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11일 월요일

◇ 1류 국민, 3류 행정

◇ 1류 국민, 3류 행정

◇ 1류 국민, 3류 행정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 세계 언론은 재해 개요나 피해 규모 못지 않게 참사에 대처하는 일본 국민의 자세에 주목했다. 극한 상황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 국민성에 놀란 것이다. 미국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는 “그들의 참을성과 질서 의식은 고귀했다”고 감탄했고,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인류 정신의 진화를 보여줬다”고까지 격찬했다.

하지만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그런 선망어린 시선은 상당 부분 거둬졌다. 매일 7000명 안팎으로 쏟아지는 확진자로 당국은 허둥지둥이다. 일본 정부는 뒤늦게 주요 도시에 긴급사태를 선포하고 영업시간 제한과 외출자제 지침을 내렸지만, 거리는 여전히 사람들로 흥청댄다. 인류의 진화라던 그 일본이 맞나 싶다.

100년전 이방인의 눈에 비친 한국은 그리 고상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 시어도어 루즈벨트 전 미국 대통령의 친구였던 친일 언론인 조지 케난은 조선인을 “나태하고 불결한 민족”으로 묘사했다. 이토 히로부미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한 조지 레드 예일대 교수도 담뱃대를 빨면서 침을 뱉는 농민을 한심하게 보면서 “대낮에 드러눕기 일쑤인 사람들”이라고 혹평했다. 국민의 자발적인 협조와 의료진의 감동적인 헌신 덕분에 코로나를 비교적 성공적으로 방어하고 있고 K방역에 대한 찬사가 나라 안팎에서 이어지는 요즘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일 법하다.

하지만 이런 상찬이 최근엔 다소 빛이 바래는 느낌이다. 현장과 괴리된 일부 탁상행정 때문이다.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가 적용되는 부산과 수도권의 목욕시설 방역지침이 대표적으로 꼽힌다. 일반 대중탕은 영업이 가능하지만 아파트 내 커뮤니티 목욕탕은 금지 대상이다. 수영장 샤워장은 괜찮고 헬스장은 안된다. 운동으로 흘린 땀을 씻지 못하는 것이다.

변호사시험이나 교원임용시험은 코로나 확진자도 칠 수 있으나 일부 국가 자격시험은 응시가 불가능한 점 역시 형평성 논란거리다. 지난 주까지만 해도 음식과 음료를 함께 파는 카페에서 몇시간씩 앉아 마스크를 벗고 식사를 할 수는 있지만 커피는 못 마시는 어이없는 상황이 연출됐다. 원칙없이 풀었다 죄었다 하는 바람에 생긴 일이다.

“우리나라 정치인은 4류, 관료행정은 3류, 기업은 2류 수준이다.”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이 한 말이다. 코로나 위기 속 그때나 지금이나 무능한 정치와 행정을 국민은 믿기 힘들만큼 높은 공동체 의식으로 견뎌내고 있다. 이 회장은 당시 1류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이제 보니 국민이 1류다.

"

-국제신문 도청도설-

"

삼일절과 파고다공원

■ 삼일절과 파고다공원

■ 삼일절과 파고다공원

삼일운동이 일어나고 100년이 지났다. 1910년 일제에게 강제로 주권을 빼앗긴 뒤, 우리 선조들은 나라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나라 안팎에서 크고 작은 투쟁들을 벌여왔다. 1918년 만주에서는 독립 운동가 39명이 대표가 되어 독립 선언을 했고, 1919년 2월 8일 일제의 심장부인 도쿄에서는 한국 유학생들이 조국의 독립을 외치며 2·8독립선언을 했다. 해외에서 들려오는 독립 선언 소식은 국내에서 활동하던 독립지사들에게도 큰 힘이 되었다.

든든한 용기를 얻은 민족 지도자들은 고종의 장례식을 이틀 앞둔 1919년 3월 1일 대대적인 만세 운동을 계획했다. 우선 최남선·손병희·이승훈·한용운 등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작성했고, 서울의 파고다공원(현재 탑골공원)에서 독립 선언식을 열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몇몇 민족 대표들은 여러 이유를 대며 오지 않았고, 남은 대표들은 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다가는 자칫 흥분한 군중이 일본 헌병과 충돌하여 다칠 수 있다고 염려했다. 이들은 독립 선언 낭독의 장소를 파고다공원에서 인사동의 음식점인 태화관으로 바꾸었다.

