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13일 수요일

시험장은 난장판 2편

■ 시험장은 난장판 2편

■ 시험장은 난장판 2편

과거에 합격한 조선 선비들의 평균 나이는 마흔이었는데, 당시 평균 수명이 마흔이 안 되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그만큼 과거 시험이 어려웠음을 알 수 있다. 과거급제가 이렇듯 어렵다보니 부정행위도 아주 심하게 일어난 것이다. 온갖 부정행위가 공공연하게 성행함으로써 과거시험의 권위는 땅에 떨어져 과거의 폐단을 시정하라는 건의도 많았으나, 한번 흐려지기 시작한 제도의 결함은 걷잡을 수가 없었다. 이와 병행하여 뇌물과 정실(情實:사사로운 정에 이끌림), 문벌의 고하, 당파의 소속에 따라 급제와 낙제가 결정되니, 과거제도는 극도로 문란해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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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시험의 부정행위가 심각해지면서 시험장은 난장판이 되기에 이르렀다. 단속이 느슨한 틈을 타서 양반 자제들은 많은 수종(隨從)을 데리고 들어갔다. 수종들은 책을 가진 자, 시험지를 베껴주는 자, 외부와 연락해 시험답안지를 바꿔치기 하는 자들이었다. 예를 들면 정조 24년에 치른 과거는 10만 명 정도가 들어갔는데 답안지는 3만 명만 냈다고 한다. 그 까닭은 응시생인 양반집 자제들이 과거장에 조수 여러 명을 데리고 들어가는데, 글을 짓는 거벽(巨擘:학식이 뛰어난 사람), 글씨를 써주는 사수(寫手)가 따라 들어갔다. 과거를 보는 사람은 손도 까딱 안 하고 대리시험을 보게 하는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라 좋은 자리를 먼저 잡고 답안지를 다 쓰면 폭력을 써가면서까지 답안지를 대신 내주는 선접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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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먼저 내려고 폭력까지 쓰는 데는 까닭이 있었다. 수만 장의 답안지를 며칠 안에 다 보기 어려우니 실제로는 답안지 앞부분만 보거나, 앞에 낸 수백 장만 채점하는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었다. 과거를 통해 훌륭한 인재를 뽑는다는 본래 취지가 퇴색되고, 일부이기는 했지만 소수 힘 있는 가문의 벼슬 독점장이 되어 버린 것이다.

차술(借述) 대술(代述)하는 방법도 있었다. 시험장에 대여섯 명을 데리고 들어가 각기 답안지를 작성하고 그들 속에 제일 잘 쓴 답안지를 골라서 내는 것이다. 이것이 차술(借述)이다. 또 시험장 밖에 글 잘하는 선비를 대기시켜 놓고 종사원을 매수해서 시험 제목을 일러주면 대리 답안을 작성한다. 이 대리답안지를 다시 종사원이 응시생에게 전달하여 제출하는 것이다. 이것이 대술(代述)이다. 심지어 응시생이 시험장 안에서 일단 절차를 밟고 난 뒤 시험장을 빠져 나와 집이나 서당에 앉아 답안지를 작성한 뒤 다시 들어와 제출하는 방법도 있었다. 이 방법은 여러 종사자들을 매수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특별히 권세 있는 집의 자식들이 써먹던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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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시험장은 난장판 1편

■ 시험장은 난장판 1편

■ 시험장은 난장판 1편

조선시대 과거는 시험으로 인재를 뽑았다는 점에서 아주 선진적인 제도였다. 과거시험은 종류도 많았으며 여러 단계를 거치게 했다. 하지만, 과거시험의 부정행위도 늘 말썽이 됐다. 그래서 본디 과거제의 부정행위를 방지하려는 장치를 마련해 두었다.

과거 시험장을 1소(所) 2소(所)로 나누어 시험을 치르게 했다. 부자나 형제 또는 가까운 친척이 한 곳에서 시험을 보지 못하게 하려는 조치였다. 형제가 같은 시기에 시험을 볼 경우 각기 다른 장소에서 보게 한 것이다. 또 시관도 가까운 친척이 응시할 경우에는 이를 피하게 했다. 이를 상피제(相避制)라 했다. 시험장의 입구에는 문지기인 수협관(搜挾官)을 세워두었다. 응시생들은 시험장 안에 종이, 붓, 먹, 벼루 이외에는 어떤 물건도 갖고 들어가지 못했다. 만일 책 따위를 숨기고 들어가다가 들키는 경우는 몇 년씩 응시자격을 박탈하는 조치를 내렸던 것이다. 수협관은 응시생들의 몸수색을 철저히 했다.

