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31일 일요일

간택 3편

■ 간택 3편

■ 간택 3편

간택의 기준은 오늘날의 기준과는 큰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황당하기까지 한 것도 있었다.

- 키는 크지 않아야 한다.

- 이마와 머리결 사이의 선이 갈매기 모양(M자 모양)이 아닌 둥근 모양이어야 한다.

- 눈은 쌍꺼풀이 지면 안 되고, 눈꼬리가 약간 처져야 한다.

- 코는 끝이 뽀족하지 않고 둥근 모양에 입술은 얇아야 했고 목도 길지 않아야 한다.

- 손과 발은 작은 반면 엉덩이는 커야 한다.

- 피부는 희고 고와야 한다.

- 가슴이 작고 턱도 주걱턱이어야 한다.

(가슴이 크면 무식하다는 소리를 들었고, 주걱턱은 성품이 착하다는 징표로 해석)

- 목이 두꺼우면 안된다.(처녀가 아닐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는 해석 탓)

- 양미간이 좁으면 안된다.(남자를 밝힐 우려가 있다는 판단)

- 입술이 자색(紫色)이어서도 안된다.(건강하지 않아서 출산에 지장을 줄 우려)

이러한 기준은 미적 외모를 갖추기 보다는 인자하고 어진 호감형 인상을 주는 사람을 뽑겠다는 것이다. 왕비에 대한 평가는 인자함과 지성이 우선이고 미모는 나중이었던 셈이다. 이 기준이 중전, 세자빈 간택 뿐 아니라 민간에도 널리 퍼져 일반 가정에서도 며느리를 들일 때 적용했다고 한다.

당시 왕실에서 선호한 왕비감은 오늘날 미인의 기준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먼저 현재 사진으로 남겨진 조선후기 왕비들의 모습을 보면, 현대적 기준으로 봤을 때 그리 뛰어난 미인은 아니었다. 조선후기의 화원 신윤복의 미인도에 그려진 얼굴이 실제 왕비들의 모습과 흡사한 점이 많다고 한다. 얼굴이 복스럽고 턱은 둥글고 크며 눈은 가늘고 눈썹이 가지런한 모습이다. 조선시대에 선호되었던 인물은 팔등신의 날씬한 미인이라기보다는 전반적으로 견실하고 반듯한 모습을 갖추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미인에 대한 기준이 시대에 따라 달라졌음은 중국의 절세미인이라는 양귀비가 매우 통통한 모습으로 전혀 현대적인 미인이 아니라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삼간택에 올라간 세 명 중 한 명이 왕비나 세자빈으로 낙점되면 나머지 둘은 결혼도 하지 못하고 평생을 혼자서 살거나 왕의 후궁이 되기도 하였다. 왕의 여자가 될 뻔한 여인을 누가 감히 아내로 맞이할 수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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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택 2편

■ 간택 2편

■ 간택 2편

금혼령이 공포되면 해당 연배의 처녀를 둔 전국 사대부 가문에서는 사주단자(四柱單子)와 함께 부, 조, 증조, 외조의 이력을 기록한 신고서를 국가에 올려야 했다. 이 신고서를 처녀단자(處女單子)라고 하였다. 처녀단자는 예조(禮曹)에서 모아 왕에게 올렸다. 왕비 간택은 대체로 왕실의 어른인 대비가 주관하였는데, 대비는 처녀단자를 보고 그 중에서 가문과 사주가 좋은 처녀를 골랐다. 하지만, 이것은 형식이고 왕비감은 미리 정해 놓고 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왕실에서는 왕비를 간택할 때 세 차례의 심사과정을 거침으로써 최대한 공정성을 기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리고 왕비를 뽑는 중요한 행사를 전국적으로 알려 축제 분위기를 조성하고 널리 왕비감을 물색하려는 국가의 의지를 알렸다.

왕비 간택 시에는 먼저 상궁으로 하여금 왕비로 예정된 처녀의 집으로 가서 뜻을 정하고 당사자를 살폈다. 단,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해 내정되어 있었다고 해도 사주가 나쁘면 간택되지 못했다. 처녀단자를 받아들인 후에는 금혼령을 해제하였다. 그리고 가례도감(嘉禮都監)이라는 임시 관청을 설치하여 간택과 혼례를 주관하였다.