그때 파고다공원에는 수많은 학생과 시민이 모여 민족 대표들이 독립 선언을 낭독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민족 대표들이 오지 않아 사람들이 머뭇거릴 때, 어떤 사람이 탑골공원 팔각정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독립선언서를 인쇄소에서 지방으로 나르는 역할을 맡았던 정재용 선생이었다. 후일 정재용 선생은 "공약삼장까지 낭독하고 조선독립만세를 선창했다. 함성과 함께 발로 땅을 구르는 소리가 지축을 울리는 것 같았다"고 증언했다. 일제에 억압받아온 우리 민족이 외치는 \대한독립 만세\ 소리가 탑골공원에 울려 퍼지고, 태극기가 물결 쳤다. 이렇게 시작된 3·1 만세 운동은 서울 도심 곳곳으로, 전국 방방곡곡으로 번져 두 달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만세 운동을 통해 일본의 식민통치에 맞서 독립하겠다는 뜻을 세계에 널리 알린 것이다.

파고다공원은 원래 고려 시대에 흥복사라는 절이 있던 곳이었다. 1464년, 불교에 대한 신앙심이 깊었던 세조가 원각사로 이름을 바꾸고 다시 크게 지었고, 연산군 때 이곳에 음악을 관장하는 관청인 장악원을 두기도 했다. 1514년 중종 때 원각사 건물이 헐리면서 비석과 10층 석탑만 남게 되었다. 그 후 1897년 고종의 명으로 영국인 브라운이 이곳을 서양식 공원인 파고다공원으로 조성하였고, 1992년에 탑골이라는 이곳의 옛 지명을 따서 탑골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어 유지되고 있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3·1운동의 상징, 유관순 2편

■ 3·1운동의 상징, 유관순 2편

■ 3·1운동의 상징, 유관순 2편

옥사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시신의 인도를 요구하지만 일제는 고문 사실이 드러날까봐 인도를 거부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이화 학당의 프라이 교장은 국제 여론에 호소하며 시신 인도를 요구한 끝에 그 시신을 넘겨받았다. 그렇게 돌아온 시신은 아주 끔찍했다. 손톱과 발톱은 모두 다 뽑혀져 있었고, 코와 귀가 잘려 나가고 머리카락이 가죽째 뽑혀져 있었다고 한다. 두 팔과 두다리와 머리와 몸통이 따로따로 잘려져 여섯 토막으로 나눠져 있었다고 하니 그 끔찍함에 소름이 돋는다.

10월 12일 시신을 넘겨받아 이틀 뒤 서울 정동교회에서 장례식이 거행되고, 시신은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하지만 무덤에서도 편히 잠들지 못했다. 도시계획에 의한 일제의 공사로 이태원 공동묘지의 유골을 미아리로 이장하면서 유골이 없어지게 되는데, 이후 열사의 유골은 찾지 못하고 말았다.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 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유관순열사의 유언이다.

삼일운동은 일본의 가혹한 무단 통치 아래서도 꺾이지 않는 우리 민족의 저력을 국내외에 떨쳤다. 또한 세계 여러 나라에게 우리나라 국권 회복 문제를 올바르게 인식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조직적인 독립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중국의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 민주 정부가 수립되어 독립 운동의 중추 기관으로 활약하게 하였다.

한편 국내에서는 일본으로 하여금 식민 통치 방법을 무단 통치에서 문화 정치로 바꾸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삼일절은 해방 이후 지금까지 가장 중요한 국가 기념일로 평가받고 있다. 이는 3·1운동이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차지하는 역사적인 의의 때문이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라고 밝히고 있는 대한민국 헌법 전문(前文)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일제의 철통같은 무단통치를 뚫고 전국 각지에서 자발적이고 열정적으로 전개된 3·1운동은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한 분명한 거부였다. 비록 3·1운동을 통해 일제 식민 통치를 극복하지는 못했지만 3·1운동은 비로소 한국 민족을 문화적, 역사적 민족 개념에 기반한 민족국가 건설이라는 목표를 한국 민족 개개인에게 뿌리내리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3·1운동의 상징, 유관순 1편

■ 3·1운동의 상징, 유관순 1편

■ 3·1운동의 상징, 유관순 1편

유관순열사는 1902년 충청남도 천안에서 류중권(柳重權)의 3남 2녀 중 차녀로 태어났고, 공주 영명학당에서 수학(受學)하다 1916년 미국인 여성 감리교회 선교사 사애리시(史愛理施) 부인의 권유로 서울의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편입학했다. 당시 이화학당은 대부분의 학생들이 기숙사 생활을 하는 학교였고, 집이 멀었던 유관순열사도 기숙사에 살며 공부하게 되었다. 유관순 열사는 뜨개질을 좋아하고 장난기 많던 소녀였다고 한다. 서대문형무소 기록에 따르면 5자 6치, 요즘 단위로 환산하면 169.7cm다. 당시 여학생 평균키는 150cm였으니 상당히 큰 체격이라고 할 수 있다.

