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8일 월요일

태실胎室 수난기 3편

■ 태실胎室 수난기 3편

■ 태실(胎室) 수난기 3편

그 시절 수습되어 온 왕실의 태항아리는 우선 시내 당주동 128번지 의 이왕직봉상소(李王職奉常所)에 임시 봉안되었다가 이듬해 봄에 모두 서삼릉으로 옮겨지는 과정을 거쳤다. 그런데 원래 명당만을 골라 모셨을 태실 자리를 포기하고 구태여 태항아리를 한곳에 모으려고 했던 까닭은 또 무엇이었을까? 그것이 망국의 왕실이 겪어야 할 수난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 태실을 옮겨오기 위해 이 일을 관장한 이왕직의 전사(典祀) 이원승과 유해종이 전국 각처의 태실을 순방한 것이 1928년 8월 무렵이었다. 그 때가 순종 임금이 세상을 떠난 직후였으니, 태실을 한곳에 정리하고자 하는 계획을 구체화하는 데에는 별다른 걸림돌이 없던 시점이었다.

실제로 충남 홍성군 구항면 태봉리에 봉안했던 순종의 태실조차도 1928년 8월 18일에 봉출했다가 홍성군청을 거쳐 그 다음날 서울로 옮겨지는 등 왕실의 위세가 전혀 작용하지 못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어디랄 것도 없이 태실의 관리 현황이 너무 엉망이었다는 점이었다. 이들이 돌아다녀 본즉, 역대 국왕의 태실은 여러 곳이 이미 도굴을 당했고, 심지어 태실이 명당이라 하여 그 자리에다 민간인들이 시체를 암장한 곳도 수두룩한 지경이었다. 그러니 온전하게 태실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태항아리를 모두 한자리에 모아야 한다는 그들의 명분도 고스란히 먹혀 들 수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가령 충남 예산의 현종(顯宗) 태실은 태항아리 마저 온데간데없었고, 충남 홍성의 순종 태실에는 암매장한 시신 두 구가 나왔다고 전해진다. 현재 서삼릉 태실 구역으로 옮겨진 역대 국왕의 태실 가운데 소화(昭和) 연호가 새겨진 탑지와 더불어 신규 제작된 외호(外壺)에 담겨져 태항아리가 모셔진 사례가 적지 않은 것은 바로 이러한 까닭이다. 결국 대다수 역대 국왕과 왕실의 태실이 서삼릉으로 옮겨져 마치 공동묘지와도 같은 형태의 군락을 이루게 된 데는 나라 잃은 슬픈 우리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창경궁으로 옮겨진 성종의 태실도 말이 태실이지, 그저 이왕가 박물관의 야외 진열품으로 전락한 채로 남겨졌던 것이다.

더구나 세월이 흘러 창경원은 다시 창경궁이 되었고 이왕가 박물관은 사라진 지 오래니, 이제 성종 태실은 딱히 오갈 데가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성종태실이 더 이상 창경궁 안에 머물러야 할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 앞으로의 처리 문제를 문화재청에서 좀 더 관심을 가지고 논의해 소중한 문화재로서 대접을 받았으면 하는 소망이다. 그런데 원래 창경궁은 성종 14년에(1483년) 정희왕후(성종의 할머니), 소혜왕후(성종어머니), 안순왕후(예종 비)를 위해 건립한 궁궐이라 하니, 성종 태실이 이곳까지 흘러온 것은 우연이 아닌지도 모를 일이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태실胎室 수난기 2편

