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7일 수요일

홍의장군 곽재우 3편

■ 홍의장군 곽재우 3편

■ 홍의장군 곽재우 3편

7월에는 현풍ㆍ창녕 등지에서 승리해 경상우도에서 왜군의 진격을 차단했고, 왜군에 항복해 길잡이 노릇을 하던 공위겸(孔撝謙)을 매복작전으로 체포해 처형했다. 10월에는 왜란 초반의 가장 중요하고 규모가 큰 전투였던 제1차 진주성 전투에 참전했다. 그들은 진주성 외곽에서 일본군을 교란해 승전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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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우가 구사한 전술은 기본적으로 유격전이었다. 그는 단기(單騎)로 적진에 돌진하거나 위장술과 매복전술 등의 변칙적 방법으로 적을 교란하고 무찔렀다. 이것은 전력과 물자에서 열세일 수밖에 없었던 의병들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전술이었을 것이다. 곽재우는 이런 전공으로 벼슬을 받았고 계속 승진했다. 그는 유곡찰방(幽谷察訪. 1592년 6월. 종6품)·형조정랑(8월. 정5품)을 거쳐 경상도 조방장(助防將. 정3품)에 임명되었고, 1593년 4월에는 성주목사에 제수되었다. 왜란이 발발한 지 1년 만에 그는 경상우도 방어에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는 군사 지휘관에 올랐다. 싸움을 할 때면 곽재우는 붉은 비단 철릭(帖裏)을 입고 백마를 탄 채 천강홍의대장군(天降紅衣大將軍)의 깃발을 내걸고 의병들을 진두지휘했다. 그래서 곽재우는 본명보다도 홍의장군으로 더 잘 알려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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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금방 끝날 것 같던 임진왜란은 내륙의 의병과 해전의 이순신이 활약하면서 1593년 후반부터 장기전의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런 전황의 변화에 따라 곽재우의 역할도 바뀌었다. 그 동안도 그는 왜군의 대규모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으려면 산성을 거점으로 방어전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런 주장이 받아들여져 1594년부터 삼가(三嘉)의 악견(岳堅)산성, 가야산의 용기(龍起)산성, 지리산의 구성(龜城)산성 등 경상도 일대의 산성을 정비하는 데 주력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이순신ㆍ원균 등과 함께 거제도를 탈환하는 작전에 참여했지만, 왜군이 대응하지 않아 성공하지 못했다. 12월에는 가장 주요한 격전지 중 한 곳인 진주목사에 임명되었고, 경상도 관찰사ㆍ경상우수사 같은 요직의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관군들이 수급(首級:적군의 머리)을 챙겨 공을 인정받기 급급할 때 곽재우는 부하들을 처음부터 단속해 수급을 베지 못하게 했다. 곽재우의 출병은 출세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오직 나라를 지키고 고향을 보호하기 위한 충정에서 우러난 일이었다. 그런 곽재우가 이후 전쟁 기간 동안 관직을 받아들인 것은 의병들에게 부족한 무기와 군량미를 관으로부터 공식적으로 충당받기 위한 수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곽재우는 명과 일본의 강화협상이 본격화되던 1595년 가을에 관직을 버리고 본관인 현풍으로 낙향했고, 거기서 2년 동안 칩거했다. 승전을 거듭해 계속 중용되던 의병장이 갑자기 낙향한 이례적인 사태의 가장 큰 까닭은 조정과의 불화였다. 그 뒤 은둔해 곡기를 끊고 생활하다가 세상을 떠난 행적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곽재우는 기본적으로 직선적이고 비타협적인 성격이었던 것 같다. 그 때문에 그는 이런저런 갈등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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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의장군 곽재우 2편

■ 홍의장군 곽재우 2편

■ 홍의장군 곽재우 2편

그의 삶은 세속과 어느 정도 절연(絶緣)한 것이었지만, 일정한 경제적 기반 없이는 영위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광해군일기에 실린 그의 졸기(卒記)에서는 이때 그가 그냥 은둔한 것이 아니라 농업경영에 힘써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고 기록했다(1617년(광해군 9) 4월 27일).

