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9일 화요일

조선의 소방관 1편

■ 조선의 소방관 1편

■ 조선의 소방관 1편

1426년(세종8년) 2월 한양에서 방화(放火)로 인한 큰 화재로 한성부 남쪽에서 집 2,170채와 행랑채 106칸을 태우고 32명이 불에 타 죽는 큰 피해를 입었다. 당시 한양 인구는 약 10만 명에 백성이 사는 집은 1만6921채 정도였으니 얼마나 큰 피해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불은 때마침 세차게 불어오는 서북풍 때문에 순식간에 한성의 중부, 북부, 남부 민가로 번져갔고, 일대가 눈 깜짝할 사이에 잿더미로 변했다. 집들이 서로 가까이 붙어 있어 한 집에 불이 나면 온 동네를 태우고 나서야 꺼졌기 때문에 화재는 그야말로 재앙이었다. 다행히 종묘와 궁궐로는 불이 옮겨 붙지 않았지만, 거리에는 어린아이와 노인 등 급작스러운 화재에 미처 대피하지 못한 이들의 시체가 즐비하였다.

세종은 강원도 횡성에서 사냥을 하고 있다가 불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시시각각 화재 대책을 지시하면서 환궁(還宮)을 서둘렀다. 이 화재 사건을 계기로 세종은 종루 옆에 우리나라 최초의 소방관청인 금화도감(禁火都監)을 설치했다. 하지만 요즘 소방서와 다른 점은 불이 나도 금화도감에서는 직접 불을 끄러 출동하지는 않았다. 금화도감은 백성들에게 예방교육을 철저히 실시하고, 대비책을 강구하는 업무에 힘썼다. 불이 이웃집으로 번지는 것을 막도록 가옥과 가옥 사이에 방화장(防火墻)을 쌓았는데, 이 때 울타리나 담은 불에 잘 타지 않는 나무로 짓게 했다. 또, 불이 났을 때 신속히 끌 수 있도록 사다리와 물 푸는 그릇 따위를 각 마을마다 준비하게 하고, 우물이 부족한 마을은 물독을 다섯 집마다 한 개씩 갖춰 방화수를 저장해 두는 등 방화 업무를 총괄하는 관청이었다. 또 화재로 해를 입은 사람들이 당분간 먹고 살 수 있도록 하는 이재민 구휼에도 힘썼다.

불이 난 지 한 달 만인 3월 6일, 방화범 이영생과 장원만 등 일곱 명이 붙잡혔다. 동전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죄로 관청에서 재산을 몰수하자, 이에 원한을 품고 화재를 일으킨 것이었다. 조선은 1425년(세종7년) 2월 처음으로 동전인 조선통보(朝鮮通寶)를 유통시켰는데, 4월에는 저화(楮貨:고려 말 만들어진 닥나무로 만든 종이돈) 사용을 금지하고 동전만 사용하도록 했다. 따라서 이를 어기면 경제사범이 되는 것이다. 특히 죄가 중한 자는 군중이 보는 곳에서 곤장 1백 대를 때리고 수군으로 강제 편입시켰으며, 재산은 관에서 몰수했다. 또 범인을 고발한 자에게는 죄인의 재산 반을 상금으로 주었다. 이 형벌이 너무 과해 한때 방화를 저지르는 자들이 창궐하기도 했다고 한다.

세종의 아버지인 태종 때 이미 ‘금화령’이 만들어져 있어 방화범(放火犯)은 대부분 극형인 능지처참에 처해졌고 가족들은 모두 노비가 되었다. 대사령(大赦令) 때도 사면되지 않는 상사소불원(常赦所不原)에 해당하는 범죄였다. 실수로 불을 냈다 해도 엄벌에 처하고, 자기 집을 태운 사람은 볼기 40대, 남의 집을 태운 사람은 볼기 50대 맞았다. 종묘(宗廟)와 궁궐을 태운 자는 설령 실수라 할지라도 교수형(絞首刑)에 처해졌고, 궁궐 창고를 지키거나 죄인을 간수하는 관리들이 불이 났을 때 혼자 도망가면 곤장 100대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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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엿 먹어라! 2편

■ 엿 먹어라! 2편

■ 엿 먹어라! 2편

어쨋든, 이 ‘무즙파동’으로 인하여 ‘엿 먹어라’라는 부정적인 비속어로 널리 쓰이게 되기는 했지만, 1930년대의 신문에도 이미 ‘엿 먹어라!’라는 표현이 나와 있다고 하니 이 또한 정확한 유래는 아닌 듯하다.