■ 태실胎室 수난기 2편

■ 태실(胎室) 수난기 2편

서삼릉을 훼손하는 행위는 일제시대에만 그친 것이 아니다.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대한민국이 탄생한 뒤에도 서삼릉은 지속적으로 훼손당해왔다.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사적 200호인 서삼릉 부지는 123만평이었다. 하지만 군사정권이 들어선 후, 이런 저런 특례법을 만들어 1963년부터 1968년까지 이리저리 총 83만1649평이 매각되었다. 또한, 외곽순환도로가 서삼릉 태실과 회묘 바로 옆을 통과하여 건설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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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원(동물원)’이 서울대공원으로 옮겨가고 벚나무가 가득했던 유원지의 모습을 걷어낸 자리에 궁궐의 외형과 ‘창경궁’이란 이름을 되찾게 된 것이 1986년 8월이었다. 너무나 오랜 세월동안 이름을 잃었기 때문에, 아마도 창경원 시절을 기억하는 어르신들은 여전히 입에서 창경원 이라는 단어가 떠오를 때도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어린 시절 추억 속의 유원지 창경원의 모습이 동물원으로 또는 수학여행지로, 소풍지로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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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큼 ‘창경궁’이 창경원이었던 기간은 일반 공개만을 기준으로 하더라도 1909년부터 1983년까지 얼추잡아 70년이 훌쩍 넘는 긴 세월이었다. 아무리 열심히 원형복원을 추진하더라도 창경원 시절의 잔영을 말끔히 씻어내는 데는 한계가 있을 지도 모른다. 원래 이왕가 박물관 본관이었던 장서각 건물을 1992년 11월에야 뒤늦게 헐어내기는 했지만, 지금도 창경궁 안에는 춘당지(春塘池)가 남아 있고, 대온실, 중국에서 건너온 보물 제1119호 팔각칠층석탑이 남아 있으며, 또 언제 반입된 것인지도 알지 못하는 오층석탑 하나도 명정전 뒤편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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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성종태실비(成宗胎室碑)’ 역시 창경원 시절이 남겨놓은 흔적의 하나이다. 궁궐 속에 태실(胎室)이란 것도 어색하거니와 그것도 왜 하필이면 성종대왕의 것이 창경궁에 와 있는 것일까? 국왕의 태실로는 드물게 원래 경기도 광주군 경안면 태전리에 있던 ‘성종태실비’가 1928년 이왕직(李王職)의 손을 거쳐 이곳 창경원으로 옮겨졌다. 그 무렵에 이왕직에서는 전국 각처에 흩어진 왕실 태항아리를 수습하여 서울로 옮겨오던 중이었다. 그런데 대개 태실의 석물은 현지에 내버려둔 채 태항아리만을 수습해 오던 터라 그 모습을 보전하기가 힘드니까, 그중에 상태가 가장 좋은 성종태실 하나만을 골라 석물 일체를 창경원 쪽으로 옮겨오기로 했다는 웃픈 뒷얘기가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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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태실胎室 수난기 1편

■ 태실胎室 수난기 1편

■ 태실(胎室) 수난기 1편

일제강점기 일본은 풍수설을 역이용하여 명산마다 쇠말뚝을 박고 지맥을 끊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았을 터이다. 조선왕조의 기운을 쇠하게 만들기 위함이라 하는데, 그 만행이 조선왕조의 태봉에까지도 미쳐 태실은 수난을 당하게 된다. 태실지가 왕조의 번영을 위한 목적에서 조성된 것이라는 것을 간파한 일제는 전국의 태실 주변에 신작로를 내거나, 태실을 고의적으로 훼손하기 시작했다.

