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6일 화요일

인체 노폐물 처리장, '콩팥'에 좋은 식품 3가지

인체 노폐물 처리장, 콩팥에 좋은 식품 3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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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체 노폐물 처리장, 콩팥에 좋은 식품 3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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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팥(신장)질환에 걸리면 콩팥이 혈액으로부터 더 이상 노폐물을 걸러내지 못하는 심각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콩팥 건강이 나빠지는 가장 큰 원인은 당뇨병과 고혈압이다.

당뇨병과 고혈압은 건강하지 못한 식습관과 생활방식 때문에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콩팥질환의 장기적인 해결책은 깨끗한 물을 더 많이 마시고, 더 많이 운동하고 여기에 더해 가장 중요한 것은 가공되거나 건강하지 못한 음식을 멀리 하는 것이다. 콩팥에 좋은 식품 3가지가 있어 소개하고자한다.

① 아스파라거스

수세기 동안 아스파라거스는 비뇨기를 치료하는 완벽한 식품으로 꼽혀 왔다. 이 채소에는 글리코시드와 사포닌 같은 천연 화합물이 풍부하게 들어있다. 이런 성분들은 이뇨와 항 류머티즘, 혈액을 정화하는 작용을 한다. 아스파라거스를 꾸준히 섭취하면 소변 발생량을 증가시키고, 이뇨 작용을 돕고, 콩팥 내의 세포 활동을 활성화시키며, 요로결석을 만드는 산과 염분을 용해시킨다.

② 마늘

알리신이라는 성분 때문에 마늘은 가장 강한 천연 질병 퇴치제로 여겨져 왔다. 항균, 항바이러스, 항 진균 그리고 항산화 효능이 있는 알리신은 콩팥병의 주요 원인인 당뇨병과 고혈압을 치유하는 효능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몇 가지 연구결과에 따르면, 알리신은 이제까지 생각하던 것보다 콩팥에 더 좋은 것으로 나타났다.

‘약리학 리포트(Pharmacological Reports)’에 실린 한 연구에 따르면, 동물실험 결과 마늘은 염화수은에 노출됨으로써 생기는 콩팥 손상을 크게 줄여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다른 연구에서는 마늘은 콩팥의 항산화 능력을 높여 유해산소로 인해 세포가 손상되는 것을 막는 것으로 나타났다.

③ 수박

수박이 콩팥에 좋은 데에는 3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콩팥 기능이 안 좋을 때 균형을 맞추는 데 문제가 생기는 두 가지 미네랄인 칼륨과 인이 수박에는 조금 밖에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수박은 92%가 알칼리성 물로 이뤄져 있어 비뇨기로부터 축척된 독소를 씻어내는 데 도움이 된다.

세 번째로 수박은 간이 암모니아를 독성이 거의 없는 요소로 변환시키는 데 도움을 줌으로써 몸에서 과도한 체액을 제거하는 동안 콩팥이 받는 부담을 완화시켜준다. 단, 수박은 아스파라거스나 마늘과 달리 천연 당 성분이 너무 높기 때문에 당뇨병이 원인이 된 콩팥질환 환자는 수박을 너무 많이 먹지 않도록 주의가 필요하다.

우울증에 먹으면 효과 좋다는 신기한 음식

우울증에 먹으면 효과 좋다는 신기한 음식

우울증에 먹으면 효과 좋다는 신기한 음식

① 카레

카레에 재료로 쓰이는 강황에는 커큐민 성분이 풍부한데 이 성분은 우울함을 개선하는데 큰 도움을 줍니다. 실제 뉴욕 시립대 심리학 교수인 글렌 샤피가 진행한 쥐 실험 결과에 의하면 커큐민이 과거 공포에 대한 기억을 지우고 무섭고 두려운 기억이 뇌속에 새로 저장되는 것을 막아주는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② 호두

하버드 대학 연구팀이 발표한 임상영양학 저널에 실린 자료에 따르면 호두의 식물성 오메가3 성분과 비타민E는 우울증 예방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③ 녹차