보통 우리 생활 속에서 ‘엿 먹어라’는 ‘혼 좀 나봐라’ ‘고생 좀 해 봐라’ ‘닥치고 있어라(엿을 먹으면 입에 붙어 말하기가 어렵다)’ 등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외국 영화에서 손가락 욕설과 함께 ‘Fuck You(성교:性交)’라는 대사가 나올 때면 주로 ‘엿 먹어라’로 번역 자막이 나온다. 그래서 ‘Fuck You(성교)’ 와 ‘엿 먹어라’가 혼동되어 성적인 욕설로 둔갑하기도 했다. 엿 자체에는 전혀 욕설의 의미가 없는데, ‘엿 먹이다’는 상대를 골탕 먹이거나 악의적인 의도로 하는 말이 되어버렸다.

우리나라에서도 ‘엿 먹어라’를 남사당패들이 성(性)적인 비속어로 사용했다는 주장이 있다. 남사당패는 과거에 전국을 돌면서 줄타기, 재주넘기, 가면극 등을 하던, 요즘으로 치면 연예인들이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에게서 떨어져 패거리 속에서 성장하면서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천민들이었다. 그들만의 집단생활을 하는데다가 입담 또한 거칠어서 여러 가지 은어와 비속어들을 사용했다. 그들이 사용한 성적인 은어 중에 여성의 성기를 뜻하는 말로 ‘뽁’과 ‘엿’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엿 먹어라’는 ‘성교(性交)’를 의미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또 우리의 고유 풍습에서 유래했다는 설(說)도 있다. 군역에 동원되었다가 고향에 가지 않고 그 지역에 주저앉아 살게 된 사람들이 초가집을 사면 엿을 돌리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는 딱히 계약서라는 것이 없어서 그래서 초가집의 소유권 분쟁이 일어나면, 그 집을 샀다는 증거로 주변인들이 엿을 먹은 날짜를 기억하는 것으로 대신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설(說)들도 문헌 증거가 있는 것이 아니므로 반론이 많지만, 당시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근거는 될 수 있다.

또한 ‘염(殮:시체를 관에 안장함) 먹어라’에서 변형된 것이라는 설(說)도 있다. 즉, ‘엿 먹어라’는 ‘죽어서 관에 들어가라’ 는 저주를 퍼붓는 욕설이라는 것이다.

유래가 어찌됐건 ‘엿’은 현재 우리 생활 속에서는 결코 좋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한편으로 지금은 보기 어려운 풍경이 되었지만, 입시철에 자식을 들여보내고 닫혀진 교문에다 정성들여 엿을 붙이고 간절히 합격을 기원하던 우리 어머니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엿 먹어라! 1편