또 시험장에는 응시생과 종사자들 이 외 어느 누구도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양반 자제들은 평소 나들이할 때 시중을 드는 수종(隨從)을 데리고 다녔다. 하지만 과거시험장에서는 수종의 입장을 허락하지 않았다. 만일 잡인이 시험장에 들어간 사실이 발각되면 누구든 즉시 체포해서 수군(水軍)으로 보내게 했다.

응시생의 입장이 끝나면 여섯 자 간격을 두고 앉힌다. 답을 쓸 동안 군데군데 감독관이 배치되어 부정행위를 감시한다. 《경국대전》 같은 책을 들여와 베끼는지, 모르는 글자를 찾으려 옥편을 들추는지, 남의 답안지를 엿보는지, 미리 답안지를 작성해 슬쩍 끼워 넣는지, 외부에서 답안지를 들여와 바꿔치기를 하는지, 두 사람이 답안지를 작성하고서 한 사람의 것만 내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규정을 어기거나 부정행위가 적발되면 두 번의 응시자격(6년)을 박탈했다. 모의해서 남의 글을 낸 사실이 발각되면 곤장 100대를 치고 징역 3년의 처벌을 내리거나 유배를 보내기도 했다.

응시생에게는 시험지에 이름을 쓰고 종이를 붙여 가리게 했다. 수권관(收券官)은 시험지를 받아 살펴보고 등록관에게 넘겨준다. 등록관은 시험지의 맨 끝에 수험번호인 자호(字號:천자문의 순서대로 써서 매긴 순번)를 쓰고 도장을 찍어 가운데를 자른다. 이름 부분이 잘려나간 시험지를 등록관이 다시 베껴서 시관에게 올린다. 시관이 시험지를 채점할 적에 누구의 답안인지 모르게 한 것이다. 이런 갖가지 방지 장치와 엄한 처벌규정을 두었는데도 부정행위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으며 그 방법도 갈수록 교묘해졌다. 초기에는 비교적 부정행위가 적었으나, 후기로 갈수록 정치적 혼란과 관기 문란을 틈타 부정행위가 만연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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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 과거제도 7편

■ 교육과 과거제도 7편

■ 교육과 과거제도 7편

과거시험을 보러 갈 때 꼭 가져가야 했던 물건은 시험 답안을 작성할 시지(試紙)였다. 오늘날은 시험장에서 답안지를 나누어주는 것과 달리 조선시대 과거시험에서는 응시자인 유생들이 직접 답안지를 장만해서 가져가야 했다. 유생들은 이왕이면 고급스럽고 큰 종이를 준비하려 했기에 조정에서는 종이의 지질과 규격을 정하고 이를 벗어나면 시험에 응시할 수 없도록 했다. 규격은 시험마다 달랐다. 시지를 장만하면 먼저 오른쪽에 응시하는 유생과 사조(四祖, 부, 조부, 증조부, 외조부)나 부친의 인적 사항을 기재했다. 이때 응시자들은 합격의 기원을 담아 먼저 급제한 사람들에게 이를 대신 써주기를 청했다고 하는데, 글씨를 써주는 이를 ‘복수(福手:복손)’이라 불렀다고 한다.

응시자들은 정성스럽게 마련한 시지를 들고 잔뜩 긴장한 채 과거시험장에 들어갔다. 시험 문제가 내걸리면 재빨리 답안의 내용을 구상하지만 주어진 제목에 맞춰 좋은 내용을 구성하는 것도, 좋은 글귀를 생각해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많은 유생은 제출 시간이 끝날 때까지도 답안을 완성하지 못했다고 한다. 답안을 제출한 유생들은 무사히 시험을 치렀다는 안도감과 합격에 대한 기대 및 불안 속에서 과거시험장을 빠져나갔다.