녹차에 함유된 테아닌 성분은 뇌를 편안하게 하는데 도움을 준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실제 일본 도호쿠대학 대학원에서 진행된 연구에 따르면 녹차를 매일 4잔 이상 마시는 70세이상 노인이 그렇지 않은 노인보다 우울증에 걸릴 위험이 44프로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④ 매운 음식

매운 음식을 먹고나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느껴보신 분들이 있으실텐데요. 이는 매운맛은 미각이 아니라 통각 세포가 느끼는 고통으로 매운 음식을 먹고 나면 신체가 이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아드레날린과 엔도르핀을 분비 하기 때문입니다.

⑤ 버섯

버섯은 인슐린 분비를 억제해 혈당을 낮춰주며 이로 인해 기분이 편안해지게 됩니다. 또 버섯의 프로바이오틱 성분은 건강에 좋은장 내 유익균을 증가시켜 세르토닌이 생성되게 도와주는 효능이 있습니다.

⑥ 바나나

바나나에 풍부한 트립토판 성분은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효능이 있습니다.

⑦ 토마토

중국 티안진 의과대학 연구팀이 20세 이상 일본인 여성 약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조사에 따르면 매주 2~6차례 토마토를 먹는 사람은 한번도 토마토를 먹지 않은 사람보다 우울증 위험이 46프로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는데요 이는 토마토의 풍부한 엽산과 비타민B가 우울감을 줄여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⑧ 굴

굴에는 풍부하게 함유되어있는 아연! 이 아연이 우울증 치매 예방에 아주 좋은 효능이 있다고 합니다.

⑨ 해조류

다시마, 미역등의 해조류에 풍부한 요오드 성분이 부족할 경우 우울한 기분을 느낄수 있습니다.

⑩ 연어

연어에는 풍부하게 함유된 마그네슘이 우울한 기분을 해소하는데 도움을 준다고 합니다.

⑪ 오리고기

오리고기에 풍부한 비타민B1은 기억력 향상에 도움을주며 비타민B2는 세르토닌 분비를 촉진시켜 우울증을 예방해줍니다.

⑫ 베리류

라즈베리, 블랙베리 등의 베리류에 풍부한 항산화 성분은 우울감을 줄이고 몸의 활력을 불어넣는데 도움을 줍니다.

이순신과 어머니 2편

■ 이순신과 어머니 2편

■ 이순신과 어머니 2편

마부형 리더십이라는 리더십 용어가 있다. 평소에는 앞에서 마차를 끌고 가지만 말이 힘들고 지치면 뒤에서 밀고 도와주는 리더십을 말한다. 변씨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전형적인 리더십이다. 그녀가 보여준 정의의 책임감, 자애, 자립자강의 정신은 그대로 아들 순신에게 전해졌고 아들의 진로 결정에 큰 도움을 주는 길라잡이가 되었다. 어머니 변씨는 전란 중에 자신을 보러 온 이순신에게 “나라의 치욕을 갚는 것이 급하니 어서 돌아가라!" 고 권한 데서 강단 있는 성격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후대의 백성들이 그를 사랑하고 존경하지 않을 수 없게 한 그 든든한 배경에는 이처럼 어머니 변씨의 사랑과 후원, 아들 진로에 대한 탁월한 혜안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자립, 자강, 충성, 나라 사랑의 엄격한 가치관을 심어주며 나라를 구한 성웅 이순신을 길러낸 초계 변씨. 50여 명이나 되는 식솔을 거느리며 전쟁과 가난, 가부장적 시대의 전통과 맞서 싸운 강인함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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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은 무과에 급제하기 전에 문과 급제를 준비하던 인물이다. 그래서 무인이지만 여느 문인 못지않은 수양과 학문의 성과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보니 그는 시를 곧잘 써서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는데 그 경지가 예사롭지 않았다. 특히 그는 <시경(詩經)>의 母也天只(모야천지, 어머니는 하늘이시다)에서 따온 천지(天只)라는 표현을 써서 어머니를 하늘(天)에 비유하고 있다. 이순신에게 어머니는 하늘 그 자체였다. 그만큼 이순신에게 있어 어머니는 그에게 삶의 의미 그 자체였다. 아버지가 하늘(天)이고 어머니는 땅(地)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전통적 사상이었다. 그런데 이순신은 어머니를 하늘의 위치에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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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은 <난중일기>에 기록된 약 650일 중 100일 이상을 어머니에 대해 기록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에 비해 아버지에 대한 <난중일기>의 기록은 7일뿐이어서 어머니와 극명하게 대조가 된다. 그가 아버지를 싫어한 것일까? 그건 아니었을 게다. 물론 이순신이 아버지보다 어머니를 훨씬 좋아하고 사모한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그의 부친이 일찍 돌아가신 데다 난중일기를 쓰기 시작하기 이전에 이미 세상에 계시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쨌든 이순신에게 있어서 어머니는 어머니 이상의 신성한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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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어머니의 네 가지 가르침이 성장기에 있던 이순신에게 확실한 가치관으로 심어졌기 때문이다. 특히 사랑에 충만한 성품, 자립정신, 담대한 기질 등은 이순신이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고 생각해도 될 정도다. 가산을 정리하여 전국 각지로 이사하고 재물을 모아 자립하게 한 일이나 엄격하게 아들을 가르친 것 모두가 그녀의 특별한 자식사랑법의 하나였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이순신과 어머니 1편