■ 엿 먹어라! 1편

■ 엿 먹어라! 1편

먹을거리가 많지 않던 옛날에는 귀한 군것질거리였던 ‘엿’. 달콤하고 맛있는 간식 ‘엿’이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일상 언어생활에서 부정적인 경우나 비속어로 쓰이게 되었다. ‘엿 먹어라’의 유래는 확실치 않고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膾炙)되게 된 사건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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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는 초등학생이 중학교 진학을 위해 입학시험을 치르는 시대였다. 1965년 입학시험에서 지금의 과학에 해당하는 자연과목에서 엿을 만드는 재료에 대한 문제가 나왔다고 한다. 엿을 만드는 과정에서 필요한 것을 묻는 이 문제의 정답은 디아스타아제였다. 하지만 보기 중에 ‘무즙’도 있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무즙에도 디아스타제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 한문제로 당락(當落)이 결정된 불합격자에게는 정말 억울한 일이었다. ‘무즙’을 정답으로 쓴 학생들의 부모가 이의를 제기하였으나, 문제를 출제한 서울시 출제위원회는 어떠한 경우든 정답은 하나라는 원칙을 고수했다. 하지만 학부모들은 직접 ‘무즙’으로 엿을 만들어 보여주며 무즙에도 디아스타아제가 있으니 그것을 이용해서 엿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학부모들이 증명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야말로 난감한 일이었다. 그래서 이 문제를 없었던 것으로 하고 모든 학생에게 1점의 가산점을 주겠다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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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번에는 ‘디아스타아제’를 정답으로 쓴 학생의 학부모들이 항의를 시작했다. 틀린 학생도 점수를 주면 불공평하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출제위원회는 다시 원래 입장으로 돌아가서 ‘디아스타아제’만 답으로 하기로 결정했는데, 또 다시 혼란을 야기 시키고 말았다. ‘무즙’도 정답이라고 항의했던 학부모들이 다시 들고 일어났다. 학교를 상대로 집단 소송을 하며 서울시 교육위원회를 찾아가기도 했다.

지금도 대학입시에서 복수정답이 나오면 복잡한 상황이 발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는 초등학생의 중등입시에서부터 극성스런 치맛바람이 일던 시절이니 정말 큰 사건이었다. 합격자 발표까지 다 된 상황에서 그 1점 때문에 원하는 중학교에 가지 못하게 된 38명 학생의 학부모들은 교육감 면담까지 했다. 항간에는 화가 난 학부모들이 무즙으로 만든 엿을 들고 가서 교육감에게 "엿 먹어라"며 던졌다는 소문으로 퍼지게 되었다. 학부모들은 무즙으로 엿을 만드는 것이 증명되었으니 합격 처리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서울시 교육위원회는 복수 정답을 인정하기 싫었지만 이를 인정하게 되었고, 그 학생들을 "정원 외 합격"으로 지원하는 중학교에 보내주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엉뚱하게 고위 관료의 자녀들을 슬그머니 끼워 입학시키는 부정입학 사건이 벌어져서 또 한 번 난리를 겪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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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음식의 유래

■ 궁중음식의 유래

■ 궁중음식의 유래

1. 설렁탕

설렁탕은 원래 ‘선농탕’이라고 불렀다. ‘선농단에서 먹는 국’이라는 뜻이다. 고려와 조선은 매년 경칩 이후 해일(亥日)에 ‘선농단(先農壇)’에서 농사의 신인 ‘선농씨’를 기리며 풍년을 기원하는 ‘선농제(先農祭)’를 지냈다. 제사는 임금이 직접 주관했고, 여러 신하들과 밭을 가는 ‘친경례(親耕禮)’를 했다. 이때 소와 돼지를 잡아 통째로 상에 올렸고, 제사가 끝난 뒤에는 문무백관과 백성들까지 모두 나눠 먹었는데, 큰 솥에 국을 끓여 밥을 말아 준 것이 오늘날의 설렁탕이 됐다는 것이다. 선농제를 지내고 선농탕을 백성들에게 나눠 주는 이 행사는 조선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 3년(1909년)에 일제에 의해 폐지되었다.

2. 청국장

청국장은 ‘청(淸)나라에서 온 된장국’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이는 잘못된 내용이다. 청국장은 단기 숙성해서 먹는 장이다. 보통 여섯 달 이상 걸리는 일반 된장과 달리 2~3일이면 먹을 수 있다. 그래서 ‘전국장’이라고 불렀다. ‘전쟁 중에도 급히 만들어 먹을 수 있는 된장국’이라는 의미이다. 청국장의 ‘청’은 청나라 ‘청(淸)’이 아니라 푸른곰팡이 ‘청(靑)’이다.