곽재우의 재력은 실제로 작지 않은 규모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이후 곽재우의 전공을 보고한 장계에서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은 그의 집안이 매우 부유했는데, 의병을 모집하는 데 재산을 모두 희사(喜捨:목적을 위해 기꺼이 돈이나 물건을 내놓음)했다고 기록했다. 한 연구에 따르면, 당시 의병활동에 참가한 양반들은 대부분 수백~수천 마지기의 토지와 200~300명의 노비를 소유했다. 이런 측면들을 고려하면, 곽재우도 그것과 비슷한 경제력을 가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최대의 국난은 곽재우가 은거한 지 4년 만인 1592년 4월에 발발했다. 그때 곽재우는 40세의 장년이었다. 나라가 누란(累卵)의 위기에 빠지자, 그는 지체 없이 행동에 나섰다.

곽재우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열흘도 안 된 4월 22일에 고향인 의령현 세간리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의 기의(起義)는 호남ㆍ호서의 의병보다는 한 달, 김면(金沔)ㆍ정인홍(鄭仁弘) 부대보다는 50일 정도 빠른 최초의 의병이었다. 이런 정황에는 그가 살던 의령이 일본군의 초기 침략지역과 가까웠다는 까닭도 작용했겠지만, 가장 중요한 원인은 역시 그의 애국심과 실천력이었을 것이다. 처음에 그의 부대는 거느리던 노비 10여 명으로 출발했지만, 이웃 양반들을 설득해 이틀 만에 50여 명으로 불어났다. 그 뒤 그의 의병은 2천 명 정도로 유지되었다.

첫 시작은 순탄치 않았다. 그 까닭은 불리한 전황이 아니라 조정과의 갈등 때문이었다. 물자가 부족했던 그의 부대는 관군이 도망가 비어있던 초계성(草溪城)으로 들어가 그곳의 무기와 군량을 확보해 사용했는데, 합천군수 전현룡(田見龍), 우병사 조대곤(曺大坤) 등이 이런 행동을 오해해 그들을 토적(土賊:지방에서 일어난 도둑 떼)으로 고발한 것이다. 그러나 초유사 김성일의 해명으로 위기를 넘긴 곽재우 부대는 그 뒤 의령을 거점으로 현풍ㆍ영산(靈山. 지금 창녕)ㆍ진주 등 낙동강 일대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중요한 전공을 세웠다. 우선 영남에서 호남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정암진(鼎巖津:경남 의령 소재. 의령과 함안 사이를 흐르는 남강의 나루)을 지키는 데 성공했다. 이것은 육지에서 일본군과 싸워 조선군이 이긴 최초의 전투로 일본군의 호남 진출을 막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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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의장군 곽재우 1편

■ 홍의장군 곽재우 1편

■ 홍의장군 곽재우 1편

곽재우(郭再祐:1552~1617)는 임진왜란을 극복하는데 크게 공헌한 장수 중 한 사람이다. 곽재우는 많은 의병 중에서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켰고, 여러 전투에서 홍의(紅衣)를 입고 지휘해 뛰어난 무공을 세웠다. 그러나 29세의 젊은 나이로 억울하게 옥사한 김덕령(金德齡:1567~1596)의 사례가 대표하듯이, 전란이 끝난 뒤 의병장들은 대체로 공훈에 합당한 포상이나 예우를 받지 못했다. 선무(宣武)공신에 책봉되지 못했고, 이런저런 관직을 거치기도 했지만 끝내는 은둔하면서 ‘익힌 곡식을 끊고 솔잎만 먹다가(벽곡찬송:辟穀餐松)’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 보여주듯이, 곽재우도 그런 사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죽고 죽이는 처절한 살육이 난무한 전장보다 현실의 정치적 여건은 의병장에게 더 가혹했다.