■ 이순신과 어머니 1편

■ 이순신과 어머니 1편

이순신이 백의종군을 시작한 직후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4월 13일). 그는 나흘 동안(4월 16~19일) 말미를 얻어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뒤 다시 종군했다. 이 때의 난중일기, 특히 맨 마지막 구절은 슬픔의 밑바닥까지 내려간 마음을 느끼게 한다.

『16일 병자. 흐리고 비가 내렸다. 배를 끌어 중방포(中方浦)에 옮겨 대고 영구를 상여에 실어 본가로 돌아왔다. 마을을 바라보고 통곡하니 찢어지는 마음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집에 이르러 빈소를 차렸다. 비가 크게 퍼부었다. 남쪽으로 떠날 일도 급박했다. 부르짖어 통곡하며 속히 죽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는 아버지 이야기는 별로 없고, 어머니 변씨 이야기만 나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만큼 어머니가 이순신에게 미친 영향이 절대적이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더구나 변씨의 아버지 변수림이 무장 출신이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변씨가 이순신의 무과 진로에 대해 상당한 역할을 한 것이 분명하다.

이순신의 아내로 보성군수 출신 방진의 외동딸 방씨를 얻도록 중매를 선 것이 동고 이준경 대감이었다고 전하는데, 어머니 변씨가 주도적으로 이를 받아들이도록 권유했다고 한다. 다소 유약하고 소극적이던 아버지 이정에 비해 똑 부리지는 성격의 소유자였던 어머니 변씨는 이순신에게만은 장래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문무(文武) 양면을 살펴보도록 도와주는 안내자의 역할을 했던 것 같다. 그녀는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에게 문과 급제에 대한 기대를 품으면서 셋째 아들 이순신에게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립심을 길러준 것이다.

서울 건천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낼 때 훈련원(조선시대 군사 교육 기관)이 근처에 있었던 것 또한 그의 진로 결정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어린 시절 동네 대장으로 활쏘기를 즐겼다는 이야기를 보면 무장의 딸이었던 변씨로서는 이순신의 앞날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 무인은 문인에 비해 낮은 급으로 여겨져 일반 사대부 집안에서 무과를 준비하는 경우가 흔치 않았기 때문이다.

