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6일 화요일

약이 되는 바다 음식

약이 되는 바다 음식

약이\xa0되는\xa0바다\xa0음식

1.\xa0가다랭이\xa0:\xa0스트레스

2.\xa0가리비\xa0:\xa0고혈압,\xa0동맥경화,\xa0간장병

3.\xa0가자미\xa0:\xa0스트레스

4.\xa0게\xa0:\xa0동맥경화,\xa0뇌졸중,\xa0시력감퇴,\xa0미각장애

5.\xa0고등어\xa0:\xa0고혈압,\xa0뇌졸중,\xa0간장병,\xa0골연화증,\xa0빈혈,\xa0감기,\xa0구내염,\xa0구각염\xa0

6.\xa0굴\xa0:\xa0동맥경화,\xa0간장병,\xa0미각장애,\xa0스태미너\xa0부족

7.\xa0김\xa0\xa0:\xa0고혈압,\xa0변비,\xa0체력저하

8.\xa0꽁치\xa0:\xa0고혈압,\xa0동맥경화,\xa0뇌졸중,\xa0골연화증,\xa0감기,\xa0구내염,\xa0구각염

9.\xa0농어\xa0:\xa0구내염,\xa0구각염

10.\xa0다시마\xa0:\xa0고협압,\xa0변비,\xa0체력저하\xa0\xa0

\xa0

11.\xa0대합\xa0:\xa0동맥경화,\xa0간장병,\xa0시력감퇴,\xa0빈혈,\xa0미각장애

12.\xa0도미\xa0:\xa0고혈압,\xa0스트레스

13.\xa0멍게\xa0:\xa0스태미너\xa0부족

14.\xa0멸치\xa0:\xa0고혈압,\xa0골다공증,\xa0빈혈

15.\xa0명란\xa0:\xa0노화,\xa0피부질환,\xa0스트레스\xa0

16.\xa0모시조개\xa0:\xa0동맥경화,\xa0간장병,\xa0부종,\xa0미각장애

17.\xa0문어\xa0:\xa0동맥경화,\xa0간장병,\xa0시력감퇴,\xa0변비,\xa0미각장애

18.\xa0미꾸라지\xa0:\xa0구내염,\xa0구각염

19.\xa0미역\xa0:\xa0고혈압,\xa0변비,\xa0체력저하

20.\xa0바지락\xa0:\xa0동맥경화,\xa0간장병,\xa0골다공증,\xa0빈혈,\xa0미각장애\xa0

21.\xa0새우\xa0:\xa0동맥경화,\xa0골다공증,\xa0미각장애

22.\xa0성게\xa0:\xa0스태미너

23.\xa0소라\xa0:\xa0동맥경화,\xa0시력감퇴,\xa0미각장애

24.\xa0아귀\xa0:\xa0노화\xa0\xa0

\xa0

25.\xa0장어\xa0:\xa0시력감퇴,\xa0빈혈,\xa0감기,\xa0피부질환

26.\xa0전갱이\xa0:\xa0고혈압,\xa0동맥경화,\xa0스트레스

27.\xa0정어리\xa0:\xa0뇌졸중,\xa0골연화증,\xa0골다공증,\xa0구내염,\xa0구각염

28.\xa0참치\xa0:\xa0고혈압,\xa0동맥경화,\xa0뇌졸중,\xa0간장병,\xa0골연화증,\xa0노화

29.\xa0청어\xa0:\xa0노화

30.\xa0톳\xa0:\xa0고혈압,\xa0빈혈,\xa0체력저하.

이순신 5편

■이순신 5편

■이순신 5편

이때부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그는 일부 대신들과 대간의 반대를 받기도 했지만, 상당히 빠르고 순조롭게 승진했다. 1589년(선조 22년) 2월 이산해(李山海)의 추천으로 다시 관직에 나서게 된 이순신은 감사 이광(李洸)의 군관으로 전라도로 파견되었다. 그리고 그 해에 조방장(助防將)과 선전관(宣傳官) 등을 거쳐 정읍현감이 되었으며, 1591년(선조 24년)에는 진도군수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부임하기도 전에 다시 전라좌도(全羅左道)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로 임명되었다.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에 부임한 이순신은 전함을 건조하고 군비를 확충하며 왜군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그의 나이 46세였고, 임진왜란을 14개월 앞둔 시점이었다. 무과에 급제한 지 15년 동안 한 번의 백의종군을 포함해 여러 곤경과 부침을 겪은 끝에 그는 수군의 주요 지휘관에 오른 것이다.