조선시대 국왕은 보통 8세 전후 세자에 책봉되면서 혼인을 하게 된다. 남자가 여덟 살이 되면 영구치가 나오고 지식이 늘어나기에 이때를 전후해 세자책봉을 하고, 세자에 책봉된 후에는 동궁(東宮)에 살면서 학업에 전념하기 위해 아예 혼인을 시켰던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 조선시대 왕비는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입궁하였다가, 세자가 왕위에 즉위한 후 정식 왕비에 책봉되었다.

간택은 초간택(初揀擇) - 재간택(再揀擇) - 삼간택(三揀擇)으로 이루어졌다. 보통 초간택에서 서류심사(처녀단자심사)로 뽑은 30명 안팎의 후보자 중에서 대여섯 명의 처녀들을 뽑고, 재간택에서 세 명, 그리고 삼간택에서 최종적으로 마지막 한 명을 뽑았다. 초간택에서는 약 30~40명의 처자들이 궐내에 들어오면 넓은 마루에 모아놓고, 각기 아버지의 이름이 적힌 방석위에 앉힌 뒤 다과를 먹게 하여, 그 용모와 행동거지를 살폈다. 부덕(婦德)과 집안의 가계, 미모, 이 세 가지를 모두 갖춘 처녀를 뽑기 위함인데, 이씨(李氏)는 본관을 불문하고 제외되었다. 이는 엄격한 유교 질서에 따라 동성혼을 금했기 때문이다.

재간택에서 뽑힌 3명의 후보자를 두고 이루어지는 마지막 삼간택은 왕과 왕비의 앞에서 치루어지는 것이 보통인데, 이때 왕과 왕비는 발을 드리운 안쪽에서, 궁녀들은 면전에서 그들을 관찰하였다. 이를 전후하여 정승들과도 논의를 거치게 된다. 이 논의에서 어느 가문의 규수를 왕비나 세자빈으로 정할지가 결정되는데, 비빈(妃嬪)의 간택이 정치상황과 전혀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왕실혼은 정략적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허다하였고, 보통 국혼은 사대부가(士大夫家)가 왕의 측근인 외척이 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경우이기 때문이다. 왕비를 배출한 가문은 당대의 명문거족이거나, 또는 왕비를 배출함으로써 명문거족으로 발돋움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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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택 1편

■ 간택 1편

■ 간택 1편

간택(揀擇)이란 글자 그대로 ‘가려서 뽑는다’는 말로 많은 인물 중에서 적임자를 선발한다는 뜻이다. 왕실에서 왕이나 세자의 혼인을 치르기 위해 여러 사람의 혼인후보자들을 궐내에 모아놓고 왕 이하 왕족 및 궁인들이 직접 보고 적격자를 뽑는 공식적인 행사를 일컫는 말이다. 요즘으로 말하면 1차 서류심사를 거친 참가자들이 모여 최종 합격자를 뽑는 공개오디션인 셈이다.

조선건국 초까지만 해도 간택제도는 없었고, 비빈(妃嬪)을 구할 경우에는 상궁을, 부마(駙馬)의 경우에는 감찰로 하여금 각각 예정된 처녀와 동남(童男)의 집으로 가서 혼인의 뜻을 전하고 당사자를 살펴 결정하게 하는 중매혼의 형태가 일반적이었다. 간택제도는 태종 때 부마선택사건을 계기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실학자 이익의 ‘성호사설’에 간택제도를 시행하게 된 배경에 대한 설명이 남아있다.