"

유관순열사가 이화학당 고등과 1학년에 진급한 1919년, 3.1 운동이 시작되었다. 교장 룰루 프라이는 학생들의 안전을 염려하여 참가를 말렸지만, 김복순, 국현숙, 서명학, 김희자와 함께 결사대를 조직하고, 학당의 담을 뛰어넘어 3.1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이 여파로 1919년 3월 10일에 전 학교에 휴교령이 떨어지자 함께 이화학당을 다니던 사촌 언니인 류예도와 함께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와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 그것이 3.1 운동 중 천안 아우내 만세운동(1919년 양력 4월 1일, 음력 3월 1일)이다. 유관순 열사 부모도 일본군이 휘두른 칼에 학살됐고, 유관순 열사는 일본 앞잡이 노릇을 한 친일파 조선인 정춘영에 의해 체포되어 서대문 형문소로 끌려갔다.

",

공주재판소 법정에서 "나는 조선 사람이다. 너희들은 우리 땅에 와서 우리 동포들을 수없이 죽이고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였으니 죄를 지은 자들은 바로 너희들이다. 우리가 너희들에게 형벌을 줄 권리는 있어도 너희가 우리를 재판할 그 어떤 권리도 명분도 없다"고 말했다. 일본인 검사가 "너희들 조선인이 무슨 독립이냐"고 하자, 유관순 열사는 검사에게 의자를 던졌다고 한다. 감옥에서도 여러 번 대한독립만세를 불렀고, 그때마다 심한 고문을 당하고 매를 맞았다. 징역 3년형을 받았으나 법정모독죄가 추가되어 7년형으로 늘어나고, 교도소 안에서도 시위계획을 세우다가 발각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아야만 했다. 결국 일제의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1920년 9월 28일 결국 옥사했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김마리아와 2·8 독립선언서

■ 김마리아와 2·8 독립선언서

■ 김마리아와 2·8 독립선언서

1919년 2월 17일, 기모노를 입은 두 여성이 일본 도쿄에서 시모노세키로 가는 기차에 올라탔다. 두 사람은 시모노세키에서 배를 타고 부산으로 건너갔는데, 이들의 허리를 감싸는 오비(帶·띠) 속에는 몰래 숨겨 놓은 것이 있었다. 만약 발각된다면 당장 감옥으로 끌려갈 문서, 바로 2·8 독립선언서였다. 이들은 일본인으로 위장한 여성 독립운동가 김마리아(1892~1944)와 차경신(1892~1978)이었다. 김마리아는 도쿄 메지로여자학원, 차경신은 요코하마여자신학교에 다니던 유학생이었다. 9일 전인 1919년 2월 8일, 도쿄 유학생들의 주도로 일어난 2·8 독립운동의 실상을 국내에 전달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았던 것이다.

"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 윌슨 대통령이 천명한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된 일본유학생들은 적국 수도 한복판인 도쿄에서 조선의 독립을 선언했다. 이들의 선언문은 『우리는 자기 생존의 권리를 위해 모든 자유행동을 취하여 최후의 1인까지 자유를 위해 더운 피를 뿌리자』며 강한 독립 의지를 천명했다. 당시 도쿄의 조선인 남자 유학생은 700~800명이었는데 여자 유학생은 50명 정도였다. 2·8 독립선언의 서명자로 나선 유학생 대표 11명 중에서 여학생은 없었다. 하지만 여학생 역시 남학생 못지않은 애국심과 독립 의지를 굳게 지니고 있었다.