변방의 말직만을 전전하다가 삶을 마감했을 장수도 분명히 적지 않은 것을 감안하면, 그의 역정은 수준 이상의 보상을 받았다고도 할 수 있다. 눈앞에 다가왔지만 거의 대비하지 않고 있던 거대한 국난을 앞두고, 전쟁 직전 그가 북방의 말단 장교가 아니라 남해의 수군 지휘관이 되었다는 사실은 국가적으로도 참으로 다행스러운 천행(天幸)이었다.

조선 최대의 국난인 임진왜란은 1592년(선조 25년) 4월 13일 일본군이 부산포로 출항하면서 발발했다. 7년 동안 이어진 전란으로 조선의 국토와 민생은 처참하게 파괴되었다. 전쟁이 시작된 뒤 보름 여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5월 2일), 선조는 급히 몽진(蒙塵:난리를 피해 옮김)해 압록강변의 의주(義州)에 도착했다(6월 22일). 개전 두 달 만에 조선은 멸망 직전의 위기에까지 몰린 것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의 요청을 받아 경상도 해역으로 출정해 왜군과의 해전에서 잇따라 승리를 거두었다. 6월 16일(음력 5월 7일) 옥포(玉浦)와 합포(合浦)에서 왜선 30여척을 격파하는 큰 승리를 거둔 것을 시작(옥포해전)으로 20여 회의 전투를 치러 모두 승리했다. 그 승전들은 그야말로 패색(敗色)이 짙은 전황을 뒤바꾼 결정적인 계기였다.

왜란이 일어난 1년 뒤인 1593년 8월 삼도수군통제사로 승진해 해군을 통솔하면서 공격과 방어, 집중과 분산의 작전을 치밀하고 효과적으로 수행했다. 나라는 전란에 휩싸였고 그는 국운을 책임진 해군의 수장으로서 엄청난 책임과 부담감을 느꼈을 것이지만, 험난했던 그동안의 관직 생활에서 보면 최고의 지위를 안정적으로 유지한 기간이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활약으로 조선 수군은 해상권을 장악했고, 북상하던 왜군은 병력 보충과 군수품 보급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리고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화의(和議)가 시작되어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호남지역으로 들어오는 피난민들을 돌보고, 전쟁이 장기화될 것에 대비해 둔전(屯田)을 일구고 병사들을 조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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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이순신 4편

■ 이순신 4편

■ 이순신 4편

말직(末職)이지만 중앙에서 근무하게 된 그에게 이때 중요한 기회가 찾아올 뻔했다. 국왕을 제외하면 당시 조선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율곡 이이가 이순신을 한번 만나보고 싶어 한 것이다. 그때 이이는 이조판서였다. 유성룡에게서 그런 의사를 전해들은 이순신은 거절했다. 같은 가문(덕수 이씨)이므로 만나도 괜찮겠지만, 그가 인사권을 행사하는 중직(重職)에 있으므로 만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겨우 9세 차이였지만 탁월한 능력과 눈부신 경력으로 조선의 핵심적인 정치가로 자리 잡은 같은 가문의 이조판서가 그때까지도 변방과 중앙을 오가며 부침을 거듭하고 있던 종8품의 말단 무관을 만나보고 싶어 했을 때, 부적절한 개입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판단 하에 거절한 이순신의 태도는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그렇게 훈련원에서 2년 넘게 근무한 뒤 이순신은 어떤 까닭에서인지 다시 강등되어 변방으로 배치되었다. 1583년(선조 16년) 10월 건원보(乾原堡:현재 함경북도 경원군) 권관으로 나간 것이다. 그러나 그때 발생한 여진족의 침입에서 그는 우두머리를 생포하는 전공을 세워 한 달 만인 11월 훈련원 참군(參軍:정7품)으로 귀경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작은 행운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 달 15일 아버지 이정이 아산에서 세상을 떠난 것이다. 불편한 통신 환경 때문에 그 소식은 이듬해 1월에야 이순신에게 전달됐다. 그는 사직(辭職)을 하고 3년 상을 치렀고, 1585년(선조 18년) 1월 사복시 주부(主簿:종6품)로 복직했다. 40세의 나이였다.