훗날 이순신이 무과에 급제했을 때 선영에 성묘를 갔다가 묘소 앞의 망주석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하인들 몇이 달려들어도 들어 올리지 못하자 혼자 힘으로 이를 일으켰다는 기록이 있다. 이순신의 체력이 보통 선비들과는 남달랐다는 것이다. 어머니 변씨는 이러한 아들의 면면을 일찍이 눈여겨보고 당시 사회 통념과 상관없이 그의 무과 진로를 추천한 것이다. 자신과 같이 무장 출신의 딸인 며느리 방씨를 맞도록 한 것도 이순신의 적성과 취미, 남다른 체력과 커오면서 보여준 리더십 및 대장적 기질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무과로의 진로선택 폭을 넓혀준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방씨는 이순신이 서른두 살에 급제할 때까지 무과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아버지 방진과 함께 남편을 도왔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거북선 2편

■거북선 2편

■거북선 2편

이순신은 처음 진수한 거북선에 승선하여 여러 가지 함재 대포들을 쏘아 보며 실전에서 발생할 수 있는 하자의 유무를 철저히 점검하였다. 또한 수군들이 귀선의 속성을 숙지하고 완전히 적응할 때까지 한동안 맹렬한 반복훈련을 거듭하게 하였다. 이처럼 중무장한 거북선의 탄생으로 이순신 함대는 세계 최강의 가공할 파괴력을 보유하게 된다.

판옥선은 2층 구조로, 아래층에서는 안전하게 노를 저어 배의 속도를 높일 수 있었고, 위층에서는 화살과 화포를 쏘며 전투에 전념할 수 있게 만든 빠르고 효율적인 배였다. 이층이니 배의 몸체가 높아 적을 공격하기는 쉽고, 적이 배에 뛰어들기는 어려웠다. 그러한 판옥선을 개량하여 윗부분을 튼튼한 덮개로 덮고 칼과 송곳을 꽂아 적군이 배 위에 오르지 못하게 만든 것이 거북선이다. 대포 사격이 가능한 용머리 및 각종 대포들을 장착하여 중무장시켰다. 적군은 덮개로 가려진 안을 볼 수가 없어 거북선이 어떤 공격을 준비하고 있는지, 어떤 방향으로 가려고 하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거북선의 용머리에서는 총을 쐈고, 양 옆구리로도 대포와 화살을 쐈다. 이순신 장군은 거북선에 대해 조정에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올렸다.

『거북선이 먼저 돌진하고 판옥선이 뒤따라 진격하여 계속 지자포, 현자포를 쏘고 뒤이어 포환과 활, 돌을 비와 우박이 퍼붓듯 하면 적의 사기가 이미 꺾이어 물에 빠져 죽기 바쁘니 이것이 우리 수군 승리의 비결입니다.』

거북선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한 군관 나대용은 이순신 장군 밑에서 활약하던 수하로 거북선을 비롯해 많은 병기를 만든 핵심 인물로 알려져 있다. 전라도 나주 출신으로, 1583년 과거 시험 병과에 급제하여 무관이 되었다. 1591년 전라좌수영의 군관이 되면서 이순신 장군의 부하가 되었다. 군관이라는 직급은 지금으로 치면 장교 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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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대용은 옥포해전에서 적의 군선 2척을 격파하는 공을 세우기도 했고, 사천해전과 한산도해전에서는 총탄을 맞아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1594년 승진해 전남 강진의 현감으로 임명되었고, 그 후 연달아 여러 고을의 현감을 지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는 적이 배에 뛰어들지 못하도록 짧은 창검을 꽂아 놓은 중간 크기의 군함 창선과 속도가 빠른 쾌속선인 해추선 등을 만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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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거북선 1편

■ 거북선 1편

■ 거북선 1편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배를 만드는 기술이 발달했다. 조선 함대의 무기 위력은대단했다. 조선은 초기부터 신기전, 화차 등 여러 화약 무기를 개발했다. 그 중 화약을 이용해 발사하는 화살인 화전과 천자총통, 지자총통 등 성능이 우수한 화포도 있었다. 그럼, 뛰어난 발상과 첨단 기술력을 토대로 만들어져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거북선은 언제 만들어졌을까?