조선왕조가 멸망한 1910년, 일제는 왕실을 관리한다는 명목으로 11월에 일본 궁내성 소속 이왕직(李王職)이라는 기관을 설치했다. 이왕직은 조선왕조를 이씨조선(李朝)이라고 폄하하는 작업부터 시작해 왕실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일에 몰두한다. 경복궁 일부를 헐어내어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를 건립하고, 궁에서 철거한 목재는 일본인들의 별장이나 요정을 짓는데 사용했다. 또한 창경궁을 유원지화 하여 동물원과 식물원을 개설하고 관람을 이유로 일반인의 출입을 자유롭게 하였다. 순종 서거 2년 후인 1928년 조선총독부는 이왕직의 이름으로 태실 정리를 계획하고 전국에 묻어둔 조선 왕의 태 53기를 파헤쳐 ‘서삼릉’으로 옮겼다. 태를 담았던 조선 백자들은 거의 모두 도굴 당했음은 물론이다. 태실이 있던 명당자리에는 일제시대 권력가(조선인, 일본인)들의 무덤이 들어앉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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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고양시 삼송리에 있는 사적 제200호인 서삼릉(西三陵)은 조선말기 왕실의 가족 묘지이다. 서삼릉은 희릉, 효릉, 예릉의 3릉이 서울 서쪽에 있다 하여 붙여진 칭호이다. 희릉(중종계비 장경왕후 윤씨), 효릉(인종과 인성왕후), 예릉(철종와 철인왕후)과 조선 역대 왕들의 태(태)가 묻혀있는 태실 54위, 폐비 윤씨의 회묘, 공주, 옹주, 후궁들의 묘지 등 7개 구역으로 이뤄져 있다. 또한 역대 3세자의 묘인 의령원(사도세자의 장자인 의소세손), 효창원(정조의 장자인 문효세자), 소경원(인조의 장자인 소현세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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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왕릉 경역 내에는 후궁, 왕자, 공주 등 왕이 아닌 신분의 묘나 태실을 둘 수 없다. 그러나 조선왕조가 망하자, 일제가 망국왕실을 관리한다는 명목 하에 전국 각지에서 왕자, 공주, 옹주들의 태를 옮겨와 서삼릉에 일괄 집장(執藏)함으로서 서삼릉은 왕릉으로서의 존엄과 품격마저 잃게 된 것이다. 일제는 태실을 마치 공동묘지처럼 서삼릉에 한꺼번에 안치했는데, 그 배열을 날 일(日)자 형태로 하여 신사 분위기를 연출하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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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우리말 나들이

■ 우리말 나들이

■ 우리말 나들이

1. 꿔다놓은 보릿자루

어떤 자리에서 있으나 마나 존재감이 없거나, 여러 사람이 모여 이야기할 때, 혼자서 끼어들지 못하고 가만히 있거나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을 ‘꿔다놓은 보릿자루’ 라고 한다.

연산군의 폭정이 극심해지자, 몇몇 신하들이 그 폭정에 항거하는 거사를 도모하게 되었다. 박원종의 집에 모여 각자의 역할을 정하고, 거사순서나 시간 등 세부사항을 확인하며 회의를 몇 차례 거듭하게 되었다. 그들은 기밀이 새어나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누가 누군지 구별 못하게 불도 켜지 않고 어둠속에서 회의를 하곤 했는데, 그러던 어느 날 성희안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앉아있는 사람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상하게 여긴 그는 모인 사람의 숫자를 세어보았는데, 약속한 사람보다 한 사람이 많았다. 놀란 성희안은 그 사실을 박원종에게 보고했고, 박원종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 조심스럽게 확인하다가 폭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혹시나 첩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그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옆집에서 꿔다놓은 보릿자루였던 것이다. 누군가가 그 위에 도포와 갓을 올려놓아 어둠 속에서 사람처럼 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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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어떤 자리에서 있는 둥 없는 둥 말없이 듣고만 있는 사람을 꿔다놓은 보릿자루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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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양아치

‘양아치’는 원래 거지를 뜻하는 말인데, 요즘은 품행이 바르지 못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못된 짓을 일삼는 사람을 가리킬 때 쓰이고 있다. 양아치는 집집을 전전하며 밥을 얻어먹는 ‘동냥아치’의 준말이다. ‘동냥’은 동령(動鈴)에서 유래된 말로, ‘방울을 흔든다’ 는 뜻이다. 스님들이 탁발을 나가면 염불과 함께 방울을 흔들어 자신의 존재를 집주인에게 알렸는데, 이 방울을 흔드는 ‘동령’이 구걸을 하는 행위와 같은 것으로 인식되면서, 동령이 동냥으로 변하여 자연스레 ‘동냥아치’라는 말이 생겼다.