곽재우는 1552년(명종 7년) 8월 28일 경남 의령현(宜寧縣) 세간리(世干里)에서 태어났다. 자는 계수(季綬), 호는 망우당(忘憂堂),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그가 태어난 의령은 외가인데, 그 뒤 그가 의병장으로 활동한 주요 지역이었고, 그래서 지금 그를 대표하는 지역이 되었다. 역시나 이런 측면은 조선시대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 남자가 결혼하여 여자의 본가에 가서 삼)의 흔적을 보여준다. 곽재우는 1567년 15세의 나이로 만호(萬戶) 김행(金行. 본관 상산)의 둘째 딸과 혼인했다. 일찍이 영남의 유학자인 남명 조식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수학하였으며, 함께 동문수학한 김우옹과 함께 스승 조식의 외손녀사위가 됨으로써 동서간이 되었다. 이 혼사는 그의 자질과 그것에 대한 인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다. 조식은 두 외손사위를 직접 선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곽재우는 18세 때인 1570년(선조 3년)부터 활쏘기와 말타기 · 글쓰기 등을 고루 익히고 병법서도 공부했다. 1575~76년에는 의주목사에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의주에서 살았으며, 1578년(선조 11)에는 명에 사신으로 파견된 아버지를 수행해 중국 북경에 다녀왔다. 이때 중국에서 가져온 비단은 그 뒤 임진왜란에서 그의 상징이 된 홍의(紅衣)의 옷감이 되었다.

10대 후반부터 문무를 함께 연마하던 곽재우는 32세 때인 1585년(선조 18) 별시에서 2등이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하지만, 답안지에 왕의 뜻에 거슬린 글귀가 있었다 하여 합격을 모두 취소시켰다. 구체적 내용은 기록에 나와 있지는 않지만, 그는 크게 낙망했을 것이다. 불행은 거듭 찾아왔다. 이듬해 8월 6일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다. 곽재우는 선산인 현풍 신당(新塘)에서 삼년상을 치르고 1588년에 탈상했다. 그의 나이 36세였다. 그 뒤 그는 과거를 포기하고 의령 동쪽 남강(南江)과 낙동강의 합류 지점인 기강(岐江) 근처 둔지(遯池)에 정자를 짓고 낚시질을 하면서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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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의 한, 귀 무덤코 무덤

■ 조선인의 한, 귀 무덤코 무덤

■ 조선인의 한, 귀 무덤(코 무덤)

일본 교토교토시 히가시야마구 차야마치(京都市 東山区 茶屋町)에 가면 높이 약 9m에 이르는 귀 무덤이 있다. 이름은 귀 무덤이지만 실제로는 코 무덤이기도 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모시는 도요쿠니신사(豊國神社)와 가까운 곳이다.

전쟁이 계속될수록 죄 없는 백성들의 피해는 날로 심해졌다. 정유재란을 거치면서 일본의 무장들은 보다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전리품으로 사람의 머리를 베어 가져갔는데, 나중에는 부피가 크고 무거우니까 귀를 베어서 소금에 절여 보내게 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 숫자를 센 뒤 무장들에게 감사장을 써 보내는 식으로 전공을 치하했다. 몇 명을 죽였는지 수량을 적은 확인서까지 보내 주며 그 공을 인정해 주니, 일본 장수들은 서로 더 많은 공을 세우기 위해 조선의 백성들을 마구 죽이기 시작했다. 얼마 후에는 귀는 두 개여서 숫자가 늘어날 수 있으므로 코를 베어 보내라는 명령이 내려지게 되었다. 원칙적으로 일본 장수들은 전쟁터에서 상대했던 조선 군인의 코를 잘라 보내야 했지만, 더 많은 공을 인정받고 싶어서 일반 백성들의 코까지도 마구 베어 일본으로 보냈다. 심지어 죽은 사람 뿐 아니라 산 사람의 코를 베어가는 일까지 발생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 길에서 코나 귀가 없는 사람을 자주 볼 수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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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일본으로 건너간 수많은 귀와 코들은 아무데나 버려졌는데, 길에서 썩는 악취를 견딜 수가 없게 되자 한데 모아서 귀 무덤, 코 무덤을 만들었다. 무덤이라고 해서 피해자를 추모하자는 의미는 아니고, 버려지고 더러우니 파묻어서 생긴 무덤인 것이다. 사실 처음의 이름은 ‘코무덤’이었고, 그들 스스로 너무 잔인하다는 이유로 이름을 ‘귀무덤’이라고 바꿨다고 한다. 현재 교토시가 세운 코 무덤 설명 팻말에는 귀무덤이라 쓰고 괄호 안에 코무덤을 덧붙여 놓았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코와 귀가 묻혔는지는 정확하게 파악되지는 않지만, 한국어 위키백과에는 12만 6천 명 분, 일본어 위키백과에는 2만 명분이라고 되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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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 무덤은 일본 전역에 있는데, 그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이 교토에 있는 것이다. 민가 한가운데 길 옆에 초라하게 놓여져 있는 귀 무덤(코 무덤)은 우리가 잊지 말아야할 역사임에 틀림없다. 1915년에 정비가 실시되었으며, 1968년에는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무덤 일부는 경상남도 사천시로 옮겨졌으나 아직 완전한 이장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한국과 일본 양국 모두의 무관심 속에서 관리 예산이 제대로 지원되지 않아 현재 개인이 관리하고 있다고 하니, 책임감 있는 대책이 필요한 것 같다.