시험이 끝나면 채점을 하는 시관(試官)들이 바빠졌다. 시관들은 먼저 제출된 답안을 열 장씩 묶어 축을 만들고, 천자문으로 순서를 매겼다. 그리고 같은 축 내에서 다시 순서를 매겼다. 답안 정리가 끝나면 시관들이 채점을 시작한다. 문제마다 상상(上上)에서 하하(下下), 차상(次上), 차중(次中), 차하(次下), 갱(更), 외(外) 등으로 성적을 매겼다. 식년시·증광시·별시 문과는 채점을 더 엄격히 하기 위해 사본을 작성해서 채점했는데, 사본에는 성적을 기재하고 원본에는 ‘일지일(一之一)’과 같은 형식으로 등수를 기재했다. 과거의 등수는 1등 몇 명, 2등 몇 명, 3등 몇 명으로 나뉘며, 같은 등수 안에서 다시 등위를 매겼다. ‘일지일’은 1등 가운데 첫 번째라는 뜻으로 곧 장원이라는 의미다.

최종 단계의 시험인 문과 전시나 생원·진사시 회시 때는 합격 답안에 각각 붉은색과 노란색의 종이를 붙여 시험 종류와 등수를 기재하고 국왕의 재가를 받았다. 첨지(籤紙)에는 ‘무오식년문과병과제십육인망(戊午式年文科丙科第十六人望)’과 같은 글귀를 적었다. 무오년의 식년시 문과에서 병과 제16등 합격자 후보라는 뜻이다. 맨 뒤에 ‘망(望)’이라고 쓴 것은 국왕에게 후보로 추천한다는 의미였다. 채점이 끝나고 합격자가 결정되면 방(榜)을 내어 이를 발표했다. 이와 함께 합격자에게는 답안지를 돌려주었다. 낙방한 답안지는 시관이나 각 관서에 나누어주어 재활용하도록 했다.

문무과와 생원·진사시 합격자에게는 국왕의 도장을 찍어 주었으나, 잡과 합격자에게는 예조인(禮曹印)을 찍어 주었다. 이는 문무과, 생원·진사시보다 잡과가 경시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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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 과거제도 6편

■ 교육과 과거제도 6편

■ 교육과 과거제도 6편

3년에 33명만 과거에 합격한다는 것은 대단히 좁은 문이다. 평생을 걸고 과거에 합격하기 위해 공부에 매진해야만 했다. 매년 보는 시험도 아니고 합격자 수도 많지 않았기 때문에 양반가문에서는 양반신분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과거에 응시해야 했다. 그래서 결국 특별시험에서 기회를 더 얻어야만 했다. 심지어 정약용도 후손들에게 한양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때 그때 행해지는 특별시험에 신속히 응하기 위해서였다. 과거에 응시하는 사람들은 사조단자(四祖單子)를 제출해야 하는데, 사조단자는 친가와 처가의 증조부, 조부, 부친, 외조부의 명단과 이력을 말한다. 양인과 서얼을 가려낼 수 있는 사조단자를 통해서 양반들은 과거시험에서 우의를 확보했다.

시험 날짜가 다가오면 유생들은 길을 떠나기 위하여 행장을 꾸린다. 과거시험장까지 먼 길을 가고, 또 장기간 외지에서 체류해야 했던 만큼 짐도 많을 수밖에 없다. 영조때 황윤석(黃胤錫)이 상경할 때 가지고 간 물건을 보면 옷이나 세면용품, 의약품처럼 오늘날에도 가져갈 법한 물품들이 있는데, 그 종류는 훨씬 더 많았다. 그중에는 이불과 베개, 자리도 있다. 상대적으로 서비스업이 덜 발달한 시절에 집을 나설 때는 더 많은 물품을 지고 가야만 했다. 그래서 양반들의 여행길에는 늘 짐을 질 노비가 동행했다. 과거를 보러 갈 여비를 마련할 수 없는 집안에서는 과거를 포기해야하는 일도 생겼다.

과거시험을 보러 갈 때 빠뜨리면 안 되는 물건이 붓, 벼루, 먹과 같은 문방구다. 그러나 여행에 가져가는 물품인 만큼 지나치게 크거나 무거우면 곤란했다. 여행 중에 가져가는 벼루를 ‘행연(行硯)’, 붓을 ‘금낭필(錦囊筆)’이라고 한다다. ‘행연’은 여행용 벼루라는 뜻으로 보통의 벼루에 비해 크기가 작기 때문에 ‘소연(小硯)’이라고도 했다. 보통의 벼루가 작게는 10센티미터, 크게는 20센티미터인 것에 비하여, 행연은 대개 10센티미터 이하였다. 또 보통의 벼루에는 화려한 문양을 새겨 넣었지만, 행연은 아무런 장식 없이 단순한 형태로 무게와 크기를 줄였다. 여행 중에 사용해야 하는 만큼 실용적인 목적에서 작고 단순한 형태의 벼루를 선호한 것이다.