3. 갈등(葛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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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葛藤)은 서로 의견이 다르거나 이해관계가 얽혀 화합(和合)하지 못하고 충돌(衝突)함을 의미하는데, 칡갈(葛)자와 등나무 등(藤)자로 이루어져 있다. 칡과 등나무는 무언가를 감고 위나 옆으로 뻗어나가려는 성질을 갖고 있는 덩굴식물이다. 그런데 칡나무는 올라갈 때 위에서 보면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며 자라고, 등나무는 올라갈 때 위에서 보면 시계방향으로 돌며 자란다. 즉, 서로 자라는 방향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갈나무와 등나무를 한자리에 심어놓으면 서로 계속 다른 방향으로 자라서 엉키고 꼬여 풀 수 없게 된다. 이렇게 두 식물이 서로 얽히고 설킨 모습에서 우리들이 흔히 쓰는 갈등이란 말이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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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명나라 황제 만력제 2편

■ 명나라 황제 만력제 2편

■ 명나라 황제 만력제 2편

만력제는 조선 백성들이 왜군들 때문에 수확을 하지 못해 굶주리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명나라의 재정을 털어 산둥성의 쌀 백만 석을 매입해 조선 백성들을 위해 원조했다. 쌀 1석이 89kg이므로 100만석이면 자그마치 약 9만 톤의 쌀을 조선에 지원해준 것이다. 더군다나 현대적 운송 수단이 없던 시대에 9만 톤의 쌀을 조선에 실어다 날랐다는 것은 엄청난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다시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만력제는 20만 대군을 다시 지원군으로 파견하여 일본군을 막아내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더구나, 명나라에서 내란이이 일어났을 때에는 자국을 위해서 단 한 푼도 개인 재산을 내놓지 않았던 만력제가 정유재란 이후 조선의 전후 복구사업을 위해 자신의 개인 재산인 은화 200만 냥을 추가로 지원하기까지 한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야 정말 고맙지만, 중국인들의 입장에선 도대체 만력제는 왜 이리도 조선에 지극정성이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는 부분이다. 이렇다 보니, 중국에선 만력제가 ‘도대체 어느 나라 황제인 것이나’ 는 불만이 터져 나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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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후, 만력제는 후대 중국인들에게 고려천자, 조선천자라는 비아냥과 함께 나라의 재정을 파탄 낸 원흉 취급을 당해 제사도 전혀 받지 못했고, 현대에 와서는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의 준동(蠢動)으로 유골이 불타오르기까지 했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당파를 막론하고 만력제를 추종하는 인물들이 생겨났다. 숙종 때에는 송시열의 제자들이 만력제의 공덕을 기리는 만동묘(萬東廟)를 세웠고, 조선 조정에서는 대보단(大報壇)을 세우게 되었다. 조선에서는 민간과 정부 할 것 없이 만력제의 공덕을 기리게 되었고, 이 만력제에 대한 제사는 자그마치 1937년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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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것을 보면, 임진왜란 이후 조선이 명나라를 재조지은(再造之恩)이라며 맹목적으로 사대하게 된 나름의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명나라 황제 만력제 1편

■ 명나라 황제 만력제 1편

■ 명나라 황제 만력제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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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황제 만력제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조선을 도와주기 위해 원군 파견을 결정했던 명나라의 황제이다. 이 만력제에게는 고려천자 조선천자라는 별명이 있었다. 이유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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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력제는 명나라 제13대 황제로, 명나라에서 제일 오랜 기간인 48년 동안 황제의 자리에 앉아 있었던 사람이다. 하지만 만력제는 황제의 자리에 있던 48년의 세월 중, 자그마치 30년간이나 정사를 돌보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나마 정사를 돌보았던 나머지 18년의 재위기간 중 7년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도와주는 데에 시간을 보냈다) 말 그대로 황제가 파업을 선언하고, 국가 정사를 돌볼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고, 자신에게 아부하는 신하를 재상으로 앉히거나, 술과 여자를 밝히며 내탕금(개인 재산)을 축적하는 데에만 몰두했다.