그는 유성룡의 천거로 16일 만에 조산보(造山堡:현재 함북 경흥) 만호로 특진해 다시 변방으로 나갔다. 1년 반 뒤인 1587년(선조 20) 8월에는 녹둔도(鹿屯島) 둔전관(屯田官)을 겸임하게 되었다. 녹둔도는 지금 두만강 하구에 있는 섬이다. 복직(復職) 이후 비교적 순조로웠던 그의 관직 생활은 이때 그동안의 부침 중에서 가장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그 해 가을 여진족이 침입해 아군 11명이 전사하고 군사와 백성 160여 명이 납치, 말 15필이 약탈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순신은 경흥부사 이경록(李慶祿)과 함께 여진족을 격퇴하고 백성 60여 명을 구출했다. 그전부터 이순신은 그 지역의 위험성을 간파하고 중앙에 병력 증강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사건의 궁극적인 책임은 중앙 정부에 있다고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이일(李鎰)은 이 사건을 패전으로 간주했고, 두 사람을 모두 패전의 책임으로 장형(杖刑)에 처한 뒤 ‘백의종군(白衣從軍)’을 명했다. 이순신 생애에서 첫 번째 백의종군이었다.

그러나 명예는 곧 회복할 수 있었다. 1588년(선조 21년) 1월 이일이 2,5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여진족을 급습해 가옥 200여 채를 불사르고 380여 명을 죽인 보복전에서 이순신도 참전해 전공을 세움으로써 백의종군에서 벗어난 것이다. 반년 뒤인 윤6월 그는 아산으로 낙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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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3편

■ 이순신 3편

■ 이순신 3편

이순신은 5년 뒤인 1572년(선조 5년) 8월 훈련원 별과(別科)에 처음 응시했다. 그러나 시험을 치르던 중 타고 있던 말이 넘어져 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다. 물론 낙방했지만, 다시 일어나 버드나무 껍질을 벗겨 다친 다리를 싸매고 과정을 마친 것은 널리 알려진 일화이다. 무장으로서 이순신의 공식적인 경력은 그로부터 4년 뒤에 시작되었다. 그는 1576년(선조 9년) 2월 식년무과에서 병과(丙科)로 급제했다. 그의 나이 31세로 임진왜란을 16년 앞둔 시점이었다. 그의 일생 전체가 그러했지만, 이때부터 순탄치 않은 관직 생활이 시작되었다.

첫 임지와 직책은 급제한 해 12월 함경도 동구비보(董仇非堡, 현재 함경도 삼수)의 권관(權管: 종9품)이었다. 동구비보는 험준한 변경이었다. 이순신은 그곳에서 햇수로 3년간 근무했다. 그렇게 만기를 채운 뒤 1579년(선조 12년) 2월 서울로 올라와 훈련원 봉사(奉事:종8품)로 배속되었다. 앞서는 거친 환경이 힘들었을 것이지만, 이번에는 사람 때문에 불운을 겪었다. 병조정랑(정5품) 서익(徐益)이 가까운 사람을 특진시키려고 하자 이순신은 반대했고, 8개월 만에 충청도절도사의 군관으로 좌천된 것이다. 핵심적인 요직인 병조정랑의 뜻을 종8품의 봉사(奉事)가 반대했으니 즉각 불리한 인사조처로 이어진 것은 그리 이례적인 일은 아니었다.

