 살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많은 숫자이다. 그만큼 조광조는 불꽃같은 삶을 살았다. 한때는 중종의 절대적인 총애를 받았던 참모였지만, 한순간 역모 혐의를 쓰고 나락으로 떨어진 인물. 그러나 그가 죽고 난 뒤, 사림파가 정치의 실권을 차지하면서 조광조는 사림파의 상징으로 거듭나게 된다.

조광조는 감찰 조원강(趙元綱)의 둘째 아들로 한성에서 태어났다. 조광조는 17세 때 북쪽의 어천도 찰방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갔다가 희천에서 유배중인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수학(修學)했다. 조광조는 천성이 총명할 뿐 아니라 부지런하고 수수해 한훤당의 문하에서도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조광조는 이때부터 시문은 물론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는 데 힘을 쏟아, 20세를 전후해서 가장 성실하고 촉망받는 청년학자로 꼽혔다. 점필재(김종직의 호)의 학통을 이은 한훤당 문하에서도 군계일학이 되었던 것이다.

1499년 한산 이씨와 혼인한 조광조는 이듬해 부친이 사망하자, 부친의 묘소 아래에 초당을 짓고 3년상을 치렀다. 1510년 과거 초시에 응시해 장원으로 합격했으나 이듬해 모친상을 당해 관직 진출이 늦었다. 학문이 깊고 행실이 올곧은 조광조는 관계(官界)에 나가기도 전에 사림파의 촉망받는 선비가 되었고, 그로 인해 23세 때에는 유배되는 몸이 되었다.

1504년(연산군10년) 임사홍(任士洪)이 궁중세력과 결탁하여 신진사림들의 제거를 꾀했다. 곧 연산군의 생모 윤씨가 폐위될 때 신진사류인 이극균 · 김굉필 등이 찬성했다 하여 이들을 처형하게 하고, 나머지 신진사류들을 삭탈관직하거나 유배를 보낸 것이다. 이것을 갑자사화(甲子士禍)라고 하는데, 아직 관직에 오르지도 않은 조광조도 여기에 끼어있었다.

정계의 매서운 현실을 몸소 겪은 조광조는 첫 유배지에서 학문에 더욱 힘쓰면서 때를 기다렸다. 그는 1510년(중종5년) 29세 봄, 진사회시(進士會試)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본격적으로 관계에 진출했다. 관계에 진출한 뒤, 조광조는 뛰어난 학문과 인격으로 중종의 신임을 두텁게 받았고 사류들의 명망을 한 몸에 모았다. 조광조의 정치관은 유교를 정치와 교화의 근본으로 삼아 왕도정치를 실현한다는 것이었다. 왕도정치의 구체적인 실현방법은 왕이나 관직에 있는 자들이 도학(道學)을 실제로 이행하는 도학(道學)정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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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반정 4편

■ 중종반정 4편

■ 중종반정 4편

중종(中宗)은 즉위 후 명에 보낸 사신을 통해 연산군이 병으로 순순히 양위한 것으로 허위 보고했다. 조선의 첫번째 쿠데타로 추대된 인물 중종(中宗)은 안타깝게도 왕으로서의 자질은 물론 준비도 되어있지 않은 인물이었다. 생각해보면, 중종은 중종반정이라는 역사적 사건으로 그 이름은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으나, 그의 업적을 보면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다.

박원종 등 반정공신들은 연산군의 배다른 동생 진성대군(13세)을 왕위에 옹립하고 실권을 거머쥔 채 모든 것을 연산군 이전으로 되돌리기 위한 조치를 취하였다. 그러나 연산군 치하에서 영화를 누린 자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는데, 이는 박원종 등 세력 등 상당수가 그런 자들이기도 했고, 또 다른 반정을 예방하기 위해 적을 만들지 않고자 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박원종 등은 대부분의 신하들을 중종반정의 공신으로 임명하고, 중종의 부인인 신씨는 연산군의 측근인 신수근의 딸이라는 이유로 폐비시켜버렸다.