조선 초 태종이 이속이란 사람과 사돈을 맺으려고 사람을 보냈는데, 바둑을 두던 이속이 일부러 바둑을 끝까지 두고 사절을 만나, ‘짚신 짜는 데는 지푸라기가 제격’ 이라고 말함으로써 태종의 제안을 그 자리에서 거절했다. 왕실과 결혼하기 싫다는 것이었다. 이에 태종은 왕실이 무시당했다고 생각해 크게 노하여 이속의 집을 몰수하고, 이속의 아들에게 금혼령을 내렸다. 이후 국혼(國婚)에는 후보자의 단자(單子:名單)를 받아 직접 간택하도록 하는 것을 제도로 정하였다. 정통성에 컴플렉스를 가진 조선 왕실은 간택제도를 통해, 국법에 명시한대로 체계적으로 정비된 절차에 따라 왕비를 선택하게 되었다.

간택 절차에 의해 비나 빈이 되는 경우는 왕비나 세자빈 정도였고, 후궁들이 간택의 절차에 의해 궁에 들어오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그러나 왕위를 이을 후사가 없는 경우 후사를 보기 위해 간택의 절차에 따라 후궁을 뽑기도 하였다. 이렇게 뽑혀 들어온 후궁의 경우는 대부분 처음부터 종2품 이상의 높은 품계를 받았고, 이들이 낳은 아들이 세자가 되는 경우는 세자의 어머니로서 특별대우와 함께 궁호(宮號)를 따로 받기도 하였다.

왕비 간택은 일반 사가(私家)로 치면 의혼(議婚) 즉, 중매를 넣어 혼인을 의논하는 절차였다. 왕실이 아닌 일반 가정에서의 혼인은 양가의 부모가 모두 혼담에 간여할 수 있었지만, 왕실의 혼인은 왕실에서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왕비를 간택할 때에는 국왕의 나이에 관계없이 15세 전후 처녀(세자빈 간택의 경우는 나이가 좀 더 어려진다) 들의 혼인을 금하는 금혼령을 전국에 반포하여 처녀들의 결혼을 일시적으로 금지하였다. 금혼령의 대상은 사대부가(士大夫家) 전체를 대상으로 하지만, 사실상 사대부가문 중에서도 당대의 명문가문에 한정되었다. 금혼령이 내려져 있는 기간에는 양반 뿐 아니라 서민도 결혼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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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한직업 조선의 왕비 3편

■ 극한직업 조선의 왕비 3편

■ 극한직업 조선의 왕비 3편

1910년 한일합방에 이르기까지 무려 27명의 왕이 있었다. 왕후의 자리에 오른 여성은 41명이나 되었는데, 국모의 자리에 올라 국민의 사랑을 받았지만 개개인의 인생은 대부분 불행했다. 현덕왕후 권씨가 24세, 정현황후는 18세, 효현왕후 김씨와 장순왕후 한씨는 1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60세 이상 수명을 다한 왕후는 정순왕후 송씨가 81세, 신정왕후 조씨가 83세, 순정효황후 윤씨가 73세 등 14명에 불과했다.

왕비가 된 후 정변으로 폐위되는 경우도 많았다. 세조의 집권으로 단종이 왕위에서 물러나 귀양을 가는 바람에 폐비가 된 정순왕 후는, 현재의 서울 종로구 창신동 인근에서 옷감에 물들이는 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폐위된 지 230여년 만인 숙종 대에 복권되기는 했지만, 20대 이후의 전 생애를 일반인으로 살아갔던 정순왕후의 삶은 무척이나 힘들었을 것이다.

연산군과 광해군의 폐위로 폐비가 된 신씨와 유씨의 삶도 남편의 몰락과 함께 참담함을 거듭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연산군과 폐비 신씨, 광해군과 폐비 유씨는 사후에 남편과 함께 묻히게 된 점이다. 현재 서울 도봉구 방학동의 연산군 묘와 경기 남양주의 광해군 묘에는 왕과 왕비의 무덤이 쌍릉 형식으로 조성돼 있다.