",

2·8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조선 여학생들은, 운동을 주도한 남학생들이 모두 체포된 뒤 이 일을 국내에 알려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되었다. 다른 유학생들과 함께 경찰에 끌려갔다가 풀려난 김마리아가 이 일을 맡았다. 황해도 출신인 김마리아는 서울 정신여학교 재학 시절 머물던 삼촌 김필순의 집에서 김규식·안창호·이동휘 같은 애국지사들이 드나드는 걸 보고 조국애를 키워나갔다. 도쿄 유학 시절엔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게 독립운동에 참여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김마리아는 2·8 독립선언서를 얇은 미농지에 열 장 넘게 베끼며 치밀하게 국내 잠입 준비를 했다. 그리고 믿을 만한 동지로 정신여학교 후배인 차경신과 동행하기로 했다. 김마리아는 서울과 대구, 광주, 황해도로 분주히 움직이며 2·8 독립선언의 실상을 알리고 3·1운동 준비 작업을 벌였다. 김마리아가 일본 유학 전 교사로 근무했던 광주의 수피아여학교에도 독립선언서를 전달했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3·1운동이 일어나고, 며칠 뒤 서울에서 체포된 김마리아는 심한 고문을 당해 평생 뼛속에 고름이 차는 병을 얻었다.

김마리아는 이후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결성해 독립운동 전선에 나섰고, 투옥과 상하이 망명, 미국 유학, 신사참배 거부 등 항일운동에 앞장섰다. 안타깝게도 광복 한 해 전인 1944년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3·1운동은 민족운동 전선에서 남녀의 차이를 처음으로 극복한 사건이었고, 이후 유관순을 비롯하여 많은 여성 운동가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을 바쳤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신라의 아이돌 화랑花郞 5편

■ 신라의 아이돌 화랑花郞 5편

■ 신라의 아이돌 화랑(花郞) 5편

화랑도의 무사도가 화랑집단은 물론이고 일반평민층에까지 널리 퍼져 보편화됨으로서 화랑도는 군사적인 면에서만 국가에 이바지한 것이 아니었다. 화랑도조직은 매우 의협심이 강한 집단으로서 약한 자를 돕는데 서슴지 않았고, 때로는 사회질서의 안녕을 위해 마을의 야경을 맡기도 하였다. 한편, 화랑도가 크게 활동하던 시기는 신라 고유의 신분제도인 골품제도가 확립되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가던 때였다. 화랑도는 이러한 신분계층사회에서 발생하기 쉬운 알력이나 갈등을 조절, 완화하는 데도 부분적으로 기여하였다. 화랑도가 진골귀족 및 하급귀족, 일반평민 출신 등 여러 신분계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면서도 국가에 대한 충성과 애국을 강조하는 공통된 목적을 가진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삼국통일을 달성하고 나자 신라의 제1차 목표인 군사적 목표는 일단 완료되었다. 이에 전사단으로서의 화랑도의 존재 의의는 점차 줄어들었다. 화랑도는 문무왕 대에 이르러 가장 왕성하였으나, 통일 후 국가가 안정되고 태평세월이 계속됨에 따라 화랑도 정신은 점차 쇠퇴하였다. 하지만 성덕왕 때 김대문은 화랑도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화랑세기》를 펴냈다. 이 책에는 200여 명에 이르는 역대 화랑들의 활약이 담겨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오늘날에는 전하지 않는다. 다만 고려시대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에 김대문이 화랑들의 이야기를 썼고, 어진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화랑에서 나왔다는 기록만 전할 뿐이다.

더욱이, 9세기에 들어와 왕권이 쇠약해진 반면 상대적으로 진골귀족의 세력이 크게 강화되면서, 화랑도는 귀족들의 사병적인 성격을 띠는 집단으로 변질되어갔다. 그러다가 신라말기 국가권력의 쇠퇴와 더불어 화랑도는 국가의 권력기구를 지지, 옹호한다는 본래의 성격과는 거리가 먼 청소년단체로 변하였다. 이처럼 점차 변질되어가던 화랑도는 신라의 멸망과 함께 존재마저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화랑도의 유풍(遺風)은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다. 고려시대 궁중의 연중행사였던 팔관회(八關會)의 의식에 양가(良家)의 자제를 뽑아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게 한 것 등은 그 한 관습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이러한 화랑도의 유풍(遺風)마저 사라지게 되고, 오로지 노래나 춤을 즐긴다는 가무조합적 기능만이 남게 되었다. 그리하여 화랑을 남자무당(巫夫)·창우(倡優)·유녀(遊女)·무동(舞童) 따위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되었고, 마침내 화랑도의 본질적인 성격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화랑도 정신은 한민족 고유의 전통과 이념의 발로로서 고려, 조선을 통하여 계승되어 국가 유사시에는 독립애국정신의 상징이 되었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신라의 아이돌 화랑花郞 4편