우리 역사 속에서 단기 속성 장류를 부르는 이름은 ‘고려장’ ‘염시’ ‘시’ ‘책성시’ 등으로 다양하다. 고려장은 고구려가 부르던 이름이고, 염시와 시는 신라, 책성시는 발해가 부르던 청국장의 이름이다. 《삼국사기》에는 문무왕이 웅진도독부로 물자를 지원할 때 『길이 막혀 염시를 보낼 수가 없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장과 책성시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절요』에도 나와 있다. 그만큼 유래가 오래됐다는 이야기이므로, 청나라에서 왔다는 것은 큰 오류인 것이다.

3. 탕평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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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21대 임금인 영조는 궁중 나인 중에서도 가장 밑바닥인 무수리의 몸에서 태어났다. 적장자 혈통을 중시했던 조선 사회에서 형인 경종을 독살하고 왕위에 올랐다는 정통성 시비도 늘 그를 따라다녔다. 이러한 그의 콤플렉스는 당쟁의 소재가 되기도 했고, 그 와중에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이는 일까지 발생했다. 아들인 사도세자가 소론과 함께 자신의 자리를 넘본다는 노론들의 모략으로 인한 오해 때문이었다. 영조가 뒤늦은 후회와 함께 당파에 관계없이 인재를 등용하고 분열을 종식하자는 의미로 탕평책을 펴게 되는데, 이 때 조정 대신들에게 내놓은 음식이 ‘탕평채’이다. ‘탕평’이란 이름은 ‘서경’에 나오는 ‘왕도탕탕 왕도평평(王道蕩蕩 王道平平)’에서 따온 것이다. 탕평채는 녹두로 만든 흰색의 묵과 붉은 색의 볶은 고기, 푸른 미나리, 검은색의 김으로 이뤄진 재료를 모두 섞어서 먹는 음식이다. 조선시대 4개 붕당으로 나뉜 서인, 남인, 동인, 북인을 대표하는 색을 띠고 있다. 영조가 탕평채를 내놓을 때 집권세력이 서인이어서 흰색 청포묵이 주재료가 됐다고 한다. 영조는 ‘탕평채’라는 음식을 만들어 신하들에게 하사함으로써 붕당 간의 정치 보복과 숙청의 피바람을 끝내고, 당파싸움을 그만하자는 그의 간절한 바램을 공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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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나들이

■ 우리말 나들이

■ 우리말 나들이

‘만승천자(萬乘天子)라도 식이위대(食以爲大)’라고 했다. 먹는 일이 가장 급하고 중요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만큼 우리 말 속에는 ‘밥’이 들어가는 말이나 밥을 지칭하는 단어가 많다. 먹는 사람, 먹는 때, 밥의 상태, 담는 모양, 형태 등등에 따라서도 다양하게 불리어 진다.

1. 임금이 먹는 밥 : 수라

2. 양반이나 웃어른이 먹는 밥 : 진지

3. 하인이나 종이 먹는 밥 : 입시

4. 귀신이 먹는 밥 : 메

5. 국이나 물이 없이 먹는 밥 : 강다짐

6. 반찬 없이 먹는 밥 : 매나니

7. 꽁보리밥 : 곱삶이(두 번 삶는다)

8. 반찬이 소금뿐인 밥 : 소금엣밥

9. 남이 먹다 남은 밥 : 대궁밥

10. 남의 눈치를 보아가며 먹는 밥 : 눈칫밥

11. 돈을 내지 않고 거저 얻어먹는 밥 : 공밥

12. 남의 집에 드나들면서 일을 해주고 얻어먹는 밥 : 드난살이밥

13. 김을 맬 때 먹는 밥 : 기승밥

14. 일하는 중간에 먹는 사잇밥 : 새참

15. 밤늦게 먹는 밥 : 밤참

16. 죄수에게 옥사의 구멍으로 넣어주는 밥 : 구메밥

17. 물이 많아 질척한 밥 : 진밥 ↔ 된밥

18. 덜 익은 밥 : 선밥 ↔ 탄밥

19. 타고 익고 설익은 밥 : 삼층밥

20. 아주 된 밥 : 고두밥

21. 술을 빚기 위해 시루에 쪄서 지은 고두밥 : 지에밥 또는 술밥

22. 찬밥에 물을 부어 다시 지은 밥 : 되지기

23. 그릇 위까지 수북이 담은 밥 : 감투밥

24. 밑에는 보리나 잡곡밥을 담고 그 위에 쌀밥을 수북이 담은 밥 : 고깔밥

25. 고깔밥과 비슷하게 잡곡밥을 먼저 담고 그 위에 쌀밥을 담거나, 밥그릇 안에 작은 접시나 그릇을 넣고 위에만 쌀밥을 얹은 밥 : 뚜껑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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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요리사, 숙수 4편