더군다나 만력제는 워낙 성격이 낙천적이고 놀기를 좋아했던 황제였는데, 그는 무덤 공사와 자신의 보물을 감상하는 것을 즐겼고, 자금성의 궁궐 깊숙한 곳에서 무려 10만 명의 궁녀와 환관의 시중을 받으며 시간을 보냈다. 황제가 얼마나 신하들에게 얼굴을 비치지 않았으면, 새로 관리가 된 신하들 중에서는 한참동안 황제의 얼굴을 전혀 몰랐던 인물도 있었다고 한다. 결국, 황제가 나라를 돌보지 않자 명나라는 깊은 수렁에 빠졌고, 그의 사치에 나라의 국고는 점점 비어만 갔지만 만력제 개인 재산은 쌀과 금은보화가 넘쳐나는 상황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던 중, 조선에서 임진왜란이 발발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자신이 통치하는 나라의 상황은 눈꼽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던 만력제가 마치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위기에 빠진 조선을 위해(?) 모든 국력을 동원하여 파병을 결정했다. 하지만 명나라 조정의 신하들은 이런 결정에 반대했다. 아직 명나라 본토가 공격을 받지도 않았는데 굳이 서둘러 파병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여태까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던 황제가 느닷없이 나타나 조선 원군(援軍) 파병을 명하니 신하들은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만력제는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4만 명의 군사를 이여송이라는 장수에게 내어주어 조선에 파병했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한양이 함락당하고 임금이 의주까지 피난 와서 요동으로 망명을 타진할 정도로 암담한 상황이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명나라의 지원군은 천군만마와 같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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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우리 궁궐 이야기 2편

■ 우리 궁궐 이야기 2편

■ 우리 궁궐 이야기 2편

내전과 외전의 주변으로 주로 서쪽에는 궁궐에 들어와 왕을 자주 만나는 관원들의 공간이 있는데 이를 궐내각사(闕內各司)라고 한다. 그리고 동쪽 편으로는 세자의 집이 배치되어 있는데 이를 동궁(東宮)이라 한다. 사극을 보면 세자를 ‘동궁’이라고 부르는 장면이 나오곤 한다.

수많은 궁궐 건물들은 이름 끝에 전(殿), 당(堂), 합(閤), 각(閣), 재(齋), 헌(軒), 루(樓), 정(亭) 등의 글자가 붙는데, 제각각 그 기능과 주인의 신분에 따라 규모가 다를 뿐만 아니라 불리는 이름도 다르다. 전(殿)은 왕이나 왕비 또는 왕의 어머니나 할머니 같은 사람들이 사는 집에 붙는 이름이고, 그 다음 단계의 건물이 당(堂)이다. 예를 들어, 왕은 당(堂)에도 기거할 수 있지만 세자는 전(殿)에는 기거할 수 없는 것이다.

합(閤)이나 각(閣)은 전(殿)과 당(堂)보다 격이 한층 떨어지는 건물로서 그것을 보조하는 경우가 많다. 재(齎)나 헌(軒)은 대체로 왕실 가족의 주거 공간이거나 관원들의 업무 공간에 붙는 이름이다. 루(樓)는 지면에서 떨어지게 높이 지은 마루이거나 혹은 이층집인 경우 이층을 가리킨다. 이때 일층은 각(閣)이라는 이름을 따로 가진다. 정(亭)은 경치 좋은 곳이 지은 작은 휴식공간이다.

‘전당합각재헌루정’ 이 엄격한 법칙성을 갖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그 순서대로 건물들의 위상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왕이나 왕비들은 용변을 어떻게 해결했을까? 화장실은 냄새나고 더러운 곳이니 되도록 멀고 구석진 곳에 위치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뒷간’이라고 부르는 것 일테다. 그 먼 곳까지 일일이 갈 수야 없지 않은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높은 신분의 사람들은 아마도 이동식 변기를 사용했을 것이다. 우리나라 궁궐도 옛날 왕과 왕비를 비롯한 왕실의 고위 신분의 사람들은 뒷간에 가지 않고 이동식 변기를 썼던 것으로 보인다. 궁중 용어로 변(便)을 ‘매화(梅花)’ 라고 쓰고 ‘매우’ 라고 발음한다.