거북선이 우리 역사 속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 초기부터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413년 태종 임금 때 『왕이 임진강 나루를 지나다가 거북선과 왜선으로 꾸민 배가 해전 연습을 하는 것을 보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또 1415년 탁신이라는 문신이 『거북선의 전법으로 싸우면 많은 적과 충돌하더라도 적이 우리를 해칠 수 없으니, 거듭 정교하게 만들어 승리의 도구로 갖추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고 한다. 그러나 그 시절의 거북선은 크기가 작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거북선은 3층으로 되어 있어 몸체가 매우 높다.

1592년 4월 11일, 그 동안 정걸과 나대용을 중심으로 개량해 온 불가사의한 신비의 돌격선 귀선(거북선)이 드디어 완성되었다. 배의 이름이 귀선(龜船)이 된 것은 완성된 돌격선의 모습이 흡사 거북과 비슷하였기 때문이다. 이 때 이순신장군은 모두 3척의 거북선을 건조하였는데, 전라좌수영인 진남관 앞 지금의 중앙동에서 이순신 자신이 직접 감독하며 만든 영귀선과 돌산섬 군내리에서 만든 방답귀선, 그리고 여천군 쌍봉면 조선소에서 만든 순천귀선이 그것이다. 1592년 4월 12일 아침, 이순신 함대의 최선봉 돌격선으로서의 새로운 임무를 담당하게 될 첫 번째 귀선(龜船) 영귀선이 건조되어 진수식이 거행되었다.

거북선에 대한 내용은 정조 19년(1795년)에 편찬된 《이충무공전서》에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거북선의 좌우 뱃전에 신방이라는 난간을 설치했고, 난의 머리에 가룡이라는 횡량을 걸쳐 뱃머리까지 닿게 하였다. 그 난간을 따라 판자를 깔고 그 둘레에 방패 판을 둘러 꽂았다. (중략)

방은 각각 12칸인데, 철물 보관소 2칸을 쓰고 나머지는 화포. 창검. 활과 화살 등의 무기고로 썼다. 아래층에는 19칸의 병사들 숙소가 있고, 왼쪽 포판 위에 선장실이 있고, 오른쪽에는 장교실이 있으며, 병사들은 평소 아래 칸에서 쉬다가 전투 시에는 포판위로 올라와 대포를 발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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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난중일기 2편

■ 난중일기 2편

■ 난중일기 2편

이순신은 정유재란 기간에 어머니뿐만 아니라 아들의 죽음까지 당하는 아픔을 겪었다. 1597년 10월14일에는 『저녁에 어떤 사람이 천안에서 와 집안 편지를 전하였는데 봉함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정신이 혼란해졌다. 겉봉을 뜯고 열의 글씨를 보니 거죽에 ‘통곡’ 두 글자가 씌어 있어 면의 전사를 알고 간담이 떨어져서 목을 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인자하지 못하시는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것 같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마땅한데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이런 어긋난 일이 어디 있을 것이냐.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하룻밤 지내기가 1년 같구나.』 하여 아들 잃은 슬픔을 절절히 표현하고 있다.

『아침에 옷 없는 군사 17명에게 옷을 주고는 여벌로 한 벌씩을 더 주었다. 하루 내내 바람이 험하게 불었다(1596년 1월23일)』 이 기록에서 군사들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보였음을 알 수 있다.

류성룡과의 절친한 관계도 잘 나타나 있다. 두 사람의 깊은 우정과 두터운 신뢰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 수 있다.

『좌의정 류성룡이 편지와 함께 <증손전수방략(增損戰守方略)>이란 책을 보내왔다. 수륙전과 불로 공격하는 전술 등에 관한 것이 낱낱이 설명돼 있었다. 참으로 만고에 보기 드문 뛰어난 저술이다(1592년 3월5일).』 『유자 30개를 영의정 류성룡에게 보냈다(1595년 9월17일)”는 등의 기록에는 두사람의 깊은 우정과 신뢰가 나타나 있다.』

억울하게 죄인이 되어 혹독한 고초를 겪고 풀려나던 그 날의 《난중일기》는 다음과 같다.