■ 왕의 요리사, 숙수 4편

■ 왕의 요리사, 숙수 4편

궁궐에서는 수백 명의 음식을 만들어야 했다. 솥 같은 주방 용품도 크고 무거웠다. 또 하루에 보통 두 끼만 먹는 일반인들에 비해 왕실은 훨씬 더 자주 식사를 했기 때문에, 궁궐 주방에서는 하루에도 여러 번씩 음식을 만들어내야 했다. 그래서 숙수의 일은 이만저만 힘든 것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사옹원은 노동력 확보에 늘 골머리를 앓았다. 궁궐 주방을 기피하는 남자 숙수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또 궁궐 주방에서 근무하다가도 중노동을 못 견디고 도망가는 숙수도 많았다. 그래서 숙수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일은 사옹원의 핵심 과제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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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종 때 ‘말손’ 이라는 숙수가 있었다. 요즘으로 말하면 그는 팀장급 셰프였다. 그의 신분은 노비가 아닌 양인이었다. 중종 7년 3월 16일(1512년 4월 2일) <중종실록>에 따르면, 말손은 궁궐 주방 일이 너무나 힘들어 어느 날부터 궁궐에 출근하지 않았고, 그런 날이 5개월이나 계속됐다. 반년 가까이 무단결근을 했던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이런 일은 매우 흔했다. 힘들다고 도망가는 숙수가 많았기 때문에 말손처럼 무단결근하는 것은 어찌 보면 소극적 저항인 셈이었다. 그런데 사옹원 책임자인 사옹원 제조는 특단의 결단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말손에 대한 중징계를 내리기로 했다. 주로 왕족이나 사대부 중에서 임명되는 사옹원 제조들은 숙수들의 고충을 잘 몰랐다. 그는 말손을 단단히 혼내줌으로써 일벌백계의 효과를 거두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법에도 없는 징계를 내렸다. 양인 신분인 말손을 사옹원 노비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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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손은 5개월씩이나 무단결근할 정도로 배짱이 좋은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이 사옹원 제조의 불법 징계를 고분고분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그는 정부에 사옹원 제조의 징계가 불법적이고 부당하니 취소해달라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징계 무효 확인 소송을 제기한 셈이었다. 이 탄원에 대한 최종 결정권자는 중종 임금이었다. 신하들은 말손에 대한 징계가 법에도 없는 것이고 너무 과하다고 하면서 징계 철회를 주장했다. 하지만, 중종의 생각은 좀 달랐다. 징계가 위법한 것은 사실이지만, 숙수들의 근무 행태를 고쳐놓으려면 이참에 본때를 보여 줄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중종은 말손의 아내가 제기한 탄원을 기각했다. 이로써 말손은 사옹원 노비가 되어 죽을 때까지 궁궐 주방에서 일하게 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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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요리사, 숙수 3편