왕비는 권력과 부가 보장되는 지위가 아니라, 답답한 구중궁궐에서 왕의 내조에 전념하는 여성으로서의 역할을 더 많이 요구받았다.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 뒤에 인공적으로 조성한 아미산(峨嵋山)과 궁궐 후원을 산책하거나, 궁궐 안에서 독서를 하는 것 정도가 왕비의 유일한 여가활동이었다. ‘왕의 조력자’로서의 역할 수행과 후계자 생산이라는 막중한 책임은 물론,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내·외명부의 수장(首長)으로서의 무게가 엄청났으리라. 자유도 없고 형식과 절차에 얽매인 답답한 궁중생활이 결코 녹녹치는 않았으리라.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이는 조선 왕비의 모습은 화려하다. 우아한 자태와 미모, 여기에 더해 화려한 궁중 복식까지 갖춰 입었으니 모든 여성의 선망의 대상이 될 법도 하다. 하지만, 어쩌면 조선의 왕비는 엄격한 궁중에서 틀에 박힌 일상을 살아가는 극한직업을 가진 존재였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일반 서민으로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는 작은 행복이 얼마나 소중 한 지를 새삼 깨닫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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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한직업 조선의 왕비 2편

■ 극한직업 조선의 왕비 2편

■ 극한직업 조선의 왕비 2편

왕비의 또 다른 중요 역할은 왕과 함께 종묘를 받들고 후손을 이어가는 일이었다. 종묘를 받드는 것은 양반가 종부의 봉제사(奉祭祀)와 같다. 이는 왕의 적처(嫡妻)만이 할 수 있는 일로 후궁들이 대신할 수 없었다. 왕비가 일찍 사망할 경우, 반드시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왕과 함께 종묘를 받들 존재가 없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왕은 현비(賢妃)를 세워 종묘를 받들고 집안과 나라를 다스린다.’는 내용이 왕비들의 교지에 자주 나타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왕비가 적자를 낳아야 하는 것도 중요한 의무였으나, 이는 종묘를 받드는 것만큼 대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후궁이 낳은 아들도 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궁의 아들이 왕이 되어도 대비의 위치는 후궁이 아닌 왕비가 차지하였다. 말하자면 후궁의 아들을 왕비의 아들로 삼게 되는 것이다. 조선 왕비의 절대적 권력이라고 할 수 있다.

위와 같은 기본적인 직무와 권한 외에 왕비는 대비로서 왕위계승자 지명권, 어린 왕을 대신하여 정치를 하는 수렴청정(垂簾聽政) 등의 권한도 가진다. 특히 다음 왕을 지명할 수 있는 대비로서의 권한은 조선 정치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또 다른 특혜는 부모에 대한 관직 수여, 출산 시 산실청이 마련되는 것, 죽음에 대한 특별한 장례절차, 종묘에의 입실, 왕실의 족보인 『선원록(璿源錄)』에 기록, 『열성왕비세보(列聖王妃世譜)』에 기록 등으로 다양하였다.

이처럼 왕비에 대한 권한 부여와 특혜가 많았던 것은 왕비가 왕의 짝으로서 존귀한 존재로 존중받아야 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왕은 태어나는 존재지만, 왕비는 다른 집안에서 왕실로 들어와 왕비로 만들어지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권위가 더 보장돼야 하는 것이다.

왕실의 후사를 이어야한다는 막중한 책임감과 함께 왕실의 자손을 번창시키기 위해 왕이 후궁을 두는 것도 인정해야 해야 함은 물론, 왕이 후궁에게 마음을 뺏기면 가슴앓이도 심했을 것이다. 성종과 폐비 윤씨와의 갈등에도 성종이 후궁을 총애하는 것에 대한 폐비 윤씨의 시기와 질투가 큰 몫을 했다. 왕비 집안에 대한 정치적 견제도 심했다. 태종이 부인인 원경왕후의 동생들을 처형한 사례나, 세종의 장인이자 며느리 소헌왕후의 부친인 심온을 처형한 것과 같이 왕비가 된 순간 친정가족들의 안위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도 여러 차례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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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한직업 조선의 왕비 1편

■ 극한직업 조선의 왕비 1편

■ 극한직업 조선의 왕비 1편

한 나라의 지존(至尊)이 국왕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그 부인인 왕비는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이 보장되는 누구나 부러워할 위치일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어떨까? 일반 서민이나 반가(班家)의 여인들보다 얼마나 더 행복했을까?