『초1일 신유(辛酉). 맑다. 옥문을 나왔다. 남문(숭례문-인용자. 이하 같음) 밖 윤간(尹侃)의 종의 집에 이르러 조카 봉(菶)․분(芬), 아들 울(蔚-이순신의 차남), 윤사행(尹士行)․원경(遠卿)과 같은 방에 앉아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지사 윤자신(尹自新)이 와서 위로하고, 비변랑 이순지(李純智)가 와서 만났다. 지사가 돌아갔다가 저녁을 먹은 뒤에 술을 가지고 다시 왔고, 윤기헌(尹耆獻)도 왔다. 이순신(李純信)이 술을 가지고 와서 함께 취하며 위로해 주었다. 영의정(유성룡), 판부사 정탁(鄭琢), 판서 심희수(沈喜壽), 이상(貳相, 찬성) 김명원(金命元), 참판 이정형(李廷馨), 대사헌 노직(盧稷), 동지(同知) 최원(崔遠), 곽영(郭嶸)도 사람을 보내 문안했다.』

일기는 기본적으로 자신만의 내밀한 기록이다. 후세에 공표될 가능성을 고려하거나 그럴 의도를 담고 있지는 않다. 이 날의 일기는 이순신의 내면을 가장 잘 보여준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고 사실만을 적었다. 그동안 승전을 거듭해 국가의 위기를 극복했지만, 충분한 근거도 없이 갑작스레 압송되어 혹독한 고초를 겪은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고통과 억울함과 분노는 철저하게 억제되어 있다. 그는 오직 사실에 입각해 사고하고 행동했다. 이것이 그의 승리의 원동력이고 그와 동시에 그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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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 1편

■ 난중일기 1편

■ 난중일기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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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불패의 신화를 이룬 이순신 장군은 1592년 1월1일부터 시작해 전사하기 이틀 전인 1598년 11월17일까지의 진중(陣中)일기인 《난중일기》를 남겼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가장 사랑하던 맏아들 쓰루마츠(鶴松)가 죽자 전쟁을 선포하고, 명나라 정벌 기일을 1592년 3월 1일로 정했다. 전쟁을 예감한 이순신은 1592년 정월부터 전쟁을 대비하기 위해 각 진영에 무기를 정비하고 본격적으로 전쟁 대비를 시작하였다. 아직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반드시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그가 남긴 《난중일기》에는 진영과 군대의 상황, 전쟁 업무에 관한 일들이 망라되어 있다. 부득이 치열한 전투를 벌인 날을 제외하고는 당시 벌어진 전황을 빠뜨리지 않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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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난중일기》는 이순신이 임진일기·계사일기·갑오일기 등으로 연대별로 쓴 친필 일기를 1795년 정조가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에 수록하는 과정에서 ‘난중일기’라는 제목을 붙인 것이다. 친필 초고(初考)본은 국보 76호로 지정돼 있다.

《난중일기》는 교전상황이나 이순신장군의 개인적인 소회 등 임진왜란의 구체적인 경과와 전술, 병사들의 심리 등 전쟁의 여러 정황이나 전쟁영웅으로서의 모습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어머니와 자식에 대한 애틋한 사랑, 류성룡과의 우정, 부하에 대한 배려 등 인간적인 면면이 잘 피력돼 있다. 특히 어머니와 관련된 일화가 여러 장에 담겨 있어 이순신 장군의 효심을 엿볼 수 있다. 《난중일기》는 우리 역사상 가장 뛰어났던 장군 이순신이 거의 매일 쓴 일기가 현재까지 전해온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를 갖지만, 《난중일기》로 인해 우리는 이순신 장군의 모습을 더욱 인간적으로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더 의미가 크다.