■ 왕의 요리사, 숙수 3편

■ 왕의 요리사, 숙수 3편

조선의 수라간은 은밀한 공간이었으며 철저하게 통제된 공간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오랫동안 조선의 정궁이었던 창덕궁, 왕비가 거처하는 대조전(大造殿) 바로 곁에 작은 수라간이 있었다. 대조전 수라간은 지금도 남아있는데, 아쉽게 온전한 조선시대의 모습은 아니다. 창덕궁 수라간은 1920년대 현대식 부엌으로 개축되었고, 당시 사용했던 일제 오븐과 당시 쓰던 찬장이 그대로 남아 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수라간은 대전과 왕비전 등 궁궐 곳곳에 위치했다. 이곳에 종사하는 인원은 400여 명. 밥을 짓는 반공, 생선을 굽는 적색, 술을 빚는 주색, 떡을 만드는 병공 등 한 사람이 평생 한 가지 일에만 종사했다. 왕의 요리사는 철저하게 분업화 되어있었고, 전문성까지 갖추고 있었다. 임금의 수라를 책임지는 업무를 맡은 기구는 이조(吏曹) 산하의 사옹원(司饔院)이었다. 사옹원에서 대전, 왕비전, 세자전의 모든 수라를 책임졌고, 특히 임금의 수라는 사옹원이 중심이 돼서 내시부와 내명부도 함께 참여했다. 수라를 맡은 최고 책임자는 종2춤의 상선내시였다. 그 아래 술과 차를 맡았던 상온과 상다가 있었고, 사옹원 총책임자인 제거가 그 밑에 있었다. 또, 조리사는 종9품, 그들 아래 별사옹을 비롯한 각 색장들이 실제 요리를 맡았으며, 이들 모두가 남자들이었다.

실록에는 숙수가 되는 것을 꺼리는 기록이 자주 등장한다. 이들은 왜 궁중 요리사가 되는 것을 기피했을까? 왕의 수라는 식재료 준비부터 숯불을 일구는 문제, 양념을 하는 문제까지 세심하고 섬세한 손길이 필요하고, 여러 단계를 거쳐 완성되는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 많았다. 궁궐 안에 배치된 요리사들은 하루에 2교대로 궁중음식을 담당했다. 특히, 대령숙수는 항상 밤에도 대기하며 음식을 만들 준비를 하고 있었고, 요리사들도 대기할 수 밖에 없었다. 더욱이 왕은 하루에 다섯 번 수라를 들었다. 고된 노동 때문에 숙수를 기피하자, 이들을 붙들어두기 위해 노비의 신분을 면천해주거나 역을 감면해주기도 했다.

엄청난 노동 강도와 국가의 공식적인 업무라는 점, 그리고 유교국가라는 조선의 특수성, 이로 인해 ‘숙수’라는 직업은 남성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왕의 신변 보호 문제도 있었다. 상선내시와 수라간의 총책임자들은 당연히 임금을 가장 잘 보필할 수 있는 정치적 측근이었을 것이다. 정적(政敵) 세력에게 임금의 음식을 맡기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으며, 왕의 신변보호에는 일선 요리사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여성보다는 남성이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임금의 음식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약이 되는 것이어야 했다. 이에 임금의 체질과 질병, 계절과 몸 상태에 따라 효능 있는 음식을 바치는 ‘식치(食治)’를 할 수 있었다. 식치를 위해서는 요리사들의 기초 의학 상식은 필수였으므로 이런 공부를 제대로 하기에는 여성보다는 남성이 낫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 4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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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을 부르는 풍수인테리어 기법

운을 부르는 풍수인테리어 기법

운을 부르는 풍수인테리어 기법

주방 풍수인테리어 기법 ㉑

주방(부엌)은 밥을 짓고 반찬을 조리하는 장소로, 한국의 전통 가옥의 경우 주방(부엌)은 보편적으로 안방 벽에 연결되어, 남쪽으로 위치하여 있으며, 무쇠 솥이 적게는 2개 많게는 5개까지 놓인 형태였으나, 사용하기 편한 현대식 주거 문화로 바퀴면서 내부도 입식 싱크대와 개수대를 설치하여 사용하기 편리한 방향으로 바꾸어 부엌에서 주방으로 불러지고 있다.

또한 요즈음은 거실을 겸한 주방 즉, 리빙키친(livingKitchen)이라는 새로운 주방 공간이 생기고도 있다.

주방은 금전 운에 많은 영향을 받는 장소로 항상\xa0청결하게 관리하고, 살균 소독 등으로 깨끗하게 하여야 한다.\xa0싱크대 주변의 물때나, 더러운 얼룩들은 금전 운을 높이는데 나쁜 영향을 준다.

주방에 커튼을 설치 시에는 엷은 커튼이나 발란스, 블라인드\xa0같은 것이 좋다. 색상은 밝은 색 계통이 좋으며, 두꺼운 소재의 커튼은 피해야 한다.