연산군의 치하에서 목숨을 겨우 부지하느라 노심초사했고, 이제 연산군도 죽고 본인 스스로 왕이 되었으나 박원종 등의 반정공신의 위세에 어깨조차 제대로 펴지 못하는 연약한 왕 중종.

즉위한 지 십년 쯤 지나자 박원종 등 반정공신들이 자연사하고 중종도 어느 정도 왕 노릇 하게 되자, 중종은 반정공신들을 견제할 새로운 세력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때 중종은 이조판서 안당의 추천으로 당시 사림들의 대표격인 조광조를 등용했다.

중종은 스스로 강력한 왕권을 휘두르던 연산군이 대신들에 의해 끌려 내려가는 것을 직접 목도한 사람으로, 평생을 자신의 왕권 유지를 위해 항상 강력한 후원자를 곁에 두었다. 하지만, 그 후원자가 지나치게 컸다 싶으면 다른 신하들과 모의해 그 후원자를 가차 없이 제거하는 방법이 중종의 전매특허(중종의 용인술) 였다.

중종은 박원종 그늘 뒤에서 초기 시절을 보내다가, 그 뒤 조광조를 등용하여 힘을 몰아주면서 왕위를 보존하다가 결국에는 조광조를 내쳤으며, 다시 김안로에게 힘을 몰아주는 방법으로 왕위를 지키다가 다시 김안로를 내쳤는데, 이 때 죽은 사람이 오히려 연산군 때보다 많았다고 하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중종은 이런 방법으로 39년 동안 왕위를 지켜낸 것이다. 그렇게 오랜 시간 왕위를 지키면서도 별다른 업적은 없었고, 재위 39년만인 1544년 향년 57세에 병으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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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반정 3편

■ 중종반정 3편

■ 중종반정 3편

박원종은 곧바로 대비전을 찾아가 정현왕후 윤씨를 설득하여, 진성대군이 왕위를 잇도록 교지를 내리게 했다. 반정군에 동조하거나 도망쳐서 텅 빈 궁에서 반정군은 대비를 모시고 나와 진성대군 이역(李懌)을 왕으로 추대하는 교서를 발표했다.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愼守勤), 신수영(愼守英) 형제와 임사홍을 처단했다. 연산군의 여인 장녹수는 반정군의 칼을 맞은 후, 분노한 군중으로부터 돌을 맞아 순식간에 돌무덤이 만들어졌으며, 연산군의 아들들은 각기 따로 유배되었다가 곧 사사되었다. 연산 역시 군으로 강등되어 강화도 교동에 유배 되었다가 두 달 만에 역질로 죽고 말았다. 잔인한 폭정으로 민심을 잃은 대가였다. 자기 세력도 없이 오직 피바람만으로 절대 권력을 향해 질주했던 최악의 군주 조선 10대 왕 연산군. 20세에 왕위에 올라 12년을 왕위에 있으면서 피바람으로 세운 절대 권력을 오로지 자기의 향락에만 사용했기에 사후 묘호를 받지 못함은 물론, 종묘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오늘날까지 폭군의 대명사로 남아있다.