■ 신라의 아이돌 화랑花郞 4편

■ 신라의 아이돌 화랑(花郞) 4편

이처럼 화랑도는 성원 스스로의 의사에 따라 결합되어 공동목표를 위해 일정한 기간 동안 수련하는 단체였던 만큼 성원간의 인적 결합관계는 매우 단단하였다. 그들 사이의 우정은 단순한 우정관계가 아니었다. 사다함의 경우, 동료인 무관랑(武官郎)과 사우(死友)를 약속했고, 무관랑이 병으로 죽자 통곡한 나머지 그 자신도 병사할 정도의 관계였다. 이 점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남자들만의 조직인 화랑도 성원 사이에 일종의 동성애가 행해진 것은 아닐까 추측하고 있으나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어떻든 화랑도 성원간의 우정관계나 단체의식이 매우 강했던 것은 틀림없다.

화랑도는 독특한 무사도(武士道)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삼국사기≫에 수록된 화랑들의 전기를 보면, 당시에 화랑뿐 아니라 낭도나 일반 병졸에 이르기까지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는 목숨을 아끼지 않는다는, 무엇보다도 전사(戰死)를 명예로 여기는 무사도 정신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러한 무사도는 특히 화랑출신의 장군들이 모범을 보였다.

660년(태종무열왕 7년) 백제를 치기 위한 원정군의 주요한 장수는 김유신을 비롯해 그의 아우인 흠순(欽純, 또는 欽春)과 품일(品日) 등이었다. 황산(黃山)벌판의 싸움에서 품일과 김흠순은 신라군의 사기를 드높이기 위해 각기 아들인 화랑 관창(官昌)과 반굴(盤屈)을 전사하게 한 것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일화이다. 한편, 김유신은 672년(문무왕 12년)에 그의 아들 원술(元述)이 석문전투(石門戰鬪:황해도 서흥)에서 당나라군과 싸워 패하고 돌아오자, 왕명을 욕되게 하고 가훈(家訓)을 저버렸다는 이유로 그를 죽일 것을 왕에게 탄원한 적도 있다. 비록 원술은 왕의 비호로 목숨을 구했으나 감히 아버지를 볼 수 없었으며, 아버지가 죽은 뒤에 어머니를 만나려 했으나 끝내 어머니의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

화랑도의 수련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노래와 춤이었다. 본래 노래가 정신교육에, 특히 청소년의 의기를 북돋우는 데 큰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점에서 화랑도는 다른 민족의 청소년집단이나 전사조직과 마찬가지로 가무(歌舞)조합으로서의 일면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화랑도는 삼국항쟁이 치열해지기 시작한 진흥왕 때 제정되어 삼국통일을 이룩할 때까지 한 세기 동안에 활기를 띠었다. 화랑도는 이 시기에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재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통일신라시대 초기의 역사가 김대문(金大問)의 ≪화랑세기(花郎世紀)≫에 『현명한 재상과 충성스런 신하가 여기서 솟아나오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사가 이로 말미암아 생겨났다.』고 한 것은 이 사실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특히, 고구려와 백제를 상대로 1백년의 오랜 기간에 걸쳐 전쟁상태에 돌입해 있던 신라의 국가적 위기에 화랑도는 전사단으로서 크게 이바지하였다.

- 5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신라의 아이돌 화랑花郞 3편

■ 신라의 아이돌 화랑花郞 3편

■ 신라의 아이돌 화랑(花郞) 3편

한편, 낭도(郞徒)들의 신분이나 자격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수도인 경주에 사는 6부민(六部民)출신의 자제들이 주축을 이루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전에는 이들을 진골귀족 이하 6두품·5두품·4두품에 이르는 상류계층 출신의 청소년만으로 좁혀서 생각하였으나, 그들 가운데 일반 병졸이 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던 만큼 3두품 이하 2두품·1두품에 이르는 평민들의 자제들도 낭도에 포함되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옳은 것 같다.