왕비는 왕의 내조자인 동시에, 궁궐 여인들로 조직된 내명부(內命婦)와 왕실소속 여성이나 관료들의 아내로 조직된 외명부(外命婦)의 수장(首長)이었다. 왕비가 되는 방법은 크게 3가지로 나누어진다. 세자빈 또는 종친의 부인으로 간택되었다가 남편이 왕위에 오르면서 같이 격상되는 경우, 처음부터 왕비로 간택된 경우, 후궁이었다가 왕비가 죽고 새로운 왕비가 되는 방법이 있다.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중전이 되고, 아들이 대를 이어받아 대비마마가 되는 것이 가장 정통적이고 정상적인 순서이다. 세자빈으로 간택되는 경우 대개 10대의 나이에 간택과정을 거친다. 그러나 정작 이 코스를 거쳐 조선의 왕비가 된 인물은 6명에 불과하다. 단종의 비 정순왕후 송씨, 연산군의 비 폐비 신씨, 인종의 비 인성왕후 박씨, 현종의 비 명성왕후 김씨, 숙종의 비 인경왕후 김씨, 경종의 비 선의왕후 어씨다. 그리고 현종의 비 명성왕후 김씨는 세자빈에서 왕비로, 그리고 아들 숙종이 왕이 되면서 대비의 위치까지 오른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만큼 세자빈에서 왕비를 거쳐 대비까지 가는 길이 결코 쉽지 않고, 그 삶과 운명이 결코 순탄치 않다는 반증(反證)이 될 것이다.

조선에 27명의 왕이 재위했는데, 이처럼 정통 코스를 거친 왕비가 소수에 불과한 이유는 무엇일까? 세자 교체 또는 정변과 반정 등 왕위계승을 둘러싼 정치적 변수도 적지 않았고, 후궁의 득세나 외척의 모반사건 등으로 폐위와 사사(賜死)되는 경우도 있었다. 또 적장자가 아닌 차남이나 손자의 즉위, 여기에 더해 후궁 소생의 왕들이 즉위하는 상황도 이어졌기 때문이다.

양녕대군의 세자빈과 같이 세자가 교체되는 바람에 대군 부인으로 강등된 사례도 있고, 인수대비로 널리 알려진 성종의 어머니는 남편 의경세자가 요절하는 바람에 세자빈의 지위를 잃었다가 나중에 자신의 둘째 아들이 성종으로 즉위하면서 대비의 지위에 오르게 된다. 소현세자의 빈 강씨는 남편의 갑작스런 의문의 죽음으로 세자빈 지위를 박탈당함은 물론 사약까지 받았다. 혜경궁 홍씨 역시 사도세자의 죽음으로 세자빈의 지위를 잃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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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부인은 어떻게 불렀을까 3편

■ 왕의 부인은 어떻게 불렀을까 3편

■ 왕의 부인은 어떻게 불렀을까 3편

원래 군주(君主)의 정실부인이 받을 수 있는 작위는 후(后)뿐이고, 비(妃)와 빈(嬪)은 후궁 또는 제후의 부인이 받는 작위였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는 전체적으로 조선시대만큼 내명부 체계가 엄격하지 않아서 후(后)와 비(妃)를 엄격히 구별하지 않고 동급으로 썼다. 또, 왕의 적처를 왕후라고 하고, 첩은 부인(夫人)이라고 하여 귀비(貴妃), 숙비(淑妃) 등의 칭호를 주었다. 또한, 여러 명의 적처가 동시에 존재하므로 태조 왕건의 경우도 신혜왕후 류씨(神惠王后 柳氏), 장화왕후 오씨(莊和王后 吳氏) 등의 적처를 동시에 두었다. 원 간섭기 이후부터 고려가 원의 제후국으로 격하되면서 모든 왕실 용어가 원나라보다 한 단계 낮게 격하되었고, 국왕의 정식 부인이라도 비(妃)로 격하되면서 원 간섭기가 끝난 후로도 여전히 ‘왕후’의 칭호를 되찾지 못했다.