별다른 저항이나 충돌 없이 거사는 이렇게 마무리됐다. 그리고 그 다음날 정현왕후 윤씨의 아들이자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이 경복궁 근정전에서 왕위에 오르니 그가 조선왕조 11대 중종(中宗, 재위 1506~1544)이다. 이것이 조선 건국 이후 최초의 반정인 중종반정(中宗反正)이다. 조선왕조에서 신하들이 반란을 일으켜 왕을 바꾼 첫 번째 사건이다. 왕조를 바꾸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역성혁명조선건국과는 다르다. 폭정을 일삼는 연산군을 물리치고 새로운 임금을 새워 옳은 정치를 이루려는 반정의 대열에 신하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했다는 것은 조선 시대 군신 간의 권력 관계가 서서히 재편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중종은 준비되지 않은 왕이었다. 중종반정 당일 날 자기 집 앞으로 군사가 밀려오고 있다는 소리를 듣자, 중종은 이복형인 연산군이 자기를 죽이러 보낸 군사인 줄 알고 자살하려 했다. 그러나 중종 부인 신씨(연산군 궁중세력 대표인물 신수근의 딸)가 집에 도착한 군사가 말머리를 어디로 향하는 가를 보고 나서 결정해도 늦지 않다며 자살을 만류했다. 신씨 말대로 군사들의 말머리는 집 바깥쪽을 향해있어 중종을 죽이러 온 것이 아니라 보호하러 왔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이처럼 종종은 반정 당일까지도 자기가 왕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런 중종이기에 즉위 초에는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었다. 박원종, 성희안 등 반정공신의 위세에 눌려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오죽하면 중종반정으로 역적이 된 신수근의 딸인 조강지처 신씨 부인도 궁으로 데리고 갈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조강지처 신씨를 지척에 두고도 신씨가 죽을 때까지 궁으로 부르지 못한 채 생이별을 하고 말았다. 신씨가 중종이 궁궐에서 자기 치마라도 볼 수 있도록 인왕산에 자기가 입었던 치마를 항상 걸어 놨다는 애뜻한 인왕산 치마바위 전설만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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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새우난초】

【금새우난초】

【금새우난초】

희귀식물에 등록된 식물입니다.

줄기(=위구경)의 모양이 새우의 등과 같이 생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유사종으로 새우난초, 섬새우난초, 한라새우난초, 큰새우난초, 여름새우난초 등이 있는데 꽃의 크기나 색깔로 분류합니다.

▷ 학명 : Calanthe discolor Lindley for. sieboldii (Decne.) Ohw

▷ 분류 : 난초과

▷ 분포지역 : 한국(제주 및 경북), 일본

▷ 서식장소 : 산의 숲 속

▷ 특징 :

다년초로 근경은 옆으로 벋고 염주형으로 마디가 많으며 많은 뿌리를 내고 꽃대는 높이 40㎝에 달하며 1~2개의 인편엽이 있다. 잎은 밑부분에서 2~3개가 나와 밑부분이 초상(鞘狀)엽으로 싸여졌다가 점점 벌어지며 주름살이 많고 넓은 타원형으로 길이 20~30㎝, 너비 5~10㎝이다. 꽃은 4~5월에 황색으로 피고 꽃대 상부에 총상으로 달리며 포는 피침형으로 길이 5~10㎜이고 건막질로 끝이 뾰족하다

중종반정 2편

■ 중종반정 2편

■ 중종반정 2편

그러던 어느 날 박원종에게 신윤무가 찾아왔다. 같은 무과 출신에다 동네 주민이라 그들은 이전부터 절친한 사이였다. 신윤무는 연산군 축출 의사를 은근히 내비쳤다. 누이의 죽음 이후 연산군 축출을 고대하던 박원종은 신윤무의 말을 듣자마자 크게 공분(公憤)하였다. 그날 저녁 성희안이 박원종을 찾아와 마주앉게 되었다.

그들은 “우리가 평생을 충성과 의리로 살았으니 마땅히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할 것입니다. 대장부의 생사는 천명에 달렸으니 어찌 경각에 달린 종묘사직을 보고 구하지 않겠습니까?”라며 반정(反正:나쁜 임금을 폐하고 새 임금을 세움)을 결의했다. 반정 후에는 진성대군(성종의 계비인 정현왕후의 아들)을 옹립하기로 합의했다.

그날 이후 반정 계획은 박원종과 성희안에 의해 착착 진행됐다. 박원종은 무사들을 포섭했고, 성희안은 문신들을 포섭했다. 박원종은 조정 대신들의 의견을 하나씩 물었는데, 조정 대신들 대부분은 망설임 없이 반정계획에 동참하였다. 마침 연산군이 며칠 후 개성으로 행차하겠다는 명령을 공포했다. 박원종과 성희안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연산군이 한양을 비운 사이에 거사를 하면 성공 확률이 높기에 그날을 거사일로 정했다. 연산군 12년 9월2일이었다.