많은 위인들의 이러한 측면이 평범한 사람들과 구분시키는 결정적인 차이지만, 이순신을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면모는 원칙을 엄수하는 강직한 행동일 것이다. 이 사건으로 처음 표출된 그의 강직한 자세는 일생 내내 그를 크고 작은 곤경에 빠뜨렸다. 그러나 그런 현실적 불이익은 그의 명성을 조금씩 높였고, 궁극적으로는 지금까지도 그를 존경하는 인물로 남을 수 있게 하는 역사의 보상이 주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 사건으로 비로소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기 때문인지, 얼마 뒤 이순신은 파격에 가까운 승진을 하게 되었다. 1580년(선조 13년) 7월 발포(鉢浦:현재 전라남도 고흥군) 수군만호(水軍萬戶:종4품)로 임명된 것이다. 이 인사는 그 파격성도 주목되지만, 더 중요한 사실은 그가 처음으로 수군에 배치되었다는 것이다. 직속상관인 전라좌수사 성박이 거문고를 만들려고 발포 객사(客舍)의 오동나무를 베어가려고 하자, 이순신이 관청의 물건이라고 제지한 유명한 일화는 이 때의 사건이다. 특별한 인사조치가 뒤따르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 때의 항명은 큰 문제없이 넘어갔다고 판단되지만, 서익과의 악연이 다시 불거졌다. 서익은 병기(兵器) 상태를 점검하는 군기경차관(軍器敬差官)으로 발포에 내려왔는데, 이순신이 병기를 제대로 보수하지 않았다고 보고한 것이다. 급속히 승진했던 이순신은 1581년(선조 14년) 5월 두 해 전의 관직인 훈련원 봉사로 다시 강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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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2편

■ 이순신 2편

■ 이순신 2편

상당히 다른 길을 걷게 되는 두 사람이 어린 시절 어떻게 어울렸는지 구체적으로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훗날 유성룡은 “신의 집은 이순신과 같은 동네였기 때문에 그의 사람됨을 깊이 알고 있다.”고 선조(宣祖)에게 아뢸 정도로 친밀했던 것은 사실이었던 것 같다. 그런 기억에 따라 유성룡은 《징비록(懲毖錄)》에서 어린 시절의 이순신을 인상 깊게 회고했다.

『이순신은 어린 시절 영특하고 활달했다. 다른 아이들과 모여 놀 때면 나무를 깎아 화살을 만들어 동네에서 전쟁놀이를 했다. 마음에 거슬리는 사람이 있으면 그 눈을 쏘려고 해 어른들도 그를 꺼려 감히 군문(軍門) 앞을 지나려고 하지 않았다. 자라면서 활을 잘 쏘았으며 무과에 급제해 관직에 나아가려고 했다. 말 타고 활쏘기를 잘 했으며 글씨를 잘 썼다.』

인생의 방향도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유년 시절에만 국한된 관찰은 아니라고 추정되는데, 유성룡이 기억하는 이순신은 어려서부터 무인의 기개가 넘쳤던 것으로 보인다. ‘마음에 거슬리는 사람은 그 눈을 쏘려고 했다’는 대목은 어린 아이로서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무례하거나 거칠다고도 보인다. 세 살 차이인 유성룡과 이순신은 임진왜란이라는 거대한 국난(國難)을 통해 각각 문무(文武)에서 나라를 구원하는데 결정적인 공로를 세웠다. 유성룡의 혜안(慧眼:안목과 식견)은 이순신을 적극 천거하고 옹호하여 나라를 위험에서 건질 수 있었다.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지만, 이순신은 서울을 떠나 외가가 있는 충청남도 아산(牙山)으로 이주했다. 아산은 지금 그를 기리는 대표적 사당인 현충사(顯忠祠)와 묘소가 있어 그와 가장 연고가 깊은 지역으로 평가된다. 그렇게 된 까닭은 조선 중기까지도 널리 시행되던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의 영향 때문이었다. 남자가 결혼한 뒤 처가에서 상당 기간 거주하는 이 풍습은 자연히 부인과 그의 집안인 처가(외가)의 위상을 높였다. 가장 익숙한 사례는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상징하는 대표적 지역이 어머니 신사임당(申師任堂)의 친정이 있던 강릉(江陵)이라는 사실일 것이다.