요즘은 잘 쓰지 않지만 나이가 좀 지긋하신 분들은 아이들이 위험한 행동을 하려 할 때 “에비야!” 하고 제지하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때 ‘에비’는 귀와 코를 뜻하는 한자어인 이비(耳鼻)에서 나온 말이다. 그 시절, 왜군이 우리 백성들의 귀와 코를 마구 베어가니 아주 무섭고 조심해야 한다는 의미로 쓰여 졌던 것 같다.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며 변형이 일어나, 이비가 에비, 어비, 에비야 등으로 변형된 것이다. 어쨌든 귀 무덤, 코 무덤의 실질적인 피해자인 백성들에게는 매우 공포스러운 단어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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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군과 싸운 왜군 2편

■ 왜군과 싸운 왜군 2편

■ 왜군과 싸운 왜군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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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야가의 우리말 이름은 김충선(金忠善)이다. 전쟁이 끝난 후 사야가는 진주목사의 딸과 결혼해 우록동에 내려와 김충선(金忠善)이라는 이름으로 평생을 살았다. 사야가의 유품이 전시된 충절관에는 사야가 집안의 족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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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4월, 조선 침략을 위해 출병한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는 부산에 상륙했다. 사야가는 바로 가토 기요마사 휘하의 선봉장이었다. 사야가는 부산 상륙 후 경상도 좌병사 박진에게 강화서를 보내 투항의지를 밝힌다.

『임진년 사월 일본국 우선봉장 사야가는 삼가 목욕재계하고 머리 숙여 조선국 절도사 합하께 글을 올립니다. 이번에 일본이 이유 없이 군사를 일으키며 저를 선봉장으로 삼으매, 저의 소원인 조선에 한번 나가보고 싶은 생각으로 본의 아닌 선봉이 되어서 군사를 이끌고 본국 조선에 이른 것입니다. 다만 저의 소원은 이 나라의 예의문물과 의관풍속을 아름답게 여겨 예의의 나라에서 성인의 백성이 되고자 할 따름입니다.』

조선군에 투항한 사야가는 곧 바로 경상도 의병들과 힘을 합쳐 동래, 양산, 기장 등지에서 왜군과 전투를 벌였고, 한 달 동안 여덟 차례나 승전보를 올리는 개가(凱歌)를 이루었다. 한때 곽재우장군의 군대와도 연합, 경상도 연안의 일본군을 격퇴하기도 했다. 가토 기요마사의 제1부대를 전멸하는 공적을 세운 사야가는 선조에게 무관 정3품인 가선대부, 지금의 차관급 지위를 하사받기에 이른다. 사야가는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도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 데 참여, 혁혁한 공을 세웠다.

우록마을 입구에서 100m 쯤 떨어진 곳에 녹동 서원이 있다. 서원 뒤에는 김충선(金忠善)의 위패를 모신 사당 녹동사가 있다. 서원과 사당은 김충선의 사후 유림이 조정에 상소를 올려 지은 것이다. ‘중국의 문명을 그리워한다’는 뜻의 모하당(慕夏堂)이라는 호를 지을 정도로 김충선(金忠善)은 유교 문물과 예의를 따른 철저한 조선인이었다.