‘금낭필’은 금낭(錦囊), 곧 비단 주머니에 넣는 붓을 의미한다. 여행 중이라도 붓은 용도에 따라 여러 자루가 필요했다. 여러 자루의 붓을 요령 있게 가지고 다닐 수 있도록 만든 것이 필낭(筆囊)으로, 여러 자루의 붓을 넣고 말아서 끈으로 묶도록 되어 있었다. 오늘날의 필통인 셈이다. 현전하는 유물을 보면 휴대용 문방구함도 있다. 나무로 짜인 상자 안에 붓, 벼루, 먹, 연적 등을 넣는 자리가 만들어져 있고, 종이를 넣을 수 있는 작은 서랍도 있다. 이런 물건은 보통 사람들이 가지고 다니던 행연이나 필낭에 비하면 훨씬 더 고급스러운 것으로 아무래도 좀 더 부유한 층에서 사용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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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 과거제도 5편

■ 교육과 과거제도 5편

■ 교육과 과거제도 5편

고려는 귀족의 신분적 특권(음서, 공음전 등)을 보다 중시하는 귀족제 사회이고, 조선은 과거와 관직을 중심으로 능력(음서의 범위 축소, 합리적인 인사 행정)을 보다 중시하는 관료제 사회이다. 그러므로 관직에 진출하여 관료로 출세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였다. 따라서 과거제도는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므로 매우 중시되었다. 과거라는 시험제도는 그야말로 개인의 능력을 평가하는 제도이므로, 조선은 개인의 학문적 능력이 중시되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사회는 합리적 인사 행정으로 권력의 집중과 부정을 방지할 목적으로 출신 지역이나 친·인척이 있는 곳을 피하여 관리를 임명하는 상피제를 마련하였고, 인사의 공정성 확보를 위해 5품 이하 관리 임명 대상을 심사하는 서경제를 두기도 하였다. 관리들은 임기제로 운영되었는데, 고관들이 하급 관리들의 근무 성적을 평가하여 승진과 좌천의 자료로 삼아 업무의 공정성과 효율성을 높이려고 노력하였다.

물론 특별 채용도 있었는데, 나이가 너무 들었거나 재주가 다소 부족한 사람을 대상으로 하급 관리를 선발하는 취재(取才)와 기존의 관리를 대상으로 덕망 있고 학식이 풍부한 사람을 선발하는 천거(薦擧), 그리고 고려보다 대상을 대폭 축소하여 2품 이상의 관리의 자제는 시험을 치지 않고 관리가 될 수 있는 음서가 있었다. 조선의 음서는 고려와 달리 고관으로의 승진이 어려워졌다. 추천에 의하여 인재를 등용하던 현량과는 중종 때 조광조에 의해 실시되었는데, 주로 사림이 등용되는데 이용되었다.

장원 급제한 사람에게는 왕이 합격증과 어사화를 내려주었는데, 이것은 곧 가문의 영광이었다. 장원 급제자는 ‘3일 유가(遊街)’라 하여 3일 동안 풍악을 울리며 축하 행진을 벌였다. 과거 급제자의 유가(遊街) 행렬은 조선시대 사람들에게 볼거리 중 하나였다. 악사와 재주부리는 광대를 앞세우고 급제자는 앵삼(鶯衫) 차림에 어사화가 꽂힌 복두(幞頭)를 쓰고 말에 올라 사흘 동안 마을을 돌았다. 유가행렬이 있을 때는 동네 여자들까지 담 너머로 목을 내밀고 급제자의 모습을 구경할 만큼, 당시의 사람들은 즐거운 구경거리로 생각했다.

과거급제에 대한 기대는 한 가정의 꿈이자 대대손손 이어지는 온 집안의 꿈이기도 했다. 십대 중반이 지나면 기본적인 소양을 갖추고 본격적으로 과거 시험을 준비하게 된다. 이때부터는 집을 떠나 동년배들과 절에 올라가 경서와 문장을 집중적으로 연마하였다. 때로는 고을이나 동네에서 과거 준비를 위한 집중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곧 결혼을 하고 집안일도 돌봐야 했기 때문에 조용히 공부에만 전념할 수는 없었다. 시험 준비에 보다 집중하는 기간은 20~30대의 일이었고, 나이가 들면서 일상에서 담당해야 하는 역할이 커지면 커질수록 더욱 시험 준비에 집중하기는 어려웠다. 사오십대에 이른 유생들은 특별히 시험 준비를 하기 보다는 이삼십년 동안 쌓아 온 독서와 경륜을 바탕으로 그 때 그 때의 시험에 응시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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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 과거제도 4편