박원종은 거사를 며칠 앞두고 연산군의 처남이자 중종(진성대군)의 장인인 신수근을 찾았다. 아직 중종에게는 반정계획을 알리지 않은 상황이라, 그의 장인인 신수근에게 알리기 위해서였다. 신수근과 장기를 두던 박원종은 은근슬쩍 궁(宮)을 들어 바꿔놓았다. 장기의 궁은 왕이기에 궁을 바꿔놓는 것은 곧 왕을 바꾸겠다는 암시였다. 그때 신수군은 장기판을 밀치며 “내 머리를 베라”고 외쳤다. 절대 찬성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렇지만 신수근은 연산군에게 알리지는 못했다. 박원종이 새로 옹립하려는 왕이 자신의 사위였기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것이다.

전 이조참판 성희안은 지중추부사 박원종, 이조판서 유순정, 군자감부정 신윤무 등과 함께 왕이 장단(長湍) 석벽(石壁)을 유람하는 날을 기하여 거사할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왕의 행차가 취소되면서 거사에 차질이 생겼다. 이때 호남 지역에서의 연산군 폐위 거사 격문이 서울에 나돌게 되면서 결국 당초 계획을 강행하였다. 연산군(燕山君) 12년 9월 1일 밤!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등 반정 3대장은 반정(反正)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조선 개국 이래 최초로 신하가 임금을 갈아치우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반정군이 궁으로 들이닥치자 연산군(燕山君)을 위해 나서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어쨌든 박원종은 신수근, 임사홍 등 극소수의 연산군 측근을 제외한 거의 모든 신하들의 호응을 얻어 경복궁에 무혈 입성하였다. 사태를 파악한 시종이나 내관들, 갑사들 모두 도망가 버린 궁궐에는 연산군만이 남아 있었고, 연산군은 옥새를 내어 놓으라는 반정군에게 마치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다는 듯이 순순히 옥새를 내 놓고 실성한 사람처럼 멍하니 있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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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반정 1편

■ 중종반정 1편

■ 중종반정 1편

연산군이 폐비윤씨 사건을 문제 삼아 일으킨 갑자사화는 임사홍, 신수근 등의 새로운 측근 세력을 등장시켜 기존 훈구세력의 기반을 탈취하려고 일으킨 사화였다. 갑자사화 이후 연산군은 측근 세력을 적극 등용해 친위 체제를 만들고, 언론기관인 사간원을 폐지하고, 정치 논쟁을 허용하지 않기 위해 경연(經筵)을 중지시켰다. 비판 세력이 대부분 제거된 상황이어서, 연산군의 방탕 생활은 더욱 심해지고 민생은 도탄에 빠졌다.

연산(燕山君)군은 하늘이 왕에게 내리는 경고인 기상이변을 보고하지 못하게 했다. 재변(災變)에 대해 연구하는 관상감은 재변을 보고 했다고 해서 없애버렸고, 그 전에 홍문관과 사간원은 말이 많다고 이미 없애버렸다. 언로(言路)를 아예 막아버린 것이다. 이렇게 조정의 모든 절대 권력을 한 손에 거머쥔 연산군(燕山君)이 할 일은 향락 밖에 없었다. 사냥을 위해 도성 밖 30리에 걸쳐 민가를 철거하고, 기생과 전국의 미녀들을 불러 연일 호화로운 잔치를 벌였으며, 그 경비를 마련하려고 백성들에게 과도한 공물을 바치게 했다. 훈민정음으로 쓴 비난 투서가 잇따르자, 훈민정음을 사용하거나 학습하지 못하도록 하고, 관련 서적을 불태웠다.