마을 뒷산 그의 무덤은 일본을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김충선(金忠善)은 1642년 72세의 나이로 두 번째 고향인 조선 땅 우록동에서 눈을 감았다. 그의 사후 조정은 대신급에 해당하는 정2품 정헌대부의 벼슬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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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군과 싸운 왜군 1편

■ 왜군과 싸운 왜군 1편

■ 왜군과 싸운 왜군 1편

《선조실록》에는 임진왜란 당시 공을 세운 인물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 가운데 낯선 이름들이 보인다. 사야가, 평구로, 산여문, 요질기,사고여무...이들은 조선 이름이 아니라 왜군(倭軍)의 이름이다. 7년에 걸친 전쟁 중 왜군과 싸운 왜군들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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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조선에 투항한 일본군’이란 뜻의 항왜자(降倭者:조선군에 투항한 왜군)들이 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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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당시 조선에 투항한 왜군 가운데 사야가라는 인물이 있었다. 사야가는 1592년 조선으로 출병한 왜군 선봉 부대의 장수였다. 그런 그가 조선에 투항해 왜군과 싸우게 된 것이다. 일본 쪽에서 보면 반역자인 셈이다. 그는 현재 일본에서도 유명한 역사인물이다. 일본 고등학교 검정 역사교과서 26종 가운데 1종에 항왜자 사야가 라는 내용이 실려 있다고 한다. 조선에 귀화(歸化)한 사야가를 소개하고, 조선 침략 전쟁의 어리석음과 함께 그 속에서 한 개인이 어떤 길을 선택해 살았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사야가는 일본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유명한 존재로서 일본 역사학자들도 사야가에 대해 활발하게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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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야가에 대한 관심이 높기는 하지만, 일본 역사서에 항왜(降倭)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당시 일본군이 조선에 투항에 일본에 맞서 싸웠다는 사실은 결코 후세에 알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사야가가 일본에 알려진 것은 그가 쓴 모하당 문집(慕夏堂文集) 이란 책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 문집은 사야가가 생전에 쓴 일기와 시조 등을 모아 엮은 것이다. 그런데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항왜의 존재와 그들의 행적에 대해 제대로 연구도 하지 않았고, 그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도 드물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사야가의 이름이 두 차례 언급될 뿐, 구체적으로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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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광역시 달성군에 야트막한 산줄기에 둘러싸인 시골마을이 있다. 사슴을 벗 삼아 지낸다 하여 우록동이라 불리는 이 마을은 400년 동안 이어온 사성 김해 김씨 집성촌이다. 그런데 이들의 시조가 뜻밖에도 사야가의 자손이라고 한다. 그런데 왜장(倭將)이었던 사야가의 후손들은 어떻게 김해 김씨로 살아왔을까? 사야가는 조선에 투항 한 후 많은 공적을 쌓았고, 그 공을 인정받아 선조로부터 김해 김씨 성을 하사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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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나들이

■ 우리말 나들이

■ 우리말 나들이

1. 판에 박다

우리나라 전통 음식으로 ‘다식(茶食)’이라는 게 있다. 녹말, 송화가루, 콩가루, 참깨가루 등을 꿀에 반죽해서 만드는데, 흰색, 노란색, 녹색 등 색깔도 넣어서 나무로 판(틀)을 만들어 그 안에 재료를 넣어서 모양을 낸다. 그래서 다식은 여러 개를 만들어도 모양이 똑같다. 물건이 여러 개 있는데 모양이 똑같거나 별 차이가 안 날 때 ‘판에 박았다’고 한다. 요즘으로 말하면 ‘붕어빵’과 같은 의미라고 할까? 사물이 모두 판에 박은 듯이 똑같을 때 ‘천편일률(千篇一律)’이라는 한자성어를 쓰는데, 이는 모두 한결 같이 비슷하거나 똑같아서 개성이 없다는 부정적인 의미가 강하다.