그 뒤 1565년(명종 20년) 이순신은 20세의 나이로 상주(尙州) 방씨(方氏)와 혼인했다. 장인은 보성(寶城)군수를 지낸 방진(方辰)이었는데, 과거 급제 기록이 없고 군수라는 관직으로 미루어 그리 뛰어난 인물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순신은 방씨와의 사이에서 이회(李薈), 이울(李蔚), 이면(李葂)의 세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 어릴 때부터 무인의 자질을 보였지만, 이순신은 문과 응시를 준비해 왔다. 10세 전후부터 공부를 시작했다고 보면 그는 10년 정도 문학을 수업한 것인데, 무장(武將)으로는 드물게 난중일기(亂中日記)와 여러 유명한 시편을 남긴 것을 보면 이런 학업이 뛰어난 문학적 능력을 쌓은 데 중요한 자산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혼인 1년 뒤 인생의 방향을 크게 바꾸어 본격적으로 무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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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1편

■ 이순신 1편

■ 이순신 1편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손꼽히는 위대한 인물 중 한 사람이다. 그를 추앙하는 수식어 ‘성웅(聖雄)’이라는 칭호는 그 자체로 그가 범접할 수 없는 경지에 있음을 나타내지만, 그는 천부적 재능과 순탄한 운명을 가진 인물이 아니라, 수많은 역경과 난관을 강직한 성품과 치열한 노력으로 돌파한 인물이다.

이순신은 조선 인종 1년(1545) 3월 8일 서울 건천동(乾川洞:현재 중구 인현동)에서 태어났다.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다. 본관은 덕수(德水)로 아버지는 이정(李貞)이고 어머니는 초계 변씨(草溪卞氏)다. 그는 셋째 아들이었는데, 두 형은 이희신(李羲臣), 이요신(李堯臣)이고 동생은 이우신(李禹臣)이다. 그와 형제들의 이름은 중국 고대의 삼황오제(三皇五帝) 중에서 복희씨와 요·순·우 임금에서 따온 것이다. ‘신(臣)’은 돌림자여서 큰 의미를 부여하기는 어렵지만, 부모는 아들들이 그런 성군을 섬기는 훌륭한 신하가 되라는 바람을 담았다고 추측할 수도 있다. 이순신이 성군을 만났는지는 말하기 어렵지만, 훌륭한 신하의 한 표본이 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순신은 원래 문신 가문이다. 이순신의 5대조 할아버지 이변은 세종 이후 역대 임금을 모신 외교 전문가였고, 덕수 이씨 가문을 크게 일으킨 인물이었다. 그는 중국어에 능했고 성품이 강직했으며, 홍문관 대제학을 거쳐 영중추부사에 이른다. 증조부 이거는 타협하지 않는 성품으로 ‘호랑이 장령’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고, 성종과 연산군 시절의 고위 공직자였다. 비교적 순조롭고 성공적인 출세를 이어왔던 이순신의 가문은 조부 이백록(李百祿)과 아버지 이정 모두 과거에 급제하지 못했고, 벼슬길에도 오르지 못했다. 그 주요한 까닭은 조부 이백록이 조광조(趙光祖) 일파로 간주되어 관직에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순신의 아버지 이정은 벼슬길에 뜻을 두지 않았고, 어머니인 변씨가 바느질품을 팔아 어려운 살림살이를 겨우 꾸려나갔다.

아버지 이정과 어머니 변씨는 장남 이희신과 차남 이요신을 문과로 보내길 희망했다. 특히 이요신의 경우 문재(文才)가 아주 뛰어나 류성룡과 막역한 친구가 될 만큼 장래가 촉망되는 문과 지망생이었고, 동생인 이순신도 문과 급제를 위해 학문에 힘쓰고 있었다. 그런 이순신이 왜 무과에 도전하고, 재수를 해 가면서까지 급제하여 후일 조선의 국난을 극복하는 삼도수군통제사에까지 이르게 된 것일까? 운명이었을까?