조선 초기 세종 14년(1432)까지만 해도 고려의 관습대로 태종의 원경왕후 민씨를 ‘정비(靜妃)’ 라 부르는 것처럼 ‘〇비(妃)’가 호칭이었다. 그 이후부터 대한제국 수립 전까지 465년간은 ‘왕비’라 하였고, 대한제국에서는 ‘황후’라 했다. ‘〇비(妃)’에서 ‘왕비(王妃)’로 바뀐 이유는 조선은 일부일처제를 지향하여 정실부인 한명에게만 ‘왕비’라는 호칭을 부여하고, 나머지 후궁들은 비(妃)나 빈(嬪)으로 불렀다.

그러므로 ‘왕비’는 조선의 전형적인 칭호라 할 수 있고, ‘왕후’는 왕비의 사후(死後) 추존된 호칭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자주적인 외교지위를 확보함으로써 황제국 군주에게만 주는 사후 \조/종\의 묘호를 준 것처럼, 중전에게도 사후 \왕후\라 격상하여 추존하게 된 것이다. 실제로 광해군 일기의 기록을 보면 광해군이 자신의 생모인 공빈 김씨를 왕후로 추숭하려하자 신하들이 반대하면서 "정실부인이 아니라 후궁이었으므로 왕후가 아니라 왕비로 추숭해야한다"고 주장한 기록이 남아있다.

생전에 왕비를 부르는 호칭은 일반적으로 사극을 통해 우리에게 익숙한 ‘중전(中殿)’이다. 왕비가 거처하는 곳인 중궁전(中宮殿-교태전)에서 따온 말로, 중궁, 내전, 곤전, 곤궁 등도 사용되었으나 보통 ‘중전마마’로 불리었다.

따라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조선의 국모를 칭할 때는 “〇〇왕비”가 아닌 “〇〇왕후”라 함이 옳다. 그리고, 대한제국이 된 뒤의 고종황제의 부인은 명성왕후가 아니라 명성황후라 함이 올바른 호칭이다. 하지만,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 중 일제 강점기의 식민사관의 영향으로 입버릇처럼 ‘민비’라고 하시는 경우가 간혹 있는 것 같다.

명성황후는 죽은 뒤에 추존되었고, 현직에서 살아생전 황후 자리에 앉았던 사람은 순명효황후(순종 비) 한 사람뿐이다. 그것도 일본에게 나라를 뺏기기 전 단 4년 남짓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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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부인은 어떻게 불렀을까 2편

■ 왕의 부인은 어떻게 불렀을까 2편

■ 왕의 부인은 어떻게 불렀을까 2편

원 간섭기 이후에는 왕실의 관제와 용어가 상당수 격하되었고, 내명부(內命婦)의 수장(首長)이 원나라 공주로 바뀌고 그 구성원 일부도 원나라가 차지하면서, 그 이전의 내명부 관제가 사실상 무너졌다. 하지만, 원나라가 고려의 관제와 왕실용어들을 격하시키기는 했지만 사실 눈에 띄는 주요부서에 주로 행해진 것이며, 고려의 관제를 모두 속속들이 격하시킨 것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고려 행정의 위계구조에 황제급과 제후급이 섞여 혼란이 생겨버렸는데, 후궁제도도 마찬가지였다.