2. 한풀 꺾이다

한창이던 기세나 열기가 어느 정도 수그러지는 것을 ‘한풀 꺾이다’라고 한다. 이 말은 옛날에 옷을 손질하던 방법과 관련이 있다. 옛날에는 옷을 빨 때 솔기를 모두 뜯어 분리해서 빨래를 하고, 잘 말린 다음 다시 꿰매서 입어야 했으니 거의 옷을 새로 만드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때 천에다 풀을 먹여 새 옷감처럼 올을 곧게 펴준다. 풀은 쌀가루나 밀가루를 물에 풀어서 끓여서 만드는데, 풀을 천이나 종이에 바르면 풀이 마르면서 빳빳해진다. 이것을 ‘풀을 하다’ 또는 ‘풀을 먹이다’라고 한다. 풀을 먹이면 천에 광택도 나고 때도 덜 탄다. 풀을 먹여 천이 빳빳해지는 것을 ‘풀이 선다’라고 하고, 풀이 선 상태를 ‘괄괄하다’고 한다. 성품이 억세거나 목소리가 크고 거센 사람을 괄괄하다고 하는 것도 여기에서 나온 말이다. 하지만 괄괄하던 옷도 시간이 지나면 풀기가 죽어 후들후들해지고 볼품이 없어지는데, 이것이 바로 한풀 꺾이는 것이다. ‘한풀 죽다, 풀이 죽다’ 등도 같은 말이다.

3. 깡통 차다

가진 돈을 모두 잃고 쫄딱 망했을 때 ‘깡통 찼다’는 말을 쓴다. 원래 옛날부터 같은 뜻으로 쓰던 말은 ‘쪽박 차다’였다. ‘쪽박’은 조롱박을 반으로 쪼개서 만든 작은 바가지인데, 거지들이 쪽박을 들고 다녔던 데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바가지 대신 깡통이란 말을 쓰게 되었다. ‘깡통’은 영어의 ‘캔(can)’과 우리말의 ‘통’이 합쳐진 것이다. 우리나라가 일제 강점기로부터 해방된 후 미군이 들어오면서 캔도 함께 들어왔다. 캔이 깡으로 소리가 바뀌고, 같은 뜻을 가진 통이란 말까지 더해져 깡통이 된 것이다. 그런데 그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이 본 깡통은 대부분 미군들이 내용물을 쓰고 버린 빈 깡통이었다. 그러다 보니 깡통이라고 하면 으레 속이 빈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는 것 없이 머리가 빈 사람을 ‘깡통’이라고 하는 것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미군이 버린 빈 깡통은 그 당시 가난한 사람들이 여러 가지 용도로 주워서 쓰기도 했는데, 주로 거지들이 밥을 빌어먹을 때 옛날 바가지 대신 깡통을 쓰게 되었다. 그래서 ‘쪽박 차다’의 쪽박 대신 깡통이란 말이 들어가 그대로 똑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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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대첩 3편

■ 명량대첩 3편

■ 명량대첩 3편

이순신의 기함(旗艦:사령관의 군함)은 이런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적을 기다렸다. 일본군은 이순신의 기함을 보자 한꺼번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때 이순신이 기수에게 신호를 보냈다. 기수가 깃발을 올리자 육지 양쪽 끝에 숨어 있던 장정들이 물레를 돌려댔다. 물레에 연결된 채 바닷 속에 늘어져 있던 쇠줄이 팽팽해지면서 위로 당겨졌다. 일본 배 밑바닥이 뾰족한 것을 이용한 철쇄전법에 선두함이 걸려 들었다. 그 뒤를 빠른 조류를 타고 달려오던 다른 배들이 들이받기 시작했다. 거침없이 몰려오던 일본 전선들은 생각지도 않은 철쇄에 걸려 차곡차곡 쌓이며, 서로 부딪쳐 부서진다. 오후 1시경 밀물이 끝나고 물길이 멈춘다.

그러나 일본 수군들은 좁은 수로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한 채 혼란에 빠져 있다. 이때 조선 수군이 전진하며 각종 화포를 빗발처럼 퍼부어 대며 맹렬한 공격을 가한다. 조선 군함에서 탄두에 철갑을 두른 초대형 화살인 대장군전(大將軍箭)이 발사됐다. 머리통만한 단석들도 발사됐다. 화포와 조란탄도 발사됐다. 이순신의 기함이 분전하면서 조선 수군의 다른 함선들도 총공격에 나섰다.