몇 살까지라는 확실한 기록은 찾을 수 없지만, 이순신은 태어난 서울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 시절에 이순신은 자신의 일생에 중요한 영향을 끼칠 뛰어난 인물을 만났다. 나중에 영의정이 되는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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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4편

■임진왜란 4편

■임진왜란 4편

일본군은 바다를 건너오는 보급품이 이순신에 의해 차단당하고 조선에서는 보급품을 구할 수 없게 되어 진퇴양난의 상황을 맞게 되었다.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일본은 명나라와 강화협상을 진행했으나, 일본의 무리한 요구로 협상은 결렬되었다. 히데요시는 명나라가 화평을 적극적으로 나서자 입장이 바뀌어 전쟁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조선의 한 지역을 아주 본보기로 폐허로 만들라는 명을 내린다. 정유년에 히데요시의 동원령으로 소집된 군사는 총 12만 1천여 명으로 정유년에 일어나 정유재란으로 불린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논개의 이야기는 이 정유재란이 일어난 진주의 이야기이다. 2차 조선정벌군이 진주를 습격하자 7천 명의 조선군은 맹렬히 항전하였다. 12만과 7천의 대결은 9일간의 긴 싸움으로 막을 내리고 진주성이 일본군에게 함락된다.

일본군은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진주를 생명이 없는 폐허로 만들기 위해 모든 생명과 건축물 등을 죽이고 불태웠다. 진주성을 함락한 일본군은 폐허가 된 지역에서 버티기 위해 경상도 남해안 일대에 일본식 성을 쌓고 장기전으로 버티기에 들어간다. 이로써 전쟁은 다시 소강상태로 들어가고, 서울을 떠난 선조는 17개월 만에 다시 서울로 돌아와 궁으로 들어갔다.

그러는 사이에 일본에서는 히데요시가 사망하게 된다. 히데요시가 죽자, 그의 유언에 따라 장장 7년간의 전쟁이 막을 내린다. 일본은 전쟁이 일어나면 단숨에 한양을 점령하고 조선을 장악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일본이 몰랐던 3가지 사실이 있었다.

첫째, 왕이 궁궐과 백성을 버리고 도주할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결국 선조의 도망은 전쟁을 장기화 시켰고, 이 때문에 전쟁물자 수송은 승패의 큰 요소로 작용했다.

둘째, 여진족의 존재를 몰랐다. 여진족은 예로부터 숙신, 읍루, 말갈, 물길로 불리는 강력한 세력이었는데, 이를 간과한 일본은 두만강을 건너 여진족과 싸우다 크게 패했다.

셋째, 그들은 전쟁의 신 이순신의 존재를 몰랐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 일까?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것은 물자 보급이다. 일본의 수군은 전라도 앞바다를 지나 한양으로 물자를 보급하고자 하였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이순신장군이 그 물자 보급로를 모조리 끊어 놓았기 때문이다. 이순신장군이 우리나라의 구국영웅으로 추앙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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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2편

■임진왜란 2편

■임진왜란 2편

원래 조선의 속령이었던 대마도는 일본과 조선의 눈치를 살피며 살던 중 이번에 히데요시 편에 붙어 함께 이 전쟁에 참가하였다. 제1군에 소속된 요시토모가 부산진성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고, 그의 안내에 따라 고니시의 제1군은 거침없이 부산진성을 공격할 수 있었다. 무조건 항복하라는 고니시의 협박에 분노한 정발 첨사는 60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700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진의 선두에 서서 결사적으로 왜적의 진공을 막았다.

그러나 왜병들은 조총으로 무장하여 재래식 활로 맞선 조선군의 결사적인 항전을 무색하게 하였다. 부산진성의 위급상황을 알게 된 다대포 첨사 윤흥신은 정발을 지원하기 위하여 달려와 왜적들과 백병전을 전개하며 노장 정발과 함께 최후까지 사투를 벌이다가 결국 700명의 병사들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부산진성에거 갑자기 총소리와 함성소리가 멎었다. 정발 첨사를 비롯한 700명의 조선 병사들이 모두 전사한 것이다. 개전(開戰)한지 불과 2시간여가 흘렀을 뿐이었다.