■ 교육과 과거제도 4편

■ 교육과 과거제도 4편

조선시대 과거 합격자의 평균 연령을 보면 생원·진사시는 34.5세, 문과는 36.4세로 모두 서른다섯 전후였다. 조선시대에 서른다섯이라는 나이는 일찍 자식을 본 사람이라면 자식 결혼을 준비하고 있을 즈음이다. 게다가 갈수록 경쟁이 치열해지고 합격자의 연령도 높아져 18세기 후반 문과급제자의 평균 연령은 39.0세나 되었다. 자식을 결혼시키고 손자를 품에 안을 수도 있는 나이였다. 그나마 30대 합격은 준수한 편이었다. 조선시대 문과급제자의 합격 연령을 보면 40대 이상의 급제자가 전체의 약 40퍼센트를 차지했으며, 극히 드물게는 70대와 80대 급제자도 있었다. 최고령 합격자는 1861년(철종 12년)의 김재봉(金在琫)과 1888년(고종 25년)의 박화규(朴和圭)로 모두 90세였다. 두 사람은 구십의 노인이라는 이유로 특별히 급제를 하사받았다. 놀라운 것은 이 나이까지도 과거급제의 꿈을 안고 과거에 응시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노년의 아버지와 중년의 아들이 함께 과거를 치르는 일은 오히려 흔한 풍경이었다.

과거에 합격한 이는 전체 응시자의 극소수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사람은 청년 시절부터 연례행사처럼 과거시험장에 출입했으나 끝내 합격의 기쁨을 누리지 못했다. 그들에게 과거는 평생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루지 못한 꿈으로 남았다. 이제는 아들과 손자가 그를 대신하여 과거시험장을 드나들었다. 그 꿈이 언제 이루어질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길이 아무리 멀고 험할지라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많은 사람은 자신의 자질과 실력이 이에 못 미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자신뿐 아니라 조상과 후손들을 생각하며 과거급제를 위해 노력하는 일은 숙명처럼 주어진 일생의 과업이었다. 그리고 이 과업은 자자손손 대물림되었다. 과거 응시는 남성이 감당해야 하는 일이지만 과거급제는 온 집안의 꿈이었다. 더욱이 수십 년에 걸쳐 남편과 자식의 과거 응시를 지켜보는 여성에게는 과거 응시가 자신의 일상이며, 과거급제가 자신의 꿈이기도 했다.

남편은 신혼 초부터 과거를 준비하느라 오랫동안 집을 비웠다. 또 시험 때마다 짧으면 열흘, 길게는 달포가 걸리는 여행길에 올랐다. 이런 일은 거의 매년 반복되었다. 남편과 자식을 과거시험장으로 보낸 여성은 매일 새벽 정한수를 떠놓고 합격과 무사 귀환을 빌었을 것이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괴나리봇짐을 메고 한양으로 향하는 선비들의 모습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과거시험을 보는 것이 자기 개인과 가문에 영광을 주는 지름길이라 생각해서 당시에는 과거를 보러 가는 것을 ‘영광을 보러 간다.’라는 뜻으로 ‘관광(觀光)’이라고 표현했다. 그런데 멀고도 험한 길을 떠나는 과거 길을 뜻하는 ‘관광’이 오늘날에는 여행을 한다는 의미로 바뀌어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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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 과거제도 3편

■ 교육과 과거제도 3편

■ 교육과 과거제도 3편

과거는 3년마다 보이는 정기시험과 필요에 따라 보이는 부정기시험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성균관의 명륜당 앞뜰에서 보이는 알성시(謁聖試)와 창덕궁 춘당대(春塘臺)에서 보이는 전시(殿試)가 대표적이었다. 성균관은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다. 성균관은 교육기능과 함께 공자와 그 제자들을 받드는 기능을 했다. 성균관 유생들은 전원이 기숙사에서 생활을 하면서 교육을 받았다. 성균관 안에 명륜당을 지어 강학(講學)하는 장소로 삼았다. 임금들은 자주 성균관을 찾아 문묘에 술잔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는 의식을 치렀다. 임금은 이런 기회를 이용해 과거시험을 보았다. 이를 성인 공자 앞에서 시험을 치른다 하여 알성시라고 불렀다. 알성시는 문과·무과 응시생만을 대상으로 했다.