화랑도는 이처럼 진골귀족에서부터 일반평민에 이르기까지 여러 신분에 속하는, 수도 경주 거주의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하여 그들 자신의 의사에 따라 자발적으로 맺어지고 있는 점이 하나의 특징이다. 다시 말해서 화랑도는 골품제도와 같이 혈연주의에 입각해 만들어진 단체가 아니라, 혈연주의를 초월해 자신들의 의사에 의해 결성된 일종의 결사체라 할 수 있다. 화랑도는 일정한 기간을 정해놓고 단체생활을 했다. 신라에서는 통상 3년을 하나의 서약·수련·의무 기간으로 정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화랑인 김유신(金庾信)의 수련기간이 3년으로 나타나 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화랑에 대한 기록을 종합해보면, 화랑은 대개 15세부터 18세까지의 청소년으로 되어 있다. 화랑집단의 구성원들은 이 기간 동안 경주 부근의 남산을 비롯해 금강산·지리산 또는 최근에 알려진 경상남도 울산군 두동면 천전리 계곡과 같은 명승지를 찾아다니면서 자긍심을 기르는 한편 무예와 도의(道義)를 연마하였다. 특히, 화랑은 김유신의 경우에서 보듯 혼자서 깊은 산 속의 동굴을 찾아가 단식기도하면서 여러 가지 신비스러운 체험을 하기도 하였다.

화랑도가 연마한 도의는 유·불·선 3교의 정신을 받들고 오계(五戒)와 3덕(三德)을 신조로 하며, 애국애족을 표방하였다. 5계란 임금에게 충성하고(事君以忠:사군이충), 부모에게 효도하며(事親以孝:사친이효), 친구에게는 신의를 가지고(交友以信:교우이신), 싸움터에서는 후퇴할 줄 모르며(臨戰無退이전무퇴), 살생은 가려서 한다는 것(殺生有擇:살생유택)이고, 3덕이란 겸허, 검소, 순후(淳厚)를 뜻한다. 그 가운데서도 특별히 귀중하게 여기던 덕목은 충(忠)과 신(信)이었다. 이것은 화랑도가 제정된 6세기 중엽으로부터 삼국통일을 이루는 7세기 중엽까지의 1세기 동안이 신라 역사상 드물게 보는 국난(國難)기였기 때문이다.

- 4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신라의 아이돌 화랑花郞 2편

■ 신라의 아이돌 화랑花郞 2편

■ 신라의 아이돌 화랑(花郞) 2편

6세기 전반기에 신라는 주변의 조그만 나라나 가야·고구려와 같은 큰 나라를 상대로 활발한 정복전쟁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이에 많은 병사를 필요로 했고, 이 때 새로운 군사제도가 만들어졌다. 화랑도가 국가에 의해 정식으로 제정된 것도 진흥왕 때(540∼576)의 일이다. 확실한 제정연대는 알 수 없으나, 562년의 대가야 정벌에 사다함(斯多含)이 화랑의 자격으로 종군하고 있는 만큼 제정연대는 이보다 빠른 시기인 것이 확실하다.

초대 화랑은 설원랑(薛原郎)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당시 신라 조정이 화랑도 제정을 서두른 것은 핵심이 되는 군대를 보충할 병력이 당장 필요했고, 장기적으로는 화랑도를 통해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서였다. 화랑도는 이처럼 궁극적으로는 인재를 양성한다는 교육기관의 임무를 띠고 출발한 제도였으나, 법률로서 제정된 정식 국가기관은 아니었다. 종전에 있던 촌락공동체적인 청소년조직의 전통과 중국 율령(律令)의 도입을 통해서 만들어진 관청조직의 원리를 결합시켜 만든 일종의 반관반민(半官半民) 성격을 띠는 청소년 조직체였다.

이와 같은 조직은 고구려에도 있었다. 경당(扃堂)이 바로 그것인데, 이것은 화랑도와 마찬가지로 청소년조직의 전통을 이은 것이다. 여기서 미혼 청년들이 학문과 도의를 닦고 무술을 연마하였다. 신문왕 때에 정규 국가적 교육기관인 국학(國學)이 완비된 뒤에도 화랑도가 교육적 기능을 지니는 민간 조직으로서 여전히 존속한 것은 이 때문이다.