준비가 되지 않은 군대는 일본군에게 함락당하고 성 안의 백성들은 몰살당했다. 일본군은 이후에 서평포, 다대포를 공격하였다. 서평포도 적의 수중에 떨어지고 곧이어 다대포도 적의 수중에 떨어졌다. 다대첨사 윤흥신과 백성들이 희생당하고, 유키나가 군은 동래성으로 진격한다. 지원군으로 가던 경상좌병사 이각은 중과부적이라 판단하여 도주하였고, 동래부사 송상현은 끝까지 성을 지키다 전사했다. 이어서 일본군은 김해로 전진해 김해성의 남녀노소 1천명을 몰상하고 김해성도 함락시켰다.

연이어 부산 웅천, 그리고 낙동강하구 등에서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들어온 일본군은 제1군에서 9군까지 15만 8천여명의 병력이 조선으로 물밀 듯 올라왔다. 4월 20일엔 밀양도 적의 수중에 떨어지고 파죽지세로 적은 서울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선조는 류성룡을 도체찰사로 임명하고 북상하는 일본군을 막으라는 지시를 내린다. 문인으로 전쟁을 잘 모르는 류성룡은 여진족과의 전공으로 유명한 신립을 추천하여 삼도순변사로 임명한다.

신립장군은 기병 3천을 이끌고 충주로 향했다. 도중에 모집한 병사들을 합하여 총 8천의 병사가 충주에 주둔했고, 일본군에 패한 경상도순변사 이일이 충주의 신립에게 합세하였다. 일본군이 조령으로 몰려오자 신립은 탄금대를 중심으로 포진하여 적과 결전을 벌이고, 이 탄금대전투에서 조선군 3천명이 전사하고, 신립과 그의 부하 김여물 등이 모두 전사하였다. 충주의 패전 소식을 접한 조정에서는 임금의 피난을 결정하였고, 4월 30일 새벽에 피난을 떠나 개성으로 향했다. 궁의 주인이 떠나자, 도둑들이 궁에 침입하여 약탈과 방화가 자행되었다.

-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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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1편

■ 임진왜란 1편

■ 임진왜란 1편

16세기 후반, 조선은 집권세력인 동인과 서인 간의 정쟁이 심하여 위태로운 상황에 있었다. 유럽은 아프리카와 아시아로 진출하여 세력을 넓히고 있었고, 일본 역시 이러한 서세동점(西勢東漸)이라는 물결에 부응하여 대륙으로의 침략을 꾀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은 이미 포르투갈과 무역을 하면서 조총 만드는 기술을 배우고, 대량 생산하는 기술을 습득하여 대량생산하기 시작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信秀吉)는 일본 천하를 제패하고 대륙 침공 작전에 착수하였다. 동아시아의 판도를 뒤흔든 임진왜란이 발생한 것이다.

1590년 조선은 일본에 황윤길과 김성일을 통신사로 파견하였다. 이듬해 이들이 돌아와 ‘전쟁설’에 대해 선조에게 보고한 내용이 서로 달라 그나마 전쟁 대비를 하려는 의견을 모두 거두게 만들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하려는 의도가 공공연하게 조선에 전해졌으나 이를 사람들은 믿지 않고 전쟁 대비를 하지 않고 있었다.

1592년 4월 2일 저녁 무렵, 왜장 고니시의 제1군은 일기도의 가쓰모토 항에 도착했다. 4월 7일 밤, 제1군은 그 동안 역풍 때문에 어려움을 겪다가 겨우 대마도의 완노우라항에 입항하였으나 역풍이 점점 더 세차게 불어 할 수 없이 수일 간 이 곳에서 대기한다. 4월 10일 밤, 갑자기 바다가 잠잠해지더니 바람의 방향이 순풍으로 바뀌었다. 항해가 예정보다 늦어 초조했던 선봉장 유키나가는 날이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그 날 밤으로 출항 명령을 내렸다. 그곳에서 조선의 부산포까지의 거리는 불과 50km에 불과했다. 4월 13일 이른 새벽, 고니시의 제1군과 그 꼬리를 물고 온 가토의 제2군은 목적지인 부산포 앞바다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때 부산포의 첨절제사 정발은 오랜 습관대로 수하 병졸 몇 명만 데리고 자신의 관내를 순찰하고 있었다. (일부 기록에선 사냥을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정발과 그의 일행이 순찰을 위해 부산진성을 나와 절영도(영도)에 도착했을 때 아직 채 밝지 않은 새벽 바다위로 수백 척의 왜선들이 바람을 등에 업고 무서운 속도로 전진해 오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 동안 소문만 무성하던 왜적의 침입이 현실로 나타났음을 직감한 정발은 즉시 부산진성으로 돌아가 휘하 병사 700여 명 전원을 비상소집하여 왜적 침입상황을 알리고 즉각 전투태세를 갖추게 하는 한편, 동래성으로 전쟁 발발의 긴급 상황을 알리는 파발마를 띄웠다.