다시 썰물이 되는 순간, 정지했던 물길이 거꾸로 바뀌어 일본 수군 쪽으로 빠르게 흐른다. 조선 함선은 떠내려가는 일본 수군을 화포로 쏘며 추격해 완전히 섬멸해버린다. 이순신의 기함이 붉은 갑옷을 입은 채 죽은 적장 구루시마 미치후사의 주검에서 목을 베어 내걸었다. 일본군은 동요했다. 다시 조류가 조선 수군의 순류 쪽으로 바뀌자 전세는 완전히 조선 수군 쪽으로 기울었다. 일본 수군은 결국 철수하기 시작했다. 전투는 불과 2시간 만에 막을 내렸다. 쇠사슬과 울돌목(鬱陶項)의 물길을 이용한 이 작전으로 일본 수군은 손 한번 써보지 못한 채 전멸하고, 조선 수군은 단 한 척의 피해도 없이 대승을 거둔 것이다.

《난중일기》에는 이순신전함의 피해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전사자 2명, 부상자 3명. 사상자는 모두 합쳐 5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순신이 사상자의 이름, 부상의 정도까지 직접 기록할 만큼 조선 수군의 피해는 적었다. 남은 13척의 함대를 모두 추정해 볼 때 전사자가 약 30명, 부상자가 약 40명으로 모두 70~100명 미만의 사상자가 있었던 것으로 계산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일본 수군은 그 피해가 실로 어마어마했다. 불타고 부서진 배는31척, 약 90척은 심하게 파손된 채 달아났다.

조선 수군이 13척의 배로 133척이 넘는 함대를 이겨낸 이 신화적인 전투가 바로 명량대첩이다. 세계 해전사에서도 비슷한 예를 찾아보기 어려운 불멸의 금자탑이다. 명량대첩은 한순간 빼앗긴 조선의 해상권을 되찾은 값진 전투였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명량대첩 2편

■ 명량대첩 2편

■ 명량대첩 2편

이순신은 기본적으로 임진왜란에서 조선의 바다가 얼마나 중요한지 철저히 인식하고 있었다.이런 전략 개념이 불명확한 조정에서는 한때 남은 군함이 12척에 지나지 않는다는 보고를 받고 “약한 수군력으로 더 이상 해전을 수행할 수 없으면 육지로 올라와 육전을 해도 좋다”는 명령까지 내린다. 그러나 그는 절대 해전을 포기해서는 안 되며 12척의 군함으로 적을 막아내겠다는 강한 결의를 보였다.

명량해전(울돌목해전)은 이순신의 해전 가운데 가장 눈물겹고 감동적인 전투이다. 조선 수군이 사실상 궤멸된 뒤 약해질 대로 약해진 수군을 동원해 일본의 대 함대에 맞서 기적 같은 승리를 쟁취했기 때문이다. 당시 명량해전 직전까지 이순신이 동원할 수 있었던 배는 군함 13척과 초탐선 32척뿐이었다. 초탐선은 첩보선으로 활용할 수는 있었으나, 승선 인원이 적고 무장력도 약해 실제 해전을 수행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에 반해 칠천량에서 승리한 일본 수군은 최소 133척 이상의 군함으로 이뤄져 있었다.

아무리 우수한 배와 무기가 있다고 해도 13척 대 133척은 감당하기 힘든 전력 차이다. 그렇다면 이순신에게 또 다른 무기가 있었을까? 일본 함선이 통과하려는 해협은 지금의 전라남도 해남군 화원반도와 진도 사이에 있는 길이 2km 정도의 수로이다. 평균 폭이 500m지만, 배가 다닐 수 있는 가장 좁은 곳은 150m에 지나지 않는다. 암초가 많기 때문이다. 최저수심은 1.9m이며, 조류의 속도가 11.5노트로 매우 빠르다. 예부터 물 흐르는 소리가 마치 울음소리 같다고 해서 울돌목이라고 불렀다. 바로 이 울돌목(鬱陶項)의 엄청난 조류를 또 하나의 무기로 삼은 것이다. 요즘도 웬만한 배가 아니고서는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지 못한다. 이순신 장군은 울돌목(鬱陶項)에서 가장 폭이 좁은 진도와 해남 우수영에 쇠줄을 연결해서 당겨 왜적을 격파하는 ‘쇠사슬 전법’을 썼다. 울돌목(鬱陶項)의 폭은 280~320m 안팎이다. 여기에다 배를 끄는 데 필요한 쇠사슬의 길이를 감안하면 450m 안팎의 쇠사슬이 필요했을 것이다. 수중 철쇄는 지금의 진도대교가 있는 폭이 가장 좁은 자리에 걸었을 것이다. 양쪽에 막개를 박아놓고 쇠줄은 물속에 잠기게 숨겨놓은 뒤 일본 수군을 기다리는 것이다.