이 시험은 한 번으로 합격자를 뽑았고 한 과목만 보았으므로 시험 본 날 합격자를 발표했다. 또 고시 시간도 초 한 자루가 다 탈 때까지 답안지를 내게 한다하여 촉각시(燭刻試)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런 탓으로 간단하게 채점할 수 있는 문제를 냈다. 조선 후기에는 알성시가 운이 많이 작용한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응시생들이 그야말로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적게는 몇 천 명, 많게는 2만여 명이 몰려왔다. 그야말로 장터나 다름없었다.

창경궁 안에는 연꽃이 아름답게 피어있는 넓은 연못이 있는데, 이곳을 춘당대(春塘臺)라 부른다. 춘당대 주변에는 너른 공간이 있고, 임금과 비빈(妃嬪)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이곳에서 조선 전기부터 춘당대시의 이름으로 과거시험을 보았다. 또 왕궁의 뜰에서 보인다 하여 정시(庭試)라고도 했다. 춘당대시는 정기시험이 아니라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보이는 특별 시험이었다. 그리고 문과의 경우, 여러 단계를 두지 않고 한 번의 시험으로 끝냈다. 무과의 경우, 복시(두 번째 시험)만을 보았다. 문과는 합격자를 5명 정도, 무과는 합격자를 몇 십 명 단위로 뽑았다. 합격자는 당일 발표했다. 그 횟수도 조선시대 전 기간에 걸쳐 20회 정도였다. 임금이 직접 시험을 보는 경우가 많았으며, 고관들이 시관을 맡았다. 그러므로 질서도 잡혔고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래서 실력 있는 응시자들이 많이 몰려들었으며 다른 과거 합격자들보다 자부심을 가졌다.

과거에 합격하는 것은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었다. 조선 500년 역사에서 문과에 급제하는 영예를 누린 사람은 1만4600여 명으로 연평균 30여 명에 그쳤다. 좀 더 많은 사람을 뽑은 생원·진사시 합격자도 4만7000여 명에 그쳐 한 해 평균 채 100명이 되지 않는다. 생원·진사는 아주 흔한 듯 보이지만, 사실은 전국에서 매년 100등 안에 드는 정도의 실력을 갖추어야만 그 영예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관료의 길이 보장되는 문과가 엄청나게 어려운 시험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특별히 이이(李珥)처럼 ‘구도장원(九度壯元)’이라고 하여 아홉 번 장원을 한 사람도 있었지만, 이이도 스물아홉 살에 문과 장원으로 급제할 때까지 연이어 낙방의 고배를 마셔야만 했다. 이이에게도 과거급제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어떤 학자는 과거를 ‘고난의 가시밭길’이라고 일컫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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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 과거제도 2편

■ 교육과 과거제도 2편

■ 교육과 과거제도 2편

과거 시험은 크게 문관을 뽑는 문과(33명), 무관을 뽑는 무과(28명), 기술관을 뽑는 잡과로 나뉘어 있었는데, 고급 관료가 되어 출세하기 위해서는 문과를 보아야 했다. 시험 시기는 3년마다 실시하는 정기시험인 식년시와 부정기 시험인 별시, 증광시·알성시가 있었다. 조선시대는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에 대한 특별한 규정은 없다. 따라서 법제상 천민이 아니면 누구나 응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반 백성들이 과거에 응시하는 것은 법제적으로나 가능할 뿐, 시간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거의 불가능했다. 그리고 모반죄와 강상죄와 같은 중죄인의 자손 및 범죄를 저질러 영구히 서용되지 못하는 자, 재가했거나 실행(失行)한 부녀자의 자손, 서얼 등은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박탈했다.