이 시기에는 무조건 원나라 공주가 정비(正妃)가 되었고, 원나라 출신이면 고려인 부인들보다 서열이 앞섰다. 반드시 공주 출신이 아니었어도 원나라 출신이면 정비(正妃)로 대우받았다. 국왕의 정비는 원나라의 공주로 정해졌지만, 여전히 국왕은 여러 부인을 정식 부인으로 둘 수 있었다(일부다처제). 이때 왕의 부인들은 ‘〇비(妃)’ 형태로 책봉되었다. 당시 기록에 비(妃)가 붙은 여인들은 모두 국왕의 왕비나 왕비에 가까운 후궁으로 볼 수 있다. 명칭도 더욱 다양해져 의비, 정비, 신비, 혜비, 순비 등 붙일 수 있는 칭호들은 대부분 붙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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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호칭적인 면에서 궁주(宮主)가 사라졌다. 정확히 말하면 원나라공주가 공주의 칭호를 가지고 가는 바람에 공주=궁주라고 여기던 고려의 왕실 칭호에서 원나라 출신이 아닌 이상 공주나 궁주를 쓸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충선왕 때 처음으로 옹주(翁主)라는 칭호가 궁주를 대체하며 후궁들과 왕녀(王女)에게 사용되었고, 옹주는 궁주 또는 공주보다 한 단계 낮은 격으로 사용되면서 천민출신 후궁들이나 왕실 관련 외명부 봉작에서 많이 보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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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태종이 내명부 체제를 개편하여 정실부인은 1명만 있을 수 있었다. 사회 전반에도 적서차별을 두어 제사를 받들 정실부인 처(妻)는 오로지 1명이고, 그 외에 부인은 모두 첩(측실)으로 제한했다. 태종이 처첩의 구별과 적서차별을 강화한 것은 고려시대 때 일부다처제의 관습으로 아버지 이성계가 고향(함경도)과 개경에 2명의 정실부인을 뒀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후처였으나 경처(景妻)였던 강씨가 왕후가 되었고, 왕권의 라이벌로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인 무안대군과 의안대군까지 생겨버렸다. 그래서 피비린내 나는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거쳐 국왕이 된 태종은 왕실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도 후계구도를 깔끔히 처리하겠다는 의도를 강력히 내보였다. 그리하여 ‘예에는 두 적이 있을 수 없다예무이적(禮無二嫡)’이라는 예법에 따라 왕에게는 한 명의 적처(嫡妻)만이 가능하게 하였다. 처와 첩의 구분이 엄격해지고 따라서 적처인 왕비의 위상이 높아졌다. 조선에서는 후궁은 비록 왕을 낳았어도 대비(大妃)가 될 수 없었다. 고려 때 아들이 왕이 되면, 후궁이라도 태후(太后)가 될 수 있었던 것과 크게 달라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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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부인은 어떻게 불렀을까 1편

■ 왕의 부인은 어떻게 불렀을까 1편

■ 왕의 부인은 어떻게 불렀을까 1편

동양의 한자 문화권 왕실에서는 일부일처다첩제가 일반적이어서, 왕의 정실부인과 왕의 첩이라고 할 수 있는 후궁 제도가 당연시되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신라와 고려 때까지만 해도 정실부인이 여러 명이고 후궁도 여러 명인 경우가 있었는데, 두 번째 이후 부인들도 엄연히 정식 부인이므로 후궁보다는 격이 높았다. 조선시대부터 정실부인은 단 한 명, 그 외엔 모두 후궁으로 구분되었다.

고구려나 백제, 가야, 발해의 비(妃)에 대한 시호는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신라는 남아있는 단편적인 기록을 통해 생전(生前)에는 ‘〇〇부인’ 이라고 부르다가 죽으면 왕후로 추존했던 것으로 보이며, 왕태후 또는 황후 등의 중국식 칭호가 사용된 흔적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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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고려에서는 정실부인은 왕후(王后)로, 후궁은 부인(夫人)이라 했던 것으로 보인다. 호족의 딸과 결혼했을 때는 출신 지역명을 덧붙여 ‘〇〇궁(宮)부인(양주궁부인)’ 또는 ‘〇〇원(院)부인(광주원부인) 이라 칭하였다. 가장 많은 후궁을 둔 태조 왕건의 경우도 왕후가 6명이고 부인은 24명이었다. 그런데 정처인 신혜왕후가 ’하동군부인‘이라고 불린 적이 있고, 대부분의 다른 부인들도 ’〇〇부인‘으로 불린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와 같은 명확한 구별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 비해 고려시대는 적서 차별이나 남녀 차별이 느슨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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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칭 상으로나 명예 면에서 약간의 서열이 존재하기는 해도 동등한 왕의 여자라는 점 때문에 왕비와 후궁의 구별이 조선시대보다 엄격하지 않았고, 이는 왕의 자식들도 마찬가지였다. 고려 성종 이전에는 원래 왕위계승자들만을 위한 칭호인 태자가 남용되어 왕의 아들이라면 누구나 태자 칭호를 받게 되어, 이를 구별짓기 위해 맏아들이라는 뜻의 정윤(正胤)이라는 칭호가 새로 만들어지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으니 내명부는 말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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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고려 중기(목종~원종)에 접어들면서부터 원 간섭기 이전까지의 시기에는 왕비와 후궁에게 보통 건물을 하사하고 그 건물 이름을 따라 ‘〇〇궁주(宮主) ’〇〇전주(殿主)‘ ’〇〇궁비(宮妃)‘ ’〇〇원비(院妃)‘ 등으로 불렀으며, 이는 고려 초기의 출신지명을 딴 ’〇〇궁부인‘, ’〇〇원부인‘이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에서 가끔 원비(元妃)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보통 이 단어는 정비(正妃)와 같은 뜻이지만, 엄밀히 따지면 다르다. 고려 시대 때는 왕의 정실부인이 한 명이 아니었고 정실부인과 후궁의 구별마저 엄격하지 않았기에, 여러 명의 아내들 중 왕이 제일 처음으로 맞이한 아내를 품계나 서열이 낮더라도 원비(元妃)라고 불렸다.