♣ IFSA 국제풍수협회 선정 2018 대한민국 최고 풍수인테리어 전문가 / 문의 : 010-2432-5522

2024년 4월 8일 월요일

왕의 요리사, 숙수 1편

■ 왕의 요리사, 숙수 1편

■ 왕의 요리사, 숙수 1편

최근에는 요리를 소재로 하는 TV프로그램이 많다. 가정에서 요리를 주로 하는 사람은 분명 여성이고, 예로부터 우리는 어머니의 손맛을 최고로 여겨왔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요즘은 남자 요리사가 대세이다. 요즘 소위 맛집으로 유명한 음식점이나 고급 레스토랑의 주방은 남자요리사로 가득 차 있다. ‘요섹남’이라는 단어가 생길 정도로 ‘요리 잘하는 남자’는 요즘 여성들에게 매력적이고 인기도 많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에는 남자요리사가 있었을까? 상식적으로 생각하더라도 유교이념이 지배하는 조선시대에 남자가 부엌에서 음식을 만드는 광경은 상상하기가 힘들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도 ‘숙수’라고 불리우는 남자 궁중요리사들이 존재했다. 조선시대의 풍속화로 어느 고관댁의 잔칫날 풍경을 생생하게 그린 그림이 있다. 음식준비로 바쁜 부엌에 재료를 나르고 불을 피우고 음식을 만드는 남자들이 가득하다. 고관의 명으로 출장 나온 궁중요리사들인 것이다.

조선시대 존엄한 존재였던 임금님의 안녕과 건강은 국가의 운명과 직결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임금님의 안녕과 건강의 근본은 음식, 즉 수라(水刺)였다. 일반적으로 궁녀와 나인, 상궁들이 만들었을 거라는 인식과 달리 왕을 위한 음식을 만드는 조선 수라간의 주역은 모두 남자들이었다. ‘대장금’이라는 드라마에는 수라간에서 요리하는 나인과 상궁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하지만 실제로 진귀한 왕실 요리를 만들어 내는 수라간에는 고기요리, 찜요리, 채소요리 등 각각의 분야에 전문가들인 남자 요리사가 배치되어 있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궁중의 요리사들은 까다로운 레시피의 궁중요리 수백 가지를 재래식 요리도구를 이용해 준비해야했다. 또, 왕이 원하면 언제라도 요리를 대령할 수 있도록 24시간 상시 대기해야했고, 때로는 고관들의 집에 불려가 출장요리를 하기도 했다. 이들의 신분은 관노(官奴)였다. 열심히 일한 대가로 상을 받거나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는 행운을 누리기도 했지만, 왕실의 잔치와 제사는 끝이 없었기 때문에 그만큼 조선시대 왕실 요리사들은 모두가 기피할 정도로 고된 직업 중 하나였다고 한다. 게다가 행여 음식에 문제라도 생기면 처벌을 면치 못했다.

1903년, 왕의 수라에 관한 커다란 사건이 발생했다. 홍합을 먹은 고종의 이가 부러진 것이다. 요리의 책임자로 ‘숙수 김원근(金元根), 사환 김만춘(金萬春), 숙수패장 김완성(金完成), 각감 서윤택(徐潤宅)’ 등이 처벌을 받았다. 모두 남자였다. 이렇듯 수라간의 주역은 남자였다. 그렇다면 그 많은 나인과 상궁들은 무엇을 했을까. 기미상궁은 임금의 수라에 이상이 있는지를 확인하며 맛보는 역할을 했고, 나인들은 수라간에서 대전 혹은 침전으로 음식을 나르거나 식재료 운반, 설거지 등 요리사들을 지원하는 업무를 맡았다. 수라상궁들은 이런 나인들을 지휘하고 감독하며 수라간 일을 주재했지만 직접 요리를 하지는 않았다. 임금님의 음식은 남자가 만들었던 것이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청국장의 기적같은 효능 14가지

청국장의 기적같은 효능 14가지

청국장의 기적같은 효능 14가지

1. 소화를 촉진한다.