왕의 이동식 변기를 ‘매우틀’ 이라고 하는데, 세 변은 막히고 한쪽이 뚫려있는 ‘ㄷ’ 자 모양의 나무로 된 좌변기이다. 앉는 부분은 빨간 우단으로 덮었고, 그 틀 아래에 구리로 된 그릇을 두어 이곳에 대소변을 받게 되어 있다. 이것으로 왕의 건강을 수시로 체크하기도 하였다.

♣ 제공 : KIMSEM과 함께 역사 다시보기

2024년 4월 7일 일요일

피부를 젊게 만드는 5가지 건강식품

피부를 젊게 만드는 5가지 건강식품

피부를 젊게 만드는 5가지 건강식품

▷ 고구마

베타-카로틴이 풍부하게 들어있다. 베타-카로틴은 피부 산성도를 맞춤으로써 피부가 건조해지는 것을 막는다. 또 피부의 각질 현상을 개선시켜 매끈한 피부를 갖게 한다.

▷ 연어

붉은 항산화제로 불리는 아스타잔틴이 들어있다. 이 성분은 세포막과 DNA에 손상을 주는 유해산소를 퇴치한다. 연구에 의하면 5일에 한 번씩 연어를 먹으면 피부암의 전구 질환인 광선각화증을 예방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 토마토

토마토에 풍부한 라이코펜은 자외선 차단제와 같은 역할을 한다. 토마토를 올리브 오일과 함께 먹으면 라이코펜을 최대한 흡수할 수 있다.

▷ 감귤류

오렌지, 레몬, 귤, 자몽 등 감귤류에는 피부를 젊게 하는 콜라겐 생성에 필수적인 비타민C가 풍부하게 들어있다. 또한 자외선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하고 세포가 죽는 것을 방지하는 바이오플라보노이드 성분도 들어있다.

▷ 잎채소

시금치, 케일 등의 잎채소에는 루테인이 많이 들어있다. 이 성분은 햇볕으로 인한 염증과 주름살이 피부에 생기는 것을 막아준다.

막걸리'에 대한 흥미로운 사실

막걸리에 대한 흥미로운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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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에 대한 흥미로운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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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중 상품마다 차이가 있지만, 보통 생막걸리 100ml에는 1억~100억 마리의 유산균이 들어있다. 이는 요구르트의 100배 이상에 달하는 양으로 장 건강을 활발하게 해주고 유해성분을 없애는 효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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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발효 기간을 줄이고 생산원가를 아끼려고 업체들이 막걸리에 화학물질 카바이드를 넣는 꼼수를 부리곤 했다. 이에 사람들은 막걸리를 마신 다음 날 숙취와 두통을 호소했다. 요즘에는 이러한 화학물질이 거의 들어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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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동주와 막걸리는 미묘하게 다르다. 한국 소비자원 공식 블로그에 따르면, 동동주와 막걸리는 찹쌀과 멥쌀 등의 곡물 재료와 발효과정은 같다. 막걸리는 다른 술보다 칼로리가 낮다. 술 100ml를 기준으로 와인의 칼로리는 70~74kcal, 소주는 41k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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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스키는 250kcal 정도 한다.

이에 반해 막걸리는 1잔에 40~70kcal로 다른 술에 비해 매우 낮은 편이다. 같은 양을 마셔도 열량 걱정이 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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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이면 흔들어 먹는 것이 좋다. 곡물을 찐 다음, 물과 누룩을 섞어 발효시킨 뒤 시간이 지나면 맑은 술과 쌀알이 위로 뜬다. 이 윗부분을 퍼내 담으면 동동주가 된다. 이와 달리 막걸리는 술이 발효된 뒤 찌꺼기를 걸러내고 물을 섞어가며 휘휘 저은 채로 마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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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걸리의 5가지 효능 *

1. 막걸리는 소주와 맥주와 다르게 지방간 억제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2. 적당히 마시면 대표적인 막걸리 효능으로 간기능 개선 효과가 있습니다.