《난중일기》에는 첫 기록에서부터 『새벽에 아우 우신(禹臣)과 아들 회가 와서 이야기했다. 다만 어머니를 떠나 남쪽에서 두 번 설을 쇠니 간절한 회포를 참을 수 없다』는 내용이 나온다. 1593년 5월4일의 일기에서 이순신은 『오늘이 어머니 생신이지만 적을 토벌하는 일 때문에 가서 오래 사시기를 축수하는 술잔을 올리지 못하니 평생의 한이다』라며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다. 또 『탐후선이 들어와 어머님이 평안하신 줄 알다. 다행이다(1594년 5월5일)』라는 기록에서는 효심이 깊은 장군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1597년 4월13일 이순신은 어머니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조금 있다가 종 순화가 배에서 와서 어머님의 부고를 전했다.(중략) 길에서 바라보는, 가슴이 미어지는 슬픔이야 어찌 이루 다 적으랴』라며 어머니를 잃은 아픔을 애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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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나들이

■ 우리말 나들이

■ 우리말 나들이

1. 진이 빠지다

식물 줄기나 나무껍질 등에서 분비되는 끈끈한 물질을 ‘진(津)’이라고 한다. 나무의 진은 오래 전부터 사람들의 생활에 널리 쓰였다. 소나무에서 얻은 송진(松津)은 예로부터 피부병을 고치는 약으로 쓰거나 방수가 되는 성질을 이용해서 나무배의 갈라진 부분에 발라 물이 새는 것을 막기도 했다. 가구에 옻칠을 할 때 쓰는 것은 옻나무에서 뽑은 진이고, 고무는 고무나무 진으로 만든다. 그런데 진을 계속 뽑아내면 나무는 기운 없이 시들시들하다가 심하면 말라죽게 된다. 사람 역시 계속 일만 한다면 기력이 다 빠지고, 만성피로로 진이 빠진 나무처럼 시들시들해질 것이다. 그래서 거의 죽을 정도로 기력이나 힘이 없는 것을 ‘진이 빠졌다’고 한다.

‘진이 빠지다’와 같은 뜻으로 ‘녹초가 되다’, ‘파김치가 되다’는 말이 있다. ‘녹초’는 녹은 초를 말한다. 초가 녹아내려 흐물흐물 형체가 없어진 것처럼 사지에 힘이 다 빠지고 맥이 다 풀렸다는 의미이다. ‘파김치’는 파에 갖은 양념을 해서 버무린 김치이다. 줄기가 빳빳하게 살아있는 생파와 비교해 보면, 파김치는 숨이 죽어 부들부들해 진다. 기운이 다 꺾이고 지친 사람을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2. 찧고 까불다

옛날에는 기계가 없었기 때문에 농사일을 할 때 봄철 모내기부터 가을걷이까지 모든 과정을 일일이 손으로 했다. 가을에 벼를 베고 나면 벼이삭에서 낟알을 털어 내고, 이 낟알을 절구나 방아에 찧어서 껍질을 벗겨 내야 비로소 쌀이 된다. 낟알에 섞여 있는 잡티나 절구질이 끝난 쌀에 뒤섞여 있는 잡티들을 골라내기 위해 키질도 해야 한다. 키에 곡식을 올려놓고 위아래로 흔들면 가벼운 잡티가 날아가는데, 이것을 ‘까불다’라고 한다. 아이들이 정신없이 돌아다니면서 장난치며 노는 것을 ‘까불다’ 또는 ‘찧고 까불다’라고 하는데, 바로 이 절구질과 키질에서 비롯된 말이다.