문과 시험은 소과(小科)와 대과(大科) 2단계로 진행되었다. 먼저 소과는 유교 경전의 이해도를 알아보는 생원과와 시와 산문 등 문장력을 시험하는 진사과로 나뉘었다. 소과는 각각 자기 고향에서 한 번(초시), 초시 합격자들을 한양으로 불러서 보는 공개 시험(복시)까지 2번의 시험을 통해 합격자를 가렸다. 소과 시험에 최종 합격한 사람은 합격증을 받고, 본인이 희망할 경우 성균관에 입학해서 대과를 준비할 수 있었다. 우리가 김생원, 최진사, 박초시 등의 호칭을 쓰는 것은 생원과에 합격하면 김생원, 진사과에 합격하면 최진사, 그 중에서도 초시에만 합격한 사람을 박초시라고 부르는 것이다. 대과는 모두 3번의 시험을 치르는데, 초시와 복시를 거쳐 최종 합격자 33명을 선발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시험인 전시(殿試)는 임금님 앞에서 합격자 33명의 순위를 매기는 시험으로, 임금님이 최종 합격자를 결정했다. 바로 여기에서 1등을 하는 것을 장원급제(壯元及第) 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과거에 합격하기 위해 평생을 걸었지만 그건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려웠다. 그만큼 과거에 합격하는 것은 남들에게 부러움과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무과는 문과와 마찬가지로 초시·복시·전시의 3단계 시험을 치렀고, 초시에서는 서울과 각 도의 병영에서 200명을, 복시에서는 서울의 병조에서 행하되 28명을 선발하였는데, 이들을 선달(先達)이라 하였다. 시험과목은 궁술(弓術)·기창(騎槍)·격구(擊毬) 등의 무술과 병서(兵書)·유교경전에 대한 강경시험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므로 문·무를 동시에 시험 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무과도 최종시험이 끝난 후 성적에 따라 등급을 매기는데, 갑과 3명, 을과 5명, 병과 20명으로 되었다. 그리고 합격자에게는 문무과 모두 합격증서인 홍패(紅牌)를 주었다.

잡과에는 역과(譯科)·의과(醫科)·음양과(陰陽科)·율과(律科) 등의 4종류가 있었다. 역과는 조선의 대외정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통역관을 양성할 목적으로 시행되었다. 역과에는 한어(漢語)·몽고어(蒙古語)·여진어(女眞語)·왜어(倭語) 등의 4과가 있었다. 의과는 의무관을 선발하는 것이고, 음양과는 천문·풍수지리를 담당하는 자를 뽑는 시험이었다. 율과는 법률전문가를 뽑는 것이었다. 잡과에는 초시와 복시만 있고 전시는 없었다. 양반의 서자나 중인들이 주로 응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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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교육과 과거제도 1편

■ 교육과 과거제도 1편

■ 교육과 과거제도 1편

조선시대 양반에게 과거는 거부할 수 없는 숙명이었고, 누구나 과거급제를 꿈꾸었다. 조선 시대에는 3대에 걸쳐 벼슬에 나아가지 못하면 결국 가문이 몰락하기 때문에 꼭 과거 시험에 합격해야만 했다. 과거급제는 개인이 입신양명하는 길이자 부모와 조상들에게 효도하는 길이요, 후손들에게는 양반으로서의 신분을 물려줄 수 있는 길이었다. 한 집안의 자손이자 가장으로서, 또 후손들의 조상으로서 과거 응시는 한 집안의 자손으로서 감내해야 하는 의무였다. 남자아이들의 교육은 유교 경전과 역사에 대한 이해, 한문 문장을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이 능력은 사족(士族)이라면 누구나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소양인 동시에 과거 시험에서 요구하는 능력이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7~8세가 되면 각 고을에 있는 서당에 다녔다. 지금의 사립 초등학교라 할 수 있지만 수업료는 없었다. 서당에는 지금의 선생님과 같은 훈장이 있었는데, 마을에서 공부를 많이 한 선비나 직업적으로 돌아다니며 지식을 전파하는 선비들이 훈장이 되었다고 한다. 서당에서는 우선 천자문(千字文)부터 배우기 시작하는데, 한권의 책을 끝내면 ‘책걸이’라는 간소한 잔치를 했다고 한다. 천자문이 끝나면 동몽선습(童蒙先習), 명심보감(明心寶鑑), 사서삼경(四書三經) 등을 배웠고, 이 과정을 마치면 대개 15~16세에 서당을 졸업할 수 있었다. 서당을 졸업하면 중등교육기관으로 진학을 하게 되는데, 지방 학생은 향교(鄕校)로, 서울 학생은 사부학당(四部學堂)으로 진학했다.