-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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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왕후, 정순왕후 송씨

■ 비운의 왕후, 정순왕후 송씨

■ 비운의 왕후, 정순왕후 송씨

한 나라의 국모로 지존의 몸이 되었으나, 결국 자식도 하나 없이 청상과부로 이 세상을 살다가 가신 비운의 왕후 정순왕후 송씨는 세종 22년(1440년)에 아버지 판돈녕부사 송현수(여산 송씨)와 어머니 여흥 민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단종 1년(1453년)에 14세의 나이로 15세의 단종과 혼인하게 되었다. 하지만, 신혼의 단꿈을 꾸어야 할 이 시간도 잠시, 1453년 계유정난으로 수양대군이 문종의 고명대신(유지를 받든 대신)인 황보인과 김종서 등을 죽이고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수양대군은 약 2년간 조카 단종 밑에서 영의정으로 때를 기다리다가 결국 허수아비 왕 단종에게 양위(?)를 받아 1455년에 왕에 올랐다.

단종이 상왕(上王)으로 물러나 앉았다가 세조 3년(1457년) 노산군으로 강등되고 영월로 유폐(幽閉:사람을 일정한 곳에 가두어 두고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함)되자, 더불어 정순왕후 송씨 또한 왕대비가 되었다가 대군부인으로 강등되게 되었다. 단종이 영월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자, 정순왕후 송씨는 슬하에 자녀도 없이 꽃다운 나이 열여섯에 청상과부가 되었다.

송씨는 동대문 밖 숭인문 청룡사 앞 동망봉(東望峯) 기슭에 초막집을 짓고 그녀를 따르던 시녀들과 함께 살았다. 단종의 죽음을 듣고는 소복을 입고 조석으로 산봉우리(동망봉) 거북바위에 올라 단종이 있는 동쪽을 향해 구슬프게 통곡했다고 한다. 그 구슬픈 통곡소리에 주위 아낙네들도 함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정순왕후는 시녀들이 동냥해온 음식으로 끼니를 해결했다. 이 소식을 들은 세조가 식량을 보냈으나 끝까지 거절하고, 자줏물을 염색하는 일로 연명하며 여생을 살았다고 한다. 참 지조있는 왕후였다. 그 연유로 인해 그 마을 이름이 자줏골이 되었다고 한다. 정순왕후는 비참하게 세상을 떠난 단종을 그리워하며 살다가, 82세에 한 많은 일생을 마치게 되었다. 다행히 177년이 지난 1698년 숙종 24년에 단종이 복위되자 함께 종묘에 모셔지게 되었다.

고통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참고 견뎌내야 하는 것이라고 한다. 정순왕후 송씨도 아마 그 고통을 참고 견디며 그 한 많은 시간들을 견뎌냈을 것이다. 어쩌면 죽음보다도 살아있음이 더 고통스러웠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참고 견디며 남편 단종 몫까지 다 살아내며 천수를 다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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