말이나 행동이 침착하지 못하고 경망스러울 때 ‘오두방정을 떤다’고 한다. ‘방정’은 찬찬하지 못하고 몹시 경망스럽게 군다는 뜻의 우리말이다. 말이나 행동이 바르고 점잖다는 뜻으로 쓰는 ‘방정(方正)’과는 발음이 같지만 정반대의 뜻이 된다. ‘품행이 방정(方正)하여 이 상을 수여함’에서는 모범적인 행동을 한 사람을 뜻하지만 ‘방정맞은 사람’은 전혀 뜻이 다르다. 가볍게 행동하고 까부는 것을 ‘촐랑거린다’라고도 하는데, 이는 물이 잔물결을 이루며 흔들리는 모양에서 온 말이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이순신 8편

■ 이순신 8편

■ 이순신 8편

조선인 포로를 대대적으로 노예로 끌고 간 것도 이 무렵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으로 잡혀간 도공, 제약기술자, 금 제련공, 농부, 부녀자 등 조선인이 적게는 5만명, 많게는 10만명을 헤아린다. 임진왜란 7년 가운데 ‘살육전쟁’ ‘노예전쟁’의 형태는 바로 이 정유재란 시기 특히 이순신이 수군 지휘관에서 물러난 시기에 결정적으로 심화되고 있었다. 바꿔 말해 이순신이 그대로 삼도수군통제사로서 조선 남해안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었다면, 조선 민중의 피해는 다소 줄어들었을 수 있었을 것이다.

1597년 8월3일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 재임명 교서를 받았을 때 그에게는 군관 9명과 군사 6명뿐이었다. 수군이 궤멸하고 호남지역의 지상군마저 스스로 무너져 내리는 처참한 상황에서 다시 적을 맞아 싸울 준비를 해야 했다. 그는 경상도 운곡에서 하동, 구례, 곡성, 보성으로 이동하면서 백성들과 지방 수령들에게 희망을 전했다. 백성들의 호응과 지원이 없으면 전쟁을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이미 그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가지고 있던 백성들에게 자신이 복권됐으므로 믿고서 생업에 종사하라고 설득했다. 이와 함께 일본군의 호남 진격으로 목숨을 걱정하던 수령들에게도 행정력을 복원해 전쟁에 다시 임할 것을 독려했다. 그 결과 군사들의 모병이 가능하게 되어 피난민은 줄고 백성들까지 참여하는 총력전 체제가 자리 잡게 되었다.

이순신은 남아 있는 전선(戰船)을 수습하여 붕괴된 조선 수군을 재건했으며, 10월 25일(음력 9월 16일) 진도 울돌목에서 13척의 배로 130여척의 왜군에 맞서 대승을 거두었다(명량해전). 이 승리로 조선 수군은 제해권을 다시 장악했으며, 왜군의 수륙병진작전(水陸竝進作戰)을 무산시켜 정유재란의 전세를 뒤집을 수 있었다. 한양으로 진군하던 왜군은 보급로가 끊길 것을 우려해 충청도 직산(稷山)에서 진격을 멈추었으며, 그 뒤 전쟁은 남해안 일대의 왜성(倭城)에서 농성하는 왜군을 조명연합군(朝明聯合軍)이 공격하는 양상으로 바뀌었다. 왜군은 그해 1598년 9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자 철수를 준비했는데, 이순신은 12월 16일(음력 11월 19일) 명나라 제독 진린(陳璘)과 연합해 노량(露梁)에서 500여척의 왜군과 싸워 200여척의 적선을 불태우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노량해전). 하지만 이 전투에서 이순신은 도주하던 적선을 추격하다가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당시 이순신이 “싸움이 지금 한창 급하니 조심하여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말을 마치자마자 바로 숨이 끊어졌으며, 조카인 이완(李莞)이 그의 죽음을 숨긴 채 전투를 독려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죽음 소식을 들은 조정은 이순신에게 우의정(右議政)을 추증했다. 이순신은 1604년(선조 37년)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으로 녹훈되었으며, 좌의정이 증직되었고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으로 봉해졌다. 1643년(인조 21년)에는 ‘충무(忠武)’라는 시호를 받았고, 1659년(효종 10년)에는 남해 전적지에 그의 비석이 세워졌다. 1707년(숙종 33년)에는 충청도 아산(牙山)에 세워진 그의 사당에 ‘현충(顯忠)’이란 호가 내려졌으며, 1793년(정조 17년)에는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그의 묘는 충청남도 아산에 있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