향교는 나라에서 지방에 설립한 중등학교로, 수령과 관찰사가 향교에서의 교육 활동을 평가했다. 수령은 학생들의 하루 일과와 성적을 매월 말에 관찰사에게 보고하고, 관찰사는 시험을 쳐서 학생을 평가함과 동시에 선생님들의 근무능력도 평가했다. 향교의 입학 자격은 양반의 자제 또는 향리의 자제들로 16세 이상이 되면 들어갈 수 있었다. 원칙적으로 평민들의 입학을 제한하는 법은 없었으나, 16세 이상이 되면 국가가 부과하는 각종 세금과 역을 부담해야 하는 평민들은 현실적으로 입학이 불가능했다. 16세기 이후 지방에서는 사립 중·고등학교인 서원이 많이 생겼다. 유명한 유학자들의 명성을 듣고 모여든 서원에서 과거 합격자가 더 많아지자 서원이 향교의 기능을 대신하면서 공교육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

성균관은 조선 시대 최고의 교육 기관이자 나라의 큰 의례를 치르는 장소로, 조선 최고의 인재들이 모이는 국립대학이라 할 수 있다. 성균관의 입학 정원은 소과 복시에 합격한 200명이었다. 이들은 모두 장학생이 되어 학비와 숙식비를 내지 않아도 된다. 성균관 학생들은 평소 기숙사에 머물렀는데, 학교 규칙에 따라 매월 8일과 23일에 집으로 돌아가 옷을 세탁할 수 있는 휴일 정도만 있었다. 따로 방학은 없었지만 사정에 맞게 휴식을 취할 수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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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왕과 선화공주의 러브스토리 4편

■ 무왕과 선화공주의 러브스토리 4편

■ 무왕과 선화공주의 러브스토리 4편

그러나 일각에서는 선화공주가 왕후는 아니라 하더라도 무왕과 결혼한 것은 사실일 것이라고 보고 있다.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무왕은 사랑했던 선화공주를 데려와 부인으로 맞이했지만 선화공주는 무왕이 즉위하기 전에 죽었고, 당시 귀족들의 세력에 위축되어 있던 무왕은 강성한 백제 재건을 위해 당대 최고 가문의 딸과 정략결혼을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가능하다. 그래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미륵사 창건설화 기록은 선화공주를 왕후(왕비)가 아닌 부인으로 기록하고 있다.

익산에는 180m거리를 사이에 두고 대왕릉과 소왕릉이 있다. ‘쌍릉’으로 불리는 이 두 무덤은 익산시 석왕동 숲속에 자리하고 있다. ‘쌍릉’의 주인을 두고 논란은 있지만, 백제의 고고학적 자료가 많이 나와 약 1400여 년 전의 백제 역사를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쌍릉’은 1917년 당시 조선총독부가 고적조사사업의 일환으로 일본인 야쓰이 세이치 등이 중심이 돼 약식 발굴을 했다. 당시 출토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목관의 일부, 목을 장식한 금속 장식물들, 치아, 토기 등은 국립전주박물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원형 봉토 형식의 무덤으로 대왕릉이 지름 30m, 높이 5m규모이고, 소왕릉은 조금 작은 지름 24m, 높이 3.5m다. 대왕릉은 무왕이, 소왕릉에는 왕비인 선화공주가 묻혀 있다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무왕과 선화공주의 사랑 이야기의 실체, 나아가 대왕릉과 소왕릉에 묻힌 주인공이 과연 무왕과 왕비인 선화공주이냐를 둘러싸고 수십 년 째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지난 2016년에는 대왕릉의 주인공이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라는 연구결과가 발표되기도 했다.

국립전주박물관이 일제강점기 때의 유물들을 분석한 결과 대왕릉 목관 내부에서 발견된 것으로 전해지는 치아 4점이 20~40세 여성의 것으로 드러난 것이다. 여자의 치아와 신라계토기가 나온 곳으로 보아 선화공주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무왕의 능은 부여 쪽에 있을 것으로 보아왔으나, 몇 년 전 정식 발굴 결과 노년층의 남자로 보이는 낙상흔적이 있는 엉덩이뼈 등이 발굴되어 현재 대왕릉은 무왕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2015년에는 중앙박물관이 유물 보존처리 과정에서 금동장식물이 소왕릉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는 조사결과를 내놓았다. 그런데 장식물 연구 결과 소왕릉이 대왕릉보다 먼저 조성된 것으로 추정됐다. 이는 소왕릉의 주인공이 무왕보다 1년 늦게 사망한 왕비인 사택적덕의 딸이 아니라, 무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 죽은 선화공주일 가능성을 높여주었다. 소왕릉은 지난 2019년 4월 정식발굴을 시작하였다. 과연 소왕릉은 누구의 묘일까? 무왕과 선화공주의 러브스토리는 어디까지가 실화일까? 진실이 밝혀지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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