당시 연산군의 호사스럽고 환락적인 생활로 궁궐재정은 바닥이 나 있었다. 연산군시절 두 차례의 사화와 공포정치가 거듭되는 동안 훈구, 사림 할 것 없이 많은 신하들이 희생되었다. 창덕궁과 담을 사이에 두고 있는 성균관을 연회(宴會) 장소로 만들었고, 장악원을 개칭한 연방원(聯芳院)을 원각사(圓覺寺)에 두어 기생들의 모임 장소로 삼았다. 이처럼 연산이 유희와 환락으로 세월을 보내며 국정을 도외시하자 갑자사화로 큰 희생을 본 훈구파들도 연산을 더 이상 견뎌낼 수 없었다. 훈구 세력을 중심으로 반정(反正)의 움직임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연산군의 행태를 비판하다 한직으로 좌천된 전 이조참판 성희안(成希顔)이 1506년에 마침내 거사를 계획했다.

성희안은 무신 출신인 박원종(朴元宗)과 신망이 높은 이조판서 유순정(柳順汀)을 끌어들이고, 연산군의 총애를 받는 군자감부정(軍資監副正) 신윤무(辛允武), 군기시검정(軍器寺僉正) 박영문(朴永文) 등을 포섭했다.

연산군 12년(1506년) 7월20일에 승평부부인 박씨가 여러 가지 추문을 남기고 죽은 후, 남동생 박원종은 하루하루를 울분 속에서 지냈다. 연산군의 아이를 배어 자살했다는 소문이 파다했고, 억울하게 죽은 누이의 복수를 결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사도세자의 죽음 2편

■ 사도세자의 죽음 2편

■ 사도세자의 죽음 2편

사도세자는 과연 아버지와의 갈등에서 오는 정신적 압박감으로 광인(狂人)이 되었을까? 아니면 또 다른 이유로 정신병자로 몰렸던 것은 아닐까? 정치적인 이유는 아니었을까?

영조의 아버지 숙종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으나 장성한 왕자는 후에 경종이 된 세자와 연잉군(영조) 단 두 명이었다. 이복형인 세자는 생모 장희빈이 숙종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왕위를 계승하기에는 건강이 약해 세자이면서도 왕위계승자로서의 위치가 견고하지 못했다. 경종은 생모 장희빈의 친정집을 중심으로 한 소론의 지지를 받았고, 장희빈의 죽음으로 복위한 인현왕후를 등에 업고 정국을 주도하던 노론은 세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잉군(영조)을 공공연히 왕위계승자로 거론하였다. 연잉군(영조)은 정쟁(政爭)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조용히 소심하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이복형인 경종은 왕위에 오르기는 했으나 얼마 있지 않아 후사 없이 죽고, 노론의 주장으로 왕세제로 책봉되었던 영조가 노론의 지지를 받으며 즉위하게 되었다. 노론과 소론의 첨예한 대립을 조절하면서 정치적 안정을 꾀하기 위해 ‘탕평책’을 폈지만, 노론의 적극적인 지지로 왕위에 올랐음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사도세자는 영조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하면서 노론의 독주를 깨닫고 이에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이는 당시 정권에서 소외된 소론이 정계로 진출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고, 노론에게는 자신들의 기반을 흔드는 위기였다. 따라서 노론은 사도세자를 제거해야만 했다.

영조의 입장에서도 자신의 생모가 비천한 신분이었던 데 대해 늘 자격지심이 있었고, 왕이 되는 과정에서 일부 세력(소론)에 의해 경종 독살 의혹을 받았음을 의식하면서 심리적으로도 늘 불안했다. 이에 소론과 놀아나는 세자를 희생시킴으로써 자신은 물론 자신을 지지하는 노론의 위치를 공고히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영조는 세자가 죽은 후,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려 그의 지위와 신분을 회복시켜 주었다.

왜 그랬을까? 애원하며 죽어가는 아들을 외면했고, 아비를 살려달라는 세손(정조)의 눈물도 외면했던 그가. 이는 다음 왕위를 이을 세손(정조)을 보호하여 왕실의 안녕을 지키려는 의도로 보인다.

♣ 제공 : KIMSEM과 함께 역사 다시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