새벽안개를 뚫고 고니시 유키나가가 지휘하는 제1군 18,000명은 빠른 속도로 부산포 상륙작전을 마쳤고, 속수무책으로 언덕 위의 부산진성에서 왜적들의 상륙을 지켜보던 정발 첨사는 적의 규모가 엄청난데 경악하였다.

-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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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별별 직업 5편

■ 조선의 별별 직업 5편

■ 조선의 별별 직업 5편

1. 프로 바둑기사 ‘기객’

삼국시대부터 사랑받던 바둑은 조선후기에 이르면 온 가족이 즐기는 놀이가 되었다. 영조 때 ‘김석신’이라는 사람은 내기 바둑에서 딴 돈으로 생활했다. 그러나 내기만으로 생계를 꾸리기란 쉽지 않았다. 그는 세력가의 후원을 받아 생계 걱정을 덜고 오직 기량을 갈고닦는 데 몰입할 수 있었다. 후원자가 있는 일종의 프로 바둑기사는 ‘기객’이라 하고, 최고의 경지에 이른 사람을 ‘국수’라 했다.

2. 전업 가수 ‘가객(歌客)’

가곡, 시조, 가사 등을 노래로 부르는 전업 가수를 ‘가객(歌客)’ 이라 했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자신의 집에 ‘가비(歌婢)’ 나 ‘가동(歌童)’을 두고 노래를 즐기기도 했다. 직업적인 ‘가객’은 17세기 이후에 출현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18세기 전후로 전성기를 맞았다. 가객의 노래는 신분이 높고 부유한 사람이 주로 향유했는데, 공연료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다. 18세기 한양의 대표적인 ‘가객’이었던 ‘손고사’의 사례에서 생계형 가수의 수입을 추정할 뿐이다. 그의 노래가 절정에 이르면 사람들이 던지는 엽전이 비처럼 쏟아졌는데 열 냥 정도가 모이면 곧 일어나 떠나곤 했다. 열 냥이면 당시 쌀 한 가마 값이다. 부잣집이나 왕실행사의 공연료 역시 상당한 수준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가객의 노래는 당시 사치스러운 문화상품이었던 것이다.

3. 유랑극단의 원조 ‘사당패’

떠돌아다니며 공연을 선보여 먹고 사는 무리를 ‘사당패’라 불렀다. 사당들은 무리를 지어 유랑하면서 재주를 선보이며 돈을 벌었고, 추워지면 본거지인 사찰로 돌아가 겨울을 나면서 기예를 연마했다. 이들은 어느 절에서 왔다는 사찰의 신표를 들고 다니며 공연을 하고 부적을 팔기도 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이 사찰로 모여들었고 사당패의 숫자가 크게 늘었다. 명색은 사당패이지만 사실은 오갈 데 없는 유랑민이었다. 사당패는 공연과 함께 매춘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조선시대 문인들은 사당패에 대한 부정적인 기록을 많이 남겼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사당패는 본거지와 특기에 따라 다양한 집단으로 분화되었는데, 그 중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것이 영화 ‘왕의 남자’에도 등장하는 모두 남자로 구성된 ‘남사당패’이다. 꼭두쇠를 중심으로 농악연주, 대접을 돌리는 묘기, 땅재주, 줄타기, 가면극 등을 선보이며 세상을 떠돌아다녔다. 공연 중 부상으로 젊은 나이에 지팡이를 짚은 채 잘 걷지도 못한다거나, 성병으로 고생하기도 했다고 하니 그들의 고단한 삶이 엿보인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