3. 막걸리에는 유산균이 들어있죠? 이 유산균이 장속의 균을 없애주는 역할을 해서 면역력을 높여줍니다.

4. 막걸리의 달달한 맛이 위액 분비를 촉진 시킨다고 합니다. 입맛 없을 때 입맛을 돌아오게 한다는 군요.

5. 막걸리에는 식이섬유가 풍부합니다. 장 활동을 도와주죠. 변비예방에도 좋답니다.

여성에게 좋은 건강음식 베스트6

여성에게 좋은 건강음식 베스트6

여성에게 좋은 건강음식 베스트6

1. 딸기, 블루베리 등 각종 베리

베리에는 노화를 방지하는 항산화성분이 어떤 다른 음식보다 많이 들어있어요. 이 성분들은 단순히 성인병의 위험을 낮출 뿐만 아니라, 기억력 감퇴도 방지하는 효과가 있어요.

▶얼마나 먹어야 할까? 하루에 한 컵 분량이 적당해요. 딸기이건 라즈베리이건 블루베리이건 상관없어요. 최소 1주일에 3번은 먹어야 효과가 있어요. 간식을 베리로 대신한다면 섬유질 섭취량이 늘어 변비를 해소하고 체중 증가도 막을 수 있어요.

2. 연어

연어는 건강에 유익한 지방 성분인 오메가3지방산을 공급하는 주요 식품. 오메가3지방산은 암의 발병 위험을 줄이고 기억력을 높이는 한편, 혈압 조절과 노화 방지에도 효과적이에요. 알약으로 만들어진 오메가3제를 먹는 것보다는 생선을 통해 자연적으로 섭취하는 것이 좋아요.

▶얼마나 먹어야 할까? 1주일에 두번은 식탁위에 올리도록 해요.(연어 대신 참치를 먹어도 좋아요).

3. 푸른잎 채소

시금치와 상추, 케일 등 적녹색 채소를 많이 먹으라는 이야기는 수없이 들어보셨죠? 이같은 채소에는 섬유소와 비타민C와 K, 엽산, 칼슘과 마그네슘, 아연과 철 등의 미네랄 성분도 풍부해요.

▶얼마나 먹어야 할까? 하루에 두끼 이상 섭취 하면 좋아요.

4. 땅콩 등 견과류

단백질과 마그네슘, 비타민 B와 E를 공급하며 심장병과 암을 예방하는 데 효과가 있어요. 물론, 견과류는 열량이 높다는 단점이 있어요. 그러나, 견과류 속 지방은 건강에 이로운 성분으로 적정량만 섭취한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얼마나 먹어야 할까? 1주일에 5줌 정도.(땅콩과 아몬드, 호두,캐슈넛 등을 섞어 한 번에 1/4 컵씩 먹기)

5. 당근, 살구, 고구마

진한 노랑이나 주황빛을 띈 야채들은 암발생 위험을 낮추는 베타 카로틴 성분을 잔뜩 함유하고 있어요. 또한 감기를 예방하고 자외선으로 손상된 피부를 치유하는 기능을 해요. 혈압을 낮추고 심장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기도 해요.

▶얼마나 먹어야 할까? 하루에 반 컵 정도 분량을 먹는 것이 좋아요. 고구마 1개 또는 당근 큰 것 1개, 살구 12개 등을 번갈아 가며 먹어요.

6. 요거트

반드시 설탕 첨가물이 없는 플레인 요거트여야 해요. 이런 요거트에는 비타민 B와 칼슘, 유익한 유산균이 들어있어 위를 튼튼하게 하고 면역력을 길러줘요. 변비 치료에도 좋으며, 효과적인 다이어트 식품이기도 해요.

▶얼마나 먹어야 할까? 1주일에 4컵 이상 먹는 것이 효과적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