1g의 청국장에는 10억마리 이상의 균이 들어있는데 이는 유산균 음료의 100배에 달한다. 이 균은 위와 장에서 소화와 흡수를 돕고 변비와 설사를 예방한다. 청국장 속의 유익한 균이 정장작용을 해 장을 깨끗하고 건강하게 만든다. 섬유질도 다른 식품보다 5배 이상 많고, 사포닌도 변비 개선에 도움을 준다. 비타민 B군(B1, B2, B6)이 간을 보호하기 때문에 음주 뒤에 청국장을 먹으면 숙취가 빨리 해소된다.

2. 항암 효과가 있다.

콩이 가지고 있는 사포닌은 발암 억제 작용을 한다. 또한 청국장에 많은 제니스테인은 유방암, 결장암, 직장암, 위암, 폐암, 전립선암 등에 효능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파이틱산, 트립신 억제제 같은 항암 물질도 풍부하다.

3. 노화를 막는다.

비타민 E의 항산화 작용으로 우리 몸속에서 세포가 파괴되는 것을 막는다. 또한 비타민 B군이 풍부하여 피부 노화를 막는다.

4. 비만을 막는다.

청국장에는 비타민 B군과 칼슘을 비롯한 미네랄이 풍부하다. 비타민과 미네랄이 신진대사를 촉진해 비만을 막고, 레시틴과 사포닌이 혈액속의 과도한 지방을 흡수하여 배출한다.

5. 뇌졸중을 예방ㆍ치료한다.

레시틴과 단백질 분해 효소가 혈관을 막고 있는 혈전이나 콜레스테롤을 녹여 뇌졸증과 같은 혈전질환을 예방ㆍ치료한다.

6. 치매를 막는다.

청국장의 레시틴이 분해되면서 콜린이라는 물질이 생긴다. 콜린은 치매환자에게 부족한 아세틸콜린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을 늘린다.

7. 당뇨병을 예방한다.

섬유질이 풍부하여 당의 흡수가 천천히 되도록 돕는다. 또한 비타민 B2는 당뇨병 예방에 효과적이다. 레시틴도 인슐린의 분비를 왕성하게 만들어 당뇨병을 예방ㆍ치료하는데 도움을 준다.

8. 고혈압을 치료한다.

발효과정에서 생기는 바실러스균에 의해 아미노산이 만들어지는데, 아미노산은 고혈압을 일으키는 주요 인자인 안지오텐신 전환 효소의 활성을 억제해 혈압을 떨어뜨린다.

9. 골다공증을 예방한다.

청국장 100g에 칼슘 90mg이 들어 있고 양질의 단백질과 비타민 K가 풍부하여 칼슘의 흡수를 돕는다.

10. 심장질환을 예방한다.

단백질 분해 효소가 심장 관련 혈관에 존재할 수 있는 혈전을 녹여 심장질환과 40대 이후에 찾아올 수 있는 돌연사를 예방한다.

11. 빈혈을 막는다.

청국장 100g당 3.3mg의 철분이 들어 있고 악성 빈혈을 막는 비타민B12도 함께 있어 빈혈을 예방한다.

12. 피부미용에 좋다.

레시핀이 장 속에 있는 노폐물과 독소를 배출하고 피부에 주름이 생기는 것을 막는다. 피부미용에 좋은 비타민 E와 비타민B군도 많다. 청국장 특유의 점액질은 피부 보습에 효과적이다.

13. 피부병을 치료한다.

피부병 예방과 치료에 좋은 비타민 B2와 B6이 풍부하고 리놀렌산 등 불포화 지방산이 많아 무좀을 비롯한 각종 피부병에 효과가 있다.

14. 정력에 좋다.

청국장에 있는 아르기닌이라는 아미노산과 레시틴은 남성의 정액을 이루는 구성 성분이다. 아르기닌 아미노산은 일산화질소의 전구물질(전 단계물질)로 일산화질소는 음경의 혈액 흐름을 개선시켜 성생활을 건강하고 활기차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