화랑도는 한 시대에 하나의 집단만이 존재한 것은 아니다. 화랑도운동이 크게 일어났던 진평왕 때에는 많을 때는 7개 이상의 화랑집단이 동시에 존재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조정에서는 이들 여러 개의 집단을 통솔할 중심기관 또는 중심인물이 필요했던 듯 한데 화주(花主)가 바로 그것이 아니었을까 추측되고 있다. 화랑도는 각기 화랑(花郞) 한 명과 승려 약간 명, 그리고 화랑을 따르는 다수의 낭도(郎徒)로 구성되어 있다. 낭도의 수는 일정하지 않으나, 많을 때는 1천명이 되기도 하였다. 화랑은 각 집단의 중심인물로서 용모가 단정하고 믿음직하며, 무예가 뛰어나고 통솔력 있는 진골귀족 가운데서 낭도의 추대를 받아 뽑혔다. 아마도 요즘 아이돌같은 재주와 용모를 가진 엔터테이너였을 것이다

768년(혜공왕 4년) 신라에 사신으로 온 당나라 고음(顧愔)의 견문기인 ≪신라국기(新羅國記)≫에 『귀인 자제 가운데 어여쁜 자를 뽑아 분(粉)을 바르고 곱게 단장해 이름을 화랑이라 했으니 나라사람들이 모두 높이 섬긴다.』고 한 것은 바로 이 사실을 입증해 준다. 신라시대를 통틀어 화랑은 모두 2백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화랑도 내의 승려들은 월명사(月明師)의 경우에서 보듯 노래 가사를 짓거나 화랑집단이 어떤 의식을 집행할 때 도와주는 등 주로 지적·정신적인 면에서 화랑을 지도하는 위치에 있었던 만큼 학문적 교양이 풍부한 사람이 뽑혔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신라의 아이돌 화랑花郞 1편

■ 신라의 아이돌 화랑花郞 1편

■ 신라의 아이돌 화랑(花郞) 1편

‘화랑(花郞)’이라는 말은 ‘꽃처럼 아름다운 남성’이라는 뜻인데, 혹은 화판(花判)·선랑(仙郎)·국선(國仙)·풍월주(風月主)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들로 조직된 ‘화랑도(花郞徒)’는 단체정신이 매우 강한 청소년 집단으로 교육적·군사적·사교 단체적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화랑도’의 기능은 많은 인재를 배출하여 신라의 삼국통일 뿐만 아니라, 신라 골품제(骨品制) 사회에서의 여러 계층 간의 긴장과 갈등을 조절, 완화하는 데도 이바지하였다.

원시공동체사회에서는 촌락과 같은 지역공동체의 요소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내부에 청소년조직과 같은 소규모 공동체가 발생해 발전하게 되었다. 이러한 조직은 유목사회보다는 농경을 위주로 하는 농업사회에서 특히 발전하게 되는데, ‘화랑도’ 역시 신라가 고대국가로서의 모습을 갖추어가는 과정에서 그 조직과 형태를 완성해 나갔다.

≪삼국지(三國志)≫와 ≪후한서(後漢書)≫에는 이미 부족국가 단계인 삼한시대에 마을의 청소년들이 그들 고유의 집회소를 가지고 있었으며, 견디기 어려운 훈련을 통해 수련을 하고 있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신라는 4세기 중엽을 경계로 하여 급속히 국가체제를 정비해갔다. 따라서, 촌락 중심의 청소년조직은 그 성장·발전에 커다란 지장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더욱이 중앙집권체제의 정비와 더불어 신라사회에 점차 친족을 중심으로 한 사회조직이 생성, 강화되면서 더 위축되어 갔을 것이다. 왕권이 강화되고 중앙집권을 강화하기 위해 시행된 군현제(郡縣制)로 말미암아 점차 촌락공동체의 독자적인 청소년 조직은 중앙정부에 의해 흡수되기 시작해 이전의 청소년조직은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이러한 상황에서 중앙정부에 의해 새롭게 조직된 것이 흔히 화랑도의 전신(前身)이라 불리는 원화(源花, 原花)제도였다. 이것은 정부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얻기 위한 방편으로, 어여쁜 여성 두 명을 ‘원화(源花)’로 뽑아 단장(團長)을 삼고, 이를 중심으로 한 두 조직의 단체생활을 통해 뛰어난 인재를 등용하려고 한 제도였다.

처음 원화로 뽑힌 남모(南毛)와 준정(俊貞)은 무리를 3백여 명이나 모았으나, 두 여성 사이에 서로 미모를 다투며 시기하는 일이 생겨, 마침내 준정이 남모를 자기 집으로 유인해 억지로 술을 권해 취하게 한 뒤 끌어다 강물에 던져 죽여 버리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결국 준정은 이 일로 인해 죽임을 당했고, 조직은 해산되고 말았다. 이처럼 원화제도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으니 신라정부로서는 어쨌든 인재를 양성, 확보할 다른 제도가 필요했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