1597년 9월 16일 오전 11시경! 어란진에서 출발한 133척의 일본 대 선단은 우수영으로 흐르는 밀물을 타고 빠른 속도로 울돌목(鬱陶項)에 들어선다. 일본 수군은 명량의 순류를 타고 거침없이 전진해왔다. 일본군 함대는 해협을 따라 좁고 길게, 거의 2km에 걸쳐 행렬을 이룬 채 다가왔다. 이순신은 군함 13척을 일렬횡대로 쭉 늘어세워서 적과 맞섰다. 그러나 이순신의 독려에도 조선 수군의 전열(戰列)은 무너졌다. 명량의 급류를 역류해서 맞아야 했기 때문에 격군들이 노를 힘껏 저어도 조금씩 뒤로 밀린 것이다.

-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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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대첩 1편

■ 명량대첩 1편

■ 명량대첩 1편

1592년 음력 7월, 조선 수군에 번번이 패한 왜군은 바다에서의 세력을 되찾기 위해 전 함대를 모아 남해로 출동했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학익진으로 왜군을 섬멸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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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장군의 명령이 떨어지자, 조선 수군은 왜군 함대가 진을 친 통영 앞바다로 나아가 판옥선 몇 대로 왜군을 꾀어내 한산도 앞 넓은 바다로 나오게 했다. 그런 뒤 거북선을 중심으로 나란히 후퇴하는 것처럼 보였던 판옥선들이 학이 날개를 펴듯 양쪽으로 펼쳐져 일본 군함들을 둘러싸고 공격을 퍼부었다. 이 전술은 학(鶴)이 날개(翼)를 편 모양으로 적을 둘러싸고 공격한다고 하여 학익진(鶴翼陣)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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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도대첩에서 학익진전법으로 승리를 거두었다면, 1592년 음력 9월에 벌어진 부산포해전에서는 장사진(長蛇陣)이라는 전법으로 승리를 이끌었고, 1597년 음력 9월에 벌어진 명량해전에서는 명량해협의 좁은 지형과 빠른 물살을 이용하여 일자진(一字陣)이라는 전법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장사진(長蛇陣)은 함대를 앞뒤로 길게(長) 한 줄로 늘어서게 하여 마치 뱀(蛇)과 같은 대형으로 적을 공격하는 전법을 말하고, 일자진(一字陣)은 배들이 옆으로 길게 한 줄로 늘어서서 돌격하며 포를 쏘아 적을 물리치는 전법이다. 이순신 장군은 전투 때마다 그에 맞는 전법(戰法)을 사용하여 적군을 물리친 것이다. 또한 우리 해역 사정에 적합하도록 배 바닥을 평평하게 만든 평저(平底) 형태 전선(戰船)의 우수성도 승리에 한몫을 했다.

",

이순신 장군은 명량해전에서 단 12척의 배로 10배가 넘는 왜군 함대에 맞서며 병사들에게 말했다. "병법(兵法)에 이르기를 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1000명이 겁을 낸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모두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르는 말이다."

이순신 장군의 말과 행동에 군사들은 두려움을 떨치고 굳은 의지로 전투에 나설 수 있었을 것이다. 죽음을 각오한 이순신 장군과 조선 수군의 용기가 세계 해전사(海戰史)에 유례가 없는 위대한 승리를 이끌었다. 이순신 장군이 이끈 조선 수군이 백전백승의 승리를 거둔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순신은 나아가 바다 전장(戰場)을 치밀하게 연구해 명량해협에서 적을 저지·격파하려는 전술을 세웠다. 하지만, 병력과 군함 수, 그리고 화력 등에서 압도적으로 불리한 조선 수군이 막강한 일본군에게 승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오직 죽을 각오로 싸울 때라야만 기적이라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 결사의 각오가 현실화되면서 세계사에 기록된 해전, 명량해전에서 승리한 것이다.

-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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